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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은 맞은 편의 아파트와 아주 가까이 붙어있다. 어느 정도냐...하면, 양쪽 시력 2.0인 내게는 우리집보다 한 층 아래인 2층에 살고있는 남자가 주말에는 밤색 앞치마를 두르고 요리를 하고, 그 주위를 등쪽에만 선명한 노랑색 줄무늬를 가진, 예쁜 고양이가 그 남자의 주위를 기분좋다는 듯이 휘도는 것이 보일 정도이다.

처음에는 그가 내 쪽을 보면 어쩌나, 그 아파트 3층에 붙어있는 사람이 나를 보면 어쩌나, 싶어서 거실의 커텐도 열지 못했었다. 하지만 밤색의 앞치마를 두른 잘생긴 남자가 요리를 하는 것도, 밝은 노랑색의 늘씬한 고양이가 행복하다는 듯이 요리하는 남자의 종아리에 꼬리를 휘감으며 발레하듯 우아하게 지나다니는 것도, 무시하기에는 너무 보기좋은 볼거리였다.

지금에서야 말하지만, 나는 고양이를 좋아한다. 매끈한 등이며, 늘씬한 다리와 꼬리도 좋고, 얼굴의 절반은 차지하는 눈이며, 뾰족한 귀도 좋다. 그러나 가장 좋은 것은 그들의 움직임이다. 그들이 얼마나 빨리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이미 알기 때문일까? 사람으로 치면 빠른 걸음이나, 조깅같이 속도를 그다지 내지 않는 달리기같은 움직임에도 그들은 마냥 여유로워보인다. 부드럽게 올라가는 앞다리와 따라서 움직이는 뒷다리의 근육이 물결치듯 움직였나 싶으면, 그들은 벌써 저만큼 앞질러있다. 그리 힘들이지 않은 동작에도 그들은 어느 발레리나보다 더 여유로운 모습으로, 어느 높이뛰기 선수들 보다도 더 높이 점프한다. 음악처럼 흐르는 꼬리의 움직임 역시 그들이 아니면 힘든 동작이리라. 스스로 와서 몸을 부비는 행동에는 상대방을 향한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온몸을 기대오며 부드럽게 몸을 쓸고지나가는 느낌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리라. 누구보다 높게 점프하는 그들의 발바닥이 얼마나 부드러운지, 까끌거리는 혓바닥으로 손가락을 핥아주는 느낌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우리 부모님처럼 고양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평생 모르리라.

그 집에 고양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 날부터 나는 수시로 베란다를 들낙거리며 맞은편 아파트의 2층, 그집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남자는 저녁 7시 30분쯤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문이 열리고 자동등이 켜지면, 한손으론 벽을 집고 다른 한손으로는 검고 큰 구두를 벗는 남자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러면, 고양이는 어디에선가 쏜살같이 달려 남자의 마중을 나왔다. 해바라기처럼 남자의 움직임에 시선을 움직이고, 남자가 움직이면 같은 방향으로 몸을 움직이며 쉴새없이 몸을 부볐다. 세상에 그 어떤 사람이 저 사람만큼 고양이의 사랑을 많이 받을 수 있을까? 나는 그가 부럽기도하고, 그렇게 사랑해줄 가치가 있는 그와 함께 사는 고양이가 부럽기도 해서 그들에게서 여전히 눈을 떼지 못했다. 때로는 고양이가 눈치를 챈듯 내쪽을 바라보기도 했었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남자를 보는 것도 즐거웠다. 그는 고양이처럼 부드럽게 움직이지는 못했지만, 움직임이 참 담백해서 보고있기가 편했다. 필요한 만큼만 조용히 움직이는 그 남자의 움직임은 고양이보다는 못했지만 나름대로 아름다웠다. 나는 그와 고양이의 동거를 매일 지켜보며 행복해 했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한 일은, 남자가 고양이에게 음식을 주는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어느날인가, 작정을 하고 아침부터 밤까지 종일 창가에 매달려 그들을 살펴보았던 그 날에도, 그는 고양이에게 사료 한 알, 물 한 모금 내어주는 법이 없었다. 그리고 고양이는 그런 그의 옆을 종일토록 지키고 있었다. 물론, 물그릇이나 사료그릇이 내 시야가 닿을 수 없는 곳에 있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며칠치를 한꺼번에 부어놓고, 부족할 때만 조금씩 나오는 자동 식기를 사용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먹을 것을 주지 않는 남자와 그의 고양이는 내게 충분히 관심거리가 되고있었다.

그러던 고양이가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아파트 문이 열리고, 현관의 자동등이 켜지고, 한손으로는 벽을 집고 다른 한 손으로 구두를 벗는 남자가 거실불을 켠 후에도, 고양이는 보이지 않았다. 매일 비슷한 시간, 같은 동작으로 집으로 돌아오는 그를 같은 동작으로 반기던 그 고양이가 그 집의 풍경에서 갑자기 사라졌다. 남자는 여전히 담백하고 조용한 움직임으로 음식을 하고, 독서를 하고, TV를 보면서 소일거리를 했지만, 그런 그의 다리에 매달리며 머물던 고양이는 없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났을 때, 나는 용기를 냈다.

-안녕하세요, 저 모르시죠?
-아 예, 안녕하세요. 누구시죠?
-맞은편 아파트 3층에 사는 사람이에요. 가끔 빨래 걷으러나가면 그쪽이 빨래 걷는 시간과 맞아서 얼굴을 조금 익히게되었네요.
-아, 맞은편 아파트에서 제 집이 보이나요?

그는 전혀 모르는 내 인사도 반갑게 받아주었지만, 우리집에서 그의 집이 보인다는 사실에는 적잖이 놀란듯 당황했다.

-제가 눈이 좀 좋거든요. 게다가 제가 고양이를 좋아하는데, 가끔 빨래를 걷으러 나오실 때 고양이가 따라나오길래 저도 모르게 빨래 걷으시는걸 쳐다보곤 했어요.
-저희집에는 고양이가 없는데요.
-네?
-아파트는 애완동물 금지에요.
-그럴리가요, 며칠전까지만해도 등쪽에만 노란 줄무늬를 가진 고양이가 있었는걸요.
-사람을 잘못 보신게 아닐까요? 저는 고양이를 키워본 적이 없는걸요.
-흰 바탕에 노란 줄무늬를 가진 고양이를 모르세요?

내가 집요하게 고양이를 찾자, 그제서야 남자는 조금 생각하는 듯 잠시 침묵을 지킨다.

-제가 키우는건 아니고, 저희 회사 근처에 말씀하신대로 흰 바탕에 노란 줄무늬를 가진 고양이가 있어요.
-회사 근처에요?
-네, 제가 가끔 근처 동물병원에서 고양이 용 캔을 사다가 주곤 했어요. 금새 사람을 따르던 귀여운 녀석이었는데, 요근래 안 보이다가 엊그제부터 다시 봤습니다. 제 회사도 요근처인데, 그걸 보신건 아닌가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저를 본게 맞으시고, 고양이를 같이 보셨다면, 제 집이 아니라, 제가 다니는 회사쪽에서 저를 보신 것 같네요.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남자는 애써 말을 돌리고는 자신의 아파트로 향했다. 내가 아닌 남자의 입에서 내가 본 고양이에 대한 변명 아닌 변명이 흘러나왔지만, 남자의 눈에서는 감추려 애써도 감추기 힘든 의문이 떠올라 있었다. 저 여자 미쳤나, 라는.

나는 귀신에 홀린 듯한 기분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내가 만난 그 남자와 같은 복장을 하고 있는 남자는 차를 끓이고는 TV를 켰다. 돌아오자마자 옷부터 갈아입던 그의 습관과 다른 행동을 보니, 그가 많이 놀랐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 그를 보고있는 나보다 놀라진 않았겠지. 고양이를 키운 적이 없다니.
그럼, 그동안 내가 보았던 고양이는 무었이었을까? 라고 생각한 순간, 쇼파 구석에서 고양이가 슬쩍 나왔다. 뱀처럼 허리를 부드럽게 비틀어 좁은 틈새를 빠져나온 고양이는 그가 앉아있는 쇼파 위로 뛰어올라와, 그의 무릎에 머리를 기댔다. 차를 마시던 그가 고양이가 머리를 둔 다리 쪽에 차를 엎지른 듯 황급히 일어났지만, 물이 묻은 그 자리에 있던 고양이는 태연했다.

내가 본 건, 내가 지금 보고있는 건. 고양이일까, 고양이의 꿈일까? 수많은 상념들이 머리속에서 어지러이 흘러다녔지만, 나는 잠시 생각을 접기로 했다. 고양이든, 고양이의 꿈이든, 고양이의 환상 또는 귀신이든, 나는 그와 고양이를 바라보는 것이 행복하니까.




추신 : 이 글과...일전에 올린 겨울이 가지 않는 이유를 올릴 때 즈음, 저는 아주 불안한 상태였습니다. 지금도 그리 안정적인 상태라고 하긴 어렵지만, 인륜지대사 라는 개인적으로는 큰 일 앞에서 그나마 안정을 주던 아이들과 잠시 떨어져 있으면서 애들이 보고싶어 안달을 했더랬지요...;;;
그래서인지 이 글과 일전에 올린 글에서는 고양이라는 존재가 빠지지 않았지요...(라기 보다는 소재 자체가 고양이지요...;)
그냥...여기에 겨울이 가지 않는 이유를 올렸었지...라는 생각이 들고나서 이 글을 같이 올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유는...저도 모르겠어요. ^^;
좀 전에 중얼거렸듯이 지금도 안정적인 상태는 아니니까요...;;;
rubyan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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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ubyan 06.02.24 14:25 댓글 수정 삭제
    아...뱀파이어와 관련이 없는 글은 올리면 안된다는 조건이 있는건 아니죠??? ^^;;;
  • No Profile
    에이~여기 뱀파이어 전문 홈피도 아닌데^^
  • No Profile
    배명훈 06.02.25 09:41 댓글 수정 삭제
    분량이 좀 더 길고 이야기가 더 이어졌으면 좋을 텐데요. 이야기 도입부, 흥미유발까지 흐름이 좋은데 거기에서 끝나버려서.
    잘 쓴 수필 한 편 읽은 것 같아요.
  • No Profile
    rubyan 06.02.27 10:48 댓글 수정 삭제
    평, 감사합니다. ^^
    수필...이라는 말이 아프기는 했지만요... ^^;;;
  • No Profile
    배명훈 06.02.27 21:49 댓글 수정 삭제
    잘 쓴 수필이 소설보다 못 하다는 의미는 아니에요. 죄송스럽게도... 혹평을 단 것처럼 됐네요. 차이라면 수필의 이야기는 소설의 이야기보다 작가와의 거리가 더 가깝다고나 할까요. 이 글이 매력없는 글이라고는 절대로 생각하지 않구요, 이 느낌 그대로 더 긴 이야기가 됐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었어요.
  • No Profile
    rubyan 06.03.03 14:19 댓글 수정 삭제
    아...감사합니다. ^^
    저는, 사건이 없다...는 의미로 말씀하셨다고 생각했어요. 사건이 없거나 임펙트가 너무 약해서 소설보다는 수필같다고요. ^^;
    저는 수필이 작가의 역량을 드러내는데는 정말 좋은 글이라고 생각하지만요. ^^
    평, 정말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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