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다락방

2005.07.05 00:5407.05

고등학교 때 절친하게 알고 지내던 친구가 있었다.
지금은 그 친구에 대해 글을 쓰고자 한다.
어쩌면 그 친구가 지금의 나를 소설로 먹고 사는 인간으로 만들어주었다고 봐야할 것이다.
과연 이 글을 써야 옳은것인가, 쓰지 않아야 옳은것인가, 수많은 고민을 했지만, 이 글을 써내야 옳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글이 친구의 명예를 깎아내리는 글이 될지도 모르지만, 개의치않는다.
그 친구도 옳은 일이라면 자신의 명예쯤은 개의치 않으리라 생각한다.
일단 이 글을 시작할 때의 가장 큰 고민은 어떻게 시작하느냐 였다.
이 친구가 바라보았던 세상을 소설로 꾸며볼까. 생각도 했지만 이내 접어버렸다.
때로는 글이라는 것은 지극히 진실될 필요도 있는 것이다.
그래야만이 거짓된 가면을 벗겨낼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나는 그 친구가 나에게 보낸 모든 글을 글자 하나 빠짐 없이 정확하게 이 곳에 옮겨놓았다.
내 친구가 부디 이 글을 너그럽게 읽어주기 바란다.
(이 글은 그가 나에게 보낸 메일로 구성되어있으며, 내가 보낸 무의미하고 성의없는 답장들은 생략했다. 아래의 모든 편지는 전자 메일로 보낸 것임을 명시한다.)



TO 승우.

나 없이도 잘 사냐? 나랑 죽이 맞는 놈이라곤 너밖에 없었는데, 이렇게 떨어져서 징그럽게 편지나 쓰고 있다니.
요새 글쓰는 일은 잘 되고 있는지 모르겠다. 너나 나나 글을 좋아해서 서로 친해진거라면 친해진거지.
새삼스럽게 이제와서야 지면상으로 표현하는게 어색하지만 너는 소설전에서도 많이 입상도 하고 했다만,
나는 영 꽝이었잖아. 소설을 읽어내는것과 써내는것은 엄연히 별개의 문제이니까 그런거라고 생각한다.
어쨋든 이곳은 살만하다. 학교는 가까워야 능률이 오른다는 우리 아버지 말도안되는 억지논리에 온 거다만,
그래도 예전에 살던 집에 비하면 여긴 천국이다. 유명 인테리어가 작업했다는데 그것까진 모르겠고.

가장 좋은 건 내 방이 이층 복도 끝에 있어서, 부모님 눈치가 예전 살던집보다 덜보인다는 거지.
위쪽에는 다락방도 있는데, 자물쇠가 잠겨있어서 말이야. 다락방만 빼면 새로온 집은 모두 점령해봤지.
마당도 있는데, 예전하고는 비교가 안된다. TV에서나 나오는 전원주택이라고 한다면 딱 적절한 비유가 아닐까 싶다.
어쨋든 다음에 기회가 되면 우리는 또 보겠지. 그 때까지 잘 있어라. 니가 이번에 새로 쓴다는 소설도 학생 문예전에서 입상하길 기원한다.

2005. 1. 5
현건.



TO 승우.

답장 잘 받았다. 소설은 줄줄 써내려가는녀석이 답장에는 그게 뭐냐? 전혀 우정이 묻어나지를 않더군.
요새는 하루하루 산다는 게 너무 힘들다. 학교는 가까워졌지만, 마음은 점점 멀어져가는 것 같다.
공부할 마음도 안 나고, 요새는 삶 자체가 역겨운 냄새를 목구멍으로 집어삼키는 듯한 고민이다.
학교에서도 그저 시간만 죽이고 있고. 멍하게 시간을 죽일수록 시간은 나를 죽이는 것 같다.
너는 요새 잘 사는지 궁금하구나.
답장 기다리마.

p.s - 미처 점령하지 못했던 다락방은 아직 점령하지 못했다. 자물쇠가 여전히 굳건히 문을 걸어잠그고 있다.

2005.1.16
현건.





To. 승우.

이번 시험을 망쳐버렸다. 말 그대로 망쳐버렸어.
무려 50등이 하락했다. 엄마아빠는 그저 성질만 내기 급급하고, 내 말은 들으려고 하지도 않아.
뭘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가끔씩은 숫자놀음에 불과한 시험에 사람들이 과민반응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시험이 도대체 뭘까? 인간사회라는 정글에서 우두머리가 되기 위한 과정일까? 난 그냥 엉덩이나 비벼대면서 책 속에 머리만 처박는게 나일까? 그게 진정한 인간일까? 난 잘 모르겠다. 어떤 게 옳은건지 암만 생각해도 난 모르겠어.

2005.1.20.
현건.





TO 승우
너는 잘 지낸다니 다행이구나. 나는 시간이 흐를수록 모든것이 지겨워진다.
시작은 거창했지만, 결국 고육의 시간을 보내기엔 아직 내가 너무 어린 것은 아닌가 싶고.
어제 부모님이 여행을 파리여행을 가셨다. 결혼기념여행이라나.
난 '학생'이라는 신분때문에 (생각해봤는데 학생의 정의는 철저하게 합법적인 죄수가 아닐까?)
여전히 집에 묶여서 학교만 가게 됬다. 아참, 다락방에 대한 이야기 기억하냐?
아직까지도 못들어가봤다. 이젠 무덤덤하게, 익숙해질때도 됬는데 웬지 들어가보고 싶은거지 뭐냐?
그래서 공구함에서 쇠톱을 하나 뽑아들고 자물쇠를 잘라내서, 들어가봤다.
옛주인이 놔두고 갔는지 책으로 가득쌓인 상자만 하나있고, 그 넓은방이 텅 비어있지 뭐냐. 허무하게시리.
어머니 돌아오실때까진 상자에 있는 책들로 시간을 죽일 생각이다.
지금 읽으려고 꺼낸 책은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다.
그럼 다음에 또 편지로 연락하자.

2005. 1. 27.
현건.


TO 승우

노인과 바다 읽어봤냐? 꼭 그 노인의 모습이 내 모습같다.
성난 파도속에 갇힌 꼭두각시 학생의 모습이라고나 할까.
그 끝도 없는 바다위의 그 늙은이는 분명 내 몇십년후의 모습하고 똑같이 생겼을거다.
뭐, 너같이 글에 미친 아이라면 읽어봤을거라 생각한다.
반이나 그 책을 읽었을까. 빵 한조각에 계란을 얹어서 대충 주린배를 채우는데, 방에 어지럽게 흩어진 책무더기속에(내가 빵을 가지러갔다가 상자를 쳐서 책이 다 쏟아졌거든.)
일기장 같은게 하나 나오지 않겠어?
지금은 그걸 읽어볼 생각이다. 노인과 바다라는 소설은 공감가는 소설이지만, 너무 비극적인 요소는 상기시키는 것보단 잠시 접어두는게 좋을때도 있는거니까.
지금 이 편지를 길게 못쓰는걸 이해해라. 남의 일기를 훔쳐본다는건 잘못됬기에 더 신난 일이잖아.
어서 이 편지를 부치고나서 읽어봐야겠다.

2005.2.6.
현건.


TO 승우

일기의 내용이 어째 너처럼 글 좋아하는 글쟁이를 위한 '상상력 풀어놓기'대회 출품작같다.
일기내용이 허무맹랑한 만화같단 말이지. 뭐 짧게 말해보자면, 다락방에는 어떤 무엇인가가 산다는 거야. 하지만 그 존재는 죽어있는 존재지. 흠, 너무 철학적인 소재아니냐?
살아있지만 죽어있고 죽었지만 살아있는 존재.
어쨋든 그 '무엇'이 대단히 위험한 존재라고 하네.
그게 무엇인지에 대해선 자세히 써놓은게 없다.
난 그냥 '노인과 바다'나 마저 읽으려구.
혹시 아냐? 결말에 가서 노인이 하늘로 승천이라도 할지.

p.s - 그 말도안되는 이야기를 읽은 뒤라서 그런지, 자꾸 다락방에서 벽을 긁어대는 소리가 난다. 바람소리겠지 뭐.

2005.2.15
현건


TO 승우.

내가 저번에 보내줬던 일기의 내용 기억나냐? 점점 그게 현실처럼 느껴진다.
뭐, 물론 넌 헛소리라고 생각하거나 장난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
이제는 다락방에서 벽을 긁어대는 소리가 확실하게 들려온다.
집에있는 로프로 다락방문을 꽁꽁 묶어놨다.
처음에는 어떻게 들어갔는지 내 자신이 의심스럽다.
벽을 긁어대는 소리가 목재로 만들어진 문으로 옮겨지면서 그 소리가 커질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집에서 도망가고 싶은 생각뿐이다.
그래도 어쩌겠니. 갈데도 없는데. 지금 대문을 열고 나가면 끝없이 깊은 바다속으로 침몰할텐데.


2005. 2. 17
현건.


TO 승우

이제 일기속의 내용이 거짓이 아니라는게 확실해졌다.
니가 곤란하다는건 알지만 이번 주말에 니가 와줬으면 좋겠다.
내 집주소는 내가 얘기해줬었지?
꼭 와주길 바란다. 이젠 다락방에서만 들리던 긁는 소리가 온 집안으로 번져가기 시작했다.
마치 빨대로 불어내는 파레트위의 붉은 물감처럼.
천장을 보고 누우면, 천장위에서 그 긁는 소리가 들려오고 고개를 파묻고 엎드리면 방바닥을 긁어대는 소리가 내 귓가에 맴돌아서 미칠 지경이야.
마치 벽면에서 무엇인가가 꿈틀거리며 튀어나와 나에게 달려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바닥을 보고 엎드리는 것보다는 천장을 보는쪽이 덜 괴롭다는 걸 터득했다.
뭔가가 튀어나오면 천장을 보는쪽이 더 피하기 쉽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바닥을 보고 엎드리면 튀어나오는 순간 그 '무엇'이 나를 집어삼킬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어쨋든 혼자 지내는것은 너무 두려워서 더 이상 버티기가 힘들다.
이번 주말에 꼭 와주길 바란다.

2005. 2. 18.
현건.



To. 승우

망할. 그것들이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 이제는 더 이상 참을수가 없어. 온 몸의 피가 거꾸로 흐르면서 내 두뇌속을 이리저리 헤집고 다니는 듯한 기분이야. 그 소리가 이제 귀가 아닌 피부로 느껴진다.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는거야. 이젠 두려움에 지쳐 소름도 돋지 않고, 공포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식은땀도 흐르지 않아. 그저 두려울뿐이야. 그 소리가 내 귓구멍을 타고 들어와 내 온 몸을 휘감아 날 결박하는 그 사실이.
더 이상 희망은 없는걸까?

2005. 2. 19.
현건.




TO 승우.

'노인과 바다'를 다 읽었다.
어떻게 내가 그 책을 다 읽을 수 있었는지 모르겠어.
귀에 거슬리는 소음들이 내 귀를 괴롭히는데도 말이지.
어쩌면 내 마지막 희망이었다고나 할까.
내심 말도 안되는 결론이란걸 알지만, 노인이 상어에 고삐라도 달아서 하늘로 끌고 올라가길 바랬는데.
역시 그런 결론은 나지 않더군.
결국은 노인이 진거야. 노인이 지더라구.
끝이 보이지 않는 파랑의 한가운데에서 기껏 저항해봤자,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잖아.
노인이 진거라구.
벽을 긁어대는 소리가 점점 심해지더니 이제는 마치 귀 바로 옆에서 뭔가를 긁어대는것 같다.
방안에서 한 걸음 떼는것조차 두려운 시점이야.
지금 이 글을 보내는 것도 나에게는 엄청난 용기를 요구하는 일이란다.
물론 넌 믿지 않을지도 모르지.
어쨋든 노인이 졌어.

2005. 2. 22
현건.





그것이 그가 보낸 마지막 이메일이었다.
그리고 3일 후, 신문의 사회면을 내 친구 현건이 장식했다.
나는 그가 부탁한 주말에 그의 집에 가질 못했다.
나는 아직까지도 그의 기사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따금씩 들여다본다. 기사를 볼 때마다 그에게 미안할 따름이며, 이 세상애 대해 분노할 뿐이다.



2005. 2. 22. XX일보 사회면에서 발췌.

서울의 한 저택에서 S고교 학생(이현건 17세)이 파리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가족에 의해 자택 다락방에서 발견되었다. 발견 당시 집안이 마구 어지럽혀져 있고, 다락방문이 밧줄로 봉쇄되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단순강도에 의한 범행으로 짐작되지만, 현장에서 발견된 그의 일기에는 다락방에 귀신이 살고 있다고 서술하고 있으며 이현건군의 손톱에서 심한 출혈과 피멍이 발견되어, 사건에 의문이 더해져가고 있다. 한편 손 이외의 신체부분에서는 외상이 발견되지 않았으며, 도난된 물품도 없어 이 사건은 미궁속에 빠질 것으로 보인다.


과연 우리는 누구에게 이 죄를 물을것인가?
죽어버린 현건이에게 용서를 구해야할 사람은 누구인가?
학교인가? 아니면 그의 아버지인가? 아니면 나인가?
나는 그가 어떻게 다락방속의 밀실에서 죽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내 가슴속에 확실하게 남아있는 것은 그 죽음이 내 친구의 인생에 있어 그가 경험한 최고의 행복이었을 것이라는 나의 확신에 찬 비극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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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뇰 05.07.07 11:42 댓글 수정 삭제
    잘 읽었습니다, 전 이런 거 좋아해요>.<

    묘사가 퍽이나 인상적이군요. '마치 빨대로 불어내는 파레트위의 붉은 물감처럼...' 섬짓합니다;

    군데군데 문장에서 좀 걸리는 부분이 많다는 게 단점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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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상칼자 05.07.07 23:14 댓글 수정 삭제
    ^^; 제가 아직 많이 미숙합니다..^^ 나중에 더 노력해서 좋은 글 남길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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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서워요...(덜덜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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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구 05.07.16 22:55 댓글 수정 삭제
    잘썼어~~ 시도 잘쓰고 글도 잘쓰고~
    대단해 대단해~ ^^
  • No Profile
    자하 05.07.25 10:31 댓글 수정 삭제
    스티븐 킹 단편집: 옥수수의 아이들 외 에 실린 '예루살렘 롯'을 읽어 보시길 권하고 싶습니다.
  • No Profile
    감상칼자 05.07.25 20:09 댓글 수정 삭제
    예루살렘롯은 제가 읽어본 작품이네요.... 제가 많이 부족한 것 보완하시라는 말씀이시죠?ㅋ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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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素雲 05.08.08 09:44 댓글 수정 삭제
    서간체로군요. 잘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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