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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딸이 피는 뒷동산

2005.05.13 21:0305.13

  세상 모든 아버지는 딸을 사랑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사내는 그 누구보다도 열정적이고, 집요하며, 끔찍할 정도로 진지한 아버지였다.

  그 남자는 커다란 집과 과수원, 그리고 나무가 울창한 뒷동산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 주위에는 사람사는 흔적조차도 발견할 수 없고 경치도 멋진 천연의 명당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가 기르는 밭작물은 무엇 하나 예외없이 실하게 자라났고 그는 이따금씩 자신이 모는 우마차에 수확물을 하나 가득 싣고 멀리 떨어진 마을 장터로 가서 고기와 옷가지 등 자신에게 필요한 물건으로 교환해오곤 했다.

  사람들은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것 만큼이나 그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의 이름조차 정확히 아는 이가 없어 그저 '아저씨'나 '주인 양반'이라고 불렀다. 사실 그렇게 된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 굳이 그의 이름을 부를 일도 없었거니와 그가 시장이나 마을의 사람들과 허물없이 지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그를 '주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큰 과수원과 뒷동산을 소유하기 있기 때문이리라). 그는 상인들과 흥정을 하는 일도 없이 간단하고 즉흥적으로 거래를 했으며, 때로는 아주 커다란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감자를 줄기 채로 먼지 앉은 신발 한 짝과 바꾸기도 했다.

  그의 외모는 기억에 남을 정도로 특이하진 않았다. 그저 언제나 낡고 헤진 옷차림에 다 떨어진 신발을 신고 머리는 봉두난발이고 수염은 깎지를 않아서 제멋대로 자란 모습이었다. 그래서 그가 야채와 과일을 잔뜩 실은 우마차를 끌고 장터로 나타날 때면 사람들은 슬금슬금 그에게서 멀어지고, 그와 자주 거래를 했던 상인들만이 얼굴에 화색을 띠고 손짓을 하며 그를 부르곤 했다. 그는 가끔 아주 멍한 상태로 서있기가 일쑤여서 상인들이 박수를 치거나 고함을 지른 후에야 잠에서 깬 것처럼 다시 움직이곤 했다. 그리고 호객꾼의 기대를 져버리지 않고 값진 농산물을 별것도 아닌 물건들과 기꺼이 바꾸어갔던 것이다.

  그런 그에게서 변화가 일어난 건 얼마 전부터의 일이다. 그는 평소처럼 우마차를 끌고 장터로 왔으나 평소엔 전혀 관심도 기울이지 않던 물건을 상인에게 요구했다. 아기가 입는 작은 옷과 신발, 이불, 기저귀, 분유, 비누와 향수와 화장품 따위. 이 일련의 물건이 말하는 바는 오직 한 가지였기에 놀란 상인이 혹시나 싶어서 이유를 묻자 그는 금세 상기된 얼굴로 띄엄띄엄 말했다.

  "따, 딸이 생겼소. 내 딸이 태어났단 말이오!"

  상인들은 놀란 얼굴을 얼른 감추고 축하한다고 말해야 했다. 그의 평소 모습과 사간 물건을 볼 때 아내는 커녕 가족이 있다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실제로 몇몇은 그가 어린 아기를 납치했을 가능성이 있다고까지 생각했다. 그런 흉흉한 소문이 장돌뱅이들 사이에서 잠시 떠돌기도 했으나, 누구도 그에게 대놓고 물어보진 못했다.

  그는 자신에게 필요한 면도용 칼을 샀고 깨끗한 새옷도 여러벌 장만했다. 그리고 장터에서 주로 아이들에게 머리를 깎아주는 노천 이발소를 찾아가 자신의 긴 머리를 짧게 잘라달라고 부탁했다. 이발사는 비용으로 그가 내민 호박 한 덩이를 받아들고 아무 말없이 그의 머리를 단정하게 잘라주었다.

  볼일을 마친 사내는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 새벽녘에 출발했지만 집에 돌아오니 이미 해가 진 후였다. 그는 싸리문을 열자마자 평소 애지중지하던 소도 내팽개치고 집으로 뛰어들어갔다. 가재도구도 거의 없어 텅 빈 그의 통나무집 안에는 이불과 옷가지가 깔려있고 그 위에 아기가 누워있었다.

  헐레벌떡 달려가던 사내는 아기의 가까이에 이르자 발소리가 날까 싶어 뒤꿈치를 들고 조심스레 다가오더니 잠든 아기의 얼굴을 보며 한참이나 서있었다. 마침내 그의 두 손이 아기를 끌어안았다. 손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고 얼굴은 어느새 땀으로 흥건했다. 그는 아기의 입술에 가만히 자신의 입술을 대었다 떼고는 살며시 아기를 도로 뉘었다. 그리고 아까와 같이 발끝으로만 걸어서 집밖으로 나왔다. 그 다음에야 그는 솟구치는 기쁨으로 펄쩍 뛰면서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팔뚝과 배에 코를 대고 킁킁대더니 얼른 목욕물을 받으러 뒷뜰로 달려갔다.



  "사랑한다. 널 사랑해. 정말 사랑한단다."

  사내는 몇 번이나 외쳤다. 알아들을 리가 없는 아기는 그저 웅얼거릴 뿐이다. 하지만 그는 두 팔로 아기를 번쩍 들고서 허공을 휘젓기고 하고 꼭 끌어안기도 하고 왈츠를 추는 동작을 흉내내기도 했다.

  그는 연거푸 아기의 눈꺼풀과 이마, 뺨과 콧잔등, 입술과 귓볼에 입을 맞추고는 도로 요람에 눕혔다. 사내는 세상에서 다시 없는 소중한 보물인 자신의 딸을 사랑이 가득 담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눈빛은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의 소유물을 바라보는 탐심어린 눈길이기도 했다.

  마치 조금이라도 세상의 때가 묻으면 안 된다는 듯이 사내는 수시로 아기를 목욕시켰고, 자극적이지 않은 향수를 뿌렸으며 부드러운 천으로 만들어진 옷을 입혔다. 그리고 조금씩 자라는 머리카락을 자신의 손가락으로 어루만지며 쓰다듬었다.

  아기는 하루가 다르게 자랐다. 머리카락이 쑥쑥 자라 허리까지 내려왔고, 며칠이 지났나 싶었는데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가서 아이는 이제 걷기 시작했고 입을 움직여 말을 했다. 사내는 레이스와 리본이 달린 옷을 입혔고 눈가와 입술에 옅은 화장을 시켜주었다.

  그는 자신의 딸이 말을 하는 걸 그리 내켜하지 않았다. 아이는 호기심으로 그의 말을 따라 하거나 종종 의미없는 음성을 내었지만, 사내는 딸에게 오직 몇 개의 말만을 하도록 강요했다. 그것은 배가 고프다든가 하는 생존에 필요한 말을 제외하면 사실상 하나로 귀결되었다.

  "사랑해요."

  사내는 아이의 입술에서 사랑한다는 말이 아무런 감정없이 흘러나올 때마다 북받치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몇 되지 않는 옷가지를 벗기고 머리카락에서 발톱에 이르기까지 온몸 구석구석에 입을 맞추고 손으로 어루만지고 쓰다듬었다. 얼굴을 제외하면 그가 가장 오랜 시간 정성들여 입술과 손가락을 놀린 부분은 아직 뚜렷하게 성장하지 않은 아이의 성기였다.

  아기는 흔히 말해지는 경구가 진실이라는 걸 증명하기라도 하듯이, 아이들은 사랑을 먹고 자란다는 격언대로 사내의 쉬지않고 퍼부어지는 사랑을 받고 엄청난 속도로 자랐다. 사내는 이내 아이의 몸을 쓰다듬으며 미세하게 자라나는 솜털을 느낄 수 있었으며, 점점 길어지는 팔다리와 뚜렷해지는 이목구비와 제 역할을 하기 위해 모습을 갖추는 성기를 사랑과 감동이 가득 담긴 눈으로 볼 수 있었다.

  아이가 집 안에서만 지내기에는 너무 커져버리자 사내는 집밖으로 나가서 노는 것을 허락했다. 그러나 튼튼하게 만들어진 울타리 밖으로 나가는 것은 절대로 금지했다. 그녀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만났고, 세상에서 가장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의 말을 거절하지 못했기에 그렇게 했다.

  집 뒤에는 사내가 소유한 널찍한 농장이 있었다. 한쪽에는 감자와 옥수수를 기르는 밭이 있고 그 옆에는 꽃을 기르는 화원이, 그 뒤로는 과수원이 있었다. 아이는 아침을 먹은 후에는 늘 꽃과 그 주위를 날아다니는 나비와 벌 등의 곤충을 바라보다가 과수원으로 가서 나무들 사이를 뛰어놀다 배가 고파지면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러면 작물을 가꾸고 소와 돼지에게 줄 여물을 썰던 아버지가 점심을 차려주기 위해 따라 들어온다.

  대소변을 보고 난 후나 집밖으로 나갔다 들어온 다음에는 늘 목욕을 해야 했다. 그건 아이에게 있어 너무나 당연한 일상이었다. 아이는 속옷도 입고 있지 않았고 옷은 늘 아버지가 골라주는 리본과 레이스가 가득 달린 얇은 원피스가 전부였다.

  아버지는 늘 그렇듯 아이의 몸을 정성스레 닦아주었다. 그렇게 목욕이 끝난 후에는 열정적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시간이 돌아왔고, 그 후에 다시 목욕을 한 후 식사가 이어졌다. 시간표처럼 짜여진 그 순서는 변함이 없었다.

  아이는 점점 아버지의 거친 숨소리와 아무리 목욕을 자주 해도 지울 수 없는 텁텁한 냄새, 때론 간지럽고 때론 아픈 거친 손길, 자신을 뚫어지게 쏘아보는 눈빛, 항상 되풀이되는 사랑한다는 신음섞인 외침이 거북하고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어지럽고 간지러우며 아프고 찝찝하며 후덥지근하고 답답한 그 경험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뚜렷해졌다. 아이가 점점 자라면서 자신과 주위의 세계에 대해 인식을 할수록 더욱 그랬다. 이곳에는 남자도 여자도 어른도 아이도 부모도 자식도 없었다. 오직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는 두 사람 뿐. 아이가 만나고 대화를 나누는 상대는 '아버지'라고 스스로를 불러달라고 요구하는 덩치 큰 사람이다.

  사내는 가끔 우마차를 타고 멀리 떨어진 마을 장터에 다녀오곤 했다. 이전엔 자신의 생존을 위한 필수품을 구하기 위해서였겠지만 이제는 딸에게 줄 선물을 사기 위한 목적으로 바뀌어버린 여행이었다. 새볔에 출발해도 해가 진 후에나 돌아오는 거리였기에 사내는 딸에게 몇 번이나 울타리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곤 했다. 하지만 울타리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튼튼하고 가시덤불이 가득 덮인 위험한 벽이었고 문을 여닫을 방법도 모르는 아이에게는 별다른 의미도 없는 경고문에 불과했다.



  그날도 사내가 장터로 떠난 후에 소녀는 혼자서 사내가 깎아놓은 과일을 먹고 집밖으로 나왔다. 울타리 밖으로는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고 야트막한 구릉이 보였다. 하지만 그는 그 시내에 손을 담가본 적도 없고 구릉 위를 달려본 적도 없다. 물이 흐르는 소리가 정확히 어디에서 나와서 들려오는 소리인지 조차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소녀는 여태껏 들어보지 못한 어떤 짐승이 내는 소리를 들었다. 무언가가 수풀을 헤치고 지나가 과수원으로 뛰어들어간 후, 나무를 기어올라 과일을 따는 소리. 벌레 울음소리를 구별해서 들을 수 있을 만큼 청각이 뛰어난 소녀는 즉시 그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내었다. 그러나 가까이 가지는 못했다. 덩치가 커다란 짐승임이 틀림없었으니까. 다람쥐가 나무를 올라갈 때는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이 짐승은 헥헥거리는 숨소리, 나무를 긁는 소리, 그로 인해 나뭇가지가 흔들리며 내는 소리 등으로 미루어볼 때 최소한 집 뒤에 묶인 개 바우보다도, 가끔 나타났다 사라지는 고양이 나비보다도, 지금 멀찍이 떨어진 나무 뒤에 숨어 있는 소녀보다도 클 것이다.

  잠시 후에 나무에서 내려온 짐승의 모습이 눈에 보였다. 하지만 더는 짐승이라고 부르기 힘들었다. 그는 아버지와도, 소녀와도 닮았으니까. 그림책에서 본, 나무 위에 매달려 사는 원숭이와도 조금은 닮았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는 분명 인간만 입는다는 옷을 입고 있었고 털도 머리에만 나있었다.

  소녀와 비슷한 정도 키의 그 사람은 나무에서 딴 과일을 넣어서 주머니가 불룩해져 있었고 입에도 하나를 물고 있었다. 그는 나무에서 내려와 잠시 주위를 살펴본 후 어딘가로 쏜살같이 달렸다. 소녀는 한참 지난 후에 그가 간 방향으로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그가 쓰러뜨린 수풀과 발자국을 찾으며 뒤를 쫓았지만 과수원 외곽의 시냇가에서 그의 흔적은 사라지고 없었다. 소녀는 막연한 두려움과 호기심을 동시에 느꼈다. 이 세상에 아버지와 자신 외에 수많은 사람이 있다는 건 동화책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직접 본 적은 없었다.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울타리 너머의 세상에서 살고 있을까 생각하는 건 얼마나 많은 나무가 바깥세상에 심어져 있는지를 떠올리는 것 만큼이나 막연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백지처럼 모르는 상태는 아니게 되었다. 비록 먼 발치에서나마 소녀는 제삼의 인물을 목격했고, 그로 인하여 이제부터 보이는 모든 세상은 이전과는 다르게 보였다. 작은 발견으로 인해 커다란 걸 깨닫게 된 것이다. 울타리는 차원을 가로막는 영원한 장벽이 아니며 그저 커다란 세상 속에 있는 하나의 작은 지표에 불과함을. 아버지와 자신만이 인간에서 연상할 수 있는 실체가 아님을.



  며칠이 지났다. 소녀는 궁금하고 두렵기도 하여 아버지에게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으나 차마 물어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속만 태우고 있었다. 밥을 먹다가도 젓가락을 입에 물고 아버지 눈치만 살폈고, 그 나름의 사랑 표현을 제외하고는 변변찮은 대화도 나누지 않는 어색한 부녀사이는 금이 잔뜩 갔으나 여전히 굳건히 서있는 장벽처럼 둘을 갈라놓고 있는 채였다.

  그래서 언제나처럼 소녀는 꽃에게, 강아지에게, 구름에게 말을 걸면서 혼자 놀았던 이전의 생활로 돌아가야만 한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새롭고 낯선 존재를 알게된 그의 마음은 결코 이전과 같을 순 없었다. 결국 나뭇잎 밟는 소리가 날까 조심스레 걸으며 커다란 나무를 껴안고 주위를 둘러보는 버릇이 생겼고, 작은 소리만 나도 겁을 집어먹으며 포식자를 피하는 초식동물처럼 도망가기가 일쑤였다.

  어느날, 처음 들었던 것과 같은 짐승의 숨소리와 발자국 소리를 들었을 때, 소녀는 평소 자신이 즐겨 찾던 큰 과일나무 아래로 도망쳤다. 이 굵고 잎이 무성한 나무라면 자신을 지켜줄 것만 같다는 믿음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나무를 반쯤 부둥켜 안고서 주위를 조심스레 살피던 소녀는 아무런 움직이는 짐승이 보이지 않자 안심하고 나무 아래에 앉아서 숨을 골랐다. 따가운 햇살도 가지와 나뭇잎이 가려주었고, 나무들 사이를 돌아서 찾아온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소녀는 조금씩 잠이 들기 시작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 우수수 떨어지는 나뭇잎. 소녀는 실눈을 떴다. 그때 커다란 소리가 들렸다. 그 자신과 아버지를 제외하고는 처음 듣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너 여기서 뭐해?"

  들짐승의 포효를 들은 것처럼 소녀는 깜짝 놀라 일어났다. 아마 저도 모르게 작은 비명도 질렀을 것이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봐도 여전히 아무도 없었다. 선잠에 빠지며 꿈이라도 꾼 걸까? 그러나 그 생생한 목소리는 다시 들려왔다.

  "아, 알았다. 너 과수원 주인집 아이지?"

  이제 소녀는 그 목소리가 자기 머리 위에서 들린다는 걸 알 정도로 정신을 차렸다. 소녀의 머리 위, 뛰어도 닿지 않을 높은 가지 위에 남자아이가 앉아 있었다. 아주 짧은 순간 보긴 했지만 뚜렷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지난번에 보았던 그 짐승처럼 뛰어다녔던 그 아이란 걸.

  소녀가 여전히 두려움에 질려 있는 동안 아이는 불룩한 바지 주머니를 뽐내며 나무에서 가볍게 뛰어내렸다. 옷차림을 비롯해 온몸이 먼지와 풀잎에 뒤덮인 지저분한 모습이었지만 눈동자는 생기있게 반짝였고 밝게 웃고 있었다.

  "과수원 주인 아저씨 딸이니?"

  소년이 물었다. 소녀는 여전히 입을 움직이지도 못할 정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그 얼굴을 본 소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렇게 무서워하지 마. 그러고보니 넌 다른데서 본 적이 없는 것 같아. 학교든 읍내든 시장이든. 맨날 여기서 사는 거야?"

  애초에 기대하지 않았지만 역시 대답은 없었다.

  "너네 아빠에게 비밀로 해주면 나도 비밀 하나를 가르쳐줄게. 맨날 여기 갇혀 있으려니 답답하지? 몰래 드나들 수 있는 비밀통로가 있거든."

  비밀? 갇히다? 드나들다? 소녀로서는 미지의, 환상적인 낱말의 나열일 뿐이다. 소녀는 태어나서 이 울타리밖으로 나가본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런 그가 이곳에 갇혀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을까. 밖과 안이라는 개념을, 드나든다는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까.

  소년은 그것만으로는 모자랐던지, 아니면 피부가 하얗고 예쁘장한 소녀에게 선심을 써서 잘보이려고 했는지 자신의 바지 주머니에 가득 담긴 열매 하나를 꺼내어 팔뚝에 쓱쓱 문지른 후 소녀에게로 내밀며 다가왔다.

  소녀는 반사적으로 뒷걸음을 치며 소년과의 거리를 유지하려고 했다. 그러나 나무의 그늘을 벗어나며 순간 내리쬐는 햇살과 밝은 빛에 신경을 쓰는 사이에 소년은 들짐승처럼 재빠르게 소녀의 코앞으로 다가왔다.

  "자, 이거 먹어."

  커다란 눈이 소년의 눈과 얼굴에서 그의 손바닥에 놓인 과일로 향한다. 소녀의 시선은 그 둘 사이를 몇 번이나 왕복을 하며 어디에 머물러야 할지를 정하지 못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그 쩔쩔매는 표정을 보다못한 소년은 소녀의 손목을 덥썩 움켜쥐고는 억지로 손에다 과일을 쥐어주었다. 생전 처음 맞닿는 타인(아버지를 제외한다면)과의 접촉에 소녀는 짐승에 물린 것처럼 놀라며 비명을 질렀으나 이내 누그러졌다. 왜냐하면, 짐승과는 다르게 너무나 따뜻하고 부드러웠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상대가 자신의 선물을 받아드니 소년은 뭔가 해냈다는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멀리서 우마차가 내는 방울소리가 들리자 이내 표정이 굳어졌다.

  "오늘은 이만 갈게. 비밀 지켜야 해, 알았지? 약속했다!"

  일방적으로 그렇게 약속을 다짐한 후 소년은 맨처음 보았을 때처럼 어딘가로 달려갔다. 소녀가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소년의 흔적은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손에 쥐어 따뜻해진 사과밖에는 남은 것이 없었다.

  그날 여느 때와 똑같이 집에 돌아와 몸을 깨끗하게 씻고 사랑하는 딸을 끌어안은 사내는 돌연 코를 킁킁거리며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오늘 집에 누가 찾아왔었니?"

  소녀는 순간 심장이 오그라들 정도로 놀랐으나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긴 세월 흙에 파묻혀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른 사내는 누구 못지 않게 냄새에 민감했다. 그는 밖에서 하루종일 놀다가 와도 흙과 풀냄새 외에는 나지 않던 딸에게서 미묘한 냄새-정확히 말하자면 다른 사람에게서 날 법한-가 나는 걸 감지했다. 그러나 그렇게 뚜렷한 것도 아니고, 개나 고양이와 뒹굴며 놀아도 이와 비슷한 냄새가 나곤 했기에 크게 의심하지 않았다. 다만,

  "알았지? 누가 대문을 두들기거나 울타리 밖에서 소리를 쳐도 절대로 들여보내지 마라. 바깥 세상에는 무서운 괴물들이 가득해서 너를 잡아먹으려고 할지도 모르니까 말야."

  늘 하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역시 소녀는 착하고 말 잘듣는 딸답게 고개를 끄덕였고, 사내는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여인에게 해줄 법한 표현을 마음껏 해주었다.



  그러나 사내에게는 유감스럽게도,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을 만나고 대화를 나누었으며 새로운 경험을 하고 난 소녀는 더 이상 그만의 착한 딸이 아니었다.

  이미 그날 소녀는 아마도 처음으로 고의적인 거짓말을 했고, 이후에도 어디선가 나타난 소년과 만났다. 물론 소녀가 먼저 말을 걸기는 커녕 그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거나 좌우로 젓는 것이 표현의 전부이기는 했으나 소년과 함께 있었다는 자체만으로도 그에게는 천지가 뒤집힐 정도의 충격이요 변화였던 것이다.

  몇 번 소녀에게 과수원에서 몰래 딴 과일이나 물가에서 주은 예쁜 조약돌을 선물로 건네던 소년은 이제 소녀가 그를 보고도 두려워하거나 하지 않는다는 확신이 들자 마침내 이렇게 말했다.

  "따라와, 지난번에 약속한 비밀통로를 가르쳐줄게. 거기로 가면 너도 나가고 싶을 때 얼마든지 여길 나갈 수 있어."

  소년이 손짓을 하면서 그렇게 말하고는 앞장서 걸었고, 소녀는 최면에 걸린 것처럼 멍한 표정으로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심장이 쿵쾅거렸고, 금지된 무언가를 한다는 알 수 없는 흥분이 이미 두려움을 압도하고 있었다.



  시냇물 바깥쪽은 울타리가 쳐져 있었다. 그리고 잘 살펴보면 무질서하게 놓여 있는 것 같던 돌멩이들이 한 곳에서는 거의 일렬로 늘어서 있는 걸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소년이 시냇물을 건너기 위해 만들어놓은 징검다리였다.

  간격이 꽤 넓었기에 소녀는 소년의 손을 잡고 하나씩 건넜다. 태연히 손을 내미는 소녀를 보며 이제 그의 접촉을 피하지 않을 정도로 친해졌다는 의미라고 생각하며 소년은 혼자서 기뻐했다.

  시냇물 건너, 높이 쳐진 울타리는 비슷한 간격으로 서있는 나무 사이를 굵은 철조망으로 두른 후 짚과 가시덤불로 덮은 형상이었다. 그러나 징검다리 건너 서있는 나무 밑둥에는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많은 짚더미가 덮여 있었다. 이를 살짝 들어내면, 나무 뿌리가 아치형을 그리며 땅에서 불룩 솟아나와 있음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뿌리가 만든 문은 개나 고양이라면 쉽게 드나들 수 있고, 사람이라면 어린아이가 엎드린다면 지나갈 만한 높이였다.

  "자, 여기가 내 비밀통로야. 아무한테도 안 가르쳐주고 나만 알고 있던 건데, 이제 아는 사람은 우리 둘 뿐이야."

  소년은 의기양양하게 자신의 통로를 자랑하듯 말했다. 실제로 이 통로는 그저 발견한 것만이 아니라 그 자신의 노력으로 만들어낸 것이기에 더욱 그러할 만 했다. 소년은 우연히 땅 위로 불룩 솟아나온 나무 뿌리를 발견했고, 그에게 있어 마치 신천지와도 같이 여겨졌던 먹을 게 풍부한 과수원으로의 통로를 만들 수 있으리란 생각에 뿌리 아래의 땅을 조그마한 묘종삽으로 몇날 며칠에 걸쳐 파내어 이 통로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이렇게 작은 통로 너머에 드넓은 세상이 펼쳐져 있다. 소녀에게는 그저 막연한 두려움의 대상일 뿐이었다. 아버지의 말씀에 따르면 바깥세상은 위험하고 무서운 곳이었다. 괴물들이 아이를 잡아먹기 때문에 자신은 이 과수원 밖을 나가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그러니, 이 소년이 밝게 웃으며 통로를 통해 밖으로 나가보인다고 해서 쉽게 따라갈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

  결국 소녀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얼굴로 조금씩 뒷걸음치더니 결국 도망쳐버렸다. 물을 튀기면서 옷이 흠뻑 젖는 줄도 모르고 시냇물을 헤치고 달리다가 결국 미끄러지며 넘어지며 울음을 터뜨렸다. 소년은 깜짝 놀라 얼른 달려가 소녀를 부축해서 일으켰다.

  둘은 부축을 한 채로 집으로 돌아왔다. 소년은 무겁긴 했지만 집이 가까워지는 게 원망스러울 정도로 행복했다. 소녀의 머리카락에서는 향기가 났다. 마을의 흙투성이 여자애들과는 딴판이었다. 햇볕에 타지 않은 하얗고 고운 피부, 길고 부드러운 머리카락, 몸 전체에서 은은하게 퍼지는 향기로운 체취. 소녀가 소년에게서 느끼는 것 만큼이나 소년도 소녀를 경이롭고 신비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함께 집 안에 들어와 소녀를 방바닥에 눕혀놓고 보니 왼쪽 무릎이 까져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얼른 손에 잡히는 수건을 찢어서 응급처치로 피를 닦고 상처를 묶었다. 하지만 그때 소 울음소리가 들리자 소년은 잠시 망설인 끝에 어쩔 수 없이 도망가는 쪽을 택했다.

  "미안. 또 올게. 약속 잊지 마. 안녕!"

  소년은 얼른 집을 뛰쳐나와 과수원을 가로질러 비밀통로로 향했다. 사내는 소를 외양간에 들여놓고 밀짚모자로 부채질을 하며 집으로 들어왔다. 그의 눈에 물에 젖고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딸의 모습이 보이자마자 그는 손에 든 물건을 떨어뜨리며 한 걸음에 달려들었다.

  "이게 무슨 일이니, 응?"

  "시냇가에서 넘어졌어요."

  소녀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그렇게만 대꾸할 뿐이었다. 사내는 정성스레 소녀를 목욕시키고 상처를 치료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소녀의 몸에서 사람의 것이 분명한 냄새가 진하게 났고, 그가 가르쳐준 적도 없는데 무릎에는 천조각으로 붕대를 감은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추위와 아픔에 질려 있는 딸의 모습을 보니 차마 꾸짖거나 추궁할 생각이 나지 않아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눈은 이미 의심과 분노로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고, 이는 그대로 딸에 대한 실망과 증오로 이어졌다.



  다음날 그는 아침을 먹자마자 우마차를 타고 집을 나섰다. 딸에게 저녁 늦게나 돌아올 거라고 말을 해놓고. 언제나처럼 소녀는 집 앞에서 손을 흔들며 아버지를 배웅했다. 아무런 마음이 담기지 않은 형식적인 행동이라고 해도 소녀에게는 당연히 해야 하는 의식과도 같이 몸에 배어 있는 일이었다.

  정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소녀는 시냇가쪽으로 달려갔다. 오늘도 소년이 놀러온다면 그 통로를 통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비밀통로가 보이는 나무 그늘에 앉아서 소년을 기다렸다.

  태양이 머리 위로 뜰 때쯤 소녀는 앉은 채로 고개를 끄덕이며 졸고 있었다. 그때 코가 엄청 간지러워서 재채기를 하면서 잠에서 깨어났다. 소년이 밝게 웃으며 서있었다. 한손에는 강아지풀 한 송이를 들고 있었다. 솜털이 잔잔하게 나있는 끝부분으로 소녀의 코를 간지럽힌 것이었다.

  소녀가 벌떡 일어나자 소년은 펄쩍 뛰어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소녀는 화난 표정만 짓고 있었지 더 움직이지 않았다. 소년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안 쫓아오니?"

  "뭐?"

  "여자애들은 보통 나 때리려고 막 쫓아오던데."

  "그러면 너는 도망가고?"

  "당연하지. 나보다 빠른 애는 없어."

  "알았어. 그럼 쫓아갈게 도망가."

  "바보. 그런 말하고 쫓아오는 애가 어딨냐?"

  소년이 혀를 쏙 내밀었다. 소녀는 심통이 나서 쫓아갔지만 소년을 따라가기도 힘들었다. 얼마 못 가서 소녀는 숨을 헐떡이며 멈춰섰고 소년이 이내 다가왔다.

  "괜찮니?"

  다음 순간 소녀가 소년의 팔을 붙잡고 가쁜 숨을 내쉬며 말했다.

  "잡았다!"

  "이런 게 어딨어?"

  "어쨌든 잡았잖아. 잡으면 어떻게 되는 건데."

  "글쎄……."

  소년도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것이 틀림없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스스로 자랑한대로 붙잡혀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럼 넌 내가 말하는대로 따르기다?"

  소녀의 제안에 소년은 망설임없이 알았다고 했다. 그는 귀족들이 으레 하는 우아한 인사를 흉내내어 고개를 깊이 숙이고는 말했다.

  "분부만 내리시옵소서, 아가씨."

  "나 업어줘. 힘들어서 못 걷겠어."

  어리광피우는 듯한 소녀의 목소리에 소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기꺼이 소녀를 업고 웃으면서 신나게 과수원을 가로지르며 뛰어다녔다. 그리고 소녀가 어지럽다며 소년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길 때까지 제자리에서 빙빙 돌기도 했고, 얕은 시냇물을 뛰어나디며 소녀에게 물을 튀기기도 하며 놀았다.

  한참을 놀다가 기운이 빠진 소년은 소녀를 나무 그늘에 내려놓고 여러가지 과일을 따와서 나누어 먹었다. 소녀는 과일과 그들 주위에 있는 꽃과 풀의 이름과 유래 같은, 책을 통해 알고 있는 지식을 들려주었고 소년은 바깥 세상과 사람들에 대한 자신이 보고 겪은 일들을 얘기해주었다.

  웃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느라 소년은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를 미처 듣지 못했다. 그가 눈치를 채었을 때는 이미 그 발자국의 주인이 나무들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후였다. 소녀의 아버지가 말을 부릴 때나 쓰는 짧은 가죽 채찍을 들고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분노로 몸을 떨며 무시무시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네놈이었구나. 네놈이 감히 내 딸을……!"

  두 사람은 화들짝 놀라며 거의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년은 당장이라도 도망가고 싶었지만 소녀를 내버려두고 혼자만 도망갈 수 없다는 생각에 망설이고 있었다. 그래서 사내가 다가오자 소녀의 팔을 잡아끌었다.

  "나랑 가자! 바깥 세상으로!"

  "너 이놈! 네가 내 딸을……!"

  소녀가 심하게 떨고 있음을 팔목만 잡고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소녀는 공포만으로 꼼짝하지 않고 있던 건 아니었다. 소녀는 고개를 저으며 소년의 팔을 뿌리쳤다.

  "빨리 도망가."

  "나만 가라고? 그러면 네가……"

  "어차피 난 느려서 도망 못 가. 같이 가다간 둘 다 붙잡힐 거야. 너라도 가."

  "하지만……!"

  "내 말대로 따르기로 했잖니? 어서 가!"

  소녀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이미 분노를 곱씹으며 사내가 소년에게로 천천히, 그러나 발걸음마다 깊이 힘을 주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때 소녀가 몸을 날리듯 뛰어와 사내의 허리를 끌어안고 외쳤다.

  "아버지! 용서해주세요! 저 애는……"

  "시끄럽다! 이거 놓지 못해!"

  소년은 소녀의 눈을 보았다. 어서 도망가라고 애원하고 있는 간절한 눈빛을 보자 어쩔 수 없이 조금씩 뒷걸음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내가 소녀를 난폭하게 밀침과 동시에 몸을 돌려 전속력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비밀통로가 발각되면 큰일이라는 생각에 일부러 과수원을 빙빙 돌며 사내의 추적을 따돌렸다. 생각대로 그는 빨리 지쳐서 소년을 오래 쫓아가지 못했다. 마침내 시냇가로 다다른 소년은 이대로 도망갈지 도로 되돌아갈지를 놓고 망설였다. 하지만 소년은 또래 아이들의 대부분이 그랬듯 겁이 많았다. 혹시나 쫓아오지 않을까 싶어 초조하게 몇 번 뒤를 돌아보던 소년은 시내를 건너 비밀통로로 기어들어갔다.

  소년을 놓쳐버린 사내는 씩씩거리는 거친 숨을 내뱉으며 소녀에게로 돌아왔다. 그리고 웅크린 채로 울고 있는 소녀를 난폭하게 일으켜 세웠다.

  "너, 너냐? 네가 저 녀석을 끌어들인거야, 응?"

  소녀는 훌쩍거리며 울고만 있었다. 사내는 애가 타서 미칠 지경이었다. 반쯤은 성을 내고 반쯤은 애원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아니라고 말해봐! 저 녀석이 몰래 들어와서 널 꼬드긴 거 맞지? 그렇지!"

  여전히 소녀는 대답을 거부하고 있었다. 고분고분하기만 하던 딸의 이런 태도는 처음이었기에 사내는 화가 치밀어 거의 이성을 잃을 지경이었다.

  "이 썅년이 왜 대답을 못해! 응! 아니라고 말을 해봐, 이년아! 내가 널 얼마나 아꼈는데……!"

  사내의 손바닥이 딸의 뺨에 떨어졌다. 소녀는 충격으로 휘청거리며 거의 넘어질 뻔 했다. 하지만 울음을 꾹 참고 사내를 당당하게 바라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리고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쥐어짜서 토해내었다.

  "그앤 내 친구예요!"

  "친구? 친구? 누구 맘대로 친구야? 누가 네 맘대로 사내자식을 만나라고 했어? 엉!"

  사내는 연거푸 세 차례나 따귀를 때렸다. 마침내 소녀는 자리에서 쓰러져 울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울음을 참으려고 꺽꺽대며 애를 쓰고 있었다.

  "내가 나가서 저녁 때나 들어온다고 하니까 이것들이 아주 신이 나서……! 일부러 나가는 척하고 다 보고 있었어! 어딜 감히 누굴 속이려고!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했는데 네가 이제와서 이딴 식으로 날 배신해?"

  사내는 소녀에게로 달려들어 가느다란 목을 움켜쥐고 흔들며 소리질렀다. 이미 그는 자기가 무슨 행동을 하는지도 모를 정도로 정신을 잃은 채 그저 혼자만의 세상 속에 빠져서 걷잡을 길 없는 분노를 토해내고 있었다.

  "금이야 옥이야 하면서 지극정성으로 길렀어! 잘 때나 깰 때나 네 생각만 하면서 어떻게 하면 더 잘해줄까 그 생각만 했어! 그런데 넌 내가 없는 동안 사내 자식이랑 놀아나고 나한테 거짓말이나 하고…… 이젠 그놈을 편들고 도망가라고 하다니…… 너한테 모든 걸 바치며 사랑해준 대가가 고작 이거란 말이냐? 응! 입이 있으면 대답을 해봐!"

  그러나 이미 대답을 해줄 상대는 이 세상에 없었다. 사내가 이제야 자신이 한 어처구니없는 일을 깨닫고 손에 들어간 힘을 빼자 소녀는 힘없이 풀섶 위로 떨어졌다. 얼굴은 창백하고 눈은 떠진 상태이되 동공이 보이지 않았다.

  사내의 떨리는 손가락이 소녀의 콧구멍을 덮었다. 숨결이 느껴지지 않았다. 손목을 짚어보아도 맥박이 뛰질 않았다. 하지만 아직도 현실을 차마 인정할 수 없는 사내는 시신의 가슴에 귀를 대고 한참동안이나 심장뛰는 소리가 들리기만을 기다렸다.

  마침내 딸의 죽음을 인정하고 난 후에, 그는 한동안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멍하니 앉아 있었다. 무심히 헝클어진 딸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기기도 하고, 목에 시퍼렇게 난 자신의 손자국을 어루만지기도 했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른 뒤에 사내는 소리내지 않고 안으로 삭히며 울었다. 딸의 시신을 안아 들고서 사내는 뒷동산으로 향했다.

  야트막한 동산은 제대로 돌보지 않아 무릎까지 오는 풀이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햇빛이 잘 드는 중턱에서 사내는 삼을 캐내는 심마니처럼 무릎을 꿇고 앉아서 맨손으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손톱이 부러지고 피부가 찢어져 피가 나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깊지는 않지만 소녀의 몸을 감쌀 정도의 너비로 땅을 파헤친 후 그는 가만히 딸의 몸을 뉘였다. 그리고 파낸 흙을 조심스레 덮었다.

  잠시 말없이 서있던 사내는, 허리띠를 풀고 흙과 피로 더렵혀진 손으로 자신의 성기를 꺼내어 붙잡았다. 그리고 열심히 만지고 쓰다듬어 크게 부풀리더니 눈을 감고 열심히 자위행위에 몰두했다. 마침내 뿜어나온 정액을 마치 씨를 뿌리듯 흙 위에 휘휘 저으며 골고루 떨어뜨렸다.

  이제 할 일을 마친 사내는 한결 홀가분해진 기분으로 손을 툭툭 털면서 동산을 걸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시신을 덮은 흙은 비가 오거나 바람이 심하게 불어도 금방 쓸려내려갈 정도로 얕았으나 사내는 상관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이 뒷동산이, 그에게 짐승과 나무와 열매를 비롯한 모든 삶의 터전을 마련해준 이 땅이 그에게 딸을 다시 선사해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잠시의 머뭇거림은 물론 뒤를 돌아보는 일도 없었고, 그의 마음 속은 이미 수확을 기다리는 농부의 마음만으로 가득찼을 뿐이었다.


(2005.05.12.)

소설을 투고하는 건 처음이지만, '시간의 잔상' 필진으로 올라가는 날까지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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