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노을이 지고 있었다. 하늘은 천천히 밤의 베일을 내리 깔고 있었다. 김은 숨을 깊게 들이 쉬었다. 노을빛이 공기와 함께 몸 안 깊숙이 빨려 드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는 숨을 내쉬었다. 그럴수록 조금씩 더 어두워졌다. 약간 졸음이 왔다. ‘이만 가야지.’ 생각하고 기우뚱해지는 시선을 바로잡았을 때 그는 낚싯대 끝에 무엇인가가 걸려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그립을 잡고 무엇이 오는지 기다렸다.

  어디선가 새가 울었다. 사실 김은 낚싯대 끝에 아무것도 걸려있지 않았으면 했다. 그는 낚시하는 흉내만 내고 있었을 뿐 전혀 물고기를 잡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귀찮게 여기는 쪽에 가까웠다. 일부러 모형미끼의 바늘까지 제거해서 달아둔 참이었다. 그는 강가에서 해가 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싶었다. 그러나 낚싯대조차 드리워놓지 않는다면 누군가로부터 착잡한 눈길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피하고 싶었다.

  김은 수중동물의 움직임을 손끝으로 느껴보고 있었다. 어느 순간 강한 힘으로 당기면 물고기는 입에서 미끼를 놓칠 것이라는 생각에 그는 기회를 기다렸다. 그는 속으로 숫자를 셋다. ‘하나, 둘, 셋··········.’ 그는 열에 당길 생각이었다. 그런데 막상 열까지 세고 보니 열을 더 세고 싶어졌다. 뜻밖에 홀로 수면 밑의 생명체와 대면하고 있는 이 순간이 의미 있는 것으로 느껴졌다. 김은 스물까지 세고 난 뒤에도 줄을 당길 생각은 하지 않고 고개를 들어 노을의 끄트머리가 마지막 남은 낮의 하늘을 불태우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김이 다시 수면 위를 보았을 때 그는 그곳에 둥그스름한 검은 형체가 수면가까이에 다가와 있는 것을 보았다. 몹시 큰 놈이 분명했다. 김의 의욕 없는 낚시질이 오히려 물고기의 자존심을 자극한 것일까? 놈은 아주 천천히 수면 위로 올라왔다. 몇 방울의 물거품과 함께 놈의 거대한 입이 수면 위로 드러났다. 입 하나만을 위해 다른 모든 신체부위가 진화를 양보한 듯한 생물. 그것은 악어였다. 김이 그 생물을 인지한 바로 그 순간 악어는 말했다.

  “놀라지 마세요. 해치지 않아요.”

  김의 눈은 휘둥그레 졌고 떨리는 턱에서는 아무 것도 말이 되어 나오지 못했다.

  “참-저도 애를 쓸만큼 썼다구요. 일부러 미끼까지 물어가며 천천히 등장했는데 그렇게까지 놀라면 애쓴 보람이 없잖아요. 헐리우드 영화의 영향 같은 것 아닙니까, 정말로?”

악어는 그렇게 말하며 코에서 물거품을 몇 방울 만들어 냈다. 김은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스스로가 귀신에 씌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길 밖에 없었다.

  “귀신에 씌인 것도 누군가의 몹쓸 장난도 아닙니다. 저는 악어인 것이 분명하지만 이미 말했다시피 당신을 해칠 생각이 없습니다.”

마치 김의 생각을 읽어낸 듯 악어는 말하고 있었다. 김은 물에서 조금 더 떨어진 곳으로 이동한 뒤 여전히 휘둥그레진 눈으로 주춤대며 물었다.

  “악어가 어떻게 말을 합니까?”

  “가끔 이렇게 우연히 다른 종과 이야기가 통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로서도 매우 드문 일입니다. 악어와 인간은 소통할 수 없다고 악어 쪽이나 인간 쪽이나 서로 무의식적으로 금을 긋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거든요. 저로서도 그러한 편견으로 가득 찬 환경에서 자라왔기 때문에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별도의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노력이라고요? 대체 무슨 노력을 한 단 말입니까?”

  “물론 공부를 해야 합니다. 거저 얻어지는 것은 없으니까요. 유리한 부분이 있다면 신생대 초기부터 유전자에 학습되어진 정보들을 넘겨받았다는 정도겠지요. 그러나 큰 부분은 아닙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연이라는 책을 읽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생존을 위해 분투하는 생명들의 지혜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다보면 자연스럽게 다른 종에 대한 이해와 존경이 싹트고 어느새 소통을 염원하게 되는 것이지요. 제 의견에 공감하지 않으십니까?”

확실히 김은 자연을 구성하는 생명체들의 지혜와 그들의 조화로운 삶에 퍽이나 감명을 받아왔다. 서재에는 관련서적이 몇 권이나 구비되어 있었다.

  “그건 그렇죠.” 하고 김은 말했다.

  “이야기가 통하는 것 같네요. 그럼 뭍으로 나가도 될까요? 이대로 계속 물거품을 튀기며 말하는 것도 힘든 일이라서요.”

  “좋을 대로.”

  김은 악어가 뒤뚱거리며 뭍으로 올라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는 거대했고 위엄이 느껴졌다. 그리고 약간 외로워보였다. 악어는 흙을 약간 파내어 몸을 뉘기 좋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것 아십니까?”

  악어가 물었다.

  “뭐죠?”

  “지성이란 늘 그것의 가치만큼 빛을 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왜일까요?”

  김은 악어의 질문이 자신이 평소 고민하는 문제와 맞닿아 있음에 조금 놀라며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이기심 때문이겠죠. 이기거나 지는 문제는 생존의 영역 뿐 아니라 저변의 무수한 사고에 영향을 미쳐 생각을 가두어 버립니다. 그런 뒤에는 두려움의 반작용으로 밖에 언어를 사용할 수 없게 되어버리는 거죠. 무서운 겁니다. 정말로.”

  “그럴 때는 어떻게 대처합니까?”

  김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렇게 낚시터에 오는 거죠.”

  그 무렵 하늘은 완전히 어두워져있었다. 물기가 남아있는 악어의 피부가 달빛에 반사되고 있었다.

  “그렇군요.”

  악어가 대답하며 꼬리를 살짝 흔들었다. 김은 말했다.

  “늘 주의 깊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은연중에 공포에 잡아먹히고 말죠. 언제나 지나치기 쉬운 곳에, 아무렇지도 않게 놓여있는 단서들이 암시하는 것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그는 거기서 말을 멈추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유쾌하지 않은 기억들이 김의 머릿속에서 물거품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수면 위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한 떼의 악어들처럼 고개를 들고 있었다. 그는 눈앞의 악어를 보았다. 악어는 악어대로 그곳에 그대로 있었다. 김은 물러섰다. 그리고 돌아서서 달아나기 시작했다. 고요한 강가에 발자국 소리만이 커다랗게 울려 퍼졌다. 새들이 퍼득이며 날아올랐다. 악어는 고개를 들어 멀어지는 김의 모습을 한동안 주시했다. 김은 돌아보지 않았다. 악어는 제 몸을 소리 없이 물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에게 기약된 기다림 속으로 다시 천천히 몸을 뉘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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