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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니 있었습니다. 아니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니, 아예 없었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 * *

  근 1년 만에 만나는 사람이었습니다. 유학 차 영국에 있었고, 오래도록 그리워했고, 오래도록 아팠으며, 가끔 주고받는 전화와 메신저만으로도 제 가슴을 터질 듯 뛰게 하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사랑을 속삭이며 보내던 메일, 편지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고 감동을 주며, 누구보다도 저를 아끼고 위해주던 사람이었습니다. 쉽고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사랑하는 사이였습니다. 몇 년 전, 그 사람이 유학 가기 전에 그에게 고백하고, 그는 저의 마음을 받아주었습니다. 매년 여름에 방학을 맞아 3개월 정도 한국에 오던 그는, 이번에 박사과정까지 밟은 뒤 한국에 아주 들어오게 됐습니다. 아주 오랜 시간을 울고 웃게 했던 그 사람을 만나는 날이었습니다.
  잿빛 하늘이 금방이라도 눈을 뿌릴 것 같고, 도시는 여전히 소란스럽게 그러나 묵묵히 제 주위를 돌았습니다. 올 들어 가장 추운 날이라고 온갖 매체에서 떠들어 대는, 강한 한파가 들이치는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제게는 가장 행복하고 따뜻한 날이었습니다. 일주일 전부터 무엇을 입을까, 화장은 어떻게 할까, 머리는 미용실에서 새로 하고, 액세서리도 사고, 추운 겨울 잘 보내게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남색 코트에 어울리는 예쁜 머플러 선물도 하고, 데이트할 때는 무엇을 하는 것이 좋을까……. 부모님께, 그리고 친구들에게 드디어 그가 아주 들어온다고, 드디어 그와 헤어지지 않아도 된다고 자랑하며 일주일간 저를 하늘을 걷게 하는 기분을 느끼게 하고, 머플러 선물을 고르느라 정신이 없었고, 급하고 불같은 성격을 가라앉히며 웃게 했던, 그런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게 하는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2년 전쯤부터 그가 얘기하던, 결혼하자는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눈을 마주치는 사람 모두에게 미소를 지어보았으나, 추워서인지 모두 발갛게 코끝이 꽁꽁 언 사람들은 무표정하게 고개를 돌리며 제 시선을 외면했습니다. 30분 정도 일찍 약속 장소로 가서 기다리던 1분 1초가, 1년처럼 끔찍이도 느리게 흘러가던, 그런 날이었습니다.
  그 일주일간 무던히도 상상하고, 꿈에서 보았던 아름다운 재회는 제가 달려가서 그 사람에게 안기고, 보고 싶었다고 말하며 눈물을 쏟고, 울고 있는 저를 달래주며 그 사람은 저에게 키스 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30분을 기다리는 순간순간, 오래 떨어져 있던 연인의 만남을 상상하며, 저기서 다가오는 사람이 그 사람일 것이라고 착각하고, 그 사람일지도 모르는 실루엣에 가슴이 두방망이질하는 것을 진정시키며, 초조하게 손톱을 뜯고 끊임없이 심호흡하면서 기다렸습니다. 귓가에 이명이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남색 코트와 정장을 입고, 장갑을 낀 사람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막상 고대하던 재회의 순간은 상상만큼 아름답고 눈물이 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게 기다리던 사람이었건만 그저 믿기지 않을 뿐이었습니다. 그저 왔구나, 나를 보러 이 자리에 나왔구나, 하는 생각과 가슴 먹먹함과 불안 뿐이었습니다. 저 사람이 지난해 울던 저를 위로해주던 사람이고, 저를 보자 환히 웃으며 손짓을 하는 저 사람이 제가 기다리던 사람이 맞았지만 저는 묘한 이질감과 불안에 사로잡혔습니다. 그저 내 앞에 서 있는 사람이 저 사람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며 그 감정들을 마음 한구석에 치워두었습니다.
숨이 막히고, 눈앞에 왔을 때 까지 그 사람이 저와 시간을 보내러 왔다는 것을 끝까지 믿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는 저를 그 사람은 꼭 안아주며, 제 귓가에 보고 싶었어, 라고 속삭였습니다. 꿈에서나 볼 수 있고, 만날 수 있었던 사람을 드디어 만나게 됐다는 것을 자각한 순간 저는 그 사람의 코트에 눈물을 한 방울 떨어뜨렸습니다. 준비해 온 머플러를 매 주며 저는 활짝 웃었고, 그 사람도 행복해했습니다. 이 머플러는 여름에도 하고 다녀야겠어, 라고 웃는 그의 반달모양으로 휘어지는 눈은 저의 가슴을 요동치게 했습니다.

* * *

  그때 저는 예쁜 빵모자를 쓰고 있었습니다. 진한 회색 모직으로 된, 끄트머리에 검은색 실로 자잘한 무늬가 새겨져 있는 그 모자는 맞벌이 가정에서 자라는 저를 거의 키우다시피 하신, 가장 사랑하는 외할머니께서 주신 것이었고, 외할머니께서는 상당한 멋쟁이셨기에 20대 손녀가 가지고 있는 옷에도 전혀 손색없이 잘 어울리는, 그런 세련된 것이었습니다. 당신께서는 모자를 달라고 조르던 외손녀를 보시며 난감한 기색이셨지만 모자가 너무나 마음에 들었던 저는 결국 그것을 받아 내었습니다. 제게 그 모자를 주시고 얼마 뒤, 외할머니께서는 돌아가셨습니다.

  행복한 데이트를 하며 그는 참 많이 웃었고, 저에게 키스해주었고, 꼭 안아주고, 사랑을 속삭이며 작은 이벤트도 해 주었습니다. 선물을 받고 활짝 웃는 저를 안아주며 그는, 웃으니까 참 예쁘다, 하고 중얼거렸습니다. 분위기 좋은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식사 하고, 그는 반지를 보여주며 저에게 청혼했습니다. 양가의 부모님께서도 우리는 결혼하리라고 믿고 계신 상태였고, 서로 집에 자주 놀러 가기도 한 터라 부모님께는 그저 통보하고 날짜만 잡으면 된다 하고, 그는 이제 결혼하네, 하면서 웃었습니다. 드디어 내 남편이 되는 거예요, 하고 저도 웃었습니다. 행복한 날이라며 그는 웨이터에게 많은 팁을 주었고, 웨이터는 우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는 순간까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배웅했습니다. 데이트하다 길에서 만난 친구에게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그리고 이제는 결혼할 사람이라고 소개해주기도 하고, 네일샵에서, 카페에서 멋진 남자친구라고 부러워하는 시선을 받는 그 순간만큼은 저는 세상 누구도 부럽지 않은 여자였습니다.  

  그렇게 함께 걷고 있을 때였습니다. 모자가 망가졌네, 하는 그의 말에 벗어서 살펴보니 모자 윗부분에 있는 단추 부분의 핀이 헐거워져서 단추가 달랑거리고 있었습니다. 곧 떨어질 것 같아 고쳐야 하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래됐는데 버리고 그냥 내가 하나 사 줄게, 하는 말에 저는 정색을 하며 할머니 얘기를 했고 그럼 고치는 것이 낫겠다, 하며 우리는 작은 카페에 들어갔습니다. 내가 할게요, 아니야 이런 건 내가 해 줄게, 가벼운 실랑이 끝에 저는 모자와 단추를 연결하는 은색 핀의 차가움과, 밖에 노출되어 꽁꽁 얼어 곱은 손에 살짝 진저리를 치며 모자의 핀을 다시 끼우기 시작했습니다.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으나 뜻밖에 까다로워서 한참을 헤매다 포기하려는데 그 모자 참 예쁘고 잘 어울리더라, 조금만 더 해보지, 하는 그의 중얼거림을 듣고 다시 핀을 꽂으려 안간힘을 썼습니다. 아마 오기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사실, 오랫동안 모자에 눌려 있던 머리가 보기 흉하기도 했습니다. 행복한 날에 눌려 있는 머리로 밖에 나가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오른쪽으로 약간 움직이고, 손톱으로 천을 살짝 누르고, 왼쪽이다, 손톱이 짧은가, 힘이 부족하네, 천을 살짝 벌리고, 그래 그렇지 조금 밀어 넣고, 그대로 꾹 누르고. 마침내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핀이 들어갔습니다. 고개를 들고 웃으며 다 고쳤어요, 하는 순간,

그가 사라진 것을 발견했습니다.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을 때면 항상 어디론가 숨어버려서 한참을 찾게 하던 그였기에 이번에도 대수롭지 않게 장난이려니, 하고 기다렸습니다. 늘 하던 대로 웃으며 많이 찾았어? 저기에 숨어 있었어, 하며 다시 나타날 줄 알았습니다. 그러면 저는 웃으며 많이 찾았잖아요, 나빠요, 하며 앙탈을 부리곤 했습니다. 혹은, 화장실에 잠시 간 줄 알았습니다. 핀이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제 옆에서 잡지를 보며 이 가방 예쁘다, 하나 사 줄까, 너에게 잘 어울릴 것 같아, 라고 하고 저는 저게 얼마짜린데 사줘요, 하고 대화를 나누며 웃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짧은 시간에 이렇게 꼭꼭 숨다니 대단한걸, 하며 불안을 억눌러 보지만 그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혹시 이벤트 할 것이 남았나, 온갖 생각을 했지만 5분이 가고, 10분이 가고, 30분, 40분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으나 그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화가 난 저는 돌아오면 아무리 멋진 이벤트를 해 주더라도 단단히 한소리 해야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참을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 걱정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주위 사람에게 그 사람이 어디 갔는지 아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카페 안에 있던 사람들은 무슨 소리를 하냐며 저를 이상하게 쳐다보았습니다. 혼자 왔잖아, 저 여자? 누구 말하는 거야? 미친거 아냐? 소곤소곤 하는 소리를 들으며 지금 이 카페에 있는 손님들이 단체로 장난이라도 치는 걸 거야, 오늘은 만우절도 아닌데, 하는 생각으로 바리스타에게 물어봤지만, 손님은 혼자 오셨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하는 대답이 돌아오고, 조금 전까지 옆에 있던 사람이 ‘사라졌다.’ 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상황이 제게 다가왔습니다.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휴대전화를 개통하지 않은 그였기에 연락할 방법도 없었습니다. 어린 시절 엄마를 따라간 백화점에서 엄마를 놓치고 가만히 서 있던 어린아이로 돌아간 것 같았습니다. 어머니는 늘 저에게, 엄마 놓치면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거라, 하는 주의를 주곤 하셨습니다. 실제로 몇 번이나 그런 일이 있었고, 저는 그때마다 사색이 되어 저를 끌어안던 어머니를 기억합니다. 그리고 가끔, 어머니께서 찾아오시는 것이 늦어지면 조금 불안해졌습니다. 엄마가 날 버린 것이 아닐까, 반찬 투정해서 내가 미워진 것이 아닐까, 곰 인형 많은데 또 사달라고 해서 나를 싫어하게 된 것일까, 가지고 놀았던 인형과 소꿉놀이는 치우라는 말씀을 듣지 않아서 더는 나를 키우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닐까, 나는 버림받은 것이 아닐까, 이제 책에서만 보던 고아원에 들어가서 아이들이랑 수녀님이랑 자라야 하는 것이 아닐까……. 어린애다운 비약과 망상은 곧 제가 저질렀던 사소한 잘못 -친구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고, 동생과 나누어 먹어야 할 과자를 언니라는 이유로 동생을 때리며 두 개 더 먹고, 엄마의 화장대에 손을 대고 등등- 때문에 어머니께서 절 버렸단 생각을 하게 했고, 저는 오갈 데 없이 버려진 고아라는 신세를 자각하고 눈물을 터뜨렸습니다. 눈물 콧물로 얼굴이 엉망이 되고, 오랜만의 외출이라고 입혀주신 예쁜 옷이 망가지는 것에 신경 쓰지 않고 저는 앉아서 울었습니다. 뒤늦게 달려오신 어머니를 안고 저는 통곡하며 저의 죄를 고백했고, 어머니는 저를 안고서 제가 제일 좋아하는 풀빵 한 봉지를 사주시는 것으로 저의 죄를 사하셨습니다.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습니다. 그에게 했던 사소한 잘못들이 떠오르면서 저를 괴롭혔습니다. 저번에 다른 여자 있느냐고 화내서 그런가, 기념일을 잊어서 그랬던가, 생리 중이어서 짜증 낸 것 때문에 그런가. 아니면, 아니면, 아니면……. 눈물이 터져 나오고, 그 사람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찾으면 꼭 사과하리라 다짐했습니다. 이벤트건 뭐건 아무래도 좋으니 그만 애태우고 그냥 제 앞에서 저를 보고 웃어주기만 하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전에 어머니께서 어린 저에게 풀빵을 사주시던 것처럼 그는 저의 죄를 사하여 주리라 믿었습니다. 불과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함께 웃고 이야기하던 사람이 ‘사라진’ 상황을 저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눈물을 닦고 일어서서 그와 데이트했던 모든 곳을 돌아다녔습니다. 다시 이명이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전의 카페로 걷는 도중, 아까 그 사람을 소개해 주었던 친구를 만났습니다. 너 왜 그래? 아까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애가 넋이 나갔어, 하는 말을 듣고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너는 기억하지, 응, 내 옆에 있던 그 남자, 그 남자가 사라졌어, 너는 알지, 그 남자, 응, 정신없이 중얼거리며 눈물을 쏟는 저를 그 친구는 가만히 안아주었습니다. 드디어 그 사람을 알고 있는 사람을 만났어, 친구의 품에 안겨서 어깨를 들썩이며 끅끅거리며 우는 저를 안아주던 친구가, 얘가 왜 이러지, 아까 좋은 약속 있는 것처럼 예쁘게 꾸미고 가던 애가, 라고 중얼거렸습니다. 순간 온몸이 경직되고 순식간에 냉정함을 되찾으며 친구를 똑바로 바라보았습니다. 이명이 더 심하게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삐익-, 날카로운 소리로 신경을 긁는 이명을 들으며 징그러운 것에 닿은 듯 친구를 밀쳐내고 뒷걸음질치며, 등줄기에 서늘한 기운을 느꼈습니다.
  믿고 싶지 않은 것을 부정하며 다시 가던 길을 갔습니다. 네일샵, 카페, 레스토랑, 분수대, 그리고 그가 저를 기다려주던 화장실, 처음 만나기로 한 약속장소……. 저와 그 사람을 부러워하던 네일샵에 가서 저를 맡았던 사람을 다그치며 물었습니다. 나와 같이 있던 남자를 기억하지 못 하냐고, 당신이 정말 잘 어울리는 커플이라고 부러워하던 그 남자를 기억하지 못 하냐고. 카페에서도 웨이터에게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네일샵과 카페의 직원은, 혼자 와서 손톱 관리를 받고 커피를 마시고 갔으면서 무슨 소리냐고 하며 저를 미친 사람 취급했습니다. 레스토랑에서 그가 팁을 주었던 웨이터를 찾아가 물었습니다. 당신에게 팁을 주던, 나와 같이 있던, 남색 코트를 입고 까만 장갑을 끼고, 머플러를 한, 정장을 입은 그 남자를 기억하지 못하나요, 하고. 제게 팁을 주신 건 손님이셨고, 오늘 혼자 오신 손님은 손님밖에 없으셔서 제 기억은 틀림없습니다, 하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밥 먹으면서 레스토랑에서 찍었던 사진과 왼손 약지에 끼워져 있던 커플 링과, 청혼하면서 받았던 반지와, 같이 찍었던 사진을 보여주려고 하는데 아무것도 있지 않은 것을 보고 ‘사라진 것’이라는 생각이 점점 더 굳어갔습니다. 뒤에서 웨이터가, 웬 돈 많은 미친 여자가 있다고 동료에게 말하며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절망과 슬픔 속에서 가장 친한 친구들이 생각났습니다. 처음 그를 짝사랑하면서 느끼던 설렘과 저를 보아주지 않는 그에 대한 안타까움, 다른 여자를 사랑하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 그와 연인이 되었을 때의 환희를 모두 함께 해 주던 친구들이 생각났습니다. 그들에게 그 사람이 사라졌다고,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고 전화를 할까 생각을 해보았지만 인정할 수 없는 현실을 제가 인정해 버리고, 그 사람이 없어졌다는 것을 -아무 흔적도 없이 오로지 제 기억 속에만 남아 있고 완전히 ‘소멸’한 것을- 분명한 사실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을 생각하자 숨이 가빠왔습니다. 네일샵, 카페, 레스토랑, 친구……. 전부 다 그 사람은 사라졌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한층 더 날카롭게 울리는 이명 속에서, 저는 거의 정신 착란을 일으킬 지경이었습니다. 밖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고, 눈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올 들어 최고의 한파가 몰아칠 거라던 날씨였지만, 손과 귀, 코, 발이 모두 얼었지만, 이상하게 제 몸은 후끈거렸습니다. 식은땀이 배어나오고, 어질어질한 눈앞에 사람들은 하나같이 목적지를 향해 종종걸음을 치고 있었습니다.

길거리를 헤매던 제게, 갑자기 모자가 떠올랐습니다. 모자를 고치면서 났던 ‘달칵’ 소리가 아직도 귀에 들려오는 것 같았습니다. 모자, 모자다. 모자의 핀을 다시 끼우면, 다시 ‘달칵’ 소리가 들리면, 그 사람이 되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급히 머리 위에 올라와 있던 모자를 끌어 내리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까, 카페를 나오고 친구에게 안겨서 울고, 길거리를 헤매면서 어느새 모자는 없어져 있었습니다. 오며 가며 보았던 모든 곳을 찾아보고, 길에 고개를 푹 숙이고 모자를 찾고, 주변 사람에게 진회색에 자잘한 무늬가 있는 빵모자를 보지 못 했느냐고 묻고 다녔습니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분명히 아름답게 차려입었을 20대 아가씨가 엉망이 된 모습으로 길거리를 헤매며 사람들에게 진회색 빵모자에 대해 물어보는 것은 분명히 좋은 구경거리였을 겁니다. 킥킥대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짓궂은 고등학생들은 저더러 미친년이라고 제 앞에서 손가락질하고 웃어댔습니다. 그것에 일일이 대응하며 화를 내느니 그 시간에 차라리 모자를 찾자는 생각을 하고 무시했음에도 그들은 집요하게 저를 따라왔습니다. 이내 시들었는지 왁자하게 떠들며 당구장에나 가자, 하며 몰려갔습니다. 사람들에게 묻고, 바닥을 보고 다니고, 그 사람이 없어진 것을 믿지 못하고 울던, 지칠 대로 지친 제 눈에 벤치가 보였습니다. 그 벤치에 앉아서, 혼란과 슬픔에 넋이 나가 앉아 있을 때였습니다. 저기 광장 어디선가 모자가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광장 가운데에, 덩그러니 사람들의 발에 치이며 먼지와 흙을 묻히며 굴러다니는 그것은 분명히 제 모자인 것 같았습니다. 분명 외할머니께서 제게 주셨던 그 모자인 것 같았습니다. 휘청하고 일어나서 그 모자로 가려는 순간, 갑자기 모자가 사라졌습니다. 귀를 찢는 듯한 이명이 울렸습니다. 시야가 흐릿해지고, 광장 바닥의 타일 무늬가 점점 더 크게 보였습니다. 사각형, 삼각형, 원, 그리고 여러 가지 색깔들이 어울린 무늬들……. 주변에서 어어, 저 여자 쓰러졌어, 하는 소리가 흐릿하게 들려왔습니다.

  꿈을 꾸었습니다. 그 사람이 제게 다가오고, 가까워졌다고 느끼는 순간 어느새 저 멀리에 있고, 그리고 그 사람이 뒤돌아서 제게서 멀어지고, 뒷모습을 보면서도 앞모습을 보았습니다. 그가 모자를 든 외할머니의 모습으로 변하는 것을 보면서도 이질감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아무런 말도 못하고, 발을 뗄 수도 없이, 이가 다 빠지신 외할머니의 환영이 하얀 가루처럼 눈부시게 부서지고 흩어지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 외할머니 가루는 저 멀리 천둥과 번개를 치는 바다를 건너, 어린왕자와 생텍쥐베리가 만났던 사막으로 날아가고, 모자는 거대한 입이 되어 저를 삼키려고 했습니다. 모자에 삼켜진 저는 모자가 되어 할머니, 혹은 그 사람이 있는 어린왕자의 소혹성 B-612인지 B-613인지로 날아가고, 그인지 할머니인지 모를 사람이 저를 막 돌아보려는 꿈이었습니다.

  정신을 잃고 쓰러져 병원에 이송된 저는 40도가 넘는 고열에 시달리며 누군가의 이름과, 없어졌어, 소멸한 거야, 모자, 할머니, 등등의 말을 중얼거렸다고 했습니다. 놀란 어머니와 아버지께서 달려오셔서 밤새 옆을 지키시곤 그 사람이 누군지, 무슨 모자를 말하는 건지 물어보셨으나 저는 말할 수 없었습니다. 살면서 누군가를 가장 사랑했던 기억이 부정당하는 엄청난 절망과 슬픔에 저는 밤새 울었습니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저는 몇 번이나 그런 꿈을 꾸었고, 항상 할머니인지 그 사람인지 얼굴을 보기 직전에 식은땀에 흠뻑 젖어 깨었습니다. 퇴원 후에도 누군지도 모를 이름을 남자 친구라며 중얼거리고, 이미 돌아가시고 그런 모자를 갖고 있지도 않으셨던 외할머니에게 받았다며 진회색의 자잘한 무늬가 있던 모직으로 된 빵모자를 찾는 딸을 부모님께서는 미쳤다고 생각하신 듯 저는 정신병원에 강제로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이 글은 아마도 제가 마지막으로 남기는 일기, 혹은 존재했으나 아무 곳에도 없이 소멸해 버린 그 사람의 마지막 기록일 것입니다. 아마 저는 오늘도 그 꿈을 꿀 것 같습니다.

  언젠가 그를 만나게 된다면, 그날, 그 사람이 소멸하던 날 하지 못했던 그 말을, 아껴두고 하지 못했던 그 말을 할 것입니다. 나는 당신을 나의 온 마음을 바쳐 사랑했었다고, 온 목숨을 바쳐 사랑했었노라고.
Hi,연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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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ominique 11.01.09 01:33 댓글 수정 삭제
    단편소설이라 호흡이 빠른건 어쩔 수 없지만 비약이 너무 심하다는 느낌밖에 들지 않는군요. 만남과 동시에 이별, 그리고 단번에 회한... 독자들이 몰입되고 공감대를 형성할 본론은 어디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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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기 11.01.14 23:36 댓글 수정 삭제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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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지개 11.01.24 23:55 댓글 수정 삭제
    너무 아쉬운 글이네요 좀더 분량을 늘려서 살을 덧붙이는건 어떨가합니다. 상황전반적인 공감이 안가니깐 감정이입이 안되고 절박한 상황이 절박하게 느껴지지 않네요
    글 혼자서 뛰어다니다가 갑작스럽게 끝! 하는 느낌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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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연 11.01.25 14:42 댓글 수정 삭제
    핑계지만 정신 없는 상태에서 마구 써내려간 글이라 많이 부족합니다(..)
    재미있게 읽으셨다니 감사하고, 비평 또한 감사합니다. 무슨 배짱으로 올렸는지 모르겠어요 사실(..) 조금 더 다듬고 살을 붙여서 다시 써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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