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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얼음마녀 이야기

2010.11.10 13:0911.10

1.
아주 먼 옛날. 저 위쪽 땅은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2.
일 년 삼백육십오일 눈이 내리지 않는 날은 드물었고, 눈이 내리는 날이면 지독한 눈보라가 땅을 뒤엎었다. 사람들은 땅 끝 얼음성에 사는 마녀가 저주를 뿌리는 것이라 믿었다. 마녀는 쳐다보기만 해도 두 눈이 얼어붙을 정도로 눈부시게 밝았다. 간혹 용기 있는 사내들이 마녀에게 눈을 멈추어 달라고 먼 땅 끝으로 여행을 떠났지만 그 누구도 돌아오지 않았다. 세상은 여전히 얼어붙어 있었고, 눈은 멈추지 않았으며, 언젠가부터 아무도 마녀를 찾아가지 않았다. 그렇게 많은 시간이 흘렀다. 백년에 한 해. 눈이 멈추고 사계가 찾아오는 해가 있었다. 그리고 그 날도 자정이 지나자 아무 일 없었다는 것처럼 눈이 그쳤다.

3.
마녀는 가슴이 꽁꽁 얼어버리는 저주에 걸렸다. 마녀는 세상을 저주하며 매일같이 눈보라를 뿌렸다. 하지만 어떤 사람도 눈부시게 빛나는 마녀를 쳐다보지 못했다. 시리도록 하얀 빛 때문에 마녀를 만나면 모두 눈이 멀어버렸기 때문에, 눈 먼 자들은 험난한 얼음계곡을 돌아올 수 없었고, 얼음성에서 마녀의 가슴처럼 꼿꼿이 굳어버렸다. 마녀는 얼어붙은 가슴 때문인지, 백년마다 기억을 잃는 병에 걸리고 말았다. 마녀는 저주를 풀기위해 구십 구년을 헤맸지만, 백년마다 다시 기억을 잃었다. 몇 백 년이 지나고 마녀는 얼음성의 성벽 위에다 일기를 써 저주를 푸는 방법을 조금씩 기록하기 시작했다. 누가, 왜, 어떻게 저주를 걸었는지 알 수 없지만 마녀는 힘겹게 저주를 풀어나갔다. 그렇게 구백 구십 구년이 지났다. 마녀는 저주를 풀기 위해 일곱 가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4.
마녀는 한 소년을 만났다. 소년은 마녀를 보고도 도망치거나, 눈이 멀거나 하지 않았다. 소년의 눈이 처음부터 멀어있었던 탓이다. 마녀는 오랜 세월 끝에 만난 흥미로운 인간을 데리고 함께 여행을 다녔다. 소년은 말도 하지 못했다. 눈이 멀고 입이 붙은 소년은 묵묵히 마녀를 따랐다. 소년은 재주가 퍽이나 많았다. 눈물로 장미꽃을 틔우거나, 얼음사슴의 뿔을 떼어다 주거나, 불붙은 눈덩이를 만들거나 했다. 소년은 들을 수 있었고, 글을 쓸 수 있었다. 마녀는 여행을 하며 소년과 사랑에 빠졌다. 소년의 헌신적인 모습에 마녀의 얼어붙은 가슴이 녹아서인지, 소년의 체온에 마녀의 얼어붙은 몸이 녹아서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차갑게 차갑게 굳었던 마음이 풀리고 풀려 마녀는 소년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녀는 다섯 가지를 모아 얼음성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마녀는 마지막으로 필요한 두 가지를 확인했다. 하나는 자신의 영혼이었고, 다른 하나는 사랑하는 이의 심장이었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구백 구십 구년까지는 단 하루가 남았을 뿐이었다.

5.
내 가슴을 뜯어 저주를 푸세요. 아니, 그렇게는 못해. 나를 사랑한다면 내 심장을 꺼내주세요. 아니, 절대로 그렇게는 못해. 내일이면 다 잊게 되잖아요. 우리가 사랑했다는 사실도, 당신의 가슴에 내가 살았다는 현실도, 나의 사랑도 모두 잊게 되잖아요. 아니, 내일 잊는다 해도 남은 하루를 사랑하겠어. 백년을, 천년을, 만년을 얼어붙은 가슴으로 살아야 한다 해도 나는 오늘 너를 사랑하겠어. 내가 살아 당신의 슬픔을 봐야한다면, 나를 사랑하지 않는 당신을 만나야 한다면 차라리 오늘 죽는 것을 택하겠어요. 내 심장을 꺼내어 주세요. 그리고 사람이 되어 주세요. 당신의 꿈을 이루어 주세요. 당신의 저주를 풀어주세요. 그럴 수만 있다면 나는 죽어서도 당신을 사랑할거에요.

6.
마녀는 손톱으로 소년의 가슴을 찔렀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마녀의 팔을 움켜진 소년의 손에 조금씩 힘이 들어갔지만 소년은 단 한 번도 소리 지르지 않았다. 소리 지를 수 없었다. 마녀와 소년은 서로가 고통에 차 몸부림치더라도, 조금 더 사랑할 수 있기를 원했다. 소년은 초점 없는 눈으로 마녀의 얼굴을 죽음의 순간까지 쳐다보았다. 마녀는 마침내 소년의 가슴에서 심장을 꺼냈다. 소년은 마지막 남은 힘으로 얼음 위에 글씨를 썼다.

7.
그 어느 날보다 더 세차게 눈이 내렸다. 얼어붙은 땅 위로는 파란빛 해가 떴다. 해는 저물지 않았다. 달도 뜨지 않았다. 구름 덮인 하늘 너머로 새파란 해가 푸른빛을 세상 곳곳에 뿌렸다. 햇빛은 마녀의 손을 비췄다. 붉게 물든 마녀의 손에는 소년의 빨간 심장이 들려 있었다. 마녀는 눈물을 흘리며 벽을 바라보았다. 마녀는 그제야 후회하고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시간은 자정을 향해가고 있었고, 달은 뜨지 않았다. 마녀는 하염없이 눈물 흘렸다. 딱딱한 얼음 바닥을 파 심장을 얼음에 묻었다. 심장은 딱딱하게 굳어갔다. 마녀는 구백 구십 구년의 마지막 시간을 그렇게 보냈다. 마녀는 마지막 하루를 사랑하는데 보냈다. 마녀는 자신의 영혼을 담아 사람이 되지 않았다. 마녀는 자신에게 걸린 저주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마녀는 슬프게 기억을 잃어갔고, 자정이 넘어서고, 거짓말처럼 눈보라는 멎었다.

8.
얼음성의 바닥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심장이 얼어붙어 있었고, 벽은 온통 ‘죽어서도 당신을 사랑하리라’는 말로 뒤덮여 있었다.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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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ominiqueq 10.11.10 22:57 댓글 수정 삭제
    짧고 인상적인 글이네요. 소설이라 보기에는 퍽 간략하고 짧지만 오히려 그것을 맹점으로 이용하여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분명하게 드러냈군요. 하지만 역으로 생각하자면 결과만 있는 글이로군요. 좋은 이야기입니다, 라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글에서 감동을 느끼진 못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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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crime 10.11.13 14:15 댓글 수정 삭제
    짧은 동화 한 편 읽은 것 같습니다. 다만, 너무 이야기가 담담히 진행되어서 그런지, 아니면 내용이 짧은 탓인지, 마녀와 소년의 애절한 사랑이 그다지 와 닿지 않는 무척 평범한 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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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lowdin 10.11.14 16:20 댓글 수정 삭제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쓰려 노력했던 텍스트입니다. 그러니까, 소설이라던가 시 같은 문학의 갈래에 따른 형식의 구분에서 자유롭고자 했는데, 굉장히 힘든 일이죠. 소설보다는 동화에 가까울 겁니다. 원래 장편 시놉시스였고요.

    현서님 덕에 거울에 들렸고요, 들린 김에 하나 풀어놓았습니다. 어른을 위한 동화 쯤으로 설명하죠.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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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념초월 10.11.20 03:29 댓글 수정 삭제
    와.........
    진짜 짧고 인상 깊은 글입니다.
    정말 짧은 동화를 읽은 기분이예요.
    예전에 인터넷에 떠도는 글중에 소년과 소녀의 사랑 이야기인데
    소년은 소녀가 자신의 운명인것을 알게되어서 저주를 받아 평생에 단 한번만
    그말을 할수있고 말을 하면 죽는다 였나 뭐그런 이야기를 읽은 적이있는데
    그때와 받는 느낌이 비슷하네요
    이렇게 이미 아이가 아닌데도 동화를 읽었을떄 같은 느낌을 받는 글을 쓰신다는게 참 좋습닏.ㅎㅎ
  • No Profile
    S 11.01.09 19:42 댓글 수정 삭제
    혹시, 군트라넷 책마을이란 곳에서 계셨던 분이십니까? 이 글 거기서도 본 글인데..
  • No Profile
    Melissa 11.11.23 21:40 댓글 수정 삭제
    잘 읽었습니다. 짧지만 굉장히 좋았던 글로 기억이 될 것 같네요.
    다만 이야기가 조금 더 길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합니다. 건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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