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다이어트환상곡

2010.07.04 08:5907.04

 1

 하늘엔 아무 것도 없다고 어머니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푹 수그리고 앉아 잠자코 듣기만 했다. 꼭 한 달 전에 담임선생님이 내게 똑같은 말을 했다. 그때도 나는 고개를 수그리고 앉아 이야기를 들었다. 어머니의 설교를 배경음악 삼아 눈을 감고 밤하늘을 속으로 그려보았다. 검고 푸른 밤하늘, 높이 솟은 건물들 너머로 커다랗게 달이 걸려있다. 무엇보다도 높은 곳에 자리를 잡은 그 누렇고 둥그런 달은 쉴 새 없이 잔구름을 흘리면서 표정을 바꾼다. 캄캄하고 맑은 하늘에 바늘로 구멍을 뚫은 듯 별들이 작지만 분명하게 빛나고 있다. 반대로 지상의 창백한 불들은 각자 짙고 푸른 어둠에 둘러싸여 맥을 못 추고 있다. 텅 빈 대로를 가로지르는 자동차 소리가 싸늘하다…. 듣고 있냐니까? 어머니가 별안간 소리를 질렀다. 네, 듣, 듣고 있어요. 나는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한 발짝이라도 더 움직여 살 뺄 생각을 해야지. 하늘을 보면 뭐가 나오니, 러닝머신이 나오니 체중계가 나오니. 열심히 살을 빼야 훌륭한 사람이 된다니까. 숨이 모자란 지 어머니의 얼굴이 빨개졌다. 나는 내 뱃살을 만져보았다. 물컹, 하고 적지 않은 지방의 존재가 느껴졌다.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래, 어제 존나 까였다니까. 어제 담임이 동훈이 패는 거 못 봤지? 몸무게 순으로 뒤에서부터 순서대로 나왔는데, 동훈이가 맨 처음 나온 거야. 한 삼백 대 맞았나? 씨발 마대자루 부러지는 거 내 눈으로 직접 보기는 처음이었다. 빠따 부러지니까, 담임이 집에 가라더라. 존나 튀었지 뭐. 동훈이 저 새끼는 괜찮나 몰라.
 어제 수업이 끝나고 교실에 남았던 과체중 아이들 중 하나가 어제 오후 교실 상황을 떠들어대고 있었다. 이야기를 듣던 아이들은 차례로 고개를 돌려 동훈이를 힐끔 쳐다보았다.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풀이 죽은 채로 앉아있었다. 의자 옆으로 내밀고 있는 굵은 허벅지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동훈이의 퉁퉁한 다리 뒤편에 나있을 시퍼런 멍자국을 상상했다.
 드르륵, 예고 없이 문이 열리고 담임선생님이 들어왔다. 훤칠한 키에 바짝 마른 실루엣이 교단 위로 올라섰다. 아이들이 자기 자리를 찾아 앉느라 의자 끄는 소리가 시끌벅적하게 났다. 이윽고 고요를 찾은 교실에 반장인 성민이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차렷, 경례. 안녕하십니까. 담임선생님은 교탁을 짚고 우리들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오늘은 구멍으로 견학을 간다. 나는 동훈이를 한 번 더 바라보았다. 고개를 책상에 박고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아이들이 하나 둘 일어나기 위해 의자를 빼는 소리가 들려왔다.

 구름이 잔뜩 껴 흐릿한 날씨였다. 천장이 없는 커다란 광장 가운데에 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우리키의 다섯 배는 족히 될 커다란 나무가 아래로 가지를 잔뜩 늘어뜨리고 있었다. 거기에 구멍이 있었다. 구멍은 그 나무기둥에 붙어서 크지도 작지도 않게 쩌억 입을 벌리고 있었다. 우리들은 멀찌감치 서서 그 구멍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이번 겨울이 오면 우리도 저 구멍을 통과해야 하리라. 모두들 무거운 표정이었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바람이 불어왔다. 발치에 쌓여있던 낙엽가루가 흩날렸다. 출석 체크 다 했으면 이제 가도 좋다, 담임선생님은 말을 마치자마자 몸을 돌려 학교로 향했다. 가자, 성민이가 작게 말했다. 우리는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지만, 구멍으로부터 눈을 떼지는 못했다. 담장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구멍은 줄곧 우리와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이윽고 구멍이 보이지 않자 나는 작게 몸을 떨었다. 아, 졸라 춥네. 옆에서 동훈이가 작게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추위가 가시지 않았다. 목도리를 여몄다. 여전히 찬바람이 옷 틈을 비집고 숭숭 들어왔다.

 성민이는 우리 반에서 가장 마른 아이였다. 학기 초부터 담임선생님의 눈에 들어 총애를 받았고, 반장 투표에서도 혼자서 후보로 나와 투표 없이 당선 되었다. 어른들은 누구 하나 성민이를 안 예뻐하는 사람이 없었고, 아이들 사이에서는 동경과 질투의 대상이었다. 많은 아이들이 성민이에게 다이어트 비결을 물어보았다. 그럴 때마다 성민이는 희미하게 웃으면서 사료를 받아와서는 반만 먹으라거나 러닝머신을 등지고 거꾸로 달리라는 등 각자의 몸매에 맞는 실용적인 조언을 해주고는 했다. 하지만 성민이 자신은 먹는 것에 별 관심을 쏟지 않았다. 내게 매점에 함께 가자고 말을 건네는 쪽은 늘 그애였으며, 반에서 사료를 잘 먹는 편에 속하는 것도 그애였다. 어떤 아이들은 성민이가 살을 빼기 위해 마약을 먹는다는 둥, 옷을 벗어보면 옆구리에 지방을 빼낸 흉한 수술 자국이 있다는 둥의 악담을 퍼뜨리고 다녔다. 하지만 그 아이들도 막상 성민이가 나타나면 다이어트 비결을 묻기에 바빴다.

 반대로 동훈이는 우리 반에서 가장 뚱뚱한 아이였다. 담임선생님은 학기 초부터 동훈이를 미워하는 기미를 보이더니 시간이 지날수록 동훈이를 때리는 횟수가 많아졌다. 숙제를 안 해서, 아침에 버스를 놓쳐서, 책을 놓고 와서, 수업시간에 떠들어서, 그것도 아니면 머리가 길어서 동훈이는 맞았다. 어른들은 동훈이의 그림자만 봐도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이들은 동훈이와 곧잘 어울려 놀고는 했으니, 동훈이는 하루에 한번쯤은 꼭 놀림감이 되곤 했다. 담임선생님은 사료시간마다 들어와서 동훈이를 보고 적당히 먹으라며 핀잔을 주곤 했다. 그러면 동훈이는 멋쩍게 웃으면서, 이거 다 옷이에요, 이 옷 벗어보면 뼈밖에 없다니까요, 하고 받아치곤 했다.

 하지만 우리들은 아무 생각 없이 먹고 사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적정량에 약간 못 미치는 사료를 군말 없이 먹었다. 간혹 다이어트를 결심하고 칼로리 계산표를 들고 다니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웬만큼 독한 놈이 아니고서는 보통 그런 짓은 사흘을 넘기지 못했다. 비싼 돈 들여서 단식원을 끊어놓고도 한 달에 열흘 정도만 들르는 아이들. 마른 아이들을 보면서는 부러워하고, 뚱뚱한 아이들을 보면서는 야, 내가 쟤보단 말랐지 않았냐? 하면서 서로 위안을 얻는 아이들. 나도 그런 부류에 속했다.

 아버지는 당신이 구멍을 통과했던 시절을 즐겨 이야기했다. 오늘도 예외는 아니었다. 담임선생님에게 혼났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아버지는 술상 옆에 나를 무릎꿇려놓고는 한바탕 설교를 시작했다. 내가 넘어갈 때는 구멍이 좀 더 좁았어. 그래도 그땐 애들이 성실해서 뚱뚱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지. 요즘 애들은 말이야, 뒤룩뒤룩 살이 찐 걸 보면 가정교육을 어떻게 받았나 싶어. 그렇게 자기 관리를 못해서야…. 구멍은 어림도 없지. 그런 놈들은 정신 차릴 때까지 굶어봐야 돼. 내가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아, 그렇지. 그렇게 비쩍 마른 애들인데도 구멍이 너무 좁아보여서 다들 쭈삣거리는 거야. 내가 눈 딱 감고 손을 들었지. 선생님! 제가 먼저 하겠습니다.
 아버지는 실제로 오른팔을 번쩍 들었다. 오른손에 쥐여있던 소주잔이 넘쳐 테이블 위에 물방울이 번졌다. 그때는 먹을 게 귀했잖아요, 마른 게 당연하잖아요…. 목구멍으로 올라오는 말을 삼키고, 잠자코 듣기만 했다. 슬슬 꿇고 앉은 무릎이 저려왔다. 아버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러면서 앞으로 나가는데, 발이 후들후들 떨리더라고. 반에서 마르기로는 세 손가락 안에 들었다고는 해도, 떨리는 건 어쩔 수가 없더라고. 눈 딱 감고 구멍에 오른팔을 쑤셔 넣었지. 근데 구멍이 내 팔을 쭉 잡아당기더라고. 그러고 나니까 나머지는 쉽더라. 오른팔 들어가니까 어깨도 들어가고, 머리도 들어가고. 마지막으로 발이 빠지면서 애들이 너도나도 먼저 구멍으로 들어가겠다고 다투는 소리가 들렸지. 이 아빠는 너한테 좋은 유전자 물려줬다. 봐라, 바싹 말랐잖느냐. 조금만 노력하면 살이 쭉쭉 빠질 놈이…. 아빠 술 마셔야 되니까 가봐라! 내일부터는 지방 섭취 줄이고 러닝머신 30분씩 더 해. 아빠가 검사할거야.
 일어나니 머리와 다리가 어찔했다. 코에 침을 찍어 바르면서 방으로 돌아왔다. 문을 닫고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천장에서 찌르는 듯한 형광등빛이 내려와 눈꺼풀을 붉게 밝혔다. 발등에 붓끝이 와 닿는 느낌이 들었다. 발치에 뚫려있는 작은 창 너머로 밤바람이 넘실댔다. 몸을 웅크려 얼굴을 창가에 들이밀었다. 차가운 바람이 훅, 코로 밀려들어왔다. 딱 창틀 크기에 맞춰서 작게 재단된 밤하늘이 보였다. 검푸른 장막이 깊게 펼쳐져 있는 밤하늘, 그 위에 모래알갱이처럼 작게 빛나는 별 몇 개. 찬바람을 한껏 들이키고 깊은 바다로 잠수하듯 방으로 돌아왔다. 보조등이 허연 눈을 부릅뜨고 강조하는 책상 위는 어지러웠다. 두툼한 책이 가장 위에 놓여있었다. 저녁식사 다이어트. 내일은 식사학 수업이 있는 날이다. 나는 책을 집어 들어 가방에 넣었다.

 동훈이가 밥을 굶기 시작한 것은 구타 사건이 있은 다음날 사료시간부터였다. 모두들 사료를 받기 위해 줄을 섰다. 동훈이를 빼고는 전부 다. 여물통 너머에 앉은 사료당번이 퍼주는 사료를 받고, 차례차례 자리로 돌아가 식사를 시작했다. 동훈이는 옆자리 짝궁이 받아온 사료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너도 받아와, 동훈이의 짝궁이 어색하게 말했다. 동훈이는 그 아이를 한참동안 노려보더니, 이윽고 문을 박차고 교실을 나갔다. 교실에는 한동안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몇 명은 사료를 다 먹지 못하고 버렸다. 한참 후에 동훈이가 돌아왔다. 옷이 흠뻑 젖을 정도로 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야, 동훈이 육수 흘린다, 어제 오후 동훈이 이야기를 떠들던 녀석이 외쳤다. 아이들은 모두 크게 웃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동훈이가 웃지 않았다. 엄숙하게 자리에 앉더니 다음 수업인 영양학 교재를 꺼내는 동훈이의 모습에 아이들의 웃음이 잦아들었다.

 넌 걱정도 안되냐? 동훈이 저 새끼 저거 벌써 일주일째야. 아직까지 안 쓰러진 게 신기할 정도다.
 지가 안 먹겠다는데 어쩌겠어. 굶어봤자 동훈인데 배고프면 알아서 찾아먹겠지.
 저 무식한 새끼 저거 한번 쓰러져봐야 정신 차리지.
 앞자리 아이들의 대화를 귓결에 들으면서 동훈이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일주일 만에 살이 많이 빠지긴 했지만, 안색이 핼쑥해진 것이 눈에 보였다. 하지만 동훈이가 마음을 고쳐먹었다는 사실을 눈치 챈 아이들은 몇 명 되지 않았다. 여전히 아이들은 동훈이를 놀림감 내지는 재미있는 아이쯤으로 여기고 있었고, 멀건 죽에 플라스틱 지푸라기 건더기 같은 사료가 매일 색깔만 바뀌어서 나오는 나날이 계속 됐다. 변한 건 동훈이가 몸매에 관한 농담에 더 이상 웃지 않는다는 점뿐이었다. 성민이와 나는 5교시 수업이 끝나자마자 언제나처럼 주린 배를 움켜잡고 매점에 가서 혀를 톡톡 쏘는 형광색 사료를 사먹었다.
 아련한 단맛에 고인 침을 삼키면서 교실로 들어섰을 때, 교실은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아이들은 흥분한 목소리로 떠들고 있었고, 교실 맨 뒤편에는 피 묻은 의자가 누워있었다. 무슨 일이야? 성민이가 한 아이에게 물었다. 동훈이 그 새끼 쓰러져서 응급실에 실려 갔어. 나는 교실 뒤편에 누워있는 의자를 바라보았다. 땅에 닿은 등받이 왼쪽 부분이 피로 빨갛게 물들어있었다. 그날 오후에 동훈이와 함께 교실에 남았던 과체중 아이들 중 하나가 동훈이가 쓰러지던 모습을 다른 아이들에게 설명하고 있었다. 그 새끼 쓰러지는 거 봤냐? 수업 끝나고 한참 앉아 있다가 일어났는데, 균형을 못 잡고 넘어지더라. 처음엔 몸개그 하는 줄 알았는데, 와 난 무슨 빌딩 무너지는 줄 알았다. 씨발, 자빠지면서 머리를 찧을 건 또 뭐람. 그 새끼 잘못하면 영영 좆되는 거 아냐? 핏자국은 교실 앞문 쪽으로 이어져 있었다. 나는 눈으로 핏자국을 따라갔다.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다행히도 뇌를 다친 건 아니래. 담임이 응급실에 데려다주고 왔대. 머리에 상처만 나으면 바로 학교로 돌아올 수 있나봐. 그것 참 다행이다, 나는 대답하면서 성민이를 바라보았다. 성민이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우리가 타고 온 버스가 더러운 공기를 우리 쪽으로 내뿜으며 저 앞으로 멀어져 갔다. 구멍 달린 나무가 있는 광장에서부터는 집까지 걸어가야 했다. 야, 내가 성민이를 불렀다. 응? 넌 다이어트 하냐? 당연히 하지. 성민이는 멋쩍게 웃었다. 그래도 넌 신경 별로 안 쓰잖아. 나랑 맨날 매점도 가고. 성민이는 대답이 없었다. 야, 우린 왜 이렇게 목숨 걸고 살을 빼야 되냐? 나는 성민이를 마주보았다. 성민이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잔뜩 수그린 입으로 작게 소리가 새어나왔다. 나도 몰라…. 우리가 해야 되는 일이잖아, 그냥 열심히 하는 거지. 성민이는 대답하면서 나무쪽으로 눈을 돌렸다. 창백한 하늘을 배경으로 구멍이 새카맣게 입을 벌리고 있었다. 나 이제 갈게. 옆에서 작별인사를 하는 소리가 귓등을 때렸다. 고개를 돌리자 집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성민이의 뒷모습이 보였다. 잘 가, 나는 내 인사가 잘 들리도록 그애의 뒤통수에 대고 크게 말했다.

 오늘 너네 반 애 한명 쓰러졌다면서? 어머니는 부엌에서 바쁘게 몸을 움직이면서 내게 말을 걸었다. 동훈이요, 우리 반에서 제일 뚱뚱한 애. 나는 풀이 죽어서 대답했다. 그래, 동훈이말야 동훈이. 에구 어쩌니, 지금 남들은 한창 다이어트 할 시기인데. 병원에 누워있으면 살이 더 찔텐데, 돌아와서 애들 몸매 따라잡을 수 있을까? 술상 앞에 앉아 신문을 읽으면서 가만히 듣고만 있던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그러게 살은 미리미리 꾸준히 빼야 하는 거다. 너도 갑자기 살 빼겠다면서 밥 굶다가 쓰러지지 말고 평소에 살 빼놔라. 너 근데, 오늘 러닝머신은 뛰고 저녁밥 기다리는 거냐? 아버지는 보던 신문을 접고 고개를 들어 나를 쏘아보았다. 지금 할게요, 나는 거실을 가로질러 구석에 있는 낡은 러닝머신 위에 올라탔다. 흠집이 가득 난 액정 너머로 시속 십 킬로미터라는 글자가 나타났다. 나는 천천히 발을 움직였다.

 다음 날 마지막 수업은 열량학이었다. 키가 결코 크지 않은, 파마한 머리가 어깨까지 내려오는 여자선생님이 고요한 필기시간 중에 말을 꺼냈다. 너네 반 동훈이 쓰러졌다며? 보자, 어디가 동훈이 자리였지? 펜이 종이를 스치며 사각거리는 소리가 점차로 멎어들었다. 아이들의 시선이 노트에서 풀려나 교실 뒤편의 빈자리로 향했다. 너네도 그날 돼서 갑자기 살 빼겠다고 하면 동훈이처럼 쓰러지기 십상이야. 뺄 사람은 미리미리 빼 두고, 포기할 사람은 포기하고. 거기 너, 넌 포기해야겠다. 선생님은 동훈이 이야기를 떠벌리고 다니던 아이를 지목했다. 그애는 놀랍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선생님의 장난을 받아쳤다. 선생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를 동훈이한테 비교하시는 거예요? 아이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선생님도 마른 허리를 꺾고 따라 웃었다. 나는 건너편 분단에 앉아있는 성민이를 바라보았다. 성민이는 아이들과 함께 잠시 소리 내어 웃더니, 이윽고 진지한 얼굴로 칠판에 적힌 글자를 따라 적었다. 나는 내 노트를 바라보았다. 내 노트는 깨끗했다.

 그날 집에 돌아가는 길에서부터 열이 오르기 시작하더니, 현관문을 닫고 나서부터는 서있기도 힘들 정도로 앞이 부옇게 보였다. 다녀왔습니다, 아무렇게나 인사를 하고 방에 들어섰다. 등 뒤로 방문 닫히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옷을 벗고 침대에 누웠다. 찬 이불이 팔다리와 가슴팍에 와 닿았다. 사지를 휘저어 이불을 더듬었다. 이윽고 이불이 체온으로 따뜻하게 달궈져서 나는 미지근한 이불을 걷어내었다. 몸의 열기를 식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치에 창문을 한껏 열었지만 고작 고개를 내밀 수 있을 정도의 크기였다. 얼굴을 들이밀어 찬 공기를 깊숙이 들이켜고 방으로 돌아왔다. 몇 번을 더 자맥질을 하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다.



 2

 사흘을 꼬박 앓은 뒤에야 열이 내렸다. 변한 것은 없었다. 동훈이의 자리는 여전히 비어있었다. 완전히 회복되려면 이 주일 정도 걸린다고들 했다. 아이들은 신경질적으로 웃으면서도 서로의 몸무게를 눈대중으로 가늠하느라 여전히 바빴다. 구멍을 통과해야하는 날이 다가올수록 아이들의 신경은 날카롭게 곤두섰다. 누가 일 킬로가 쪘네, 누가 영쩜 오 킬로를 뺐네 하는 소문이 아이들의 폭발적인 관심들 속에 빠르게 나돌았다. 소문의 주인공과 몸무게가 비슷한 아이들은 소문의 내용에 따라 그날그날 표정이 달라지곤 했다.

 12번, 담임선생님이 내 번호를 불렀다. 나는 비둘기색 철제문을 열고 교무실로 들어갔다. 손잡이가 손에 달라붙을 듯 차가웠다. 맞은편에 달린 창문 블라인드 너머로 늦은 오후의 짙은 햇살이 넘실댔다. 그 아래 담임선생님이 생활기록부를 뒤적이며 앉아있었다. 나는 담임선생님 맞은편에 앉았다. 생활기록부에 달라붙어 어색하게 웃고있는 내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73킬로? 입학할 때보다 많이 쪘네. 담임선생님은 고개를 들어 힐끗 나를 보았다. 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가 절로 나왔다. 며칠 쉬었다고 살이 더 오른 것 같네. 통과 못하면 어떻게 되는 줄 알지? / 네. / 잘 알면서 그래. 이제 정말로 얼마 안 남았어. 지금이 제일 중요한 때야. 내가 말해두는데, 지금 열심히 안하면 너 나중에 후회한다. 이만하면 알아들을 놈이니까 오늘 면담은 여기까지 하고. 음, 교실 올라가서 13번 불러와. / 네. 나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교무실을 나섰다. 문이 열리자 네모 모양으로 햇빛이 밝게 비치는 바닥에 내 그림자가 커다랗게 맺혔다. 내가 그토록 거대해보인 적은 처음이었다. 바닥을 굳게 딛고 선 맥주통처럼 내 몸뚱이가 엄연한 부피를 가지고 햇빛을 막아서고 있었다. 문이 닫히고 그림자는 사라졌지만 나는 그 자리에 한참동안 그대로 서 있었다.

 잘 보이지는 않지만, 구멍 옆에는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우리들이 구멍을 통과하는 수능날, 온 마을의 어른들은 나무 근처로 모여들어 우리들의 성인식을 구경하기로 되어있었다. 구멍을 통과해 다른 세상으로 가는 아이들은 어른들에게 칭찬받았다. 하지만 구멍을 통과하지 못하면 어른들이 지친 아이들을 그 안으로 끌고 간다고 했다. 그 속으로 사라진 아이들을 다시 보았다는 이야기는 들을 수 없었다.

 일주일쯤 뒤에 동훈이가 나타났다. 1교시 열량학 수업 도중에 뒷문이 드르륵 열렸다. 아이들이 모두 놀라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았다. 동훈이였다. 이마가 땀으로 흠뻑 젖어있고 등판에서 김이 피어오르는 보람도 없이 단식을 시작하기 전 몸매로 돌아가 버린 동훈이가 거기에 있었다. 모두가 쳐다보는 가운데 동훈이는 커다란 덩치를 움직여 느릿느릿 자기 자리로 걸어갔다. 가방을 내려놓고 책을 꺼내더니, 아까부터 자기만 뚫어져라 보고 있는 선생님을 말없이 마주보았다. 음, 우리, 음, 음, 우리 어디까지 했었지? 열량학 선생님은 동훈이의 눈을 피해 교실을 한 바퀴 쓱 훑어보았다. 선생님의 목소리가 뒤집혔는데도 아이들은 웃지 않았다. 불편한 눈치를 보이면서 선생님이 수업을 계속했다. 나는 동훈이를 바라보았다. 짧은 양 소매를 번갈아 잡아당겨 연신 땀을 닦아내면서도 펜을 내려놓지는 않았다. 동훈이가 구멍에 들어가는 날까지는 절대 웃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쉬는 시간이 되자 아이들은 오랜만에 등교한 동훈이 주변으로 밥알처럼 모여들었다. 동훈이는 누구의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왜 이렇게 일찍 나왔냐고, 어쩌다 다시 살이 붙은 거냐고, 너 없으니까 교실이 텅 빈 것 같았다고 아이들이 말을 퍼부어댔지만 동훈이는 그 누구의 말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누군가 의자에 본드라도 발라놓은 듯 동훈이는 앉아서 공부만 했다.
 사료시간이 되자 사료를 먹기는 했다. 하지만 이전에 받던 것보다 훨씬 적은 양이었기 때문에 나는 동훈이가 또다시 쓰러지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저러다 말겠지 하던 아이들은 동훈이의 침묵과 소식(小食)이 하루씩 그 기록을 갱신해나가는 것을 보면서 자기 생각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철든 거지, 뭐. 어머니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동훈이 걔가 한 번 쓰러지더니 정신차렸나보다. 넌 언제쯤 정신차릴래? 어머니는 빨래를 개키다 말고는 나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너도 동훈이 좀 따라 해봐라. 며칠 남았다고 아직도 칠십 킬로 대니? 동훈이가 지금 너보다 뚱뚱하다고 아직 안심하면 안 돼. 수능날 막상 가보면 니가 더 뚱뚱할 수도 있어. 너 오늘 러닝머신은 다 뛴 거야? / 다 뛰었어요, 나는 작게 대답했다. 그래도 더 뛰어. 조금 더 뛴다고 손해볼 것 하나도 없다. 거실에서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동훈이인가 하는 그 녀석, 듣고 보니 너 따라잡는 건 시간문제인 것 같구나. 너 통과 못하면 어떻게 되는지는 알고 노닥거리는 거냐? / 알았어요, 십 킬로미터 더 뛰면 되잖아요. 나는 거실 구석의 러닝머신을 향했다. 겨우 십 킬로? 뛸 수 있을 때까지 뛰어. 아버지는 일어나 신문을 내려놓고는 내 곁으로 왔다. 이 아빠보다 못 뛰면 오늘 저녁은 없다.

 차렷, 경례. 안녕하십니까. 담임선생님이 교단 위에 서자 성민이가 일어나 아이들을 일제히 인사시켰다. 담임선생님은 교탁을 한손으로 짚고 종이를 팔랑거렸다. 이거, 영양학 수행평가 점수다. 이따 게시판에 붙여놓을 테니까 점수 확인하고 이상한 점 있으면 영양학 선생님한테 물어보고 가라. 아이들 사이에서 산발적으로 네, 네 하는 대답이 흘러나왔다. 담임선생님은 종이를 교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장동훈이, 담임선생님은 동훈이를 전에 없이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네. 동훈이가 짧게 대답했다. 요즘 열심히 하는 모습 보기 좋다. 시간이 얼마 없지만 그대로 해줫으면 좋겠다. 담임선생님은 모두에게 하는 말처럼 교실을 빙 둘러보면서 말했다. 동훈이는 담임선생님과 눈길을 마주치지도, 웃지도 않았다. 오늘 종례는 여기까지. 성민이가 다시 일어났다. 차렷, 경례. 안녕히 계세요.

 시간은 재채기로 튕겨 나간 밥풀처럼 빠르게 흘렀다. 온 세상이 수능날을 잔뜩 고대하는 마냥 점점 더 많은 시간이 변기 물 내리듯 아래로 내던져졌다. 이윽고 우리가 구멍에 들어가는 날이 다가왔다. 나무 주위에는 어른들을 위한 임시 천막이 세워졌다. 구멍은 밝은 색으로 칠해져서 멀리서도 잘 볼 수 있게 되었다. 어른들이 일을 멈추고 나무 주변에 몰려 웅성민이는 소리를 만들어냈다. 임마 너 28기 이창섭이 맞지? / 야, 못 본 사이에 더 말랐네! 이새끼 이거 출세했구나! 와 같은 대화가 나무 주위를 가득 메웠다. 어른들 틈으로 잡상인들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물이며 사료 따위를 팔고 있었다. 나뭇가지에 묶인 여러 갈래의 민국기가 을씨년스럽게 펄럭이고 있었다. 해는 창백하게 떠서 광장을 비추고 있었다. 탕, 소리가 나면서 나무에 난 구멍이 시커먼 입을 벌리기 시작했다. 어른들이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이제 우리가 구멍을 통과할 차례였다.

 성민이가 먼저 앞으로 나섰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더니, 고개를 들고는 나무를 정면으로 마주보고 섰다. 오른발을 떼는가 싶더니 어느새 나무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나무와의 거리가 빠르게 가까워졌다. 다섯 발짝, 세 발짝, 한 발짝…. 구멍은 어렵지 않게 성민이를 머리 쪽부터 집어삼켰다. 성민이의 발끝이 말끔하게 사라진 것을 확인하자 어른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반짝이는 꽃가루가 만국기 너머까지 날렸다.

 다음, 이동훈. 담임선생님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동훈이는 긴장한 듯 쭈뻣거리며 앞으로 나왔다. 방금 전까지도 운동을 하다가 왔는지 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동훈이는 제자리에서 발을 몇 번 구르더니, 성민이처럼 구멍을 향해 달려갔다.  다섯 발짝, 세 발짝, 한 발짝…. 퍽, 둔탁한 소리가 났다. 동훈이는 벌렁 뒤로 나동그라졌다. 어른들의 야유가 쏟아졌다. 동훈이는 벌떡 일어나 구멍을 보고 한참을 씩씩대더니, 다시 팔을 집어넣고 온몸을 바동거렸다. 어른들은 야유를 넘어서서 먹던 사료를 동훈이를 향해 집어던지기 시작했다. 담임선생님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몇몇 어른들이 앞으로 나와 발버둥치는 동훈이를 끌어내렸다. 가기 싫다고 울부짖는 동훈이를 구멍 옆 지하계단으로 끌고갔다. 울음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우리들은 굳은 표정으로 구멍을 바라보았다.

 내 차례가 왔다. 나는 구멍 앞에 섰다. 잔뜩 긴장했는지 손끝이 떨렸다. 숨을 고르고, 구멍을 바라보았다. 발끝을 퉁겼다. 구멍이 빠르게 다가오면서 점점 크게 보였다. 팍, 눈앞에 하얗게 별이 튀었다. 엉뚱한 곳에 머리를 박았다. 다행히 팔은 구멍 안쪽으로 들어갔다. 들어간 팔을 쐐기삼아 몸을 밀어 넣었다. 아직 들어가지 않은 귀로 어른들의 야유소리가 들렸다. 어른 두세 명이 나를 끄집어내려 구멍 쪽으로 모여들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다리를 놀려 몸을 들어 올렸다. 엉덩이가 두어 번 들썩거렸다. 발끝이 잡힌다고 생각하는 순간, 몸이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밀고 들어가던 관성으로, 나는 끝없이 떨어졌다.

 *

 맑은 하늘이다. 솜을 뜯어놓은 듯 뭉게구름이 몇 조각 떠있고, 따가운 햇살이 하늘을 푸른빛으로 물들인다. 구멍을 통과하기 전의 세계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많은 나무들이 있다. 나무마다 관목마다 꽃들이 피어있어 코끝이 꽃향기로 시리다. 정원처럼 아름다운 세계다. 안녕? 하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내 곁을 빠른 속도로 스쳐지나간다. 가장 말랐던 성민이다. 멈춰 서서 고개를 든다. 멀리 성민이의 뒷모습이 멀어져간다. 여전히 호리호리한 허리. 부러질 것만 같다. 목덜미에 와 닿는 햇살이 이상할 정도로 뜨겁다. 나는 주위를 둘러본다. 관목으로 두른 풀밭, 크지 않은 나무 몇 그루가 서있다. 가까이 다가가 관목 잎사귀를 만져본다. 가운데가 일자로 잘려나갔다. 나무로 시선을 옮긴다. 동글동글하게 다듬어져있다. 나무와 풀은 누군가가 둥그렇게 혹은 모나게 잘라놓았다. 내가 맡은 꽃향기는 풀이 죽어간 냄새였다. 이 언덕 너머에는 수많은 구멍이 있다고들 한다. 구름이 흘러와 해를 가렸는지 갑자기 몸이 식는다. 나는 하늘을 바라본다. 지금 내 머리 위를 가리고 있는 구름을 빼면 하늘은 잔구름 없이 맑다. 은빛으로 테를 두른 구름이 점점 구석으로 흘러간다. 햇빛이 천천히 다시 나를 쪼이기 시작한다. 이곳이 정말 내가 원하던 하늘이었을까.
liberte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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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oremi 10.07.04 22:05 댓글 수정 삭제
    공부를 살에 빗댄 것일 뿐, 조금 진부한 소재였긴 하지만 잘 읽히는 글이었습니다. 구멍을 통과해야 한다는 광기어린 사회의 강박증, 그 인형놀음에 맞쳐 목숨까지 불사하며 필사적으로 정상아닌 정상에 맞춰 가려는 아이들. 최근에 읽은 글 중에 가장 주제성이 명확한 글이었습니다.
  • No Profile
    irlei 10.08.12 22:06 댓글 수정 삭제
    좋았어요. 잘 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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