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2010.02.01 18:0902.01

[아마..봄이었을 거야. 아니 여름이었던가? 뭐..계절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으니까 넘어가고..하여간 눈은 오지 않는 시기에 작은 공을 주웠어]
[공?]
[응, 크기는 야구공 정도인데 불투명한 느낌의 공. 안이 완전히 안 보이는 건 아니고 뿌연 안개 같은 게 잔뜩 끼어있는.. 높이 들어서 햇빛에 비추니까 반사광에 반응하는지 연기들이 무지개 색을 보여주더라]
[흠..독특하네]
[그렇지? 왠지 버리기가 아까운 기분이 들어서 마침 들고 있던 가방에 넣어 집에 가져왔어]

나는 고등학교 동창인 김성수와 저녁을 먹는 중이다. 학교를 졸업한 후 처음 만나는 셈인데, 선약을 한 게 아니라 10여분 전에 우연히 거리에서 마주쳐 몇 마디 인사 후에 골목 끝에 있는 허름한 술집으로 끌려 들어왔다. 가로로 긴 10여 평의 작은 공간은 붉은 색의 등이 탁자 위에 켜 있는 정도라 어둡고 칙칙한 느낌이었다. 테이블 사이의 칸막이는 모습만 그런 역할을 할 뿐 고개를 들면 저쪽이 무엇을 시켰는지 다 알 수 있고, 귀를 쫑긋하면 대화도 넘실넘실 귀에 들어와 전체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슬쩍 주변을 둘러보는 사이에 그는 알아서 재떨이와 물이 담긴 컵 두 개를 가져왔다. 그때쯤에야 주문을 받기 위해 나타난 주인에게 그는 아는 척을 하면서 꼬치 오뎅탕을 시켰고, 잠시 멋쩍은 표정으로 내 근황을 물어본 후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그가 천장을 향해 뱉은 회색 연기가 붉은 등을 휘감고 올라가는 모습이 특수 효과 같다는 생각을 하는데 난데없이 꺼낸 소리가 공이야기였다.

[티비에서 공을 양 손에 쥐는 손쉬운 운동이 나왔는데, 갑자기 가방에 넣어둔 게 생각나서 꺼냈지. 강사를 따라서 공을 올렸다 내렸다, 쥐었다, 폈다를 하는데 손바닥이 따뜻해지는 느낌을 받았어. 조금 지나니까..공이 울룩불룩 하다가..펑..]

그는 펑..이라고 터지는 순간을 말할 때 그 강도가 어느 정도 였는지를 알려주고 싶은지 두 손을 들어 원을 그렸다. 그런 동작을 보며 나는 술을 한 잔 들이켰다. 고교 시절을 되돌아보니 그의 특기 중 하나가 부풀려 말하기였고, 서른이 넘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음을 알았다.

[연기가 퍼져 나가는데 깜짝 놀라서 엉덩방아를 찔 정도였어. 근데, 그 공안에서 뭐가 나온 줄 알아?]
[글쎄..뭔데?]
[드래곤!]
[뭐?]
[용! 불을 뿜는 용말이야, 몰라?]

그의 표정이 하도 진지하여 하마터면 믿을 뻔 했다. 몇 초쯤 후에 그런 게 어디 있냐고 반문하며 웃자 찌푸린 표정으로 탁자를 쳤다.

[있어, 우리 집에! 그 놈은 진짜 드래곤이라고. 마침 내 가방에 그 놈이 뱉은 공이 있는데 한번 볼래?]

그는 애써 평범한 표정을 지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우리와 맞닿아 있는 테이블에는 손님이 없어 이런 웃긴 대화를 들을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데, 그는 뭔가를 경계하는 듯한 태도로 작게 속삭였다. 나는 그의 열기 어린 눈빛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그는 한숨을 쉬며 옆 의자에 두었던 검은색 가방에서 보자기를 꺼내 탁자 위에 놓았다. 낡은 분홍색 보자기를 조심스럽게 풀어 내 앞으로 밀어 논 물체는 그의 말대로 공이었다. 사우나실 같이 연기가 자욱하게 들어있는데 뭔가 작고 검은 물체가 그 연기의 한가운데 둥둥 떠 있는 것 같았다. 호박이라는 광물에 들어 있는 화석화된 생물을 머리에 떠올리며 바라보니 왠지 값지고 진귀하다는 판단이 들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한건 그에게서 들은 어처구니없는 말들의 영향 때문이다. 지나칠 정도의 진지함에 내가 빨려들어 갔음이 틀림없었다.

[가질래?]
[글쎄..별로, 그닥..]
[손으로 만지기만 하면 돼. 너도 드래곤을 소유할 수 있어]
[그걸로 뭘 하지? 내 대신 돈이라도 벌어다준데?]

물 잔을 들어 한 모금쯤 마신 후, 시니컬하게 되묻자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짓더니 원하면 그럴 수도 있을 거라고 했다. 이쯤 되니 그가 미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 만에 본 동창 놈은 허풍을 지나 미치광이들의 세계에 발을 디딘 것이다. 제정신도 아닌 놈을 하필 내가 만나다니..운도 없다. 기분이 급격히 나빠져서 일까, 단숨에 들이킨 맥주가 유난히 썼다.

[세상에 나오면 공을 뱉는데...다른 사람에게 그 공을 주기만 하면 되]

내가 비딱한 표정을 지으며 탁자를 소리 나게 툭툭 건드리는데도 그는 무엇인가에 홀린 사람처럼 하고 싶은 말을 이어 나갔다. 아마도 나에게 내민 이 공이 바로 그가 해야 할 숙제였던 모양인 듯, 싫다는 나에게 가지라고, 가져야한다고 주장했다.

10여분 쯤 지나자 탁자에는 술집 주인이 가져다 준 오뎅탕과 술잔, 그리고 미친 동창 놈이 나에게 주려는 그 문제의 공이 자연스럽게 놓여 있었지만, 배가 고파 죽겠다던 놈은 따뜻했던 음식이 다 식어가도록 드래곤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어떻게 대화를 하고, 무엇을 먹여야 하며,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와 보름여 만에 집을 다 차지할 정도로 커진다는 말까지..듣기 싫다는 사람에게 왜 저리 열강을 하나 싶지만, 한편으로 들으면 들을수록 스토리의 견고함과 치밀함에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혼자 실실 웃으며 오뎅탕에 수저를 넣다가 문득 중요한 질문이 생각나 몸을 앞으로 수그리며 속삭였다.

[정말 드래곤이 있다면..전부 비밀로 해야 하는 거 아니야?]
[맞아. 비밀이지]
[왜 나에게 말하는 건데?]

그는 눈을 탁자 쪽으로 돌린 후 한참동안 입을 다물었다. 터질 듯한 풍선 같은 열기어린 모습이 내 말 한 마디에 바람처럼 빠져나가버리고 껍데기만 남은 듯, 그렇게 잠시 동안 있다가 “지쳐서..”라는 한 마디를 뱉었다.

돌연 우리 사이에 기묘한 침묵이 찾아왔다. 지쳐서..라는 말 한마디는 앞서 떠들어대던 미친 소리들보다 더 진실 되게 다가왔고, 어쩌면..이라는 생각마저 야금야금 머리 속에서 피어올랐다. 그 쯤 그는 새로 가져다 준 술을 원샷으로 털어 넣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미쳤다고 생각한다면..두 말 하지 말고 집에 가서 이 공을 손에 쥐고 있어봐. 10일안에 잊지 말고 꼭 해]

그는 손목시계를 내려다 본 후 밥 줄 시간이라고 중얼거리며 인사도 없이 먼저 가버렸다. 이제 붉은 등 아래에는 다 식은 오뎅탕과 술, 보자기 위에 놓인 공 그리고 나만이 있었다. 얼마나 그걸 보고 있었는지는 모르나, 주인이 괜찮냐고 물으러 올 정도면 꽤 시간이 흘렀다. 나는 폭풍 같은 저녁 해프닝에 한숨을 몰아쉬며 그 공을 챙겨 술집을 나섰다. 왠지 그대로 두고가면 동창 놈의 원성을 살 것 같아서..

                                                      *

이주일이 지나갈 무렵, 동창 모임의 반장 격인 현태가 그의 죽음을 알려왔다. 사인은 살인. 그는 자취하는 집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마치 후라이드 통닭의 다리를 찢듯이 오른쪽 다리를 잡아당겨 분리시킨 것으로 경찰은 보고 있으며, 그 찢어진 다리는 감쪽같이 사라졌다. 사람이라면 손힘이 엄청난 남자일거라는 현태의 추측이 전화를 끊은 후에도 찜찜하게 따라다녔다. 샤워를 하면서도, 밥을 먹으면서도 사람이 정말 그럴 수 있을까, 그가 아무리 말랐다 해도 성인인데 잡아 찢는 게 가능할까..과연 찢어지기는 할까..라는 의문이 맴돌았다.

[뭐지?]

다음 날 사무실 일이 끝나고 돌아오는 데 주인아주머니가 부재중에 받아놓았던 등기 우편물을 건네주었다. 보내는 사람이 죽은 동창 놈이라 고개를 갸웃하며 재빠르게 열어 종이를 꺼냈다.  

[드래곤의 자손을 번식시키는 게 공을 가진 사람의 의무인데 그걸 멈추면 계약자는 끝없는 고통 속에서 살아야하지만, 만약 공을 받은 사람이 부화시키지 않으면 계약자를 죽이고 그를 찾아가 서서히 조여들어가지. 나는 그런 계약에 속박돼 살아왔고, 이제는 끊임없는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것이 죽음일 지라도..

내가 아는 사람 중에 넌 제일 이성적이라..사실을 말하면 날 미친놈으로 볼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넌 분명 내 말대로 공을 만지는 일은 하지 않을 테고, 그럼 나는 마침내 죽을 수 있겠지..라고 믿었다]

그의 편지는 인사도 마무리도 없이 그렇게 빈 여백과 함께 끝났다. 나는 여전히 그가 미쳤다고 생각되지만 한편으로는 목에 뭔가 걸린 것처럼 따끔했다. 자꾸 등을 타고 올라오는 불안한 기분을 떨치고 싶어 너저분한 옷더미 속에 박혀있던 공을 찾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

침대에서 잠이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거대한 드래곤이 나타나 내 몸 위에 내려앉았다. 곧이어 의무를 저버렸다고 화를 내며 날카로운 발톱으로 가슴을 사정없이 찔렀다. 온 몸을 타고 흘러내리는 고통은 근육 속으로 파고 들어오는 발톱 끝에서 솟구치는 새로운 피와 함께 신경을 통해 뇌에 전달되었다. 드래곤의 발톱은 내 가슴을 지나 복부를 뚫고 허벅지까지 반으로 갈랐다. 하반신의 뼈가 우지끈 부셔지는 걸 느끼지만 지독한 고통에 무기력해진 나는 어서 빨리 끝나길 바라며 비명을 집어삼켰다. 만약 지금 죽는다면 지옥 끝까지라도 찾아가 꼭 이 모든 일을 가져다준 동창 놈을 잡아 내가 당한 만큼 갚아 주리라는 결심을 되새겼다. 몇 초, 혹은 몇 분이 지났을 때, 드래곤은 가장 긴 엄지발톱을 높이 쳐들었다. 어디선가 비추는 실낱같은 빛에 번쩍이는 끝을 보며, 그것이 내 심장에 꽂힐 예정임을 느꼈다. 드래곤의 표호와 함께 마침내 심장이 쪼개지는 순간, 내 생애의 가장 지독한 고통이라는 생각과 함께 눈을 부릅떴다.

[헉헉..헉헉]

간신히 지독한 악몽에서 깨어나자 무서움과 두려움에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5초 쯤 후에 숨을 들이켰을 때, 방 안에는 무엇인가가 함께 있었다. 평소라면 휘황찬란한 네온사인과 경적음이 들이쳐야 할 원룸이 창문마저 가린 거대하고 검은 덩어리로 꽉 차 어둡고 고요했기 때문이다.

크르르르..크르르르.

낮고 음침한 신음 소리가 덩어리에게서 내 머리 속으로 곧장 들어왔다. 눈은 아직도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하여 그것이 정말 드래곤인지, 혹은 내 상상의 산물인지 확신이 들지 않았지만, 잠시 후 그쪽에서 불어온 공기를 타고 코 속으로 들어온 구역질나는 역한 냄새에 실재로 무엇인가가 그 자리에 있다고 믿었다.  

방을 가득 채운 검은 덩어리는 짐승이 내는 신음 소리를 낼 뿐, 더 이상 어떤 움직임도 없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내 머리 속은 바늘로 찌르는 고통이 엄습해왔다. 그 통증은 오른쪽 눈과 이로 내려와 신경이 존재하는 얼굴 전체를 불에 댄 듯한 감각 속으로 떨어뜨렸다. 또한 이마에서 시작된 땀은 목과 겨드랑이, 사타구니와 발바닥까지 번져 얼마 후엔 침대 시트와 이불이 축축해졌다.

꿈속에서 겪었던 일들이 현실에서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뇌를 압박하는 고통에 침대 옆에 있는 탁자로 손을 뻗어 더듬거렸다. 엉뚱한 물건들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소리를 낼 때마다 놀라 허공을 곁눈질했다. 내가 일으키는 소리와 함께 귀로 들어오는 거친 숨소리에 마구 손을 내저었다. 마침내  친구 놈이 준 공이 잡히자 두 손으로 감싸 알라딘의 램프를 닦듯이 열심히 주물렀다. 친구의 말대로 이 모든 일이 부화를 위한 위협이라면 어서 빨리 뭔가가 그 공에서 튀어나와 이 순간이 끝나기를 바라고 또 바랬다.

검은 덩어리가 숨을 내 쉬었는지 역한 냄새가 진동 치며 다가왔다. 숨을 들이쉴 때면 구역질이 올라와 욱..욱..하는 소리를 내며 나도 모르게 위액을 옷에 흘렸다. 내 온기에 울룩불룩 해진 공을 미친 듯이 문지르며 눈물을 흘렸다. 공은 검은 덩어리의 크르르 거리는 소리에 맞혀 점점 커지다가 펑..하는 소리를 내며 깨졌고 동시에 나는 소변을 지렸다. 바닥으로 산산이 부셔져 내리는 껍데기에 정신을 판 사이에 주먹 크기의 붉은 드래곤이 눈앞에 떠 파도 속을 유영하듯 서서히 움직였다.

검은 덩어리와 나는 텔레파시가 통하는지, 기묘한 신음 소리를 머리 속으로 보낸 후 방 안에서 사라졌다. 밝아진 창문으로 그제야 달빛과 외부의 불빛이 쏟아져 들어왔고, 뒤이어 누군가의 차가 내는 광란의 경적에 그 무엇인가가 정말 없어졌다는 사실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

나는 붉은 드래곤 양육이라는 새로운 의무를 부여받았다. 친구의 말처럼 드래곤이 먹고 자라는 속도는 가시박처럼 무시무시하다. 언젠가 티비에서 보니 가시박은 외래종으로 미국에서 들어왔다고 한다. 하루에 20센티까지도 자라며 하늘을 가려 주변의 식물이나 나무를 말려 죽이는데 딱 지금이 그런 상황이다. 드래곤이 먹어야 할 엄청난 양의 음식을 공수하고 그의 말을 들어주고 원하는 심부름을 하고, 급격하게 불어나는 몸뚱이로부터 가재도구를 보호하기 위해 이리저리 옮기다보니 회사에 병가를 낸 날도 거의 다 끝났다. 혹시라도 외부에 들킬까 두려워 외출 역시도 음식을 사는 일 외에는 할 수 없다. 이 상황에 이르러서야 일전에 본 동창의 모습이 왜 초췌하고 불쌍한지 절절히 와 닿았다.

붉은 드래곤은 부화한 지 보름 쯤 되었을 때 완전한 성인으로 자라 첫 번째 공을 뱉었다. 현관 쪽으로 또르르 굴러가는 걸 보고 있으려니 머릿속으로 타인에게 전달하라는 말이 들려왔다. 이제 나는 두 번째 의무를 시작해야한다. 드래곤 종족의 번식 사업.

판타지 영화처럼 갑자기 나타난 계약서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기재되었다. 공은 한 달에 한 번씩 생산되기 때문에 그 때마다 새로운 사람에게 주고 다음 부화 전에 깨어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하며, 성공할 때 마다 내가 원하는 것을 한 가지씩 들어준다. 단, 타인에 의해 부화가 되지 않으면 계약자의 목숨을 거둬간다.  

매우 단순하지만 쉽지 않은 사항이었다. 내가 죽은 친구를 만났을 때, 처음에 든 생각이 ‘이 놈, 미쳤구나’ 였으니 다른 사람도 그럴 것이다. 진실을 말하지 않고 과연 한 개라도 부화시킬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졌다. 아니, 진실을 말한들 공을 부화시킬지도 장담할 수 없다.

[두려움은 비밀을 지키게 한다. 너 역시도 그렇지 않은가?]

붉은 드래곤은 내 머리 속을 이미 들여다봤는지, 짧은 말과 함께 둔탁한 움직임을 보였다.

두려움.

행동의 원천이고 자신이 이룬 모든 것을 지키게 해주는 힘. 드래곤의 말은 나에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깨우치게 해주었다. 아이디어가 떠오르자 바로 일어나 이 작업을 실천할만한 친구인 용태와 통화를 시도했다. 너에게 보낼 것이 있으니 꼭 직접 받아야한다고.

내가 보내준 소포를 열어 종이를 읽고 10여일 안에 공을 만져 부화시키면, 그의 앞에서 펑..터진 후 나타난 드래곤은 이곳으로 날아온다. 만약 기간을 넘기면 나는 죽고 부화시킨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지금의 나처럼.

우체국에서 정성껏 포장한 소포를 붙인 후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귀찮다는 듯, 마지못해 직접 인수해 열어보겠다고 대답했다. 수화기 너머로 드래곤의 음식 먹는 소리가 들어가는지 시끄러워 잘 안 들린다는 말과 함께 친구는 전화를 끊었다. 나는 무릎을 세워 팔로 감싸 안고 한 때는 침대였으나 드래곤의 무게로 부셔져버린 잔해 위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

회사에서 몇 번의 출근 독촉 전화를 받은 후, 그만두기로 결정하고 퇴직금 정산을 하니 몇 푼 되지 않는다. 드래곤이 먹어대는 음식의 양을 보아 그 돈도 얼마 못 갈 것 같아 이 일이 성공하면 돈부터 마련해 달라는 소원을 빌어야겠다.

동거한지 한 달이 가까워지자 드래곤은 방에 똑바로 누울 수 없을 정도로 자라 대각선으로 몸을 비틀며 벽에 얼굴과 몸통을 기대고 있으니 매 순간 불편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숨을 쉴 때면 그동안 먹었던 음식물들이 위에서 엉망으로 썩는지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노란 가스가 방 안에 가득 찼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건만, 이 냄새와 가스는 시시각각 구역질을 하게 만들어 음식에 대한 욕구를 없애버렸다.

드래곤이 점심 식사를 거의 마칠 무렵 나의 눈앞에 노란 색의 새끼가 나타났다. 이로써 첫 번째 공은 마무리가 된 것이다. 소포를 받은 용태는 나에게 동의를 하고 이 일을 실천했다. 내 목숨이 다음 공을 뱉을 때까지 늘어난 대신 비밀을 지켜야 하는 사람도 한 명 늘었다. 그는 우정과 상관없이 자신의 목숨이 다할 때까지 입을 열지 못할 것이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무엇을 원하는가?]
[돈]

드래곤은 붉은 눈을 깜박이며 나를 잠시 쳐다본 후 입을 벌렸다. 어둡고 칙칙한 느낌이 드는 입구멍에서 나뭇잎이 떨어지듯 튕겨 나오며 내 앞에 쌓여가는 엄청난 양의 지폐들. 분명 이런 상황만 아니라면 부자가 되었다는 기쁨에 바닥을 뒹굴며 환호성을 크게 내지를 테지만, 기분이 기분인지라 가만히 보고 있자니, 새끼 드래곤이 지폐들을 장난감처럼 던지고 논다.

다음 날 아침에 계획의 다음 단계로 명단을 적기 시작했다. 앞으로 내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공을 건네주는 일을 반복적으로, 영원히 해야 하는데 생각 없이 하다가는 더 이상 건네줄 사람도 없는 상황이 나타날 게 뻔 하니까. 이 리스트를 완성하려면 용태와 드래곤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이다.

                                                     *

드래곤은 커지기를 멈췄다. 하긴 내 원룸이 이제는 누워 잘 공간 빼고는 움직이지도 못하게 꽉 찼으니까. 내 침대나 살림살이는 그의 기지개에 모두 부셔져 공동 쓰레기장으로 갔고, 나는 최소의 공간에서 밥을 먹고 잠을 잔다. 일전에 받은 돈으로 새 집을 사 이사하면 간단히 해결되겠지만, 드래곤이 동의하지 않아 어쩔 수 없다. 이제 나는 생각과 결정에 대해 그와 공유하게 되었다.

[부지 매입은?]
[오전에 완료했고, 건물 착공은 밤부터 한다. 나와 볼래?]
[아니, 좀 바빠서..돈이 얼마가 들든 상관없으니까 최대한 빨리 부탁한다. 밤샘 공사라도 해라]

용태는 현장의 소음 때문인지 수화기에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가 건물이 올라가기 전에 땅을 보여주고 싶다며 나오라고 했지만 그 순간 슬쩍 쳐다보자 드래곤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에 거절하고 통화를 마쳤다.

[너는..여타의 인간들과는 다르군]
[그래?]
[그들은 삶을 포기했다. 그런데 너는 꽤 끈질기다, 왜지?]
[살고 싶으니까]
[단지 그것 뿐?]
[너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내 목숨을 취할 수 있지만, 나는 그럴 수 없어]
[나를 죽이고 싶은가 보군]

드래곤의 웃음을 띤 듯한 말이 흘러들어오자 나는 머리 속을 깨끗이 비웠다. 우리는 입을 통해 말을 전달할 필요가 없어 의사소통이 쉽지만, 동시에 내 생각을 감출 수도 없기에 대답을 하지 않으려면 빗장을 단단히 걸어야 한다.

[분명한 건..너는 나를 못 죽여. 인간에게는 두려움이 적이지만, 너에게는 지루함과 권태가 그렇지]

오랜 세월을 살아온 노장답게 드래곤은 내 도발적인 발언에도 웃음을 띤 채 눈알을 굴리며 숨을 내쉬었다. 노란 연기가 코에 와 닿자마자 항시 비치해 두는 산소 호흡기를 입에 장착했다. 빠르게 대처하지 않으면 그 거북한 냄새에 위액이나 소화되지 않은 음식물을 게워내기 때문이다. 며칠 전에 방문한 내과에서 역류성 식도염이라고 진단을 받아 새롭게 준비한 방법이다.

[오랜만에 좋은 동거인을 찾았군]

내가 새로 짓는 건물에 대한 계획을 떠올리자 드래곤은 말을 멈추고 머리를 내게로 수그렸다. 용태가 며칠 간 발품을 팔아 선택한 대지는 인적이 드문 지방의 공터로 대략 만오천제곱미터다. 이정도면 서울의 올림픽 체조 경기장 하나는 너끈히 지을 수 있는 크기다. 나의 계획은 그 대지에 용의 육아 시설과 택배 회사를 지으려고 한다. 현재 5마리까지 새끼용이 탄생했고, 이들은 경기도 광주의 임시 건물에 옮겨져 자라나는 중이다.

[흠..나쁘지 않은데..]
[빨리 완공되어 새끼들을 옮기면 좋겠어. 그리고 택배 시스템이 자리 잡아야 공의 부화가 쉬워져. 지금처럼 한 명 한 명 발품 팔아 찾아서는 너무 느려]
[너는 충분히 잘하고 있다]
[그럴지도..내가 왜 자꾸 일을 벌이는지 궁금하지? 너는 인간에 대해 너무 몰라]
[그런가?]
[응. 인간은..강해, 너보다. 니 눈에는 두려움 때문에 움직이는 걸로 보여도, 인간은 다른 감정과 능력을 가지고 있어]
[예를 들면?]
[호기심, 적응력, 통찰력, 동정, 연민 등]
[동정? 넌 뭐에 대해 동정하지?]

드래곤은 내가 생각을 멈추며 다시 백지 상태를 만들자, 평가를 하듯 나를 바라보다가 머리를 앞 다리 위에 올리고 잠을 청했다. 그는 사람보다 오래 살아 무기력한 면이 있다. 계약이 해지 되면 다음 사람을 찾고, 그 마저 사라지면 인류가 다 없어질 때까지 반복할 것이다. 내가 이 무한 사이클에 참여한 이상, 나는 평범할 수 없고, 그렇다면 언제 죽게 되든지 간에 최선을 다하고 싶다.

                                                   *

지난주에 배달한 다섯 번째 공까지 우체국을 통해 소포로 전달하다보니 당사자가 못 받는 엄청난 문제가 발생하여 하마터면 죽을 뻔 했다. 그래서 용태에게 대지 구입과 건물 착공을 재촉했다. 그 덕에 그는 발에 땀나도록 뛰어 일주일 만에 이 모든 일을 해냈다.

[사람 찾는 일은 누가 해?]
[심부름센터]
[보안이 철저할까? 걱정 안 돼?]
[그런 부분이 걸리기는 하지만..지금으로썬 다른 방법이 없어. 니가 최대한 빨리 완공한 후에 다시 맡아줘]

용태는 이틀 뒤에 다시 연락했다. 조립식 건물이 현재로는 최대한 빨리 지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결정하고 그 지역 건축 회사를 고용해 짓는 중이라고 한다. 아마도 다음주 내로 기자재까지 완벽하게 세팅된 육아 공간과 사무실이 마련된다고 하니 마음이 놓였다. 그의 말대로 사람을 찾고, 적합한지에 대해 결정을 내린 후, 공을 전달하고 비밀이 유지될 수 있도록 사후 관리를 하는 걸 심부름센터에 맡기기에는 입맛이 씁쓸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공이 제대로 부화될 때 마다 한 가지씩 소원을 들어주기 때문에, 드래곤의 도움을 받아 심부름센터 직원을 우리 일꾼으로 편입시킬 계획이다.

[나를 그런 용도로 쓸 생각을 하다니..이젠 내가 무섭지 않은가보군]
[아니, 여전히 두렵고 무서워]
[그들을 어떻게 하길 바라지?]
[죽이는 건 곤란해. 약간의 겁만 줘]

여섯 번 째 공을 전달할 인물의 인적사항과 문제가 담긴 파일을 넘겨받자 나는 용에게 부탁했다. 드래곤을 올려다보니 말은 툴툴거려도 눈빛이 반짝거렸다. 어느새 나와 함께 인간사에 끼어드는데 즐거움을 느끼고 있었다.

                                                    *

계획대로 육아실과 사무실이 마련되었다. 나는 드래곤을 만난 이래 처음으로 서울을 벗어나 완성된 결과물을 보러갔다.

[직원들은 내일 도착할거야, 잘 부탁한다]
[알았어. 그나저나 자주 좀 나와라. 햇빛을 얼마나 안 봤기에 허옇게 떴냐? 유령 같다]

우리는 용태의 사무실로 내정된 방에서 커피 잔을 앞에 두고 서류 점검을 시작했다. 직원들은 새끼용에게 밥을 먹이고 씻기며 잠을 재워줄 사육사와 컴퓨터 네트워크를 통해 공을 받을 인물들에 대한 서류 정리를 할 사무직원으로 나누어 배치할 예정이다. 또한 생산된 공을 포장하여 책임지고 당사자에게 전달할 택배 직원으로는 심부름센터 사람들을 뽑을 것이다. 이들은 실시간 네트워크를 통해 당사자가 어디에 있는지 전송받아 움직인다.

[이제부터는 기업화하는 거니까 인물 선택에 주의해야해]

인간의 심성 중 가장 활용하기 좋은 게 두려움이다. 두려움은 죄악의 시작이고, 이것은 특히 타인이 알아서는 안 될 어두운 비밀을 지녔을 때 더욱 진가를 발휘한다. 상상해보라. 어느 날 배달된 소포에서 자신만이 아는 절대 비밀이 적혀진 종이를 발견했다면, 순간적으로 고민을 할 것이다. 지시사항대로 공을 부화시켜 비밀을 유지할지, 거부하여 모든 게 만천하에 공개될 것인지. 그 비밀의 파장이 크면 클수록 공의 부화확률은 높아지고, 나의 죽음도 미루어진다. 용태를 처음 끌어들일 때 그가 의도하진 않았으나 결과적으로는 죽여 버린 친구에 대해 언급했다. 아무도 본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믿었던 그 일을, 오로지 나만이 목격한 그 일을. 용태의 눈에 서린 감정들이 가라앉을 시간을 준 후, 이 일에 끌어들였다. 인간의 두 번째 심성, 호기심. 그는 그 감정에 무릎을 꿇었다.

[이번엔 누구야?]
[국회의원 박춘식. 김 전 대통령의 시해 사주범]

용태의 보고에 고개를 끄덕인 후, 차가워진 커피를 단숨에 들이켜고 사무실을 나섰다. 이 모든 일의 모태가 되는 드래곤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여왕개미와 같은 역할을 하는 그가 내일 공을 뱉을 예정이고, 그 전날은 언제나 신경이 예민해져 배고픔을 빨리 느끼므로, 이렇게 오래 집을 비우면 곤란해진다. 하여 서둘러 차를 운전해 바람처럼 서울로 돌아갔다.

[오늘은 새로운 걸 사왔어. 맥시칸 음식이야]
[그래?]

현관문을 열며 외치자 드래곤이 눈을 반짝이며 웃었다. 그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주인을 따르는 애완견처럼.

                                                   *

계절이 셀 수 없을 만큼 바뀌면서 사람들 사이에 묘한 질문이 돌기 시작했다. “용택배 소포를 받은 적 있어?”  받은 이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는 질문에 대한 답을 목구멍으로 삼켰다. 소포를 받았다는 뜻은 공개하지 못할 비밀이 존재한다는 의미기 때문에, 그들은 화제를 전환했다.

또한 온라인에서는 용택배를 받은 이들끼리 동호회를 결성해 “용택배 모임” “소포를 받은 사람들” “비밀을 공유하자” 등이 포털에 생겨났다. 그들은 익명성이 보장됨에 기뻐하며 자신이 언제, 어떻게 소포를 받았는지, 공을 만졌더니 이렇게 되더라는 체험을 꼼꼼히 올렸다. 그들 중에는 용택배의 움직임을 주시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용태는 그런 사정을 모니터하여 매주 나에게 알려주었다. 그 역시 소포를 받은 경험이 있는지라 온라인, 오프라인 모두에서 활발히 활동할 수 있었다.

[일이 너무 커지는 거 아니냐? 조만간 9시 뉴스에서 밀착 취재라도 할까 겁난다]

그의 시답지 않은 농담에 피식하며 쳐다보았다. 우려와 걱정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이제와 멈추기에는 늦었다. 나는 마음에 품고 있던 카드를 슬쩍 내밀었다.

[사람이 움직이려면 뭐가 필요한지 아니?]
[글쎄..]
[동기]

용태는 전혀 이해하지 못한 눈치다. 그런 그를 잠시 바라보다가 씩 웃고 일어났다. 이 일은 내가 직접 할 예정이라 그에게 더 이상의 설명을 하지 않고 사무실을 나왔다. 외부로 통하는 문을 열자 낙엽이 발치로 굴러왔다. 내가 드래곤만 바라보며 살아가는 동안 계절은 자신의 소임을 다하려고 살아있는 생물들에게 월동준비를 시키고 있었다. 그 낙엽들을 밟으며 걸어가자니 어떤 일이든, 무슨 인연이든,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와의 기묘한 동거 역시.

                                                  *

[인간, 지겨운가?]
[아니, 왜?]
[요즘 너의 생각을 읽기가 어렵다. 마음을 비우는 시간이 늘어가고 있다]
[일종의 명상이야. 정신 수양]
[그래?]

드래곤은 몇 번째인지 모를 공을 바닥에 뱉은 후, 크게 숨을 내쉬며 자신의 생각을 전달했다.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으나 두려워한다. 혹시라도 내가 죽을까봐.

[지겨운 건 너 아니야? 만약에..내가 이 세상에서 없어지면 넌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잖아. 부화시켜줄 사람에게 공포와 두려움을 주고, 계약을 하고, 감시하는..]
[그래]
[내가 없으면..너도 없어. 이 모든 건 내가 너에게 준거야]

드래곤의 노란 눈은 성난 기색 없이 나를 쳐다보았다. 내 진의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인지, 혹은 내가 진실이라고 믿고 말한 사실에 대해 충격을 받았는지 나는 모르지만 그는 확실히 달라졌다. 이제 부화에 대해 전적으로 맡기고 잠을 자는 시간이 길어졌으며, 지금의 안정과 평화를 좋아한다. 그의 생애동안 이토록 평온한 적은 없었을 것이다.

[맞다. 이렇게 지낼 수 있다는 게 좋다]
[넌..이제 더 이상 드래곤이 아니야]

그는 내 마지막 말에 어떤 반응도 없었지만 그것으로 나는 충분했다. 그의 침묵은 긍정이니까.

[좀 있다 보자]

나는 수면의 세계로 빠지려는 드래곤의 몸을 한 번 쓰다듬은 뒤 현관문을 열고 나섰다. 문을 닫기 전 뒤를 돌아다보았을 때 그의 거대한 몸이 부르르 떨렸다.

                                                 *

12월이 막 시작되는 날이 오자, 사람들이 시청 광장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온라인, 오프라인으로 전달된 말을 반신반의하면서도 그들은 시간을 지키기 위해 전철을 타거나, 자동차를 몰았다. 또한 몇 몇의 공중파 방송들도 촬영을 하기 위해 광장 한 쪽에 부스를 마련하는 중이다. 나는 용태와 함께 시청 앞에 설치한 간이 천막에서 이 모든 일들을 지켜보고 있다.

[그 말이 사실이야?]
[응]
[너..]

용태는 눈이 커지며 나를 쳐다보았다. 좀 더 자세한 설명이 듣고 싶겠지만 나는 가스난로 앞에서 눈을 감고 주머니 속의 공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집에 있을 드래곤에게 생각을 보냈다.

미안, 공을 부화하지 못했다.

아마도 몇 초, 몇 분 혹은 몇 시간 안에 드래곤은 내가 있는 곳에 나타날 것이다, 나를 죽이기 위해. 눈을 뜨자마자 천막을 나왔다. 당황하여 나를 막는 용태를 밀치고 광장 중앙에 마련한 단상 위에 올라가 하늘을 보며 누웠다. 오늘따라 끔찍하게도 맑은 하늘은 구름 한 점 없다.

내 주변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수군거리며, 눈치를 보며 어색하게 자리를 잡았다. 몇 만의 사람들. 그들이 모두 택배를 받은 사람들은 아니다. 애초에 받은 이들만 오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호기심은 관련 없는 이들도 나타나게 만드는 법이다.

[괴물이다!]

누군가가 하늘을 향해 외쳤다. 모두의 부산한 움직임과 비명이 귀로 전달되었지만 나는 똑바로 내 위의 하늘만 보았다.

[왜..어째서?]

드래곤은 예상보다 빨리 내 앞에, 내 몸 위에 나타났다. 노란 눈은 의아함을 담았고 내 몸을 건드리는 발톱은 미세하게 떨렸다.

[니 삶이 좋아?]
[내 삶?]
[그래, 니가 살아가는 이유는 오로지 자손의 번성이잖아. 넌..너는 대체 뭐지? 신의 꼭두각시인가?]

드래곤은 대꾸하려는지 소리를 보내다가 멈췄다. 그로써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부분. 혼란과 흔들림, 괴로움으로 거대한 날개를 흔들었다. 광풍이 웅성거리는 사람들에게 몰아닥쳐 물결이 퍼지듯 쓰러진다. 그들이 내는 엄청난 잡음에 드래곤이 정신을 차렸다.

[너..삶을 포기하려는거군. 너 역시 똑같은 인간이다]
[그래. 죽으려는 건 맞는데..그 이유가 달라. 너를 위한 것도 상당 부분 있다]
[나를?]

사람들은 의아할 것이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온 드래곤이 날개를 퍼덕이기만 할 뿐 아무 행동도 하지 않으니. 그들은 우리가 머리 속으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상황임을 모르기 때문에 슬금슬금 단상으로 다가왔다.

[내가 어느 날 죽는다면..너는 혼자 남겨져. 그 순간을 생각해봐. 지금도 넌 나를 기다리고 나와 대화하며 평온하게 사는 걸 행복하게 생각하잖아. 이 곳으로 오면서 왜 화가 났는지 생각해보면 내 말 뜻을 알거야]
[난..더 이상 드래곤이 아니라는..]
[그래. 넌 감정을 지닌 인간이야. 드래곤은 흉포하고 목적만을 따르지만 너는 아니야. 너는 나를 생각하고 나와 함께 웃고 나를 믿는 사람이야]
[나는..나..는..]

크르르르. 크르르르.

드래곤의 입에서 귀를 울리는 괴성이 나왔다. 처음 어둠 속에서 그를 만났을 때 들은 두려움을 일으키는 짐승의 소리. 단상에 막 올라오려고 다리를 걸치던 몇 몇 사람이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어떤 여자는 실신하고, 또 어떤 남자는 귀를 막았다. 드래곤이 하늘을 향해 처음으로 불을 내뿜었다. 공중 높은 곳까지 솟아오르던 불씨들이 다시 바닥으로 향하자 불꽃놀이의 한 가운데 서 있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없으면..너도 없어]

그의 발톱이 가슴을 누르자 셔츠 위로 피가 배어나왔다. 그가 진심으로 나를 죽이려고 했다면 가차 없이 박았을 테지만, 아직도 머뭇거린다. 그 때 멀리서 소리가 다가왔다. 비행기의 엔진 소리 같다. 드래곤이 나보다 먼저 알아채고는 땅이 울릴 정도의 괴성을 내질렀다. 지진이 나는 듯 공기의 흐름이 바뀌며 주변의 건물과 나무들, 시설들이 움직인다. 사람들은 날아가지 않으려고 서로를 붙잡고 바닥에 엎어졌으나 반 이상이 허공에 떴다가 몇 미터쯤 뒤로 밀려 나동그라졌다.  

[내 삶의 목적은 공이다. 공이 부화되지 않으면 나는..내 존재는 사라져야 한다]

드래곤은 나를 바라보며 말을 멈춘 후 길고 높은 소리를 내며 내 가슴에 생체기를 냈다. 그리고는 시야에 나타난 비행 편대를 향해 날아올랐다. 내 상반신은 솟구쳐 오르는 붉은 피의 따뜻함에 부르르 떨린다. 흐려지는 의식너머로 의사에게 들은 말이 생각났다. 역류성 식도염이 진행된 식도암 1기. 계약에 따라 병이야 감쪽같이 사라지겠지만, 나는 인간이다. 드래곤이라는 괴물만 쳐다보는 게 아닌, 나도 보통 사람처럼 살다가 언젠가 자연스럽게 죽고 싶어졌다.  

그 날 병원을 나서면서 곰곰이 생각했다. 어느새 나를 기다리는데 익숙해진 드래곤. 그는 더 이상 드래곤이 아니었다. 그는 인간이 되었다. 공포와 본능이 아닌 인간의 감정을 지닌 사람이었다. 시간이 갈 수록 나에 대한 애정이 깊어져 그가 나를 바라볼 때면, 내 생각을 들여다볼 때면, 생기가 넘치고 행복해했다. 만약 내가 죽어 또 다른 누군가를 만나야 한다면 이제 그는 좌절을 경험할 것이다. 그 후엔 지치고 고단한 마음만이 남아 황폐해질 것이다. 그래서 나는 변해버린 그를 이용해 이 계약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졸음으로 감기는 눈을 부릅떠 올려다본 하늘엔 드래곤과 비행 편대들이 격렬히 싸우고 있다. 그의 몸에 하나둘씩 늘어나는 상처들이 보인다. 그가 가끔씩 내 쪽을 내려다본다, 나를 살피고, 걱정한다.

그가 무엇을 선택할까? 사명을 다하기 위한 나의 죽음? 나를 살려두는 대신 그의 존재가 사라지는 계약 파기?

[너는 인간에 대해 너무 몰라]
[그런가?]
[응. 인간은 강해, 너보다. 니 눈에는 두려움 때문에 움직이는 걸로 보여도, 인간은 다른 감정과 능력을 가지고 있어]
[예를 들면?]
[호기심, 적응력, 통찰력, 동정, 연민 등]
[동정? 넌 뭐에 대해 동정하지?]
[너..드래곤. 너의 불행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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