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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어느 그믐

2006.01.19 12:3401.19

...에 그러니까 거울 마감에 쫓겨 허겁지겁 기어코 올리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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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그믐


…(전략)오크가 주적으로 나오는 이야기는 특히 왕국의 북부 지방에 흔하다. 아무래도 오크들의 고향인 대평원과 가까우니 그런 모양이다. 이야기는 간단하다. 준수한 외모를 갖춘 영웅이 사악한 오크들을 무찌른다는 내용이다. 이는 주민들의 오크에 대한 뿌리깊은 두려움을 반영하고 있다…(후략)


-태바다 무라타수의 <동화에 관하여> 중 발췌





  어두운 밤. 그믐이었다. 달이 사라진 밤엔 희망이 신인 산캐스롤리의 축복이 줄어든다는 전설이 있다. 하지만 여기 지나가는 여행자 한 쌍은 그 이야기를 모르거나, 알더라도 신경 쓰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그들은 익숙한 듯 어두운 숲 속을 그다지 어렵잖게 헤쳐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꽤 먼 거리를 이동한 모양이다. 키 작은 쪽이 걸음을 멈추고 숨을 몰아쉰다. 머리까지 눌러쓴 로브엔 나뭇잎이나 도꼬마리, 도깨비바늘 등이 잔뜩 붙어있었다.



  "저, 저기, 잠깐만 쉬었다 가자…."
  멈춰선 자가 높고 가느다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고, 동행인이 침묵으로 동의하자 옆에 있던 바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들고있던 꽤 큼지막한 보따리를 내려놓은 그는 답답해서 그런지 후드를 벗었다. 자그마한 키, 비교적 긴 얼굴에 뾰족한 귀와 툭 튀어나온 광대뼈, 그리고 눈초리가 휙 올라간 어찌 보면 소름끼칠 수도 있는 얼굴을 보아하니 분명히 엘프다. 하지만 그녀는 인간의 기준으로 봐도 예쁘다고 여길 법한 모습을 지닌 아름다운 여성 엘프였다. 그녀는 뭔가 불안한 듯 손을 모아 쥐고 손가락을 계속 움직였다. 겁먹거나 초조한 애들이 흔히 그러는 것처럼, 손가락이 정신없이 움직인다.
  "좀 진정해."
  키 큰 자가 유창한 엘프어로 말했다. 그 자는 여전히 후드를 눌러 쓰고 있어서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를 들어보니 남자, 그것도 인간 남자인 듯 하다. 등에는 여자의 것보다 훨씬 커다란 짐을 메고 있었다.



  "하지만, 꼭 이런 길로 가야돼?"
  "응. 지름길이니까. 뭐, 밤중에 숲 속 지나는 것도 익숙해졌잖아."
  "익숙해졌어도 싫어. 엘프는 밤눈이 안 좋단 말야."
  남자는 소리 없이 웃었다.
  "그래그래, 우리 공주님. 그 소린 서른 번도 더 들었겠다. 인간이라고 특별히 밤눈 좋은 건 아니야. 이제 슬슬 발걸음을 옮기셔야지?"
  "응."
  엘프는 마지못하다는 듯 일어났지만, 일단 일어나자 빨리 걷기 시작했다. 한시라도 빨리 숲을 빠져나가고 싶은 듯 하다. 한 동안 사각거리는 소리와 풀벌레 우는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꽤 오랫동안 걷기만 하자 엘프는 심심해졌는지 그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있잖아, 로벤."
  "응?"
  "이번 여행이 끝나면 어디로 갈 꺼야?"
  "여러 번 말했잖아. 오크들이 없는 곳이면 어디라도 상관없다고. 여기 오크놈들을 무찌르고 얻은 것들도 있고. 이 정도면 평범하게 살아가는 덴 문제없을 거야."



  쉽지 않았다. 싸움을 위해 태어난 거들이라고도 할 수 있는 오크들은 암컷들조차도 근육질에 간단한 무장을 하고 있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그들의 조잡한 서식지를 찾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둘 밖에 안 되는 인원으로 공격하기 위해선 그 일부가 잠시 그들의 소굴을 떠났을 때를 노려야했다. 남아있는 숫자는 상대적으로 적었고 그들을 쓰러트리고 빠져나오는 것은 한결 수월했다. 남자와 엘프가 들고있는 짐은 그 위험을 무릅쓴 행동에 대한 대가였다. 남자는 공상에 빠졌다.



  많았다. 무리가 줄어든 순간을 노리긴 했어도 그들은 둘이었고, 적은 최소한 셋 이상이었다. 오크들은 어리석지만 강한 힘을 갖고 있었다. 그들이 주로 사용한 전략은 이런 것이었다. 몇 안될 경우 남자가 오크 못지 않은 완력으로 녀석들을 휘저어서 혼을 빼 놓은 틈을 타서 엘프가 마법으로 다수의 적을 한 번에 쓰러뜨렸다. 그녀는 나이는 어렸어도 마법을 시동어 없이 사용할 수 있는 무음(無音)의 경지에 이른 솜씨좋은 마법사였다. 오크들이 너무 많을 경우, 남자는 독연탄을 사용했다. 비싸고 구하기 어려운 물건이었기에 아껴 써야했지만, 효과는 탁월했다. 가끔은 죽은 줄 알았던 녀석이 갑자기 발목을 물어뜯으려 한 적도 몇 번 있었지만. 오크의 송곳니는 무척 커서 위협적이었다. 그 사악한 생명체들의 피냄새는 비린 정도가 아니라 역겨운 수준이었다. 게다가 오크의 피는 기분 나쁘게도 붉은 색보다는 검은 색에 가까웠다. 옆에 정말 검은 것이 놓여있어야 그것이 붉은 기를 띄고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정도였다.



  "그럼 이 나라 말고 딴 나라로 가."
  엘프가 때를 쓰듯 말하자 남자는 공상에서 빠져나왔다. 그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한 마디 덧붙였다.
  "기왕이면 푸른 들판으로 가자."
  "어? 하필이면 왜?"
  "음, 공국들은 안 좋은 소문이 많잖아. 전쟁날 수도 있고. 왕국으로 가면 네가 그다지 좋은 대접을 받지 못할 거야. 대평원보다 북쪽인 곳은 논할 가치도 없고. 푸른 들판이 제일 나아. 하플링들은 순하잖아."
  "웬만하면 호비트라고 불러."인간이 말했다. "호비트들도 지적을 잘 안하는 편이라 다들 모르지만, 그게 정확한 명칭이고 예의야."
  엘프가 툴툴거렸다.
  "헷갈려. 너랑 대화할 땐 그냥 하플링이라고 부를래."
  "마음대로 해."
  남자는 개의치 않는 다는 듯이 씩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잠시 침묵이 이어졌지만, 나이가 어려 보이는 엘프는 심심한 걸 못 참는 모양이었다.
  "그 돈으로 뭘 할까?"
  "먹고살아야지."
  "그런 거 말고."
  "그럼 뭐?"
  "구체적인 거. 그러니까, 소를 산다던가, 뭐 하플링 전통의 굴집을 산다던가……."
  "난 일단 가 본 다음에 생각하려고 했는데."
  "뭐야, 무책임해. 생각 좀 해보자. 걷는 거 빼면 할 일도 없는데."
  엘프는 잠시동안 생각을 하더니 다시 재잘거렸다.
  "집은 평범하게 짓자. 아담하고 가정적인 분위기가 나는 예쁜 집으로. 마당에는 예쁜 꽃도 많이 심고…푸른 들판산(産) 꽃들이면 되겠지? 장미같이 가시 난 거 말고 팬지처럼 귀여운 걸로 심자. 근처에 우물이나 냇가가 있으면 좋겠는데. 음, 푸른 들판은 인구에 비해 국토가 넓은 편이지? 설마 끼어 들 자리가 없을 것 같진 않고…."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는 보따리를 귀여운 동물이라도 되는 양 꼬옥 끌어안으며 종종 걸음으로 달렸다. 남자는 미소지었다. 살의로 가득 찬 오크 여럿을 단숨에 쓰러트릴 수 있는 숙련된 마법사이지만 이런 얘기를 하는 그녀는 그저 평범하고 귀여운 아가씨처럼 보였다.
  "토끼도 키우자. 난 토끼가 좋더라. 잡아먹진 않을 꺼야. 강아지도 아주 어린 녀석 구해서 토끼들이랑 같이 키우면 나중에 뭐 물어뜯고 그러지는 않겠지? 푸른 들판의 개 하면 일바리가 유명하니까 한 마리 키워야지. 집안 가구들이야 이웃들 집을 참고해서 들여놓으면 될 거야. 아, 너 무슨 일해서 먹고 살 거야?"
  "너는?"
  "가정 주부."
  인간이 슬쩍 돌아보자 그녀가 뾰로통하게 한 마디 했다.
  "내 평생 소원이야."
  남자는 피식 웃더니 잠시 후에 말을 꺼냈다.
  "음…난 작은 과수원이나 농사. 그 쪽은 내가 어렸을 때 많이 해봐서 좀 알고 있거든. 정 안되면 일꾼 노릇이라도 하지. 인간 일꾼을 싼값으로 쓸 수 있으면 호비트들은 좋아할 거야. 네 말대로 그쪽 사람들은 그다지 계산적이지 않은 편이니까 너무 혹사시키거나 착취하지도 않겠지."
  "그럼 먹고사는 일은 문제없겠네."
  "생각만큼 쉽지 않을 지도 모르지만, 뭐 다들 그렇게 살아가는 거 아니겠어. 어쨌든 이 돈 잘 아끼고 열심히 일하면서 쓸데없는 욕심 부리지만 않으면 우리 둘이 사는 데에는 별 다른 지장 없을 꺼야."
  "그거 말인데 말이야…."
  어둠 속이라 잘 보이지 않았지만 엘프의 창백한 얼굴에 잘 익은 복숭아처럼 붉은 기운이 퍼져나갔다.
  "…아이는…몇이나 낳을까…?"
  남자는 한 동안 대답을 하지 않았다. 잠시 후에 그가 뭐라고 한 마디 했지만, 작아서 들리지 않았다. 그녀가 되물었다.
  "뭐라고?"
  "…둘."
  "응?"
  "둘 정도면 적당하겠지. 우리 사정 봐가면서…아니, 아니, 반드시 둘 이상이어야만 해."
  "왜?"
  "…하프 엘프가 의지할 것이 자기 형제자매 말고 어디 있겠어."
  엘프의 얼굴이 침울해지자 그가 황급히 덧붙였다.
  "뭐, 하지만 걔들도 푸른 들판에 산다면 별 문제 없을 거야. 호비트들에게 다른 종족은 순수혈통이건 혼혈이건 다 그냥 꺽다리일 뿐이니까."
  그녀는 제대로 들은 것 같지 않았다. 잠시 뒤 제 딴에는 당찬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나, 오래 살 거야. 그래서 내 애들을 지켜 줄 거야. 그리고 너도. 너도 오래 살아야돼."



  인간은 쓰게 웃었다. 비록 큰 차이가 있는 건 아니지만, 종족의 특성이란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그녀가 그의 임종을 지키게 될 것이다. 그녀가 더 어린데다가 엘프의 수명은 짧으면 10년에서 길면 20년 정도 인간보다 더 기니까. 그가 죽으면 그 충격으로 그녀도 오래 못 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뒤이어 그 나이쯤 되면 누군가의 죽음에 익숙해질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지금 생각할 필요는 없는 일들이다.



  "그런 건 나중에 생각하자. 지금은 희망에 부풀어오를 때야."
  인간이 짐짓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엘프가 작은 소리로 수긍을 했다. 끝없어 보이던 나무들의 장벽이 조금씩 엷어지는 듯 하더니 갑자기 평지가 나왔다.
  "이것 봐, 르엘, 숲이 끝났어. 이제 그냥 길을 따라가면 돼."
  "아, 좋다. 어두운 숲은 정말 싫어. 기분 나빠."
  "푸른 들판 쪽으로 가자고 했지? 어디…."
  남자가 갑자기 쓰러졌다. 엘프가 비명을 질렀다.
  "로벤?! 무슨…."
  그녀도 뭔가가 덮치는 바람에 쓰러지고 말았다. 추가 달린 그물이었다. 순간 여기저기서 시끄러운 발소리와 함께 공용어로 뭔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고개를 들려 애를 쓰는 동안 주변이 갑자기 밝아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때 누군가가 느리지만 강하게 그녀의 머리를 눌렀다. 엘프는 째지는 목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그녀와 달리 남자는 주변에서 들려오는 외침을 이해할 수 있었다. 붙잡았다, 못 도망가게 해, 한 건 올렸군, 네놈들은 이제 끝이야, 애들 불러모아 등이었다. 걸걸하고 굵은 목소리였다. 오크! 그녀와 마찬가지로 그도 누군가가 머리와 몸을 누르고 있어서 움직일 수 없었다. 오크 한 명 정도라면 어떻게 뿌리칠 수도 있었지만 다리에 볼라가 걸린 것 같았다.



  '젠장! 잔당들인가?'
  그는 허리를 더듬어 무기를 찾으려고 했다. 그 때 누군가가 갑자기 그의 고개를 잡아당겨 올렸다. 주변이 환해져서 똑똑히 보였다. 다수의 무장한 오크들이 지금 막 불을 붙인 듯 한 횃불을 들고 그들을 둘러싸고 있었다. 저 쪽에서 그녀가 포박된 것이 보였다. 그녀를 결박하고 있는 것은 다른 녀석들에 비해 날렵하게 생긴 오크였다. 그는 악을 쓰면서 발버둥쳤지만 그를 붙잡고 있는 자는 그의 귀를 칼로 찌른다던가 하는 것도 생략하고 강하게 억누르고만 있었다. 그래도 그는 절망에 빠져서 발버둥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안돼. 안돼. 이렇게는 안돼. 요란한 소음이 들렸다. 누군가가 그들의 보따리를 뒤집은 모양이다. 동전과 잡동사니들이 굴러다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상관없었다. 지금 당장은 그녀와 탈출하는 게 더 중요했다. 하지만 어떻게…?



  그 때였다. 그를 붙잡은 자가 그를 일으켜 세웠다. 엎어져있을 땐 잘 몰랐지만 그를 포박하고 있던 오크는 둘이었다. 젠장! 그 때 횃불이 아직 미치지 않는 곳에서 누군가 걸어오는 것이 어렴풋이 보였다. 그러더니 갑자기 쓱 하고 그 거대한 형체가 드러났다. 인간과 같은 몸에 소의 머리를 한 2미터 반쯤 되는 형상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자는 머리와 가슴에 피로 얼룩진 붕대를 잔뜩 감고 있었다. 그는 헛 하는 소릴 냈다. 어린애 주먹만한 검은 눈동자가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엘프는 와들와들 떨면서 다른 것은 볼 생각도 하지 않고 오직 남자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황급히 마법을 쓰려고 했으나 어느새 오크들이 손을 포박하고 재갈을 물렸다. 그녀는 대마법사들이나 가능한 무동(無動)의 경지엔 이르지 못했다. 어쩌지? 어쩌지? 어쩌지? 남자가 갑자기 믿을 수 없을 만큼 엄청난 힘으로 오크들을 밀쳐내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는 손에 든 짧은 검을 그 거대한 형상의 가슴을 노리고 내 찔렀다. 엘프는 순간적으로 그가 풀려나리라 기대했지만 곧바로 비명을 질렀다. 그의 무모한 공격은 그 부상자가 그의 손목을 붙잡는 것으로 간단하게 막혀버렸다. 남자가 뿌리친 오크들이 무기를 들고 달려들었지만 남자는 기절했는지 손목을 소머리에게 붙잡힌 체 힘없이 늘어져버렸다. 여자는 고개를 떨구었다. 흐느낌과 함께 눈물이 흘러내렸다. 재갈 때문에 그녀의 울음소리는 끅, 끅, 하며 죽어 가는 생명체의 마지막 숨소리처럼 들렸다.



  어떤 석조 건물의 사무실. 한 사내가 젊고 잘생긴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정신 사납게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창문 쪽엔 늙수그레한 인간 하나가 무장을 한 체 창 밖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덕분에 그는 부하가 벌이는 도무지 고치질 못하는 버릇을 보지 않을 수 있었다.
  "…결국 솔께서 보우하사, 범인들은 간신히 붙잡았습니다, 대장님."
  "음."
  "경비대의 빠른 행동으로 증인이 기적적으로 살아있던 것이 다행이었지요. 인명피해는 이미 일어난 후입니다만."
  "그거야 이미 알고 있어."
  "…슬픈 일이지요. 단란한 가정이…."
  "됐어, 아마루. 말하지 않아도 돼."
  중년 사내가 짜증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그 때 문이 열리더니 경비병 하나가 들어왔다. 그는 뭔가 보고하려 했지만 그러기도 전에 경비대장이 먼저 말을 꺼냈다.
  "들여 보네."
  유별나게 커다란 문이 열리더니 머리와 가슴에 붕대를 감은 덩치 큰 소머리가 들어왔다. 대장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체 여전히 창문을 쏘아보고 있었다. 소머리가 커다란 의자를 방 한가운데에 놓인 탁자 쪽으로 끌어당겨 앉자, 젊은 사내도 그 옆에 앉았다. 덩치는 부상 정도가 심한지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정의의 실행자이신 솔의 축복을. 몸이 불편하신 가운데 이 곳에 왕림해주시다니, 고맙구만."
  신의 가호를 비는 것 치곤 다소 불경한 태도로 대장이 말을 걸었다.
  "자, 이제 자총지총 사정을 좀 들어보실까? 응?"
  여성 우란이 차분히 말을 꺼냈다.
  "말투는 여전하시군요, 대장님."
  "미안해. 이 바닥에 오래 있다보면 그렇게 돼. 자네는 일찌감치 때려 친 걸 다행으로 여기게, 파랑 무라타수. 아무리 우란이라고 해도 여자가 오래 할만한 짓이 아니야. 이런 젠장맞을 일도 가끔 벌어지니 말일세."
  파랑은 빙그레 웃으려 했으나 붕대 때문에 잘 되지 않았다. 말이나 제대로 나와서 다행이었다.
  "그나저나 엄청난 힘의 소유자였습니다. 오크 경비원 두 분이 붙잡고 있는 걸 뿌리치다니, 제가 다 놀랄 지경이었죠. 하지만 그 불쌍한 사람은 절보고 까무러치도록 놀라더군요. 실제로 기절해버렸고. 뭐 얼굴은 확실히 확인했습니다만."
  "무라타수씨, 그런데 지금 괜찮긴 하신 건가요?"
  아마루가 그녀의 상반신을 훑어보며 말했다.
  "가슴과 얼굴은 심하게 다치셨다고…."
  "흥, 멍청한 범죄자놈들이 자주 하는 어이없는 실수야."
  중년 사내가 말했다.
  "자신들이 증인을 한 사람도 안 남겨놨다고 확신하지. 하지만 나중에 법정에 끌려갔을 때 분명히 심장이나 허파에 구멍이 난 줄 알았던 우란이 멀쩡히 살아서 나타나는 거야. 우란들을 점잔이나 빼는 바보들이라고 생각하고 그 악착같은 생명력을 얕본 결과라고."
  대장은 한숨을 쉬었다.
  "정말, 자네들은 죽여도 안 죽는다니까."
  파랑은 그 나름대로의 안도의 표현을 감사하게 받아들이기 위해 한 번 더 웃으려고 노력했다. 결국 그녀가 얼굴근육의 통증과 붕대에게 항복했을 때 느닷없이 문이 큰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리고는 날렵하게 생긴 오크 하나가 휙 뛰어들어왔다. 주위를 쓱 훑어본 그는 인사도 하지 않고 탁자 위에 쿵 하고 걸터앉았다.
  "기별정도는 좀 보내고 오시지? 그루 경사."
  책망하는 듯한 말투였지만 대장은 익숙하다는 듯이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그루도 익숙한 듯 코방귀를 한 번 뀐 다음 파랑과 대장의 중간쯤 되는 지점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뭐랬습니까? 그놈들 맞다니 까요. 흥, 숲 속에서 조용히 처리했으면 훨씬 더 편했을 텐데 말입니다. 멍청이들이 이 그루 소대가 숨어있는 줄도 모르고 숲으로 들어왔으니, 쫓는 건 일도 아니었지요. 석궁 한 방 먹여주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습니다."
  "하지만 경사님, 이 곳은 법치국가입니다. 그렇게 쉽게 죽일 순 없습니다. 제가 왜 필요했겠습니까?"
  "그러니까 중상자분을 억지로 끌고 나오지 않았어도 되잖으냐, 이 말입니다."
  "됐네, 그루, 그 삐뚤어진 입 좀 다물으라고. 어쨌든 잡았으니 된 거잖아."
  대장의 면박에 오크는 뭐라고 투덜거리다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아, 그리고 방금 솔의 성기사단원 하나를 만나고 왔소. 판결이 나왔다던데."
  아마루가 고개를 흔들었다.
  "빠르네요."
  "이만큼 빌어먹을 정도로 끔찍한 사건도 드무니까."
  대장이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판결은?"



  "그래서 판결은?"
  눈을 깜빡이며 자신의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애인을 보며 아마루는 한숨을 쉬었다.
  "흐응."
  그가 건넨 무언의 대답에 별 의미 없는 콧소리로 대답을 대신한 그녀는 다시 물었다.
  "걔는? 그 교육 잘못받은 엘프꼬마는? 걔도 효수 돼서 저자거리에 전시됐어?"
  "…유족들의 강력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사형은 면했어. 어쨌든 미성년자니까. 대신 소년원도 뭐도 아닌 감옥에서 무기징역…이라는 판결을 받을 뻔했는데,"
  그는 또다시 한숨을 쉬었다.
  "자기 애인이 사형선고 받는 것을 듣고 정신을 잃더군. 그리곤 두 번 다시 깨어나지 않았어. 나중에 알고 봤더니 임신 중이었다나."
  "뭐, 아기만 불쌍하네. 그 년놈들은 하나도 안 불쌍하지만 말야."
  인시아는 코방귀를 뀌었다.
  "죄명은 정확히 뭐야?"
  "잘 기억 안나. 뭐 그런 게 중요하겠어? 일단 무단침입죄랑 강도죄, 인마살상용 독연탄 등 불법무기 소지죄가 있지만 무고한 민간인을 오크만 골라 21명을 죽였으니 다른 건 필요 없지. 그것도 대부분 어린애랑 일하러 나간 남편대신 집을 보고있던 여성들이고…나 원 참 경비대 노릇하다보니 별 못 볼 꼴을 다 본다니까."
  조용히 듣고 있던 태바다 무라타수가 말을 꺼냈다.
  "제가 꽤 오래 살았습니다만, 이런 사건도 참 오래간만이군요(그는 고개를 양옆으로 천천히 흔들었다). 파랑이의 증언이 결정적 단서였다는 게 기쁘긴 하지만, 한편으론 착잡합니다."
  "파랑씨와는 어떤 관계 세요?"
  "조캅니다. 제 아우인 한하의 맏딸이랍니다(내심 '당고모'라던가 하는 난생 처음 들어보는 호칭이 나올까 긴장하고 있던 인시아는 약간 맥이 빠졌다). 다행히도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답니다. 본가에서 연락이 왔는데, 의사 분께서 걱정 말라고 호언장담하셨다는군요."
  창 밖을 바라본 우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군요. 그럼 저는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내일 본가로 가야하니 미리 짐을 좀 챙겨놔야할 것 같아서요. 그럼, 두 분다 안녕히 계십시오."
  그는 무거운 표정으로 인사를 하고 찻집의 문으로 향했다. 그런 그의 커다란 등에다 대고 아마루가 큰 소리로 말했다.
  "태바다씨. 조카님에 대해 자랑스럽게 여기세요."
  태바다가 고맙다는 듯이 미소지으며 뒤를 돌아보자 그는 한마디 덧붙였다.
  "덕분에 정의가 이루어졌으니까요."



…(전략)그러나 그런 것들은 옛날 이야기에 불과하다…(중략)…현재 대부분의 오크들은 별다른 일이 없으면 왕국의 국경을 넘으려 하지 않는다…(중략)…다민종 국가이기에 특정 종족에 대한 증오를 조장하는 것을 불법으로 삼고있는 제국에선 그런 이야기에 대한 검열이 철저하다. 아직도 엘프들은 오크들을 믿지 못하는 경향이 있지만, 어쨌든 현재 제국과 몇몇 공국에서 오크들은 이야기 속의 도깨비가 아닌 현실의 이웃으로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다…(후략)


-태바다 무라타수의 <동화에 관하여> 중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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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그러니까 제 세계관을 아시는 분이라면 세삼스러울 것도 없는 썰렁한 얘기입니다. 죄송합니다(__)

흐흠, 먼저 쓴 얘기들을 살짝 고쳐서 감춰버리면 될라나?(퍽)
미소짓는독사
댓글 2
  • No Profile
    ^^ 06.01.22 03:13 댓글 수정 삭제
    단편이라기 보단 시리즈물이란 느낌입니다. 그런데 단서를 너무 많이 주셨네요. 그래서 반전이 반전으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조금 더 시치미를 떼면 어떨까요.
  • No Profile
    시리즈 물 맞습니다^^;;

    흐흠, 역시 그런가요. 하긴, 힌트는 이미 '그가 젊었을 때'에 거의 정답 수준으로 나와있죠(...). 충고 감사드립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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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5 단편 대폭발지구 외계인- 2006.05.17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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