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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finite infinite

2012.11.09 07:0111.09


'...인간과 다름없는 외견과는 달리 양자 안드로이드는 숙련된 양자 형삭공에 의해 정밀하게 가공된 코어쿼크와 그 밖의 교체가능한 입자로 구성된 그물 집합체로, 그들의 언어와 표정, 손짓 등의 모든 기표는 그들 자신의 의지 - 그런 것이 존재한다는 가정 하에 - 와 완전히 무관하다. 따라서 양자 안드로이드란 실제로 원인이 없는 결과의 화신이라 할 수 있다. 양자 세계에서 결과는 관찰에 의해 고정되고, 확률은 결과에 의해 고정되므로, 양자 안드로이드는 그가 도착한 우주에 존재하는 무명의 관찰자와 조우할 때 비로소 결과가 된다. 그렇게 확정된 결과는 해당 안드로이드에 의해 다시 관찰되고, 그 데이터를 구성 입자에 스스로 돋을새김함으로써 수치화된 확률로 저장한다... (중략) ...오늘날 산업의 역군으로 기능하는 양자 안드로이드의 1차적 효용은, 도약 시 성공 확률에 있다. 훈련된 도약자(80종의 포유류 외 다수)의 생존율(0.098%)에 비해 양자 안드로이드의 소멸률(경로 추적 불명 포함, 터널 내 유실 추정)은 제로에 가깝다..."

- 양자 안드로이드의 이해, 제8판, 장영실 편저 -



"에이, 세상에 붉은 사막이 어디 있어?"



보랏빛 모래가 넘실거리는 그 때 그 사막의 동쪽 어귀에서, 너는 내게 눈을 흘기며 큰 소리로 말했어. 선인장 한 그루도 자라지 않는 숫처녀의 사구를 점령하고, 우리는 이국의 무늬가 화려하게 수놓인 양탄자 위에 서로의 다리를 겹친 채로 누워있었지. 제비꽃 향내를 풍기던 모래 바람이 네 머리카락을 잘생긴 이맛전에 흩어놓는 걸 보면서, 나는 조금 서운했던 것도 같아. 네가 내 말을 단박에 믿지 않아서가 아니라, 내가 손수 흩트리고 싶었던 네 머리칼을 대신 돌보고 내빼버린 바람결이 야속해서.



"이것보다 붉단 말이지?"



그리고 양탄자의 사변에 촘촘히 달려있던 자줏빛 술을 만지작거리던 손가락. 휘영청한 달빛을 탑코트로 펴바르고 반짝반짝 빛이 나던 너의 다섯 손톱은 고르게 길지도 짧지도 않았어. 바람이 골라주고 간 앞머리처럼, 네 손가락의 마디 사이로 붉은 실가닥이 결결이 흘러내렸어. 커튼을 들춰보는 개구장이마냥 언뜻거리던, 알맞게 다듬은 반달 위로 봉긋 솟은 손끝의 도톰한 살마저도 못 견디게 사랑스러웠어. 너는 진짜 어린아이였을 때조차 꼬마라고 불리는 걸 싫어했지만 나는 그런 너를, 깨물어주고 싶을만큼 귀엽다고 말하면서 보드라운 카펫 술을 얹어서는 두 볼이 터지도록 베어물고 싶었어. 얼결에 묻어들어온 보라색 모래가 까끌하게 씹혀도 오히려 입맛이 한껏 오를 것만 같았어. 잘 익은 체리맛이 날 것 같았어. 나는 한 번도 검붉은 태즈매니아 체리를 먹어본 적이 없지만, 와인빛 술에 곁들이는 한입거리로 쏙 집어먹는 네 손가락은 분명 같은 맛이 났을 거야.



"왠지 무섭네, 지금 여기 보라색 모래만으로도 생경한데, 사막이 피처럼 붉은 빛이라니."



진짜 핏빛의 사막을, 핏빛의 바다를, 핏빛의 하늘을, 우리는 함께 본 적이 있어. 너는 실로 용맹스런 군인이었지. 어느 차원에서건 전쟁은 응당 두려움을 수반하지만, 어느 차원에서도 너는 네가 느끼는 두려움을 외면한 적이 없어. 언제나 가장 두려워했고, 언제나 가장 맨 앞에서 싸웠지. 네가 살아남아야 나도 살아남을 수 있다고, 너는 입버릇처럼 말했지만 나는 한 번도 대답한 적이 없어. 그 대신 우린 둘 다 살아남아서 핏빛의 사막을, 핏빛의 바다를, 핏빛의 하늘을 나란히 지켜보았지. 분노한 바다가 울컥울컥 쏟아내는 핏덩이가 우리의 징박힌 군화 밑에서 몽글거리고, 총알이 스쳐지나간 견장의 헤진 틈을 타고 동료들의 저며진 살점이 굴러내리고, 눅진한 피비린내를 머금은 모래바람이 상처난 뺨을 후려치는 가운데, 너는 벌겋게 녹이 슨 음성으로 말했어. 내가 살아남았기에 너도 살아남았다고. 하지만 나는 또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핏빛의 사막을, 바다를, 하늘을 보았지. 이제 와 하는 말이지만, 행성의 모든 포유류에서 쏟아져나온 시뻘건 핏물이 범람했던 그 곳조차, 네가 방금 내게 이별을 고하고 떠난 여기 이 붉은 사막만큼 황홀하게 붉지는 않았던 것 같아.  



"물이 흙보다 많다니, 나무가 한아름보다 크다니, 말도 안 돼!"



이름난 전사가 아닐 때에도 우리는 종종 저렇게 다투곤 했지. 좀처럼 의심을 거두지 않는 내게 너는, 네가 살다온 제3행성에서 물과 나무는 이 곳의 모래와 같다고 말했어. 어딜 가나 흔하고 많은 게 당연해서 아무도 그걸 일부러 모아둘 정도로 특별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말이야. 내가 나고 자란 제4행성의 사람들이 모래를 수집하지 않는 것처럼. 그래서 나는 정말로 화가 났어. 이 곳에 불시착한 이후로 줄곧 돔에서만 갇혀지낸 주제에, 필드 지역의 붉은 모래알 한 톨 씹어본 적이 없는 녀석이, 전에 살던 곳의 모래는 어떠냐고 물었을 때 모래가 모래색이지 뭐, 라며 멋대가리없게 굴었던 네가, 나의 모래에 대해 뭘 아느냔 말이야. 붉은 모래는 특별하다고, 흔하고 당연해서가 아니라 너무나 소중하고 귀해서 누구도 감히 소유할 생각을 품지 않는 거라고, 흥분해서 반박하는 내게 너는 쓸쓸하게 웃으면서 참으로 낯간지러운 말을 덧붙였지. 네겐 내가 그렇다고. 그 이상은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고, 나를 따스하게 응시하던 시선을 거두고, 꼭 붙든 손을 어느새 놓아버리고, 이제는 왔던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내게 선사할 물과 나무를 가지러. 하지만 반드시 다시 돌아오겠다고. 내게 선사할 물과 나무를 가지고.



"그 때는 꼭, 우리 함께 저기 저 붉은 사막에 가자."



센터에 설치된 수십 개의 대형 스크린은 소리없이 폭발한 너의 우주선이 뿜어내는 섬광을 다양한 각도로 비춰주었지. 갈가리 찢긴 네 몸뚱이의 잔재가 자기권의 경계를 헤맬 적에, 어떤 스크린은 갖가지 채도의 적색으로 네가 스며든 대기의 열을 측정해서 보여주었지. 그것이 바로 내가 목격한 최초의 붉은 하늘이었어.



"네 말대로, 아니 네 말보다 훨씬, 이 곳은 아름다워."



얼마 전, 우리는 설레는 마음으로 붉은 사막에서의 첫 데이트를 준비했지. 사막행 급행셔틀의 커플석을 예약하고, 무릎 위에 펴놓고 요기할 도시락도 준비하고, 가볍고 편한 티셔츠와 스니커즈를 서로에게 선물했어. 여자와 여자. 남자와 남자. 남자와 여자. 여자와 개. 개와 고양이. 고양이와 쥐. 쥐와 치즈. 이마를 맞대고 어깨를 견주고 손등을 감싸고 사이좋게 사막을 산책하는 연인들이 모두 우리처럼 다정했어. 돔보다 낮은 기압을 견디게 해줄 특제 산소캔디를 혀끝으로 녹이면서, 우리는 수줍게 키스했지. 머금고 있던 캔디들이 부딪치면서 경쾌한 방울소리가 났어. 내 귓가에 무어라 속삭이던 네 입술에서도, 맑은 종소리가 났어.



"우린 이미 늦었어."



이번엔 종소리가 아닌 목소리로 너는 내게 말했지만, 나는 이미 늦은 너를 사랑한 적이 있어. 건강한 곱슬머리가 하얗게 샐 때까지 너는 나를 까맣게 모르는 채로 내가 아닌 다른 이와 수십 년을 해로하고 살았어. 그러다 수명을 다한 두 눈이 온통 흐려져서는, 드디어 너를 찾아낸 나를 보지 못 하고, 귓가에 속삭이는 내 목소리조차 듣지 못 하고, 너는 나를 하나도 모르는 채로 죽었어. 또는, 네 이름을 부르짖으며 뻗고 또 뻗는 내 손을 끝내 낯설어하다가 한 길 낭떠러지로 스스로 뛰어내리고 말았지. 찰나라도 살아있기는커녕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 아련한 추억으로만 남아있기도 했어. 심지어는, 너를 간신히 기억하던 사람들조차 모두 늙거나 죽고 없는 바람에 아무리 샅샅이 뒤져봤자 세상 그 어디에서도 너의 사진 한 장 발견하지 못 한 적도 많아.



"하지만 나는 너를 받아줄 수 없어."



너는 잘 벼린 창끝처럼 서늘한 시선으로 나를 보았지만, 나는 이미 나를 받아주지 않는 너를 사랑한 적이 있어. 언젠가 우린 둘 다 너무 어렸고, 한 때는 내가 너무 어렸고, 그 당시엔 너야말로 너무 어렸지. 받아줄 수 없어서 받아주지 못 했고, 받아줄 수 있어도 받아주지 않았어. 모른 척 했지만 알고 있었다고, 널 보는 내 눈빛이 늘 슬퍼보였다고, 연민의 말로 차근차근 도닥여도 결국엔 이별이었지. 억지로라도 맘을 가져보려 애써봤지만 쉽지 않았다고, 차라리 원망하고 미워하라며 담담하게 네 마음을 내어놓을 때에도, 마찬가지였어. 여기서 당장 끝내자고, 우리는 처음부터 만나지도 말았어야 한다고, 꼴도 보기 싫다며 꺼지라고 악을 쓰던 너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지. 가난한 이별도, 배부른 이별도 이별은 한결같이 이별이더라.



"이렇게까지 말하는 나를, 아직도 원해?"



환멸이 그득한 너의 반문에 나는 네가 필요하다고, 반드시 그렇다고 분명하게 긍정했지만, 나는 이토록 사랑하는 너를 원하지 않은 적이 있어. 다른 이를 품에 안고, 다른 이에게 입을 맞추고, 다른 이와 침대에서 뒹구는 너를 그저 바라만 봤었지. 네가 태어나고 또 죽는 동안 나는, 그 곳에 존재하지 않은 채로 그냥, 있었어. 네 곁에. 너에게 내 이름을 말하지 않았어. 너에게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았어. 나를 사랑해달라고 말하지 않았어. 네가 향유하는 일생의 후미진 곳에 선사의 유물처럼 고요하게 웅크리고서, 투명한 의식으로 너의 주변을 희미하게 맴돌기만 하다가, 네가 떠나고 나도 떠난 뒤에야 비로소 알았지. 내가 그 곳에 너와 함께 존재했다면, 온 우주를 통틀어 너에게만 유일하게 허락하는 미소를 살짝 지어보이기만 했어도, 네가 나를 죽도록 사랑할 확률이 99.999%였다는 걸.



"하지만 난 마음을 정했어."



너를 떠나기로, 라고 잔인하게 통보하던 너처럼, 나 역시도 몹시 드물게 너를 버린 적이 있어. 자존심을 다 구기고 절절히 매달리는 너를 끝까지 모른 척하면서, 어차피 안될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지 않았느냐고 밉살맞게 쏘아붙이면서, 조금도 열지 않고 닫아버린 마음을 내내 두드리는 너를 비웃거나, 네가 똑똑히 지켜보는 앞에서 보란듯이 다른 이와 혀를 얽다가, 본디 네 것이었던 누군가의 일그러진 심장을 송두리째 가로채기도 했었지. 그렇게, 마음은 변하고 또 변하는 거더라. 아끼고 보듬고 지켜주면서 너를 무척이나 사랑하거나, 짓밟고 무시하고 상처주면서 너를 무섭도록 사랑하는 식으로.



"준호야, 저기 저 별들을 봐."



우리가 보는 저 북쪽의 별은 2만 년 전에 이미 소멸하고 사라진 별이야. 우리가 보는 저 남쪽의 암흑은 불과 몇 시간 전에 새 별이 생성된 자리야. 신기하지? 죽은 별은 여전히 저렇게 찬연히 빛나고 있는데, 태어난 별은 하나도 보이지 않아서 태어난 줄도 모른다니. 그만큼 머니까, 그만큼 멀어서, 지금 빛나고 있는 저 별은 이제 없어. 아직 빛나지 않는 저 별은 이제 있어. 준호야, 그래서 우리는 아무것도 몰라. 무한하지 않은 모든 건 너와 나처럼 유한하니까, 무한하지 않는 한 알 수가 없어. 앞으로 무엇이 빛날지, 어디에서 빛을 잃고 꺼질지, 언제, 어디서, 누가 그럴지.


잔등을 둥글게 구부리고 앉아서 한창 보랏빛 모래로 손장난을 치던 너는, 머리 밑에 두 팔을 포개고 별하늘을 바라보던 나를 돌아보며 천진한 두 눈을 샛별처럼 깜빡였고, 기지개를 쭉 펴면서 하품을 하는가 싶더니 문득 입술을 다물고 방과 후 소년처럼 웃으며 말했지. 난 그런 거 관심없어. 별로 알고 싶지도 않아. 몰라도 저렇게 예쁘기만 한데 뭐. 그런데 은수야, 그래서 말인데.



"지금 나한테 키스해도 돼."



하지만 나는 네게 키스하지 않았어. 그냥 나는, 웃는 너를 따라 빙그레 웃었어. 내가 내가 아닐 때에도, 네가 네가 아닐 때조차, 너는 한결같이 너로구나 하면서. 그리고 모든 차원의 모든 장소에 동시에 존재하는 나를 모두 그러모아 외쳤지. 나를 사랑하지 않는 너를 사랑해. 나를 모르는 너를 사랑해. 더 이상 네가 아니게 된 너를 사랑해. 아직 네가 아닌 너를 사랑해. 한 번도 존재한 적 없는 너를 사랑해. 앞으로 존재하지 않을 너를 사랑해. 사랑해, 무한히.



"널 두 번 다시 보는 일은 없을 거야."



한 때 나는 네가 없는 우주에서 천이백 년을 살았지. 천이백 년을 너 없이 사는 동안, 내 마음은 자꾸만 변했어. 예전과 같을 때가 하나도 없었어. 그래서 나는 추호의 의심을 버리고 확신할 수 있었어. 내 마음은 언제나 변해, 준호야. 널 사랑하거나 널 사랑하는 쪽으로. 깨달은 나는 뒷춤을 툭툭 털고 일어나 다시금 도약했지. 그렇게 나는 무수한 우주를 거쳤고, 무수한 우주에서 무수한 너를 만났고, 또 그만큼의 너를 만나지 못 했어. 그리고 결국 여기, 무한한 터널의 무한한 끝에서, 나는 찾아내고야 말았어. 드넓은 사막이 모래색도, 핏빛도, 보랏빛도 아닌 우주를. 내가 처음 너를 만나고, 떠나보내고, 다시 찾기 위해 도약했던 우주와 같이, 사막의 붉은 모래가 몹시도 소중한 우주를. 이 곳의 연인들은 보통 너와 내가 헤어진 이 카페에서 만나 산책을 시작해. 사막의 초입에 자리잡은 초록 간판의 스타벅스. 이별하기 전에 나와 함께 이 곳에 와봤던 너도 알다시피, 코스는 의외로 소박해. 취향대로 골라든 한 손의 커피를 홀짝이면서, 다른 손을 맞잡은 둘이 함께 사막을 걷는 거야. 신성한 붉은 모래를 맨발로 밟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옛 전설을 빨갛게 달아오른 서로의 귓가에 속삭이면서.


드넓은 사막이 붉은 우주. 그 곳에서 너는 붉은 모래를 빌어 내게 사랑한다고 말했지. 하지만 우린 끝내 함께 붉은 사막에 가보지 못 했어. 드넓은 사막이 보랏빛인 우주. 그 곳에서 너는 내게 키스를 허락하며 사랑한다고 말했지. 하지만 우린 그 때 키스하지 않았어. 그리고 여기, 또다른 사막이 붉은 우주에서 우리는 해지는 붉은 사막을 디디고 선 채로 오래도록 키스했지만, 너는 방금, 단 한 번도 나를 사랑한 적이 없다고 말하면서 홀로 이 곳을 떠났어.


떠나가는 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테이블 위에 손가락으로 둥글게 원을 그리고 있어. 시럽을 넣지 않은 아메리카노는 벌써 식어버렸지만, 네가 마시다 만 바닐라 라떼의 향취는 아직도 코끝을 맴돌고 있어. 숨이 가쁘도록 달콤하게 입을 맞추다가, 버릇처럼 한 자락을 몰아쉬는 너의 숨결처럼, 꼭 그만큼 은은하게.


하지만 갈수록 옅어지는 바닐라 향처럼 시시각각으로, 날 버린 네가 점점 작아져. 희미하게 없어져. 수억만 년 전에 타버린 별빛처럼 사라져. 수억 광년이나 떨어진 별처럼 멀어져.


네가 떠난 이후 나는 줄곧, 테이블 위에 손가락으로 둥글게 원을 그리고 있어. 아까는 너를, 혹은 네가 내게 고할 이별을 기다렸지만, 이제 나는 다른 만남을 고대하고 있어. 네가 나를 무참히 버리고 내가 너와의 이별을 받아들인 순간, 우리의 결과는 고정되었고, 나는 그 동안 시공간의 틈새에 묻어두고 있던 무수한 나와, 무수한 너를 모조리 기억해냈어.  



"저를 양자 터널로 데려가 주세요."



내가 처음 너를 찾아 도약했던 우주에서, 자신을 아놀드 레오파드 티모시 맥그리거라고 소개했던 양자 안드로이드에게 나는 말했지. 아놀드는 설명했어. 역학이 고도로 발전한 그의 우주에서, 너를 태운 채로 폭발해버린 로켓처럼 나를 태우고 터널을 통과할 스포츠카 대신, 복잡하고 헷갈리기 짝이 없는 안드로이드를 만들어낸 이유를 말이야.  



"죽을 지도 몰라요."
  


그래서 나는 그에게 확률을 말했지. 이 우주에 네가 있을 확률은 제로, 다른 우주에 네가 있을 확률은 플러스, 그러니 내가 살아남을 확률에서 너를 다시 만날 확률을 뺄셈한 결과가 마이너스라 할 지라도, 0이 아닌 플러스를 향해 가야 한다고.



"어쨌거나 저는, 최선을 다 하고 싶어요."



내 우주에 네가 없는 확률이 일백퍼센트로 차오를 때면 언제나 그랬듯이, 아마 오래지 않아 그가 나타나서 내게 물을 거야. 터널을 열어줄까요, 라고. 그리고 어김없이 경고하겠지. 당신은 또 버림받고 실패한 채로 소멸할 지도 몰라요, 라고. 물론, 여기서 아무리 기다려봤자 그는 영영 내 앞에 나타나지 않을지도 몰라. 주사위 놀음이란 원래 그런 것이니까. 그치만 준호야, 운좋게 그 사람이 다시 내게 와준다면,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할 작정이야.



"그 동안 내가 보아온 숲과 바다는 모두 핏빛이었어요."



네가 불씨 하나 남겨두지 않고 꺼뜨리고 간 현재의 암흑은 하나도 빛나지 않지만, 준호야, 이제 나는 알아. 눈앞이 온통 컴컴한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막 태어난 별빛은 최선을 다해 달려오고 있다는 것을. 수억 광년이나 떨어진 머나먼 우주에서, 수억만 년을 쉬지 않고 쏜살같이. 그리고 빛이 보일 거야. 켜켜히 쌓인 어둠을 단번에 젖히고 환하게 비출 거야. 그 아무리 견고하고 오래된 암흑이라도, 한 번도 빛난 적이 없다고 해서 한 번도 빛나지 않으리란 법은 없어. 그것이 바로 유한한 내가 유한한 너를 찾아 무한한 우주를 여행하는 이유야.



"보고 싶어요. 드넓은 사막이 모래색으로 반짝인다는 우주의, 물과 나무를."



나는 무한한 우주에서 무한한 삶을 살면서 무한한 일을 겪었어. 갖가지 너를 무한할 정도로 만나고, 무한토록 사랑하고도 나는 무한히, 그치지 않고 여행을 계속했어. 태어나고, 죽고, 싸우고, 화해하고, 만나고, 헤어졌지. 나는 너를 찾아 홀로 여행을 시작했지만, 어쩌면 너 역시도 나를 찾아 외로운 여행을 계속하고 있는지도 몰라. 언젠가 어느 우주에서는, 여행하는 너와 여행하는 내가 만나서 함께 무한한 우주를 여행하게 될 지도 몰라.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지만, 한 번도 그러지 말란 법은 없으니까. 그러니 준호야, 다음의, 다다음의, 혹은 다다다음의 우주에서 우연히, 따로 여행하던 우리가 만나고 또 우연히, 너와 내가 우연히 알게 된 그를 만나게 되면 우리 꼭 이렇게 말하자. 무한한 우주에서 무한한 삶을 살면서 무한한 일을 겪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 못 다한 것이 너무 많다고.

무한한 우주에서 무한한 삶을 살면서 무한한 서로를 만나 무한히 사랑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 해보지 못한 사랑이, 겪지 못 한 이별이 너무 많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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