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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자객행(刺客行)

2012.03.28 20:20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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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성이 어둡고 헤아림이 얄팍하여 별호를 冥薄이라 하는 이가 통령의 자리에 올랐을 때 많은 이들의 생각은 아우라지 강물처럼 서로 갈리고 섞여 복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비록 세상이 개명하여 피와 뼈를 살펴 왕의 자리를 대물리지 않았으나 그렇기에 한 나라를 대표하는 지도자를 고르기는 더욱 어려웠다. 백성들은 아직 자신의 손으로 나라의 대표자를 정하는데 익숙하지 않았고, 백성 모두가 제각기 나라의 주인임을 스스로 깨닫는 이조차 많지 않았다. 백성 모두가 나라의 주인이라 하면서 그들 대신 정치를 하겠다며 나선 대의원(代議員)이라는 족속들이 왕정 시절의 고관대작(高官大爵)과 어찌 다른지 분간하기는 어려웠다. 그들은 거의가 왕정 시절에 부와 권력을 쌓아두던 고관대작들의 후손이었고 왕 대신 통령을 모신다는 점에 있어서는 사실상 여전히 백성 위에 군림하는 이들이었다. 백성들의 삶은 그다지 나아질 것이 없었다.








冥薄통령은 젊어서부터 상재(商材)에 도통하여 손을 대는 곳마다 금전을 끌어오지 못하는 곳이 없었다. 금전이란 것은 참으로 신기하여 살아 있지 않으면서도 살아 있는 듯 활발히 움직였고, 모으고 쌓을수록 새끼를 쳤다. 금전의 자태는 달빛 아래 서시(西施)보다 고왔고 그 유혹적인 움직임은 손바닥 위의 조비연(趙飛燕)보다 날래고 요염하였다. 사람이 편하자고 만든 금전이 도리어 거꾸로 올라서서 거들먹거렸다. 세상이 개명하여 통령부터 아이까지 모두 평등하다 법이 말했으나 법전부터 금전 앞에 고고한 허리를 꺾는 세상이었다. 그런 세상에서 冥薄통령의 금전은 옛날의 왕족이나 높은 벼슬아치들이 지니던 권력 못지 않은 세도를 부렸다. 그가 한낱 큰 장사꾼에서 정치에 뜻을 두어 통령 자리에 올랐을 때 많은 사람들은 공화국이 그를 출세시켰다고 입을 모았다.






冥薄통령은 사람을 부려 금전을 모으는데는 타고난 재주가 있었으나 아쉽게도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는데는 그 재주가 빈한하였다. 타고난 도량이 좁은 탓인지 그에게 있어 사람은 도구에 더 가까웠다. 왕의 다스림이 피와 뼈가 천한 이들의 분수를 알게 하여 세상을 안정시키는데 있었다면 통령의 다스림은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대하는데 있었다. 많은 석학들이 冥薄통령의 부름을 받아 그를 가르쳤으나 한 나라의 지도자가 품은 뜻을 글줄로 바꾸기는 쉽지 않았다. 冥薄통령이 가슴에 품은 큰 뜻은 일단 나라부터 살찌우면 백성들도 당연히 살찌리란 생각이었다. 그가 보기에 반도 공화국은 국경을 마주댄 한(漢) 대륙이나 바다 건너 호쿠사이에 비해 아직 가난하고 낙후되어 있었다. 이미 오래 전 왕정 시절에 무력으로 보위를 빼앗고 한 시대를 풍미했던 어떤 무서운 장군의 생각이기도 했다. 금전이 금전을 낳아 제 몸을 불리듯 생각도 역사를 거쳐 사상(思想)과 이념(理念)의 이름으로 되풀이되었다. 冥薄통령은 그 동안 그를 보필해왔던 수족과도 같은 측근들을 모두 출세시켜 본격적으로 일을 벌이기 시작했다.






멀리 내다보았을 때 冥薄통령의 뜻이 과히 틀리지는 않을 터였다. 그러나 백성들은 왕국에서 공화국으로 바뀌는 이 시대를 살아가며 막연히 새 세상이 열리기를 바라고 있었다. 여인에게 품는 막연한 기대가 한 남자를 못나게 만들듯이 冥薄통령에게 품는 백성들의 기대는 자꾸만 쌓여 하늘을 찔렀다. 통령궁 앞에 놓아둔 신문고의 가죽이 찢어져 바꾸기를 수십 차례였고 의무 군역 대신 치안대에 지원한 젊은 청년들은 명령에 내몰려 못살겠다 애걸하는 부모형제를 억지로 내쳐야만 했다. 冥薄통령이 나라를 살찌울 동안 금전을 가진 이들만이 배를 불렸고, 그를 두고보기에 백성들은 너무 지쳐 있었다. 무엇보다 나라가 살찐다 하여 백성이 살찐다는 보장도 없었다. 잘난 의원들이 입을 나불거렸지만 그들은 떠든 뒤에 항상 무언가를 먹을 수 있었다. 그들은 말로만 종복이었고 입으로만 백성을 위했다. 冥薄통령의 곁에 있는 이상 그들은 배곯을 걱정도, 설움을 얻을 걱정도 없었다. 백성들은 나라가 살찌우는 일이 대의원과 통령을 살찌우는 일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공화국이 왕정 시절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은 백성들은 마침내 살 방도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어느 색목인 학자가 이르기를 나라는 큰 힘을 제멋대로 쓸 수 있는 무리라고 하였다. 사실 그 학자는 몇몇 학자가 그렇듯이 반도 왕국에서는 접하기가 금지되어 있는 인물이었다. 금서(禁書)가 백성들 사이에서 공공연하게 나돌 정도로 나라의 분위기는 어지러웠다. 백성들은 나라의 힘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을 갖고자 했다. 그러나 오래 전 백성들의 집단 행동을 대란(大亂)으로 규정하여 피를 뿌렸던 군왕(軍王) 시절을 되풀이할 수는 없었다. 지나간 역사는 그렇게 미래를 규정하는 힘도 가지고 있었다. 백성들은 역사를 통해 새로운 길을 찾고자 했다.
그리고 그들은 역사가 거의 시작될 무렵의 한 기록을 찾아내었다. 천하를 위해 큰 뜻을 품고 제 목숨을 버려 그릇된 제왕들의 목을 베는데 앞장섰던 자객들에 관한 이야기였다. 冥薄통령이 백성의 원성과 울음을 듣지 않기 위해 통령궁에 높은 장벽을 세운 것처럼 백성들은 희망을 실어 그 벽을 넘어설 수 있는 자객을 수소문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 자객은 의외로 멀지 않은 곳에서, 흔쾌히 백성들의 뜻을 수락하였다.





1.




이무상(李無上)이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자객행(刺客行)을 공표하고 떠난지 한 달이 흘렀다. 더 이상 오를 경지가 없어 이름을 무상(無上)으로 바꾸고, 버린 본명과 함께 남쪽 바다를 건너 반도 영해 끝의 탐라에 야인(野人)으로 묻힌지 오래였다. 칼쓰기로 둘째가라면 서럽다는 호쿠사이의 사무라이들이 제 키보다 큰 칼을 차고 그에게 도전하였다는 이야기는 짠내나는 바닷바람에 섞여 애달프게 들려왔다. 사람들은 소문의 결말을 궁금해했고 호사가(好事家)들은 큰 배를 세내어 이무상이 숨어 삼다는 탐라의 큰 산봉우리를 헤매어보기도 했다. 한 번 몸을 빼치면 두발당상으로 성문 위에 높이 매단 종을 걷어차 부순다는 천하제일의 경공(輕功)을 지닌 이무상이었다. 소풍과 다를 것 없는 신선놀음 같은 수색에 몸을 보일리 없었다. 멀리서 찾아온 호사가들은 한라산 아래 숱하게 묻힌 호쿠사이 검객들의 무덤을 보고 역시 이무상이라는 감탄만 하다 돌아갈 도리밖에 없었다.








십팔반병기(十八半兵器)를 모두 능히 다루어 별호를 소야뇌(小野餒), 혹은 강호대제학(江湖大提學)이라고 불리우던 이무상을 달리 일컬어 태대협(太大俠)이라 부르기도 했다. 타고난 성품이 강직하고 협기(俠氣)가 뛰어나 불의를 모르면 모르되 알고는 참지 않았다. 이무상이 강호무림을 떠도는 동안 직접 손을 써서 해결한 일이 수도 없이 많아 무림어사(武林御使)라 부르기도 했다. 문식 있는 백성들이 冥薄통령의 뜻을 꺾을 자객을 뽑고자 했을때 수없이 많은 전설과 별호를 남긴 명망 있는 이 고인(高人)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을 터였다.





신선처럼 종적없이 한라산 어딘가를 떠돌고 있을 이무상에게 백성의 뜻을 전달하기 위해 한라산 밑둥 아래에서 시를 지으며 살고 있는 한 노선비가 발품을 팔았다. 정확히 말하면 그는 스스로 움직여 찾지 않았고 단지 글을 써서 오기를 청하였다. 교분은 없었으나 노시인 정백금(鄭百金)의 오두막 위에 펄럭이는 깃발을 보고 이무상은 두말없이 그를 찾았다. 지은 시 한 수가 금 한 덩이 값어치가 있다 평받는 시인의 필체는 웅혼하여 멀리서도 그 기상을 살필 수 있었다. 老請俠客. 다른 말은 필요없었다.




- 전하는 이름이 과연 옳으니 명불허전(名不虛傳)이외다.



정백금이 건네는 초면의 인사가 잔잔하고 무거워 이무상은 허리를 굽혔다. 중키에 알맞게 근육이 붙은 몸이었다. 기상이 씩씩하고 맑아 작은 산이 걷는 듯했다. 하얗게 센 머리에 비해 피부에 주름이 드물었다. 잔흉터가 많았으나 살기를 감추어 함부로 드러내지 않았다. 아직은 허리가 꼿꼿한 노시인은 장년 협객의 인사를 받고 차를 한 잔 내며 물었다.


- 협객은 그 옛날 형가와 번오기의 고사(古事)를 아시오?

- 모르지 않습니다.

- 저 서울 궁 안의 높은 이가 뭇 백성을 눌러 죽인다는구려.



이무상은 대답하지 않았다. 일다경(一茶頃) 속에서 숨결을 가슴 속으로 차분히 누르며 깊이 생각했다. 햇볕과 바람에 오래토록 덖어낸 찻잎의 향이 온 몸에 스미듯 혈관을 타고 돌 때 비로소 그는 입을 열었다.


- 하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백성의 뜻이 하늘의 뜻이라는 옛 가르침을 받들겠다는 말이었다. 몸을 돌려 나가려는 이무상의 뒤를 정백금이 주름진 손으로 휘저어 잡았다.


- 협객 앞을 막는 이도 백성이고 하늘이오.


이무상은 두 손을 올려 예를 표하고 허리에 맨 검을 풀었다. 넉 자 길이의 표식 없는 평범한 장검이었다. 쇠도 자루도 흔하여 싼 값에 팔리는 물건이었다. 오직 이무상이 잡았을 때 그 검은 천하를 격동했다. 나라 또한 마찬가지일 터였다.

- 큰 선비께서 큰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미욱한 무상은 가르침을 받들어 함부로 피를 보지 않겠습니다.


이무상이 거처를 떠나자마자 정백금은 시를 한수 지었다. 小山大步 大俠無上. 작은 산이 크게 걸으니 그 협기를 누를 수 없다는 말이었다. 정백금이 그 시를 관청에 보내자 탐라 군수는 기겁을 하여 군사를 모았다. 때마침 이무상이 탐라 항구에서 배를 타고 막 떠날 채비였다. 탐라 군수도 배운 가락이 있어 대번에 이무상의 뜻을 깨달았으나 감히 그에게 덤비지 못했다. 대저 공화국의 관료란 이들이 대부분 그렇게 제 몸부터 사리기 마련이었다. 그는 재산을 모두 정리하고 은퇴한 이후의 노후를 모두 헤아린 뒤에야 비로소 서울의 통령궁과 병조(兵曹)에 서신을 넣었다. 누구도 탓할 수 없는 필부(匹夫)의 작은 헤아림은 역사가 돌아보지 않았다. 다만 그는 시골 졸부로 그럭저럭 한 평생을 잘 먹고 잘 살았다.







이무상이 뭍에 닿았을 때 이미 온 나라가 들썩거리고 있었다. 이무상의 체포에 만금(萬金)과 승진을 걸어둔 탓에 혈기방장한 젊은 무관(武官)들과 병사들이 몰려든 구경꾼들과 먼저 싸움을 벌여야할 지경이었다. 이무상은 뱃전을 차고 고고하게 날아 그 한가운데로 바위처럼 내려섰다. 저자거리처럼 소란한 틈바구니 중앙에서부터 파문처럼 고요함이 퍼져 젖었다. 심성이 주름지고 좁은 이들은 이미 양 어깨에 내려앉은 정적의 무게를 감당치 못하고 줄행랑을 놓았다. 개중 담대한 몇이 남았으나 별무소용이었다. 손에 잡은 칼이며 창이 이미 떨려 엿가락 같았다. 멀리서 활을 겨눈 군관도 있었으나 이무상의 쏘는 듯한 눈빛이 더 화살 같아 금시로 손을 떨구었다. 관청의 경마(競馬)잡이는 이무상이 정중히 청하자 두말않고 튼튼한 군마를 내주었다. 골격이 실하고 먹성이 좋아 사람 하나 지고 뛰는 일을 부담스러워하지 않았고, 바람과 앞다툼하기를 즐겨 번갯불처럼 뛰달리는 말이었다.






이무상이 반도 공화국의 땅끝 해남에서 풍요로운 고장 전주쯤을 지날 때 비로소 병조에서 수배한 군영의 고수들이 그 앞을 막아섰다. 강호를 떠돌다 큰 뜻을 품고 입대한 이도 있었고, 국가에서 공인한 무공을 오래 수련한 무가(武家)의 장남도 있었으며, 돈만 주면 염왕(閻王)의 목도 벤다고 알려진 세외방파(世外房派)의 음험한 암살자들도 있었다. 하필 그들의 숫자가 또 다섯이라 호사가들은 그 옛날 한 대륙의 뛰어난 무장이었던 미염공(美髥公)이 의형을 모시고자 하는 충의를 지키기 위해 제 앞을 막는 다섯 장군을 참수하던 이야기에 비유하곤 했다. 사람들의 말이 모여 글이 되고, 글을 골라 큰 역사가 되는 시대였다.





훗날 역사의 몇 장을 차지한 여섯 고수의 만남은 한없이 맑은 하늘의 어느 늦봄이었다고 전해진다. 햇빛은 여섯 사람의 발목에 고여 찰랑거리고 바람은 머리 사이로 새었다. 싸우고자 맘먹어 살기를 드러내기 전까지는 장삼이사(張三李四)와 다르지 않은 이무상에 비해 그 앞을 막고 선 다섯 고수는 제각기 흉흉한 병기를 들고 있어 살벌하기 이를데 없었다.


이무상은 빈 두 손을 들어보이며 말을 건넸다.

- 그대들은 빈 손의 중늙은이를 그 쇳덩이로 쳐죽이려 하는가?

사람이 다섯이니 대답도 제각기 나왔다.


- 너의 목을 가져가야 만금을 받는다.



가장 먼저 차갑게 대꾸한 이는 귀혈묘(鬼血猫)라 불리우는 을돌(乙乭)이었다. 공화국에서 태어났어도 오랫동안 비천한 직업을 쉽게 숨길 수가 없어 천대받던 이였다. 본디 소돼지를 잡던 백정 가문의 아들이라 사람 살점을 발라내는 솜씨가 기막혔다. 여러 개의 투박한 발골 칼을 날카롭게 갈아 몸 안에 감춰두고 한 호흡에 칼을 빼어 사람을 조각내는 모습이 고양이가 발톱을 휘두르는 모양새 같다고 했다. 만약 이무상이 검을 들었다면 몸을 뒤로 빼치며 검을 깊고 멀리 찔러 그 목숨을 빼앗았을 것이었다. 을돌이 짧은 선을 난잡하게 그어가며 악랄하게 덤빌 때 이무상은 긴 선을 우아하게 그어 대적할 수 있었다. 물론 검이 없는 이무상으로서는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





상대와의 거리를 헤아려 제압함은 싸움의 기본이라 여겨 긴 창과 봉을 가져온 양시훈(楊是勳)의 뜻도 그와 같았다. 이무상이 십팔반병기에 능하다고 하나 세상에 으뜸으로 치는 병기는 검이었다. 사람이 쇠를 다룰 줄 알게 되면서부터 검은 가장 알맞은 무게와 길이로 모양새를 바꿔가며 그 몸으로 파고들었다. 그러나 봉은 사람이 싸우고자 하는 뜻이 있을때부터 손에 쥐었던 것이었고, 창은 그 끝에 돌을 붙여 죽이고자 하는 뜻을 더한 무기였다. 활을 제외하면 이보다 더 능란하게 거리를 제압할 수 있는 병기는 없었다.





양시훈은 대장군인 제 아비의 덕을 받아 젊은 나이에 첨정(僉正) 관료가 되었다. 가문 덕에 출세함은 왕정이나 공화국이나 다르지 않았다. 일찍이 한 대륙에 유학하여 양가창법(楊家槍法)을 수련하는 등 나라 제일의 무공을 일등으로 배워 실력을 자부했으나 왕정 아닌 공화국에서 스스로 출세하지 못함을 아쉬워했다. 칼보다 말이 더 무거운 시대였다. 그는 서양 학자들의 금서를 받아들여 평등을 공공연히 요구하는 공화국 북쪽의 무력 시위 단체들을 진압하기를 강력히 탄원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창과 봉을 가늠해보던 양시훈은 결국 창을 들어 겨누었다. 그가 봉을 내던지자 어디선가 숨어 있던 수십 명의 군졸들이 쭈뼛쭈뼛 나타나 주위를 멀찍이 에워쌌다. 애시당초 군졸들이 모인다 한들 이무상을 당해낼 수는 없을테니 싸움터를 좁혀 도망치지 못하게 하자는 나름의 병법이었다.


- 노인장의 목을 받아야 공을 세우니 사내로서 원망 마시오!





그와 뜻을 같이 하는 이가 하나 더 있었다. 여염의 행색을 한 나이를 종잡을 수 없는 여인이었다. 가정을 둔 아낙 같기도 했고, 나이가 조금 처지는 처녀 같기도 했다. 거친 피부에 고집스러워보이는 외모를 질끈 묶은 머리칼로 감추고, 사려쥔 채찍을 후려칠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검과 창이 한 번의 호흡으로 나아갈 때, 채찍은 호흡에 여유를 두고 길게 휘돌아 쳐야 했다. 손목을 부드럽게 돌릴 때 채찍의 무게는 고루 분산되어 상대를 옭아매었다. 물을 머금어 질겨진 소가죽에 사금파리를 바르고 그 끝에 무거운 분동을 단 쇄혼편(鎖混鞭)의 궤적은 눈짐작조차 어려웠다. 그녀가 한번 손목을 떨치면 채찍은 살아 있는 뱀보다 더 변덕스럽게 내달아 허공을 그림자처럼 내리그었다. 그러나 그녀는 한번도 채찍의 움직임을 놓친 적이 없었다. 그녀의 삶이 채찍보다 더 어지러웠고, 헤아리기도 싫을만큼 고통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반도건 왕국이건 용모 없는 여인이 살기란 여러모로 힘든 땅이었다. 그녀는 아직 이름조차 없었고, 남자 중의 남자로 꼽히는 이무상의 목을 허리에 차고 돌아가 부모 앞에 내던지고 이름을 지어달라 조를 작정이었다. 그녀는 차마 개도 갖는 이름을 받고자 이무상의 길을 막아섰다는 말조차 하지 못해 목이 메었다.







멀리서 이무상을 노리는 두 사람의 뜻을 헤아리는 사람은 없었다. 하나는 눈이 뵈지 않는 꼽추였고, 하나는 두 다리가 없는 앉은뱅이였다. 불구의 몸을 가진 추레한 행색의 노부부에게 뉘도 관심을 주지 않았기에 그들이 유명한 암뢰쌍살(暗雷雙殺)이라는 사실을 밝힐 필요가 없었다. 다리가 없는 남편이 주름진 손으로 화약을 적당히 덜어 화승총에 재어놓고, 꽂을대로 총구를 쑤셔 다진 뒤 심지를 당겨 총 쏠 준비를 할 때 아내는 활에 화살을 얹고 혀 를 내밀어 바람맛을 보았다. 눈이 먼 대신 귀가 민감하여 적의 기척을 귀신처럼 알았다. 남편의 총이 준비할 때에 화살이 틈을 메우기도 했고, 화살이 나설 것도 없이 총알이 끝장내는 경우도 있었다. 아는 이들은 부창부수(夫唱婦隨)도 별나다 생각했으나 감히 입 밖에 내지는 못했다. 장님 꼽추 아내의 귀가 누구보다 밝았고, 앉은뱅이 남편의 눈이 누구보다 매서웠기 때문이었다.







이무상은 어깨를 펴고 편안하게 섰다. 누구든 무문(武門)에 몸을 들이면 그 동안 속세에서 어지러웠던 호흡, 삐뚜름한 자세, 지저분한 걸음을 모두 버리고, 숨쉬는 법, 서는 법, 걷는 법부터 다시 배웠다. 무관심하게 버려두었던 자신의 몸을 끌어다 자세히 살피며 무예를 닦을 심신을 새롭게 준비하는 것이었다. 이무상은 무예를 닦으며 오십 해 가까이 몸에 익힌 편안한 자세로 섰다.


- 백오십 보 바깥의 어르신들은 대저 나를 노리는 연유가 무엇이오?


한참 만에야 손톱으로 유리창 긁는듯한 목소리가 바람 새로 뚫듯이 울렸다.

- 잘난 놈은 죽여야 맛이겠다!

- 끔찍하군요.



이무상은 왼발 끝을 세워 반원을 그리며 오른발 뒤로 갖다붙였다. 이무상의 움직임이 낚싯대처럼 나머지 세 명의 움직임을 미묘하게 흔들었다. 을돌이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고, 양 첨정이 창을 곧추세우며 앞발을 크게 내딛었다. 쇄혼편의 여인은 손목을 감치며 분동을 매단 채찍 끝을 날렸다. 채찍이 먼저 달려들 때 검과 창은 그 뒤를 따를 터였다. 총과 활은 싸움이 절정에 이를 때 귀신같이 파고들어 목숨을 빼낼 셈이었다. 이무상은 숨을 끊어서 쉬었다. 마지막 호흡에 몸을 반 바퀴 돌려 채찍을 피했다. 검과 창이 얌생이처럼 기세를 올리며 달려들었다. 이무상의 신경은 아직 등 뒤에 남아 있었다.




2.




시대가 아무리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것들이 의외로 적지 않았다. 그 중 배움에 관한 열의가 그러하였다. 반도가 아직 왕국이던 시절에 한때 참람된 무인들이 제각기 용력을 뽐내며 왕 대신 국사(國史)를 휘젓던 시절이 있었다. 누구를 섬기건 백성들이 힘들기는 마찬가지였으나 붓 든 이들이 유독 뜻을 꺾어야만 했던 때였다. 붓이 칼보다 강하다 했으나 목을 잃고 나서도 붓을 세울 수는 없었다. 푸른 구름처럼 하늘을 물들이며 날아오르고픈 젊은이들은 하나같이 책을 버리고 품새를 익히고 창칼을 벼리던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이들이 여전히 책을 버리지 못했고 자존심을 꺾지 않았다. 무인들의 비웃음을 피해 그들은 귀한 학문을 머리에 품은 채 좁고 깊은 계곡으로 숨어들었다. 그로부터 수없는 세월이 지나 반도 학문의 총본으로 꼽히는 심곡(深谷)을 모르는 이는 무인 중에서도 없었다. 공화정이 들어서며 변론과 정치를 배우기 위해 수많은 서생들이 심곡에 몸을 던졌다. 젊은 시절 심곡에서 문장의 기초를 익히던 정백금이 심곡을 뭇 서생들의 가슴에 불을 지르는 요녀에 비유하여 찬사와 야유를 동시에 받았을 정도로, 서생들이 총각을 떼듯 세상의 한 몫을 하기 위해 거쳐야만 하는 곳이었다. 정백금의 싯구처럼 심곡은 여인의 마음보다 더 뜨겁게 정열을 태웠고, 여인의 눈물보다 더 아픔에 소슬히 젖은 곳이었다. 심곡의 수재들이 하룻밤에 별의 수를 다 셀까 싶어 그 곳에는 달빛조차 들지 않는다는 말도 있었다.


그러나 달빛이 들지 못하는 곳에도 사람의 발자국은 남았다.



통령궁에서 파견한 공조(工曹)의 관원이 길라잡이를 했고, 성균관(成均館)에서 파견한 문형(文兄) 급의 노신(老臣)들이 말을 타고 그 뒤를 따랐다. 통령궁의 방비가 우선이었기에 병조의 무관들 대신 형조(刑曹)의 고참 형리(刑吏)들이 호위를 맡았다. 벼루가 가장 큰 무기로 통용되는 심곡에서 그 정도면 훌륭한 병력이었다. 형리들은 좁고 어둡고 거친 심곡의 형세로 깊숙이 들어가며 지루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표현은 훨씬 거칠어도 형리들의 생각도 노시인 정백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무료함을 덜고자 음담패설을 입에 올리던 형리들의 말에 따르자면 심곡의 제 47대 학장 밤골(栗谷) 선생의 거처는 여인의 인중 무렵에 위치해 있었다. 그러니까 여인의 다리 사이 울창한 숲을 지나고, 우묵하게 패여 물이 고인 배꼽을 지나서, 봉긋한 젖가슴 사이를 통과하고, 길다란 목선을 따라 한참을 걷고 난 뒤에야 비로소 밤골 선생을 만날 수 있었다는 뜻이었다. “제에미, 고 년, 몸 한 번 허벌나게 푸지네잉. 두 번만 이 짓하믄 좆뿌렝이(뿌리)가 녹아나겄다.” 형리 하나가 땀을 닦으며 걸쭉한 농을 터뜨렸고, 말 잔등 위에서 삭신이 녹아버린 노신들은 그들을 야단칠 기운조차 없었다.






나이 열여섯에 이미 고시에 수석 합격한 수재 중의 수재 밤골 선생이었다. 곱상한 외모와 달리 성격이 고집스럽고 물러섬이 없어 하필 교육공무원이 되자마자 질문을 던진 이가 그 유명한 대학자 무른내(退溪) 선생이었다. 택호처럼 성정이 부드러워 뭇 제자들을 야단치느라 언성 한번 높인 적이 없어 다른 말로 가시내 선생이라는 우스운 별호까지 붙었으나 여전히 무골호인(無骨好人)이었다. 오랜 사유와 연구를 거쳐 오십줄을 넘겨서야 리(理)와 기(氣)에 대한 논의를 정리하여 발표했는데, 손으로 잡을 수 있고 말로 표현할 수 있으며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는 모든 기(氣)들을 좌우하는 리(理)가 있다는 관념론(觀念論)의 정수였다. 물질의 근원을 살피는 크고 작은 방식에 무른내 선생의 리기론(理氣論)이 도입되지 않는 경우가 없었고, 특히 내가무공(內家武功)을 수련하는 무인들 역시 리기론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기혈(氣穴)을 흐르는 내력(內力)을 모으는 방식과 원리가 곧 리(理)였고, 갈무리한 내공을 기술로 표출하여 상대를 타격하고 꺾는 외공(外功)의 초식이 기(氣)라고 봐도 무방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세를 풍미한 리기론에 열여섯 풋내기 교육공무원 밤골 선생이 기통론(氣通論)으로 반론을 제기함이란 실로 엄청난 일이었다.






훗날 색목인들의 서역에서 유물론(唯物論) 등의 현실주의(realism) 철학을 공부하여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실증적인 것만을 믿게 된 젊은 밤골 선생에게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손으로도 잡을 수 없고, 눈으로도 볼 수 없으며, 말로도 표현할 수 없고, 헤아림으로도 닿지 않은 영역에 비로소 리(理)가 있다면 그 증거는 찾을 수 없었고, 설사 있다 한들 인간에게는 소용이 없을 터였다. 따라서 그의 헤아림에 모든 것은 전부 기(氣)일 수밖에 없었다. 다만 애초에 순수하게 타고난 기(氣)가 있고, 후에 길러서 배우는 기(氣)가 있어서 그 두 기운이 서로 상응하며 변화하는 것이었다.





밤골 선생은 무른내 선생에게 끝없이 서찰을 보내어 의문과 비판을 가했고, 무른내 선생은 온유하게 대답하며 반문했다. 후에 무른내 선생이 노환으로 죽었을 때 밤골 선생은 그를 스승의 예로 장사지냈고, 무른내 선생의 나이가 되었을 때 심곡으로 돌아와 은거하며 후학을 가르쳤다.




그가 비록 명망 값을 하느라 심곡의 학장을 맡았으나 안타깝게도 세상은 더 이상 형이상학(形而上學)의 세상이 아니었다. 금전이 그렇듯 학문도 출세의 도구였고, 심곡에 입문한 서생들은 심학(心學)과 현학(玄學)을 논하기보다 의학과 변론, 정치 등을 배우길 원했다. 밤골 선생은 해가 갈수록 서생들의 요구에 따라 학과 과정을 재편해야 했다. 리와 기를 통해 세상과 인간의 근원을 탐구하는 심학은 학생은커녕 선생조차 구하기 힘들어 밤골 선생이 늙은 몸을 이끌고 졸고 있는 서생들을 깨워가며 가르쳐야 하는 형편이었다. 젊은 시절의 성정이 세월에 함께 물러버린 밤골 서생은 기미 낀 얼굴을 쓸어가며 무른내 선생을 자꾸만 떠올리곤 했다.


- 그런고로 이 좁고 험한 계곡에 홀로 외로이 늙어 쉰내나는 촌로를 성균관의 석학들께서 무슨 연유로 찾으셨습니까?


밤골 선생이 손수 끓여낸 차 한 잔에 어느 정도 피로를 녹여낸 노신들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아직 속세의 때에 찌든 어젊은 서생들과 어울려 질펀한 술판을 벌이는 형리들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사이사이 밖에서 새었다.


- 자객행을 하노라 스스로 이름한 자객 이무상을 아십니까.

- 비록 붓을 벗삼아 늙었으나 그 위명은 들어 알고 있습니다. 모든 무기를 다룰 줄 알아 강호대제학이라고 불리우는 무인이라지요. 나이가 적지 않아 은거했다 들었습니다만.

- 그 작자가 황당하게도 통령을 시해하겠다 천명하고 탐라로부터 서울까지 작정하고 길을 나섰습니다. 흔적을 감추는 것도 아니요, 바람처럼 달리는 것도 아니라 추적하기는 어렵지 않는데 정작 막을 방도가 없습니다.

- 놀라운 일이군요. 행여 그 자객이 거병(擧兵)을 하였습니까?

- 아닙니다. 참으로 헤아림을 벗어나는 일이지만 적수공권에 혈혈단신(孑孑單身)이올시다. 무공이 뛰어나 병조에서 급파한 다섯 고수를 모두 꺾어 쓰러뜨렸으니 이미 무공 대결로는 저지할 수 없다고 보아야 합니다. 헌데 그 한 명을 잡자고 대군을 보내기도 모양새가 좋지 않거니와 새로 제정된 공화국 법에도 어긋나는 과잉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 대의회에서는 수많은 의원들이 날마다 이무상의 자객행을 두고 공화국에 대한 반역행위인가 아닌가 를 판단하여 군대를 파병해야할지를 논의하기가 삼천릿길입니다. 그리하여 묘수가 없을까 하여 부득이하게 심곡의 밤골 선생을 찾아뵙게 되었으니 부디 큰 가르침을 내려주십시오.



밤골 선생은 관자놀이를 실룩거리며 웃었다. 생각할수록 재미난 일이었다. 열여덟 종류의 병기를 모두 다룰 줄 아는 이인(異人)이 한 나라의 지도자를 치고자 단신으로 올라오는 마당에 소수의 고수는 그를 대적할 자가 없고, 다수의 범인(凡人)들로 막자니 아닌게 아니라 낭비였다. 열 포졸이 한 도둑 못 잡는다는 옛말이 틀린 게 없었다. 그러고도 입질만 주고받는 대의원들의 행색이 눈앞에 보여 한숨을 쉴 도리밖에 없었다.




밤골 선생은 찻잔을 비우고 다반(茶盤) 구석에 놓인 조그마한 종을 울렸다. 귀에서부터 가슴까지 흘러 적시는 물기어린 소리였다. 만취한 형리와 서생들이 박자와 음률을 떠들썩하게 놀아제끼는 와중에도 문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간결하고 맑았다.

- 스승님, 불러 계시옵니까.

- 그래, 가서 네 사형 사매들 좀 오라 일러라.

- 모두 말씀입니까.

- 그래, 모두 다 부르거라.



노신들은 수염을 꼬며 말없이 차만 마셨다. 생각 같아서는 그들도 답답하여 형리들처럼 술을 사발로 들이키고 싶을 터였다. 한때 반도를 대표하는 양대 지성이자 십만양병(十萬養兵)을 주장하던 호전적 정치인이기도 했던 밤골 선생이 뭔가 그럴듯한 계책을 내줄 줄 알았는데 느닷없이 자기 제자를 부르는 속뜻을 알 수가 없었다.

- 무기에 정통한 자를 무기로 치려니 어렵겠지요. 다른 방도를 써볼까 합니다.

- 선생, 그렇다고 서책과 지필묵으로 그 자를 쳐죽이겠습니까.


밤골 선생의 말에 대번에 성질 급한 반론이 말꼬리를 물었다. 내 젊었을 시절 저러하였던가. 돌아가신 무른내 선생 속이 넓기도 하셨구나. 밤골 선생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 이 일을 촌로에게 맡기시려거든 끝까지 맡겨보시오. 믿어볼만한 제자들이오. 일이 잘되거든 온고지신(溫故知新)이요, 이고비금(以故批今)하는 셈쳐서 심학에 대한 지원이나 더해주시오. 우리가 예전에 배우던 학문은 결코 이렇게 묻혀야 될 것들이 아니오.



제자들이 건너오는 소리를 들으며 밤골 선생은 느닷없이 부끄러워 눈을 감았다. 무른내 선생은 학자로서 고고하게 살다 갔지만 심곡의 운영을 맡은 그는 제자들에게 재주 팔기를 종용하고 있었다. 학문을 위해 금전에 고개를 수그려야 하는 그 사실이 새삼 비참했다. 아쉽게도 제자들은 너무 순하여 젊었을 적 밤골 선생처럼 대거리하지 않았다. 그 것이 오히려 더욱 가슴이 아팠다.




3.



빗방울이 이무상을 불렀다.


자객치고는 여유롭고 느긋한 자객행이었다. 잘고 가느다란 비가 어깨 위로 튀고 솟으며 사방을 적셨다. 마른 옷을 챙겼으나 구태여 갈아 입거나 우산을 펼치지 않았다. 도롱이도 없이 이무상은 비에 젖은 숲을 걸어들어갔다. 보법을 깊이 익힌 그의 발끝이 가볍게 내려앉았다. 급할 게 없는 걸음이었으나 경계를 늦추지는 않았다. 식은 주먹밥을 한 걸음에 한 모금씩 물었다. 질게 지은 밥에 고기와 야채 고명을 넣고 참기름과 깨소금으로 간을 한 주먹밥이 입 안에서 고소하게 퍼졌다. 밥알이 목에 걸릴 때마다 허리에 찬 술병을 빼어 목을 축였다. 술은 독한 향을 뿌리며 목구멍을 뜨겁게 훑어내려 빗물과 달랐다. 이무상의 몸은 안팎으로 젖어가고 있었다.


- 마음도 젖는구나.


이무상은 쓰게 웃으며 술병을 도로 허리에 찼다. 산세가 험치 않다 여겼는데 보기보다 숲이 깊었다. 내공을 기혈에 따라 일주천(一走天)하여 젖은 몸을 데우고 기운을 돋웠다. 비를 맞아가며 산길을 걷는 일이 어려울 것은 없었으나 어쩐지 마음까지 젖어내려 자꾸만 옛 생각이 나는 것이었다.


- 부질없는 과거구나. 무상아. 무상(無常)하다.



발을 디딜수록 이무상은 숲이 점점 자신을 강하게 끌어당긴다고 느꼈다. 바다에서 헤엄칠 때 흐름을 잘못 타면 깊은 곳까지 단숨에 끌려가는 경우가 있었다. 물을 거슬러 박차고 나오는 일은 이무상 같은 고수에게도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물처럼 휘어져 끌어당기는 길이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 여인 같구나.


문득 한 여인이 떠올랐다. 왜 갑자기 그 여인이 떠올랐는지 이무상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아직 풋익고 설익었던 이무상을 지금처럼 한없이 끌어당기던 여인이었다. 이름처럼 한송이 연꽃 같은 여인이었다. 성도 몰라 연(蓮)이라고 불렀다. 그녀의 연(戀)이 되고파 연(緣)을 이으려던 세월이 적지 않았다. 눈끝이 서늘하고 차분하게 내려앉아 고운 여인이었다. 말끝을 눌러 단호하게 내지르는 목소리가 뜻밖에도 요염하고 달콤했다. 이무상이 창검에 미쳐 있을 때 그녀는 취흥 돋는 시문을 즐겼다. 밤바람을 등지고 달빛을 칼날로 베어 쪼갤 때 연은 술잔을 기울이며 담배를 태웠다. 하늘하늘 가녀린 꼬리를 올리는 연기가 코끝을 스쳐 매웠다. 애초에 보는 세상이 달라 말 한 마디 못하고 결국 떠나야 했던 이무상이었다. 그녀는 무섭게 그를 끌어당겼지만 바다의 역류(逆流)를 떨치듯 그렇게 갈 수밖에 없었다. 꿈에 미친 남자는 외로움을 겉멋처럼 두르고 다니는 법이었다.


- 철이 없었지.


이무상의 호흡이 민망하게 흩어져 입가에서 부서졌다. 정신을 차리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발자국이 어지럽고 깊었다. 비가 내려 질퍽한 흙길 위로 발의 무게가 사정없이 내려앉아 있었다. 조금 오래 걸었을 뿐인데 이리 지쳤을리가 없었다. 잡념 때문이리라 이무상은 스스로를 탓하며 주위를 살폈다. 지척의 나무조차 분간할 수 없을만큼 안개가 짙었다. 무해(霧海). 안개의 바다였다. 오리무중(五里霧中)이 실감났다.

- 뿌옇구나. 그녀 살결이 그랬다.


마음조차 전하지 못한 연을 떠날 때 그녀의 손등은 달빛에 곱게 타서 커피빛이었다. 허전한 마음을 채워주고 데워주던 여인은 커피 마시기를 즐기던 소희(素姬)였다. 이름처럼 가느다란 손목도 방울 같은 귓불도 매끈한 등과 아담한 목덜미도 모두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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