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성만이 녀석은 정말로 ‘슈뢰딩거의 상자’를 만들었다. 가로세로 1미터의 검은색 아크릴상자 속에는 50%의 확률로 독가스를 내뿜는 장치가 들어 있었다. 상자 속에 고양이를 집어넣고 뚜껑을 닿으면 장치는 삼십 초 후에 룰렛을 돌려 가스를 내뿜거나 우유를 흘리게 된다. 나는 성만이가 왜 이따위 실험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슈뢰딩거의 고양이 실험은 실재했던 상황이 아니라 물리학자들 사이의 가상의 논쟁이었다. 이런 잔인한 실험을 한다고 해서 알아낼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
“재미있잖아. 그리고 어차피 처치 곤란한 녀석이니까.”
그제야 나는 성만이가 자신이 키우던 고양이를 기묘한 방법으로 안락사 시키려 한다는 걸 알게 됐다. 결혼도 안 한 성만이가 밤샘 연구가 계속 되는 일상에서 혼자 애완동물을 키운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고양이를 상자 속에 집어넣으면 고양이는 양자역학적으로 살아 있는 상태와 죽어 있는 상태가 중첩적으로 존재하는 반생반사(半生半死)의 상태가 된다. 상자를 열어보게 되면 고양이는 살아있거나 죽어있겠지만, 죽었다고 해도 성만이의 책임은 없다. 상자를 열어보는 순간 성만이의 관측행위가 파동함수를 수축시킨 것이지, 성만이가 고양이를 살해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만이는 고양이에게 마지막 인사와 정중한 사과를 하고, 고양이를 상자 속에 집어넣었다.

주인이 그를 들어 올려 우울하고도 음흉한 눈빛으로 쳐다보고는, 이상한 상자 속에 집어넣었다. 뚜껑이 닫히고, 어둠이 찾아왔다. 고양이는 어둠속에 있는 것은 익숙했지만, 갇혀 있는 데는 익숙하지 않았다. 더구나 뭔지 모를 두려움이 온 몸을 엄습해 발톱을 세웠다. 잠시 후 딸깍-치익- 하는 기묘한 소리가 들리더니 콧구멍과 입속이 따끔따끔해지고 숨쉬기가 힘들어졌다. 털이 모두 뽑히는 것처럼 아프고 입에서 끈적끈적한 액체가 흘러나왔다. 그는 주인이 자신을 버렸다는 것을 온 몸으로 알았다. 털갈이와 발정을 하는 자신이, 주인은 귀찮았을 것이다. 어둠 속에서 다시 어둠이 찾아왔다. 단지 보이지 않는 어둠이 아니라, 아무 것도 느낄 수 없는 무시무시한 어둠이었다.

우리는 마스크를 하고, 상자의 뚜껑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사지를 비틀며 고통스럽게 죽어간 고양이의 시체가 보였다. 성만이는 죽은 고양이를 꺼내서 검은색 비닐봉지에 담았다. 나는 죄책감으로 불편해 보이는 성만이를 달래기 위해 다중우주론을 꺼내들었다.
“우리가 있는 우주에서는 고양이가 죽어 버렸지만, 다른 우주에서는 우유를 핥으면서 잘 살고 있을 거야. 안 그래?”
성만이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무시무시한 고통 속에서 깨어났다. 콧구멍과 입속은 아직도 따끔거리고, 머리가 깨지는 것처럼 아팠다. 하지만 점차 고통은 가시고, 쫄쫄거리는 소리와 향긋한 냄새가 감각기관을 기분 좋게 자극했다. 그는 본능적으로 다가가 조그만 꼭지에서 흘러나오는 우유를 핥았다. 뚜껑이 열리고 주위가 밝아지면서, 위에서 주인이 얼굴을 상자 속으로 들이밀었다. 주인의 얼굴을 보는 순간, 고통의 기억이 좀비처럼 벌떡 일어났다. 그는 배신감에 치를 떨면서, 발톱을 날카롭게 세웠다.  

룰렛은 독가스대신 우유를 선택했고, 고양이는 살아남았다. 성만이는 오히려 잘 됐다는 표정이었다. 기왕에 이렇게 된 거, 하늘의 뜻으로 알고 귀찮아도 계속 키우던지 새 주인을 찾아줘야겠다면서 고양이를 들어올렸다. 그 순간, 고양이가 요동을 치면서 성만이에게 달려들었다.
“아악!”
눈 깜짝할 새에 벌어진 일이었다. 성만이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얼굴을 부여잡고, 아직도 자신을 향해 날카롭게 포효하고 있는 고양이를 노려보았다.
“이 자식, 기껏 살려주려고 했더니만...........”
내가 말릴 사이도 없이 성만이는 렌치를 집어 들고 고양이를 내리쳤다. 퍽퍽퍽.....둔탁한 소리와 함께 고양이는 하나의 고깃덩어리로 짓이겨지고 있었다.  

고양이는 조그만 꼭지에서 흘러나오는 우유를 핥았다. 뚜껑이 열리고 주위가 밝아지면서, 위에서 주인이 얼굴을 상자 속으로 들이밀었다. 주인의 얼굴을 보는 순간, 렌치로 살해당했던 기억이 머릿속에서 살아났다. 그는 배신감을 느꼈지만, 발톱을 숨기고 혀로 주인의 손등을 핥았다. 얌전히 굴었지만, 언젠가 자신을 두 번 씩이나 살해한 주인의 목을 물어뜯어야겠다고 복수를 다짐했다.  

룰렛은 독가스대신 우유를 선택했고, 고양이는 살아남았다. 성만이는 오히려 잘 됐다는 표정이었다. 기왕에 이렇게 된 거, 하늘의 뜻으로 알고 귀찮아도 계속 키우던지 새주인을 찾아줘야겠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고양이의 눈빛이 은근히 기분 나빴다.
“야, 네 고양이 은근히 기분 나쁘다. 눈빛이 꼭...........저승에서 살아 돌아온 거 같아.”
“뭐 고양이 목숨은 아홉 개라는 말도 있잖아.”
성만이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고양이를 쓰다듬었다. 고양이가 하품하는 동안 날카로운 송곳니가 보였다.

- 끝 -
김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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