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2006년 단편중 마지막 입니다.


[단편] 기억 – 남은 용량 없음

Copyright ã 2006 by박 찬일(Chaneel Park)
Nickname 화룡
All rights reserved


하얀 천장, 하얀 벽, 하얀 커튼. 햐안 침대 시트. 하얀 베개, 하얀 환자복, 하얀 간호사복, 하얀 의사 가운… 이건 뭐 일부로 놀리려는 건가 하고 그는 이를 갈았다. 흰색은 공백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계속 노려보다보면, 오래된 병실에 흰색 페인트를 덧칠한게 눈에 띈다. 이 병동의 환자들이 모두 비슷한 이유로 여기 와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병원 측이 환자에 대해 극도로 무신경하거나 아니면 고의적으로 환자를 조롱하고 있다고 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450MU 정도를 잃으셨군요.”

의사는 차트를 들여다보며 그렇게 말했다. 450엠유. 그렇게 말해봐야 어느 정도인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기억보조장치 수술이 일반화되어 길 가는 사람 중 열에 하나 정도는 기억보조장치를 달고 있는 지금에 와서도 사람들은 MU(Memory Unit) 이라는 단위에 익숙해지지 못했다.

“도대체 450MU가 어느 정도의 기억입니까?”

의사는 이런 질문에 익숙해져 있었다. 이거 가격이 얼마입니까 하고 물어오는 손님에게 대답하는 점원과 별 다를 바 없는 말투다. 사무적인 친절함이 묻어나는 장황한 설명에는 그도 이골이 나 있었지만, 그렇다고 딱히 제대로된 대답이 있을 수가 없다.

“보통 100 MU가 책 한 권의 기억 정도니까, 책 네 권 반 정도의 기억이 되겠군요. 물론 아시다시피 그 책을 읽고 느낀 점이라던가 덧붙여 상상한 그림 등을 합친 기억이니까요. 일상 생활의 열시간 정도의 기억이라고도 할 수 있죠.”

의사는 ‘책 네권 반 정도’ 라는 건 경우에 따라서 얼마든지 책 사십권도 될 수 있고, 일상 생활 열시간 정도라는 건 경우에 따라서 일상  생활 10분에서 일상 생활 한달치도 될 수 있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 메모리 유닛에 관해서 평균치라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의사도 잘 알았고, 환자들도 그 좋은 기억력 덕분에 다 알고는 있었지만, 알고 있으면서도 평균값이라는 건 믿고싶어지는 숫자였다.

“선생님은 제 총 기억 용량을 보셨겠지요? 450MU라는 건 많이 잃은 겁니까?”

의사는 안경을 만지작거리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꾸며낸 표정이다. 하루에도 골백번씩 같은 질문을 들어왔고, 대답 역시 항상 같다. 다만 환자가 어떻게 반응하는가 하는 문제가 남아 있긴 하지만.

“아시다시피, 총 기억 용량은 법적으로 알아서는 안 되는 수치입니다. 잘 아실 텐데요.”

당연히 잘 안다. 기억보조장치 메뉴얼은 이미 다 기억하고 있으니까. 예를 들어, 최초의 기억보조장치는 총 기억 용량을 표시했었으나, 총 기억 용량이 그 사람이 얼마나 똑똑한가를 판가름하는 척도가 되어버려 사회적 이슈가 되자 법적으로 총 기억 용량을 표시하지 못하도록 한 일이라던가. 학자들이 아무리 소리높여 총 기억 용량과 그 사람의 실제 지능지수는 전혀 관계 없다고 외쳤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 사람이 얼마나 공부를 열심히 했는지가 시험 점수에서 나타난다고 믿는 것처럼, 그 사람이 얼마나 똑똑한가는 총 기억 용량 수치에서 나타난다고 사람들은 쉽게 생각해버렸다. 사람들은 숫자를 너무 좋아했다. 그래서 새로 생산되는 모든 기억보조장치는 총 기억 용량과 남은 기억 용량을 ‘알 수 없음’ 으로 표시하게 되었다.

물론 기억보조장치 도입 수술을 시술하는 의사들은 환자의 총 기억 용량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을 절대 환자에게 발설해서는 안되었고, 기록으로 남겨서도 안되었지만, 모든 의사가 의무적으로 기억보조장치를 사용하고 있는 만큼 그 환자의 얼굴과 총 기억 용량은 그들의 머리에 분명하게 각인되어 있을 것이다. 그래서 환자들은 의사가 미소지을 때마다 혹 그것이 비웃는 것이 아닌지 몹시 신경쓰여했다.

“그건 알지만, 그냥 적당히 말씀해 주실 수 없을까요. 아무래도 걱정이 되서요.”
“글쎄요… 평균적으로 일반 성인은 200조 MU 정도의 기억 용량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450MU라는 수치는 음주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기억소실 치고는 꽤 높은 수치라는 거지요. 보통 음주로 기억을 소실하는 경우는 200에서 300 MU정도를 잃거든요.”

소주 여덟 병 값, 9600원의 힘 치고는 괜찮았다. 병원에서 제공하는 기억삭제 서비스는 100MU당 만원이었으니, 가격대 용량으로만 보자면 소주도 훌륭한 수단이었다. 다만, 어떤 기억을 지울 수 있을지 기억삭제 서비스처럼 깨끗하지가 못하는 것이 치명적인 단점이었다.

“기억보조장치를 갖고 계신 이상 음주, 흡연, 및 기타 뇌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약품은 자제하셔야 한다는 것은 잘 아실 테지요. 잊고싶으신 기억이 있으시다면 합법적인 기억삭제 서비스를 사용하시기를 권장합니다.”
“아, 예. 그저 어쩌다 술을 마시기 시작하다보니… 다음부터는 주의하지요.”

다른 건 그렇다 쳐도 술과 담배는 보건당국을 골치아프게 만드는 요주의 품목이었다. 기억보조장치가 세계적으로 일반화되면서, 기억보조장치에 영향을 끼쳐 사용자의 두뇌에 손상을 입힐 수 있는 술과 담배는 그 판매량이 급격히 줄었다. 그러나 그에 비례해서 허용치 이상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워 기절해 병원으로 실려오는 사람들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각 병원은 관련 병동을 따로 만들어야 할 지경이 되고 말았다. 물론 목숨을 잃을 정도로 심각한 경우는 없었지만, 허용치 이상의 약물로 기억보조장치에 이상이 생길 경우 약간의 기억을 잃게 된다.

“퇴원은 언제쯤 할 수 있을까요?”
“지금 간단한 검사를 받고 괜찮으신 것으로 판단되면 내일 아침 퇴원시켜 드리죠. 김간호사, 준비좀…”
“예.”

의사는 몇 장의 종이를 챙겨들고, 간호사는 한 장의 서류와 펜을 준비했다. ‘사회적응 필수기억 존재여부 검사 결과 확인 동의서’ 라는 긴 제목의 서류에는 ‘검사 중에 나온 질문에 정직하게 답변하였습니다’ 라던가 ‘검사 결과를 기억보조장치 삽입 수술 당시의 기록에 의거 보호자에게 재확인 받는 절차에 동의합니다’ 따위의 귀찮은, 그러나 법적으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들이 가득했다.

그가 사인을 해서 서류를 넘기자 의사는 그제서야 질문을 시작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최 재영.”
“가족관계는 기억나십니까?”
“시골에 부모님이 계시고 두 살 위의 형이 한 명 있습니다.”
“주소는?”
“서울시 성동구 성수 1가 1동 한진아파트 104동 305호.”
“전화번호는 기억나십니까?”
“02-547-2890.”
“지금 다니고 계신 직장은?”
“동영물산.”
“직장으로 가는 길을 기억하실 수 있습니까?”
“있습니다.”

우스운 질문들이다. 이것들을 잊어버린 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기억보조장치는 몇몇 기억들을 완벽하게 지워버린다. 인간의 뇌가 기억하는 것들이 망각의 늪에 빠지지 않도록 보조하는 기억 보조장치는, 술기운으로 생긴 순간의 망각을 영원의 망각으로 바꿔버린다. 기억을 지운다는 것은 정확한 말이 아니었다. 그건 기억을 덮어씌워 버리는 일이었다. 하얗게 덮어버린 위에는 다시 아무것도 쓸 수 없다.

“… 마지막 질문입니다. 현재 연인에 대한 것이 기억나십니까?’

대답은 바로 들려오지 않았다. 의사가 들고 있는 펜은 ‘사회적응 필수기억 이상 무’ 칸에서 맴돌다, 천천히 ‘재검토 요망’ 칸으로 옮겨갔다. 그는 한참이나 침묵하고 있다가, 간신히 대답했다. 갈라진 목소리가 의미심장했다.

“생각납니다.”

그는 의사가 ‘이상 무’ 칸에 사인하는 것을 분노 섞인 눈으로 노려보았다. 종이 위를 가볍게 미끄러지는, 의사들 특유의 날림체를 그려내는 손에는 안도감이 다분히 포함되어 있었다. 가장 골치아픈 부분이다. 다른 기억들은 그저 다시 외우면 되는 것들이지만, 연인에 대한 부분, 애초에 이 검사의 필수 항목이 아니었으나 소비자 단체의 항의로 포함된 이 민감한 항목은 의사들을 가장 골치아프게 만드는 부분이었다. 제발 이 부분만은 그냥 조용히 넘어갔으면 하는 것이 의사들의 약간은 비겁한 바램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사실 의사들을 탓할 바가 못 되었다. 그들은 자신있는 부분, 즉 호르몬 분비를 체크한다거나 두개골을 절개하고 신경세포를 만지작거리는 따위의 전문분야가 아닌 연애상담이라던가 정신적 상해에 대한 치료 같은 것들에 대해서는 일반 사람이나 다름없는 문외한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퇴원하셔도 문제 없겠군요. 아시겠지만 당분간은 지인들의 도움을 받을 것을 권합니다. 혹 기억나지 않는 것이 있으셔도 혼자 고민하지 마시고 지인들에게 부탁하시거나 전문가와 상담하도록 하세요. 아참, 운전면허가 정지되는 건 아시고 계시죠? 다시 가서 간단한 재시험을 받으시면 됩니다.”

그는 의사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그는 몇 번이고 기억검색을 되풀이하며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찾으려 노력했다. 그러나 나오지 않는다. 술로 하얗게 덧칠해버린 기억의 얼룩들을 보며 그는 좌절했다. 하필이면 그 기억들일까. 잊으려면 관련된 부분까지 싹 잊어버렸으면 좋았을 텐데.

“나는 왜 선미랑 헤어졌지?”
“예?”

재영에게서 멀어져 가다 말고 돌아선 의사의 반문에 재영은 답하지 않았다. 무신경한 의사는 멀어져갔다.


*                *                *                *                *                *

공중전화의 다이얼을 누르며 그는 초조한 마음이 되었다. 병원기기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우려에 휴대전화 사용을 금지한 병동 내에서 그가 쓸 수 있었던 것은 15분이나 줄을 서 기다려야 했던 공중전화였다. 왜, 왜, 왜. 결코 기억나지 않는 새하얀 공백 앞에서 그는 자신의 의문을 해결해주리라 믿는 한 사람의 전화번호를 떠올렸다.

“여보세요.”

낯익은 목소리.

“성욱이냐?”
“… 어, 최재영? 야, 잘 들어갔냐? 너 오늘 하루 종일 전화 안받더라고, 그래서 걱정했지.”
“내가 뭐라고 했지?”
“엉?”
“내가 어제 뭐라고 했냐고!”

잠시의 침묵. 성욱이 길게 헛기침하는 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재영이 조바심에 다시 한번 물으려 할 때, 성욱이 입을 열었다.

“너 병원이냐?”
“응.”
“너 어제 나랑 술먹고 집에 가서 혼자 또 마셨냐?”
“응. 약간.”
“병신새끼… 내가 한계치 근처라고 집에가서 바로 쳐 자라고 했잖아.”

험악한 욕에 움찔할 재영이 아니었다. 기억삭제 서비스로 기억을 지워도 이런 기분일지 궁금했다. 멀쩡하던 기억의 한 부분만이 하얗게 덧칠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 앞뒤의 연관성으로도 도저히 어떤 기억인지 추리해 낼 수 없는 기억이 있을 때. 분명히 그것을 한때 알았었지만 지금은 도저히 기억해 낼 수 없는 그런 것을 느끼고 있을 때. 처음부터 가는 것이 불가능했던 것이 아니라, 원래는 갈 수 있었으나 지금은 움직이지 않는 벽이 막고 서 있을 때. 조바심이 점차 짜증으로, 짜증이 분노로 변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는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것에 분노하며 평생을 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네가 좀 말해줘. 어제 내가 뭐라고 그랬지?”
“하나도 기억 안나?”
“… 조금은 나.”
“너 송선미랑 헤어졌어.”
“그건 알아.”

그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눈두덩이를 한 번 문지르고 다시 질문했다.

“내가 궁금한 건, 왜 선미랑 헤어졌느냐 하는 거야.”
“몰라 새꺄.”
“… 뭐?”
“너 그런 이야기 한 적 없어. 선미랑 헤어졌다고 한 마디만 하고 나랑 줄창 병나발 불었어.”
“…”

그는 침묵했다. 반쯤 짐작하고 두려워하고 있던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제 진실을 말해줄 사람은 단 한 명 밖에 없었다.

“자식아, 어차피 기억도 반쯤 지워졌으니 잘된거야. 이 참에 병원에서 아예 기억삭제 해 버려라. 잊어버려. 잊는게 최고야.”
“이만 끊는다.”

내던지다시피  수화기를 내려놓은 그는 낡아빠진 병원 공중전화를 노려보았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그는 다시 한번 수화기를 집어들고 카드를 넣었다. 여전히 그의 기억 한 구석을 당당히 차지하고 있는 전화번호, 465-3149. 숫자 4와 6, 5를 눌러가던 그의 손끝이 멈칫한다. 뭐라고 말하지?

그녀의 전화번호를 떠올리는 순간 함께 대기상태로 끌어올려진 수많은 연관된 기억들을 보며 그는 이를 악물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끝으로 3을 누르려던 그는 끝내 포기하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지금은 할 수 없었다. 그는 공중전화에서 도망쳐 병원 밖으로 나왔다.

밤바람이 시원했다. 낮에 보았던 일기예보 화면을 떠올려 본다. 영상 17도. 쾌청한 날씨. 과연 구름 한 점 없는 쾌청한 하늘이었다. 주위를 둘러싼 빌딩의 숲에 가려 비좁은 틈새로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그 작은 틈새로도 하늘은 맑고 검고 무한했다.

그날도 그랬다. 영상 14도. 맑고 쾌청한 날씨. 시계는 저녁 8시 43분을 가리키고 있었고, 재영은 겨우 닷새 전에 기억보조장치 수술을 했고, 거기에 적응하기 위해 의미없는 산책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본 것은 무엇이든 기억되었고 집에 돌아와 기억을 검색해보면 그가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느낀 모든 것들이 바로 되살아났다. 마치 사진기를 처음 산 사람처럼 그는 자꾸자꾸 모든 기억을 남기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 때 본 사람. 우연처럼 스쳐지나간, 웃는 얼굴이 예쁘던 그녀. 친구와 음료수를 마시며 지나가던 그녀의, 소녀처럼 양갈래로 땋은 머리를 한 그녀의 뒷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그는 넋을 잃고 말았다.

그게 시작이었다. 그녀와 처음 만나던 때를 떠올리자 셀 수도 없이 많은 기억들이 함께 떠올라 대기상태가 되었다. 처음으로 이름을 묻고 친해지기 시작하던 때의 기억. 처음 고백하던 기억. 미묘하게 움직이는 그녀의 입술이 거부인지 아니면 허락인지 긴장해 두근두근 거리던 심장의 고동, 부끄럽게 고개를 숙이며 ‘응, 나도…’ 라는 대답을 듣던 순간의 환희,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껴안았고 가까이서 맡은 체취에 취해 반쯤 맛이 갔던 기억. 스크린의 배우가 하는 말에 입을 빌려 사랑해 라고 속삭이고, 영화관의 어둠을 틈타 뺏은 그녀의 입술에서 느껴지던 씁쓸하면서도 달콤한 립스틱의 맛. 어깨에 기대오던 그녀의 머리는 왜 그리도 그를 편하게 만들었던가.

그는 끊임없이 밀려나오는 기억들을 간신히 닫았다. 가슴이 너무 아팠다. 이토록 사랑하는데, 죽을 만큼 사랑하고 있는데 헤어져야 한단 말인가. 이 기억들을 모두 지우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기억보조장치를 한 사람은 아무 것도 잊을 수 없으니까, 그녀에 대한 사랑을 잊으려면 기억을 지워야 했다. 재영은 한동안 밤하늘을 올려다보다 다시 병원 안으로 뛰어들었다.

재빠르게 번호를 누르고 신호음을 기다린다. 낯익은 목소리가 대답한다.

“여보세요.”
“야, 성욱아! 내가 뭐라고 말했었지?”
“… 뭐?”
“내가 분명히 말하지 않았어? 선미가 기억보조장치를 안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 했어.”
“그리고?”
“… 변하는 사랑과 변하지 않는 사랑에 대해서도 이야기했지.”
“알았어. 고맙다!”

성욱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그는 전화를 끊었다. 분명 성욱은 나중에 쌍욕과 함께 그의 목을 부러트리려 할 것이다. 그가 기억하는 바에 따르면 성욱은 자기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는 사람을 인간 말종으로 취급했다. 그러나 그런 건 지금의 그에겐 관계없는 이야기였다. 그는 사랑하고 있다. 그리고 그가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로 그 사랑을 잃을 상황이었다. 이대로는 안된다. 후에 기억삭제 서비스를 이용하게 되더라도 이유는 알아야 했다.

병실로 돌아와서도 그는 잠들지 못하고 창가를 서성거렸다. 같은 병실을 쓰는 세 명의 다른 환자들이 그에게 눈치를 주고 있었지만 그는 의도적으로 그들을 무시했다. 그는 사랑을 믿는 사람이었다. 변하는 사랑. 변하지 않는 사랑. 기억보조장치를 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그는 사랑하고 있고, 그녀는 사랑하고 있지 않다 – 가능한 추리이다. 그는 그녀와의 모든 순간들을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심장이 터질 듯 두근거리고 설레이는 매 순간들. 그녀를 기다리던 순간조차도 행복했던 기억들. 그녀와 한 공간에서 숨을 쉬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세상은 아름다웠고 그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나이였다.

그러나 그녀는 다르다. 재영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녀는 기억보조장치를 하지 않았다.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라식 수술이 아무리 안전하고 부작용이 적어도, 만에 하나 일어날 수 있는 위험은 너무 컸기에 아직껏 사람들은 라식 수술을 기피했다. 마찬가지로 두개골을 절개하고 전기 신호를 보내는 기계를 뇌 안에 삽입하는 수술은 썩 유쾌해 보이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기억보조장치를 하게 되면 각종 술, 담배 등의 기호식품을 자제해야 했다. 절대 망각할 수 없는 완벽한 기억이라는, 기억보조장치의 존재 이유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도 있었다. 몇몇은 그 성능을 불신했고, 몇몇은 수술 실패를 두려워했다. 개중에는 잠재기억능력 개발에 방해가 될 수 있다는 학자들의 연구 결과 때문에 기억보조장치를 거부하기도 했다. 때문에 기억보조장치 수술이 그리 비싸지 않은 지금에 와서도 세계 인구의 10%정도만이 기억보조장치를 하고 있었다.

송선미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그녀가 기억보조장치를 하고 있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까르르 웃으며 반문했다.

“왜? 꼭 해야 하나?”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없으면 불편하잖아.”
“왜? 난 지금도 그냥 괜찮은데.”

그에게 팔짱을 껴오며, 그녀는 일부러 귀여운 목소리로 애교를 부렸다. 가끔 가다, 그녀가 몹시 기분이 좋은 날만 볼 수 있는 애교였다. 그는 주변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면서도, 그녀가 이렇게 애교를 부릴 때면 스스로를 자제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보통 때는 거의 하지 않는, 아니, 절대 하지 않는 간지러운 말을 하곤 했다.

“그거야 그렇지만, 너와 내가 사랑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을 영원히 기억할 수 없을텐데.”

그녀는 미소지었고, 그는 더 참을 수 없었다. 그는 기억했다. 뒤통수에 꽂히던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 쯧쯧거리며 지나가던 노인의 얼굴. 누군가의 헛기침. 그리고 그 모든 것들보다도 더욱 강렬했던 그녀의 입술과, 뒤섞이던 서로의 숨결과, 반쯤 감겨 그를 올려다보던 촉촉한 그녀의 눈동자였다. 그는 우울한 마음에 주먹을 쥐었다. 행복했던 과거의 기억과 행복하지 못한 현실이 가져오는 괴리가 너무 커 그는 거기에 빠져 죽을 것만 같았다.

‘이유만 알고나서,’

그는 생각했다.

‘기억을 지우자.’

그녀를 처음 만났던 순간부터 그녀를 사랑해온 모든 순간들을 지워버리자. 행복했던 순간을 하얗게 덧칠해 더 이상 아무 의미도 가질 수 없게, 그래서 현재의 순간을 과거의 행복에 비교할 수 없게. 그는 마지막으로 확인만 하면 되었다. 이제 그녀의 마음이 변했다는 것을 확인하기만 하면 되었다. 기억보조장치를 하지 않은 사람들은 많은 것들을 잊는다. 한때의 사랑했던 마음도 시간이라는 괴물 앞에서 퇴색하고 말았다. 그들의 기억은 아무런 갑옷도 입지 않은 연약한 먹잇감이었고 시간은 입맛을 다시며 덤벼드는 사나운 맹수였다.

망각은 인간에게 내린 신의 선물이라고 누군가 그랬다. 괴로운 순간을 잊을 수 있는 것은 정말 축복이다. 그러나 사랑마저 잊어버리게 만드는 망각은 그에게 있어 추악한 괴물일 뿐이었다. 그녀는 잊어버렸을 것이다. 첫 만남의 두근거림도, 그들이 속삭이던 달콤했던 사랑도, 그들이 함께 불사른 정열도 모두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오래된 사진처럼 퇴색해 버릴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다 삭아 없어져 버린, 그저 그런 사람이 있었지, 한때 사귀었던 남자친구였어 라고 중얼거릴 정도의 그런 기억이 되어버릴 것이다. 십년이 지나도 그 모든 순간을 기억하고, 첫 만남의 두근거림을 그때 그대로 간직하고 있을 그는 그런 변화를 참을 수 없었다.

“기억보조장치를 한 사람은, 기억보조장치를 한 사람만을 사랑해야 하는 걸까.”

답이 나오지 않는다. 기억보조장치가 상용화된지 5년. 아무도 그런 부작용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건망증이 심했던 그가 처음 기억보조장치 수술을 받도록 권유했던 성욱도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자기가 너무나도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이 언젠가는 변할수도 있다는 가능성. 그 자신이 전혀 기억을 잊지 않았기에 가끔 다른 사람은 잊어버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곤 하는 부작용 – 그래서, 그들이 속삭이는 사랑 조차도 자신의 사랑 만큼 영원할 거라고 믿게 되는 치명적인 부작용이 있다는 사실은 이 세상 누구도 말해주지 않았다. 그의 수술을 집도한 의사도, 애초에 그에게 수술을 권한 성욱도, 기억보조장치를 개발한 학자들도.

*                *                *                *                *                *

재영은 넥타이를 매며 거울을 보았다. 우울한 샐러리맨의 전형이 병원 화장실에 기대어 서 있었다. 병원으로 실려오던 때에 입고 있던 정장은 병원측에서 깨끗하게 세탁해 돌려주었다. 안사람의 넉넉함이 없는, 흠 잡을 데 없는 정장은 갑갑해 보였다.

“출근해야지.”

집에도 들르지 못하고 병원에서 바로 출근해야 하는 것이 인생이다. 어제 하루 병원에서 보낸 시간만으로도 직장 상사들은 충분히 화가 나 있을 터였다. ‘그러게 젊은 사람이 기계 같은 것을 머리에 박으니… 에잉, 쯧쯧. 이 나이먹은 나도 아직 기억력이 좋은데, 의지가 얼마나 약하면 기억조차 기계에 의지하려는 겐가?’ 쉰이 넘도록 만년과장을 벗어나지 못하는 김과장은 곧잘 그렇게 말하곤 했다. 이제 기억보조장치 문제로 쓰러져 회사를 하루 결근했으니 김과장은 얼씨구나 하고 그에게 잔소리를 해댈 터였다.

그는 김과장이 건망증으로 잊어버려 부장에게 깨졌던 사건들을 하나 하나 되짚어 보며 그 중 어느 것으로 김과장의 입을 막을지 고민했다. 퇴원 수속을 밟으면서도, 주의사항을 열심히 설명하는 간호사를 앞에 두고도 그는 계속 김과장의 실수들을 떠올렸다. 말하자면 그건 일종의 엄폐막이었다. 한 가지 생각에만 몰두해, 다른 기억들이 표면 위로 부상하는 것을 막는 가장 오래된, 그러나 그리 오래 가지 않는 방법.

“면허가 일시정지 되셨습니다. 저장된 루트를 바탕으로 스마트드라이버 기능을 사용하시겠습니까?”

익숙한 기계음은 그의 차의 네비게이션 인공지능의 목소리다. 새 차는 자신이 원하는 목소리로 바꿀 수 있는 기능도 있다지만, 그의 5년 된 차는 그런 기능은 달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익숙해져버린, 그러나 여전히 정이 가지 않는 차가운 기계음에 운전을 부탁했다.

“스마트드라이버 기능을 가동합니다. 목적지를 선택해 주십시오.”

음성인식 장치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그런 비싼 옵션을 달 만큼 부유하지 못한 재영은 네비게이션 화면의 터치패드를 눌러야만 했다. 때때로 주관식보다 객관식이 어렵다. 이것도 맞는 답일 듯 하고 저것도 맞는 답일 듯 한데, 마음은 흔들리고 결정은 쉽지 않다. 실수를 허용치 않는 빡빡한 서민생활을 28년이나 해왔다면 누구나 정답강박증에 걸리기 마련이다. 선택지는 많고, 근접한 답은 답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오직 정답만이 받아들여진다. 그는 ‘동영물산 본사’라고 쓰여있는 칸을 지나쳐 그 밑의 칸을 눌렀다. ‘사랑스런♡선미네’ 익숙하지 않은 터치패드에서 몇 번이나 잘못된 기호를 선택하는 고생을 하며 입력했던 작은 하트가 그의 가슴을 후볐다.

결국 소용없었다. 김과장의 실수에 대한 생각을 아무리 오래해도 막을 수 없었다. 불가항력이라고 스스로를 위안해보이지만 입안이 썼다. 스마트드라이버 기능을 사용한 차는 평소의 그가 운전할 때와는 다르게 부드럽고 천천히 움직였다. 모든 제한속도를 지켰고, 모든 교통법규를 지켰다. 규정속도를 지켜 달리는 그를 참다 못한 뒷차가 그를 추월해 갈 때도 속도를 늦추며 자리를 양보해 주었다.

술에 취했을때나 전날 밤 늦게 자서 극도로 피곤한 상태가 아니면 스마트드라이버 기능을 써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재영은 아무의 방해도 받지 않으면서 동시에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아도 되는 낯선 시간과 만나게 되었다. 그는 그 시간을 유익하게 쓰기로 마음먹었다. 뭐라고 말해야 할 지를 고민하는 것이 그의 과제였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전날밤에도 결국 나오지 못한 답이 고작 삼십여분의 시간 만에 나올 리가 없었다.

“바보같군.”

그녀의 집 앞에서 그는 중얼거렸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아무것도 생각해내지 못한 채 초인종만 두 번 누르고 난 후에 말이다. 아무 대답 없는 묵직한 철문 앞에서 그는 씩 웃어버리고 말았다. 휴대폰의 발신자 표시에 여섯 번이나 회사 번호가 찍혀 있지만 그는 그것을 무시했다. 그녀가 자신과 같은 식으로 회사에서의 전화를 받고 싶지 않다면 지금쯤 직장에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하아.”

그는 그녀의 대문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뭐, 시간 벌고 좋잖아, 하고 생각해 보았다. 그녀가 돌아오려면 6시간 남아 있었다. 길고 충분한 시간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의 왼쪽 눈을 아프게 하던 햇살이 정수리에 내리꽂히다 다시 오른 눈을 찔러왔을 때 까지도, 그는 아직 시간이 남아있다고 생각했다. 백열하던 해가 금빛으로 변하고, 다시 마지막 남은 붉은 조각을 흘리며 사라지던 순간까지도 그렇게 생각했다. 아직 시간은 있어. 뭔가를 생각해 낼 수 있을거야.

설마 기억보조장치에 생긴 손상이 뇌의 사고능력에도 영향을 끼친 것일까 하는 작은 의구심이 들었다. 학자들은 그런 일은 절대 없다고 호언했지만 혹시 모르는 일일 수도 있지, 하고 그는 웅얼거렸다. 하늘이 묵직하게 걸려 늘어진 전깃줄이 어느새 하늘에 묻혀 보이지 않게 되고, 홀로 외로운 가로등에 불이 들어올 때까지도 그는 아무런 할 말을 생각해 내지 못했다.

그녀의 그림자는 또박거리며 걸어왔다. 그녀의 구두 뒤축이 보도블럭에 부딪쳐 나는 소리인지, 아니면 그녀  스스로의 외로운 그림자에 부딪쳐 나는 소리인지 재영은 알지 못했다. 불규칙한 걸음걸이는 그녀의 경쾌한 걸음과는 멀었다. 비틀거리던 그녀의 그림자는 전봇대의 그림자에 기대어 한참을 쉬었다. 어두운 주황색 전구알이 스쳐간 그림자에서 상실감이 뚝뚝 묻어나왔다.

“선미야.”
“… 오빠?”
“저기 말야.”

밀쳐내는 그녀의 손길에 힘이 없다. 재영은 강제로 그녀를 돌려세웠다. 눈물이 그렁한 눈이 그를 올려다봤다. 슬픈 눈이다. 뭐라고 말해야 하지, 그는 결국 구하지 못한 답을 서둘러 만들어내려 애썼다. 그러나 그녀가 먼저였다. 그녀의 주먹이 가슴을 쳤다. 아팠다.

“왜 내가 싫어?”

그녀가 물어왔다. 재영은 뭐라고 답해야 할 지 몰랐다. 왜냐면 그건 그가 간신히 생각해낸 질문이었기 때문이었다. 질문만을 준비했던 그는 답변을 낼 수 없었다.

“왜…?”
“왜 내가 싫어졌어? 나 아직도 오빠를 이만큼 사랑하는데! 이렇게 사랑하는데!”

왜 내가 할 말을 네가 하고 있는 거니, 하고 묻고 싶었다. 질문자와 답변자가 뒤바뀐 이 상황에서 그가 취할 수 있는 선택은 많지 않았다. 그는 급조한 답변을 내놓아야 했다.

“나도 널 사랑해. 다시는… 다시는 놓지 않을게.”

그의 눈물이 그녀의 머리칼을 적시고, 그녀의 눈물이 그의 가슴을 적셨다. 왜, 왜, 왜. 새하얗게 덧칠된 기억의 페인트를 지울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 의문은 무엇으로도 풀 수 없었다. 그녀의 눈물을 가슴으로 받으며 그는 다짐했다. 알아낼 수 없다면, 차라리 덮어놓고 잊어버리자. 체내 알콜작용억제 약을 먹을 시간이 다섯시간이나 지나 있어, 머리 한구석이 살살 아파오기 시작했다. 한 귀로 흘려들은 간호사의 주의사항이 생각났다. 주머니에는 분명 의사가 처방한 이틀치의 약이 들어 있었다.

*                *                *                *                *                *
그의 휴대전화는 가장 기본적인 벨소리, 즉 따르르릉 하는 개성없는 벨소리가 울리도록 설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너도나도 인기 가수의 노래나 특이한 소리를 벨소리로 지정하는 요즘에 와서는 클래식하게 들릴 지경이었다. 길거리에서 울리기라도 할락치면 ‘어머, 저건 무슨 벨소리지? 신기하네’ 하는 소리도 들린다. 그러나 벨소리가 어떻건 간에 때와 장소를 가리지 못하면 주위에 불쾌감을 주기 마련이다.

“아, 이거 말씀중에 죄송하지만, 잠깐만…”

그는 전화를 받았다. 발신자 번호를 기억검색한 그는 인상을 구겼다. 이 자식, 안 그래도 할 말이 있긴 했다만 하필 지금 전화하냐, 하고 성욱은 짜증을 내었다.

“여보세요.”
“어, 성욱이냐? 나야, 재영이.”
“너 말야 지난번에 전화 끊은거…”
“나 선미랑 결혼하기로 했어.”

성욱은 잠시 침묵했다. 성욱이 침묵하자 재영은 혼자 말을 이어나갔다.

“일단 부모님 찾아 뵙고 나서 날짜 잡을 생각이야.”
“어… 그래. 어, 축하한다.”

물어 볼까 말까 잠시 고민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안 물어보기엔 너무 궁금했다. 그토록 우울했던 녀석이 이틀만에 이렇게 활기가 돌아오다니, 그것도 깨진 인연을 도로 엮어서.

“그런데 너… 선미랑 일 있었잖아?”
“아, 그거 말이지. 그게 나도 잘 몰라. 선미가 하는 말이, 내가 선미랑 헤어지자고 했었다는데, 나도 내가 왜 그랬었는지 기억도 안나고 말이지. 난 내가 왜 그랬었는지 전혀 이해를 할 수 없지만 뭐 어쩌겠냐. 설마 그 순간에는 그랬을 지 몰라도 내가 영원히 선미 사랑하는거, 그건 변하지 않는거야.”
“그러냐.”

성욱은 한숨을 쉬었다.

“너 말야, 혹시 선미가 거짓말하고 있다는 생각은 해 본 적 없어?”
“뭐야? 야, 너 왜 그래? 별로 축하하는 기색이 아닌거 같다?”
“짜아식, 농담도 못하냐. 그래, 청첩창 받으면 내 정장 하나 제대로 맞춰서 가주마. 근데 함잡이 아직 못 구했지?”

그 뒤로는 친구간의 허물없는, 그리고 의미없는 잡담이 3분가량 이어졌다. 신이나서 떠벌거리는 재영에게 적당히 맞장구를 쳐 주고는 겨우 전화를 끊었다.

“죄송합니다. 이 친구녀석이 좀 그래서… 아, 아까 어디까지 얘기했었죠?”

검은 가죽 의자와 흰색 의사복은 짙은 대비를 이루었다. 차갑게 번뜩이는 금테 안경과 깊은 갈색의 원목 책상이 둥글둥글한 의사의 얼굴에 지성과 부를 더했다. 의사는 깍지 낀 손을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말씀드렸다 시피, 저라면 새로 나온 고급기억삭제 서비스를 사용하시도록 권하겠습니다. 일반기억삭제 서비스처럼 덧칠해서 지우는 게 아니라 특정기억을 완전히 지워 새로운 기억을 기록가능한 상태로 만들어 드리죠. 물론 가격은 상당히 비쌉니다만, 기억보조장치 해체수술에 비하면 위험도도 없고…”
“상관없습니다. 해체수술에는 얼마쯤 들 것 같습니까?”
“그게… 돈이 문제가 아닙니다. 이 수술 자체가 워낙 사례가 없는지라… 아직까지 보고된 사례는 미국에서 두 건, 독일에서 한 건입니다. 돈도 많이 들 뿐더러 수술의 성공조차 보장하기가 어렵습니다. 미국의 두 건은 모두 심각한 후유증으로 기억상실이나 자율신경계 마비를 가져왔고, 독일의 한 건은 기억보조장치 수술 이후의 기억을 모두 잃게 되었습니다.”
“괜찮습니다. 그 정도는 각오하고 있습니다.”
“기억보조장치에는 남은기억 용량 없음이라고 나오지만, 그건 기억보조장치가 더 이상 작동하지 못한다는 뜻이지 뇌의 기억능력이 사라진다는 건 아닙니다. 새로운 기억들은 더 이상 기억보조장치의 도움을 받지 못하지만 예전처럼 뇌가 그냥 기억하는 것은 문제가 없습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돈은 얼마가 들어도 괜찮습니다.”
“글쎄 돈 문제가 아니라…”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 성욱은 중얼거렸다. 구구히 설명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기억을 지울까 생각해 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미봉책을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었기에, 그는 가장 극단적인 선택을 내렸다. 그는 아마 기억보조장치 오작동의 시초가 되었을 그 날을 기억했다. 고작 사흘 전 밤의 일이었다. 기억보조장치가 영구활성화시킨 마지막 기억. 그 며칠 전부터 재영의 목소리가 좀 우울하다고 생각은 했었기에, 마침내 올것이 왔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재영이 침울한 목소리로 술마시러 가자고 전화왔을 때, 그는 하던 업무마저 팽개치고 달려나갔다.

“네가 미워, 이 개자식아.”

아무 말 없이 소주 한병을 비우고 난 뒤 재영이 한 말은 섬뜩했다. 그는 성욱의 손에서 병을 빼앗더니 스스로 잔을 채웠다.

“왜 밉냐?”
“기억보조장치 수술 하라고 권유한 거 너잖아.”
“문제라도 있냐?”
“있어. 많이.”

그리고 다시 소주 한 병이 사라질 때까지 경직된 침묵이 계속되었다. 시간은 차갑고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술을 윤활유 삼아 시간은 힘겹게 앞으로 나아갔다.

“나 말야, 선미를 사랑하고 있어.”
“나도 알아.”
“말 끊지 말고 들어. 그런데 선미를 사랑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

술에 취한 머리는 잘 돌아가지 않았다.

“누구나 사람은 변해. 수줍던 연인이 마침내 용기있게 고백을 하고, 서로 좋아하고, 사랑하고. 사랑이 오래되면 그건 깊어져야 해. 그런데 웃기는 건 말야, 난 아직도 선미를 보면 가슴이 설래.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 기억이 나서 말야.”
“좋은 거 아냐? 항상 신혼 같으니까.”

재영은 우울한 눈을 들어 그를 노려보았다. 살벌한 시선이군, 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게 좋은 거라고 생각해? 언제까지나 설래고, 언제까지나 조바심 나는게? 그녀를 사랑하는 매 순간을 모두 기억하고 있어. 그게 언제나 계속되지. 난 언제까지고 처음 그 마음 그대로 그녀를 사랑하는 거야. 그러다가, 어느 순간 과거의 사랑에 파묻혀 현재의 사랑은 보이질 않는거야. 내가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지, 아닌지, 그것조차 분명치 않아. 싫은 나는 그녀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게 아닐까? 그런게 그저 과거의 기억, 너무나도 생생했던 사랑의 기억 때문에 아직도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고 착각하는게 아닐까?”
“그건 누구나 마찬가지야. 과거는 변하지 않아.”
“아냐, 과거는 변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힘들었던 과거도 좋았던 과거도 모두 천천히 변해가는거야. 기억보조장치는 글러먹었어. 아무것도 변하지 않거든.”

성욱은 그렇지 않다라고 말하려 했지만, 곧 납득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렇지 않다면 도대체 기억삭제 서비스는 왜 존재하는걸까? 간단한 일이다. 기억보조장치를 한 사람은 과거를 변화시킬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은 변하지 않는 기억을 지운다. 현실의 숨통을 틔우기 위해.

“선생님, 그거 아세요?”

한참 침묵하던 성욱이 입을 열자 의사는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그의 말을 경청하는 척 했다. 사실은 수술비와 필요한 의료진과 세계 각국에 보낼 자문 문제로 머리속이 바빴지만.

“변하지 않는 과거는 현재를 붙잡습니다.”

의사는 아, 예 하고 대답했지만 사실은 다른 생각에 열중해 있었다. 그렇더라도 걱정없었다. 기억보조장치는 이 순간을 분명히 기억했고, 의사는 절대 성욱의 말을 잊지 않을 것이다. 다만, 떠올리지 않을 뿐이다.
댓글 0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1897 단편 불온한 병3 김몽 2009.11.17 0
1896 단편 이니스프리의 호수 섬을 찾아서3 해파리 2008.01.19 0
1895 단편 B급 망상극장 : 무뢰도 - 아미파 최후의 날8 異衆燐 2006.08.16 0
1894 단편 너는 눈을 감는다. 티아리 2014.02.26 0
1893 단편 나비 유리아나 2013.01.03 0
1892 단편 멸종(수정)2 엄길윤 2010.11.04 0
1891 단편 키보드 워리어1 제퍼리 킴 2012.02.25 0
1890 단편 세인트 프롤레타리아 천공의도너츠 2011.08.21 0
1889 단편 [Machine] K.kun 2011.07.23 0
1888 단편 자객행(刺客行) 이니 군 2012.03.28 0
1887 단편 다수파 이나경 2016.10.19 2
1886 단편 책을 읽고 싶습니다 김효 2013.06.06 0
1885 단편 인간신화 목이긴기린그림 2013.02.13 0
1884 단편 지구를 보다 성창훈 2011.06.03 0
1883 단편 스타 글라디에이터1 룽게 2010.04.01 0
1882 단편 3차원 진화3 유진 2008.12.30 0
1881 단편 그 아저씨를 위하여3 화룡 2007.08.30 0
1880 단편 영원의 단면2 샤유 2011.09.03 0
1879 단편 모든 꽃은 그저 꽃일 뿐이다.2 rubycrow 2005.07.02 0
1878 단편 finite infinite 2012.11.09 0
Prev 1 ...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 110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