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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대폭발지구

2006.05.17 00:3505.17

대폭발지구



1

『속보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한 시간 뒤면...』


2

 그 해 겨울은 너무나도 춥기만 했다. 철학과를 갓 졸업한, 이제는 학생이라 부르기도 뭣한 청년이 있을 곳은 집뿐이었다. J는 철학관이라도 열어보는 게 어때? 하고 실실 웃으면서 비꼬는 투의 질문으로 내 속을 비비 꼬아놓았지만 (하기야 몇 년 전 내가 J의 이름이 앞에 떡하니 붙어있는 철학관의 간판을 보고서 미친 듯이 웃어댔던 적이 있기는 했다.) 그나마도 건물을 구하고 돈을 내고 특히나 열었다 하더라도 찾아 올 손님이 종교인과 철학과 후배 정도 되는 사람들 빼고는 마땅치 않았기 때문에 사회 초년생인 데다가 사업 경험도 전무한 내게는 그다지 매력적으로 보인다거나 장밋빛 미래가 펼쳐져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말하자면, 청년 실업 육십만의 시대가 한 두 해 지난 그 때에도, 나는 여전히 육십만 청년들과 함께 집을 데굴데굴 굴러다니며 무료한 겨울을 무료로 보내고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육십만 모두가 나와 같은 삶을 살았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 무렵 나는 사랑에 대한 아주 깊은 회의에 빠져 있었다. 딱히 짝사랑에 빠졌다거나 여자친구에게 차였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지만(사실 차일 여자친구도 없었다.), 그 무렵의 후기산업사회라는 세상은 너무나도 뒤숭숭해서 사랑에 대한 명상이라도 하지 않고는 살아나갈 수 없었다. 말하자면, 비행기가 6 0 빌딩을 향해 달려들던 그때, 그리고 그 장면이 LIVE 마크를 오른쪽 가슴 위쪽에 당당하게 달고 TV에 뜨던 그때, 내가 여태껏 갖고 있던 사랑에 대한 환상은 산산이 깨어져버렸다, 는 것이다. 세상은 아직 그래도 살만하다던, 사람은 사랑으로 살아간다던 말들은 매캐한 연기를 뿜어내는 6 0 빌딩의 깨어진 유리창처럼 음절 단위로 깨어져서 제멋대로 흔들리는 내 마음 바닥에서 이제는 다 부러진 철근과 유리조각이 되어 뒹구는 6 0 빌딩 마냥 위험하기 짝이 없는 파편의 형태로 굴러다니고 있었다. 이어도를 가득 메운, 그리고 TV 스크린을 가득 메운 피, 시체, 그리고 폐허. 다음날 아침 TV는 비행기를 납치한 테러범들에게 선전포고를 하는 피곤한 대통령의 두꺼운 쌍꺼풀이 점령했다. 귓가를 스치는 것만으로도 졸음이 절로 쏟아지게 하는 대통령의 나른한 목소리와 함께 후기산업사회의 사랑이란 저토록 지치고 늙은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폐허만이 남은 이 황량한 세상에서, 무엇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나는 아무런 뜻도 재미도 없는 유머를 지껄이는 텔레비전을 마냥 바라만 보았다. 예쁘장한 여자애들이 칠 할, 나머지 삼 할은 키 크고 잘생긴 녀석들이 조그마한 세상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저 작은 세상 안에도, 백수라는 존재가 있을까. 십오만 명의 원빈과 장동건들이, 그리고 사십오만 명의 송혜교와 전지현들이 배를 긁고 텔레비전의 채널을 돌리고 컴퓨터 마우스를 붙잡고 라면을 끓이고 후루룩 짭짭 맛있게 드시고 시원하게 볼일도 보고 아니면 드러누워 침을 질질 흘리며 거실 바닥에서 잠이 들고 머리에 띠를 둘러매고 굳은살이 풀려버린 손가락에 샤프를 쥐고 책을 읽고 이력서를 쓰고 면접을 보고 취업을 하고 하는 모습들을 그려보자니 이건 마치, 코끼리 떼가 좁다란 동물원 우리 안에 꾸역꾸역 갇힌 채 먹고 마시고 싸고 자고 새끼에게 젖을 물리고 공을 머리에 올려놓는 묘기를 보여주고 하는 모습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었다. 머릿속이 육십만 마리의 코끼리로 터져나갈 듯 아파왔다. 이것 참,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복잡한 심정으로 창문을 열어보았다. 차가운 바람이 뺨을 할퀴고 지나갔다. 미친 듯 불어 닥치는 바람에 정신을 못 차리다 한참 후에 눈을 떠보자, 눈앞에는 거대한 아파트 한 채가 서 있었다. 시야를 가득 메우고도 하늘의 네 귀퉁이를 옹졸하게 남겨 둔, 거대하게 굳어버린 흙더미. 네 귀퉁이 중 셋에는 자동차와 거기서 뿜어져 나온 매연이 가득 차 있었다. 빵빵 뿡뿡, 생활이 되어버린 소음 위에는 역시 좁다란 틈으로 햇살이 필사적인 손길을 뻗치고 있었다. 두 시간이면 저쪽 아파트 너머로 사라져 버릴 햇살을 쐬고 있자니, 배가 고파왔다. 추운데 나갈까 말까, 한참을 방바닥을 뒹굴면서 고민했지만 텅 빈 라면박스를 보고 있자니 가만히 앉아있기만 해서는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아 나는 마음을 고쳐먹고 집을 나섰다.


3

 (E. 웅장한 로고송 : 배트맨의 사랑 교향곡 제1악장.
 하나하나 화면 바깥에서 날아와 박히는 글자.

 '지구 대폭발 특집 - 예술의 역사와 함께 하는 인류 최후의 순간'

 음악이 잦아든다. 화면 F.O.)
 (화면 F.I. , 사이버 스튜디오에 진행자가 서 있다가 화면 왼쪽으로 걸어 나온다.)

A : 안녕하십니까? '예술의 전당포' 진행자 김영민 입니다.
 (자막에 이름이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A : 지구 최후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 역사적인 마지막 순간에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요?
 (진행자, 발걸음을 천천히 멈춘다.)

A : 저희 ABS 방송은 인류의 예술사를 돌아보는 것이 이 위대한 순간에 걸맞은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진행자, 화면으로 조금 다가온다. 진행자의 얼굴 C.U.)

A : 고상한 최후를 원하신다면 지구의 예술사를 총 정리하는 이번 프로그램을 끝까지 시청해주시길 바랍니다.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
 (화면, 진행자의 몸 전체를 잡는다.
 진행자 화면 왼쪽 바깥으로 걸어 나간다. 화면  F.O.

 2분 30초 간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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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깥은 쌀쌀했다. 추리닝을 뚫고 스쳐 지나가는 겨울바람에 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근처 큰길은 자동차들이 꽉 막힌 도로를 화장터 건설 반대 점거 시위라도 하는 주민들처럼 떡 버티고 앉아서 방구를 부릉부릉 빵빵 뀌어대고 있었다. 도로 위의 모든 것을 주관하는 듯 머리꼭대기에 올라앉은 신호등이 몇 번이나 눈을 바꿔 떴는데도 자동차들은 꿋꿋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가로수들이 허리를 부여잡고 기침을 하지 않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무참히 뿜어져 나오는 매연, 귀청이 떨어질 정도로 우렁차게 울어대는 경적. 보고만 있어도 콧구멍이 턱턱 막히고 고막이 뚝뚝 떨어지는 광경이었다. 지구가 멸망하지 않는 한 악몽의 교통대란은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고 주장하듯 고집스레 네 발을 짚고 선 거대한 무리의 자동차들. 이제 지구는 우리가 지킨다, 인간들은 구석에 처박혀 있어, 라고 말하는 듯 빵빵 언성을 높이는 녀석들. 자동차는 누가 만든 거야 도대체, 손모가지를 그냥 확.

 한바탕 욕지거리를 해대며 편의점에 들어섰다. 손님은 아무도 없었고 알바생으로 보이는 종업원 한 사람이 카운터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당당히 걸어가 푸라면 세 봉지와 데스 두 갑을 집어 계산대에 내려놓았을 바로 그 때, 나는 어찔, 하고 몸이 기우는 것을 느꼈다. 어라, 건강한 편은 아니지만 갑자기 쓰러질 정도로 허약하진 않은데, 스스로의 몸에 대한 억울함을 허공에 대고 호소해보았지만 눈앞으로 다가오는 깔끔한 타일바닥을 막는 데에는 별 소용없었다. 쿵,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잠시 바닥과 하나가 되었다. 끓는 물을 컵라면에 붓고 젓가락을 비비다 뚜껑을 열 정도의 시간이 지나 나는 눈을 떠보았다. 어지러이 흩어져 여기저기 넘어진 진열대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와장창하고 무언가 넘어지는 소리가 들렸던 것도 같았다. 그제야 나는 내가 넘어진 이유를 알게 되었다. 지진인가? 하는, 당황한 알바생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면 세 봉지를 끌어안고, 썩 유쾌하지만은 않은 기분으로 알싸하게 아려오는 오른쪽 엉덩이뼈를 쓰다듬으며, 여전히 복닥거리는 큰길을 건너 집으로 향했다. 따스한 실내의 공기가 얼어붙은 내 뺨을 제일 먼저 반겨주었다. 나는 라면을 방구석 어딘가에 제멋대로 던져놓고는 리모콘을 집어 들었다. 찬 바람에 굳어버린 손가락이 딱딱했다. 손끝으로 무디게 느껴지는 전원 버튼을 힘겹게 눌렀다. 번쩍, 새카맣게 네모난 무의 공간에 한 점 빛이 깜빡이고, 이윽고 풀 컬러의 세상이 화려하게 펼쳐지고, 그곳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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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보]지구 대폭발... 한 시간 이내로 지구 사라져>(3보)
 2006-2-14 15:12
 (버밍엄=최규형 기자)
 약 한 시간 뒤에는, 우주 공간에 지구라는 존재가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

 영국 왕립 지질과학 연구학회(ELGRA)는 앞으로 한 시간 이내에 지구가 폭발할 것이라고 14일 오후 세시(한국 기준) 버밍엄에서 긴급 기자 회견을 통해 밝혔다. 학회장 존 테리는 “버밍엄 지표 밑을 조사해 본 결과 무척 활발한 맨틀대류를 관찰할 수 있었다. 이는 폭발을 예고하는 아주 위험한 현상” 이라며, “거대한 양의 에너지가 모여 있기 때문에 버밍엄만의 피해로 끝나지 않을 것” 이라고 했다. 잇따라 뉴욕의 미국 국립 과학 진흥회, 베이징의 중국 국영 과학 기술원에서도 각각 동일한 내용의 기자회견이 열려 전 세계를 혼란에 빠뜨렸다. 이들의 발표를 종합해보면, 대폭발은 워싱턴, 상하이, 런던, 서울 등을 포함한 전 세계 주요 도시 97곳을 포함, 총 3092곳에서 동시에 일어날 것으로 보인다. 관련 전문가들은 입을 모아 “이번에야말로 지구가 멸망할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정부는 아직 공식 입장을 발표하지 않았다.

관련기사 : [대폭발 특집] 지구는 어떤 별? , [지구대폭발] 너이봐 블로그 포스팅 58% 급증 , ...


6

 대폭발이라고?

 나는 소리 내어 되물었다. 그렇다고 멍한 두려움에 가득 찬 표정을 짓고 있는 저 TV 속의 앵커인지 기상캐스터인지 하는 분이 대답해줄 리는 없었지만, 여하튼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한 시간, 지구 대폭발, 과학자들이 연구한 바에 따르면, 지구 내부에서 강력한 에너지가, 대충 귀에 들어오는 단어의 조합들만으로도 그것은 충분히 비현실적이었고, 그래서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화면은 지구 단면도에 화살표 몇 개가 어지러이 그려진 그림과 당황하는 사람들의 표정이 담긴 동영상을 반복하여 보여주고 있었다. 설마, 진짜 터지겠어, 하고 피식 웃어넘기려는 순간, 아까의 그 현기증이 다시 일었다. 잠시 휘청, 한다고 생각했더니 이내 정신이 돌아왔다. 웅성웅성, 바깥이 삽시간에 시끄러워진 것을 보면 나만 이 진동을 느낀 것이 아닌 듯 했다.

 속보, 속보. 오랜만에 듣는 단어였다. 내 마음 밑바닥에서 6 0 빌딩이 다시 치솟아 올랐다. 광폭한 돌개바람은 이제는 다 부서져 가루가 되어버린 6 0 빌딩의 파편들과 연료를 가득 실은 채 펑 하고 터져나갔던 비행기의 조각들을 다시 긁어모아 이리저리 흩날렸다. 농경사회와 후기산업사회의 본질적인 차이에 대한 고민, 얼마 전 인터넷을 떠돌아다니다 우연히 보게 된 언론의 익스클루시브와 익스플로시브의 관련성에 대한 보고서. 두서없이 찢어져 흩날리는 종이조각들은, 이제는 멈출 기회조차 잃어버린 바람을 타고 끝없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익스플로시브를 익스클루시브라며 전해주는 후기산업사회의 뉴스. 모든 뉴스가 그래왔듯, 이번 사건에 대해서 방송사는 단 하나의 해결책도 내놓지 못하는 객관적이고 냉정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 이 시대의 두 번째, 그리고 마지막 속보였다.

 나는 눈 깜짝 조차 할 새도 없이 엄청난 혼란에 빠졌다. 지구에 발을 붙이고 사는 사람들이라면 모두 그랬을 것이다. 단 일분도 지나지 않아 인터넷뉴스, TV, 라디오, 심지어는 바깥에서 북적대는 사람들조차도 모두들 지구 대폭발에 대해 떠들고 있었지만 정작, 살아남을 수 있는 건설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이는 그 누구도 없었다. 사람들은 포털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여러 가지 서비스를 통해 순식간에 카페를 만들고 클럽을 생성했다. <지구 대폭발 생존 비법 공유>의 제목을 단 카페는 사상 초유의 높은 회원 수를 기록하는 인터넷 역사에 길이 남을 쾌거를 세웠으나 그들의 글은 모두 어쩌면 좋죠, 어떡해요 같이 공포에 질려 아무 것도 바로보지 못하는 내용이었다.

 창문에서 톡 톡 하는 소리가 들렸다. 또 비둘기가 창문을 쪼아대고 있는 걸까, 나는 고개를 돌려 그쪽을 바라보았다. 맙소사, 이건 또 무슨 일인가. 세계사 교과서의 초상화에나 나올 법한 고풍스러운 컬의 윤기 나는 흰 머리. 이마가 널찍하고, 와이셔츠도 아니고 티셔츠도 아닌 요상한 것을 코트 아래에 받쳐 입은 노인의 얼굴이 창문 너머에서 불쑥 나타났다. 그는 묘하게 미소 짓더니, 손을 들어 까딱거렸다. 뭐야 저 할아범, 나오라는 건가. 나는 잠시 고민했다. 나갈까 말까, 나갈까 말까. 그래, 방바닥에서 불룩 튀어나온 배때기나 떡떡 긁어대다가 지구 종말을 맞는 것보다는 그래도 나가서 뭐라도 해봐야지. 나는 방에서 코트를 찾아 대충 걸쳐 입고 차디찬 겨울공기가 기다리고 있는 바깥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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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보]지구 대폭발... 한 시간 이내로 지구 사라져>(3보) 에 대한 의견

toto144 (58.226.xxx.127) 06-02-14 15:12
 앗싸 일빠! 처음해보네 ㅋㅋㅋㅋ

xel (220.72.xxx.79) 06-02-14 15:13
 분하다; 선감상후리플 하지 말걸

sosq88 (220.127.xxx.52) 06-02-14 15:13
 이거 진짜인가요? 아무래도 믿기지가 않아...

dongg (125.181.xxx.130) 06-02-14 15:13
 시작부터벗고보여드립니다.♡♥ 가입은 정말 무료입니다. 주소는 w w w.s p a m 1 8.c o.k r 입니다. 서비스 1시간 채팅있습니다. 유진이넘이뽀 찾아주세요. 무료시간30분 추가해드릴꼐요

carrot807 (211.172.xxx.232) 06-02-14 15:14
 또 저러다 오보 ㅈㅅ 이러면서 구렁이 담 넘어가듯 슉슉... 기자양반 반성하쇼

dc325 (59.0.xxx.208) 06-02-14 15:14
 헉;;; 나 아까 넘어질 뻔했는데 저거였구나 ㅅㅂ

natuur_iz (163.180.xxx.59) 06-02-14 15:14
 진짜래요 ㅋ 기자회견 위성생중계 봤는데 분위기 완전 계엄숙 ㅋㅋㅋ

ycy6006 (61.111.xxx.142) 06-02-14 15:15
 아놔 이런데도 광고글 올라오고 지/압이야

gireum (211.41.xxx.77) 06-02-14 15:15
 그래서 어쩌라고? 가만히 앉아 지구와 운명을 함께하라는 건가

blue_edge (218.49.xxx.53) 06-02-14 15:16
 이게 다 고이주 총리 때문이다 섊

hklee89 (61.247.xxx.143) 06-02-14 15:16
 외계인의 지구 정복 계획은 이미 시작되었다

michinpodo (221.165.xxx.111) 06-02-14 15:16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위대한 절대자 아후라좀맞자의 존재를 인정하시고 그의 품에 안기십시오 조로안습교에서는 영생을 보장받을 수 있습니다

sweatdew (125.57.xxx.70) 06-02-14 15:17
 님들 안 뛰고 여기서 뭐해요? ㅋ


8

 바깥에서 보니 할아범의 차림새는 더욱 가관이었다. 새카만 구두는 금방이라도 구둣방에서 나온 듯 묵직한 광택이 가득했고, 와이셔츠는 불룩 나온 배를 가로로 잡힌 주름으로 더욱 불룩해 보이게 하는 효과를 일으켰다. 게다가 목 부분의 장식은 몇 년을 두고 한 번도 빨지 않은 것 같은 누런 빛깔을 띠고 있었다. 짙은 갈색의 코트는 탐욕스레 바지를 먹고 이제 무릎까지 올라오려는 흰 양말을 가리기에는 턱없이 짧았다. 게다가 결코 크다고 볼 수 없는 키 때문에 그의 난감한 옷차림은 더욱 찌그러져 보였다. 뭘 보나? 할아범이 말했다. 요즘 미친 외국인들은 한국말도 할 줄 아나, 하는 생각을 하며 나는 그제야 그의 얼굴을 자세히 볼 용기가 생겼다. 고개를 들어 그를 마주보았다. 불쑥 튀어나온 광대뼈와 볼품없이 벗겨진 이마가 빈곤한 인상을 주었다. 할아범은 누구야? 내가 물었다. 그는 말없이 손을 들어 왼쪽 가슴팍을 가리켰다. James Watt, 1736 - 1819. 고풍스러운 명찰에 나는 참다못해 풉, 웃음을 터뜨렸다. 말해줄 게 있어서 찾아왔네, 나는 할아범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예의 그 묘한 미소를 띠고 있는 할아범의 얼굴이 보였다. 멀리서 찬 바람이 한 올 불어왔다.  

 아니, 말해줄 거고 뭐고, 이게 다 뭐야. 나는 전 인류를 대표하는 기분으로 물었다. 이게, 다, 뭐야. 할아범은 내 곁에서 고개를 푹 수그린 채 걸으면서 모기 귓속에 사는 기생충에게나 들릴 법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이럴 줄은 몰랐다구. 지극히 인간적인 그 변명에 나는 더 이상 할말을 잃었다. 타앙- 갑자기 어디선가 바람을 타고 사냥총이 입을 여는 소리 비스무리 한 것이 울려왔다. 돌비 서라운드 쓰리디 홈씨어터에 앉은 것처럼 사방의 건물 벽이 웅웅 울려왔다. 조금씩 여기저기 스며들어 잦아드는 총성에 나는 말을 나지막이 얹었다. 이봐, 할아범, 그러면 우리는 어쩌지. 나는 발끝에 걸리는 돌부리를 차도를 향해 멀리 차내며 할아범의 대답을 들었다. 자네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게. 나는 진리 타당한 윤리 교과서라도 읽는 듯 틀에 박힌 답안을 읊는 할아범을 발걸음을 멈추고 멍한 눈길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할아범은 몇 발짝 앞서나가다 말고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예를 들어, 사랑을 향해 달려간다던가. 사랑이라니? 내가 되물었다. 할아범은, 아참 여긴 후기산업사회지, 정도의 의미로 보이는 한숨을 폭 쉬었다.


9

 (화면, 채도를 조금씩 높인다. 새카만 화면에서 어슴푸레한 공간이 튀어나온다.
 E. A : 태초의 예술은 지구 아주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따라오시지요.

 동굴 속에서 암반이 어지러이 스쳐지나간다. 라이트를 따라 끝없이 더 깊숙한 곳으로 향한다. 한참 가다가 멈추고 벽을 비춘다. 노란 빛깔의 돌 위에 빛바랜 동물의 피로 그려진 사람 모양의 작대기. 허리를 깊숙이 숙이고 팔꿈치와 무릎을 모두 한 방향으로 구부리고 있다. 온 힘을 다해 어딘가로 달려가는 모습이다.)

A : 선사시대 예술인들은 달리는 사람을 지구 곳곳에 새겨두었습니다.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고고학 박사 웨인 루니는 태초의 인간들이 가장 중시한 가치가 바로 사랑이었다고 주장합니다.

 (화면, 어느 노교수와의 인터뷰를 보여준다. 머리는 벗겨지고 흰 수염이 턱에서 짙게 시작해 귀 밑까지 뻗어있다. 영어로 뭐라고 열심히 말하며 열정적인 눈빛을 하고 있다.)

 (자막 시작.)
웨인 루니 (국제예술학회 회장) : 인류는 줄곧 사랑을 향해 달려왔습니다. 태초의 벽화와 르네상스의 조각상, 중세의 음악을 거쳐 현대의 소설에 이르기까지, ‘사랑을 향해 달리는 것’은 인류 최대의 관심사였습니다.  

A : 학계는 웨인 루니의 주장을 정설로 인정하는 추세입니다.

 (자막 시작.)
웨인 루니 (국제예술학회 회장) :
 (화면, 검고 두꺼운 가죽 옷을 입고 있는 책을 비춘다.)
세계의 베스트셀러, 종교 서적 ‘더 버블’ 역시 사랑을 향해 달리는 인류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다음, 작가 케이크스피어의 초상화와 그의 책을 같은 화면에 올린다.)
영어의 연금술사로 전 세계에 알려진 케이크스피어 역시 ‘로데오와 줄리앙’을 통해 사랑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인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음, 화가 모늬의 초상화와 그의 그림을 한 화면의 왼쪽 오른쪽에 각각 띄운다.)
화가 모늬와 작곡가 배트맨 역시 사랑을 향해 달리자는 주제로 각각 ‘철도원’과 ‘이에프소나타’ 등의 명작을 남긴 바 있습니다.

 (E. 모자른듸의 ‘피자로의 사랑’中 서곡.
 화면, 사이버스튜디오를 비춘다. 진행자, 천천히 걸어나오며 말한다.)
A : 지금 흐르는 음악은 천재 작곡가 ‘모자른듸’ 의 오페라 중에서도 정수로 꼽히는 ‘피자로의 사랑’의 서곡입니다. 사랑을 향해 달린다는 주제가 이렇게 예술의 역사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은 한눈에도 쉽게 보이는군요.

 (진행자, 멈춰선다. 화면, 진행자의 얼굴 C.U.)
그런데 인류는, 과연 무엇 때문에 사랑을 향해 달리는 것일까요?

10

 무려 오천오백 년 동안 인류에 의해 쌓아올려지고 만들어져오고 다듬어져온 지구가, 불과 육십 분 만에 사라지려고 하네. 그렇지만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뿐일세. 할아범은 그렇게 말하고 나서는 등을 돌려 멀어지기 시작했다. 생각 외로 왜소하고 조그마한 인류 대혁명의 지도자가 멀어지는 모습을 멍하니 선 채 바라보며 나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바람이 제멋대로 불어와 머리를 마구 헝클어놓았다. 할아범, 잠깐만. 나는 그의 뒤통수를 향해 힘껏 소리 질렀다. 할아범은 또 그런대로 신통하게 한국어를 알아듣는지, 천천하던 발걸음을 멈추고서는 나를 돌아보았다. 할아범, 제임스 와트가 아닌 것, 맞지? 할아범의 얼굴에는, 멀어서 잘 볼 수는 없었지만, 흐릿하게 미소 같은 것이 스쳐 지나간 것 같았다. 나는 할아범이 행여나 다시 멀어질까봐 황급히 말을 이었다. 혹시 신이나 뭐 그런 존재 아냐? 나는 무교론자이긴 하지만, 무신론자는 아니니 용서해달라구. 할아범은 그 자세 그대로 굳어서 나를 한참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이윽고 피식, 웃고서는 - 웃었다 - 그대로 고개를 돌려 앞으로 나아갔다. 양 옆으로 갈라 선 아파트의 행렬, 그리고 저 멀리 황금빛 노을이 눈부시게 지는 산등성이, 그리고 그 아래 다리 너머로 사라지는 할아범의 뒷모습, 그리고 그 뒤로 내 발끝까지 길게 끌리는 그림자. 그제야 나는 예술이라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결국에는 홀로 남겨졌다. 다리 위는 많은 사람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그러나 모두들 갈 길을 잃은 걸음걸이에 잔뜩 겁먹은 눈망울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넋이 나간 이들의 우왕좌왕 두리번세리번 뻐끔뻐끔 들을 바라보며, 나는 발아래 대폭발의 맨틀이 용트림을 해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차가운 강바람이 휙 하고 불어 닥쳤다. 달려야하는 것일까. 인간은 무기력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야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오십구 분, 오십팔 분. 시간이 흐르고 있다. 서둘러야 한다. 비로소 나는 가벼운 몸놀림으로, 지구 위 전 인류의 이름을 걸고, 사랑을 향해 달리기 시작하는 첫걸음을, 최선을 다해 떼었다.
외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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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 단편 B급 망상극장 : 무뢰도 - 아미파 최후의 날8 異衆燐 2006.08.16 0
1895 단편 너는 눈을 감는다. 티아리 2014.02.26 0
1894 단편 멸종(수정)2 엄길윤 2010.11.04 0
1893 단편 키보드 워리어1 제퍼리 킴 2012.02.25 0
1892 단편 세인트 프롤레타리아 천공의도너츠 2011.08.21 0
1891 단편 [Machine] K.kun 2011.07.23 0
1890 단편 자객행(刺客行) 이니 군 2012.03.28 0
1889 단편 다수파 이나경 2016.10.19 2
1888 단편 책을 읽고 싶습니다 김효 2013.06.06 0
1887 단편 인간신화 목이긴기린그림 2013.02.13 0
1886 단편 지구를 보다 성창훈 2011.06.03 0
1885 단편 스타 글라디에이터1 룽게 2010.04.01 0
1884 단편 3차원 진화3 유진 2008.12.30 0
1883 단편 그 아저씨를 위하여3 화룡 2007.08.30 0
1882 단편 영원의 단면2 샤유 2011.09.03 0
1881 단편 모든 꽃은 그저 꽃일 뿐이다.2 rubycrow 2005.07.02 0
1880 단편 finite infinite 2012.11.09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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