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눅눅한 비가 흠칫 몸을 떨게 했다. 시종을 불러 난로에 장작을 더 넣으라 하고 쓰던 서류마저 밀어 놓은 채 난롯불을 쬐었다. 창 밖은 어두운 회색빛이었다. 아직은 낮인데도, 창 밖은 어둡기만 했다.

하인이 가져다 준 초콜릿이 달아서 나는 한 모금 마시고 언짢아하며 그것을 물렸다. 좋지 못한 날씨 탓에 기분이 나빴다. 하인들은 내 안색이 나쁘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굽신댔다. 나는 쌓여 있는 서류를 보고, 눅눅한 공기를 느끼고, 엄청난 편두통을 느꼈다.

그 와중에 나타난 손님이었다. 더욱이 누구의 시종인지 밝히지도 않은 심부름꾼이었다. 달갑지 않은 기분으로밖에 맞을 수 없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하인들의 대우도 매몰찼다. 심부름꾼의 행색이 어지간히 초라했기 때문이었다. 나를 만나겠다고 고집하는 심부름꾼의 언동에 모멸과 비웃음을 잔뜩 들은 모양이었지만, 결국 그는 내 앞으로 불려 왔다.

"너는 누구냐? 무슨 일이지?"

언짢은 듯 내던지는 말에, 공손히 내놓은 것은 아무런 글씨도 없고 무늬도 없는 흰 봉투였다. 나는 봉투를 뒤집어들고 앞뒤를 살폈다. 밀랍을 녹여 봉한 인장의 무늬는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너는 누구지?"

다그쳐 물었으나 그는 말없이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흰머리가 드문드문 섞인, 아직은 젊은 나이인데도 쇠약해진 남자였다. 내가 봉투를 뜯지 않고 남자를 노려보자 남자는 거듭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제가 뫼시는 분께서 후작님의 답장을 기다리십니다."

나는 그를 노려보며 봉투를 뜯었다. 편지지에서는 희미한 향기가 났다. 무슨 향기던가, 낯익은 향기. 그러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편지지를 펼쳤다. 새하얀 편지지에, 쓰여 있는 것은 단 한 줄이었다.

-오빠, 나는 꽃이 보고 싶어.

나는 편지지를 뒤집었다. 그러나 그 외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다. 편지지의 앞뒤 모두, 봉투의 앞뒤 모두가 깨끗했다.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망연자실하여 편지지와 그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나를 '오빠'라고 부를 사람은, 단 한명밖에 없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나의 아버지는 후작가의 단 하나뿐인 후계자로, 명망 높고 부유하지만 마음이 약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는 가문의 주선으로 북국의 아름다운 여인'들'과 결혼을 했다. 그렇다, 여인'들'이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나의 아버지는, 북국의 명망 높은 가문의 자매와 결혼했던 것이다.

아무리 첩을 맞아들이는 것이 당연시되는 세상이라도 두 명의 부인을 동시에 맞아들인다는 것은 생각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버지가 특별히 잘생겼다거나 인기 좋다거나 하는 차원이 아니라-물론, 미남이었고 위세 높은 가문의 후계자였으니 인기도 좋았을 테지만- 나의 어머니의 가문에서 요구해 왔던 것이다. 손이 귀한 어머니의 친정에는 아들이 없어서, 그들은 두 딸을 아버지에게 주고 아버지가 아들들을 낳으면 그 중 하나를 자신들에게 달라고 요구해 왔던 것이다. 부인이 많으면 자식이 많지 않겠느냐는 멍청하고 덜떨어진....실례, 단순무식한 생각으로 아버지는 동시에 두 명의 미인을 아내로 맞게 되었던 것이다.

세상일은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지만, 기실 아버지와 어머니'들'만큼 꼬여버린 일도 드물다. 어머니들 사이에 태어난 아들은 나 하나뿐이었다. 큰어머니-나의 친어머니-가 아들을 낳고 1년 후, 작은어머니-어머니의 여동생-가 딸을 낳았다. 그리고, 우리 집안은 그 때부터 바야흐로 메마른 난투장이 되어 갔다.

북국의 미인은 아름답고 차가운 미모에 살을 에일 바람처럼 굳세다던데, 적어도 어머니들에게는 적합한 말이다. 큰어머니가 나를 낳고, 작은어머니가 여동생을 낳은 후 집안은 기세를 완전히 휘어잡으려는 큰어머니와 지지 않으려는 작은어머니의 다툼으로 차마 못 볼 꼴이 연출되었던 것이다. 그나마 아버지의 기상이 좀 굳세다면 나았으련만, 아버지는 전형적인 귀족 가문의 방탕아에 나약한 성격으로 어머니들의 난투를 막는 데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되려, 양쪽에 팔을 붙잡혀서 늘어날 대로 늘어난 고무인형 같은 모습이 되어 있었다. 하긴, 고집 센 북국의 미인을 두 명이나 아내로 맞은 것은 아버지에게도 나름대로 불행이었으리라. 두 명의 어머니는 무서운 기세로 싸워대기 시작했고, 그 사이에 아버지는 납작 눌린 핫케이크처럼 되어서-가엾게도 근성 좋은 아내들 사이에서 바람피울 엄두도 못 냈다고 한다- 괴로워했고, 어머니들의 친정은 친정 나름대로 대가 끊기게 되었다며 무섭게 분노했다. 그리고, 나와 여동생은, 정말이지 불쌍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던 것이다.

북국은 살을 에일 정도로 추운 날씨 탓인지 대부분 자손이 드물다고 한다. 그것 때문인지 어머니가 둘인데도 자식은 우리 둘뿐이었다. 그리고 어머니들은 자신의 자식들을 한 팔에 각각 끼고 우리들을 닭싸움 밀어넣듯이 싸움을 시켰다. 내가 왕실에서 예절바른 행동으로 공주님의 키스를 받거나 하면-오해 없도록 말해 두는데 공주님은 나보다 열 살이 위였다- 내 여동생은 무조건 그 주 안으로 왕자님의 에스코트 신청을 받아와야 했다. 여동생이 유력한 가문의 후계자의 눈을 끌면 나는 공작가 아가씨를 꼬시라는.....실례, 비위를 맞추라는....이것도 적당치 않지만 아무튼, 그런 일을 강요당해야만 했다.

지독한 어머니들의 싸움으로 질려 버린 아버지는 그나마 싸움을 줄이기 위해 어머니들에게 각각 살 곳을 따로 마련해 주었다.(그리고 아버지는 그 누구에게 하루도 더하고 덜함이 없이 어머니들을 방문했다......바람둥이 아버지지만, 허허 웃으며 어머니들의 히스테리를 견뎌내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저도 모르게 가엾어졌다.) 어머니들의 견제로 나와 여동생은 거의 격리되어 살았지만, 딱히 여동생을 그리워하거나 한 적은 없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여동생이고, 어린 혈육이란 왠지 귀찮은 존재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여동생을 처음 만난 것은 아버지의 마흔의 생신으로 큰어머니가 나를, 작은어머니가 여동생을 끌고 저택으로 '들이닥친' 직후였다. 두 어머니들의 싸움에 어지간히 시달린 고용인들이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터라 나는 아버지의 저택이 편하지가 않았다. 아니, 전투 태세로 몰입한 어머니에게 들볶이고 있었던 까닭이 더 클 것이다. 시녀 한 명만 데리고 나는 정원을 구경하러 나갔다. 꽃에 별로 관심이 없었기에 재미없긴 했지만 어머니와 한 방에 있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여동생을 만났다. 머뭇머뭇하면서 '도련님...' 하고 나를 부른 시녀가 뒷쪽에 흘깃거리며 눈길을 주었던 것이다. 주랑의 기둥에 몸을 숨기고 얼굴만을 빠끔히 내민 소녀를 보았을 때 나는 그 소녀가 여동생인 것을 알아차렸다.

북국의 미녀들의 기세 때문인지, 아버지의 약골 때문인지는 몰라도 나는 아버지보단 어머니를 쏙 빼닮아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에겐 가련한 말이지만, 여동생도 작은어머니를 쏙 빼닮긴 마찬가지였다. 갈색이나 금발, 초록색이나 파란 눈이 가득한 이 나라에서 여동생의 은발에 가까운 옅은 색의 금발과 색이 옅은 물빛 눈동자는 드문 것이었다. 그리고 소녀도, 자신과 닮은 옅은 금발과 옅은 푸른 눈동자를 보고 내가 누군지 알아차린 것 같았다.

여동생의 첫 인상은, 솔직히 나쁘지 않았다. 하얀 피부에 어울리는, 레이스와 프릴이 나풀나풀 달린 상아빛 드레스를 입은 여동생은 귀여웠다. 어느 정도 컬이 풀리고 핀이 빠져 흩어진 옅은 금발도 그 나이대엔 저도 모르게 웃어 버릴 정도로 앙증맞게 비쳤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동생의 옅은 물빛 눈동자와 조그맣고 귀여운 입술은, 어머니들을 닮았지만 또한 닮지 않았다. 동생에게는 어머니들에게 지나치게 발휘된 북구 미인의 성격이-여왕답다 못해 완전 독불 장군인 성격이-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문득, 옅은 금발과 옅은 푸른 눈동자 외에도 어머니의 독불장군적 성격을 그대로 물려받았다던, 친척들 사이에서의 나에 대한 평가에 잠시 우울해졌다. 북국의 유전자가 남국의 유전자에게 승리했다-란 평을 들을 정도로, 나는 어머니의 마음에 안 드는 성격까지 꼭 빼닮아 있었다.

시녀는 여동생과 나를 못 만나게 하라는 어머니의 지시를 받았는지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나에게 말해 봤자 말을 들을 성격도 아니고-사실, 어머니의 성격을 못마땅해하면서도 나도 내 성격이 어머니를 닮았다는 건 스스로 깨닫고 있었다- 그렇다고 저택의 어엿한 아가씨인 소녀를 쫓아낼 수도 없었다. 나는 별 생각없이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어머니가 그렇게 여동생을 미워하게 세뇌를 시키려 하셨건만 내 머릿속의 여동생은 그저 흐릿하고, 있든 없든 상관없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여동생이 등 뒤에 손을 돌리고 나에게 머뭇머뭇 다가왔을 때도 나는 놀라거나 하진 않았다. 하지만 여동생이, 발개진 얼굴로 나에게 붉은 장미꽃 다발을 품에 안겨주고 도망갔을 때는 솔직히 놀랐다는 것은 인정해야겠다.

"....하?"

놀란 얼굴로 장미꽃다발을 바라보았을 때, 소녀는 이미 뛰듯이 멀어져 있었다. 그러나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이 아니라, 멀찍이 있는 주랑의 기둥에서 처음 보았을 때처럼 얼굴만을 내밀고, 자그마한 양손으로 주랑의 기둥을 꼭 붙잡은 채 내가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빨개진 귀를 보았을 때 나는 마치 자그마한 하얀 고양이가 수줍어하며 재롱떠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여동생에게 하는 말치고는 실례된 말이겠지만.

시녀는 어쩜, 하고 탄성을 올렸다. 어머니에게 그렇게 시달렸건만 이 한 번의 선물로 시녀는 여동생이 마음에 든 듯 '어서 도련님, 고맙다고 하셔야지요'라고 재촉했다. 나는 조금 어리둥절해진 기분으로 '고맙다'고 말하고 장미꽃다발을 안은 채 자리를 떴다. 등 뒤에서 여동생이 타닥거리며 달려가는 소리가 멀어져 갔다.

그리고 나는 첫인상에서의 느낌을 수정했던 것이다. 오빠라고는 해도 모르는 남자아이에게 서슴없이 꽃다발을 갖다 안길 정도의 대담한-조금 수줍어하긴 했어도- 성격은 역시 북국의 핏줄이었다.




그런데, '오빠, 나는 꽃이 보고 싶어.'라니.

나는 머리를 감싸쥐고 남자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꽃이라니 무슨 소리지? 작은 어머니가 꽃을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무릇 숙녀란 꽃에 둘러싸여 키워지는 것이 당연시되는 세상에서 나에게 이런 편지를 보내 올 이유는 없을 텐데. 꽃이라니, 나에게 주었던 붉은 장미꽃 말인가. 뭐 그거라면 정원사가 관리하고 있을 테니 한아름 꺾어다 보내 주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시종을 부르려는 순간, 생각나는 그 날 밤의 기억에 당혹했다.

붉은 장미인가? 흰 장미인가?






아버지의 마흔의 생신날 저녁에는 성대한 연회가 열렸다. 그 연회에서였다. 늘 그렇듯 큰어머니와 작은 어머니는 상냥한 미소를 띄우고 서릿발같은 말들로 서로를 공격하고 있었다. 나는 그걸 느긋하게 구경하고 있는 중이었다. 평소에 보이지 않는 물밑전투도 굉장한데, 막상 혀로 싸워대는 장면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가엾은 아버지는 가련하게도 손님들 앞에서 허허거리며 웃고만 있었다. 손님들도 이 두 미녀의 대결을 구경하는 데만 열중하고 있었던 것 같다.

후작가의 후계자로 나에게는 분명 프라이드가 있었다. 그러나 솔직히 어머니들의 싸움에 끼어드는 건 시간낭비라는 것이 내 견해였고, 무엇보다 나는 집안 내분이 아무리 추잡스러워도 별로 내 일이라는 실감이 들지 않았다. 손님들 앞에서 망신을 당해도 아버지가 당하지 내가 당하겠냐 싶기도 했다. 말릴 자신이 없으면 끼어들지 않는 것이 낫다 싶었다.

연회의 첫 시작은 연회의 주인공들의 춤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셋이서 출 수 있는 춤이 있기나 할까. 두 미녀는 아버지와 첫 춤을 출 사람이 누구냐에 대해 부드럽게 웃으며 잘 갈린 혀의 칼날을 세웠다. 질려 버린 아버지가 '그렇다면 첫 춤은 내 자식들에게 추게 하겠다'라는 대안을 제시하자 이번엔 내가 첫 춤을 추느냐 여동생이 첫 춤을 추느냐가 문제였다.

가장 기본적인 해결책이 있는데 말이다.

연회엔 갖가지 사람들이 있다. 나는 어머니들의 싸움을 구경하다가 사람들을 느긋하게 둘러보고 있었다. 남국의 짙은 머리카락을 지닌 시워드 백작이 맨 먼저 눈에 들어왔다. 과묵하지만 키가 크고 호리호리해 옷맵시가 좋은데다가 강직한 성품, 뛰어난 외모로 많은 귀부인들의 환심을 사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이제 겨우 스무 살의 나이로 작위를 계승한 남자. 어머니가 저와 같이 되라고 압력을 넣는 대상자이건만 얄밉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나와 일곱 살의 나이차. 날카롭게 갈린 장검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드는, 그런 남자.

그 뒤로는 리유스 공작. 겉보기엔 풍채 좋고 무뚝뚝한 노인으로 보이지만 의외로 유머 감각이 풍부하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 만찬에서 공주의 실수로 국왕이 포도주를 뒤집어쓰자 자기 머리에 포도주잔을 들이부으며 '보랏빛 비가 흐르는 성대한 만찬입니다'라고 말해 무마시켰다는 얘기가 있다. 그 옆은 아이린 백작 부인. 아름다운 미모로 천성적으로 허약하다는.....

쿡쿡 신경을 찔러 오는 시선이 느껴진다. 호소하는 듯한 아버지의 시선을 무시하고 다시 사람들을 살펴보기 시작한다. 아이린 백작 부인은 천성적으로 허약하지만, 독으로 시달린 가문에서 태어난 탓인지는 몰라도 온갖 독에 면역이라고 한다. 대신 약도 잘 듣지 않는다는데....

이번엔 다른 쪽에서 따끔따끔히 찔러 온다. 옅은 금발. 옅은 물빛 눈동자. 북국의 날카로운 미인이 아닌, 남국의 기질인 듯한 순하고 따뜻한 눈동자. 작은, 겁에 질린 입술.

나는 단념하고 여동생에게 다가갔다. 손을 내밀고, 가만히 고개를 숙인다. 문득 주변의 공기가 나에게 쏠리는 것을 느낀다. 두 명의 미인이 움찔 놀라 입을 다문 정적 속에서, 분명히 말했다.

"춤을."

입을 다문 두 명의 미인이 이제는 서릿발을 내세우며 다가온다. 큰어머니나 작은어머니나 달가워하지 않을 것은 뻔한 일이다.

"유젠, 공주님께 춤을 청하는 게 도리가 아니겠니. 공주님께 어서, 첫 춤을 청하려무나."

첫 춤, 을 강조하는 큰어머니.

"유젠, 일단은 앉아 있으렴. 유렐이 첫 춤을 추기를 기다려야지."

역시 첫 춤, 을 강조하는 작은어머니. 정말 진력이 난다. 여동생에게 딱히 애정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제 열두 살인 여자애를 이렇게 겁에 질리게 불안하게 만들다니. 그다지 모성이라는 것을 이 아름다운 어머니들께 기대하는 건 아니지만, 너무하잖아.

공기가 흥미진진하게 바뀌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느긋하게 구경하던 손님들이 눈을 빛내고, 입가에 웃음을 머금는다. 공주 전하께서도 사태가 어떻게 될지 궁금하신지 웃으며 서 계셨다. 그 때, 손이 얹혀 당겨지는 것을 느꼈다. 내민 손 위에 하얀 장갑을 낀 작은 손이 놓인다. 놓인 것뿐만이 아니라 장갑 속의 올망졸망할 손가락들이 구부러져 내 손끝을 강하게 잡는다.

"출게요."

아직은 애티가 나는 귀여운 목소리에 푸후, 하고 몇몇 손님들은 숨죽여 웃음을 쏟아놓는다. 반색하는 아버지와 달리 두 명의 미인들이 다시 반격을 가한다.

"유젠, 공주님이 기다리신다. 유렐, 더 멋진 기사님이 기다리시잖니?"

"유렐, 손을 놓으렴. 실례잖니."

나는 후유, 하고 한숨을 쉬며 재미있다는 듯 구경 중인 공주 전하를 힐끗 보았다. 말려 줄 생각은 전혀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사건은 그 다음에, 동시에 일어났다. '유젠, 공주님께 춤을 청하지 못하겠니?'라는 어머니의 날서고 조급한 재촉과, 내가 다시 공주 전하를 돌아본 것과, 여동생의 말이.....

"싫어요!"

꽉 하고 손이 거세게 쥐어졌다. 어린애가 온 힘을 다해 붙잡고 늘어지는 것처럼....이 아니라 사실, 온 힘을 다해 거세게 붙잡고 늘어졌다. '유, 유, 유.....유렐!'하고 두 명의 미인이 동시합창으로 부르짖는 것을 부시하고, 여동생은 입술을 고집스럽게 깨문 다음 선언한 것이다.

"오빠가, 오빠가 나에게 먼저 춤 신청 했으니까! 공주님은, 공주님은 그 다음이에요!"

'오빠'라는 낯선 명칭이 둔부를 장식용 그랜드 피아노로 후려친 것 같은 타격을 주었다....뭐랄까 상당히 낯간지럽고, 싫진 않지만 지나치게 달달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의 타격은 '역시 너도 어머니들의 딸이구나'라는 복잡한 심경이랄까.....저 순진하고 가냘픈 남국의 피가 영향을 끼친 것은 겉모습뿐이란 말이냐, 하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나저나 공주님의 웃음소리를 선창으로 하여 연회가 웃음바다가 되어 가는 모습은 볼만했다. 그 과묵한 시워드 백작까지 희미하게 웃음을 물고 있었다. 이럴 때가 이른바 '적기'라는 것이지. 나는 홀 중앙으로 여동생을 이끌어나갔다. 그리고 탈 많던 연회가 비로소 시작되었던 것이다. 길이길이 손님들의 기억에 남을 연회가 되었으리라, 아마도. 손님들이 그렇게 웃었던 연회는 드물었을 테니.

그리고 연회가 끝날 때쯤, 어머니들이 우리들을 끌고 나가기 전에 미리 정원사에게 준비시켜 놓은 하얀 장미 꽃다발을 나는 여동생에게 선물했었다. 보잘것없는 선물이지만 여동생을 만날 일은 그날밖에 없으리라 생각했고, 연회 직전까지 마땅히 생각해 낸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작은어머니에 의해 버려질지도-라고 생각했지만, 별수없지 싶었다. 여동생이 주었던 장미 꽃다발보다 더 큰 것을 선물했다는 것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여동생은 수줍어하며 하얀 장미 꽃다발을 받아들고, 장미처럼 하얗게 웃어 주었다.

그리고 당연한 일이지만, 여동생은 내가 스무 살이 된 지금까지도 만나지 못했고-3년 후라면 아버지의 쉰을 기념하여 연회가 열릴 테니 그 때야 다시 볼 수 있겠지만- 좀 많이 무정한 소리겠지만, 그 동안은 연회도 그 기억도 까맣게 잊고 있었고, 여동생에 대한 관심도 없었던 것이다.





여동생과 나 사이의 꽃이라면 그것뿐이었다. 붉은 장미, 흰 장미. 어느 쪽일까. '꽃이 보고 싶다'는 말은 내가 준 그 꽃을 말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흰 장미다. 하지만 내가 주었던 흰 장미를 받아 준 것은 단순히 선물을 준 것이 기뻐서일지도 모른다. 나에게 붉은 장미를 선물했던 것은 여동생이 붉은 장미를 좋아해서가 아닐까. 그렇다면 붉은 장미겠지.

.........수수께끼도 아니고 이거 원.

"이보게, 자네가 뫼시는 분은 어떤 꽃을 좋아하지?"

그리고 그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아마 백합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뭐야 이건!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가 편지지가 와삭 구겨졌다. 겨우 화를 가라앉히고 편지지를 문질러 폈다.

차근차근 생각해 보자. 여동생은, 일주일 후면 결혼한다. 결혼하는 상대는 시워드 백작. 그래, 그 문제의 연회에 왔었던 그 백작이다. 백작으로서는 두 번째 결혼이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전처가 아이 없이 사망한 후 백작은 홀로 지내왔던 것이다. 여동생과 나이 차이가 여덟 살이 나지만 인품이나 인망, 재력이나 권력 등 아무리 살펴봐도 뒤떨어지는 혼처는 아니다. 여덟 살도, 스무 살 나이차의 결혼이 빈번히 이루어지는 상황에서는 오히려 나이차가 적은 편에 속한다. 더욱이 백작의 외모는 명문가의 아가씨들이 상사병에 걸릴 정도로 뛰어나다. 어느 면을 봐서도 훌륭한 혼처.....

.........라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법이니까. 결혼하기가 싫은 걸까. 그래서 결혼 전 옛 연회의 기억을 떠올리고 이런 편지를... 시워드 백작은 내가 존경하는 남자이고, 어렸을 적 그와 같이 되리라는 꿈을 품어온 이상 '여동생이 그와 결혼하기 싫어한다'라는 건 별로 납득이 되지 않는다. 백작과의 혼담은 나 역시 적극적으로 찬성했던 것이다. 여동생의 기억은 흐릿해져서 관심도 없었지만, 백작과 매제 관계가 된다는 것은 나쁘지 않은 일이니까.

..........나는 부정할 수 없이 무정한 오빠인 것 같다. 새삼스럽지도 않지만.




결국 붉은 장미 꽃다발, 흰 장미 꽃다발, 백합 꽃다발을 챙겨서 마차에 탔다. 시종에게 맡기고 싶었지만 여동생이 이런 편지를 보내 온 것이 '결혼이 싫어서'라면 일단 만나 봐야 할 필요성이 있다. 결혼식 전날에 도피라도 하면 큰일이니까.....가 아니라 여동생을 위해서! .......늘 생각하지만 역시, 내 핏속에 남국의 피는 섞여 있지 않은 것 같다.

작은어머니에게 방해받으리란 짐작과는 달리, 나는 곧장 여동생에게 안내되었다. 하얗게 웃고 있는 여동생은 그 날과 같았다. 그 날과 같이 하얗고, 장미꽃같이 아름답다. 옅은 금발과 물빛 눈동자와 상냥한 얼굴........하지만, 저 하얀 미소는 타다 남은 하얀 재처럼 창백하고 처연한 것이었다.

"와 주었네, 오빠."

부드럽게, 자연스럽게 말했다. 수십 번을 만나 왔던 남매인 양.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만나고 싶었어. 오빠를 정말 만나고 싶었어. 괴로워, 괴로워서....오빠가 곁에 있어 주기를 바랬어. 방해가 될 테니까, 연락 못 하고 지금까지 괴로워서....바쁜데 이렇게 오게 해서 미안해. 편지........일부러 재촉하는 말 쓰지 않으려고 했는데...."

남국의 꽃은 아름답고 커다란 꽃잎과, 꿀로 가득찬 대궁과......가느다랗고 약한 줄기를 가지고 있었다. 북국의 작은 꽃잎과 단단한 줄기를 가진 꽃과는 달리. 나는, 단 한 번 만난, 그리고 피로 연결된 이 소녀에게 지금까지 전혀 관심이 없었다. 오빠, 라고 친근하게 불려지는 것이 싫지 않았지만 딱히 좋지도 않았다. 애정에 애정으로 보답해야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내 무심함이, 어머니들과 똑같았다는 것은 부정하지 않는다. 그 날 그 연회에서, 스스로의 위상을 위해 어린 딸을 괴롭히던 어머니들과 나는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는 것을. 어머니들을 마음 속으로 언짢게 여기던 그날의 나는, 지금까지 전혀 발전하지 않았던 것이다.

친근하게 흘러나오는 '오빠'라는 단어. 몇 번이고 마음 속으로 나를 불렀는지, 그것은 모르겠다. 작은어머니나 큰어머니나 어머니로서는 낙제점인 인물들이고, 여동생도 어머니들에게는 기대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왜 나일까. 솔직한 심정으로,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나는 가만히 여동생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나는 그저, 가만히 바라보았다. 초상화 속의 인물을. 잘생기고, 그렇지만 왜인지 나약해 보이고 교활해 보이고, 상냥하고 순한 미소를 띠고 있는 초상화 속의 남자를. 여동생은, 다시 타버린 재처럼 하얗게 웃었다.

"이걸 보내왔어. 날 만나고 싶대."

위험한 부위를 건드렸구나, 하고 생각했다. 나조차도 건드리고 싶지 않던 부위를. 결혼 전에 그렇게 많은 여자를 섭렵해 왔던 바람둥이 아버지에게 사생아가 한 명도 없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나는 별로 생각하려 들지 않았다. 딱히 충격받을 일은 아니지만 불유쾌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북국의 피를 이어받고 누구보다도 어머니들과 닮은 나는, 알 것만 같았다. 자신의 아들들에게 권력을 주겠다는 일념 하나만으로 먼 남국으로 시집온 두 명의 아름다운 미녀가, 남편이 자신들을 수태시킬 수 없다고 희미하게 짐작했을 때, 그 절망이 얼마나 큰 것이었을지. 청춘도 버리고 바람둥이 남자에게 시집을 왔다. 아들을 하나씩만 갖게 되면 한 명은 친정의 권력을 가질 수 있고 한 명은 시가의 권력을 가질 수 있다. 그것만을 바라왔는데, 양쪽 모두가 물거품이 되어 버리고.....더욱이, 남편이 죽으면 의지가지할 곳이 없게 되어 버릴 처지. 남편의 권력은 먼 방계 혈통으로 넘어가 버리겠지.

그것이 자존심 강한 두 명의 미녀에게 얼마나 시련이었을까. 시집올 때까지만 해도 둘은 사이가 좋았다고 들었다. 각각의 아들에게 미래가 보장되어 있으니까, 싸울 이유 따윈 없었다. 그러나 진실이....잔혹한 진실이 두 명의 사이를 갉아놓기 시작한 것이다.

배신한 것은 큰어머니. 나의 친어머니겠지. 아마도, 그렇게 사이 좋았던 작은어머니에게도 비밀로 했을 것이다. 동생마저 배신하고, 권력을 위해 불륜으로 아이를 가졌다. 그리고 태어난 아이는 아들. 권력을 가질 수 있다!

작은어머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큰어머니의 불륜을 시가에 고해 바쳐 큰어머니를 파멸시킬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태어난 아들도 파멸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남편이 죽고 나서 권력은 방계 혈통으로 넘어가 버린다. 그리고, 후작의 미망인으로서 그 어떤 힘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자신이 낳은 아들이 아니라도 '아들'만 있으면 후작의 사후, 후작의 미망인으로서 존재할 수 있다. 작은어머니에게 아들이 없는 상황에서, 나는 구명줄이었던 것이다.

결국, 작은 어머니는 큰어머니와 똑같은 길을 택했다. 불륜으로 자식을 얻으면 된다. 그 자식이 남자아이라면, 친정의 권력을 잡을 수 있고, 자신의 미래도 보장받는다. 프라이드도 양심도 버려 가며 필사적으로 찾은 마지막 비상구. 여자아이가 태어났을 때의 작은어머니의 분노는 상상도 가지 않는다.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두 자매가 얼마나 서로를 증오했을지. 내가 여자아이였거나, 여동생이 남자아이였다면, 두 자매가 이렇게 사이가 나빠질 이유도 없었을 텐데.

그렇다 해도....

"내가 만나러 가겠다. 너 대신."

처음 배신한 것은 큰어머니, 나의 친어머니. 그러나 고발하지 못한 작은 어머니. 나는, 내 친아버지는 벌써 저 멀고 차디찬 북해에 묻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큰어머니는, 아무런 문제 없이 처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작은 어머니는, 작은 어머니는......초상화 속의 남자는 전형적인 남국인이지만, 여동생의 옅은 금발이나 옅은 물빛 눈동자와는 조금도 닮지 않았지만, 그 순하고 가냘픈 표정만은 닮아 있었다.

고발하지 못한 작은 어머니. 큰어머니보다 마음이 약했던 걸까. 그래서 '후환'을 없애지 못한 걸까.

젠장-이다. 결혼식이 일주일 남았는데 무려 후작의 누이동생에게 '내가 네 친아비니 돈을 다오'라고 협박 편지를 보내온단 말이지. 젠장! 차라리 작은어머니에게 보낼 것이지. 하기사 작은 어머니도 북국의 미인이다. 비록 큰어머니보다 약하다 한들 이런 식으로 쪼잔하게 협박하는 남국의 방탕아에게 질쏘냐. 결혼식을 일주일 앞둔 신부, 만만한 자신의 친딸. 쉽다고 생각했나 보지? 개같은 새끼! 북국의 늑대는, 먹을 가치 없는 자는 먹지도 않는다. 갈갈이 걸레짝처럼 찢어서 흰 눈을 검붉게 물들여, 눈으로 더러운 피를 정화시킬 뿐이다.

후회하게 만들어 주마.





목덜미에 칼을 대고, 낮게 으르렁거렸다. 히익-하며 주저앉는 이런 방탕아 따위. 이런 놈, 정말 싫다. 무엇보다도 싫은 건, 그 나약하면서도 상냥해 보이는 표정이, 여동생의 얼굴과 겹쳐 떠오른다. 그 상냥하며 수줍게 웃던 작은 아이가.

그러나 이 표정은 거짓이다. 이런 표정으로, 자신의 친딸을 상처입혔다.

"실컷, 움직이고 싶은 데로 움직여라. 아니, 제발 부탁이니 움직여! 기꺼이, 아니 기쁘게 베어주마."

'움직이지 마, 안 그러면 벨 테다'라고 말할 때보다 더 뻣뻣하게 굳어버리는 모습에 핏 웃었다. 움직이지 않아도 베어버릴지도 모르는데.

"협박 편지를 보냈겠다?"

"나, 난 단지....."

"아버지라고? 그렇게 당당히 써 보내? 핏줄이 흐르는 자식을 상처입히고 협박하고 공포에 질리게 해 놓고, 뭐가 어쩌고 저째!"

자식은, 부모의 도구로 쓰인대도 어쩔 수 없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자식이 필요하다면 부모들로서는 그 자식을 써먹을 수밖에 없는 법. 귀족가든 천민가든 살아가는 데엔 누구나 크기만 다를 뿐 고난을 겪는다. 살아가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이던가. 알고 있다. 그렇기에 당연하다고까지 생각해 왔다. 부모님들의 행동이 못마땅해도 반항하지 않은 건, 낳아주었기 때문에. 감사나 은혜 때문이 아니다. 태내를 빌린 빚. 키워 준 빚. 그것을 갚기 위해.

하지만 너는 방법이 틀렸다, 이 개자식아. 순순히 도움을 청했다면, 이런 식의 협박이 아니라 고개를 숙이고 '돈이 필요하다'고 친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면.....저 어리고 가냘픈 것이 그 청을 거절했을까.

........기분이 나빴다. 검에 불결한 것이 묻어서가 아니다. 시간을 주었는데도, 그랬는데도, 죽이지 말아 달라고 목숨만 구걸했던 그 자식 때문에.

나는 애정으로 자란 아이가 아니다. 그리고 애정을 갈구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애정으로 자라지 못한 여동생은, 애정을 갈구했다. 메마를 대로 메마른 나에게까지도 애정을 쏟아부었고 보답받기를 바랬다.

거짓말이라도, 친딸이니까 그 아이를 사랑한다고 말했다면......단 한번이라도 친딸을 생각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면.....아니, 최소한 변명이라도 했다면! 나는, 죽일 수 없었을 텐데.




피에 묻은 검은 내팽개쳐 버리고, 믿을 만한 수하에게 뒷처리를 맡겼다. 관 안에 금화를 가득 넣어 매장하라는 말에 수하는 눈을 둥그렇게 떴지만 그 말에 따랐다. 아무리 충실한들, 아무리 입이 무거운들, 말은 언젠가 은밀히 전해진다. 그는 그렇게 바랬던 돈 때문에 편하게 잠잘 수도 없을 것이다. 언제 저 무덤이 도굴되는지를 살펴보면 저놈의 입의 무거운 정도도 짐작할 수 있겠지.

여동생은, 내가 안심시키려고 지은 미소에 상냥하게 웃어 주었다. 돈을 잔뜩 주고 먼 북국에 영구적인 일자리를 구해 주었다는 말에 여동생은 내 말을 믿는 것 같았다. 물론 언뜻 불안한 얼굴을 했지만, '그래도 네 진짜 아버지니까, 부정(父情)이란 게 있기는 한 모양이야. 얌전히 말을 듣더군'하고 말하자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신부에게 어울리는 미소였다.

나는 시워드 백작을 믿는다. 그는 믿을 수 있는 남자로, 인품이나 인격이나 흠잡을 데 없다. 뛰어난 검사이며 전술가이자 책략가로 국왕에 명에 의해 오랫동안 국경 밖에서 싸워 와, 전처와는 심지어 합방마저도 못 했다 하여 무정한 남자라는 소릴 듣지만, 나는 전처에 대해 그가 말할때마다 그의 눈이 흐릿한 죄책감으로 물들던 것을 기억한다. 책임감이 강한 남자. 과묵하지만 강인한 남자. 그 예전의, 아버지의 연회 때, 연회가 파하고 내가 자리를 뜨자마자 내던져진, 흰 장미꽃다발을 주워 여동생에게 손질해 보내 주었던 그의 다정함을 기억한다. 여동생과 내가 어머니들의 주장을 무시한 것에 작은어머니가 얼마나 분노했는지, 작은 어머니가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를 뻔히 알면서도, 여동생의 울부짖는 소리에 나는 어느 정도 상처입었다. 처음으로 베풀어진 호의에 처음으로 정성껏 한 답례였다. 큰어머니가 알았다면 여동생이 준 붉은 장미 꽃다발도 똑같은 꼴을 당했을 것을 알면서도, 아직-그리고도 어쩌면 지금까지- 속좁은 소년이었던 나는 자존심이 심하게 상했던 것이다.

그가 꽃다발을 집고 일어섰을 때 참으로 불가피하게 눈이 마주쳤고, 나는 발가벗겨진 듯한 모욕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희미하고 친근하게 미소지었다.

"아름다운 장미꽃이군요, 공자. 내일 내가 직접 유렐 공녀께 보내 드리겠습니다."

".........버려요, 그런 거!"

분노에 치밀어, 거칠게 나간 말에 그는 내 어깨를, 동료들에게 그가 그렇게 하듯 힘있게 툭툭 두들겼다. 나는 반항적으로 그의 눈을 올려보았다. 만일 그의 눈에 동정이 담겼다면, 나는 이제까지 존경할 남자고 본받을 남자고 어쩌고 한 것을 머릿속에서 싸그리 지운 후 장미꽃다발을 빼앗아 그의 얼굴에 뭉개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눈은 동정을 넘어선 불가사의한 이해를 담고 빛나고 있었다.

그의 이복형제가 그를 지키다 죽었으며, 그 둘은 유난히 사이가 좋은 형제였다는 것은 아주 후에서야 알았지만, 그 연회 이후에 내가 그를 존경하는 강도는 한층 더 높아졌다.

아, 그러고 보니 백합은 시워드 가의 문장이었구나.





결혼식에 꼭 참석하겠다고 시워드 백작의 초청장에 답장을 보낸 후 나는 역시나 한가로이 의자에 기대어 있었다. 초콜릿은 역시나 달았다. 나는 좀 짜증이 났지만 별 수 없었다. 북국에선 다 이렇게 마셔요-하고 고집부리는 요리장은, 어머니를 꼭 닮은 북국의 여인이었으니까. 가끔 집사는 헛기침을 하며 '후작님께서는 너무 북국의 사람들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습니다'라고 말하곤 하지만, 그 역시 내 편견을 깨 줄 '특이한 북국의 여인'이 한 명도 내 주위에 없었다는 것은 부정하지 못한다. 그나저나 결혼식엔 선물과 함께 꽃을 보내야겠지. 뭘 보내야 하나...

............흰 장미? 붉은 장미? 백합? 대체 뭘 보내야 하는 거지? 귀찮아, 모든 꽃은 그저 꽃일 뿐인데!








루시 모드 몽고메리풍의 연애 얘기라던가 가문의 속사정 얘기라던가(앤 시리즈 전권을 읽어보신 분이나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다른 소설들을 읽어보신 분이라면 짐작하실 듯) 하는 거, 상당히 좋아합니다. 무조건 해피엔딩이라던가, 개연성 없는 우연 일색이라거나, 연애 얘기가 대부분이라거나 하는 온갖 악조건 속에서도 말이죠(....) 뻔하고 뻔한 얘기인데도 읽으면 재미있는, 그런 이야기를 쓰는 것도 하나의 재능이라고 생각되곤 해요. 오늘도 뻔하디 뻔하면서도 재미있는 글을 찾아 읽게 되네요^^:

글이 잘 안 써져서 예전에 썼던 단편 하나 올리고 갑니다;
댓글 2
  • No Profile
    세뇰 05.07.07 12:10 댓글 수정 삭제
    훌륭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안 좋아하는 소재인데도 잘 읽었습니다^^ 단... 단편이 아니라 장편의 일부 같군요; 내적인 완결성이 다소 떨어지는 듯 합니다. 시워드 백작이란 인물에게 너무 무게추가 많이 기운 듯한 감도 있고요.
  • No Profile
    rubycrow 05.07.09 00:48 댓글 수정 삭제
    리플 감사합니다. 일상의 한 순간을 가볍게 써 보려고 했는데 여기저기 단점이 보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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