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지난 번 글을 쓴 지 얼마 안되어 쓴 글이라 나아진 점이 전혀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게다가 이 내용, 꽁트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짧은 주제에 제가 봐도 정말 싸X지가 없습니다.

그냥 뭐든지 써야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혔다고 착각하는)힌 작가지망생의 처절한 몸부림이라고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철듦

  태바다 무라타수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인시아도 싱긋 웃었다. 엘프들하고 얘기하는 것은 긴장감이 넘치는 짜릿한 일인 반면 이 우란 작가와 얘기하는 것은 마음 편하고 즐거운 일이었다. 엘프나 인간 학자들은 그녀와 언쟁을 벌일 때면 일부러 자리를 사양하고 서 있는 게 대부분이었다. 아마 언쟁이란 서로 신체적 부상을 입히는 것만 제외하고 모든 것이 허용된다고 가르치는 수사학학원(사실상 말싸움 학원이었다)의 영향일 터였다. 비유적인 의미가 아니라 글자그대로 상대방보다 높은 위치를 차지하려는 얕은 수작인 셈이다. 처음엔 그러려니 했지만 한두 번 일어나는 일도 아니다보니 아주 넌덜머리가 나버렸다.


  태바다도 자리를 일부러 사양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는 미리 준비한 듯한 깔개를 깔고 바닥에 앉았다. 그래도 인시아보다 눈높이가 높았지만 성의는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녀도 우란을 만난 적은 거의 없었고, 만난다 해도 길거리에서 지나가는 걸 본 것이 전부였다. 물론 소문이나 책 등으로 우란들의 예의에 대해 많이 알고있었지만 역시 직접 경험하니 기분이 좋았다. 엘렌과 더불어 마음 편하게 대화할 수 있는 상대가 하나 더 늘어난 것에 대해 인시아는 무척 즐거운 기분을 느꼈다.


"'이야기에 대해서'는 아주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문체가 상당히 날카로우시기에 만만찮은 분인 줄 알았는데, 되게 부드러우시네요."
"감사합니다."


태바다도 우란 중에는 꽤 이름난 문학가였다. 그렇게 많은 책을 쓰진 않았지만 그는 일반적인 주제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을 가졌다는 평가를 듣고 있었다. 엘렌과 친분이 있었던 그는 잠시 이 도시에 몇 가지 서적을 구하러 들렀다가 엘렌에게 인시아를 소개받아서 이렇게 서로 친한 사이가 된 것이다.


  한창 이런저런 주제로 대화를 하던 중에, 태바다는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아, 제가 잘 아는 그럭저럭 부유한 인간상인 가족이 하나 있습니다.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이라 좀 있으면 이곳으로 올 겁니다. 저도 그 때까지만 이 도시에 머무를 생각입니다."
"같이 떠나시는 건가요?"
"예. 그 분들의 다음 행선지가 제 고향이랍니다."
"저런, 아쉽네요. 더 오래 계시면 좋을 텐데."
"하하하, 저도 가족이 있으니까요. 그런데…"


갑자기 우란이 말꼬리를 흐렸다. 말할 까 말 까 망설이는 눈치였다. 호기심이 생긴 인시아는 자신의 삶에 변화를 줄지도 모를 일이 우란의 예의 속으로 사라지기 전에 잽싸게 말했다.


"부탁할 거라도 있으세요?"
"이런, 죄송합니다. 이거 뭔가 해드린 일도 없는데…"
"괜찮아요. 하플링으로 엘프들 사이에서 사는 것은 재밌지만 편하진 않거든요. 하지만 당신이랑 얘기하는 것은 아주 즐거웠어요."
"그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 근면한 가족한테 남매가 있습니다. 딸이 더 나이가 많죠. 딸은 별 탈 없이 보통 상인으로 자랐습니다만, 아들한테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 아이가 어렸을 때부터 제가 자주 말상대를 해주었었는데 그 영향인지 몰라도 책을 좋아한답니다. 머리는 오히려 좋은 편입니다. 그게 문제였지요. 남의 집 자식을 이렇게 말하긴 좀 그렇지만 철이 반만 들어버렸답니다."
"알만 하네요."


빈 말이 아니었다. 꼬장꼬장한 엘프들의 사회에서 살면서 인시아는 그런 아이들을 수도 없이 많이 보았다. 어른도 아이도 아닌 어중간한 나이 때에 적당히 머리가 좋은 녀석들은 종종 다른 생각 없는 녀석들보다는 고차원적이지만 얼토당토않은 고민이나 환상, 혹은 비관주의에 빠져들곤 했다. '철이 반만 든'이란 표현은 그녀도 자주 쓰는 표현이었다. 무엇보다 그녀가 그런 시기를 겪었기에 그 위험함(그래, 위험했다)을 잘 알고 있었다.



"자기 자신만의 어두운 세상을 형성해놓고 자신같이 비범한 인간이 우매한 자들 사이에 떨어졌다는 것을 한탄하며 벌써부터 우울증 비슷한 증상을 보이고 있나보죠?"
"…그렇습니다."
"덤으로 세상을 이리 만든 모든 어른들에 대한 반발심도 얹어서. 이런, 실례했습니다."
"아니, 괜찮습니다. 부모가 몇 번이나 설득하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소용이 없었습니다. 원래 이런 문제가 생기면 그냥 나이가 들면 스스로 알게 될 거다, 라고 하고 넘어가는 게 대부분이지만 상태가 다소 심각합니다. 당장이라도…자살이라도 할 것 같은 분위기입니다. 이번에 얹혀 타고 가는 일도 있고 해서 어떻게 서든 저도 도우려고 애써보았지만, 아까 지적하셨던 것처럼 저는 글쟁이 기질은 있어도 말로 어떻게 하는 건 잘…. 그렇다고 이런 일로 편지를 쓰자니 그것도 좀 그렇고요."
"한 번 해볼게요."
"…예?"
"이런, 제 맘대로 넘겨짚어서 죄송해요. 제가 한 번 설득을 시도해 볼게요. 그걸 부탁하고 싶으신 거죠?"
"이거 정말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원래 제 엘프 친구 하나도 저에게 이런 일로 조언을 자주 구한답니다. 그래도 엘프 아이보단 인간 아이가 설득하기 더 쉽겠죠."



  다음날, 인시아는 별 다른 생각 없이 태바다를 따라 그 가족을 만나러 갔다.


'어이쿠, 비관주의에 빠질 수도 있겠구만.'


그 가족은 아버지는 중부인이었지만 어머니는 남부인이었고 아이들은 혼혈아였다. 중부가 남부(를 침략해서)보다 부유했던 시대가 오래 전에 지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어지간한 중부인들은 '남부인=야만인'이라는 별 신빙성이 없는 공식을 머릿속에 담고 다녔다. 혼혈아에 대한 태도도 곱진 않았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한 때 악명을 떨쳤던 단체 '붉은 씨아'단은 혼혈들을 집중적으로 '사냥'한 적도 있었다. 처음엔 인간과 엘프 사이에서 태어난 하프 엘프와 엘프와 사르크 엘프 사이에서 태어난 던 엘프만이 목표였지만 나중엔 점점 더 살인에 맛을 들(였다고 많은 사람들은 추정했다)여서 모든 종류의 혼혈로 목표가 확대되었다. 이쯤 되자 원래 골머리를 앓고 있던 엘프 정부와 방관적인 자세만 취하던 인간 국가들의 정부가 단합하여 대대적인 진압작전에 들어갔고, 결국 붉은 씨아단은 와해되어 전설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그게 겨우 한 세대 전 일이다. 아주 송곳 같은 단어만 골라 정신머리가 번쩍 들게 만들어줄 작정이었던 인시아는 잠시동안 마음속으로 그 아이를 동정해주었다. 어린 아이한테 인생 상담하러 가는데 이런 생각하는 것도 우스웠지만, 그 애가 자신의 출생상의 문제를 언급하면 그녀는 자신이 엘프들 틈바구니에 끼어 사는 하플링이라는 걸 부각시킬 계획이었다. 스스로도 피식 웃고 말았다. 무슨 머리끝까지 약이 오른 엘프 문학자 만나러 가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하신 겁니까?"


태바다가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 그는 상인 내외와 이야기하는 사이에 그 아들 녀석의 태도가 바뀐 것을 보고 어리둥절한 상태였다. 인시아는 다소 자조적인 미소를 띄우며 대답했다.


"오늘 당장 떠나시는 것은 아니죠?"
"예."
"그럼 잠시 후에 차나 한 잡 대접해드릴 테니 우리 집으로 와 주세요. 다 설명해 드릴 깨요. 그리고 가급적이면 혼자 와 주실 레요? 죄송하지만 좀 편하게 말하고 싶어서요."
"알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인사는 됐어요.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었으니까요."


하지만 쉬운 일도 아니었어. 인시아는 절대로 태바다에게 그녀가 한 말을 고스란히 들려줄 생각은 없었다. 그러기엔 좀 피곤했다. 어두운 방식으로라도 나름대로 청춘을 불사르고 있는 젊은이를 설득하는 건 확실히 기운 빠지는 일이다. 인시아는 찬찬히 방금 전에 그 머리는 좋지만 아직 완전히 성숙하진 않은 그래서 더 안쓰러운 녀석에게 해준 말을 곱씹어 보았다.


  우리 모두는 특별하다. 이건 너무 뻔한 사실이다. 가끔 씩 '너는 절대로 특별하지 않아!'라며 순진한 젊은이들에게 우울증을 주입하는 사람이 있는데 단어를 잘못 고른 거다. 아무도 특별하지 않다면 무슨 재미로 삶을 살겠는가? 그 누가 사람의 목숨이 중하다 하겠는가? 다만 특이하지 않을 뿐이다. 세상에 고민 한 번 안 해본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세상이 왜 이렇게 어두운지, 다들 왜 자기 자신의 몫만 챙기려고 하는지. 그리고 난 이렇게 특별한데 왜 다들 몰라주는 건지. 모두가 특별하기 때문에 모두가 역사의 주인공이 될 수는 없지만 자신의 삶의 주인공이거늘. 좀 지긋지긋한 말이긴 하지만, 세상의 이치란, 세상이 돌아가는 모양이란 단순한 것이다. 왜 자기 비하와 자만에 동시에 빠지려고 하는가? 그대는 역사의 주인공도 아니고 특출 나지도 않지만 엄연히 그대의 삶의 주인공이며 특별하다. 이미 자기도 모르게 터득한 사람한테는 이런 말도, 생각도 필요 없다. 진정으로 냉소적이고 지혜로운 사람은 그저 하루 하루를 성실하게 살아갈 뿐이다.


'하지만, 그렇지만….'
'네 혈통?'
'아니, 그것에 대해선 그렇게 불만이 많진 않아요.'
'그거 다행이네. 불가항력적인 것으로 상대방의 약점을 잡는 놈들도 머저리지만 불가항력적인 것으로 고민하는 것도 별로 똑똑한 사람이 할 만한 행동이 못 되거든.'
'…그렇게 절 바보로 만들어놨으면서, 똑똑한 사람이라고요?'
'얌마, 똑똑해지는 건 젊은이도 할 수 있는 일이야. 넌 충분히 똑똑해. 내가 희망을 가지라던가 뭐 그런 말이라도 해 줄까?'
'됐어요. 아주머니는 절 절망시키려고 오신 분은 아닌 것 같으니까요.'
'누나라고 불러.'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 아이는 그래도 제법 지식이 쌓여있었기에 인시아가 한 말의 요점을 그나마 빨리 이해했다. 인시아는 꿋꿋하게 살아가는 부모와 화목한 가정환경, 그리고 소년의 지능 개발에 도움을 준 태바다에게 마음 속으로 감사를 표했다. 안 그랬으면 더욱 어려웠을 것이다. 그녀는 한 숨을 쉬며 태바다를 대접할 준비를 했다. 그 우란은 아마 내 방식에 대해 점잖게 이의를 조금 제기한 다음 그래도 훌륭한 방법이었다고 거듭 감사를 표하겠지. 사실 위의 조건들이 충족되어 있지 않았으면 사용도 못할 방법이었다. 피부에 와 닿을 정도로 어두운 현실에 시달리는 사람에겐 설령 그것이 진실이라도 입이 차마 안 떨어진다. 돌대가리에 개념도 없는 녀석이라면 말해주는 것 자체가 시간 낭비고. 그 애가 자신의 말을 완전히 이해했으리라고는 인시아도 기대하지 않았다. 그래도 일단 충격을 줬으니 성공이라 할 만하다. 아직 젊지 않은가? 간단한 정신적 충격 하나만으로도 얼마든지 삶이 바뀔 수 있는 시기 아닌가? 이제 나머지 삶이 어떻게 흘러가느냐는 그 아이의 몫이지만, 나중에 저 애가 성공하거든 그걸 빌미로 뭔가 좀 뜯어내야지.


  부드럽게 바닥이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태바다가 온 모양이다. 떠나는 것은 내일이라고 했으니 인시아는 오늘밤을 실컷 즐길 생각이었다. 이야기할 거리가 잔뜩 늘어났으니까. 내일부턴 또(엘렌을 제외한)엘프 학자들이나 상대해야한다. 오늘 일도 있으니 말동무 좀 오래 삼는다고 실례가 되진 않을 것이다. 우란들의 문학과 문화에 대한 정보는 시시콜콜한 것들까지 모두 말해달라고 해야지. 인시아는 별다른 이유도 없이 그들의 대화의 대단원은 '요즘 젊은것들'에 대한 한탄과 상대방(누가 될지는 모르겠지만)의 강력한 동의로 마무리지어질 것이라고 지레 짐작했다. 그런 식의 짐작이 늘 그렇듯이, 그녀는 즐거운 기분을 느끼며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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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잡문을 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미소짓는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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