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고등학교 1학년 때 학교 방침으로 독서록을 써야 했다. 읽어야 할 책 중에 내용을 어디서 주워들었거나 어렸을 때 축약본으로 읽었던 것을 골라 대충 기억나는 대로 썼더니 종례 시간에 담임한테 이 녀석의 독서록이 어떤 꼬라지인지 반 전체에 낭독해 주고 싶다는 평을 들었다. 당시의 필독도서 목록에는 삼국유사가 있었는데, 나는 그 책에서 읽었노라며 독서록에 설씨녀와 가실 설화의 줄거리 및 감평을 써놓았다. 사실은 집에 있던 아동용 역사 만화책에서 읽었던 거지만.
 
 신라 진평왕 때 사량부에 가실이란 청년이 살고 있었다. 가실은 설씨 노인의 딸을 좋아했으나 너무 가난하여 혼인 말을 꺼낼 처지가 못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설씨 노인에게 변방에서 군생활을 하라는 영장이 날아온다. 가실은 노인 대신 자기가 변방으로 갈 테니 돌아오면 자신과 부부의 연을 맺어달라 청하였고 노인의 딸은 이를 수락한다. 가실은 약속의 증표로 거울 하나를 깨 노인의 딸과 나누어 가진 뒤 변방으로 떠났는데 몇 년이 흘러 돌아올 기한이 한참이나 지났건만 깜깜무소식이라. 기다리다 못한 설씨 노인은 이제 포기하자면서 딸을 다른 남자에게 시집보내 버린다. 그러자 혼인잔치가 한창인 마을에 웬 거지가 나타나더니 신부에게 거울 조각을 내밀며 나를 모르겠느냐고 묻는 것이 아닌가. 놀란 신부가 자신의 거울조각을 꺼내 맞추어보니 딱 들어맞더라. 가실이 극적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삼국사기는 역사적인 인물이나 공식적인 사건을 다룬 책인 반면 삼국유사에는 설화나 민담도 수록되어 있다고 배웠으므로 마을의 평범한 처녀 총각이 등장하는 설씨녀와 가실 이야기는 필시 삼국유사에 나오는 설화일 거라 생각해서 독서록에도 그렇게 썼고 담임도 별 말 없이 확인 도장을 찍어 주었다. 헌데 나중에 찾아보니 설씨녀와 가실 설화는 삼국사기에 나오는 이야기라더라. 수업 시간에 듣기로 신라에는 민정문서라는 것이 있어 어느어느 마을에 장정이 몇이고 과일나무가 몇 그루고 가축이 몇 마리고 하는 것을 기록하여 이를 토대로 세금을 거두었다는데 어째서 가실처럼 팔팔한 총각에게 영장이 안 오고 설씨 노인처럼 나이든 사람한테 날아왔는지 의문이다. 

 각설하고, 가실과 설씨 노인의 딸이 그랬듯 옛날에는 남녀가 거울을 둘로 깨 사랑의 증표로써 나누어 가지는 법이었건만 요즈음엔 파경이라는 단어가 결혼이 파탄났을 때나 쓰이고 있으니 얄궂은 일이라 쓴 칼럼을 읽었던 적이 있다. 역시 나중에 찾아본 바 한나라 때 쓰인 신이경이라는 책에 부부가 잠시 떨어지면서 거울을 깨 정표로 삼았는데 부인이 변심하여 재가해 버리자 거울 반쪽이 까치로 화해 남편에게 날아가고 말았다는 이야기가 나와 있다 하니 파경이라는 단어의 유래도 거울을 깨 정표로 삼던 풍습만큼이나 유서깊은 것으로 보이는데 그 칼럼의 저자는 어째서 그런 글을 쓴 것인가. 잠깐 인터넷만 검색해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건만. 하기야 읽은 지가 하도 오래되어 그 칼럼의 저자가 사람들이 파경의 처음 뜻은 모르고 정반대의 의미로만 사용한다고 지탄하는 말투로 글을 썼는지 아니면 단순히 사랑의 증표가 파탄난 결혼생활의 상징으로 변모하다니 묘한 일이라는 말투로 글을 썼는지 정확히 기억나지가 않으니 애꿎은 저자를 함부로 매도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만.

 남성보다는 여성이 거울을 지녔을 법하니 설씨녀와 가실 설화에서 두 사람이 나눠 가진 거울도 본디 설씨녀의 것이었으리라. 하지만 설씨 노인의 딸 역시 가난한 집안 처자였다는데 어떻게 귀한 거울을 가지고 있었을까. 근대 이전까지 거울은 값이 비싸 아무나 가질 수 없는 물건이었다지 않던가. 뭐 드라마 속에서야 가난한 집 맏딸이라는 여주인공이라도 매화 명품옷을 갈아입고 나오는 법이지만. 그러고보면 사실 가실도 말 한 마리를 가지고 있어서 변방으로 가기 전에 설씨 노인의 딸에게 줬다고 하는데 그 말을 팔아서 혼인자금을 마련할 수는 없었던 걸까. 말이 유일한 생계수단이라 팔아버릴 처지가 못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긴 하다만. 좌우지간 귀하고 값비싼 거울을 깨 나눠 가지는 것은 그야말로 이야기 속에서나 가능한, 낭만적이긴 하나 비현실적인 행위가 아니었을까 싶다. 실제 서민 남녀들은 대신 적당한 크기의 자갈 같은 것을 조각내어 정표로 썼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니 이런 이야기가 떠올랐다.
 

 북극성을 다스리는 신선의 아들이 지상에 잠시 유람 왔다가 아름다운 인간 처녀와 사랑에 빠졌다. 몇 달 뒤 신선의 아들이 혼인을 허락받기 위해 부모님께 다녀오겠노라며 천상으로 떠나려 하자 처녀는 검고 단단한 차돌 하나를 반으로 깨 정표로 주었다.
 
 아들이 미천한 인간 처녀와 백년가약을 맺고 싶으니 윤허해달라 조르자 신선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네가 다녀오는 동안 생각해보겠노라며 일단 아들을 멀리 남극성으로 심부름 보냈다. 닷새가 지나 돌아온 아들에게 신선은 가서 그 처녀가 어떻게 되었는지 보고 그래도 네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면 뜻대로 해도 좋다며 아들을 지상으로 보내 주었다. 아들은 희색이 만연하여 내려갔는데 하계에서는 그간 오십 년이 흘러 열여덟 처녀가 그만 예순여덟의 노파가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신선의 아들이 정녕 그대가 그 처녀란 말인가,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다며 의심하자 노파는 소중히 간직해 온 차돌 반쪽을 내밀며 맞추어 보라 말했다. 하지만 오십 년 동안 떠나간 낭군을 그리며 수없이 어루만진 탓에 노파의 돌은 손때가 묻고 모서리가 닳아 뭉툭해진 반면 신선의 아들이 가졌던 돌은 아직 단면이 날카로웠기 때문에 서로 딱 들어맞지 않았다. 신선의 아들이 그것을 빌미로 노파를 거부하니 남녀의 인연을 관장하는 여신이 이를 목격하고선 노하여 차돌끼리 단단히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게끔 만들어 버렸다. 자석의 다른 극끼리 끌어당기는 것은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여기까지 쓴 것은 좋았지만 A4용지 반쪽도 안 되는 이야기를 어디에 내놓겠나. 분량을 늘리고자 자석에 관련된 단원의 수업지도안을 작성해야 하는 교육학도가 본격적인 학습에 들어가기 전에 학생들에게 간단히 들려줄 만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찾다가 친구에게 저 유래담을 듣는다고 하는, 개연성도 그닥 없는 외화를 갖다붙여 으레 그랬듯이 액자소설로 만들어 버렸다. 친구는 초등학생이었을 때 담임에게 그 이야기를 들었는데 우연히도 교육학도의 지도교수가 바로 그 담임이라 교육학도의 지도안을 검토한 뒤 보통 학습에 들어가기 전 학생들에게 들려 줄 이야기는 학생들의 흥미를 끌면서도 수업의 주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어 학습목표와 학습활동을 자연스럽게 이끌어 낼 수 있어야 하는데, 학생이 수업지도안에 제시한 이야기는 이후 수업활동이나 학습목표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니 적합하지 못하다고 혹평한 다음 그건 그렇고 그 이야기는 내가 지은 건데 누구한테 들었느냐, 그 유래담에는 사실 뒷이야기가 있지만 초등학생들에게 들려 주기에는 건전하지 못한 구석이 있어 앞부분만 말했다면서 자석의 같은 극끼리 어떻게 서로 밀쳐내게 되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해 준다는 식으로.
 
 신선의 아들과 처녀 사이에는 사실 딸이 한 명 있었는데, 딸은 신선의 피를 이어받아 쉰 줄이 되었음에도 열다섯처럼 젊어 보였으며 어머니를 빼닮아 무척 아름다웠다. 처녀의 집으로 돌아온 신선의 아들은 문전에 서 있던 딸을 처녀로 착각하여 덥석 그 손목을 붙든 채 아버지께서 허락하셨으니 함께 천상으로 가 혼례를 올리자고 들떠 말하다가 웬 놈팽이가 내일모레면 지천명인 내 딸한테 헛수작을 부리느냐며 부리나케 뛰어나온 노파와 대면했던 것이다. 노파가 된 처녀에게 마음이 식은 신선의 아들은 그러면서도 천상으로 돌아가는 것을 차일피일 미루면서 처녀 몰래 딸한테 슬쩍슬쩍 추파를 보냈는데, 딸도 난생 처음 보는 아버지라 남이나 다름없는 상대렷다. 이를 은근히 받아들이는 눈치가 아닌가. 결국 부녀가 껴안고 수작을 부리건 입을 맞추건 몸을 섞건(이런 옛날 이야기는 본디 뼈대만 같으면 나머지는 이야기하는 사람 마음이다. 좋을 대로 생각하라고 교수가 눙쳤으리라)여하튼 천륜을 어기는 순간 노파가 딸의 방에 들어왔다가 이 가관을 목도하고선 분기탱천하여 악다구니를 쓰니 품속에 소중히 간직하고 있던 차돌이 쩍 소리를 내며 도로 갈라져 버리고 말았다. 나중에 사람들이 차돌을 갖다 맞추어 보려 했지만 두 조각이 서로 밀쳐내는 탓에 아무리 애써도 다시 합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자석의 같은 극끼리 서로 밀치는 것은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또한 자석이 북쪽을 가리키는 것은 망신을 당한 신선의 아들이 천상으로 달아나자 매일 밤 북극성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침을 뱉던 노파의 한이 서려서라고 한다.

 분량을 늘리기 위해 어거지로 붙이기는 했으나 쓰다보니 같은 극이 밀쳐내는 연유와 북쪽을 가리키는 까닭까지 밝힐 수 있게 된 셈이라 괜찮은 수확이다 싶었다. 교육학도의 지도교수가 친구의 담임이었다는 점이 다소 작위적이기는 하나 아주 없을 법한 일도 아니잖은가. 나중에 교육학도에게 유래담의 뒷이야기를 들은 친구가 과연 초등학생에게 들려 줄 만한 이야기가 아니구나 하고 생각하는 것으로 끝을 맺으면 적당하리라. 


 당초 이 유래담을 구상했을 때 대강의 뼈대는 잡아 놓았으나 막상 글로 옮기려니 잘 되지 않는지라 묵혀만 놓고 있다가 ‘나는 부티의 천 년을 이렇게 쓸 것이다’를 읽었다. 하여 이걸 소설로 재구성하기도 귀찮으니 나도 아예 수필을 만들어 버리자 마음먹고 이 글을 쓴 것인데, 쓰다 보니까 교육학도와 친구가 나오는 엽편 또한 어찌어찌 풀리는지라 양쪽을 다 완성할 수 있었다. 다행한 일이라 생각한다.
댓글 0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1914 단편 영원의 빛 (1)1 inkdrinker 2006.05.18 0
1913 단편 고백 MadHatter 2016.03.19 0
1912 단편 기억 초연 2013.03.15 0
1911 단편 잿빛 우물 은비 2013.01.12 0
1910 단편 세 번째 기적 너구리맛우동 2011.12.29 0
1909 단편 1 adama 2004.09.05 0
1908 단편 별빛 우산1 쿠키 2006.11.14 0
1907 단편 홀로 앉은 남자.1 joana 2004.09.15 0
1906 단편 하루 34000명의 아이가 죽는 것보다 더 끔찍한 세계6 짜증나 2008.11.10 0
1905 단편 하얀 나그네 블루베리 2006.11.23 0
1904 단편 나의 사랑스러웠던 인형 네므2 아진 2003.12.08 0
1903 단편 [뱀파이어] 카나리아1 김지원 2006.03.27 0
1902 단편 옛 하늘4 amusa 2005.05.25 0
1901 단편 불면1 금원정 2013.07.15 0
1900 단편 죽은 달의 여신4 안단테 2009.10.31 0
1899 단편 [외계인]이빨에 끼인 돌개바람(본문 삭제)5 Inkholic 2007.04.20 0
1898 단편 협회에서 온 남자4 마그마 2010.11.18 0
1897 단편 어린왕자와 여우 은비 2013.01.12 0
1896 단편 얼음마녀 이야기6 slowdin 2010.11.10 0
1895 단편 이니스프리의 호수 섬을 찾아서3 해파리 2008.01.19 0
Prev 1 ...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 110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