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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책을 읽고 싶습니다

2013.06.06 17:5206.06


   ‘코 그늘’ 이라는 제목의 그 책은 전체적으로 거무튀튀하고 기묘한 문양이 그려진 표지를 가지고 있었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침체되는 책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달리 방도가 없었다. 선물 받은 책을 읽지 않을 수는 없다. 혹시나 책을 읽지 않은 채로 모임에 나갔는데 A가 ‘책은 어땠어?’ 하고 묻는다면 대체 어떻게 대답해야 한단 말인가? ‘요새 시간이 없었다.’ 와 같은 진부한 핑계를 대는 것은 꺼려진다. 게다가 나는 요즘 꽤 한가한 편이다. 아니, 그렇지 않더라도 돌이켜보면 타인에게 비치는 나라는 인간은 어느 상황에서건 속이 편하고 맹한 구석이 엿보이는지, ‘요새 아주 느긋해 보이는데?’ 라던지, 조금 심하면 ‘긴장 좀 해라.’ 라는 말까지 들어버리는 것이다. 한번은 지인들과 함께 추진하던 일이 중도에 무산되어 그들과 불쾌한 다툼까지 벌어지는 바람에 몹시 심한 마음고생을 하고 모임에 참석한 날이 있었다. 그런데 그날 내게 처음으로 말을 건넨 사람이 한 말은 무엇이었는가? 그는 복잡한 생각들로 머리가 지끈거리는 내게 ‘지금 좋은데? 달밤의 히피 같은 표정이군.’ 이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나는 또 거기서 순발력을 발휘한답시고 기타를 퉁기는 시늉까지 했었다.

   나는 스탠드 램프를 책 가까이로 끌어당겼다. 500페이지는 가뿐히 넘길만한 두께의 하드커버 양장본이었다. 페이지의 절단면이 닭 가슴살처럼 느껴졌다. 조금 졸렸다. 자연스럽게 ‘아직 표지를 넘길 때가 아니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책을 읽어간다면 졸음이 오는 것이 내용의 지루함 때문인지, 아니면 신체현상 때문인지, 정확하게 판별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유가 어떤 것이었든 간에 다음번에 책을 펼칠 때는 그 신선도가 지금과는 비할 나위 없이 떨어져있을 것이고, 그것은 독서에 치명적인 방해요소가 될 것임이 분명했다. 나는 책을 책상 한 쪽으로 밀어두었다.


   ‘책이라고 모두 먹어치우는 것은 아냐.’ 하고 그 생물은 말했다. 거대한 도마뱀을 연상시키는 외모였다. 하지만 놈은 두 발로 서 있었다.

‘그럼?’ 하고 어린 남자아이는 물었다.

“너는 아직 어려서 잘 이해할 수 없겠지만 세상의 책 100권 중의 1권만이 다음 세대까지 남을 가치가 있지. 나는 그런 책만을 취식해. 그래야 만족스러운 기분이 들거든.”

“책은 아무 맛도 나지 않아.”

“인간에게 책은 음식이 아니야. 읽어야 할 대상이지. 그런데 인간 중에는 독서를 ‘고귀한 식사’라고 표현하는 사람도 있다지? 그건 우리로서도 꽤 공감할만한 이야기야. 네가 공감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좋을 텐데. 혹시 모르니까 시험해 볼까? 내가 하는 말을 잘 듣고 느껴봐.”

“좋아.”

“보라색.”

“뭐?”

“혀에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아?”

“전혀. 귀만 간지러운데.”

“그게 공감각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야. 내가 전에 만났던 한 인간은 보라색이라는 말에서 태양에 뜨겁게 달궈진 토마토 맛을 느낀다고 했지. 실제로 입에 침이 고이더군. 아마 그들은 우리의 식사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거야.”

“근데 넌 이름이 뭐야?”

“어떤 사람들은 우리들을 책 포식자라고 부르기도 한다더군.”

“책 포식자? 그럼 여기에 온 이유가?”

“물론 식사를 하기 위해서지. 이 동네에는 유서 깊은 도서관이 한 곳 있지? 그곳에 구비되어 있는 다양한 고서들이 내 입을 즐겁게 해줄 거야.”

“넌 너밖에 생각하지 않는구나?”

“원칙적으로는 그래. 난 쾌락주의자니까. 하지만 너희한테 그런 이야기를 들을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네게는 그 책들이 필요하지 않잖아? 네 친구들도, 네 부모도 마찬가지지. 인간들은 책을 버렸어. 그것들의 가치를 날이 갈수록 더 무용하게 만들고 있지. 오히려 책들도 자신들에게 관심이 있는 나 같은 생물에게 먹히는 것을 좋아할 거야.”

그 생물은 그렇게 말하며 등에 붙어있는 날개를 펼쳤다. 아이는 자신의 하늘을 반쯤 가려버린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여기는 꿈속이야?”

그는 날개짓을 시작했다. 돌풍이 일며 근처에 있던 새들이 날아올랐다. 아이는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제대로 눈을 뜰 수 없었다. 생물이 공중에 뜬 채 말했다.

“어디라고 생각해?”


   머리가 약간 지끈거렸다. 엎드린 채로 잠이 든 모양이었다. 스탠드 불빛에 눈을 제대로 뜨기 힘들었다. 나는 몇 번 눈꺼풀을 감았다가 떴다 하며 꿈속으로 넘어가있던 의식을 조금씩 책상 앞으로 끌어당겼다. 책상 한 쪽에 놓인 검은 책이 눈에 들어왔다. 낯선 사람과 눈이 마주친 듯한 경계심이 내부에서 일어났다. 잠들어 있는 동안 책이 줄곧 나를 지켜보았다는 기분이 들었다.

   찬 공기를 마시고 싶었다. 나는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맨션 뒤편의 산책로는 주변의 공원과 연결되어 있었다. 나는 두 길이 만나는 지점까지 걸어갔다가 눈에 보이는 벤치에 앉았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산책로를 거닐고 있었다.

“그걸 잃어버리면 어떡해!”

갑작스럽게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나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눈 앞에 부부로 보이는 한 쌍의 남녀가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비명은 분명 가까운 곳에서 들려왔고 여성의 목소리였다. 그들 가까이에는 강아지를 데리고 나온 아이들뿐이었으므로 비명은 여자의 입에서 나온 것이어야 마땅했다. 그런데 그녀와 그녀의 남편은 너무나 담담하고 평온한 표정으로 걷고 있었으므로 나는 다음 순간 어떻게 생각하면 좋을지 알 수 없게 되었다. 흙바닥 위에는 개미들이 줄지어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한동안 그것들을 응시했다. 아마도 조금 몸을 떨었던 것 같다. 해는 빠르게 저물며 지상에 주었던 빛을 거두어들이고 있었다. 나는 무엇인가에 쫓기듯 산책로를 빠져나왔다.

   그날 내가 집으로 돌아와 현관문을 열었을 때 놈은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녹색의 미끈해 보이는 등가죽과 도마뱀의 머리, 나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 생물은 다름 아닌 ‘책 포식자’였다. 나는 다시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야 하는 것이 아닌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 때 놈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수채 구멍으로 고였던 물이 빠져나가는 소리. 그런 소리가 놈의 커다란 입에서 튀어나왔다. 무척이나 커다랗고 탐욕스러워 보이는 입이었다. 그 안에서 빛나는 이빨들은 더욱 흉악해 보였다.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책상 위로 뛰어가 ‘코 그늘’ 이 제 자리에 있는지 확인했다. 책은 얌전히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고개를 돌려 다시 놈을 보았을 때 놈은 이미 소파에서 일어나 있었다. 그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나는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서고 난 뒤에야 놈이 인사를 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압축되었던 스프링이 펼쳐지듯 허리를 펴고는 비틀거리며 말했다.

“갑작스럽게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나는 침을 한번 삼켰다. 공손해 보이는 태도지만 어떤 함정을 숨기고 있을지 모른다. 나는 경계를 늦추지 않고 놈을 노려보았다.

“그렇게 경계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저희는 사람을 해치거나 하지 않으니까요. 어쨌든 놀라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놈은 다시 꾸벅 허리를 숙였다. 나는 목소리를 떨지 않으려고 일부러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그런 것은 그만둬.”

놈의 다시 튕기듯 허리를 폈다. 비틀거리며 놈이 말했다.

“그럴까요? 사실 저희에게는 어려운 동작이라서 말이죠.”

“여기서 대체 뭘 하는 거지? TV까지 켜놓고.”

“죄송합니다. 마침 ‘전격가면’이 방송할 시간이라서 저도 모르게 그만······.”

“전격가면?”

나는 TV화면을 응시했다. 막 광고가 끝나고 드라마가 시작되고 있었다. 사실 ‘전격가면’은 내가 최근 주의 깊게 보고 있는 드라마였다. 나는 놈을 바라보았다. 놈은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괜찮다면 같이 봐도 될까요?”

“뻔뻔한 족속이군.”하고 말하며 나는 슬쩍 TV 앞으로 가서 앉았다. 놈의 술수에 말려드는 척 하면서 본색을 드러내게 하려는 속셈이었다. 놈은 소파 옆에 멀뚱히 서서 천천히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앉지 그래?” 하고 나는 말했다.

“감사합니다.”

놈은 소파의 오른 쪽 끄트머리에 앉았다. 놈과 나는 그대로 드라마 1회분을 시청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드라마가 진행될수록 나는 놈을 주시한다는 최초의 계획을 잊고 극 속으로 깊숙이 빠져들어 갔다. 결국에는 놈이 옆에 있다는 것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정말로 정신을 쏙 빼놓는 드라마였다. 아마 놈 역시 그랬을 것이다. 광고가 나오고 나서야 나는 놈의 존재를 다시 의식했다. 솔직히 가슴 언저리가 서늘해졌다.

“역시 재밌네요.”

그가 쭈뼛거리며 말했다. 나는 호주머니에서 담배케이스를 꺼내 뚜껑을 열고 놈에게 건넸다.

“저는 끊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근처에 있던 재떨이를 내 쪽으로 밀었다. 나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연거푸 몇 번 연기를 내뿜었다. 나는 말했다.

“우리 전에 한 번 만난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글쎄요. 저는 기억에 없는데요. 저희 중 한 명과 마주치신 것 아닙니까? 인간에게는 저희의 개별적인 모습이 대체로 구분이 가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만······.”

“어쨌든 상관없겠지. 대체 날 만나러 온 이유가 뭐지?”

“그건···드라마가 끝난 후에 말씀드리면 안될까요?”

“뭐?”

나는 TV를 바라보았다. 스크린에는 내일 방영될 축구 중계 때문에 한 회분을 앞당겨 방송한다는 공지가 송출되어 있었다. 그것은 곧 ‘전격가면 8회’라는 문구로 바뀌었다. 솔직히 말해서 참을 수 없이 다음 전개가 궁금했던 참이었다. 나는 헛기침을 한 번 한 뒤 다시 잠자코 화면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드라마는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며 전개되었다. 나는 화면 속에 완전히 몸을 담그고야 말았다.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다음 회의 예고편이 시작되고 나서야, 나는 드라마가 끝났다는 것을 알았다. ‘아차.’ 하는 생각과 함께 나는 소파 끄트머리를 확인했다. 놈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심장박동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나는 황급히 책상이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A에게 받은 책이 보이지 않았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은 나는 눈 주위와 관자놀이를 매만졌다. 귓불을 잡고 의미없이 세게 당겨보았다. 티셔츠 목 부분을 늘여 얼굴을 집어넣었다.

“제길.”


   언제부터인가 내 주위에는 아무런 이유 없이 책들이 사라지는 일이 일어나곤 했다. 내가 그것을 처음 알아차린 것은 한창 사춘기를 겪고 있을 무렵이었다. 책의 존재는 당시의 내게 특별한 것이었다. 작가에 의해 창조된 세계 속에서 유영하는 것은 직면해야할 현실이 단 하나뿐이라는 사실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던 나에게 적잖은 위안이 되었다. 나는 용돈을 아껴 책들을 사 모으기 시작했고 시간이 지나 그것들은 작은 서가를 이루었다.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나는 책가방을 내려놓고 책들 사이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알 수 없는 온기가 있었다. 서가에서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는 집 밖에 있을 때에도 내 몸의 어딘가가 그곳에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럴 때면 한시라도 빨리 서가 앞으로 돌아가고 싶어 마음이 들뜨곤 했다. 무척이나 잠들기 싫었던 어느 토요일 밤이었다. 나는 얼마 전 구입한 장편소설을 다 읽고도 여전히 활개치는 감성적 질료들 때문에 또다시 서가 앞으로 갔다. 그 때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 일 년쯤 전에 읽었던 후지모토 에츠시의 소설집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서가를 뒤져도 그 책은 보이지 않았다. 책상 위며 소지품 서랍, 침대 밑을 뒤져봐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부모님을 떠올렸지만 이내 생각을 거두었다. 그분들은 말없이 내 물건에 손을 대지 않으셨다. 할 수없이 차선책으로 같은 시기에 구입했던 에츠시의 에세이 집을 찾는데 어찌된 일인지 그것마저 보이지 않았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때 불현듯 내 머릿속에 밀어닥친 생각은 ‘책 포식자’에 대한 것이었다. 기억 속에 지나치게 생생한 꿈처럼 남아있던 놈과의 만남을 나는 현실로 받아들여야 할 것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확신할 수 있는 단서는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에츠시를 대신 할만 한 다른 책을 찾아 읽는 것 뿐이었다. 그 후에도 그런 일은 몇 번이고 주기적으로 일어나 나를 혼란에 빠뜨렸다. 그제서야 나는 ‘책 포식자’와의 만남이 한낱 꿈이나 공상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놈의 모습을 목격하지 못했지만 서재에 생긴 빈칸을 통해 놈이 왔다 갔다는 사실을 알았다. 커다란 충격이 머리끝에서부터 심장 언저리까지 번져갔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빈방에 대고 소리를 지르거나 커튼 뒤를 살펴보는 일 뿐이었다. 공포와 분노, 불안과 안도의 감정이 잇따라 지나가면 나는 방안에 홀로 남아 서늘한 무력감과 마주앉아 있었다. 

   시간은 지체 없이 흘러갔고 나 역시 고교생이 되었다. 입시준비로 인한 바쁜 나날들이 이어졌고 그 시간들은 자연스럽게 서재와 나를 떨어뜨려 놓았다. 그에 따라 ‘책 포식자’에 대한 생각도 차츰 희미해져갔다. 놈이 책을 훔쳐갔는지 어쨌는지도 더 이상 알아차릴 수 없게 되었다. 서재를 떠난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참고서와 문제집들이 있는 또 다른 서재였다. 그곳은 시간이 지나 전공서적과 자격증 수험서가 있는 서재로, 또다시 토익수험서과 취업준비서적들이 구비된 서재로 바뀌어갔다. 새로운 서재의 책들이 사라지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한 뒤, 도심에 있는 회사에 입사한 후에는 회사 근처의 맨션을 빌려 지냈다. 나는 본가의 책들을 옮겨오지도, 새로운 서재를 만들지도 않았다. 그렇게 나는 놈의 존재를 거의 잊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었다.

   사내에 독서 동아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각 부서의 PC를 연결하는 메신저의 공지 란을 통해서였다. 한 달에 한권씩, 추천 서적의 이름이 ‘이 달의 책’ 게시판을 통해 올라왔다. 회사 일도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을 무렵이었다. 문득 스스로가 일 년에 한권도 책을 읽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의 여가시간을 채우고 있는 것은 술과 담배, 주기적이지 않은 데이트와 PC게임, 건강의 악화를 방지하기 위한 산책 정도였다. 그 안에 독서를 추가하는 것은 꽤 괜찮은 생각처럼 느껴졌다. 나는 독서에 대해 놀랄 만큼의 애정을 가지고 있었던 사춘기 시절을 회상하며 조금 기대에 들뜨기도 했다. 그 날, 나는 퇴근 즉시 서점으로 달려가 ‘이 달의 책’ 중 한 권을 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집중력 있는 독서를 위한 책상용 스탠드까지 구매했다. 집에 도착해서는 스탠드를 제외한 조명을 모두 끄고 와인 한잔과 함께 책상 앞에 앉았다. 준비가 되었다는 생각에 책을 펴 들었다. 한 페이지를 읽어 내려가자 오래 사용하지 않았던 근육을 움직이는 듯한 기분 좋은 자극이 머릿속에 전달되었다. 책의 깊이가 영혼의 깊이를 확장시켜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흥을 돋구고자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책과 혼연일체가 되어 의식할 틈도 없이 페이지가 넘어가는 기쁨이 곧 나를 사로잡으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러나 그날의 독서는 거기까지였다. 책과의 교감은 첫 페이지 까지였다. 나는 이미 읽은 문장을 계속 되풀이 하여 읽고 있었으며 활자들은 의미 없는 복잡한 그림들처럼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난독증 환자가 된 기분이었다. 나는 와인을 한 잔 더 비웠다. 입에서는 이미 작가에 대한 투덜거림이 시작되고 있었다. 며칠 뒤 나는 다른 추천작을 구해 읽기 시작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인터넷의 서평을 조사하여 평가가 가장 좋은 책을 골랐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줄어드는 것은 와인뿐이었다. 쓸데없는 짓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 남아있는 사춘기 시절에 느꼈던 책 속의 온기, 그 광활한 품에 대한 갈망은 쉽사리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 날, 나는 예고 없이 독서 동아리 모임에 참석했지만 당혹스러워 하는 회원들은 없었다. 실로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본격적으로 시나 소설을 습작하는 회원들부터, 사진이나 회화에 취미 이상의 애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 직장인 밴드의 드러머, 애니메이션에 광적으로 열광하는 사람 등. 그 중에서는 직장 내에서 오가며 몇 번이고 마주치며 인사를 나누던 사람도 있었지만 설마 그가 시집을 몇 권이나 출간한 시인이라는 것은 도무지 짐작할 수도 없었던 일이었다. 모임의 주최자는 ‘다음 페이지에 무엇이 있을지 예상할 수 있다면 저희가 문학작품을 읽는 의미는 없을 겁니다.’ 라는 말을 서두로 갑작스럽게 모임을 찾은 나를 부탁했다. 나는 내가 겪은 독서 실패담을 가감 없이 이야기 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책을 읽고 싶습니다.”


   놈이 사라진 뒤, 나는 새 담배에 불을 붙이고 혹시 집 안 어딘가에 놈이 숨어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에 방과 방 사이를 돌아다녔다. 연기는 확신 없고 무기력해진 나의 생각을 대변하듯 일렁이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집에서 나올 때는 필터만 남은 담배가 네 개, 재떨이에 뭉그러져있었다.

   주말의 서점은 꽤 붐비고 있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책을 하나씩 집어 들고 들여다보는 척 하고 있었지만 진정 책 속에 자신을 던져 넣어 문장의 흐름에 몸을 맡긴 '다이버'들은 좀처럼 없었다. 입으로는 까마귀 같은 소리를 내며 있는 힘껏 책장을 넘기는 일에 집중하고 있는 꼬맹이와, 자신이 읽고 있는 책이야말로 가장 의미 있다는 것을 표정으로 보여주려는 듯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들 사이를 빠져나가며 나는 서점 직원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한 명이 눈에 띄긴 했지만 그녀는 천정까지 뻗은 사다리 위에 올라가 있었다. 마침 반대편에서 또 다른 여직원 한 명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와 나의 거리는 서서히 가까워졌다. ‘지금이다.’ 싶어 말을 꺼내려고 하자 그녀는 갑자기 발을 성난 쥐처럼 움직여 빠르게 눈 앞을 스쳐지나갔다. 당혹감에 돌아보았을 때는 이미 멀찍이 달아난 뒤였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사다리 앞에서 기다렸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리기가 뭐해서 눈앞에 있는 책 하나를 집어 읽는 척 하기 시작했다. 직원은 좀처럼 사다리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다른 직원이 나타나지 않을까싶어 통로 쪽을 내다보는데 조금 전 눈앞을 지나간 여직원과 눈이 마주쳤다. 즉시 그녀는 눈앞에 쌓인 책들을 한 아름 안고 시야에서 사라졌다. 손님에게서 어떠한 일도 떠맡지 않겠다는 그런 태도는 나를 완전히 질리게 만들었다. 포기하고 사다리 위를 올려다보는데 직원이 없었다. 그녀는 이미 지상에 발을 붙이고 후드를 뒤집어 쓴 남자 손님의 문의를 받는 중이었다. 뒤편에 서 있던 내게 그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직원이 PC 앞에 서서 물었다.

“제목이 뭐라고 하셨죠?”

“코 그늘입니다.” 하고 남자가 대답했다.

귀를 의심하게 하는 말이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내가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후드에 가려진 남자의 뒷모습뿐이었다. 직원은 무심히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짧은 제목에 비해 자판 소리는 상대적으로 길게 들려왔다.

“재고가 있긴 한데, 비치된 것은 없고 창고를 확인해봐야 하거든요.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어요?”

말을 마친 직원은 빠르게 어딘가로 걸어갔고 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았다. ‘같은 책을 찾고 있다고 말해볼 걸.’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지만 그녀는 이미 창고 안으로 사라진 뒤였다.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책을 펼쳐 들여다보는 척 하면서 후드를 쓴 남자의 행동을 주시했다. 거기에는 분명 기이한 구석이 있었다. 남자는 직원이 떠난 후로 자신이 선 자리에서 단 한걸음도, 심지어 목의 방향조차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의 목은 직원이 걸어간 방향으로 완전히 고정된 채였다. 거기에는 보는 사람을 불안하게 하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나는 실제로 그가 그곳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 맞는지 도무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인가 느껴본 적이 있는 감각이었다. 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에게 점점 다가가고 있었다. 어쩌면 손을 뻗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때 직원이 돌아왔다. 나는 다시 책 속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녀의 손에는 거무튀튀하고 기묘한 문양이 그려진 책 한 권이 들려있었다. ‘코 그늘’ 이었다. 남자가 목례를 하고 직원이 건넨 책을 받아들었다. 나는 여직원에게 다가가 불쑥 코 그늘의 재고가 남아있는지 물었다. 직원과 후드를 쓴 남자가 동시에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고개를 돌려 남자와 마주 보았다. 나는 비명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손으로 막았다. 후드의 안쪽에 있는 것은 내가 익히 잘 아는 도마뱀의 얼굴이었다. 나는 입을 벌린 채 놈과 서점직원을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말이 되지 못한 숨이 얕은 기침 같은 형태로 목을 비집고 나왔다. 그러나 직원은 오히려 나의 그런 행동이 거추장스럽고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재고가 없는데 주문해 드릴까요?”

나는 책 포식자를 응시하고 있었다. 놈은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나는 여직원을 향해 소리치듯 말했다.

“아무렇지도 않아요? 저게 대체 사람의 얼굴입니까?”

나는 손가락을 들어 놈을 가리켰다. 직원은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었으므로 나는 그녀의 얼굴이 상기되어가는 과정을 그대로 지켜볼 수 있었다. 그녀는 놈의 얼굴을 바라보았고 얼마 후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다음 순간, 그녀는 짜증이 치민다는 목소리로 “그게 도대체 어쨌다는 건데요?” 하고 소리치고는 발자국 소리를 크게 내며 자리를 떠나버렸다. 나는 입을 벌리고 멀어져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놈은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한번 흔들더니 계산대가 있는 출구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소리쳤다.

“잠깐!”

그는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나는 말했다.

“너희는 대체 뭐지?”

그는 뭔가를 생각하는 듯 왼쪽, 오른 쪽으로 한번 씩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시 후 놈은 말했다.

“그럼 인간은 뭐라고 생각하나? 그건 대체 누구의 얼굴이지?”

그는 나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다시 몸을 돌려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책상 위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놓여있는 검고 기묘한 무늬의 책을 보았다. 현기증이 일었다. 책은 자기 자신의 굳센 의지를 가지고 그곳에 도달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날 밤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본가에 계신 어머니였다. 그녀는 늘 그렇듯 나의 건강과 생활에 대한 염려의 말을 늘어놓고는 생각난 듯 최근 자신이 읽고 있는 책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나의 서가에서 꺼낸 책이었다. 그녀가 책의 내용을 말하기 시작하자 조금씩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이 느껴졌다. 그 책의 내용은 내게 몹시 익숙한 것이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바로 그 사실이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나는 알면서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책의 저자가 누구죠?”

그녀는 후지모토 에츠시라고 대답했다.


  “책은 어떠셨나요?”

술이 한 순배 돌아갔을 때 쯤 A가 물어왔다. 나는 술병을 기울여 그의 잔을 채우면서 말했다.

“꽤 힘들었어요.”

그는 조금 웃었다.

“저도 처음 보았을 때 그 두께에 놀라고 두 번째로 내용에 놀랐었죠.”

A가 나의 잔에 술을 채웠다.

“확실히 놀라운 구석이 있는 책이었습니다.”

나는 그렇게 말한 뒤 고개를 들어 술자리를 한 바퀴 빙 둘러보았다. 시끌벅적하게 떠드는 사람도 있었고 조용히 옆에 앉은 사람과 서로의 의견을 공유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어디에서건 ‘무엇인가를 좋아한다.’라는 진심의 가치를 존중하는 분위기가 배어나오고 있는 자리였다. 그때 회장이 큰 목소리로 이야기를 꺼냈다.

“잠시만 주목해 주세요. 저희 모임의 이름을 기존의 ‘○○독서회’에서 모임의 정체성을 더욱 잘 드러낼 수 있는 다른 어떤 것으로 바꿔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이 나왔습니다. 어떤 이름이 좋을까요?”

웅성거리던 회원들은 곧 저마다의 의견을 내놓기 시작했다. ‘독서 관능기.’, ‘책탑방.’ ‘아는 이야기.’등의 후보작들이 튀어나왔다. 그 때 내 머릿속에서는 계속 한 가지 생각이 맴돌고 있었다. 그것을 알아챈 듯 A가 물었다.

“좋은 이름이라도 떠오르셨나요?”

나는 조금 웃었다. 스스로에게 보내는 웃음이었다. 그리고 말했다.

“책 포식자는 어떨까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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