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나비

2013.01.03 20:2201.03

나비


어데까지 왔니.
여기까지 왔다.
어데까지 왔니.
여기까지 왔다.

저벅저벅. 산 깊은 곳의 침묵을 깨고 발걸음 소리가 천천히 다가왔다. 새하얀 소복을 늘어뜨린 여인이 그 끝없이 이어진 산길을 맨발로 터벅터벅 걸어왔다. 길게 풀어헤친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형형한 눈동자가 빛났다. 그 눈동자는 마치 어찌하여 나를 죽였냐.하며 원망하는 것만 같았다.
-오지 마.-
정향은 두려웠다. 분명 닿지 않을 터인데, 분명 닿을 리가 없을 텐데도 금방이라도 저 핏기 없고 삐쩍 마른 손이 자신의 목을 조를 것만 같았다. 제 목을 조르고, 제 살을 파먹으며 함께 가자 할 것만 같았다. 정향은 점점 입안의 침이 마르는 것을 느끼며 옷자락을 꽉 쥐었다.
  -이건 꿈이야. 넌 죽었어!-
정향은 비명을 내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오지 마. 오지 마. 오지 마. 제발. 정향은 파르르 떨리는 두 손을 꽉 쥔 채 애원하듯, 절규하듯 눈앞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감정의 폭풍이 마음속에서 휘몰아치며 그녀의 정신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 그때 여인의 손이 정향의 목을 졸라왔다. 뼈만 남았건만 어디서 힘이 솟아나는 지 정향의 새하얀 목이 점점 붉은 빛깔로 물들어갔다. 숨이 막혀 괴로워하는 정향을 보며 여인은 소름끼치게 웃었다. 창백한 얼굴 너머 요사스럽게 빛나는 붉은 입술이 숨이 막히게 아름다웠다.
-그래. 네가 죽였지!-

정향은 거친 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의 온 몸에 땀이 비가 오듯 흘렀다. 그녀는 붉게 충혈 된 눈을 하고는 어두운 방안을 바라보았다.
'꿈.'
방금 전 그것은 분명 꿈이었다. 몸을 덮고 있는 이불의 감촉도, 어두운 방안의 모습도 현실이니까. 헌데도 그것이 이리도 생생해 온 몸을 덮치니 그것이 대체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정향은 아직도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꼭 끌어안은 채 애써 그 꿈을 머릿속에서 지우려 애썼다.
"부인? 어찌 그러시오."
그때 옆에서 남편인 진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금 깨었는지 그는 흐릿한 눈으로 염려스레 아내를 응시했다. 그 눈빛에 서서히 진정을 되찾은 정향은 흐트러진 옷자락을 단정히 하고는 살포시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옵니다. 단순한 악몽이옵니다. 쉬시지요, 서방님."
"정녕 괜찮은 게요? 낯빛이 좋지 않은데."
“괜찮습니다. 심려치 마세요.”
“허나.”
온화한 눈빛은 여전히 염려를 품고 있었다. 혼인한 지 두어해. 그러한 시간이 흘렀음에도 처음 보았을 때와 전혀 변하지 않은 이 다정한 정인이 그녀의 가슴을 울렸다. 정향은 몸을 움직여 남편의 품에 안겼다. 그는 자신의 품에서 작은 새처럼 몸을 떠는 아내를 안고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서늘한 바람결 사이로 새들의 자그마한 지저귐이 녹아들어왔다. 정향은 어젯밤의 악몽이 거짓처럼 평안한 기분에 사로잡힌 채 조심스레 옷을 지었다. 지아비를 향한 그녀의 마음처럼 새하얀 면 위에 한 땀 한 땀 바느질이 더해져 옷의 형태를 그려갔다.
“아이고, 아씨. 이런 건 쇤네들 시키시라니까요.”
월산댁이 호들갑스럽게 말하며 안절부절못했다.
“서방님께 옷 한 벌쯤은 지어드리고 싶어 그러네. 요새 바쁘셔서 제대로 무언가를 해드린 적이 없지 않나.”
정향이 수줍게 미소를 지으며 잠시 멈추었던 바느질을 다시금 이어갔다. 그 모습에 월산댁은 함박웃음을 짓더니 넉살좋게 말했다.
“아이고. 우리 아씨 마음씨도 참 좋으시지. 나리께서는 무슨 복이 있으신가. 이리 고우신 아씨를 만났으니.”
“월산댁.”
월산댁의 말에 쑥스러웠는지 정향이 얼굴에 홍조를 드리우고는 그녀를 흘겨보았다. 그러자 월산댁은 언제 그랬냐는 듯 시치미를 뚝 떼었다. 그때 월산댁의 딸인 언년이가 허겁지겁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아씨. 마님께서 급히 찾으십니다요.”
“어머님께서?”
시어머니가 황급히 찾는다는 소리에 정향은 의아함을 품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서둘러 안채로 향했다.

  차가운 밤바람이 문틈사이로 스며들어와 불빛을 흔들어놓았다. 호롱불이 아릿하게 흔들리는 것을 바라보는 정향의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녀는 몇 번이고 마음을 다잡아보려 자수를 시도해보았지만 곧 얼마 지나지 않아 바늘을 놓아버렸다. 착잡한 심정에 입술을 악물던 그녀의 귓가에 지아비의 목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부인, 내 들어가도 되겠소?”
“아, 예. 들어오시지요, 서방님.”
정향은 놓던 자수를 서둘러 뒤로 물리고 화급히 일어서 남편을 맞이했다. 방안에 들어선 진정은 잠시 입구에 서서 아내를 바라보았다.
“어찌 그리 보고만 계십니까. 어서 앉으시지요.”
정향은 혹여 감정이 얼굴에 드러날까 싶어 표정을 다스리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권했다.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진정은 곧바로 자리에 앉았다. 정향은 다소곳이 그 마주 편에 앉아서 그의 말을 기다렸다.
“자수를 놓고 있었소.”
“예. 긴 밤 호젓하여.”
“......”
“어찌 그리 보십니까?”
남편의 시선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느낀 정향이 진정에게 물었다. 진정은 잠시 망설이는 듯 하더니 곧 본론을 꺼냈다.
“내 어머님께 이야기를 들었소. 장모님께서 쓰러지셨다고.”
“...들으셨습니까.”
“어머님께서도 말씀하셨겠지만 아무리 출가외인이라 하나 장모님께는 그대가 하나뿐인 귀한 딸이지 않소. 허니.”
“서방님께서 관직에 오르신 지도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이리 한참 번잡하시고 중요한 때에 신첩이 어찌 서방님의 곁을 떠난다 말입니까. 딸은 출가외인이라 하니. 어머님께서도 필경 이해해 주실 것입니다.”
정향은 단호하게 말했지만 그 목소리안의 떨림마저 온전히 숨길 수는 없었다. 아내를 착잡하게 바라보던 진정이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보드랍게 덮었다.
“헌데 어찌 그리 안색이 어두운게요.”
“서방님.”
진정의 따뜻한 어조와 그의 온기에 정향은 고개를 들고 남편을 올려다보았다. 진정은 포근한 미소를 지으며 아내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다녀오시구려. 나 역시 부인을 혼자 친정에 보내는 게 마음이 편치는 않으나, 혹여 이대로 장모님께서 세상을 떠나시면 필시 평생의 한이 될 거요.”
“......”
지아비가 이렇게까지 말해주자 더 이상 무어라 말할 수 없었던 정향은 결국 그리하겠다고 대답했다.

이미 진정이 시어머니에게도 허락을 구해놓은 터라 길을 오르는 것은 쉬웠다. 가볍게 준비를 마친 정향은 하인 몇과 함께 길을 떠났다. 이틀 정도 길을 떠난 후, 정향은 드디어 고향에 도착했다.
    
사가에 도달하여 가마에서 내리니 예전과 똑같은 가택의 모습이 정향을 맞이했다. 정향은 가마에서 내려선 채로 그 모습을 잠시 말없이 바라보았다. 노비가 정향이 왔음을 알리자 안에서 사람이 나와 그녀를 맞이했다.
“아이고, 아씨. 어서 오십시오. 마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실지.”
오랜 노복이 눈물을 글썽이며 반가이 그녀를 맞이했다. 그러나 정향은 어째서인지 전혀 미동조차 없었다. 도리어 무언가를 불안해하는 사람마냥 눈빛이 초조함에 흔들리고 있었다.
“아씨.”
“아, 그래.”
몸종의 독촉소리에 정향은 그제야 제정신을 차리고는 가택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안방에 들어서 본 모친, 한씨부인은 깊이 잠들어 있었다. 요 며칠째 내내 혼절하여 눈을 뜨는 적이 별로 없다는 말에 정향의 눈빛이 흔들렸다. 정향은 곧 모두를 내보내고 혼자 남아 한씨부인의 곁을 지켰다. 못 본 2년 사이에 몸이 많이 상하였는지 피골이 상접한 모습이 정향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다. 쌔액쌔액. 아기처럼 자그마한 숨소리만이 퍼져가는 방안에서 정향의 가슴 한 곳이 점점 무언가에 억죄어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정향은 천천히 손을 들었다. 그리고 한씨부인의 목에 그 손을 찬찬히 가져가댔다. 그리고 그 목을 조르려다가 결국 손을 떨어뜨리고는 바들바들 떨었다.
‘안 돼. 이것만은!’
그때 사람의 신음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와닿았다. 정향은 화들짝 고개를 들고 소리가 들린 방향을 쳐다보았다. 그때 그녀가 본 것은 서서히 눈을 뜨는 한씨부인의 모습이었다.
“아가......”
그녀는 곧 정향을 발견하고는 흐릿하게 미소를 지었다. 곧 그녀의 눈망울이 반가움으로 붉게 젖어들었다.
“어...어머니. 깨어나셨습니까.”
정향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려왔다. 그녀는 가슴이 미칠 듯이 뛰는 것을 느끼며 애써 표정을 다스렸다. 그러나 그것을 알 리 없는 한씨부인은 아픈 몸을 힘겹게 일으켰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 딸의 양뺨을 감쌌다. 뺨을 감싸는 그녀의 온기에 정향의 몸이 흠칫 굳었다.
“어디 보자. 우리 딸. 우리 어여쁜 아가. 악몽을 꾸었지 뭐니. 네가 죽어버리는 꿈을. 이리 있는데... 내 딸이.”
한씨부인은 어여쁘게 웃었다. 그러나 이내 힘이 다하였는지 다시 힘없이 정향의 품속에 쓰러졌다. 정향은 몸이 굳은 채로 어떠한 행동도 하지 못했다. 가는 몸을 바르르 떨며 자신의 품에 쓰러진 한씨부인을 쳐다보던 그녀는 자꾸 떠오르는 무언가를 잊으려 질끈 눈을 감았다. 그리고 한참 후 그녀는 한씨부인을 다시 자리에 제대로 눕히고는 찬찬히 방을 나섰다.

정향은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왔으니 잠시 걸어보고 오겠노라고 그대로 밖으로 혼자 거닐러 나갔다. 시간가는 지도 모른 채 마냥 걷다 보니 어느새 시간은 저녁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하늘이 햇빛에 물들어 주홍빛이 새하얀 하늘위로 점점 퍼져가는 광경을 바라보던 정향은 문득 이곳이 지아비와 처음 만났던 곳이었음을 깨달았다. 냇가에 있는 작은 돌다리. 졸졸졸 물이 흐르는 가운에 큼직하게 놓인 돌들이 건널목이 되어주고 있었다. 정향은 어릴 때처럼 그 냇가에 서서 맑은 물속에 손을 갖다 대었다. 차가운 물의 감촉을 만끽하고는 다시 일어서던 그녀의 눈에 언뜻 보이는 것이 있었다.
“!”
그것은 과거의 자신이었다.
-발을 삔 게냐.-
-아, 아닙니다. 귀하신 도련님께서 신경 쓰일 일이 아닙니다.-
-어디 보자. 보아야 상태를 살필 것이 아니냐. 이래서는 걷지 못할 것이니.-
-괘, 괜찮습니다.-
발목을 삐어 움직이지 못하고 앓고 있던 소녀. 그리고 그녀에게 다가와 무슨 일이냐며 다정히 말을 걸어주던 청년. 마치 현실처럼 눈앞에 보이는 과거의 환영이 정향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그녀는 잠시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떴다. 다시 떠본 그곳에 더 이상 어린 정향도, 진정도 없었다. 모든 환영이 사라지고 나자 정향은 그만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 주저앉아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운 터라 눈가가 부은 채로 가택으로 돌아온 정향은 들어가지 않은 채 그저 대문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들어가려고 몇 번이고 마음을 먹었지만 그 결심이 무색하게도 발이 돌덩이라도 된 것처럼 도통 움직이지가 않았다. 어느새 노을도 완전히 져버리고 하늘은 먹빛으로 검게 물들어 있었다. 캄캄한 하늘아래 자리 잡은 가택의 모습은 음습한 느낌을 주어 그녀의 마음을 더욱 졸이게 만들었다.
그때 그녀의 머릿속에 앳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찾았다.-
“!”
정향의 온 몸에 좌르륵 전율이 흘렀다. 그녀는 겁에 질린 사람마냥 몸을 파들파들 떨며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피곤하여 헛것을 들었나.’
그리 생각하고 안심하여 고개를 든 순간 그녀의 눈앞에 댕기머리를 한 어린 소녀가 보였다. 고운 분홍빛 저고리를 입은 소녀는 정향을 보더니 방긋이 웃었다.
-왜 이제 오니.-
“아... 아아아아아!”
그녀를 발견한 순간 정향의 입에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녀는 고성을 내지르고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손으로 두 귀를 막고 두 눈을 감은 채 현실을 거부했다.
“저리 가. 저리가! 아니야! 아니야!”
터벅터벅. 발걸음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그리고 그 발걸음소리가 자신 바로 앞에 서자 그녀는 진정을 생각하며 외쳤다.
“서방님!”
“아씨. 왜 그러고 계십니까요.”
“!”
그러나 들려온 소리는 친정노비인 마서방의 것이었다.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위를 쳐다보았다. 거기에는 마서방이 의아하고 염려어린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향은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내려놓고는 혼이 나간 사람마냥 멍하니 그를 응시했다.
“아씨?”
“아, 아닐세. 내가, 내가 헛것을 보았군 그래.”
그녀는 애써 웃음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치맛자락에 묻은 흙을 탈탈 털어내었다. 마서방은 그녀의 행동에 의문을 품었지만 굳이 입밖에 내지 않았다.

혼인하여 떠난 지 두어해. 그동안 주인이 없었던 별당은 호젓했다. 한씨부인이 건강할 때는 자주 살폈지만 그녀가 앓아누운 후부터 제대로 돌본 사람이 없어 음산한 기운마저 돌았다.
“아씨. 어찌 들어가지 않으시고 그러고 계십니까.”
정향이 별당마루에 서서 들어가지 않고 마냥 보고만 있자 삼월이가 물었다. 그녀의 물음에 정향은 그제야 정신이 든 사람처럼 아, 그래.라고 짤막하게 대답했다. 그러고는 힘없이 다리를 움직였다.

삼월이가 준비를 갖추고 난 후 물러나자 정향은 방안에 혼자 남게 되었다. 가구나 다른 물건들이 모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녀는 문득 경대를 발견하고는 다가가 그것을 펼쳤다. 그리고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봤다. 말없이 그 속에 비친 얼굴을 응시하던 그녀는 거칠게 경대를 다시 닫아버렸다. 곧 그녀의 입에서 거친 숨결이 터져 나왔다. 숨을 내쉬는 것 하나하나가 너무나 힘들어 그대로 심장이 조여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한참동안 힘겹게 숨을 토해내던 정향은 시간이 아득히 흐른 후에야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형형한 눈빛으로 다시금 경대를 펼쳤다. 그리고 그 속의 자신은 또다시 응시했다.
‘이긴 건 나야. 이 자리는 내 자리야. 네가 아니라 나라고!’
  
기이한 악몽이 또다시 정향을 찾아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꿈의 내용을 기억할 수가 없었다. 알 수 없는 악몽에 신음하며 괴로워하던 그녀는 결국 야심한 시각에 깨어났다. 온 몸이 땀에 흥건히 젖은 채로 가쁜 숨을 내쉬던 그녀는 마음을 달래려 마루로 나갔다. 스산한 찬바람이 새하얀 소복을 뚫고 들어와 몸을 시리게 만들었다. 아직 가을이건만 밤바람은 너무나 차가워 그녀의 마음마저 시리게 만들었다. 잠시 후 다시 방안으로 돌아가려던 정향은 문득 별당 밖에서 사람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을 깨달았다. 오밤중에 울리는 절절한 울음소리에 몸을 굳혔던 그녀는 곧 무언가를 결심했는지 당혜를 신고는 그쪽으로 걸어갔다. 별당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 그곳은 소실 진씨가 머무르는 곳이었다.

진씨는 달에 향을 올리며 기원을 하다가 또다시 울음을 참지 못하고 울기 시작했다. 정향은 그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었지만 발이 바닥에 사로잡힌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서러운 울음을 토해내던 진씨는 문득 사람의 인기척을 느끼고는 정향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아씨......”
정향을 발견한 진씨의 눈빛이 동요에 가득 찼다. 정향은 어찌할 바를 모른 채 그 자리에 굳어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했고 진씨는 서둘러 손등으로 눈물을 닦고는 향을 치웠다.
“죄송합니다. 쇤네 울음소리에 깨셨습니까. 쇤네가 칠칠맞아. 아씨가 오셨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쇤네가 오늘 절에 갔다가 밤늦게 온지라 인사도 못드렸지 뭡니까.”
“......”
정향은 무언가 말을 하려다가 곧 완전히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녀는 스스로를 다잡듯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아니...네. 그저 오랜만에 돌아오니 잠이 오지 않아서. 어머...니도 저리 몸져누우셨고.”
“예. 마님이 그리 몸져누우셨으니 큰일이지요. 그래도 아씨께서 돌아오셨으니 곧 쾌차하실 것입니다. 어미에게 있어 자식이 건강히 옆에 있는 것만큼 큰 약이 없지요.”
진씨는 애써 웃음을 지었다. 그 모습에 정향의 가슴 한 곳이 아릿했다.
“어찌 그리 울고 있는가. 뉘에게 제를 지내고 있었던 것인가.”
“...제 여식의 제를 지내고 있었습니다.”
“!”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정향의 입에 침이 바싹바싹 말라왔다.
“아무도 챙겨주지 않으니 제가 챙겨줄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 못난 어미니, 제라도 챙겨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
“그 못난 것이... 하필이면 왜 아씨 혼인 전에 죽어.”
애써 태연히 말을 이어가던 진씨가 결국 치밀어 오르는 울음을 견디지 못하고 입을 막고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린 채로 흐느끼는 그녀의 모습에 정향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그녀는 몇 번이고 입을 달싹거리다가 결국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곧 담담히 고개를 들고는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 눈물 흘리지 마시게. 자네가 울면 그 아이도 필시 슬퍼할 게야.”
“그렇지요. 제 어미를 끔찍이 생각하던 착한 아이이니. 아씨께 염려를 끼쳐드렸군요. 송구합니다. 들어가시지요, 아씨. 쇤네가 모시겠습니다.”
“아닐세. 내 혼자 들어가도 되니. 그만 쉬시게나.”
“예.”
진씨의 대답을 들은 정향은 별당으로 돌아가기 위해 발을 돌렸다. 그때 진씨의 목소리가 그녀를 붙잡았다.
“아씨.”
“응?”
그녀의 부름에 정향이 뒤돌아보았다.
“참으로 고와지셨습니다. 행복하십니까?”
“...응.”
“그러십니까. 허면 되었습니다. 허면 우리 그 못난 딸아이도 필시 저승에서 기뻐하겠지요. 아씨를 정말 좋아했으니까요.”
진씨는 안심이 되었다는 듯 새하얗게 웃음을 머금었다. 그 웃는 모습이 정향의 가슴을 찔렀지만 그녀는 그것을 내색치 않았다. 곧 정향은 별당으로 돌아갔고,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진씨의 입가에 쓸쓸함이 깃들었다.

이틀간 평온한 나날이 지나갔다. 정향은 그동안 한씨부인의 병간호를 하며 조용히 시간을 보냈다. 한씨부인이 이틀간 내내 정신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그녀가 하는 것은 그저 곁을 지키는 것뿐이었다.
잠든 한씨부인의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던 정향은 그만 자신도 모르게 까무룩 잠이 들었다. 그러나 곧 자신의 손을 잡는 누군가의 손에 그녀는 눈을 번쩍 떴다. 그것은 한씨부인이었다. 그녀는 방금 깨었는지 희미한 미소를 품은 채 딸을 애틋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깨셨습니까. 의원을 부르겠습니다.”
“아니... 아니다. 네가 옆에 있어주면 된단다.”
한씨부인은 손을 놓으면 딸이 사라질까봐 두려운 사람처럼 그녀를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 행동에 정향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한씨부인은 곧 밖에 일러 곶감을 가져오게 했다. 그러고는 힘겹게 몸을 일으켜서는 힘없는 손을 억지로 들어 정향에게 곶감을 내밀었다.
“이것 좀 먹어보아라. 네가 좋아하는 곶감이지 않느냐.”
“어릴 적의 일입니다. 이제 어린아이도 아닌 것을요.”
“네가 그런 것을 따지느냐. 어릴 적부터 곶감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지 않았느냐.”
한씨부인은 어린아이를 향해 말하듯 다정하게 속삭이고는 다시 한 번 정향에게 곶감을 내밀었다.
“괜찮습니다. 전 정말 괜찮다니까요.”
정향이 사양했지만 한씨부인은 또다시 권하였다. 곶감의 냄새가 코를 찌르자 갑자기 기분이 나빠진 정향은 그만 그것을 내팽개쳐버렸다.
“!”
“아...저......”
정향은 자신도 모르게 한 행동에 놀라 굳은 채로 한씨부인을 바라보았다. 한씨부인 또한 너무 놀라 할 말을 잃은 채 그저 그녀를 응시했다. 그 순간 정향의 속에서 무언가가 역한 기운이 치솟아 올랐다.
“아가!”
그리고 그녀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일어서 밖으로 뛰쳐나갔다. 뒤에서 놀란 한씨부인이 그녀를 불렀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마당으로 내려온 그녀는 치밀어 오르는 토기를 견디지 못하고 구역질을 해댔다.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그녀의 귀에 들려왔다.
“아씨? 어찌 그러십니까. 의원을 부를까요?”
진씨였다. 정향은 주춤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니네. 그저 갑자기 속에서 토기가 치솟는 것이. 이상도 하지.”
“토기라 하셨습니까? 아씨. 달거리가 끝나신 것이 언제이십니까?”
“달거리? 그러고 보니... 설마......”
정향의 눈망울이 파르르 떨려왔다.

진씨는 곧바로 의원을 불러 정향의 상태를 살피게 했다. 그리고 곧 회임이 맞다는 진맥이 내려졌다. 두어해가 흘렀으나 계속 아이가 생기지 않아 염려하였던 정향은 이 뜻밖의 희소식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고향에 돌아온 후 내내 진심으로 웃어본 적이 없었던 그녀의 얼굴에 처음으로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회임소리를 함께 들은 진씨는 마치 제 친자식이 회임한 것처럼 기뻐했다.
“축하드립니다, 아씨. 이 같은 경사가 어디 있겠습니까. 마님께서 곧 손주를 보시겠군요.”
진씨의 목소리에 정향은 번뜩 정신이 든 것처럼 어찌할 바 모르는 얼굴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것을 본 진씨는 온화하게 미소 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쇤네는 신경 쓰지 마십시오. 어찌 이런 경사스러운 일에 쇤네를 신경 쓰십니까. 물론 제 딸아이가 살아 있었다면 분명 지금쯤 제게도 손주가 생겼겠지요. 허나, 생각해보아야 헛된 일입니다. 언제까지 옛일에 묶여 살수는 없겠지요. 분명 딸아이도 이 소식을 접하고는 기뻐할 겁니다.”
힘겹게 웃음을 지어보지만 그 얼굴에는 처연함이 서려 있었다. 그 표정에 정향의 가슴에서 무언가가 솟아 올랐다.
“어......”
‘안 돼! 말하면!’
감정과 이성이 마음속에서 충돌했다. 그녀는 입을 벌린 채로 차마 뒷말을 잇지 못했다. 잠시 후 그녀는 고개를 떨어뜨리고는 그래.하고 짤막하게 대답했다. 곧 진씨가 방을 나갔고 정향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것이 벌인가.’
곧 그녀의 입에서 웃음인지 울음인지 알 수 없는 것이 흘러나왔다.

잠시 후 정향은 다시 한씨부인의 처소로 향했다. 정향이 그리 나가고 난 후 내내 걱정이 되었던 한씨부인은 그녀가 들고 온 소식에 반색했다.
“회임이라고? 경사로구나. 이 어미가... 네 그 소식을 들으려 아팠나 보다.”
한씨부인은 참으로 기뻐하며 병색이 짙은 얼굴에 환한 미소를 안았다. 그녀는 곧 정향의 손을 꼭 잡았다. 정향은 자신도 모르게 그 손을 뺄 뻔 했지만 다행히 그리 하지는 않았다.
“어머니께서도 어서 쾌차하셔야지요.”
“그러게다. 어서 손주도 보고 그리 해야 하는데.”
그녀는 어린아이마냥 해맑게 웃었다.
“그래서 아까 곶감도 싫다 하였구나. 이 어미가 어리석게도 그것도 모르고 권하였으니. 이제부터 몸을 더 조심해야 한다. 홀몸이 아니니. 귀한 아이를 가지지 않았니. 사위가 참으로 기뻐하겠구나.”
“예. 그리하시겠지요.”
정향의 뇌리에 진정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토록 아이를 갈망하던 지아비니 이 소식을 들으면 필시 뛸 듯이 기뻐해 주리라. 또한 시어머니도. 그것을 떠올리기만 해도 행복한 기분이 온 몸에 퍼져 나갔다.  
‘어서 그 사람 곁으로 가고 싶어.’
진정을 만나 이 기꺼운 소식을 전하고 그의 품에서 쉬고 싶었다. 그의 향기를 맡고 그의 온기를 느끼며. 지금까지 그녀를 감쌌던 모든 불안이 한순간에 녹아 사라졌다. 오로지 행복만이 그녀의 내부를 가득 채웠다. 정향은 곧 한씨부인이 누울 수 있도록 자리를 제대로 펼쳤다.
“어머니도 어서 쉬세요. 건강을 찾으셔야지요.”
“그래. 그리해야지. 그래서 내 손주가 태어나는 것을 보아야지.”
한씨부인은 정향의 부축을 받은 채로 찬찬히 자리에 누우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갑자기 그녀의 몸이 흠칫 굳었다. 그러고는 낯빛이 파리하게 변하더니 온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이 떨렸다. 그 갑작스런 변화에 정향은 영문을 알 수 없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머니?”
“너는... 누구냐?”
“!”
너는 누구냐. 그 말이 정향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그녀를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정향은 굳은 채로 힘겹게 말을 건넸다.
“방금... 뭐라고......”
“너는... 너는... 자염이 아니지 않느냐!”
그 뼈밖에 없는 몸에서 어떤 힘이 났을까. 한씨부인의 입에서 새된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없는 힘을 긁어모아 정향의 손을 뿌리치고는 뒤로 물러섰다.
“왜 네가... 왜 네가 자염의 모습을 하고 있느냐. 이 요망한 것! 너는......!”
한씨부인의 눈의 동공이 크게 커졌다. 그녀가 곧 무언가를 외치려는 찰나 정향은 반사적으로 그녀의 입을 막았다. 한씨부인이 몸을 버둥거리며 그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병든 몸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결국 축 늘어졌다. 또다시 혼절한 그녀를 보며 정향은 숨을 헐떡거리며 몸을 떨었다. 머릿속이 마비된 것처럼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그때 문밖에서 안이 시끄러움을 알았는지 삼월이가 무슨 일이 있냐고 묻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것도 아니다! 어머니께서... 정신이 혼미하여 헛소리를 하셨구나. 이제 괜찮으시니 들지 말거라!”
그녀의 외침에 삼월이는 의구심을 가지지 않고 그러려니 하고 돌아갔다. 삼월이가 멀어져 이제 걷는 소리마저 들리지 않게 되자 정향은 찬찬히 한씨부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고는 천천히 두 손을 들었다. 그녀의 두 손이 한씨부인의 주글주글하고 가는 목을 서서히 조르기 시작했다. 마음속에서는 죽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과 죽여야 된다는 상반된 생각이 맞부딪쳐 싸워댔다. 온 몸에 식은땀이 흘러 어느새 그녀의 속곳은 땀으로 축축이 젖어버렸다. 곧 목을 조르는 손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마치 괴물이 된 것처럼 그녀의 마음속에서는 더 이상의 갈등조차 일어나지 않았다. 오로지 죽여야 한다는 생각만이 그녀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그녀의 두 눈동자에서 핏줄이 터져 눈이 붉게 물들어졌지만 그러한 감각조차 없었다. 곧 다시 의식을 되찾은 한씨부인의 입에서 고통어린 신음소리가 자그맣게 흘러나왔다. 그러나 정향은 그것을 못들은 척 거부하며 그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리고 곧 그녀의 숨을 완전히 끊어버리려는 찰나. 한씨부인이 두 눈을 초승달처럼 가늘게 떴다.
“이제는 내 어미마저 죽이려 하느냐.”
“!”
그 말이 정향의 머리를 후려쳤다. 또한 그 목소리도. 그 음성은 한씨 부인의 것이 아니었다. 정향이 잘 아는 한 젊은 여인의 것이지.
정향은 믿을 수 없는 것을 들은 사람처럼 몸을 사시나무 떨 듯 떨며 그 손을 놓았다. 그러고는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그래. 죽여 보려무나. 날 죽였듯 내 어미도 죽여 보려무나. 허나, 너 또한 모든 걸 잃게 될 게야. 내 것을 모두 빼앗아 가놓고는 너는 영원히 행복할 줄 알았더냐? 너를 갈기갈기 찢어줄 것이다. 네 뱃속의 태아를 갈기갈기 찢어줄 것이다. 내가 왜 너를 죽이지 않았는지 아느냐? 내 한이 많아 저승에도 가지 못하고 이승을 돌면서도 왜 너를 죽이지 않았는지 아느냐? 가장 행복한 때. 가장 처참하게 너를 죽여 놓아야 하니까. 그래. 마음껏 발버둥쳐 보거라. 발버둥쳐 봐! 그러나 넌 결국 내 손에 죽고 말 테니!”
꺄하하하! 여인의 찢어질 듯한 웃음소리가 정향의 귀를 찔렀다. 정향은 그 자리에서 일어서 그대로 황급히 도망쳤다. 그러나 아무리 멀리 도망가도 그 저주어린 웃음소리는 계속 그녀의 귓가를 맴돌며 사라지지 않았다.

한씨부인은 그대로 의식을 되찾지 못했다. 그 일 이후 별당에 처박혀 몸을 바들바들 떨며 아무도 만나지 않던 정향은 야심한 시각이 된 후에야 별당을 나섰다. 무언가를 각오한 그녀의 두 눈이 어둠속에서도 형형하게 빛났다.

그날 밤, 정향은 깊은 산을 혼자 올라갔다. 치맛자락이 가시덩쿨에 찢기고 몇 번이고 오르다 미끄러져 옷이 흙투성이가 되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는 거친 산속을 하염없이 올라갔다. 무언가를 찾기 위해서. 그렇게 한참을 산을 오르던 그녀가 도달한 곳은 어느 동굴이었다.
“여기 있지! 나와!”
동굴을 발견한 정향의 얼굴에 광기가 어린 희색이 퍼졌다. 그녀는 이내 안으로 들어가 미친 사람마냥 고래고래 소리를 내질렀다. 그러나 답은 없고 들려오는 것은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소리정도였다. 정향은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미친 듯이 누군가를 찾아 동굴 안을 헤매었다. 그때 정향의 귀에 신경을 긁는 듯 한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정향은 눈을 번득 뜨고 소리가 들린 방향을 쳐다보았다. 웃음소리가 맴돌던 곳에 곧 흐릿한 인영이 형태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온전한 형상을 갖추었는데 동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래. 왜 또 나를 찾았을까? 이번에는 무슨 소원을 들어 달라 청하려고?-
동자의 형상을 띄고 있었지만 그 눈동자만은 아이의 것이 아니었다. 그 눈빛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정향의 온 몸에 힘이 빠지고 소름이 돋아났다.
‘그래. 정작 두려운 것은 이게 아니지.’
그녀는 실소를 지으며 몸을 다잡았다. 그러고는 두려움을 억누른 채 성큼성큼 아이의 곁으로 다가갔다.
“죽은 자를 어찌해야 없앨 수 있는 지 그 방도를 알려다오. 귀신을 완전히 없앨 수 있는 방법을.”
“흐음? 왜? 네가 죽인 자가 네 자리를 내놓아라.라고 하기라도 하더냐?”
여유로운 얼굴을 하고는 입술을 이죽거리는 동자의 행동에 정향의 이성이 사라졌다. 그녀는 동자의 두 어깨를 꽉 쥔 채 광기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알고 있지 않느냐! 알고 있는 게 아니냐! 말해보아라. 방도가. 방도가 무언지. 알고 있을 것이 아니냐!”
“허면 너는 평생 아무런 대가도 치루지 않고 행복할 줄 알았더냐?”
“!”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냉랭한 어조뿐이었다. 곧 정향의 손에서 동자의 모습이 사라지더니 바로 뒤에서 다시 나타났다.
“누군가를 해할 때는 그만한 대가를 치루는 법. 허니, 그 대가를 치를 때가 온 것일지 언데, 그것이 이상한 것이 아니지 않느냐. 누군가를 죽여 그 인생을 오롯이 빼앗았으니 이제 그 원주인이 그것을 되찾으려 왔다면 당연한 일이지.”
뒤에서 들려오는 조소에 정향은 굳은 몸을 서서히 돌렸다. 그러고는 절박하게 소리쳤다.
“이대로! 이대로 죽을 수는 없어! 겨우 두어해였어! 겨우! 이제야 아이도 생겼는데 이대로 갈 수는 없다고! 이 자리는 내 자리야! 그 여자가 아니라 내가 서방님의 배필이라고!”
정향은 자신이 무어라 외치고 있는지 조차 인식할 수 없었다. 그저 초조함이 두려움이 머릿속에서 엉켜 그녀의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그래. 내가 더. 내가 훨씬 서방님을 사랑해왔어. 그 여자가 아니라 내가!’
-자수 같은 건 싫어. 답답해. 왜 어머니는 이런 걸 해서 도련님께 드리라고 하는 걸까.-
-자수가 싫으세요?-
-넌 좋겠구나. 손재주가 좋으니. 그래. 네가 한번 해보렴. 네가 만들어서 내게 줘.-
-네?-
자신보다 몇 달 아래인 제멋대로인 배다른 여동생 자염. 정실인 한씨의 무남독녀. 집안의 사랑을 독차지했고 그것도 모자라 정향의 모친인 진씨조차 그녀를 친딸인 자신보다 더 아꼈다. 정향은 그것이 몸소리치게 싫었다. 본시 한씨부인의 사가에서 몸종으로 함께 왔던 진씨는 주인나리의 눈에 들어 첩이 되었다. 그것을 못내 죄스럽게 여긴 나머지, 그녀는 친딸인 정향보다도 마님의 자식인 자염을 더욱 아꼈다. 그럴수록 정향의 가슴에는 날카로운 감정이 점점 키워졌다. 어째서 같은 아버지의 자식인데 자신은 자염에게 굽실거리며 노비처럼 살아가야 하는 것인지.
그러던 날 진정이 정향의 앞에 나타났다. 정향의 나이. 열다섯의 봄. 아파 움직이지 못하던 그녀를 신분에 아랑곳없이 다정하게 대해주고 살펴주던 남자. 그리하여 처음으로 마음에 품게 된 사내가 이복동생의 정혼자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녀의 마음에서 무언가가 깨져 버렸다.
‘그 여자는 모든 걸 가졌었잖아. 하나쯤, 하나쯤 내가 가지고 싶은 걸 갖겠다는 데 그게 그렇게 큰 잘못이었어? 대감마님의 사랑도, 어머니의 사랑도 모두 가졌으면서 내가 사랑하는 남자의 사랑마저 당연하게 가져버리는 그 여자가 싫었어! 싫었다구!’
정향이 놓은 자수 손수건을 자신이 한 것이라고 거짓말을 하며 그것을 진정에게 주던 자염의 모습이 정향의 뇌리에 떠올랐다. 그리고 그것을 숨어서 지켜보던 자신을. 진정을 생각하며 정성으로 수를 놓았는데 그 자수손수건은 자염의 것으로 둔갑해 진정의 손에 가버렸다. 그를 생각하며 수를 놓은 것은 바로 자신이었는데.
“그래... 그래서였어. 상관없었지. 그 여자의 자리를 빼앗을 수만 있다면 어떠한 짓을 해도 상관이 없었어. 더 이상 빼앗기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그리 했어. 내 어머니가 피눈물을 흘려도! 어떠한 업보를 짊어지게 된다고 해도! 내 자신의 존재가 사라진다고 해도!”
“......”
“그래도 후회하지는 않아.”
참혹하게 소리치던 정향의 몸이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부스러지듯 주저앉았다. 동자는 그런 그녀를 무심한 눈길로 쳐다보다가 곧 바로 가까이에 다가왔다. 그러고는 몸을 웅크려 정향의 눈을 마주보았다.
“인간들이란 연정이란 것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지. 그것이 어떤 때는 자신마저 불태워버린다는 것을 알면서도”
동자는 냉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허긴. 내 그런 너이기에 네 소원을 들어준 것이지만.”
동자는 천진난만한 소년처럼 함박웃음을 머금고는 다시금 일어서 한발 뒤로 물러섰다.
“기억하느냐? 혼인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너는 이 동굴을 찾아와 울었다. 그리고 네 이복동생을 저주했지. 그 광기가 나를 불러들였다. 그리고 나는 그 원을 들어주었지. 내 말대로 너는 네 동생을 산으로 꾀어내 절벽에서 밀어 죽여 버렸지. 그리고 내가 너희들의 외향을 바꿔주었다. 네가 바라는 대로.”
동자는 즐거운 일을 상기하듯 경쾌한 목소리로 하나하나 읊조렸다. 그때의 일은 정향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아무런 의심 없이 자신을 믿고 오밤중에 산으로 올라온 자염. 그리고 그녀를 절벽에서 밀어버리던 자신을. 이복동생을 절벽에서 밀어버렸을 때 그녀는 존속살해에 대한 두려움으로 떨었다. 그러나 곧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갖게 될 것이라는 사실에 환호했다. 어쩌면 그때부터 자신은 이미 미쳐버린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허나, 이번에는 그 원을 들어줄 수 없어. 본시 자신이 엮어놓은 매듭이니 자신이 푸는 것이 인지상정. 그것만은 아무리 나라도 어찌해줄 수가 없구나. 그것은 네가 감당해야 할 몫.”
“!”
동자는 씨익 웃음을 짓고는 순식간에 그녀의 앞에서 사라졌다.

해가 떠오를 때까지 정향은 동굴에 있었다. 그녀는 목이 쉬도록 동자를 부르짖으며 찾았지만 그는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동굴 밖에서 햇빛이 스며들어오는 것을 보며 정향은 허허롭게 웃었다. 동자가 자신을 완전히 버렸음을 깨달은 그녀는 힘없는 몸을 간신히 일으켰다. 밤새 추운 동굴에 있었던 터라 온 몸이 오들오들 떨려왔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동굴을 나선 그녀의 눈에 어느새 해가 온전히 떠올라 새하얀 하늘이 보였다. 그 하늘이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고 또한 슬퍼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그 길로 정향은 다시 고을로 내려갔다.

정향이 돌아오자 집은 한바탕 뒤집혀져 있었다. 오밤중에 사라진 정향이 아침까지 돌아오지 않은 터라 다들 전전긍긍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향이 흙이 묻어 엉망이 된 옷차림으로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는 텅 빈 눈을 하고 돌아오자 다들 놀라 어찌할 바를 몰랐다. 정향은 무슨 일이냐고 여쭈는 종들에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방에 들어가 그대로 잠을 청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시간은 정오가 지나 있었다. 그 날 정향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홀로 산 깊숙한 곳에 산다는 무당할매를 찾아갔다. 음험한 기운이 돌아 고을 사람들이 익히 피하며 잘 찾지 않는 이였지만, 정향에게 이 이상의 대상은 없었다. 그녀는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고 그저 원혼을 잠재울 수 있는 굿을 해달라 했다. 할매는 낄낄 웃으며, 독한 원혼일 수록 그 한을 풀어주는 것이 힘들다 하며, 많은 돈을 요구했다. 정향은 기꺼이 그 돈을 내밀며, 굿이 성공시 그 이상의 돈을 내줄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다음 날, 급하게 치러진 비밀 굿이 이루어졌다.
무당 할매를 감싼 붉은 옷자락이 살아있는 뱀처럼 펄럭거리며 날아올랐다가 다시 내려앉았다. 할매의 손에 잡힌 방울이 거친 소리를 내며 원혼을 불러들였다.
방울소리와 함께 할매의 입에서 터져 나온 굿소리가 정향의 신경을 어지럽혔다. 점점 격렬해지는 방울소리와 할매의 목소리를 들으며 정향은 속으로 몇 번이고 울부짖었다.
‘죽어버려라. 영원히 죽어 저승의 불길에 떨어져 버려라. 그래서 영영 내 앞에 나타나지 말거라. 죽어 내 저승에 가 그 불구덩이에 함께 떨어져 이 육신이 불타고 영혼마저 불타 완전히 혼의 한 조각조차 남아있지 않게 된다고 해도 좋으니!’
정향의 눈동자가 광기에 번뜩였다. 그녀 자신 역시 자신이 인간인지, 귀신인지 알 수가 없었다. 살아 육체를 지니고 있으나 혼이 미쳐버린 자신이 귀신인지, 아니면 죽어 원한에 잡혀 이 세상에 남아 있는 자염이 귀신인지.
‘아니, 우리 둘 다 귀신이겠지.’
그런 생각이 정향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속으로 자조적인 웃음을 터뜨리던 정향은 문득 할매의 춤이 멈춘 것을 알았다. 그와 동시에 할매의 꼬부라진 몸이 더욱 꼬부라졌다. 점점 아기처럼 꼬부라들던 몸은 그대로 털썩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정향은 생각을 멈추고 경직된 채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곧 할매의 몸에 자그마한 경련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경련은 점차 심해져 할매의 작고 늙은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곧이어 탈탈탈탈,하고 떨리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떨림이 멈추었다.
그와 동시에 할매가 천천히 몸을 들고 정향 쪽을 응시했다. 할매의 눈빛이 그때 한씨 부인의 눈처럼 초승달처럼 가늘게 올라갔다.
“정향아. 정향아. 네 거기 있구나.”
그 목소리는 젊은 여인의 것이었다.
“네가 가엾구나. 네가 처량하구나. 항상 두려움에 떨며, 항상 불안에 젖어 살다니. 죽은 나보다 네가 더 가엾지 않느냐. 그것이 사람이 사는 것이더냐? 내 죽어 원혼이 되었지만, 너는 살아 원혼이 되지 않았느냐!”
여인의 절규가 정향의 귓가를 때렸다. 정향이 무언가 말을 하려 입을 달싹하려는 찰나, 다시 할매의 입이 열리었다.
“기다리거라. 내 말한대로, 네가 가장 행복한 순간 널 가장 처참하게 죽여줄 것이니! 너는 가장 외롭게, 가장 비참하게 죽을 것이다. 꺄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여인의 미친 듯한 웃음소리가 정향의 온 몸을 파고들었다. 한참동안 이어지던 광소가 끝난 후, 할매가 입에서 피를 토했다. 붉은 핏물을 쿨럭쿨럭 토해내던 할매의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이내 힘을 잃고 쓰러졌다. 혼절한 할매를 둘러싸고 자염의 웃음소리가 아직까지도 맴도는 것만 같았다. 계속, 계속 그곳을 떠도는 것 같은 자염의 웃음소리에 정향은 귀를 막고 미친 듯이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쓰러진 할매를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은 채, 그녀는 돌에 걸려 치맛자락이 찢어지고 나뭇가지에 얼굴에 상흔도 생겼지만 그렇게 도망치고 또 도망쳤다.  

그날 바로 정향은 시댁으로 돌아왔다. 마님이 눈을 뜨실 때까지 있으라는 다른 이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대로 길을 나섰다. 돌아오는 길 내내 그녀는 혼을 놓아버린 사람마냥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처음보는 그녀의 낯선 모습에 시중들던 몸종들은 영문을 몰라 의아해했다.

그리고 또다시 이틀이 지나 정향은 시댁에 도착했다. 그녀가 돌아왔음을 안 진정은 일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정향에게 향했다. 정향은 도착한 뒤 몸이 좋지 않아 진맥을 받은 후 누워 쉬고 있었다.
“부인!”
정향이 회임을 한 데다 지금은 몸져누웠다는 소식에 진정은 그답지 않게 다급하게 방안으로 들어왔다. 그가 들어오자 정향이 힘없이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다소곳하게 그를 맞았다.
“서방님.”
“일어나지 마시오. 누워 계시오. 못 본 사이에 안색이 나빠지셨소. 장모님이 많이 안 좋으신게요? 하여, 그대의 마음이 편치 않아 이리 아픈게요?”
“아닙니다. 그저 오랜만에 먼 길을 다녀온 터라 좀 곤하여 그럽니다.”
정향이 미소 지으며 대답하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진정이 그대로 그녀를 보드랍게 끌어안았다. 그의 갑작스런 행동에 당황하던 정향은 곧 그의 품속에 조용히 자신을 묻었다.
“무리하지 마시오. 그대가 아프면 나 또한 아프니. 이제 홀몸도 아니지 않소.”
“예. 그리하겠습니다.”
“어머니께서도 기뻐하신다오. 손주가 생긴다고 말이오. 이러한 복을 누리게 되었으니 다 그대 덕분이오.”
진정은 고개를 들고 수줍은 소년처럼 얼굴에 홍조를 띠우고는 천진하게 웃었다. 그 모습을 보던 정향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고인 것을 알아차린 진정이 당혹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어찌 그러시오. 또 아픈게요? 여봐라! 밖에 있느냐! 어서 의원을......!”
“아닙니다. 서방님을 뵈오니 너무나 기뻐서. 참으로 서방님이 그리웠습니다.”
정향은 눈가에 맺힌 눈물을 소맷자락으로 닦아내고는 함소를 지었다. 그런 아내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던 진정은 그녀를 다시 품에 안고 부드럽게 속삭였다.
“나도 그렇다오. 그대가 없는 내내 이 별당이 얼마나 휑뎅그레하던지. 어서 오시오, 부인.”
“다녀왔습니다, 서방님.”
정향 또한 온화한 미소로 그의 속삭임에 화답했다.

털썩. 돈꾸러미가 무당의 앞에 던져졌다. 정향은 서늘한 눈을 하고는 고요히 무당을 내려보았다. 무당은 히죽 웃으며 돈주머니를 품에 넣었다.
“그래. 무엇을 원하십니까, 마님.”
“방법을 일러다오. 죽을 혼을 떨쳐내는 방도를 말이다.”
“원혼을 떨쳐내는 방도 말씀입니까. 그거야, 그 한을 풀어주면 되겠지요.”
“내가 지금 그것을 몰라 이리 왔더냐.”
정향을 날카롭게 째진 목소리로 소리를 내질렀다. 분노로 일렁이는 정향의 눈을 보며 무당은 입꼬리를 올리고는 그녀의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진정이 나가고 시어머니인 노씨부인도 아이가 생긴 것을 부처님의 공덕이라 여겨 절에 가고 난 후 정향은 사람을 시켜 닭을 잡아 그 피를 별당 마루에 뿌리게 했다. 그러고는 가시가 잔뜩 달린 엄나무가지를 구해오게 시켰다. 돌아온 노씨부인이 이 사실을 알고는 정향을 불러 꾸지람을 내렸다.
“내 듣자하니 아가 네가 해괴한 일을 했다고.”
“어머님.”
“별당에 닭피를 뿌리다니! 그게 무슨!”
“만약을 위해서입니다.”
“만약이라니?”
“어렵게 들어선 아이가 아닙니까. 혹여라도 악귀가 이 아이를 해치고자 하면 어찌합니까.”
“괜한 걱정이로구나.”
“두어해만에야 들어선 아이입니다. 저 역시 제가 과하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오나 어머님. 저는 혹시라도 이 아이가 잘못될 까봐 두렵습니다. 부디 허해주십시오.”
정향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애처롭게 애원했다. 며느리의 애원에 노씨부인은 결국 더 이상 화내지 못하고 승낙했다.

그날 밤 별당에 든 진정은 정향을 다독였다.
“너무 예민한게 아니오. 어찌 악귀가 우리 아이를 해하겠소. 부인.”
“제 친정어머니께서도 정정하시던 분께서 겨우 두어해만에 그리 몸이 상하셨습니다. 혹여 이것이 제게 원한을 가진 악귀의 짓이 아닌가 싶어 두렵고도 불안합니다. 서방님. 힘들게 얻은 아이가 아닙니까. 혹여라도 이 아이에게 변이 생긴다면 저는 살 수가 없습니다.”
정향은 서글프게 속삭였다. 그 말에 진정은 착잡한 표정을 하고는 말없이 아내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러고는 부드럽게 달래었다.
“부인이 그리해야 마음이 편해진다면 내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겠소. 허나, 그런 일은 없을 것이오. 내 약조하리다. 설령 무슨 일이 있다 해도 부인과 아이는 반드시 내가 지킬 것이니.”
“예, 서방님.”
정향은 그리 대답하고는 그의 품에 몸을 기대었다. 그러나 그의 품에 안긴 그녀의 눈만은 부드러운 대답과 달리 서늘한 빛깔을 띠고 있었다.

밤바람 사이로 여인의 서글픈 울음소리가 섞여 들어왔다. 진정과 함께 잠들어 있던 정향은 그 울음소리에 번득 눈을 떴다. 온 몸을 파고드는 냉기와 구슬픈 울음소리가 ‘그녀’가 다가왔음을 알려주었다. 정향은 입술을 악물고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절대로 진정을 이 일에 말려들게 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곧 한 손에는 은장도를 한 손에는 엄나무가지를 움켜쥐고 마당으로 나갔다.

다들 잠든 시각이라 사람의 기척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바람사이에 섞여 들어오던 울음소리는 어느새 기이한 웃음소리로 변해 있었다. 정향은 정신을 다잡고 어서 원령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그때 차가운 바람이 그녀의 몸을 감싸고 지나갔다. 그와 동시에 정향이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나를 기다리고 있었느냐. 장하구나. 네 죽으러 스스로 나왔으니.-
그 바람 속에는 여인의 목소리가 섞여 있었다. 곧 정향의 눈앞에 여귀의 모습이 드러났다. 새하얀 소복을 입고 검은 폭포수같은 머리를 늘어뜨린 원귀의 두 눈은 증오로 인해 번득이고 있었다. 정향은 입이 바싹바싹 말라왔다. 그녀는 엄나무가지를 원귀를 향해 들이댔다.
“당장 꺼져라! 죽은 자가 산자를 해하려 하느냐! 당장 저 세상으로 돌아가!”
-엄나무가지더냐. 그래. 죽은 자를 저승으로 돌려보낼 수 있다 하지. 허나, 어찌한다? 나는 그 정도로는 돌아갈 수가 없는데. 내 혼이 갈가리 찢겨지고 가루가 되어 영원히 환생치 못하여 구천을 떠돈다 하여도! 내 이 자리에서 돌아갈 듯 싶으냐! 내 삶을 빼앗아가버린 네 년을 내가 용서할 듯 싶으냐!-
원귀의 얼굴이 일그러지듯이 곧바로 정향의 바로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원귀의 손이 정향의 새하얀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정향은 몇 번이나 그 손을 떨쳐내고자 애쓰며 엄나무가지로 원귀의 몸을 때려댔다. 엄나무가지에 맞은 원귀의 몸이 옅어졌지만 그 원한이 깊은 까닭인지 사라지지는 않았다.
-아파하거라! 괴로워하거라! 내가 죽었을 때의 고통을! 내 모든 걸 빼앗겨버린 그 괴로움을! 네 년 또한 알아야 할 것이 아니냐!-
여귀의 절규에 사방에 퍼져 나갔다. 그녀는 웃음도, 울음도 아닌 것을 토해내었다. 정향은 힘을 내어 단도로 여귀의 얼굴을 몇 번이고 찔렀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다. 점점 숨이 조여왔고 곧 그녀의 손에서 단도도 엄나무가지도 떨어져 내렸다.

이대로 죽는 것인가. 정향의 의식이 점점 희미해졌다. 오로지 진정의 웃는 얼굴만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그때 그녀의 귀에 진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인!”
자다 일어나 정향이 보이지 않고 밖이 소란스러움을 알게 된 진정이 만약을 위해 검을 들고 뛰어나온 것이었다. 그는 눈앞의 상황에 믿을 수 없어 잠시 혼란스러워하다가 그대로 원귀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곧 원귀의 모습이 사라지더니 정향의 몸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간신히 살아난 정향이 힘겹게 숨을 토해내었다.
“부인. 괜찮은게요? 부인!”
진정은 다급히 정향의 안위를 살폈다. 그녀가 살아있자 진정은 아내를 꽉 끌어안고는 다시금 검을 고쳐 쥐었다. 그때 그들의 앞에 또다시 원귀가 나타났다. 그녀는 입을 이죽거리더니 처절하게 소리쳤다.
-좋겠구나. 원래 내 자리를 빼앗아갔으니. 행복하느냐? 지금 그 자리가 네 자리인줄 아느냐? 허나 어찌한다? 네가 그토록 연모하는 네 서방님은 네가 아닌 날 연모하는 것인데. 네 얼굴이 아닌 내 얼굴을. 바로 나를! 너를 나인줄 알고 연모하는 것이니 네가 참으로 가엾고도 처량맞지 않느냐!-
깔깔깔깔! 원귀의 목소리가 귀를 찌르듯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에 진정의 눈이 혼란에 가득 찼다.
“무슨 말이냐. 어찌 죽은 귀가 산 사람을 해하고자 하느냐! 내 아내를 해하려거든 나부터 죽여야 할 것이야!”
-아내? 아내라. 네 눈에는 그것이 아직도 너의 아내, 자염으로 보이느냐. 네 아내라는 그것은 말이다. 살인자다. 제 욕심을 채우려 제 이복자매를 죽인 살인자란 말이다!-
“그만해!”
원귀의 외침에 정향이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과음을 내질렀다. 그녀의 몸이 공포로 인해 바들바들 떨려왔다. 그러나 그것은 죽음이 다가와서도, 원귀가 앞에 있어서도 아니었다. 모든 사실이 진정에게 들킬지도 모른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두려움에 떠는 정향과 그런 그녀를 싸늘하게 노려보는 원귀의 모습에 진정의 눈망울이 흔들렸다.
“무슨...소리냐.”
-그것은 천하디 천한 살인자란 소리다. 첩의 자식으로 태어나 제 이복자매인 나를 죽이고 그 인생을 빼앗아 자염인 척 하는 정향이 년이란 소리다!-
“하지 마!”
“......뭐?”
진정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정향은 결코 그의 앞에서만큼은 들키고 싶지 않았던 진실이 폭로되자 절박한 눈으로 남편을 돌아보았다.
“아... 아니에요. 아니에요, 서방님. 저는......!”
“자염이...아니야? 하지만......”
-그것은 나를 죽이고 내 외향을 훔쳐갔지. 믿을 수 없겠지만 그것이 현실이다. 저년은 내 탈을 뒤집어쓰고 지금껏 거짓행세를 해왔던 것이지.-
“그런... 그럴 리가... 거짓이다. 거짓이야! 그런 말도 안 되는!”
-허면 네 아내에게 물어보거라. 그것이 거짓이라면 어째서 그렇게 두려워하는지. 어째서 그렇게 죄지은 사람마냥 네 눈치를 보고 있는지. 거짓이 아니라면 두려워할 이유도 없지 않느냐.-
진정은 천천히 정향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고 곧 캄캄한 절망만이 가득한 정향의 눈에서 그는 모든 진실을 읽었다. 저 원귀가 말하는 것이 사실이라는 끔찍한 진실을. 그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나를... 속인 것이오?”
“아니에요. 아니에요. 저는... 저는 서방님의 곁에 있고 싶어서. 쭉. 쭉. 그 누구보다도 서방님을 연모해왔어요! 냇가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줄곧 서방님만을 사모해왔어요. 그래서... 그래서... 서방님 곁에 있고 싶어서!”
“하... 하하하하!”
믿고 있던 현실이 부서져내리는 소리에 진정의 입에서 허무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한참동안 그리 웃음을 토해내던 그는 미친 사람처럼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 속에 자리잡은 깊은 절망에 정향의 가슴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정향은 떨리는 손을 들어 다시 한 번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그러나 진정은 반사적으로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단 한 번도 자신을 내친 적이 없는 그의 손이 자신을 내친 현실에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원귀를 마주하고 한 번도 흐른 적 없는 눈물이 하염없이 그녀의 새하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오가고 곧 원귀가 정향의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원귀는 다시 한 번 정향의 목을 졸랐다. 이미 진정에게 거부당한 정향은 더 이상 사는 것을 포기하고 그 손에 자신을 맡겼다. 그때 그 광경을 본 진정이 비틀거리며 일어서서 검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 검을 원귀를 향해 휘둘렀다. 그러나 그 순간 강한 소용돌이 바람이 불면서 검이 날아갔다. 그리고 바람이 사라졌을 때 그 검은 진정의 가슴에 꽂혀 있었다.
“!”
원귀는 그 모습을 냉정하게 바라보고는 정향을 잡은 손을 떨어뜨렸다. 새하얀 옷 위에 붉은 핏자국이 서서히 번져가는 것을 보며 정향은 엉금엉금 기어 그의 곁에 다가갔다. 그녀는 이 현실을 믿을 수 없어 그의 얼굴을 끌어안고는 몇 번이고 진정을 불렀다.
“서방님? 거짓이지요? 장난치지 마시어요. 서방님! 서방님!”
그때 진정이 희미하게 눈을 뜨고는 힘겹게 손을 뻗어 아내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대가...미웠소. 나를 속인 그대가. 사람을 죽인 그대가.”
“말하지 마시어요. 서방님. 제가 다 잘못했으니. 그러니 제발... 제발 죽지 마세요!”
“하지만... 그대의 모든 게 거짓이었다 해도... 나와 함께 살았던 나의 아내는 그대였소.”
쿨럭. 진정의 입에서 핏물이 솟아올랐다. 그럼에도 그는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 곧 자신의 마지막이 올 것을 알았기에.
“내가 연모했던... 누구보다 연모했던 이는 그대였으니까. 그러니까... 나는...그대를......”
말은 마지막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곧 그의 눈이 감겼고 숨이 끊어졌다. 정향의 두 손이 떨리고 두 눈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그녀는 이것을 믿을 수 없어 그를 끌어안았다.
그러나 그녀가 아무리 지아비를 불러도, 소리를 쳐도 그의 눈은 떠지지 않았다. 자신의 품에서 차갑게 식어가는 그의 온기에 정향의 입에서 처절한 절망이 터져 나왔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한참이 흐른 후 정향은 진정의 시신을 내려놓고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원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허허롭게 웃었다.
“이제야 족하느냐? 말해보거라. 이제야 족하느냐? 이제야 족하냐 말이다!”
원귀는 아무런 답도 없었다. 그저 말없이 그녀를 응시할 뿐. 허허롭게 웃음을 터뜨리던 정향은 곧 진정의 몸에서 검을 뽑아들었다. 그러고는 그것을 응시했다.
“용서하세요. 당신의 아이를 낳지 못해서. 하오나 서방님. 신첩은 말입니다. 서방님이 없는 세상에서 더 이상 살아갈 수가 없답니다. 이리도 못난 신첩을 서방님은 마지막까지 사랑하고 보듬어 주셨으니까요. 곧 서방님 곁으로 가겠습니다.”
정향은 담담히 검을 들어 올려 그대로 자신의 가슴을 찔렀다. 힘을 잃은 몸이 털썩 옆으로 쓰러졌다. 정향은 마지막 고통 속에서 죽은 진정을 바라보았다. 잠들듯 죽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녀 역시 죽어갔다.

동자는 한 시신옆에 앉아 있었다. 그것은 한 여인의 시신이었다. 여우에게 간이 먹힌 시신은 산속에 처참하게 버려져 있었다. 그것은 열여섯살의, 정향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던 여인의 것이었다.
“참으로 재미있지, 인간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행복한 꿈을 꾸고 싶어하다니.”
동자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곧 동자의 몸이 여우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꼬리가 아홉 개 달린 구미호였다. 구미호가 사라지고 난 뒤 여인의 입에서 작은 나비 하나가 나왔다. 그리고 그 나비는 하늘로 조용히 날아올랐다.

다음날 자염과 진정의 혼례가 이루어졌다. 그 경사스러운 날 정향은 보이지 않았고 다들 어찌 된 것인지 의아해하긴 했지만 워낙 혼례가 바빴던 지라 그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진정이 신부를 향해 절을 올리려던 찰나 어디선가 날아온 작은 나비 하나가 그의 어깨에 앉았다. 진정은 그 나비의 존재에 잠시 멈칫했다. 곧 나비는 다시 하늘로 날아올랐다. 잠시 그 나비를 넋 놓고 바라보던 진정은 다시 정신을 차리고는 천천히 신부에게 절을 올렸다.

내가 나비인가
나비가 나인가

하늘에서는 비익조가 되기를 원하고
땅에서는 연리지가 되기를 원하네.

댓글 0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1914 단편 영원의 빛 (1)1 inkdrinker 2006.05.18 0
1913 단편 고백 MadHatter 2016.03.19 0
1912 단편 기억 초연 2013.03.15 0
1911 단편 잿빛 우물 은비 2013.01.12 0
1910 단편 세 번째 기적 너구리맛우동 2011.12.29 0
1909 단편 1 adama 2004.09.05 0
1908 단편 별빛 우산1 쿠키 2006.11.14 0
1907 단편 홀로 앉은 남자.1 joana 2004.09.15 0
1906 단편 하루 34000명의 아이가 죽는 것보다 더 끔찍한 세계6 짜증나 2008.11.10 0
1905 단편 하얀 나그네 블루베리 2006.11.23 0
1904 단편 나의 사랑스러웠던 인형 네므2 아진 2003.12.08 0
1903 단편 [뱀파이어] 카나리아1 김지원 2006.03.27 0
1902 단편 옛 하늘4 amusa 2005.05.25 0
1901 단편 불면1 금원정 2013.07.15 0
1900 단편 죽은 달의 여신4 안단테 2009.10.31 0
1899 단편 [외계인]이빨에 끼인 돌개바람(본문 삭제)5 Inkholic 2007.04.20 0
1898 단편 협회에서 온 남자4 마그마 2010.11.18 0
1897 단편 어린왕자와 여우 은비 2013.01.12 0
1896 단편 얼음마녀 이야기6 slowdin 2010.11.10 0
1895 단편 이니스프리의 호수 섬을 찾아서3 해파리 2008.01.19 0
Prev 1 ...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 110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