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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세인트 프롤레타리아

2011.08.21 21:5508.21

아마 천국이 존재한다면
그 곳의 바닥은 너무나 하얘서 눈을 뜨지 못 할 것이다.
그 곳은 끝없고 한없고 이어짐 없이 파란 하늘과 하얀 땅만이 존재할 것이다.
영원히.

마치 지금처럼.

세미욘은 콕핏 아래로 끝없이 펼쳐진 구름의 평원을 보면서 잠시 감상에 빠져들었다. 자외선 편광 글라스가 어둡게 그의 헬멧의 시야를 가렸지만 구름에 반사된 태양빛은 안경의 효용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시간이 멈춘 듯, 세미욘은 지금 자신이 어디쯤 어느 곳에 와 있는 지 조차 알 수 없었다. 운동성을 느낄 수 없었다. 조용히 웅웅대는 계기판과 기체의 소리만이 그와 승무원들이 지상 15km 위 성층권의 구름 위에 머물고 있다는 것만을 알려주고 있었다. 기실 움직임은 극히 적었다. 그들은 기류를 타고 있었고, 눈을 부시게 만든 햇살의 도움으로 깃털처럼 구름 위를 머무는 중이었다. 저 멀리 땅 아래에 눈이 좋은 사내가 구름을 뚫고 세미욘을 쳐다본다면, 아마 이렇게 생각했으리라. 천사라고.

“물건은?”

세미욘은 옆자리의 친구에게 물었다. 두꺼운 안경은 고글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작은 체구의 파트너는 누구보다 예리하게 정황을 분석하는 시각을 갖고 있었다.

“출항기록과 정확히 일치, 앞으로 3분 내에 5킬로 안으로 접근예상.”

“무장 확인?”

“아직. 아, 목표 접근. 포착했음.”

빠르다. 생각 외로 전속운항 중이다. 이 구름 아래 날씨는 비가 내리거나 잔뜩 찌푸린 고르지 못한 일기일 터, 베테랑이라 할지라도 큰 덩치의 수송기를 함부로 굴릴 이유는 없었다. 하나를 제외하면.

“눈치 챈 모양이군. 그 쪽 레이다가 더 좋아.”

세미욘은 입맛을 다셨다. 점점 좋아질 것이다. 이 쪽은 점점 안 좋아지겠지.

“페르난도?”

“준비 되었습니다. 대장님.”

세미욘은 고개를 끄덕거렸지만 아마 두터운 헬멧 덕에 보이지 않았으리라. 조용히 세미욘은 왼손 검지를 들었다가 아래로 향했고, 우측의 친구는 익숙하게 조종간을 잡고 천장을 가득 메운 계기판의 이름도 알 수 없는 수십 개의 버튼을 재빠르게 피아노를 치듯 가볍게 누르기 시작했다.

순간, 기체에 울림이 시작되었다. 천천히 양쪽에서 진동이 오기 시작하더니 부르르 떨리는 움직임이 세미욘의 온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웅웅 거리는 소리가 순식간에 기체를 가득 메웠고 방음이 되어 있는 이어폰을 넘어왔다. 조금씩 몸이 뒤로 쏠리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서서히 아래쪽으로 시야가 기울어지는 것을 느꼈다. 하강이 시작되는 중이었다. 하얀 대리석처럼 보이던 흰 구름이 조금씩 울퉁불퉁하게 시야게 들어왔다. 웅웅거리는 떨림과 속도는 더욱 강해지고 있었다. 마치 벼랑 위에서 쉬고 있던 독수리가 평원의 사냥감을 목격한 듯, 그들을 태우고 있는 기체는 자신의 힘을 뿜어내고 싶어 안달하는 것 같았다. 세미욘은 늘 이럴 때마다 겁이 나곤 했다. 추락이 겁나는 것이 아니라 제어를 하지 못할 것 같은 속도감 때문이었다. 눈 깜짝할 새에 세미욘은 구름 위를 거품을 훑어버리듯 날고 있었다. 세미욘은 조용히 동료들의 통신망을 열었다.

“공격개시”

순식간에 구름들판이 휙 하니 콧픽의 위로 올라가버렸다. 세미욘과 동료들의 스피커에 조용히 음악 하나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옛날부터 전해지던 고전가요였다. 전설에 다르면 팔이 부러진 음유시인이 병사들의 앞에서 죽을 때까지 불렀다던 유서 깊은 노래였다.
Venceremos, venceremos (승리하리라, 승리하리라)
mil cadenas habra que romper. (수많은 사슬은 끊어지고)
Venceremos, venceremos, (승리하리라, 승리하리라)
la miseria sabremos vencer. (우리는 비극을 이겨내리라)

순식간에 어두운 발트해의 상공이 눈앞에 확 들어왔고 동시에 흰색으로 칠한 거대한 수송기가 바로 아랫 상공을 비행하는 중이었다. 어마어마한 크기였다. 여객기 세 대는 합쳐놓은 듯한 슈퍼 에어로크래프트였다. 세미욘은 노랫소리에 파묻히지 않게 큰 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늘 단 한마디뿐 이었다.

“사격!”
콰콰콰쾅하는 소리와 함께 선체가 흔들리기 시작했고 세미욘은 하늘에서 말을 타고 달리는듯한 기분이 들었다. 무지막지한 불꽃들이 날개의 양편에서 미친 듯이 화물기를 향해 쏟아졌고 순식간에 번쩍이는 불꽃과 연기가 하얀 거조(巨鳥)를 휘감았다. 사수 페르난도는 절대로 목표물을 벗어난 적도 없었고, 한 번도 목표물이 땅에 착륙하게 놔 둔 적도 없었다. 기관포탄은 순식간에 천장을 뚫고 기체의 후미부터 주조종석까지 최소한 석 줄의 총상을 일렬로 만들었다. 10초가 되기 전의 일이었다. 더 이상 세미욘은 화물기를 보지 않았다. 추락이 틀림없었다.

“드론 셋. F-55 둘! 꼬리를 밟혔다!”

그 때 친구의 목소리가 귀가 찢어질 정도로 날카롭게 울렸고 세미욘 역시 레이더에 잡힌 다섯대의 작은 발광체를 확인했다. 미끼였나? 녹색의 화면이 적색으로 붉게 빛나기 시작했고 세미욘은 즉시 전 대원에게 알렸다.

“전속이탈!”

파도를 만난 조각배처럼 순식간에 좌석이 쑥 하니 허공으로 치솟는 기분이 들면서 엉덩이의 무게를 느낄 수 없었다. 동시에 어깨와 등은 좌석에 못 박힌 듯 활처럼 휘면서 몸이 뒤로 들러붙었다. 기체는 짐승 같은 소리를 내며 포효하는 중이었다. 눈이 빠져나올 듯 아프기 시작하고 손과 발이 찌릿 울리고 갈비뼈가 우적우적 소리를 내며 허파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미사일 세대, 아니 넷, 다섯기 확인”

“전속 상승! 채프!”

천둥 치는 진동 속에서도 레이다는 그들의 비행기와 적기들과 적기가 뿜어낸 가느다란 물건들을 말끔하니 투사하는 중이었다. 아마 저들은 인공위성의 궤도수정을 받고 있으리라.  위성을 차폐시켜서 흔적을 없애는 건 간단한 문제였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정지위상에서 지구의 자전에 가깝게 운행하며 방해전파를 사용해야 했다. 한마디로 안전지대에 피신한 뒤의 이야기였다. 가슴이 욱씬욱씬 쑤시며 머리 속의 피가 다 빠져나가는 느낌이 계속되었고 그들의 비행기는 여전히 야수 같은 소리를 내며 미친 듯 천공을 질주하고 있었다.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세미욘은 알고 있었다. 고통스러우면 고통스러울수록, 죽음으로부터 멀어진다는 것을. 그리고 그들의 비행기를 따라온 미사일이나 기체 따위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을.    

미사일들은 오랫동안 알아 온 구혼자들인 양 끈질기게 그들의 뒤를 따라붙었다. 아마도 새로 만들어진 신제품인 듯싶었다. 무지막지할 정도의 추력을 자랑하는 공대공 미사일이었지만 작은 구혼자들은 연료와 속도, 고도에서 거대한 신부에 비할 바가 되지 못하였다. 곧 하나 둘 레이다는 그들의 모습을 지워가기 시작했고 몇 분 뒤, 레이다는 적색에서 파란 색으로 돌아왔다. 세미욘의 부사수는 조용히 다시 허공에 손을 얹고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고 기체는 이제서야 쉴 수 있겠다는 듯 조용히 용트림을 하며 긴박했던 허공의 질주를 늦추기 시작했다. 조금씩 잦아드는 으르렁 소리가 세미욘의 귀에는 헐떡이는 숨소리로 들려왔다.

“기체는 이상 없나?”

“연료의 1/3이 소모되었습니다. 갈수록 미사일들의 추적거리가 길어집니다.”

“더 길어질 거다.”

헤드셋에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침묵. 언젠가, 언젠가는 다가오게 되어 있는 법. 세미욘은 천천히 창밖의 풍경을 내다 보았다. 풍압과 습기의 충돌이 미세한 흠집을 낸 강화유리 아래로 아까와 같은 백색평원이 펼쳐지고 있었다. 정면에 떠 있는 태양은 여전히 바라볼 수 없는 존재였다. 그제서야 가슴의 뻐근한 격통이 느껴졌다. 커다란 바위 밑에 깔렸다가 빠져 나온 기분이었다.

“거점으로 돌아가자.”

피곤함이 갑자기 온 몸을 엄습해왔다. 용마처럼 날뛰던 세미욘의 비행기도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하고 고요한 정적 속에 천천히 구름 위를 비행하고 있었다. 새하얀 평원 위를 새하얀 날개를 지닌 유려한 곡선의 새가 날고 있었다. 만곡을 이루며 뒤로 젖혀진 거대한 날개와 갸름한 몸통 사이 날갯죽지에 검은 색으로 쓰인 애칭(愛稱)과 날개 달린 뱀의 표식만이 새가 아닌 비행기, 그것도 전투폭격기라는 것을 나타낼 뿐이었다.

‘St. Proletariat’  

-2-

“빅토리아 호수를 가운데 놓고 치열하게 벌이던 오스프리 서비스와 인디아라마 서비스의 포격전은 이제 소강상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2-3주의 대규모 포격전이 예상되는 가운데 제3차 공습을 앞두고 렉스콤 에어 서비스는…”

“카이난 서비스와 렉스콤의 대규모 공중전이 양 사 50%의 손실율을 보인 것으로 기록되어 화제입니다. 지금까지의 기록을 갱신한 전투기록으로 양 사는 3주 전 호주 다윈시와 카카두 공원에서 대규모 공격을 감행하였으며…”

“호르무즈 해협에서 인디아라마와 유로글라스트의 대규모 함포전이 얼렸습니다. 중형함대의 순수 포격전으로 발생한 이번 격전을…”

채널을 아무리 돌려도 세 개 채널 외에는 먹통이었다. 세계의 채널들이 하나로 통일되는 이 시점에도 티벳의 산자락에서 잡히는 전파는 고르지 못했다. 세미욘은 담배에 다시 불을 붙였다. 벌써 새 개피 째였다. 보급되어 온 담배는 이제 네 통 밖에 남지 않았지만 입에 뚫려있는 한 그는 계속 담배를 피워댈 것 같았다. 전황은 아무리 봐도 그대로였다. 바뀐 이야기라고는 하나도 없었고, 여전히 5대기업들은 예정된 전쟁서비스를 수행하고 있었다. 히말라야의 산골짜기에서 잡히는 채널들로 파악하기로는 그러했다. 이번 발트해에서 격추한 대형화물기는 분명 호르무즈 아니면 빅토리아호수로 가는 수송물자일 텐데 여전히 그들의 보급에는 차질이 생기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기업들은 건재했다.

“추락하지 않은 걸까?”

프란츠가 도수 높은 안경 너머로 코를 찡긋거렸다. 세미욘은 고개를 저었다. 40미리 철갑탄을 삼열종대로 맞고 떠 있을 수 있는 항공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전황에 필요가 없는 물건만 잔뜩 들어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숨기고 있거나. 프란츠는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천장을 보더니 다시 친구 기장을 돌아보았다.

“이봐 세미욘 박, 다시 미사일을 장착하는 게 낫지 않을까.”

“음?”

“일격이탈(一擊離脫), 좋긴 하지만 너무 위험부담이 커. 우리 아가씨가 어떤 사내놈들보다 발이 빠르다는 건 알지! 하지만 상대방도 충분히 알고 있단 말이야. 이번에 봤지? 그 미사일이 어디까지 쫓아왔는지?”

세미욘도 알고 있었다. 점점 적들의 미사일은 순항거리가 길어지고 있었다. 언젠가는 우주로켓만한 연료통을 매달고 지구 끝까지 쫓아올 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세인트 프롤레타리아는 미사일을 쏠 수 없었다.

“우리가 구할 수 있는 미사일이 얼마나 되겠어.”

“아흐메드는?”

“아흐메드는 육상서비스 담당이야. 그리고 섣불리 아가씨를 개조할 수도 없어. 지대공 레이저 반사코팅은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단 말이야.”

“잭이 있잖아. 유카탄에.”

“출항 때 급보가 날아왔어. 유카탄은 말소됐다. 거점 4도 이젠 없는 거야.”

프란츠의 활달했던 얼굴이 순식간에 황당하다는 듯 변했다. 대화가 끊겼고 두 사람의 입에서 하얀 입김만이 올라올 뿐이었다. 세미욘은 깊숙하게 담배연기를 허파 속으로 들이밀었다. 이제 남아있는 아지트는 전세계에 다섯 군데뿐이다. 언제 없어진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늘 스파이는, 프락치는 존재해왔다. 노동자가 있고 사용자가 있는 한, 그 둘의 관계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미끼가 있으면 물리는 존재는 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잡힌다는 건 곤란했다. 어쩌면, 세미욘의 일생에 걸쳐 마지막 기회일지도. 아니, 노동투쟁역사에 있어서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는 호기가 눈 앞에 와 있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세미욘은 일어서서 창 밖으로 점검을 받고 있는 그의 비행기를 바라보았다. 거대한 날개와 거대한 네 개의 엔진을 단 하얀 비행기는 마치 사냥을 마치고 잠이 들어버린 맹금류처럼 보였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기체, 유일한 희망. 그리고 언제 사냥 당할 지 모르는 마지막 사냥꾼.

그 때였다. 허름한 막사 문을 열고 티벳 거점의 책임자 첸참이 그들을 바라보았다. 붉은 얼굴에 번쩍이는 검은 눈동자가 두 명의 기장을 황급하게 둘러보고 고개를 까닥 숙였다. 전례없이 굳은 표정이었다. 세미욘은 순간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무슨 일이오 위원장?”

“초소 레이다에 대수 미상의 차량들이 잡혔소.”

프란츠가 튕기듯 의자에서 일어났다. 세미욘 역시 벗어놓은 항공점퍼를 재빨리 낚아챘다. 첸참의 굳은 얼굴에서 또박또박 말이 얼어붙은 듯 떨어지는 중이었다.

“지상에서 병력이 올라오는 중인 것 같소. 항공지원도 오겠지. 어서 이륙하시오.”

“어찌된 거요?”

“착륙을 누군가가 밀고한 모양이오. 기장! 이륙하시오!”

작별인사 같은 애틋함 따위는 잊은 지 오래였다. 두 사내는 미친 듯이 격납고로 뛰기 시작했다. 이미 나머지 네 명의 승무원이 기체 아래에서 멍하니 그들의 달리기경주를 보고 있다 동시에 기체로 올라타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냐! 이틀이 지나기 전에 거점 두 군데가 털리다니! 세미욘의 가슴이 두방망이질 치며 머릿속이 헝클어지기 시작했다. 이미 두 사내가 조정석에 앉아 벨트를 메기도 전에 하얀 새는 다시 굉음을 내기 시작했다. 여섯 명의 파일럿은 이미 십 년이 넘게 손발을 맞춰온 사이다. 비행기의 심장과 두뇌와 신경이 된 지 오래였다. 다른 비행기들이 예열을 받기도 전에 이미 그들은 칼바람이 불어오는 활주로를 움직이는 중이었다. 세미욘은 창 밖을 내다 보았다. 다른 이들도 부산히 움직이며 기지를 떠나고 있었다. 몇 명 만이 남아서 무기를 정비하고 바리케이트를 치고 있었다. 떡 벌어진 어깨의 첸참이 유독 눈에 띄었다. 위대한 투사를 하나 또 잃는구나. 그제서야 세미욘은 그의 오른손이 떠나가는 비행기를 향해 번쩍 들려있는 것을 목격했다. 세인트 프롤레타리아호는 작별인사 대신 굉음을 울리며 대지를 박찼다. 둥지를 잃은 거조는 다시 창공의 보금자리로 떠 오른 것이다.

“이제 어디로 가나.”

프란츠의 물음에 세미욘은 고개를 숙였다.

“루트 원으로. 돌아가세. 본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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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원경을 가지고 있어요. 세미욘?”

부드러운 알토의 목소리가 고원의 희박한 대기를 젖히고 남자의 귓속으로 파고 들었다. 세미욘은 대답대신 자신의 목에 걸려있는 망원경을 가지고 천천히 유니스의 옆으로 다가갔다. 칠흑 같은 머릿결을 자랑하는 그녀는 여전히 동아시아 반도국의 민족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강인해 보이지만 부드럽기 그지없는 턱선과 가냘픈 목선. 그에 비해 강인한 턱과 등근육을 자랑하는 슬라브족의 피가 더 많이 들어가 있는 세미욘은 park이라는 성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그렇지만 한국어를 기억하고 있는 쪽은 세미욘이었다. 해고노동자였던 그들의 가족은 유라시아 전체를 유랑하던 [서비스 부적격자]의 집안이었다. 그에 비해 관리직 가문이었던 유니스 황은 영어와 독일어. 중국어. 스와힐리, 아랍어에 능통했지만 정작 한국말은 한 글자도 알아보지 못했다. 세미욘은 그녀의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을 천천히 망원경으로 내려다보았다.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이 길다란 막대기를 들고 특유의 가벼운 발걸음으로 평원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소년들과 소녀들이 자신보다 훨씬 긴 그림자를 이끌고 들짐승처럼 노란 평원을 뛰어다니는 중이었다.

“밖에 있는 아이들을 본 적이 있어요? 세미욘?”

세미욘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이들은 모두 교육서비스를 마치고 집에 들어가기 전 4시간 동안을 지정된 산업체에서 [주니어서비스]를 실행하도록 되어 있다. 길거리를 움직이는 이들은 산업서비스 운송팀과 근로자, 전쟁서비스 종사자. 그리고 관리자들뿐이었다. 유니스는 망원경에서 눈을 떼고 넘어가는 태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만년설이 뒤덮여 있는 본부와는 달리, 제1초소는 태양빛이 따듯하다는 것을 느낄 정도는 되었다. 구(舊) 아르메니아-터키의 끝을 이루는 산맥. 아라랏 산맥에 마지막 노동조합, 국제노조본부가 남아있다는 것을 아는 이들은 극히 드물었다. 그러니 험준한 암벽과 그늘 사이로 촘촘히 얽힌 관측초소와 비밀통로가 있다는 것은 더더욱 범인이 알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다.

“모두 서비스에 바쁘니까 하늘을 볼 시간이 없겠지.”

“예전 아이들도 이랬을까요.”

감상적인 유니스의 모습이 낯설었다. 유니스 황은 국제노조 산하의 대의원 중에서도 가장 공격적인 [매 중의 매]였다. ‘5대 기업의 절멸’을 목표로 조직원들을 다그치고, 개별 분조에서는 가장 과격한 [노동전사]들을 이끌며 사보타지를 주도하는 4총국의 국장이기도 했다. 그녀의 부친은 공공연한[노조후원자]중 하나였고, 결국 온 가족이 [전쟁서비스]로 이직된 사례였다. 5대기업에 대한 증오가 남다른 그녀의 입에서 이런 소리가 나온다는 것은 그만큼 유니스도 지쳤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편서풍을 타고 소문 없이 지구를 한 바퀴가량 돌고 나서야 루트 원에 도착한 세미욘 일행이 들은 것은 티벳 거점의 소실과 우에우에테낭고(Huehuetenango)의 함락뉴스였다. 오스프리와 렉스컴이 각각의 거점을 가져갔다. 이제 남은 노동조합 거점은 본부를 포함해서 세 군데로 줄어들어 있었다.

“불안한 건가.”

“끝이 보이질 않잖아요. 아니, 우리의 끝이 보인 달까요.”

“어차피 모든 것이 열세였어.”

“점점 열세로 몰리죠.”

“노동자들은 늘 열세였어.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최고의 노동전사답지 않은 패배주의에 찌든 소리네요. 당신과 당신의 성 프롤레타리아는 여전히 5기업 최고의 암덩어리예요. 눈엣가시고 없어지지 않는 근심이죠.”

“등에일지도 모르지. 아테네의 등에.”

“5기업은 당신이 몇 대 비행기를 떨어뜨렸다고 노동자들의 자유를 어느 날 허락할 만큼 도덕적이지 않아요. 그리고 그게 비효율적이라는 걸 너무 잘 알만큼 똑똑하죠.”

유니스의 말은 사태를 분석하는 것도 아니고,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자조(自嘲)에 가까웠다. 우에우에테낭고는 그녀가 특별히 애착을 가지고 있던 조직세포들이 있던 곳이었다. 습하고 불편한 지리적 환경에도 불구하고 남미지역 최초로 잃어버린 [노동자]라는 이름을 되찾고 렉스콤의 산하에서 노동조합을 만들 수 있는 기질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이라 했었다. 더 이상 서비스유닛이라고 불리지 않고 개별 노동자라고 불릴 수 있는 노동정관을 다시 만들 수 있는 곳이라고.

모두가 낙담하고 있었다.
아라랏 본부노조의 모든 간부와 구성원들 역시 유니스와 진배없었다. 이번 세인트 프롤레타리아 호의 공습으로 빅토리아 호수나 호르무즈의 전황이 한쪽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었다. 오스프리, 혹은 유로글라스트의 물자가 날아가면 전황은 인디아라마 서비스가 유리하게 되어 있었다. 동시에 인디아라마는 그들에게 노조 활동의 기본적 요구사항을 수용하겠다는 말까지 나오는 중이었다. 일단 가장 중요한 원거리 수송조합에 대한 노조설립을 그들은 조건으로 내세웠다. 그리고 그 세부 사항과 인력은 유카탄과 우에우에테낭고에 보관하고 있었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애들이 부럽네요. 세미욘 조합장.”

“저 아이들은 측량을 하는 중이야. [서비스]중이라고.”

흠칫 놀란 유니스가 다시 망원경을 꺼내 골짜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세미욘은 천천히 뒤돌아서 동굴쪽으로 들어갔다. 유니스의 목소리를 더 이상 듣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3-

[세대가 바뀌고 시대가 바뀌어도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부리는 자가 있고 부림 당하는 자가 있다. 힘세고 힘 약한 자가 있었던 세상의 여명기부터 당연시 되었던 태도였다. 적은 수의 사람들은 권세와 돈과 힘으로 다수 위에 있었고, 힘 없는 다수가 그들에게 대응하기 위한 수단은 그들의 숫자 외에는 없었다. 그 장구한 투쟁의 역사가 인류 문명을 이끌어왔고 발전시켜왔다고 사가(史家)들은 적어왔다.]

이해가 될 듯 말 듯 한 글을 읽으면서 세미욘은 사가(史家)라는 말을 주목해서 보고 있었다. 역사학자. 지나간 과거를 캐내는 인간들이라는 뜻이라고 했다. 피드백서비스와 비슷한 종류였지만 그들은 생산성과 관계없는 모든 인간의 분야를 탐구했던 자들이라고 했다. 엄두가 안 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었군. 세미욘은 더 이상 독서를 할 기분이 아니었다. 기분전환을 위해 서가에 꽂혀있던 책을 보려 한 것이었는데, 더 머리가 복잡해지기만 할 뿐이었다.

“무슨 책을 읽고 있었나?”

걸걸하면서도 힘이 있는, 하지만 나이를 속일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동운동의 정당성 개요]로군요.”

세미욘은 천천히 책을 다시 서가에 넣어두었다.

“좋은 책이지. 그 책을 마지막으로 에밀리오는 체포되었던 걸로 기억하네. 유일무이하고도 훌륭한 저작이지. 뛰어난 노동자였고 지식인이었어.”

노인은 꽂힌 책을 손가락으로 천천히 쓰다듬었다. 안경 너머의 눈은 과거를 뛰도는 희미한 하늘색이었다. 세미욘은 입맛을 다시고 천천히 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총위원장님, 이번 일은 어떻게 된 겁니까.”

“정보는 정확했어. 자네가 격추한 화물기는 빅토리아 호수를 향하던 것이었네. 오스프리의 것이었고 그 쪽은 지대한 타격을 입었지.”

인디아라마의 승리인가. 확신할 수 없었다. 실제로 인디아라마가 빅토리아 호수의 네오 케냐나 호르무즈 근처의 아랍연맹 독립을 승인할지도 몰랐다. 그렇게 되면 신생국가와 국민들이 생겨나고 노동자계급이 당연히 출현하게 된다. 그리고 21세기 이후 유일하게 생겨나는 독립국가가 될 것이었다. 단, 그 당시에는 인종갈등이 원인이었지만 지금은 전혀 다르다. 5대 기업의 윤허 아래 생겨 난 독립국가.

“어차피 무대 위의 꼭두각시일 뿐이고, 언젠가 나라의 독립성은 사라지겠죠.”

“매사 비관적이군, 세미욘 박. 독립국가를 인디아라마 서비스가 세운다고 해도 50년 내로 다시 그들의 자본에 귀속되겠지. 오스프리나 렉스컴, 카이난이 먹을지도 모르고. 하지만 그 동안 역량을 키울 수가 있어. 세포조직을 활성화 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노동자가 되도록 다시 교육할 수 있는 거야.”

총위원장은 나이에 어울리는 진지함과 느릿함을 담아 세미욘에게 말했지만 세미욘은 눈살을 찌푸릴 뿐이었다. 유니스 황만큼은 아니더라도 머릿속을 불안감이 잠식해 들어감을 막을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철통 같은 벙커 안에 있는 수뇌부의 근거 없는 낙관주의는 그러한 불안감을 증가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었다.

“내일 인디아라마와 회담이 잡혀 있네.”

총위원장의 말에 세미욘의 눈이 커졌다. 너무나도 급작스런 일이었다. 72시간만에 전황이 그렇게 바뀌었던 말인가? 노인은 세미욘의 심정을 읽었다는 듯 푸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위험합니다.”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네. 협약을 만들지 않으면 어떻게 노동자 규약을 만들고 직업선택의 자유를 얻겠나?”

세미욘은 담배를 빨아들였다. 총위원장의 말도 맞긴 하지만 과연 지금이 그 때일까? 유니스의 표정도 그렇고, 모든 면에서 수세로 아직 몰리고 있는 시점인데. 세미욘은 담배연기를 하늘로 뿜어 올리면서 총위원장의 주름진 얼굴을 바라보았다. 노회환 노동운동가이자 군사령관은 젊은 지휘관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 국가는 사상누각이라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지역 자체가 국가설립의 기반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를 이용해 먹는 걸지도 몰라요.”

모두가 알고 있지만 말하지 않는 사실을 세미욘은 말하고 있었다. 어차피 호르무즈와 빅토리아호수. 그리고 호주 북부지방은 개발불가지역이었다. 이 지역은 수 세기 동안 세계경제를 지탱해 온 [전쟁경제]를 지속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전쟁지역이었고, 기계로 대체 가능한 서비스직종 종사자들의 후손들이 [전쟁서비스]로 직종이전을 한 뒤에 군수물자와 병력으로 투입되는 지역이었다. 한 마디로 세계경제의 재활용지역이고 인구조절지역이었다. 이런 곳에 국가를 세운다는 인디아라마의 공약이야말로 감언이설에 다름 아니었다. 내친김에 세미욘은 맘에 담아 둔 말을 꺼냈다.

“대가리를 부수기 전까지 뱀은 죽지 않습니다.”

“유니스와 같은 말을 하는군.”

총위원장은 천천히 서재를 가로질러 격납고와 무기고가 붙어있는 공장이 내려다보이는 창문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백색의 기체 역시 그곳에 보관되어 있었다. 위원장은 천천히 세인트 프롤레타리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대가리를 부순다……자네 비행기의 마크가 뭔지는 알고 있나.”

“케찰코아틀. 남미의 신이죠.”

“힘없는 신이었지.”

“힘이 다한 거겠죠.”
세미욘의 날카로운 대꾸에 총위원장은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했다는 듯 잠시 머뭇거리더니 손가락을 들어 비행기를 가리켰다.

“자넨 저 비행기의 정체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나.”

“제 몸보다 훤히 꿰뚫고 있습니다.”

자신의 의도와 다른 대답이 나오자 위원장은 고개를 흔들면서 입을 다셨다.

“저 아이는 냉전의 산물이야. 국가가 존재하던 시절, 체제가 기업대신 우위에 서서 이념에 의해 인간의 운명을 바꾸었다는 그 신화시대의 유물이야. 들어는 보았나?”

“예.”

“기괴한 시대였지. 기업의 생산성 조절이 없었던 시대야. 저 아이의 몸통은 연료를 한번 보급 받으면 대륙을 넘어 폭격을 할 수 있었던 폭격기의 전신이야. 그리고 저 아이의 엔진은 성층권에서 미사일이 닿기도 전에 도망칠 수 있었던 정찰기의 부품이고. 그 이야기들을 알고 있겠지?”

검은 새와 곰의 자식. 세인트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이야기는 무기상 아흐메드를 통해 들었던 내용이었다. 세미욘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업들은 그런 시절을 두려워해. 생산성이나 경제활동의 수치활동이 아닌 계량 불가능한 이념이나 민족에 의해 세상에 돌아가는 것이 불합리하다고 여겨. 세인트 프롤레타리아나 핵폭탄 같은 말도 안 되는 병기를 만들지 않는 것이 그 때문이야. 세인트 프롤레타리아를 요격할 수 있는 미사일은 현재 5대기업 어디서나 제작 가능해. 하지만 수지타산이 맞지 않기 때문에 생산하지 않는 것이지.”

세미욘은 고개를 끄덕였고 담배연기가 입에서 힘없이 뿜어져 나왔다. 그들이 맘만 먹으면 세인트 프롤레타리아는 말 그대로 날개 꺾인 새가 되어 불덩이가 되어 추락할 것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기업들은 전쟁수행에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재래식 무기만을 생산하고 사정에 맞게 분배하고 있었다. 정확하게 인구를 줄이고 재화를 소비할 정도만 생산해냈다. 그 이상은 낭비였다. 그 결과, 세인트 프롤레타리아 같은 비대칭무기를 갖게 된 것은 국제노조뿐이었다. 아주 잠시 동안의 우위겠지만.

“이건 게임이야. 우리는 그들에게 사람이 계량 가능한 요소가 아니라는 걸 계속 심어줘야 해. 국가가 만들어지고 노조가 만들어진다고 해도 그들의 입지가 바뀌지는 않겠지만”

“피로강도를 높여간단 말이군요.”

위원장은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내곤 집게손가락을 들어 세미욘을 가리켰다. 늙은 얼굴에 아주 살짝 미소가 번져갔다.

“때가 된 걸세. 수고했어. 세미욘동지.”

세미욘은 길게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위원장의 칭찬에 부끄러워 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유니스와의 대화가 맘에 더 걸렸기 때문이었다. 5대기업은 절대로 비행기 몇 대 떨어진 것을 가지고 굴복하진 않으리라. 세미욘도 같은 생각이었다.

-4-

산 아래로 일단의 사람들이 이동하는 것을 세미욘은 묵묵히 초소에서 보고 있었다. 인디아라마와의 회담은 정상회담과 같은 것이 될 것이었다. 어차피 인디아라마의 공중파까지 들어오는 것이니 그 안에서 무슨 일을 내지는 못하리라는 것이 국제노조측의 계산이었고, 그걸 피하기 위해서 위성으로 노조본부에서 회담을 하는 것은 더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언제 기업들이 기지를 칠 지 모르는 일이므로.

세미욘은 자청해서 기지 방어를 맡았고, 그는 자신의 비행기와 함께 눈 덮인 터키의 산 아래 남아있게 된 것이다. 하릴없는 기다림이 계속되는 가운데 그의 망중한을 같이해 줄 것이라고는 TV밖에 없었다. 전파를 도청해서 나오는 희뿌연 영상은 그런대로 참으면서 봐 줄 만 한 것이었지만 여전히 방송되는 내용들은 동일한 것들이었다. 빅토리아 호수쪽의 이야기는 눈을 뜨고 아무리 찾아봐도 없었다. 단지 5대기업 총연맹 회의가 브뤼셀의 대경제연합빌딩에서 유례없는 대규모로 열릴 거라는 광고만 20분째 모든 채널에서 하염없이 나오는 중이었다. 세미욘은 인상을 벅벅 쓰고 있었고, 프란츠를 비롯한 승무원들은 일찌감치 TV앞을 떠나 놀러 가 버린 뒤였다.

“ 왜 그렇게 인상을 쓰고 계시나? 세미욘 국장?”

깝짝 놀라 뒤를 돌아 본 세미욘의 눈에 멋진 구레나룻과 더 멋진 선글라스를 낀 훤칠한 아랍계 사내 한 명이 들어왔다. 예상외의 손님이었다. 군수물자를 조달해주는 조력자. 아흐메드가 들른 것이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두 사내는 굳게 포옹한 뒤에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오히려 걱정스런 얼굴은 아흐메드 쪽이었다.

“거점이 세 개나 날아갔다면서?”

“기업들의 정보망이야 원래 대단한 것이니까. 어디서 움직이는 지 정도는 다 알지 않나.”

“우에우에테낭고와 티벳이 날아가다니. 둘 다 방위력은 철통 같은 곳 아닌가.”

세미욘은 입맛을 다시고 주변의 사내들을 둘러보았다. 격납고 주변에는 그의 ‘하얀 새’와 탑승동료들 외에는 자리에 없었다. 아흐메드도 같은 것을 의심하는 것이다. 첩자. 기업의 염탐군이 노조에 들어와 있다. 누구인지 모르지만 본부위치를 설명해 줄 수 있는 정도의 위치에 있는 사람임에 분명했다. 아흐메드는 손을 들어서 더 이상의 말은 하지 않겠다는 표시를 보냈다. 가무잡잡한 사내는 천천히 하얀 비행기를 둘러보며 감탄사를 발했다.

“늘 볼 때 마다 느끼지만 저 놈은 정말 대단해. 당분간 저 놈을 허공에서 잡아 내릴 인간은 없을 거야.”

“어제 위원장이 이야기를 하더군. 세인트 프롤레타리아의 탄생에 대해서.”

아흐메드는 오른손으로 허공에 곡선을 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위대한 정찰기 블랙버드와 가공할 폭격기 베어. 미국과 러시아 같은 강대국이 경제불황을 못 이기고 기업에 정치 경제권을 모두 인도한 뒤, 엄청난 물건들이 한 번 세계 각국으로 퍼져 나간 적이 있었지. 핵탄두부터 폐기된 우주왕복선까지 팔렸다고 해. 그 와중에 저 놈들이 서로 여기까지 굴러온 거라지. 프랫 앤 휘트니 엔진 네 대와 개조된 베어 폭격기. 저 놈들은 화석연료의 포식자들이야. 거짓말 안 보태고, 저런 전력이 다섯 대만 더 있었어도 국제노조는 버티질 못했을 거야. 유지비 때문에.”
  
“세인트 프롤레타리아는 유일무이한 기체야.”

“유일무이하고, 무식하지.”

세미욘 역시 동감했다. 무인항공기들의 시대에 수송기와 수송함을 공중강습해서 때려잡는 전략을 쓰는 비행기라니. 무식한 것은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만큼 원시적인 효과를 냈다. 이번 회담의 결과에 따라 아마 그들은 인디아라마의 수송을 담당하던가 그들이 만들어낸 빅토리아호 국가의 치안을 담당하게 될 지도 몰랐다. 그러면 그 동안 대기업의 목을 졸랐던 ‘하얀 새’의 정체가 백일하에 까발려 질 지도 몰랐다.

“어때, 국가의 탄생에 기여하게 된 소감이?”

“노조의 탄생이지. 국가의 탄생이라는 건 결국 인디아라마의 잔꾀일 뿐이지.”

“노조도 마찬가지야. 그냥 요식행위일 뿐이라는 생각 안 드나.”

아흐메드는 노조와 관련이 없는 사내였다. 그는 묘하게도 각국의 군사서비스에 관련된 소소한 육상전 물품들을 취급하는 군사서비스를 제공하면서 뒤로는 노조에도 돈을 받고 물건을 제공하고 있었다. 어떻게 숫자를 파악해서 맞춰놓는 지 신기할 뿐이었지만 그보다 궁금한 건 그가 왜 노조를 돕고 있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하지만 세미욘도 인정하는 것은, 아흐메드는 국제노조보다 훨씬 현실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노조라는 거 금방 없어질 거라고 생각하는구먼. 아흐메드.”

“사람들이 원하지 않으니까?”

“뭐?”

세미욘의 쌍심지에 아흐메드는 넉살 좋게 슬쩍 웃으며 두 손을 펴고 악의가 없다는 제스처를 해 보였다.

“사람들은 행복해 해, 열량이 공개된 하루 섭취권장 영양가의 동일한 빵을 제공 받고, 일하고 유지돼. 아프면 교체되고 다 나으면 일할 수 있지. 집마다 1인 1자녀가 구현되고 주거의 위험도 범죄의 위험도 없어. 이런 시대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나?”

“새장 속에 갇힌 새들일 뿐이야.”
묘하게도, 어저께 나눈 위원장과의 대화가 처지가 역전된 형세였다. 세미욘은 자신도 믿지 않는 노조활동의 정당성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듣고 있는 아흐메드는 웃으면서 반박했다.

“세미욘, 이런 삶을 갖기 위해서 노동자들이 투쟁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나. 어차피 상위 1%를 위해서 모든 것은 흘러가. 부모가 전쟁서비스 종사자면 자식도 당연히 전쟁서비스종사자가 되는 거야. 시스템 관리자는 시스템 관리자를 낳는 거지. 그리고 경영자는 경영자를 낳는 거야. 그게 세상의 이치야. 망치와 낫으로 세상을 바꾸던 시대는 지나갔어. 그건 백 년, 천 년 전의 전설일 뿐이야. 말 한마디에 사람들이 우르르 모여들었다고? 그런 신화를 믿는 건가?”  

비록 웃으면서 말하지만 아흐메드의 말은 신랄하기 그지없었다. 완전고용. 완전 통제되는 시스템. 완벽한 산아제한정책. 그리고 정교하게 날줄과 씨줄로 짜인 계급구조. 인류가 생겨난 이래 한번도 구현된 적 없다는 완벽한 구조.

“다섯 살이 되면 집단 탁아소에 가서 서비스교육을 받고, 열 두 살이 되면 아버지의 일을 맡아서 할 대리 교육을 받고 그리고 서른 세 살에 선별된 배우자와 결혼하고 한명의 애를 낳고. 예순 다섯 살에 약을 먹고 죽는 거? 이건 사람의 삶이 아니라고 생각해.”

“사람의 삶이라.”  

“같은 해에 태어난 관리자들은 자신들이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평생을 살고 약을 먹고 죽지도 않아.”

“관리자니까.”

“그게 잘못 된 거야.”

전 세계 5천5백만 명. 그들 역시 엄격한 산아제한을 갖는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영속적인 권리를 누릴 최대한의 인구에 맞춰진 숫자일 뿐이다. 비행기로나 넘어갈 높은 담장 뒤로, 드넓은 초원과 평원 아래 드문드문 펼쳐져 있는 화려하고 거대하기 그지없는 주택들. 세미욘은 우랄 산맥과 알프스, 로키산맥 너머와 메콩강 유역의 그 화려한 집단 거주지역 위로 수십 차례 비행을 거듭해왔다. 모든 것이 콘크리트로 뒤덮인 새장 같은 아파트거주구역과는 천지차이였다. 하지만 이것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은……

“그게 잘못 되었다는 사람들은 국제노조밖에 없네. 모든 사람들은 만족하고 있지 않은가. 노동운동이라는 건 종교일지도 몰라. 허상이라고.”

아흐메드의 말은 가시보다 날카롭게 세미욘의 폐부를 찔렀다. 그랬다. 그렇게 믿는 사람들은 이제 점점 줄어든다. 새로운 동지들을 찾는 일은 기업에 대항해 총질을 하는 일보다 힘들었다. 부족한 것이 없으니까. 그리고 더 이상 바랄 것도 없으니까.

고개를 숙이고 있는 세미욘을 보자 아흐메드는 겸연쩍은 표정이 되었다. 그러더니 슬쩍 다가와서 뭔가를 안 주머니에서 꺼내 세미욘에게 건네주었다. 뜯지도 않은 새 담배였다. 세미욘이 고개를 들자 아흐메드는 슬쩍 웃고는 뒤로 돌아서서 나갈 차비를 했다.

“기죽지 마, 세미욘 국장. 선적은 다 끝났네. 자네의 흰 새는 다시 날아갈 수 있을 거야. 특별한 놈에게 특별한 서비스지.”

“뭐 하나 물어보세 아흐메드.”

“뭘?”

“자넨 우리는 왜 도와주지?”

아흐메드는 하얀 이를 드러내고는 웃었다.

“마흔 네 살에 우리 아버지께서는 쌍둥이를 낳으셨지. 그 다음 일은 알아서 상상하라고.”

-5-

유니스는 이틀이 지난 뒤 홀로 기지에 복귀했다.

거진 이십여 명에 달하는 지부장과 조직원과 훈련원들이 같이 나갔지만 정작 돌아온 것은 그녀 하나뿐이었다. 산 아래 그녀의 자동차가 도착했다는 소식과 달랑 한 명뿐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세미욘은 즉시 나머지 기지병력을 무장시킨 채 노조본부의 정문에 대기하는 중이었다. 시간과는 관계없이 한없이 긴장이 흐른 뒤에야 유니스의 모습이 천천히 그들의 시야에 들어왔다. 예상과는 반대로, 그녀의 의복은 정갈하기 그지없었고, 얼굴 역시 깨끗했다. 심각하게 굳어있는 표정을 제외하고는.

“무슨 일입니까?”

세미욘은 좌중의 여러 사람을 의식해서 공적인 어조로 여국장에게 근황을 물었다. 하지만 그녀는 뻣뻣하게 선 채로 말을 주저하고 있었다.

“나머지 분들은 어떻게 된 건지 설명 해 주십시오.”

그녀는 여전히 석상 같은 얼굴로 세미욘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고산지대의 거세고 매서운 바람이 터널 속으로 들이닥쳐 그녀의 흑발을 이리저리 흩날리고 있었다.

“어찌된 거야! 유니스!”

“저 외에는 모두 돌아오지 않습니다.”

순간 가녀린 여인의 목소리가 마이크라도 댄 듯 고요한 옹벽과 벙커의 벽에 부딪힌 뒤 거인의 목소리처럼 웅웅거리며 메아리쳤다. 바람소리조차 숨을 죽였다. 숨 하나 쉬는 사람이 없었다. 세미욘은 눈이 동그랗게 된 채 그녀를 쳐다봤으나 그 역시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돌처럼 굳었던 유니스의 얼굴에 조금씩 화색이 돌기 시작했고 그녀의 입은 다시 벌어지기 시작했다.

“총위원장 휘하 20명은 인디아라마에 체포되었습니다. 그리고 몇 시간 뒤, 이곳 기지로 인디아라마의 정규군이 몰려올 것입니다. 칼리만탄 지부와 마운틴 매킨리지부도 같은 시각에 렉스컴과 카이난의 군대가 들이닥칠 것입니다.”

순식간에 기지가 웅성대기 시작하고 고함과 욕설이 난무했다. 세미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투항이라니? 이런 호기를 맞이해 놓고 투항이라니? 마지막으로 본 총위원장의 얼굴에서는 그런 낌새라곤 전혀 찾을 수 없었다. 무슨 이야기인가. 그는 유니스의 얼굴을 조용히 쳐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소녀처럼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누가 배신한 건가.”

차가운 세미욘의 목소리가 힘있게 기지를 울렸다. 순간 유니스의 눈이 급작스럽게 깜박이면서 세미욘을 쳐다보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세미욘의 뒤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내는 거칠게 권총을 풀어 격철을 젖히고 유니스의 머리에 가져갔다.

“유니스 황 동지! 누가 배신했느냐고 묻지 않는가!”

“제가 그랬습니다!”

순간 웅성거림이 거짓말처럼 멎었다.
그리고 조금 뒤 사방에서 총기의 안전장치를 해제하고 그들이 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일단의 구성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모두들 아무런 말이 없었지만 눈빛은 불쏘시개로 뒤진 듯 하얗게 타오르고 있었다. 유니스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어! 희망 없는 싸움을 언제까지 할 거야! 수많은 동지들이 미래 없는 투쟁 속에 죽었어. 우리는 성공할 수 없어! 노동자의 시대는 오지 않는다고! 아무도 우리를 지지하지 않는다고!”

세미욘의 시선은 유니스의 눈물 어린 얼굴에 못 박힌 듯 고정되어 있었다.

“그래서 거점들을 밀고했던가?”

“렉스컴은 투항하면 전쟁서비스가 아닌 군수서비스로 넣어준다고 약조를 받았어. 우에우에테낭고의 동지들도 그 약속을 받고 위치를 알려준 거야. 인디아라마도 모두를 사무직서비스로 개편해서 넣어준다고 말했어. 전쟁서비스가 아닌 곳에서 남은 생을 보낼 수 있게 해 주겠다고 했어. 카이난도 마찬가지야.”

“우리가 일신의 처지를 해결하려고 투쟁했던가.”

“우린 아무것도 바꿀 수 없어. 비행기 하나 떨어뜨리는 걸로 뭐가 바뀐단 말이야? 산업시설 하나 부순다고 뭐가 바뀔 것 같아? 세상은 이미 다수의 것이 아니야! 관리하는 자들의 것이라고! 부술 수 있다고 믿은 내가 바보였고 우리가 바보였어!”

“그래서 우에우에테낭고도 날렸나? 당신의 분신 같던 거점도?”

“전염병이 돌았다고! 약을 쓸 수가 없었단 말이야! 아무것도 못하고 사람들이 죽어갔다고! 당신이 그걸 봤어야 한단 말이야! 차라리 투항하는 게 낫다고!”
세미욘의 질책은 순간 정지되고 유니스의 목소리는 점점 갈라지고 있었다.

“언제부터 그렇게 생각했나?”

“처음부터 그랬어! 나도 이겨내고 싶었지만……”

유니스는 결국 울음이 터져나오면서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녀의 앞에 서 있던 병사 하나가 그녀의 머리통에 총구를 들이댄 순간, 다른 조합원 하나가 그 총구를 눌러 내렸다. 사내의 표정은 어둡기 그지없었다. 순간 저 멀리서 한명의 남자가 꺼이꺼이 울음을 터뜨렸다. 분위기는 순식간에 역전되었다. 그녀에게 탄환을 난사하러 모여든 모든 이들이 총구를 내리고 하늘을 보거나, 눈물을 흘리거나 망연히 주저앉기 시작했다. 세미욘은 유니스의 머리에 댄 권총을 서서히 내려 엉거주춤 총집에 다시 넣었다.

모두가 느끼고 있었구나.
어차피 이런 결말이 올 것을.
그걸 못 느끼는 놈이 바보지. 다 같은 인간인데.

세미욘은 천천히 그의 비행기를 쳐다보았다. 깃털 달린 뱀이 유려하게 꽁무니에 도장되어 있었다. 케찰코아틀. 장인과 농민의 신, 전쟁의 신 데스카틀리포카에게 유혹당하고 타락한 뒤 힘을 잃어버린 신. 멀리 떠나버린 신.
재수없는 마킹이었구먼. 불길한 미래를 예견하다니. 세미욘은 담배를 꺼내 꼬나 물고 아직도 울고 있는 유니스를 쳐다보았다.

“동지들을 책임져라.”

“응?”

“동지들의 인생을 책임져 보란 말이다. 배신자야.”

“제발 그만……”

세미욘은 깊게 담배를 들이마시며 동료들에게 돌아섰다. 세인트 프롤레타리아의 동지들은 모두 제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기장의 손짓 하나에 그들은 일언반구 없이 모두 하얀 기체로 탑승하기 시작했다. 유니스가 천천히 그들에게 다가섰지만 세미욘은 팔을 들어 그녀의 접근을 저지했다. 담배 맛이 쓰디쓰게 느껴졌고, 그는 폐가 꺼질 때까지 연기를 길게 뿜어냈다. 세미욘이 담배를 털고 조종석에 들어설 때까지 그녀는 우두커니 제자리에 서 있었다.

“가룟유다를 살려두는 건가.”

프란츠의 농담에 아랑곳 않고 세미욘은 뒤의 동료들을 쳐다보았다. 마지막 이륙이다. 이번에 뜨면 다시는 내리지 못하리라.

“내릴 사람은 지금 내려라. 막지 않는다.”

“어차피 땅에서 죽을 생각은 없었으니까요.”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페르난도의 목소리일지도, 혹은 다른 대원의 목소리일지도 몰랐다. 최소한 하루하루의 생이 마감장부를 찍는 이들에게 보장된 삶이라는 것은 더 이질적인 것인지도 몰랐다. 세미욘은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고 자리에 앉으며 소리쳤다.

“전 대원 이륙준비!”

하얀 새의 몸이 덜덜덜 떨리며 세미욘의 몸에 기분 좋은 진동을 가져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안개 속을 헤매는 것 같던 머릿속이 환하게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엔진에 힘이 들어갔고. 세인트 프롤레타리아는 천천히 활주로를 움직이며 밝은 하늘을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하늘이 잡힐 듯이 올라왔고 몸이 뒤로 젖혀짐과 동시에 눈 덮힌 봉우리와 암석들이 발 아래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어디로 갈까요. 대장”

이미 세인트 프롤레타리아는 구름 위를 뚫고 고요한 백색 바다 위를 스치듯 항해하는 중이었다. 더없이 좋은 날이었다. 푸르다 못해 어두운 청색 하늘 아래로 펼쳐진 눈부신 하얀 바다. 하얀 평원. 하얀 도로. 천국이 존재한다면

“어디로 갈까요 대장.”

아마 이렇게 하얀 색일 것이다.

“세미욘, 어디로 갈 지 말해 줘.”

프란츠의 딱딱한 목소리가 귀청을 울렸고, 그제서야 세미욘은 목표물을 지정했다. 거대한 엔진 네 개를 단 헌걸찬 위용의 비행기는 천천히 기수를 북쪽으로 돌리며 점점 속도를 올리고 있었다. 마지막 남은 노동자들의 날개. 그리고 몇 시간 후면 사라질 마지막 노동자들의 비행.

유니스의 말대로 항복한 노동자들은 생을 인정 받고 안정된 서비스를 공급 받을 수 있을까?  5대 기업의 서비스수준은 절대로 잉여인력을 한도이상 넘기지 않았고, 예비자원을 낭비하지 않았다. 아마 모두들 전쟁서비스로 등록이 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어디론가 가서 [서비스해제]를 당하겠지. 모두가 어렴풋이 알고 있지만 믿고 싶지 않은 일일 것이다. 현재에 대한 안온한 희망은 불확실한 미래를 견뎌내지 못하게 만드는 법. 결국, 그들은 현재의 불안 때문에 미래를 포기할 것이다. 기꺼이.

노동자들은 실패했다. 영원히.
하지만 하나 마지막으로 할 것은 남아있었다.

“목표구역에 접근. 요격시스템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데.”

“그런 거 이젠 신경 쓰지 않아도 되지 않나.”

갑자기 웅웅 거리는 소리가 머리를 울리더니 기체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다시 날뛰고 싶어하는 것이다. 하얀 새는 천공을 발판 삼아 다시금 질주를 원하고 있었다.

“좋아. 브뤼셀 상공에 접근. 목표물과의 거리 180km”

최소한 머리를 부수진 못하더라도 상처는 낼 수는 있을 것이다.

“전속돌진”

“즐거웠어. 대장! 즐거웠네 제군들!”
하루라도 자유를 누린 사람은 절대로 그것을 잊지 않는다.
그리고 그 자유를 아는 이는 이제 여섯 명 밖에 남지 않았다.
거대한 하얀 새와 함께 날아가는 여섯 명.

“전속돌진 합니다!”

세미욘은 고개를 끄덕이고 통신망을 열었다.

“사격!”

Venceremos, venceremos (승리하리라, 승리하리라)
mil cadenas habra que romper. (수많은 사슬은 끊어지고)

순식간에 구름평원이 하늘위로 들리고 엄청난 압력이 등뒤로 전해져 왔다. 까마득히 얼룩졌던 대지가 순식간에 확대되면서 강과 들판이 보이기 시작하고 주름 같았던 길이 이리저리 연결되며 길의 양끝에 연결된 수 많은 아파트 단지들과 거주지역과 공장이 시야에 들어왔고, 저 멀리 높은 은색의 고층빌딩이 앞으로 미끄러져 돌진하고 있었다.

Venceremos, venceremos, (승리하리라, 승리하리라)
la miseria sabremos vencer. (우리는 비극을 이겨내리라)

웅웅거리는 소리와 함께 불꽃들이 앞에서 쏟아지기 시작했다. 빌딩 근처의 대공포가 작동하고 미사일이 날아오며 거짓말처럼 시야 뒤쪽으로 사라지는 중이었다. 휘황찬란한 불꽃놀이 가운데로 세인트 프롤레타리아는 불꽃을 내뿜으며 벼락처럼 내리 꽂히는 중이었다. 아래에서 위로 쏘아대는 대공포와 미사일과 수많은 강철의 저항은 속도와 총탄들과 광포한 인력과 중량을 담보 삼은 마지막 용트림을 막아내지 못했다. 순식간에 하얀 기체는 탄막을 뚫고 불꽃에 휩싸인 채 거대한 빌딩 위로 불벼락이 되어 쏟아져 내려왔다.

압력으로 일그러진 세미욘의 입에서 껄껄대는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현실을 뛰어넘어 전설로 진입하는 순간 그의 눈 앞에 펼쳐진 것은 하얗고 환한 광채였다. 굴복하지 않은 마지막 인간들이 세상에 남겨준 불씨였다. 그리고 최후의 노동자들이 마지막으로 지상에 남긴 족적이었다. 찬란한 광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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