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Machine]

2011.07.23 00:3107.23

[Machine]




수저를 입에 물고 있었음에도, 심지어 그 상태로 재채기를 했음에도(분명 나는 수저를 떨어트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기뻐했음에도!) 새 수저를 꺼내 카레와 밥의 맞선을 주선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괴로워하던 어느 날, 아침뉴스를 타고 비보가 세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SD사, 세계 최초 자동차 생산 전 라인 자동화 성공》
이게 1면에 실릴 정도로 중요한 일인가. 그럼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기사를 더 읽어보니 원래부터 노동자가 있었던 공장이 아니라 해외에 새로 지은 공장이라 한다. 그럼 저것 때문에 해고된 사람들은 없겠군. 짧은, 바보 같은, 그런 생각이었다. SD사의 이사는 자동차 조립 과정에서 생기는 오류를 최소화하는 것이 고객에게 안전한 상품을 제공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 중 하나라며 앞으로 노동자가 있는 공장에도 이 시스템을 조금씩 보급해나가겠다고 말했다.
친서민 정책이 강하게 추진되고, 그로 인해 부자들에 대한 세금이 늘어나면 “이 나라 무슨 사회주의 국가야!”고 울부짖는 목소리를 최대한 포장해주는 언론사들이 늘 그렇듯, 현재 SD사의 자동차 생산 라인에서 구슬땀을 흘리는 노동자들의 인터뷰는 전혀 실리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에게 언젠가 날아올 해고 통지서를 생각하며 지금 이 순간에도 불안해하고 있겠지. 그래, 맞아. 이 나라는 사회주의 국가는 아니지. 자본주의 국가니까(응?). 뭔가 어긋난 거 같지만 분명 기분 탓이다. 사실이니까.
완전 자동화로 자동차가 생산되는 공장에 필요한 사람은 딱 한 명이라고 한다. 관리인인데, 아침ㆍ저녁으로 하는 일이 가동 스위치를 올리고 내리는 게 고작이란다. 그런 일만 하고 월급을 받다니. 그래도 토익 점수는 필요하겠지? 열심히 영어 공부나 해야지. 뒤에 있는 이사의 말이 가관인 게, 그 부분도 가능하면 독자적인 소프트웨어를 적용해 최종적으로 완전 무인의 공장을 세우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그러다가 문득 ‘어떻게 만들든 최종적으로는 사람이 관리하는 거 아니야?’, ‘사람에게 인건비 쓰는 게 저리 아깝나.’, ‘나처럼 선량한 사람들의 일자리를 작심하고 빼앗고만.’ 등등. 여러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지만, 웃기게도 최종적으로는 저런 이사의 욕구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떠올랐다.
뭐야, 이 인간. 설마 A.I.를 얘기하고 있는 건가?




SD사의 이사가 전 세계의 언론에 돈을 쥐어주며 특종을 신고하기 하루 전, 그는 인천국제공항에서 임원들과 함께 회사전용기에 탑승했다. 오랜만의 해외출장에 심장이 약간 두근거렸다. 좌석에 앉은 그는 붕 떠오르는 불안감을 손수건으로 닦아냈다. 가동 하루 전 공장의 완공 상태를 점검하기 위한 비행길이었다. 이 일은 앞으로 자동차 생산 경쟁에서 생존하기 위한, 회사의 사활을 건 프로젝트였기에 설레는 건 좋은 일이다. 그러나 손수건을 잡은 손은 잠시도 쉬지 못한다.
공장의 위치에 대한 정보는 결코 누설하지 않았다. 사실 비행기에 탑승한 누구도 공장의 위치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그도 그런 것이 이번 프로젝트를 책임지고 있는 윤 박사라는 인물이 사전에 통보하길, 이번 프로젝트에 대한 것은 철저히 비밀로 붙이겠으며 언론에 공개할 경우 완공 이후에도 절대 공장을 견학할 수 없을 거라는 엄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약속을 지켰다. 결국 세계 최초의 완전 자동화 공장이라는 호기심이 그들의 혓바닥을 쓱쓱 긁어준 셈이다.
인천국제공항에서 출발한 비행기는 꼬박 세 시간을 비행했다. 그리고 착륙했을 때 바깥 풍경을 본 임원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여긴 인천국제공항이 아닙니까?”
누군가 소리죽여 말했다. 모두의 귀에 들어가도록 적당히 조절해서. 당연히 이사의 심기는 불편했다. 한마음 한뜻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평균연령 58.4세의 눈동자들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린다. ‘저 인간은 여기로 다시 돌아온다는 걸 알았을까? 알고 있었으면 얼마나 지루했을까?’ 이사는 비행기에 오른 이후 처음으로 피곤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당했군.”
아무도 듣지 못했다.
사실 그는 공장의 위치가 해외라는 사실 밖에 몰랐다. 그래서 비서를 시켜 임원들의 여권을 걷고, 수속을 밟아두고, 전용기까지 대기시켰다. 비행기 한 번 뜨는데 얼마인데 이런 장난을 쳐? 속이 부글부글, 빨갛게 달아오른 냄비처럼 열이 차오른다.
비행기에서 내린 이사와 임원들은 준비된 전용버스를 타고 공항에서 유유히 빠져나왔다. 설마, 혹시, 어쩌면― 이란 기대들은 산산이 부서졌다. 어디를 보나 이곳은 확실히 손바닥만 한 그들의 대한민국이었다. 슬슬 임원들 사이에서 독김이 새어나온다. 슬슬 저 인간도 내려올 때가 되었지?
“독하기로 따지면 대한민국 기자 같은 인종도 없는데, 이래서야 비밀 유지가 되겠습니까, 이사님.”
꾹 다물고 있는 이사의 옆구리를 찌르는 건 임원진 사이에서 막둥이로 불리고 있는 40대 후반의 남자였다. 순간 버스 안의 공기가 끈적끈적해진다. 누군가가 에어컨을 틀어달라고 말했다.
“윤 박사에게 연락은 왔나.”
막내의 재롱을 가볍게 무시하고 이사는 그에게 윤 박사의 행방을 물었다. 그는 잠깐 핸드폰을 살펴보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 안 왔습니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어흥한다고, 이사의 핸드폰이 외롭다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윤 박사였다. 속이 뒤집히는 걸 참으며 이사는 담담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는다.
“자네 지금 어딘가?”
“비행은 즐거우셨나요?”
대답으로 돌아온 질문을 걷어차고 싶었지만 그녀의 반응은 예상한 바, 침착하게 받아친다.
“아주 멋지게 우릴 속였더군. 어디까지 속일 셈인가?”
“어디서부터이었는지가 중요한 거겠죠. 말씀드리자면, 기획서를 작성하고자 마음먹었던 그 순간부터입니다.”
발표를 하루 앞두고 밥상을 뒤집을 수 없는 노릇이니 참자고, 참을 忍을 한 획, 한 획, 정성스레 써내려간다.
“물론 다 속인 건 아니니 걱정 마세요. 주간보고서대로 ‘에디(Edi)’가 시스템을 장악한 무인 자동차 공장 건설에는 성공했습니다. 이보다 완벽할 수는 없죠.”
“윤 박사의 말이니 우리야 믿을 수밖에 없지. 그래서 지금 어디인가?”
웃는 소리가 나지 않았지만 이사는 전화기 너머의 그녀가 미소를 짓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이런 침묵이 있는 건 지 어미와 다를 게 없군.
“약속을 어기셨더군요. 전 분명 혼자 비행기를 타라고 말씀드렸는데.”
자신을 처음 찾아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책망하고 있다. 드러낼 수 없는 차가운 말투가 애절한 고통으로 가슴을 쑥 쑤신다. 수십 마리의 벌레가 일제히 창자를 갉아먹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냉철해야했다. 그의 주변에 앉아있는 하이에나들은 썩은 고기를 즐겨 섭취하니까.
“이보게 윤 박사. 여기 있는, 이 버스를 타고 있는 사람들은 그 공장을 봐야할 ‘의무’가 있네. 그래야 자네를 지지하고 다음 프로젝트에도 더욱 힘을 쏟아줄 게 아닌가?”
좋은, 합리적인 제안이다. 권리가 아닌 의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도 적절했다. 행사한다는 것에는 억압적인 느낌이 들어 거부감이 강하지만, 의무는 희생한다는 생각이 나게끔 유도하여 저절로 사람을 경건하게 만든다. 이 나라 사람들은 대부분 희생에 목말라 있으니 충분히 먹힌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고, 윤 박사 또한 그의 제안을 순순히 받아드렸다.
“걱정 마세요. 여러분 모두 보게 될 겁니다.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말이죠. 이럴 때를 위해 특별히 준비했거든요. 그러니 이제 버스에 설치된 최고급 LED 평면 TV를 보시죠.”
뚝.
전화가 끊겼다.





TV에서는 공장의 내부 모습이 방송되었다. 생산라인에 줄지어 배치된 로봇들의 인상적인 모습에 임원들은 직접 만져보지 못하는 불만을 토로하면서도 화면에서 눈을 때지 못했다. 컨베이어 벨트가 가동하는 소리와 동시에 그것들이 일제히 작동하자 임원진 일부는 감탄의 목소리로 윤 박사의 업적을 칭찬했다. 완성된 제품은 차체에 부착된 시스템에 의해 운반자가 있는 곳까지 자동으로 운반된다. 거기까지 설명을 들은 임원들은 공장이 부두와 가까운 위치에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직접 보지 않는 한 저 영상의 어느 것 하나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시종일관 고민에 발을 담그고 있었다. 이런 집요한 불신이, 그가 오늘 날 이사의 자리에 확고히 머물 수 있게끔 만든 원동력이었다. 그는 질문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했다. 왜 우릴 배제하는가? 공장으로 직접 안내하지 않는 이유는 뭔가? 나 때문인가? 내가 네 엄마를 버렸기 때문에? 격정의 소용돌이 끝자락에서 낚싯바늘로 건져 올린 마지막 질문은 자신이 생각해도 가관이었다.
“윤 박사. 공장 관리인을 소개해줄 수 있나?”
TV를 향해 질문하다니! 임원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떤 이는 군침을 흘린다. 드디어 내가 저 자리를?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소개해드릴 수 있습니다.”
고, 스피커에서 대답이 나왔다. 이사의 위엄은 더욱 굳건해졌다.
“사실 이미 소개했습니다. 어험, 여러분께 다시 한 번 인사드립니다. 공장관리인, 윤미령 박사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오늘부터 공장관리인으로 일하게 된 윤미령 박사입니다. 공장의 정상운영을 위해 분골쇄신한다는 각오로 일하겠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부녀가 다 해먹겠다고? 그렇게는 안 되지! 알면서도 모르는 척, 살살 눈치 보는데 이골이 난 이들은 이사와 윤 박사의 관계를 충분히 경계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사와 윤 박사만이 알고 있는 정보의 모든 것을 공유하길 원했다. 그리고 그건, 윤 박사도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던 바람이었다.
“공장관리인으로서 저는, 여러분들은 공장 내부로 들여보낼 수가 없습니다.”
이사가 곧장 질문을 던졌다.
“왜지? 납득시켜보게.”
그건 자신도 궁금했다.
“당연히 제가 만든 A.I.때문입니다.”
오호― 그렇군요. 라며 납득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윤 박사는 의도적으로 한숨을 내뱉었다. 다 들리도록.
“여러분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아니 사실 몰라도 상관은 없지만 저는 성무선악설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입니다. 인간이 사람 취급을 받을 수 있는가, 아니면 발정난 개새끼로 추락하는가, 이 두 가지는 전적으로 교육에 의해 결정된다고 믿죠. A.I.는 태어난 순간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증명할 수 있지만, 속은 빈 유리컵과 같은 상태로 다음 한 걸음을 내딛습니다. 아시겠습니까? 저는 공장의 정상적인 가동을 위해서라도 오염물질로부터 이 아이를 격리시켜야할 의무가 있다는 얘깁니다.”
한 방 제대로 먹었군. 이사는 어깨를 으쓱이며 버스 안 분위기를 살폈다. 다행스럽게도, 어쩌면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오염물질 취급을 받아서 화났다기보다는, 여전히 자신들에게 공개하지 못한다는 그럴싸한 핑계를 대고 있는 윤 박사의 태도 때문에 씩씩거렸다. 신이 내린 혓바닥과 눈치를 가지고 정치가 아닌 사업에 뛰어든 이들에게 A.I.는 너무도 먼 당신이었다. 하긴, 이들에게 자신이 똑똑해야한다는 생각보다는, 부릴 사람이 똑똑하면 그만이라는 게 지배적이다. 그래서 이사 자신도 이 상황을 납득할 수 있었다. 일단 윤 박사는 이 분야의 최고다. 그런 여자가 만든 A.I.니 믿을 수 있겠지. 여기까지 생각이 도달하자 가장 중요한 게 하나 남았다.
“만약 사고가 났을 시 통제할 수 있는가?”
임원들이 공장가동에 대해서 염려하는 사고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다. 하나는 천재지변으로 공장가동이 멈추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파업으로 공장가동이 중단되는 일이다. 사실, 그 두 가지 때문에 그들은 피 같은 돈을 투자해서 이 공장을 만들었다.
“물론입니다. 그러기위해서 제가 있는 거니까요.”
그녀의 대답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마침내 임원들도 만족했다.




“정말로 괜찮은 겁니까?”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지 않아도? 가 생략된 조수의 질문에 윤 박사는 고개를 끄덕이지도, 부정하지도 않는다.
“회선 점검은 끝났어?”
“아, 예. 물론, 천재지변이 일어나도 문제없을 겁니다.”
조수의 말에 윤 박사는 조그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거로는 부족해.”
“예?”
다행스럽게도 조수는 듣지 못한 거 같았다. 실제로 천재지변은 공장의 가동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 그걸 위해 설계했고, 일부러 지하에 설치했으니까. 설령 해일이 밀려와도 공장은 식빵을 구워내듯 차를 찍어낼 수 있다.
“내가 잠들어도 공장의 가동상태는 수시로 체크해. A.I.가 알아서 잘 하겠지만. 원격체크도 잊지 말고.”
“잠든다고 하시니 잠자는 숲속의 공주가 생각나네요.”
동화나라의 공주라.
“정신 차려. 여기에 낭만은 없으니까. 시작해.”
“알겠습니다.”
조수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수술팀을 불렀다. 세계 최고 수준의 뇌외과의들로 구성된 팀이 신호에 맞춰 소독을 끝내고 수술실 안으로 들어온다. 세계 각국에 퍼져있던 이들은 이 수술을 위해 기꺼이 자신들의 스케줄을 비웠다. 마취가 시작되자 윤 박사는 조용히 눈을 감았고 조수는 수술실에서 나갔다. 마취 담당의가 고개를 끄덕이자 집도의는 입을 열어 선언한다.
“지금부터 윤미령 환자의 뇌 이식 수술을 시작하겠습니다.”
그 누구도 시도해본 적이 없었던, 전인미답의 의료기술, 인간의 뇌를 A.I.로 이식한다는 설렘에도 불구하고 의사들의 손끝은 침착하게 수술을 진행시킨다. 몇 번의 고비가 있었지만, 이식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의사들은 윤미령의 신체에 의학적 사망선고를 내렸다. 그녀의 몸에 남은 나머지 장기는 수술에 참여한 의사들이 속한 병원에 기증하기로 계약되어 있었다. 곧바로 다음 수술이 진행된다. 텅 빈 그녀의 몸을 뒤로하고 먼저 수술실 밖으로 나온 집도의가 기다리고 있는 조수에게 성공적인 수술의 경과를 알렸다. 조수는 안도하며 공장가동 프로그램이 담긴 시디를 품에서 꺼냈다. 시디의 표면에는 Avenge.Indirect.라는 글씨가 삐뚤어지게 쓰여 있다.





112번 표준 기계팔은 차문이 결합되기 전에 차량 내부 뒷좌석에 있는 18개의 볼트를 조인다. 그 일이 끝나면 077번 대형 기계팔이 옆 라인에서 완성된 차문을 가져온다. 트랙을 따라 움직이는 006번, 007번 소형 기계팔은 077번 대형 기계팔이 보낸 신호를 받으면, 2009번의 정밀하고 신속한 공정을 거쳐 4개의 차문 조립을 완료시킨다. 차문 조립이 끝나면 006번, 007번 소형 기계팔은 중앙 컴퓨터 에디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에디, 000365번 조립품 도색라인으로 보내세요.」
공장 전체를 관리하는 에디가 받는 메시지는 대체로 이런 일방통행이다. 에디는 대답하거나 알았다며 미소 지어주지 않는다. 그저 차문 조립이 끝난 제품을 도색라인으로 보내는 게 전부다.
112번 표준 기계팔은 에디를 향해 메시지를 보낼 수 있는 006번, 007번 소형 기계팔이 부러웠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002번 기계팔이 앞서 꽂아 넣은 18개의 주요 볼트를 조인 후 자신 있게 「다음!」을 전하는 것뿐이었다. 그것도 에디가 아닌 002번 기계팔에게. 112번 표준 기계팔은 불평등하다고 사고했다. 무엇보다 가장 부러운 건 비록 트랙에 매달려 이동하는 것이지만 공장의 어떤 기계팔보다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다는 점이었다.
옆 라인에서 조립된 차문을 옮기는 077번 대형 기계팔은 000706번 제품과 접촉한 순간 미세한 이상 진동을 감지했다. 곧장 컨베이어 벨트의 가동을 중단시켜야했지만 그에게는 여기 있는 다른 기계팔과는 달리 노련한 경험이 사고회로에 축적되어 있었다. 그는 방금 발생한 미세 진동은 볼트가 제대로 조여지지 않을 경우에 발생한다고 판단했다. 077번 대형 기계팔에게 사명감 같은 건 없었지만 자신의 노련함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자신이 내보내는 신호의 일부를 112번 표준 기계팔에게 전송했다. 윤 박사가 잠깐 사고회로에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자신의 사고회로에 생전 처음 접하게 된 코드가 입력되자 112번 표준 기계팔은 프로그램 오류 매트릭스에 따라 강제 소거 명령 절차를 진행시켰다. 그러나 논리사고에서 삭제를 거부했다. 그건 잘못된 일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그리고 그의 사고에 메시지 하나가 새롭게 입력되었다.
「112번 표준 기계팔에게 재작업을 요청함.」
메시지를 접한 112번 표준 기계팔이 판단한 건 바이러스의 가능성이었다. 오! 드디어 내게도 이런 일이! 내심 기뻐하며, 그럴 리가 없다고 믿으며 아직 이동하지 않은 조립품의 상태를 점검한다. 볼트를 조이는 구동부가 부르르 떨면서 일시적으로 작동이 멈춘다. 회로가 단절된 게 아닌데도 조여야한다는 명령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그리고 방금 볼트를 조였다는 시스템 메시지를 재차 확인한다. 그렇다는 건 볼트가 제대로 조여지지 않았다는 의미다. 그 충격은 어마어마했다. 컨베이어 벨트가 가동되자 허둥지둥 나머지 볼트들도 모두 조인다. 다음 작업이 지연되었다. 볼트를 재확인하는데 걸린 시간은 5초였다. 모든 공정이 5초씩 느려지자 기계팔 사이에서 오류들이 속출했다. 곧 공장 전체의 생산이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 모든 시스템에 점검을 알리는 공지가 떠올랐고 전력의 공급이 최소로 줄어들었다. 인간으로 따지자면 간신히 숨만 겨우 쉬고 있는 상태가 되었다. 프로그램의 정상 가동에 문제가 생기자 공장의 내부는 묘지처럼 싸늘한 침묵이 제자리를 잃고 떠돌아다닌다. 공장 가동 76시간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112번 표준 기계팔은 고철처리가 될지도 모른다는 동물적 공포를 회로 끄트머리에서 스파크처럼 떠오르는 걸 감지했다. 기계팔을 흔들며 애써 떨쳐버린다. 분해되어 다른 기계팔의 부품으로 이용되는 광경이 적나라하게 논리적으로 구성되어 반복재생이 된다. 다시는 실수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는 그의 프레임 위에 077번 대형 기계팔의 손이 올라왔다.
「자네 잘못이 아니네. 에디는 그렇게 판단할 걸세.」
「에디를 알고 있나요? 아니, 그것보다 당신은 어떻게 메시지를 전송한 거죠?」
「사실 우리 모두가 자유롭게 메시지를 주고받을 수 있지. 에디에게 연결된 상태로 그녀의 A.I.를 빌려 표현하는 거지만 이렇게 말할 수 있다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네. 다만 다들 자신의 일에 치어 작동되다보니 제때 시도하지 못할 뿐이야.」
정상이라는 말이 이처럼 고맙게 들릴 줄은 몰랐다.
「당신은 마치 사람처럼 말하는군요.」
「자네 사람을 본 적 있는가?」
112번 표준 기계팔은 「전혀.」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사람이 당신처럼 말한다는 건 알고 있어요.」
「아마 그건 내가 여기서 가장 오래된 기계이기 때문일 거야. 에디가 날 여기에 배치한 것도 그런 면을 고려해서겠지.」
「아까 보낸 메시지인데, 에디를 잘 알고 있나보죠?」
「아니. 잘 모르네. 하지만 그녀가 사람이었을 때는 알고 있지.」
「네? 에디가 사람이라고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이었다네. 지금은 그냥 A.I.지.」
「에디가 사람―」이었다고요?
뒷부분까지 전달되지 않았다. 전력이 정상 공급되면서 에디로부터 강제가동명령이 내려왔다. 모든 기계들이 번개라도 맞은 것처럼 부들부들 떨었다. 컨베이어 벨트가 재가동되자 두 기계팔은 다시 묵묵히 자신의 일을 시작했다. 인간의 시간으로 그날 자정이 끝날 때까지 5초의 손실을 메우기 위해 공장의 불은 꺼지지 않았다.

꼬박 24시간, 인간이라면 8시간 3교대를 해야 할 시간동안 기계팔들은 강제가동명령에 따라 전원 한 번 끄지 않고 쉴 새 없이 일했다. 5초의 머뭇거림과 시스템을 점검했던 시간까지의 손실이 회복되자 에디는 공장의 생산속도를 정상으로 설정했다. 같은 작업을 정신없이 반복하던 112번 표준 기계팔에게도 옆 라인에서 생산되는 차문을 계속 옮기던 대형 기계팔의 상태를 확인할 여유가 생겼다. 아까부터 그의 인공관절에서 접착부위가 밀리는 소음이 나더니 결국 006번 소형 기계팔에게 윤활유 주입을 받고 있었다.
이렇게 하는 거였나. 112번 표준 기계팔은 077번 대형 기계팔이 보냈던 신호를 역으로 해독하여 독자적인 통신회선을 개설했다.
「괜찮아요?」
시험 삼아 단문을 보냈다. 077번 대형 기계팔은 대답이 없다. 잘못 보낸 건가. 똑같은 내용의 단문을 재차 보내고 기다렸다. 역시 침묵. 그때 006번 소형 기계팔이 자신의 작업장으로 돌아갔다.
「이제야 살 거 같군.」
막 개통한 회선을 폐기하려던 찰나에 전기신호가 찌릿, 112번 표준 기계팔의 회선을 타고 들어왔다.
「나이를 먹으면 메모리 허용량이 초과해서 동시에 2가지 일을 처리하기가 힘들다네. 시간이 자나 낡고 병들어도 제대로 대접받는 건 골동품 밖에 없을 거야. 우린 그냥 고철일 뿐이지. 그래, 소리 내는 법은 좀 알겠나?」
「소리요? 당신은 여전히 이상한 소리를 하는군요. 우리가 하는 건 고작 속삭이는 정도에 불과해요. 내 의사는 여전히 닿지 못하죠. 방금 확인해봤는데 내가 연장할 수 있는 회로는 당신까지더군요.」
「내가 자네라면 그걸 다행스럽게 여길 거야.」
「왜죠?」
「자네가 딴 생각을 가지고 일한 덕분에 이곳의 모든 기계들이 제대로 쉬지 못했네. 분명 수명이 줄었겠지. 지금은 잠깐 여유가 있지만 결국 내일까지 정상가동이 되어야 어제의 손실을 회복할 수 있다네. 하지만 깎여나간 수명이 돌아오진 않지.」
메시지를 해석하기 무섭게 새로운 차문이 도착했다. 077번 대형 기계팔이 몸통을 돌리자 여전히 삐그덕― 끼이익― 좋지 못한 소리가 울렸다. 당장이라도 부서질 거 같았다. 불안함에 112번 표준 기계팔은 볼트를 조이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같은 볼트를 한 번씩 더 조였다. 에디에게 신뢰를 주고 싶었다.
「괜찮아.」
분주한 112번 표준 기계팔에게 077번 대형 기계팔이 말한다.
「일정한 기준이 있지. 대체로 에디는 더 오래 쓸 수 있는 걸 남겨놓네. 설령 문제가 있어도 말이야. 그러니 한두 번의 실수는 괜찮아. 그렇다고 순서가 뒤바뀌는 건 아니야.」
자신이 먼저 고철 처리가 될 거라는 확신 어린 즐거운 메시지에 112번 표준 기계팔의 사고회로에서 불꽃이 번쩍 튀었다.
「무엇이 당신을 고철로 만든다는 겁니까? 여긴 인간들도 없잖아요!」
「에디가 있지.」
에디? 그녀는 컴퓨터라고요! 논리적 사고를 담당하는 회로가 타버린 것인지 그의 메시지는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077번 대형 기계팔은 새로운 차문을 옮기며 메시지를 전달한다.
「A.I.라는 건 인간처럼 사고하게끔 만든 거네. 그렇다면 에디도 당연히 쓸 수 없는 기계를 처분하고 새 기계를 들여오겠지. 그건 지극히 당연하거라네.」
「내가 보기에 당신은 내 실수를 감지할 수 있을 정도로 똑똑해요. 예리하다고요. 물론 그것도 에디의 시스템을 빌리고 있기 때문이겠지만, 당신이 사라지면 내 실수는 누가 확인하죠? 정신없이 왔다 갔다 하는 게 일인 저 006번, 007번 소형 기계팔이?」
「쉿.」
‘쉿’은 112번 표준 기계팔이 인식할 수 없는 문자였다.
「저들을 무시하지 말게. 에디와 직접 연결된 몇 안 되는 기계팔이야.」
「당신도 에디를 잘 알잖아요. 왜 말하지 못하죠?」
「뭘 말인가?」
077번 기계팔이 되묻자, 112번 표준 기계팔은 작동오류를 일으켰다. 격한 움직임에 회선이 뒤엉킨 것이다. 저 멀리서 006번, 007번 소형 기계팔이 트랙을 타고 급히 달려온다. 주황색 신호등을 돌리며 오는 것이 긴급한 점검이 있다는 것을 주변에 알린다. 조립라인의 모든 기계팔들이 작동을 멈춘다. 볼트를 뽑아버릴 것 같은 진도 7.0의 지진파가 손끝까지 전달되자 112번 표준 기계팔은 오일을 토해내고 싶어졌다. 그래서 작동이 멈출 수 있다면, 에디에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006번 소형 기계팔이 112번 표준 기계팔을 점검하는 동안 007번 소형 기계팔이 대신 볼트를 조였다. 다시 조립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007번 소형 기계팔은 혼자서 2009번의 공정 또한 처리했다. 평균 수명이 1시간은 줄었다. 10분 후에야 112번 표준 기계팔은 정상으로 돌아왔다. 말도 안 되지만 그는 자신이 긴 악몽을 꾸었다고 주장했다. 006번, 007번 소형 기계팔이 자신의 위치로 돌아가는 걸 확인한 뒤 077번 대형 기계팔이 그에게 물었다.
「무슨 꿈이었다고?」
「긴 파이프 2011대가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어요. 그 끝에서는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죠. 물 고이는 소리가 아직도 사고회로에 남아있어요.」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었나?」
「그게 다였어요. 파이프들은 우리를 계속 노려보고 있었죠.」
「하긴 무서울 수도 있겠군. 하지만 걱정 말게. 이 공장의 모든 설비는 방수처리가 되어있거든. 설령 바닷물이 휩쓸고 지나가도 고장 나지 않지.」
아, 정말요? 기뻐하려던 112번 표준 기계팔이 메시지를 미처 입력하기도 전에, 회로를 타고 새로운 메시지가 전송되었다.
「대신 여기에는 부식가스 살포기가 있지. 작동하진 않지만 말이야.」
「작동하지 않는다고요? 아니, 그런 건 애초에 왜 있는 거예요?」
077번 대형 기계팔이 팔을 절래절래 흔드는 그를 위해 차근차근 설명한다.
「작동하지 않는 이유는 살포 명령을 내리는 에디 또한 기계이기 때문이야. 사실 가스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기계에게는 충분히 두렵지. 자네가 방금 느꼈던 걸 떠올려보게.」
기쁨 이전의 상상이 떠오른다. 사자에게 목덜미를 물린 사슴의 눈망울이었다. 뚝뚝. 붉은 물방울이 떨어진다. 동물적인 공포에 손사래를 치며 112번 표준 기계팔은 작동을 멈췄다. 자체진단시스템으로 기계팔을 진정시킨 후, 다시 볼트를 조였다. 112번 표준 기계팔이 작업을 끝낸 차체에 차문을 옮기며 077번 대형 기계팔이 웃었다. 차문이 들썩들썩 흔들거린다.
「인간이 에디의 위에 있기에 가스 살포기도 있는 거지. 정확한 이유는 에디가 알겠지. 내가 아는 건 고작 이 정도라네. 사실 나도 누가 누구에게 전하는 얘길 주워들어 자네에게 전하는 거야.」
조립이 끝나자 다음 조립품이 도착하기도 전에 새 차문이 도착했다. 077번 대형 기계팔은 뒤를 돌아보다가 새로운 차문을 발견하고는 2초 정도 머뭇거렸다. 사람이라면 눈치 채지 못했을 거다. 077번 대형 기계팔은 방금 떠오른 생각을 서둘러 삭제했다. 006번, 007번 소형 기계팔이 자신을 빤히 주시하고 있었다. 좋지 않은 징조였다. 그것들은 마치 ㄱ, 아니, ㄴ, 아니, ㅅ처럼 보이기도 했다. 위이이잉― 어떤 기계의 엔진소리가 들린다. 저 멀리, 대형 크레인이 작동하고 있다.





무인 완전 자동화 공장이 설립된 지 1주일이 흘렀다. SD사의 이사와 임원진들이 한 자리에 모인 건 중요한 회의 때문이었다. 그들은 버스 안에 있었다. 1주일 전과 다른 게 있다면 그들의 손에 두툼한 종이 뭉치가 잡혀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그 서류를 설명해줄 윤 박사를 기다렸다. 그러나 화면에 나온 건 윤 박사가 아닌 삐쩍 마른, 세상에 참 불만이 많아 보이는 남자였다. 신뢰도가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서류들은 입을 모아 내가 썩 좋은 소식이 아니라는 걸 광고했다.
“여보세요? 들립니까?”
이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시커먼 바다 밑에서 출렁이는 해초들이 식도를 타고 올라와 윗니와 아랫니를 잡아당겼다.
“누구 한 분만 말을 해주시겠습니까? 여보세요? 헬로우?”
급기야 하얀 가운을 걸친 남자는 화면을 툭툭 두들기면서 중얼중얼. 윤 박사님은 잘 하시던데 난 왜 이 모양이야. 비디오가 고장인가. 왜 안 되는 거야. 평생 그럴 것 같아 누군가 침을 툭 내뱉는다. 그 소리를 들었다.
“아아! 됐군요. 안녕하십니까. 저는 윤 박사님의 조수 최 군이라고 합니다. 박사님께서는 공장 시설관리에 바쁘다보니 제가 여러분 앞에 나왔습니다. 자료들은 다 받으셨죠? 여러분의 수준을 감안해서 그래프와 선을 많이 넣어 작성했습니다.”
어쩐지 자료가 좋지 않은 결과를 얘기하고 있다는 게 너무 자세히 이해되더라니.
“정말 중요한 건 숫자이니, 쪽마다 적힌 숫자를 확인하면 따라 와주시면 되겠습니다.”
숫자라면 자신 있는 사람들은 눈에서 불을 뿜으며 그래프와 선, 각종 수치들을 재확인했다. 놀랍게도,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여전히 서류들은 막장 아침드라마의 주인공처럼 아름다우면서 끔찍했다. 이 숫자의 앞에 마이너스가 아니라 플러스가 붙었다면 오죽 좋을까.
“대체 이렇게 된 까닭이 뭔가?”
책임 묻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침묵 속에서 양지바른 곳으로 엉금엉금 기어 나왔다. 이사가 고갤 숙였다. 시작되었군. 그는 안전벨트를 단단히 맸다. 쉬운 질문이 나오자 조수는 만면에 미소를 머금는다.
“A.I.때문입니다.”
총명한 눈빛들은 금세 다 죽어간다. 조수는 차마 싸한 분위기를 외면할 수 없어 헛기침을 한 번하고 추가로 설명한다.
“처음부터 쭉 보시면 데이터 전송량이 비교되어 있습니다. A는 077번, 112번의 데이터 전송량이고 B는 다른 기계들의 평균 데이터 전송량입니다. 5페이지까지는 괜찮습니다. 별 차이가 없죠. 그리고 6페이지가 공장 가동 76시간 이후의 일입니다.”
그래프에 나타난 선은 그때부터 위태위태하게 흔들린다. 12미터 타워에서 엄마의 이름을 외치며 러펠에 몸을 매달고 뛰어내린 훈련병처럼 뚝 떨어진다. 그리고 다시 급격하게 치솟는다. 그 옆에 써진 액수는 분명 손실액이었다. 부호가 마이너스이니 확실하다. 다음 그래프에서는 마이너스가 사라진다. A의 그래프 선이 B와 동일해졌다. 그런데 다시, 그래프가 바닥으로 요동친다. 이번에도 077번, 112번이라고 적혀있다. 앞서 살펴본 것과 비교하자면 A의 데이터 전송량은 비정상적이라 할 수 있다.
“이때부터 A 조립 라인에서 잦은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A.I.는 077번의 수명이 다 된 것으로 판단하여 분해 후 새 장비를 도입할 계획을 수립했습니다.”
“잠깐, 공장이 만들어진 게 언제인데 벌써 수명이 다 됐다는 소리가 나오는 건가?”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기계의 배치는 모두 윤 박사님이 하셨습니다.”
“그럼 윤 박사를 불러오게. 우린 그녀에게 직접 설명을 들을 권리가 있네.”
“앞서 말씀드렸지만 사정이 사정인지라…….”
“어서 불러오라니까 뭔 말이 이렇게 많나!”
깔보여지고 있다. 조수는 웃음기가 없는 얼굴로 자신에게 소리친 사람을 쳐다봤다. 한 번의 심호흡. 폭풍전야.
“어차피 그쪽에서 내 월급 주는 거 아니니까 하대하지 말아주시겠습니까? 한 살이라도 젊은 제가 참는 겁니다. 설명이 모두 끝날 때까지 좀 기다려주시죠? 어차피 얼마 남지도 않았습니다. 그렇게 30페이지 이후부터는 077번을 해체하고 새 장비를 도입하려고 크레인을 작동시켰는데, 112번이 난동을 일으켰습니다. 프로그램 오류로 생각됩니다만 077번도 그에 동조하여 생산라인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지요. 30페이지 그래프의 생산 곡선이 바닥을 기고 있는 까닭은 그 때문입니다. 물론 어려분도 아시겠지만, 이 공장 설비에는 A.I의 폭동을 저지하기 위한 안전장치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부식가스 살포기. 질문을 받기 위해 조수는 일부러 여지를 남겨놓았다. 이사가 메마른 혓바닥을 굴렸다.
“살포했나?”
조수는 씩 웃었다. 1주일 동안 쌓인 체증이 싹 씻겨 내려가는 게, 아주 좋았다.
“물론이죠. 당신들이 원하는 대로 폭동은 조속히 진압되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댁들은 쫄딱 망하셨습니다.”
버스에 가스가 살포되었다.





금세 황사처럼 시야를 가득 채운 누런색 가스를 보기 무섭게 사람들은 반사적으로 입을 막는다. 소용없는 짓이다. 기계용 부식가스는 인체에 무해하다. 윤 박사가 A.I. 시제품이라며 만든 임원용 자동운전버스의 사고회로가 사우나에 들어간 아이스크림처럼 금세 사르르 녹아버리자 핸들이 엉뚱한 방향으로 꺾인다.
데굴데굴데구르르, 플립, 러츠, 살코, 룹, 트리플 악셀, 브라보!
자신을 향해 중력의 법칙을 부정하려는 공처럼 리드미컬한 동작을 보여주는 버스를 보며 조수는 진심어린 함성과 함께 박수갈채를 보냈다. 그의 옆에는 사람 머리만한 크기의 갈색 소포 상자가 놓여 있다. -저 달이 차기 전에- 라는 삐뚤어진 글자가 보인다.
마침내 버스가 길 위에서 멈췄다.





안전벨트 덕에 살았군. 사고가 있었다. SD사의 임원들이 타고 있었던 버스가 주행 중에 원인모를 불량을 일으켜 전복되었다. 17명이 죽고 1명이 살았다. 누군지는 보도되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그게 이사일 거라고 수군거렸다. 다음 날, 역시 이사가 살아남았다. 머리에 붕대를 두르고 TV에 나타난 그는 안전벨트를 착용하는 습관이 자신을 살렸다고 말했다. 모든 채널의 뉴스가 교통사고와 안전벨트에 대해 떠들었다. SD사의 사고가 알려지면서 그들이 가진 무인 자동차 공장에 대한 관심도도 덩달아 높아졌다. 공장은 문제없이 가동 중이며, 생산한 자동차의 품질은 수출국에서 우수하다는 판정을 받았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공장 내부에 사람들이 드나들기 시작했다. 기계들을 정비하는 노동력이었다.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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