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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지구를 보다

2011.06.03 10:3606.03

                                                  지구를 보다

                                                            
“속도 감속. 299,999km/h, 269,432km/h, 192,432km/h, 100,203km/h, 32,000km/h 3420km/h, 200km/h, 62km/h, 9km/h, 4km/h, 2km/h, 1km/h 정지. 공기농도 검사... 정상, 기압 밸브 검사... 정상, 멸균 가스 살포, 시간동결수면 해지.”
눈꺼풀 사이로 눈부신 빛이 들어왔다. 몸을 구부린 채로 빛을 최대한 차단했다.
“호흡수 검사... 정상, 심박 수 검사... 정상. 혈당치 검사... 정상. 세균 및 바이러스 항체 투입...”
그때 갑자기 차갑고 미끈한 것이 손등을 타고 내려갔다.
“이게 무슨 짓이야!”
신경질 적으로 소리 질렀다. 열 번째 잠에서 깨어난 뒤부터 용납할 수 없는 몇 가지가 생겼다. 그중 가장 상위에 들어가는 것이 잠에서 다 깨어나기도 전에 행해지는 검사였다. 나는 손에 기어 다니는 것을 잡아 바닥에 패대기쳤다. 전자 침을 단 나노봇이 뱀처럼 기어 내 다리 위로 올라오려 했다.
“저리 꺼지지 못해!”
나는 온 힘을 다해 나노봇을 밟았다. 숨이 거칠어 졌다. 막 잠에서 깨어나 심장도 미어져 왔다.
“관리인의 생명유지는 최고 등급의 보안 사항입니다.”
차가운 기계음이 수면실 안에 울려 펴졌다. 동시에 나노봇이 팔위로 빠르게 올라왔다. 나는 다시 한 번 팔을 거세게 낚아챘다.
“아얏!”
잽싸게 피해간 나노봇 사이로 손등 위 붉은 선혈이 일어났다. 그러자 벽에서 또 다른 나노봇들이 튀어나왔다. 하나같이 은백색을 띤 치료 로봇들이었다.
“1단계 경고. 관리인 신체에 경미한 피해.”
이를 질끈 물었다. 입술이 빨갛게 물들었다. 나노봇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려다 힘없이 떨어뜨렸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주먹정도로 부셔질 로봇들이 아니었다. 잘해야 내 손에 상처와 함께 두 배 많은 치료를 받을 뿐이었다.
“항체 생성 완료. 치료 완료. 수면실 문을 개방하겠습니다. 관리자께서는 세 걸음 뒤로 물러나 주십시오.”
육중한 기계문 밖으로 통로가 모습을 나타났다. 일부로 발을 세게 구르며 메인관리실로 향했다.
메인 관리실 의자에 무너지듯 앉으며 명령했다.
“수신편지 확인해,”
“1순위 작업은 관측정보 확인입니다.”
“수신편지 확인해!”
주먹을 거세게 내려치며 말했다. 메인컴퓨터는 그제서야 수신편지 창을 띄었다.
“L.C 15년 8월 30일 오전 8시. 수신편지 확인. 총 20,340건의 편지가 등록되어있습니다. 확인하시겠습니까?”
“가장 최근에 온 편지부터 역순으로 재생해.”
홀로그램 사출기 쪽으로 몸을 돌리며 의자에 눕듯이 몸을 기댔다. 홀로그램 사출기는 몇 차례 빛을 쏟아내더니 이내 열여섯 정도의 소녀가 되었다. 양쪽으로 딴 머리칼이 진한 커피를 연상케 했다. 나는 내 머리카락을 훑었다. 이제 어깨정도까지 내려온 머리칼은 여전히 진한 커피색이었다. 흐뭇한 기분에 사로잡혀 소녀가 말을 꺼내길 기다렸다. 이윽고 영상 사출이 끝났는지 홀로그램 소녀가 눈과 입을 동시에 뗐다.
“안녕하세요. 선조님. 저는 길 가문의 6876452번째 후손인 길희주 라고 합니다.”
소녀는 꾀꼬리처럼 떠들었다. 사람의 목소리가 얼마나 달콤하던지, 세계최고 디바 공연의 황홀함도 비할게 못 됐다. 그러는 사이 소녀는 몇 마디를 더 떠들었다. 대부분의 말들이 내가 지구에 남아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선조님께서 어떻게 그곳에 남으셨는지 정말 대단해요. 저라면 그곳에 남지 못했을 거예요.”
잠시 멍하니 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그녀의 모습 구석구석을 살폈다. 자세히 보니 그녀의 좁고 도톰한 귓불은 영락없이 내 것과 닮아있었다. 어머니께 물려받은 작은 입술도 소녀와 똑같았다. 퍼즐을 맞추듯 소녀의 얼굴 구석구석을 살폈다. 그러는 사이 소녀의 편지는 끝이 났다. 홀로그램의 빛이 몇 번 일그러지더니 이내 완전히 사라졌다. 나는 또다시 고개를 푹 숙이고 어서 다음 사람이 나오길 기다렸다. 편지와 편지 사이를 기다리는 이 시간은 그 어느 때보다 혼자인 게 절실했다.
“안녕하세요! 길 가문에 자랑스러운 6876451번째 후손 길하늘 입니다!”
홀로그램이 두 번째로 비친 것은 키가 크고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소년이었다. 소년은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연신 띠우고 있었다.
“엄마, 이거 제대로 나오는 거 맞아? 이제 말하면 되는 거지?”
쿡 하고 웃음이 튀어나왔다. 32번째 잠이 든 후부터 기억에 없던 행동이었다. 소년의 대화는 소녀와는 또 달랐다. 그는 오늘 자신이 학교에서 있었던 축구대회부터, 요즘 들어 늘은 엄마의 잔소리까지 시시콜콜한 애기를 전부 꺼냈다. 문뜩 나도 예전에 저랬었나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하지만 그랬을 지도 모른다. 소년의 눈매는 아버지께 물려받은 내 눈과 붕어빵이었다. 나는 또 다시 소년의 얼굴 요모조모를 분해해 내 것과 비교했다. 듣다보니 목소리도 비슷한 것 같았다.
계속해서 여러 명의 편지가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알 수 없는 행복감도 여섯 번째 사람까지였다. 행복한 마음은 일곱 번째 사람이 지나갔을 때부터 서글퍼지기 시작했다. 여덟 번째 사람에서는 슬픔으로 바뀌고, 아홉 번째 사람에서는 분노로 변했으며, 열 번째 사람에서는 비통함으로 가득 채워졌다. 비통함은 내면 깊숙이 있던 기억을 끄집어내 왔다. 아니, 사실 첫 번째 소녀 때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나는 아이가 없었다. 어머니와 아버지, 형이 내 가족 전부였다! 그들은 형의, 아버지의, 어머니의 자손을 지 몰랐지만 내 자손이 아니었다!
“으아아아악!”
홀로그램 재생기에 의자를 세게 집어 던졌다. 열 한 번째 남매의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망가진 홀로그램재생기와 고철이 된 의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3단계 경보. 관리자 정신에 심각한 오염이 발생했습니다. 관리자께서는...”
“닥쳐!”
메인컴퓨터의 음성은 내가 내던진 의자에 파묻혔다. 대신 어디선가 날아온 나노봇들이 컴퓨터의 손상부위를 고쳐나가기 시작했다.
“2-3735 약을 가져와.”
나에겐 엔돌핀과 아드레날린이 필요했다.
“그 약은 금지 약물입니다. 관리자의 생명유지 보완에 따라 5단계 이상의 신체 손상을 제외하고는 사용할 수 없습니다.”
“이것도 안 돼! 저것도 안 돼! 관리자의 생명유지 보완을 해체해!”
불가능 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반사적으로 소리쳤다.
“관리자의 생명유지는 최고 등급의 보안 사항입니다. 해체하기 위해서 패스워드가 필요합니다.”
열개의 빈칸과 함께 복잡한 수식들이 나타났다. 이미 열다섯 번째부터 서른 번째 잠에서 깨어난 뒤 수십 번이고 매달렸던 수식들이었다. 지구에 아직 모두가 있었을 시절의 내가 만들었던 수식임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정답에 다가갈 수 없었다. 결국 씩씩거리는 숨소리와 함께 발길을 돌려 수면실로 향했다.
“홀로그램 사출기의 수리 여부를 요청합니다.”
발을 멈칫했다. 그리고 찡그린 채로 홀로그램 사출기를 바라보다 힘없이 말했다.
“고쳐둬.”
“알겠습니다.”
나노봇들이 홀로그램 사출기로 날아가는 것을 보며 수면실로 걸어갔다.
침대에 누워 몸을 움츠렸다. 태양이 십 퍼센트는 가깝게 왔지만 지독한 독감에라도 걸린 듯 온몸이 떨렸다. “선조님께서 어떻게 그곳에 남으셨는지 정말 대단해요. 저라면 그곳에 남지 못했을 거예요.” 소녀가 했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리고 보니 어쩌다 이곳에 남은거지? 나는 왜 이곳에 남았었을까. 안개 속에 파묻힌 듯 기억이 선명치 않았다. 나는 그대로 수면실의 안정가스에 취해 잠이 들었다.

“개인 사진과 동영상을 불러와.”
“1순위 작업은 관측정보 확인입니다.”
“가져오라면 가져와!”
서른네 번째 꿈에서 사람들을 만났다. 서른 세 살의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교에 이르기까지의 친구들을 만나고, 동료들을 만난 뒤 집으로 향했다. 그리 크지 않은 아파트에는 6876452명이나 되는 대 가족이 모두 모여 있었다. 나는 그 누구보다 시끄럽게 떠들며 그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한참을 돌아다니던 중 어머니와 아버지, 형이 보였다. 그들에게 반갑게 인사하려 손을 올린 순간, 그들의 얼굴이 뭉개진 찰흙 인형처럼 변했다. 주위를 돌아보니 나와 이야기 한 6876452명 모두가 찰흙 인형이었다.
어느새 화면에는 어릴 적 내 모습이 띄어져 있었다. 내가 흙을 만지고 있고, 형은 옆에서 모래성을 쌓고 있었다. 엄마는 데이지 꽃잎보다 하얀 챙 모자를 쓰고 웃고 있었다. 동해 어딘가에 갔었던 해변인 것 같았지만 정확한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리 붙잡으려 해도 기억이 모래알처럼 부서져 내렸다. 다음 사진으로 넘겼다. 이번에는 중학교 졸업 사진이었다. 형이 막 내 얼굴에 케이크를 던지려 했고, 엄마는 선생님과 말을 하고 있었다. 말리려는 아빠의 손도 카메라 안쪽에 잡혀 있었다. 졸업년도를 떠올리려 했지만 숫자들만 머릿속에서 어른거렸다. 포기한 채로 다음 사진으로 넘겼다. 대학교 입학 사진이었다. 아, 이건 조금 기억이 난다. 엄마가 꽤 기뻐했던 걸로 기억한다. 반면 형은 뿌루퉁한 얼굴로 나를 보다가 엄마와 아빠가 없을 때 검은 펜 하나를 주었었다. 형의 얼굴을 보자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 다음 사진은 가족사진이 아니었다. 이리저리 구겨진 주름옷을 입은 나와 내 친구들이 웃고 있었다. 아쉬움이 묻어나오는 웃음이었다. 사진 속 내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뺨이 흥분으로 고양돼 붉은 선홍빛을 띠고 있었다. 나는 이 사진이 언제인지 떠올렸다. 아, 그래. 내 송별회, 아니. 친구들의 송별회 사진이었다.

“지구의 역사를 1만년 단위로 끊었을 때, 인류의 생존을 가장 위협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범우주국 소장이 입을 뗐다. 그가 비록 백세에 가까운 노인이였지만, 우리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하지 않았다.
“빙하기입니다.”
“맞습니다. 간빙기와 빙하기가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지구에서 인류의 생명을 가장 빨리 위협했던 것이 바로 빙하기였죠. 하지만 인류는 빙하기를 무사히 이겨냈습니다. 그렇다면 100만년 단위로 끊어 보았을 때 인류의 생존에 가장 커다란 위협은 무엇일까요?”
소장이 우리 모두를 둘러보며 물었다. 사실 나와 친구들, 그리고 범우주국의 모든 연구원들은 소장이 우리를 모은 이유를 알고 있었다.
“운석이나 혜성의 충돌입니다.”
누군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렇습니다. 백만 년을 주기로 보았을 때 운석의 충돌확률의 거의 백퍼센트죠. 허나 인류의 과학문명은 그 위기조차 이겨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조금 더 길게 보도록 할까요? 지구의 역사를 10억 년 단위로 본다면 우리에게 가장 커다란 재앙은 무엇일까요?”
이번에는 쉽게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강당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가라앉았다.
“태양이 지구를 삼켜버립니다.”
내가 대답했다. 침을 꼴깍 삼키고 한 대답이었다.
“그렇습니다. 적색거성이 바로 우리를 위협하는 가장 커다란 재앙입니다. 태양은 꾸준히 커져왔습니다. 30억 년 전에 비하여 온도는 40퍼센트나 증가했죠. 빙하기와 혹성과는 달리... 안타깝지만 피할 방법이 없습니다.”
“우주 항해 탈출계획이 있지 않습니까!”
누군가가 침묵을 아니 두려움을 걷어내듯 말했다. 큰 소리로 외쳤지만 가는 떨림이 묻어 있었다.
“네. 분명 그렇습니다. 국가적인 인류애와 단체들. 그리고 범우주국 여러분의 노력으로 인류는 살아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할 안건은 그것이 아닙니다.”
소장은 또다시 침묵을 지켰다. 지혜로운 현자로써 범우주국을 이끌어온 그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는 몇 번의 숨고르기 끝에 말을 이었다.
“이미 모두 아실 테니…….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우리는 오늘 지구에 남을 연구원을 뽑아야 합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강당 전체에 수군거림으로 가득 찼다. 이미 범우주국 안에서는 쥐들조차 알고 있던 소문이었다. 전 세계 지도자들이 모여 토론한 결과 그들은 인류의 문화가 숨 쉬는 지구를 포기할 수 없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들의 요청에 의해 범우주국은 곧바로 연구에 착수했고, 그 결과 소행성을 끌어당기며 반대로 지구를 태양계 밖으로 이끌어내는 원대한 계획을 만들었다. 이 계획은 지극히 정상적이고 과학적이었으며, 또한 꽤나 안전했다. 고무줄을 튕기듯 소행성만 끌어당기면 만사 오케이였다. 하지만 완벽하다는 모든 계획들이 그렇듯 지구탈출계획에도 문제점이 있었다. 첫 번째는, 우주 항해 탈출 계획에 범우주국 사람  이 계획에 범 우주국 직원들이 없어서는 안 되었다. 즉 지구에 남길 수 있는 사람은 기껏해야 한명만이 가능했다. 두 번째 문제점은 단 시간에 지구의 공전반경을 늘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시간동결침대에 의해 냉동인간보다 안전하면서도, 신체의 시간이 멈춘 채 잠들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어느 정도 긴 시간이 아니었다. 적어도 10억년. 10억년 이상동안 지구를 홀로 관리해야 했다. 강당에서 지원자는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나와 내 친구들도 무거운 시선을 교차할 뿐이었다.
그날 밤 나는 우주관리국 소장을 찾아갔다. 30여분의 이야기 끝에 그는 내 의지를 들어주기로 결정했다. 다음날 모든 사람들 앞에서 공정한 제비뽑기가 이루어 졌고, 그 결과 화면에 뜬 것이 내 얼굴이었다. 친구들이 모두 경악에 질린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사실 난, 그리 다른 이들의 걱정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 당시 내 나이는 고작해야 24살에 불과했었다. 나는 젊음과 패기로 가득 차있었고, 젊은이의 무모한 열기에 잔뜩 도취되어 있었다. 내 머릿속에 있는 것이라곤 영웅이 되어 돌아가는 나의 모습과 황금으로 만들어진 내 동상 정도였다. 나는 반대나 저항의 의사를 한 번도 내비치지 않는다는 의미로 손을 들어올렸다.
인류 전체가 지구를 떠나기 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내 주관적인 감각이지만, 정말인지 세 번 정도 밖에 없었던 우리 집 이사보다도 빠르게 느껴졌다. 나는 엄마와 아빠를 그리고 형을 배웅한 뒤 친구들과 작별 인사를 나눴다. 누군가 골동품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가져왔고, 우리는 마지막 사진을 찍었다.

눈물이 눈가에 매쳤다. 10억년이었다. 나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름뿐인, 아니 그마저도 확실치 않은 명예와 사진들. 빛바랜 기억들. 그게 전부였다. 사진 속사람들은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 문자 그대로 세월의 먼지 속으로 사라졌다. 다시 잠들고 나면 6876452번째 후손도 사라질 것이었다. 바보, 멍청이, 미친놈.
나는 차마 남에게 담을 수 없는 말을 스스로에게 했다. 어리석었다. 너무 젊었고 너무나도 어리석었었다. 그러기에 지금 이곳에서 후회하고 있는 나밖에 누구도 남아있지 않았다. 심장이 두근댔다. 이빨을 부득부득 갈아도 성이 차지 않았다.
“관리자의 심박 수가 정상수치를 초과하였습니다. 이상 수치에 다다르.”
“닥쳐!”
손에 닿는 날카로운 물질을 있는 힘을 다해 휘둘렀다. 휘익 하는 소리가 귓가를 서늘하게 갈랐다.
“5단계 경고. 관리인 신체에 심각한 피해.”
메인컴퓨터가 떠들 때 마다 더욱 세게 손을 휘둘렀다. 오른손의 격렬한 운동과 함께 왼손의 구멍이 하나 둘 씩 늘어갔다. 갑자기 무언가 내 팔을 휘어잡았다. 돌아보니 기다란 나노봇 하나가 손을 붙잡고 있다.
“이거 놔!”
손을 강하게 흔들었다. 하지만 최첨단 소재로 만들어진 나노봇을 끊기엔 내 손의 근육들은 너무나도 약했다. 벽면에서부터 치료로봇들이 다가와 왼손에 달라붙었다. 피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그것들이 구더기 같아 소름끼쳤다. 그러나 왼손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피는 더욱 혐오스러워 보였다.
“이거 놔. 이거 놓으라고......”
흐느끼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왼손의 피가 멎어갈 수록 욱신거리는 고통이 더해왔다. 언제나 그렇듯 이성도 고통을 뒤따라 고개를 들었다. 나는 울었다. 어렸을 때조차 하지 않았던 커다란 울음, 속된 말로 기지 전체가 떠나갈 정도의 울음이었다.
“양파 키우기를 권고합니다.”
메인컴퓨터가 떠들었다. 양파를 키우라니, 이제 프로그램에게 까지 나를 무시하는가 싶었다.

“흙을 화분에 삼분에 일쯤 채워 넣습니다. 다음으로 백미리미터의 물을 붓습니다. 물이 스며들면 양파 모종을 심어.”
“잠깐 기다려. 너무 빨라. 천천히 다시 설명해.”
나노봇들이 건네주는 양파 모종을 받아들며 말했다. 양파 모종은 투명한 유리에 들어있었다. 막 시간 냉장고에서 꺼난 덕분인지 뿌리에 붙은 촉촉한 흙이 빛에 반짝였다. 갓난아이를 다루듯이 조심스럽게 유리뚜껑을 들어올렸다. 알싸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이게 무슨 냄새야?”
얼굴을 찡그리며 물었다.
“이황화프로필아릴과 황화아릴입니다.”
“친절도 하시지. 그래서 다음은 뭐야?”
내 혼잣말에도 일일이 대답해주는 컴퓨터를 비꼬며 물었다.
“양파의 껍질을 벗겨 삼분의 일정도가 덮이도록 흙에 심어줍니다.”
나는 조심스럽게 양파 모종을 들어올렸다. 사람 머리처럼 생긴 채소가 눈에 익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어디서 봤었지? 아버지와 시골을 내려갔을 때였나? 옛 기억이 언제나 그렇듯 연기처럼 흩어졌다. 손톱에 상하지 않게 조심하며 황토빛 껍질을 벗겨냈다. 바스락 거리는 양파 껍질의 촉감은 금속만 만지는 나에게 묘한 즐거움을 불러일으켰다. 얇은 껍질 한 겹을 떼어내자 그 안 또 다른 갈빛 껍질이 모습을 드러냈다. 세로줄 주름이 비 오듯이 새겨진 껍질이었다.
“이거 또 벗겨야 돼?”
“하얀색이 들어날 때 까지 벗겨주셔야 합니다.”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움직여 껍질을 한 겹 더 벗겨냈다. 한 겹, 두 겹, 세 겹... 껍질을 벗겨낼수록 주름의 수가 점점 늘어났다. 화장을 지을수록 나이 드는 멋대가리 없는 여자들이 떠올라 혼자 킥킥됐다. 그리고 또 한 겹. 나타났다! 다섯 번째로 갈빛 껍질 안쪽으로 뽀얗고 하얀 알맹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렇게 많은 주름 사이로 이런 하얀 속살이 있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감탄을 멈추고 양파를 흙속에 심었다. 뿌리가 다치지 않게 조심하며 마지막으로 흙을 쓰다듬듯이 두 번 두드렸다.
“됐다. 이제 끝난 거야?”
“아침 여덟시, 저녁 여덟시. 두 번에 나눠 이백 밀리리터씩 물을 주면 됩니다.”
컴퓨터의 말을 들으며 화분을 연구실의 인공조명 아래로 옮겼다. 타오르는 듯한 붉은색 화분 속 하얀 양파는,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잘 차려입은 숙녀 같았다. 시계를 확인해 보니 아직 2시 3분 이였다. 그제야 양파와 씨름으로 오전 시간을 모두 보낸 것을 깨달았다.
“내가 뭐 하고 있는 거람.”
컴퓨터의 말에 따라 막상 양파를 심었다만, 물론 그게 싫증을 불러일으키던 시간이 아니라는 것도 인정한다만, 양파를 키우는 것은 나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행동이었다. 홀로그램 사출기만 부셔지지 않았어도...... 한숨을 쉬며 한쪽 끝에 쓰러져있는 고철 덩어리를 바라보았다. 일곱 번째 후손의 등장에서 홀로그램은 또다시 자신의 모습을 잃었다. 일그러진 일곱 번째 후손의 얼굴도, 홀로그램 사출기를 부수는 주기가 짧아진 것도 내 기분에 좋은 영향을 끼칠 리가 만무했다. 그 어느 때보다 우울한 내 얼굴 때문인지, 아니면 그 잘난 관리자의 생명유지 보완 때문인지 컴퓨터가 말했다.
“양파 키우기를 권고합니다.”
그 후 시간이 흐른 뒤, 그러니까 내가 컴퓨터에게 앉아있던 의자마저 던져버리고 컴퓨터실을 서성이며 진정한 뒤 양파 키우기를 생각해 보았다. 지구가 목성의 궤도까지 공전주기를 늘리며 수면으로 도피는 선택할 수 없었다. 적어도 한 달 이상은 목성의 위치와 지구와의 충돌 가능성을 주의 깊게 살펴야 했다. 컴퓨터는 홀로그램 사출기가 살아나기까지는 열흘이 걸린 다는 통보를 했다. 그동안 뭐하면서 지내지?
“양파 키우기를 권고합니다.”
때 마쳐 컴퓨터의 음성이 메인 컴퓨터실에 울려 퍼졌다. 나는 한숨을 쉬며 설명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귀를 지나 뇌를 관통하는 알람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간만에 들었던 알람소리는 정겨움보단 짜증을 불러일으켰다.
“컴퓨터 수신편지 재생해.”
메인 컴퓨터실에 들어가기 무섭게 명령했다.
“불가능 합니다. 홀로그램 사출기는 현재 수리 중에 있습니다.”
아, 그랬지. 제길.
“관측정보를 확인하겠다. 끌어당길 소행성의 위치 및 질량 정보, 목성의 궤도, 그리고 목성과 충돌 가능성, 현재 태양의 반경을 표시해.”
컴퓨터는 눈 깜짝할 사이에 계산을 마치고는 3차원 디자인을 화면에 띄었다.
“L.C 2015년 5월 4일 오전 9시 현재 BC-305번 소행성과 1452번 소행성에 힘을 작용중입니다. 각각의 질랑은 102000kg과 309421kg. 현재 토성과 천왕성 사이에 위치합니다. 목성은 지구와 0.027 광년 떨어져 있습니다. 충돌확률 2.5퍼센트. 태양은 금성과 수성 가운데로 십오만 년 뒤 92퍼센트 확률로 금성을 삼킬 예정입니다.”
모든 게 정상적이었다. 데이터도 사전 계산과 그대로 일치했다. 갑작스러운 태양의 자기폭풍이라도 발생하지 않는 이상에야 지구의 탈출 계획이 성공하지 못하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나는 몇 가지 데이터를 자세히 살피고 재계산을 실시한 뒤 아침식사를 하기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양파 물주기를 권고합니다.”
“뭐?”
한동안 컴퓨터의 오작동에 인상을 찡그리다 잠들기 전 일이 떠올랐다. 그제야 느릿느릿 인공조명 아래로 발길을 돌렸다.
“어?”
감탄에 가까운 신음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천천히 손을 뻗어 양파의 꼭대기를 만졌다. 부드럽고 촉촉한 녹색 잎이 손가락을 간질거렸다.
“이건?”
“양파의 싹입니다. 새순이라고도 부르며 칼슘, 철분, 비타민 B1, 비타민 C, 알리신, 퀘르세틴 등을 함유하고 있습니다.”
“싹!”
벌써 싹이나? 이제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나는 양파의 싹에서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떼어냈다. 머리위로 솟은 싹은 조그만 뿔을 연상시켰다.
“양파 물주기를 권고합니다.”
“아, 그래. 물.”
양파에 고정된 눈을 떼며 움직였다. 주방에서 제일 깨끗한 유리컵을 집어 막 정수가 끝난 물을 한가득 떴다. 순간 컴퓨터의 말이 떠올랐다. 아침저녁으로 이백 밀리리터씩 주라고 했었지? 나는 눈대중으로 물을 몇 번 부어내고 다시 따르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몇 번을 시도해도 불안함이 가시질 않았다.
“제길.”
따라내던 손을 멈춘 체 비커를 꺼내들었다. 백 팔십, 백 구십, 백 구십 칠. 이백! 비커를 들고 재빨리 달려와 흙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손가락 사이에서 부스러지는 흙이 건조하게 느껴졌다. 입 안으로 욕지거리를 중얼거리며 급하게 오른손으로 부었다. 잘게 부셔진 흙들이 진한 색으로 엉켜들어갔다.
“이정도면 돼? 모자란 거 아냐?”
“양파는 아스파라거스목 백화과 식물로써 다습할 시 뿌리가 썩을 수 있습니다. 양파는 저온 다습한...”
“그래. 알았어. 알아들었으니까 그만 떠들어!”
신경질적으로 외친 뒤 양파로 눈을 돌렸다. 그 사이에 양파 싹이 손톱만큼이나 더 자라 있었다.

다급하게 메인 연구실로 뛰어갔다. 양파를 키운 지 보름 하고도 닷새가 더 지난 저녁이었다. 여느 때처럼 양파에 물을 주고 있었다. 정확히 이백 밀리미터를 화분에 붓고 있을 때 붉은 전조등이 기지 전체를 물들였다. 화분과는 달리 불길한 기운을 가득 띤 붉은 색이었다. 붉은 경고등은 기지 안의 10억년 동안의 시간 중 단 한번 밖에 기억이 없었다. 서른 번째 수면에서 깨어난 뒤 오후 주방에서 목을 걸었을 때 컴퓨터는 처음으로 붉은 경고등을 켰다. 목에 서늘한 한기가 스쳤다.
“무슨 일이야?”
메인컴퓨터 실에 들어가자마자 외쳤다. 컴퓨터 화면에 커다란 것이 비췄다.
“저건? 지금 당장 외부 상황을 비춰!”
머리 위 불투명한 천장이 서서히 투명하게 변해갔다. 노을이 가득한 저녁 하늘 위로 둥근 것이 떠있었다. 달이 아니었다. 달은 이미 10억 년 전 텅 빈 우주에 두고 온 뒤였다.
“젠장. 주피턴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핏빛 노을사이로 다가오는 목성이 번개를 몰고 다가오는 죽음의 신과 겹쳐보였다.
“지금 당장 연산에 들어간다. 목성과 부딪칠 가능성은?”
“현재 목성과 부딪칠 확률은 76퍼센트. 지금부터 168시간 후에 목성의 중력권에 속박됩니다.”
중력권에 속박되면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다.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으며 조급함을 없애려 했지만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현재 끌어드릴 수 있는 소행성의 목록을 보여줘.”
금세 컴퓨터 화면에 소행성의 이름과 질량 거리로 가득 찼다.
BC-2031 안 돼, 너무 질량이 작아. BC-241 거리가 너무 멀고. BC-34213 이건... 안 돼! 토성의 궤도에 가로막혀 있어!
“다음 목록으로 넘어가!”
다음 목록도 재빠르게 살펴보았다. 하지만 다음목록, 그 다음목록, 그리고 그 다음목록으로 넘어가도 가능한 데이터가 없었다. 이대로 끝이라고? 10억년 동안 끝이 고작 이거야? 입에서 희미한 신음소리가 새어나갔다. 꽉 쥔 주먹엔 손톱자국이 일었다.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난 거지!”
내 목소리가 풍랑을 만난 탓을 선원에게 돌리는 선장의 변명처럼 들렸다.
“소행성들의 질량이 예측한 값에서 5퍼센트 미만이었습니다. 또한 태양의 부피 증가로 인해 태양풍이 목성에 미치는 영향이 0.95의 오차범위 안에서 11퍼센트 증가했습니다.”
컴퓨터가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다시 한 번 천장 위를 바라보았다. 목성이 그 사이에 더 가까워 진 듯이 느껴졌다.
“좋아. 메인컴퓨터 지금부터 탈출 방법을 모색한다. 가능한 사항을 전부 나타내라.”
침을 꿀꺽 삼키며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고쳐진 홀로그램 사출기에서 3차원 영상과 함께 가능한 방법들을 보여주었다. 하나같이 보여주나 마나 하는 것들이었다. 그중 몇 가지를 동시에 사용한다 해도 탈출할 가능성이 채 10퍼센트에 이르지 못했다. 그때 컴퓨터 화면 아래로 조그만 창이 반짝거렸다. 마지막 남은 희망인가? 손가락을 뻗어 네모난 창을 클릭했다.
긴급탈출프로그램
“긴급탈출프로그램?”
앵무새처럼 따라하며 물었다.
“긴급탈출프로그램. 북아메리카에 위치한 초대형 우주선을 발진시킴으로써 지구의 탈출속력을 오차범위 0.7 안에서 3퍼센트 가량 높일 수 있습니다. 긴급탈출프로그램을 사용할 시 지구 자전 및 자전축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미치는 영향이 어느 정도 되지?”
“지구 자전축이 이동할 가능성은 12퍼센트, 지구 자전에 미칠 영향은 자전속도의 감소 확률 21퍼센트, 자전이 멈출 확률 0.96퍼센트입니다.”
12퍼센트에 21퍼센트, 0.96퍼센트라……. 자전속도의 감속은 분명 위험한 일이었다. 자칫하면 자전이 멈춤과 동시에 태양풍을 직격으로 맞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탈출이 우선이다.
“긴급탈출프로그램을 사용할 시 목성의 중력권을 탈출 할 가능성은 어느 정도지?”
“긴급탈출프로그램을 사용할 경우 목성의 중력권을 1000km 차이를 두고 스쳐 지나갈 확률이 97퍼센트입니다.”
“좋아. 메인컴퓨터 긴급탈출프로그램을 실행한다.”
심호흡을 한 뒤 말했다. 예상대로만 진행된다면, 3일 후 목성을 스친 뒤 탈출 할 수 있어. 목성을 스쳐지나간다…….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시간이 시시각각 흘렀다.

눈을 뜨자마자 시계를 살폈다. 22시 54분. 시침은 정확히 32초를 지나가고 있었다. 목성의 중력권에 가장 가까워지게 될 시간까지 채 삼십분도 남지 않았다. 이십 구분 이십 구초, 이십 구분 이십 팔초, 이십 구분 이십 칠초. 출발점에 서서 시작까지 삼십분이나 기다리는 마라톤 선수가 떠올랐다. 의자에서 일어나자 몸이 휘청거렸다. 머리가 깨질듯이 아파왔다. 잠자고 일어나니 목성을 지났으면, 설사 죽더라도 잠을 자다 죽었으면 하는 생각이 두통으로 돌아왔다.
“외부 상황을 보여줘.”
곧 천장이 유리 알갱이 보다 투명하게 변했다. 헬륨과 수소로 이루어진, 태양계에서 가장 거대한 행성의 영향으로 하늘은 그 어느 때보다 불안하게 떨렸다. 암흑으로 가득 찬 공간은 태초 지구의 모습을 연상케 했다. 아무것도, 심지어 다가오는 목성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연속적으로 몰아치는 번개만이 하늘을 가득 메웠다. 개 중 몇 발은 지상으로 제 몸을 내던졌는데 그럴 때마다 검은 화염이 치솟아 올랐다.
“지금 목성이 어느 정도 와있지?”
“현재 지구를 향해 접근중입니다. 14분 후에 목성의 중력권을 스치게 됩니다.”
컴퓨터의 건조한 목소리가 메인컴퓨터실에 울려 퍼졌다. 암흑덩어리의 하늘 사이로 목성의 대극점이 보이는 듯 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좋아. 지금부터는 목성의 상황과 그로 인한 지구의 영향을 시시각각 보고해.”
명령을 내린 뒤 메인컴퓨터실의 안전석에 몸을 고정했다. 안전띠의 압박이 불안한 안정감을 가져다 주었다. 컴퓨터 화면에 중력권까지 카운터다운이 떠올랐다. 앞으로 오 분 후였다. 번개의 번쩍임이 점점 간격을 줄였다. 이제는 눈이 부실정도로 많은 수의 번개가 지상에 충돌했다.
“컴퓨터 외부 상황을 닫아.”
천장의 번쩍임이 줄어들더니 이내 언제 나와 같은 하얀색으로 돌아갔다. 짜증만 불러일으키는 천장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지구의 진통은 점점 더 심해져갔다. 발밑이 떨림도 시작됐다. 이 단계. 지진이군. 컴퓨터 화면을 보니 이제 이분 사십 구초를 지나가고 있었다. 땅 아래 울림이 점점 심해졌다. 문뜩 어렸을 적 지진은 땅 속 지렁이들이 전쟁을 벌이기 때문이라고 믿었던 게 떠올랐다. 피식하고 웃어보려 했지만 얼굴 근육이 긴장해 움직이지 않았다. 이제 삼십 초, 이십 구초, 이십 팔초. 아, 잠깐 뭔가 잊은 게 있는 것 같은데? 이십 삼초, 이십 이초, 이십 일초. 뭐였지?  무언가 머릿속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들어갔다를 반복했다. 뇌가 화면의 카운터다운과 머릿속 기억을 왕복했다. 십이초, 십일초, 십초. 아! 그때였다. 커다란 번개가 기지에 맞은 듯 커다란 굉음이 울려 퍼졌다. 동시에 머릿속에 하얀 불빛이 번쩍였다.
“양파.”
입안에서 신음이 새어나왔다. 안 돼! 두 번째 말은 입안에 갇혀 맴돌았다. 나는 재빨리 안전띠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고합니다! 관리자는 지금 바로 안전석에 앉아주십시오!”
컴퓨터가 시끄럽게 떠들었다. 너는 떠들든지 말든지 나는 이대로 있을 수 없어! 10억년의 시간동안 처음으로 전력을 향해 뛰었다. 목적지는 연구실의 인공조명 아래였다.
걸음을 옮길 때 마다 몸이 휘청거렸다. 컴퓨터의 경고도 귀를 찢을 듯한 광음에 가려졌다. 아, 있어! 아직 양파가 무사했다! 빨간 화분에 담긴 양파는 탁자에서 떨어지기 일 보 직전이었다.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재빨리 다리를 놀렸다. 바로 그 순간 내 의지와 상관없이 몸이 엎어졌다. 지진은 세상을 무너트리려는 결심을 끝낸 듯 행동했다. 연구실 벽이 서서히 갈라졌다. 이를 악 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탁자위의 양파는 좀 전 보다 더욱 위태롭게 비틀거렸다. 한발, 한발만 더.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었다. 연구실 바닥 갈라진 틈 사이로 암흑이 혀를 날름거렸다. 하지만 양파도 바로 코앞이었다. 그때 두 번째 진동이 연구실을 강타했다. 동시에 양파가 탁자에서 떨어져 자유낙하를 시작했다.
“안 돼!”
재빨리 오른손을 뻗었다. 그러나 족쇄에 매인 개처럼 턱 하니 걸려 앞으로 나아가질 않았다. 뱀처럼 긴 나노봇이 내 오른손을 칭칭 감고 있었다.
“이거 놔!”
절규에 가까운 고함을 내질렀다.
“관리자의 생명유지는 최고 등급의 보안 사항입니다.”
컴퓨터가 말했다. 나노봇의 강한 힘이 내 몸을 연구실 밖으로 끌어당겼다. 필사적으로 버티며 아직 자유로운 왼손을 뻗었다. 양파의 초록 싹이 검지에 걸렸다. 잡았다! 나노봇이 내 몸을 끌어당김과 동시에 검지를 휘어 감았다. 그 순간 왼손에 번개 같은 통증이 관통했다. 왜? 생각과 동시에 왼손이 수그려 졌다. 아주 잠깐 힘이 빠졌을 뿐인데 검은 틈이 양파를 낼름 삼켜버렸다.
“안 돼!”
고통으로 가득 찬 비명이 연구실 안에 메아리 쳤다. 나노봇은 승기를 잡은 듯 내 몸을 잡아당겼고 순식간에 통로까지 끌려갔다.
“경고합니다. 관리자는 지금 바로 안전석에 앉아주십시오.”
나노봇이 스르륵 풀렸다. 나는 컴퓨터의 말에 따를 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은 고작해야 개폐된 연구실 문을 멍하니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시간이 지나자 진동이 간헐적으로 줄어들더니 이내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미세하게 변해갔다. 어느 샌가 번개의 굉음도 들리지 않았다.
“L.C 2015년 5월 20일 01시 39분 목성의 중력권 탈출했습니다. 현재 목성의 거리가 멀어지고 있습니다.”
컴퓨터가 떠들었다. 소리가 들어왔지만 의미는 들어오지 않았다. 몸이 차갑게 식어갔다. 얼마나 있었을까? 천천히 일어나 수면실로 들어갔다. 침대에 눕자 곧 수면가스가 나오기 시작했다. 칠흑 같은 잠이 순식간에 몰려왔다. 잠이 빠지기 직전 왼손을 보았다. 왼손에는 손바닥 전체를 관통한 여러 개의 상처가 하얗게 반짝였다.

“속도감속. 299,999km/h, 269,432km/h, 192,432km/h, 100,203km/h, 32,000km/h 3420km/h, 200km/h, 62km/h, 9km/h, 4km/h, 2km/h, 1km/h 정지. 공기농도 검사... 정상, 기압 밸브 검사... 정상, 멸균 가스 살포, 시간동결수면 해지.”
몸을 구부린 채로 빛을 최대한 차단했다. 하지만 날카로운 빛줄기가 눈꺼풀의 어둠을 찢었다.
“호흡수 검사... 정상, 심박 수 검사... 정상. 혈당치 검사... 정상. 세균 및 바이러스 항체 투입... 항체 생성 완료. 수면실 문을 개방하겠습니다. 관리자께서는 세 걸음 뒤로 물러나 주십시오.”
압축펌프의 기지개 소리와 함께 수면실의 문이 육중한 몸을 움직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메인컴퓨터실로 향했다. 메인컴퓨터실은,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었다. 화면에는 늘 떠있던 관측정보가 반짝이고 있었고, 한가운데 놓인 홀로그램 사출기도 그대로였다.
“수신 편지를 재생해.”
컴퓨터에게 명령했다. 내가 듣기에도 무미건조한 목소리였다.
“1순위 작업은 관측정보 확인입니다.”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L.C 12015년 6월 4일 수신편지 확인. 총 120,340건의 편지가 등록되어 있습니다. 편지를 재생하겠습니다.”
새로운 명령이 떨어지지 않자 홀로그램 사출기가 움직이는 조용한 소음이 컴퓨터실 안을 메워갔다. 몇 번의 빛이 깜박이더니 사출기는 커피색 짧은 스포츠머리를 가진 소년으로 변했다. 첫 번째 후손의 편지는 채 십분도 안 돼 끝이 났다. 두 번째 후손의 모습이 떠오르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열 번째, 스무 번째까지 순식간에 지나갔다. 내가 지금 이걸 왜 보고 있지? 머릿속에 멍청한 질문이 고개를 들었다. 아, 편지가 와서 보고 있지. 왜 편지가 왔을까? 더욱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 내가 지구에 남았기 때문이잖아. 너무나도 시시한 답이었다. 근데 왜 지구에 남았었지? 이번에는 쉽지 않았다. 수만 가지 생각이 떠올랐고, 그래서 아무런 생각도 남지 않았다.
“관리자는 점심식사 하기를 권고합니다.”
점심? 고개를 내려 배를 바라봤다. 그리고 보니 오십 여섯 번째 후손 애기 중에 꼬르륵 울림이 들렸던 것 같다. 후손의 배에서 나던 소리가 아니었나보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백 번째 후손의 편지를 재생하는 홀로그램 사출기를 나둔 채 주방으로 향했다.
나노봇이 차려주는 식사는 훌륭했다. 나는 컴퓨터 프로그램 중 최고급 요리사의 요리비법이 입력돼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내 혀는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어째 밥알을 씹어도, 반찬을 먹어도, 국을 마셔도 하나같이 유리조각을 씹는 맛이 들었다. 입속에서 바즈락 거리는 소음이 밥을 먹는 내내 멈출 생각을 않았다.
식사를 멈추고 정수기로 향했다. 얼음처럼 찬 정수가 유리잔의 투명한 면을 타고 흘러내려왔다. 한 모금 마시고 두 모금 째 들이켰을 때 정수기 옆 받침대에 이상한 컵이 보였다. 다른 유리잔과 마찬가지로 투명한 유리잔이었는데 어째 눈금이 그려져 있었다.
“백 팔십, 백 구십, 백 구십 칠. 이백.”
비커에 적힌 눈금을 나지막이 따라 읽었다. 안 돼. 이미 알고 있잖아. 속으로 혼자 중얼거렸다. 이미 답이 뻔히 정해진 문제였다. 10억년 동안 가족도, 친구도 모두 빛바랜 사진으로 변한 것과 같은 답이었다. 1만년의 시간은, 설사 갈라진 틈 사이에서 살아남았다고 해도 모래 먼지로 만들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가슴이 미어질 듯 조였다. 잊어. 두뇌가 명령을 내렸지만 몸은 따르지 않았다. 비커의 이백밀리미터 눈금에 자꾸만 촉촉한 무언가가 만져졌다. 손가락부터 이어진 전류신호는 결국 발가락 끝까지 전달되어 버렸다. 발걸음을 따라 가보니 어느새 연구실 앞이었다. 개폐된 문은 기지의 다른 문보다 조금 더 낡은 빛을 띠고 있었다.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말문을 트려고 했지만 누군가 잡은 듯 입술이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몇 번의 심호흡 끝에 간신히 명령했다.
“연구실 문을 열어.”
“연구실은 현재 외부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연구실은 폐쇄중이오니 접근은 불가능합니다.”
“연구실에 위험한 생물이 있어?”
“없습니다.”
컴퓨터가 대답했다.
“내가 항체를 가지지 못한 바이러스나 세균이 존재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컴퓨터가 두 번째로 대답했다.
“현재 지구 대기 조성이 내 생명에 심각한 위험을 끼쳐?”
“아닙니다.”
컴퓨터가 세 번째 대답을 마쳤다. 나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
“그럼 관리자의 권한으로 연구실 문을 열어. 명령이다.”
속삭이듯 하지만 분명하게 말했다.
“관리자의 명령에 따라 연구실문을 개방합니다. 관리자께서는 세 걸음 뒤로 물러나 주십시오.”
세 걸음 뒤로 물러남과 동시에 아랫배에 간질거리는 느낌이 가득 찼다. 발바닥에도 땀이 고이기 시작했다. 침을 몇 번 삼켰는데도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이대로 도망갈까? 뒤를 돌아야 할지 그 자리에 서 있을지 망설였다. 그러는 사이 오랜 세월의 한숨을 토해내며 연구실 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처음 순간 나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강렬한 빛이 내 눈꺼풀을 꿰뚫며 눈부신 어둠을 만들어냈다. 손가락과 손가락 사이로 거의 보이지 않는 연구실을 살피려 노력했다. 무언가 하얀 것이 아지랑이처럼 어른거렸다. 내 검은 눈동자가 연구실의 갈라진 벽 사이로 들어오는 태양빛에 적응했을 때 나는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하얀 꽃, 온통 하얀 꽃이야. 감탄조차 내지를 수 없었다. 내 감정을 대신 말하듯 연구실을 가득 채운 하얀 꽃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어디선가 봤었나? 어디선가 봤었어. 어디였지? 필사적으로 기억의 창고를 뒤졌다. 그때 알싸한 향기가 바람을 타고 전해졌다. 두툼한 손이 떠올랐다. 아버지가 어린 나에게 꽃의 줄기를 건네고 있었다. 달콤해. 먹어봐. 아버지가 말했다. 어린 내가 꽃대를 입에 가져갔다. 처음 보는 맛이 입안에 퍼지려는 순간, 나는 뛰었다. 연구실에서 돌아 수면실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수면침대에 누워도, 수면가스가 서서히 분사되는데도 벌렁거리는 가슴은 멈추지 않았다. 뜨거운 무언가가 자꾸만 차올라 심장이 터질듯이 쿵쾅거렸다.
서른일곱 번째 잠에서 깨어난 아침 처음으로 메인컴퓨터 실이 아닌 곳으로 걸어갔다. 연구실 안쪽은 하얀 물결로 넘실거렸다.
“이게 전부 양파... 맞지?”
양파 밭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물었다.
“학명 Allium cepa L. 혹은 양파라 불리는 식물입니다. 아스파라거스목 백화과 식물로써 두해살이풀로 흰색 또는 연한 자주색의 꽃이 산형(繖形) 꽃차례로 피고 땅속의 비늘줄기는 매운 맛과 특이한 향기가...”
통로에서부터 들려오는 컴퓨터의 음성을 들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바람이 휘파람 소리를 내며 귓가를 갈랐다. 갈라진 틈 사이를 요리 조리 뛰어다니며 양파꽃밭 한가운데로 들어갔다. 걸음을 옮길 때 마다 양파 꽃술이 간지럽게 느껴졌다. 어떻게 된 거야? 다리를 긁적이며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무려 만년이었다. 내 친구들이 떠나간 시간 이였으며, 가족들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는 시간이었다. 구천 명이 넘는 후손들이 내 곁을 떠난 시간이기도 했다.
아무렴 어떠냐. 양 발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그대로 힘을 뺐다. 온몸이 기우뚱 하더니 털썩 소리와 함께 흙먼지와 꽃가루가 코 속으로 파고들었다.
“에, 에, 에취.”
연구실 전체에 재채기 소리가 왕왕 울렸다. 또 한 차례 꽃가루의 폭풍이 몰아쳤다. 한동안 재채기와 콧물을 동반한 수난을 격은 뒤, 다시 말해 꽃가루 폭풍이 어느 정도 가라앉은 뒤 양파 밭 한가운데에서 대자로 누웠다. 쌉싸래한 향기가 콧속을 시원하게 뚫어주었다. 양파꽃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꽃대가 제법 굵고 긴 것이 내 팔뚝만한 것도 있었다. 침을 삼키며 양파대를 살며시 움켜졌다. 가만, 이거 이대로 뽑아도 돼는 건가?
“이거 다 자란거야? 꽃이 질 때 까지 기다려야 해?”
“양파의 수확기를 판단할 때는 보통 잎의 도복 정도를 보고 판단합니다. 대게 양파는 잎이 65퍼센트 가량 도복했을 때가 가장 적절한 수확기입니다. 현재 가장 적절한 수확기로 판단됩니다. 수확하시겠습니까?”
연구실 밖 통로에서 기어 나온 나노봇을 통해 메인컴퓨터의 음성이 들려왔다.
“응, 수확할래. 근데 나노봇을 이용하지 않고 직접 하겠어.”
말을 마침과 동시에 양손에 힘을 주어 잡아당겼다. 양파 줄기가 생각보다 억셌다. 기합을 세 번이나 주고 나서야 커다란 소리를 내며 양파가 땅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땅속에서 막 수확된 양파는 아직 촉촉한 수분에 젖어 있었다. 크다! 양파는 생각보다 컸다. 심지어 머리통만 했다! 신이 나서 바로 옆 양파 줄기도 휘어잡았다. 두 개, 세 개, 다섯 개, 열 개, 스무 개. 계속해서 뽑아도 질리지가 않았다. 오전 내내, 그러니까 양팔을 두드리며 주저앉음과 동시에 “양파 건조시키기를 권고합니다.” 라는 컴퓨터의 음성을 들을 때 까지 양파 뽑기를 멈추지 않았다.

“데이터 오차를 수정해주십시오.”
한참 퇴비를 주고 있을 때 메인컴퓨터의 음성이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양파밭 어귀에 기다란 나노봇이 있었다.
“무슨 일이야?”
“관측 데이터 및 프로그램에 미세한 오차가 발생하였습니다. 관리자께 오차 수정을 요구합니다.”
“오차?”
장갑을 벗어들며 바짓단에 묻은 흙을 털어냈다. 관측 데이터라... 그리고 보니 최근에 본적이 없었지. 언제까지 봤었더라? 한 달 전쯤이었나?
양파밭을 재배하기 시작한 한 달 전 모습이 눈에 선했다. 거름을 준답시고 양파밭에 시원하게 오줌을 갈기기도 했었다. 혼자 킥킥 웃으며 나노봇을 따라 메인컴퓨터실로 향했다.
“오차부분에 대한 데이터를 보여줘.”
“오차 부분에 대한 정보를 출력합니다. L.C 12015년 7월 21일 9시를 기점으로 태양의 질량 및 부피증가속도가 입력 값보다 0.5퍼센트 차이가 발생합니다.”
“뭐?”
화면에 태양의 질량과 부피 증가 속도 측정값을 살펴보았다. 처음 계획보다 0.5퍼센트 이상 차이가난 값이었다. 잠깐만, 0.5퍼센트?
“지금 당장 새로운 연산을 시작해. 태양의 질량과 부피증가 속도를 0.5퍼센트 증가 시켜서 지구에 미치는 중력을 다시 계산한다.”
컴퓨터가 새로운 연산을 시행했다. 책상을 두드리는 손톱소리가 메인컴퓨터실 안으로 초조하게 메아리 쳤다.
“연산완료. 지구의 탈출속도 약 40퍼센트 감소. 태양의 복사에너지 전달율 20퍼센트 증가. 45일 뒤 태양의 자기폭풍 영향권 안에 들어갈 확률 97퍼센트.”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신음 소리를 멈출 수 없었다.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자기폭풍 안에 들어간다면 지구의 모든 컴퓨터가 남아 날 수 없었다. 그렇게 된다면……. 소행성을 끌어당길 수 있는 힘을 공급하는 핵융합발전소도 작동을 멈출게 틀림없었다.  
“태양의 영향권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컴퓨터가 명령에 맞춰 연산을 시작했다.
“불가능 합니다. 현재 예정된 소행성들로는 태양의 영향권을 벗어 날 수 없습니다.”
컴퓨터는 절망적인 최후의 통첩을 발부했다.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이런 결말은 용납할 수 없어. 아니 이대로 끝낼 수 없어! 목성조차 벗어났었는데. 잠깐만……. 목성?
“아! 그래. 목성! 컴퓨터 긴급탈출프로그램의 초대형 우주선을 만드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지? 지구의 모든 시스템을 그곳에 집중 한다면!”
“99퍼센트 확률로 40일 후에 완성됩니다.”
좋아! 됐어. 아직 가능성이 남아있었다. 바로 옆을 스치고 지난 목성조차 피해낸 방법이었다. 아직 멀리 떨어진 태양정도라면.
“긴급탈출프로그램 사용은 불가능합니다.”
“뭐? 왜? 목성에서는 사용 가능했잖아!”
갑작스러운 컴퓨터의 음성에 재빨리 되물었다. 메인컴퓨터는 태양계의 3차원 도형을 화면에 띄우며 말을 이었다.
“한 방향으로 우주선을 사출시켰던 목성 때와는 달리 태양의 영향권을 피하기 위해선 상황에 따라 연속적인 새로운 정보를 넣어 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현재 지구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컴퓨터는 중간권을 지나게 될 때 태양의 자기폭풍을 견뎌낼 수 없습니다.”
“가능한 컴퓨터가 단 한 대도 없어?”
절망에 가득 찬 목소리로 물었다.
“현재, 태양의 자기폭풍을 견디며 고도의 연산을 작동시킬 수 있는 컴퓨터는 지구에 단 한 대가 존재합니다.”
그제서야 나는 컴퓨터의 불가능하다는 표현을 이해했다. 가능한 단 한 대 다시 말해 가장 성능이 뛰어난 컴퓨터는 지금 내 앞에 있는 메인컴퓨터였다. 그러나 지구의 태양계 탈출 계획의 연산을 해내는 것 또한 내 앞의 메인컴퓨터였다. 지금 메인컴퓨터를 보낸다면, 결국 모든 프로그램이 멈추고 태양에 삼키게 될 것이었다. 조금 더 오래 사느냐 마느냐. 그게 내가 택할 수 있는 전부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메인컴퓨터실을 빠져나왔다. 연구실에 가보니 어느덧 해가 지고 검은 밤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깜깜한 밤 아래 양파꽃이 그 어느 때보다 새하얗게 반짝였다. 양파밭 한가운데 몸을 누였다. 밤하늘에는 수많은 별들이 각자의 빛을 내뿜고 있었다. 등 뒤에 촉촉한 물기가 서렸다. 90억년의 시간동안 태양은 그 어느 때보다 지구에 가까이 와있었는데 흙에서는 서늘한 한기가 올라왔다. 흙 한줌을 손에 쥐고 혀끝에 올렸다. 다를 것 없는 흙 맛이었다. 다를 것 없는 흙 맛? 나는 내가 이 맛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랐다. 언제였더라? 가장 큰 덩어리를 혀끝으로 굴렸다. 머릿속에서 어렴풋이 낡은 집 한 채가 떠올랐다. 한 번 더 덩어리를 굴렸다. 이번에는 옆에 있는 사람들의 손이 떠올랐다. 세 번째로 흙덩이를 입에서 굴렸다. 달콤해. 먹어봐. 아버지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들려왔다. 그 날의 향기가 코끝으로 들어왔다. 쌉싸래한 향. 콧속이 시원해지는 향기. 어린 내가 양파 줄기를 받아들었다. 너 그거 엄청 매워. 아마 못 먹을걸? 형이 한쪽 끝에서 겁을 주며 놀리고 있었다. 동생 좀 그만 놀려! 괜찮아. 형이 장난치는 거야. 엄마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응원의 눈길을 보냈다. 달콤해. 아빠가 약속할게. 가족들의 응원을 받으며 양파꽃 줄기를 입술에 갔다댔다. 달콤하고 쌉싸름한 향이 혀를 부드럽게 아렸다. 나는 양파줄기를 열심히 씹었다. 우적우적 씻는 소리가 연구실 틈을 통해 검은 밖까지 퍼져나갔다. 달콤했다. 사탕보다, 엔돌핀보다, 아니 지금까지 먹어본 무엇보다도 달콤했다. 연구실 천장에 뚫린 커다란 구멍을 통해 밖을 보았다. 양파뿐만이 아니었다. 그곳엔 수십 가지 나무에서는 수많은 모양의 꽃과 열매들이 달려 있었다. 이름 모를 곤충들과 동물들이 열매와 꽃 사이를 바쁘게 다녔다. 가장 커다란 나무에서는 이름 모를 새 한 마리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컴퓨터 지금부터 모든 프로그램을 초대형 우주선 제작에 돌려. 그리고 지금부터 40일간 관리자 방에 출입을 금지한다.”
“네. 알겠습니다.”
컴퓨터의 부드러운 음성이 동의의 뜻을 알렸다. 나는 관리자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할 수 있을까? 해야만 한다? 아니, 할 수 있다!

“초대형 우주선의 제작이 완료되었습니다.”
그날로부터 정확히 40번째 태양이 떠올랐을 때 컴퓨터의 음성이 관리자 개인실 문을 통해 들려왔다.
“그래. 알았어. 대기해.”
손바닥으로 조명 빛을 가리며 대답했다. 아직 조금 더 자고 싶었다. 눈이 찌릿찌릿 저려왔고, 입에서는 연신 하품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가슴속 뿌듯함은 육체의 고통 따위는 나 몰라라 했다. 손바닥 위에 종에는 40일 동안 밤샘의 결과가 들려 있었다. 열 번째 잠에서 깨어난 뒤부터 용납할 수 없는 가장 커다란 문제는 사실 간단한 것이라는 생각에 스스로가 대견스러웠다.
“아침부터 먹을게.”
주방으로 가며 말했다. 연신 새어나오는 하품에 아침밥 보다 좋은 게 있을까? 어릴 적 밥 먹으면 잠깬다는 말은 엄마의 레퍼토리 중 하나였다.
“초대형 우주선 제작이 완료되었습니다. 지금 메인컴퓨터를 우주선에 탑재시키시겠습니까?”
컴퓨터도 스스로 자살할 수 있을까? 목매단 컴퓨터라니... 궁금증과 함께 입가에서 웃음이 새어나왔다.
“이봐. 천천히 하자고. 아침은 먹고 해야지. 모든 일이든 밥심으로 시작하는 거야. 너도 잘 알고 있으라고.”
컴퓨터에게 훈계조로 말하며 마지막 숟가락을 내렸다. 따뜻하게 불러오는 배와 함께 머릿속이 점점 또렷해졌다. 메인컴퓨터실 화면으로 완성된 우주선이 보였다.
“지금 메인컴퓨터를 우주선에 탑재시키겠습니까?”
메인컴퓨터가 앵무새처럼 말을 반복했다.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컴퓨터 지금부터 최고 등급사항에 접속한다. 관리자 생명유지에 접속해.”
“관리자의 생명유지는 최고 등급의 보안 사항입니다. 보완 사항을 바꾸기 위해서 패스워드가 필요합니다.”
열 개의 빈칸,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
“패스워드를 입력한다. 구, 공, 공, 공, 공, 공, 공, 공, 공, 공”
열 개의 숫자를 또박또박 불렀다. 제발 맞아라. 이것조차 맞추지 못하면 그땐 정말 빌어먹을 머리야!
“패스워드가 입력되었습니다. 관리자 생명유지 보완을 해체하시겠습니까?”
맞았다!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긴장이 풀리자 40일 동안에 피로가 한순간에 몸을 덮쳐왔다. 휘청거리는 몸이 바닥에 몸을 눕히려는 순간 간신히 오른손으로 의자를 붙잡았다.
“해체해.”
“관리자 생명유지 보완을 해체하였습니다.”
컴퓨터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마음속에 흐뭇한 감정의 파동을 일으켰다. 이제 엔돌핀이건, 아드레날린이건 내 맘대로 피울 수 있었다! 이번 기회에 코카인이나 한 대 피워볼까? 하지만 똑딱거리는 시계는 시시각각 촉박함을 경고해 왔다. 할 수 없지. 뭐, 다음 기회로 미루자고.
“지금부터 새로운 프로그램을 입력하겠다. 학습과 감정에 대해 저장된 모듈을 불러들여.”
시계에서 눈을 떼며 말했다. 이젠 정말 시간이 없었다. 나는 마지막 작업들을 서둘렀다.

“감정에 대한 모든 데이터와 학습능력에 대한 프로그램도 설치했어. 감사하라고, 내 회심의 역작이니까. 안드로이드 몸체를 만드는 것은 자체 프로그램에 있지? 그 정도는 스스로 하도록 해.”
초대형 우주선에서 마지막 전달 사항들을 메인컴퓨터에게 수신했다. 대답이 없었다. 감정과 학습능력을 습득한 1시간 전부터 컴퓨터는 이상할 정도로 말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컴퓨터의 대답을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우주선 발사 궤도에 대한 정보를 다시 한 번 머릿속으로 계산했다.
“이해 할 수 없습니다.”
새로운 프로그램을 입력한 컴퓨터의 첫 마디였다.
“뭐가?”
“당신이 지구에 남은 이유는 훗날 지구를 구하고 다른 인간들에게 영웅으로서 돌아가려는 것 때문이 아니었습니까?”
윽, 너무나도 솔직한 물음이었다. 하긴 아직 돌려 말하기를 학습했을만한 시간은 주어지지 못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당신은 스스로 죽으러 떠나려 합니다. 이러실 거였다면 처음부터 왜 지구에 머문 것입니까?”
컴퓨터가 물었다. 언젠가부터 스스로에게 가장 많이 했던 질문을 이번엔 컴퓨터가 했다. 난 왜 지구에 남았을까?
“글쎄? 미안하지만 모르겠어.”
내가 대답했다. 그때 우주선 화면에 출발 시간이 카운터 되기 시작했다. 나는 장갑을 끼고 조종간에 손을 고정했다. 이제 마지막이다. 할 수 있을까? 아랫배가 울렁거리면서 동시에 간지러운 이상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마치 고양이가 뱃속에서 손톱으로 위장을 긁는 기분이었다. 언젠가 이런 기분이었을 때가 있는데? 기억났다. 초등학교 축구대회 마지막 승부차기였지. 야, 못 넣으면 죽어! 형이 소리쳤다. 파이팅! 엄마도 목청껏 소리 질렀다. 그때의 기억과 함께 묘한 흥분감이 몸 구석구석, 손가락 근육에 까지 차올랐다. 십, 구, 카운터 다운이 시작됐다. 아, 잠깐. 그리고 보니 그때 내가 꼴을 넣었었나? 사 ㅁ, 이, 일. 엄청난 진동과 함께 초대형 우주선이 발진을 시작했다. 있는 힘껏 조종간을 잡아당겼다.

“관리자께 응답을 요청합니다. 관리자!”
“조용이……. 해. 머리 울리잖아.”
머리를 부여잡으며 정신을 차렸다. 아직 눈을 뜨기는 힘들었다.
“현재 지구 탈출속도는 어때? 계획대로 탈출이 가능한가?”
“긴급탈출프로그램으로 지구의 탈출 속도가 3퍼센트 가량 증가했습니다. 99퍼센트 확률로 태양의 영향력을 빠져나갈 것으로 보입니다.”
온몸에 힘이 풀렸다. 지구를 통과하면서 받은 압력의 잔재가 몸 이곳저곳을 짓눌렀다. 나는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지끈거리는 머리와 다르게 다행히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보였다.
“화면을 외부로 돌려줘.”
우주선 화면이 검은 우주로 가득 찼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지구가 있었다.
“아!”
입에서 절로 감탄이 나왔다. 초록빛 지구가 눈동자를 가득 메웠다.
“이것 때문이었나......”
나는 나 자신에게도 들리지 않을 만큼 속삭였다.
“이해 할 수 없습니다.”
컴퓨터가 아까의 질문을 계속했다.
“그럼 고민하면 돼.”
“이러실 거였다면 처음부터 왜 지구에 머문 것입니까?”
컴퓨터는 아까의 질문을 반복했다. 멋대가리 없는 놈. 이러다가 융통성 없는 놈이 될까 심하게 걱정이 들었다.
말해줄까? 그러나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태양풍으로 인해 컴퓨터와의 접속이 끊겼다. 떼려던 입을 도로 다물었다. 이러다가 매트릭스 꼴이라도 나면 어떡하지? 이미 수십억 년 전 제작된, 그렇지만 수십 번은 리메이크를 거친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하지만 나는 곧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어. 저 녀석 그래 뵈도 양파 키우기는 나보다 고수인걸. 등 뒤가 점점 뜨겁게 달아올랐다. 눈도 조금씩 따가워 졌고 눈물도 맺혀왔다. 그러나 눈을 감지 않았다. 나는 오랫동안, 아주 오랫동안 지구를 봤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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