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불온한 병

2009.11.17 20:1011.17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교회에 다녔던 수경은 아홉 살 때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후 더욱 신앙심이 깊어졌는데, 그녀가 섬기는 김형도 목사는 신도 수 오십 명에 불과한 교회를 언젠가 대한민국 랭킹 십 위 안에 들게 하겠다고 공언하는 야심가였다. 그는 정치적 소신도 무척 뚜렷한 사람으로, 성경말씀을 종종 인용하여 자신의 정파를 드러내곤 했는데, 가장 즐겨 인용한 구절은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오른편의 양과 왼편의 염소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는 성경에서 오른편은 하나님의 편, 능력의 편이고 왼편은 하나님의 반대편, 버림받은 편을 의미하니, 우파는 복 받을 자들이며 천국을 상속할 사람들이고 좌파는 저주받은 자들이며 영원한 불에 들어갈 자들이라고 설교했다.

김형도 목사의 설교 덕분에 수경은 방향에 대한 강박증이 생겼는데, 물건을 건네거나 집을 때는 반드시 오른손을 썼으며, 잘 모르는 길에서는 항상 우회전을 했고, 버스에서도 오른쪽 좌석만을 노렸고, 아무리 잘생긴 야구선수라도 우완투수,우타자가 아니면 쳐다보지도 않았다.

-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마태복음 25:31)

-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마태복음 25:34)

-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마태복음 25:41)

전교생이 숨을 죽이고 그 분을 기다렸다. 생활지도부장이 박달나무를 깎아 만든 지휘봉으로 측량사처럼 날카롭게 열을 맞추고 있었다. 그의 아랫배는 인심 좋게 불룩 나왔으나 눈빛은 야멸치게 차가웠다. 그가 지휘봉을 까딱까딱 움직이면 들쑥날쑥한 계집애들이 비척비척 걸음을 옮겨 줄을 맞췄다. 행사장에서 수다를 꾹 참고 있는 여중생들은 위험천만한 수류탄과도 같았다. 행사가 끝날 때까지 꽉 쥐고 있지 않으면 시끄럽게 폭발할 것이다.

“오셨습니다!”

일당 사만 육천 원을 받는 행정보조원이 강당 입구로 뛰어 들어와 보고했다. 전령병처럼 자못 비장한 표정이었다. 생활지도부장은 자신이 자리를 비워도 꼼짝 말고 있으라는 뜻으로 학생들을 두루두루 노려보고 허둥지둥 뛰어나갔다. 그는 자신의 임무 때문에 다른 교사들보다 줄 뒤쪽에서 그분을 영접해야 하는 것이 항상 불만이었다.

검은색 체어맨 승용차가 물웅덩이를 밟는 바람에 차문 손잡이를 잡기 위해 달려들던 교감은 흙탕물을 뒤집어쓰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차문을 열어주며 벙글벙글 웃었다. 그 분을 위해서라면 이깟 바지쯤이야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차에서 내리는 중년남자는 조심조심 마른땅을 디디며 교감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걸 어쩌시나. 우리 박기사 때문에 바지를 다 버리셨네.”
“아이구 아닙니다! 이사장님 조심하십쇼. 운동장 상태가 말이 아닙니다.”

교감은 이사장이 하사한 악수를 받으며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그 때 교감에게 차문 손잡이를 빼앗긴 것이 무척 분한 듯 교장이 그를 밀쳐내며 이사장의 악수를 가로챘다. 이사장은 자신보다 십 수 년 연장자인 교장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고 평교사들에게도 자신의 손을 나누어주기 시작했다. 이삼초 가량의 손바닥 스킨십만으로 황공함과 행복감이 전염병처럼 번졌다.

박은구 이사장님의 취임 6주년을 축하드립니다.

강당 정면에는 커다란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연단 뒤에는 커다란 원목의자가 가운데 놓여 있고 양 옆으로 철제 간이의자가 줄지어 놓여 있다. 이사장이 원목의자에 엉덩이를 내려놓자 교장과 평교사들이 철제 간이의자에 앉았다. 천오백 명의 여학생들은 이들이 의자에 앉는 동안 숨소리를 죽이고 서 있었다. 강당 벽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카랑카랑한 교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에 그럼 지금부터, 봉호여자중학교의 발전을 위해 애쓰시는 박은구 이사장님의 취임 6주년 기념행사를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국민의례가 있겠습니다. 모두 국기를 향해 주십시오.”

국기에 대한 맹세문을 낭독하는 익숙한 성우의 목소리가 강당 안에 울려 퍼졌다. 맹세문이 끝나자 학생들은 사회자의 구령에 따라 가슴에 올렸던 손을 내리고, 연단에 올라선 교장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 차려 자세로 교장의 축사를 기다렸다. 교장은 축사를 읽기 전에 뒤로 돌아 이사장에게 절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사장은 후덕한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한 번 끄덕여주었다.  

교장이 읽은 축사의 요지는, 봉호학원 재단이 우리나라 교육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는 것과, 박은구 이사장이 취임한 이후에 봉호여자중학교가 해를 거듭할수록 명문학교로 탈바꿈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교장은 전임 이사장인 송금자 여사의 업적과 품성을 미화하는 것도 잊지 않았는데, 이는 송 여사가 이사장의 친모이자 현재도 이사회의 일원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의를 기울여 축사를 듣는 이가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전임 이사장과 현 이사장을 균형 있게 배려한 교장의 노력은 그다지 의미가 없었다.

연단에서 내려온 교장이 정중하게 이사장에게 절을 하고 자리로 돌아가자, 교감은 목소리를 가다듬어 다음 순서를 발표했다.  

“에, 다음은, 3학년 1반 오윤희 학생이 이사장님께 축하의 꽃다발을 전달하겠습니다. 오윤희 학생은 단상으로 올라와 주십시오.”

두꺼운 뿔테 안경을 쓴 여학생이 긴장된 얼굴로 꽃다발을 배달하는 동안 교감은 그녀가 다섯 학기 동안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은 모범학생이라고 부연설명을 했다. 이사장은 꽃다발을 건네받은 뒤 대견하다는 듯이 수재 화동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교감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기라도 한 것처럼 마이크에 대고 ‘감사합니다 이사장님’이라고 말했다.  

“에, 다음은, 학생회 부회장인 임수경 학생이 이사장님께 전하는 감사의 말씀이 있겠습니다. 임수경 학생은 연단에 서 주십시오.”

원고를 똘똘 말아 쥐고 이사장에게 인사를 올리는 학생은 얼굴이 하얗고 작고 붉은 입술을 가진 미소녀였다. 이사장은 흡족한 웃음을 지으며 자기도 모르게 입맛을 쩝쩝 다셨다. 교감은 이미 부회장이 써온 초고를 읽어보았고, 이사장에 대한 감사의 표시가 미흡한 점을 지적하여 상당한 분량을 첨삭지도 했으며, 연설내용에 아무런 하자 없음을 교장에게 보고한 상태였다. 눈치 빠르고 달변인 학생회장이 해주면 더욱 안심이겠지만, 아쉽게도 필리핀에서 어학연수 중이었다.

부회장이 연단에 올라선 뒤 잔뜩 경직된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교사들은 혹 실수라도 하지 않을까 숨을 죽였다. 하지만 조금 뒤 바람직하고 진부한 구절이 들려오자 이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학생회 부회장 임수경입니다. 먼저 봉호여자중학교 전교생을 대표하여 이사장님께 감사드립니다. 이사장님께서는 봉호학원재단 이사장으로 취임하신 후 봉호여자중학교를 경기도의 명문여중으로 만드셨습니다. 이사장님께서 취임하신 후 외국어고등학교에 열다섯 명, 과학고등학교에 두 명, 민족사관고등학교에 여섯 명이 진학하였습니다. 봉호여자중학교에 다니는 것을 자랑스럽게 만들어주신 이사장님께 감사드립니다. 이사장님께서는 창의와 실력이라는 건학이념을 되살려 공부 잘하는 학교, 실력 있는 학교, 학생의 미래가 밝은 학교를 만들어주셨습니다. 저희 봉호여중 전교생은 이사장님의 가르침을 가슴 속에 깊이 새겨 열심히 공부하고 부모님께 효도하며 예쁘고 훌륭하게 자라나겠습니다.”

사고가 난 것은 부회장의 연설이 중반에 접어들었을 때였다. 교감의 첨삭지도를 충실히 따른 내용이 전개되어 오다가, 급반전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녀는 전체 학생을 대표하여 재단과 학교 측에 몇 가지 건의할 것이 있다면서, 불법 찬조금을 없애달라고 했다. 봉호여중에는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도 많이 있는데, 간식비나 교재비를 걷어서 교사들 회식비로 쓰면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또한 반찬이 맛없고 냄새가 나서 밥을 먹지 못하는 친구들이 많으니 급식업체를 바꿔달라고 했다. 그녀는  이사장의 외숙이 운영하는 성덕식품은 이사장이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옛날에 망했을 거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축사의 내용이 의례적이지 않고 조금 참신하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이 알아차리기까지 조금 시간이 걸렸다. 다들 각자 딴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열 뒤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다들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고 느꼈을 때 부회장은 마무리를 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학생회가 학교운영에 참여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지금의 학생회는 이름뿐인 기구입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아무 것도 결정할 수 없는 학생회가 어떻게 학생들의 대표기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봉호여자중학교는 이사님과 이사님 가족들의 것이 아닙니다. 학교를 학생들에게 돌려주세요. 부탁드립니다.”

부회장은 이미 축사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간 뒤였기 때문에, 박달나무 지휘봉을 들고 그녀를 응징하려던 생활지도부장은 머쓱해져서 물러섰다. 교사들은 쭈뼛쭈뼛 주위의 눈치만 보며 어쩔 줄 몰라 했고 교감은 입을 벌린 채 멍하니 부회장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이사장은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했고 교장은 교감에게 빨리 진행하라고 손짓을 했다. 앞쪽에 있는 학생들은 교사들의 눈치를 보느라 입을 꼭 다물고 서 있었지만 뒤쪽에서는 킥킥대는 웃음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최혜원 선생과 수경은 학생회 지도교사와 학생회 간부로 처음 만났다. 최 선생은 서른을 살짝 넘긴 나이였지만 교생처럼 미숙하고 앳된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학생들이 조금 건드려주면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외모와는 달리 똑 부러지는 성격에 언변이 뛰어났고 단숨에 기선을 제압하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그녀가 지도교사 된 뒤로 항상 나른하고 지루하기만 했던 학생회는 갑자기 활기가 넘치기 시작했다. 정례적으로 모여 교감이 정해준 ‘정숙한 자율학습을 위한 방안 마련’이나 ‘환경미화 아이디어’같은 시시한 안건을 토의하던 아이들은 ‘야간 자율학습 강제참여가 학습능력 증진에 도움이 되는가’, ‘체벌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와 같은 흥미진진한 주제를 놓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 최혜원 선생은 학생들의 토론에 끼어들어서 자신의 주관적인 판단을 말하지 않았다. 대신 입을 다물고 있는 사람이 토론에 참여하도록 부추기거나 토론이 진전되지 않고 맴돌기만 할 때 새로운 의견을 제시하며 길을 터주었다. 그녀는 무엇이 옳은 것인지 묻는 학생들에게는 이런 말을 해주었다.

“스스로 생각해보렴. 계속 생각하고 서로 이야기를 하는 거야. 그러다보면 누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있게 되지. 잘못 아는 것은 심각한 일이 아니야. 진짜로 심각한 일은 스스로 생각할 수 없게 되는 거야.”

비상 교무회의가 시작되자마자 포문을 연 사람은 생활지도부장이었다. 그는 감히 이사장님 취임 기념식장에서 망발을 지껄여 학내 질서를 어지럽힌 수경을 마땅히 퇴학 조치해야 하며, 빠른 시일 내에 징계위원회를 열자고 주장했다. 수경의 담임교사는 관대한 처벌을 요구했다가 교장에게 욕을 먹었고, 교감은 이 게 다 평소에 학생지도를 소홀히 한 담임교사의 책임이라고 몰아붙였다. 소심하기로 소문난 수학교사 박 씨는 ‘이사장님은 뭐라고 하시든가요’라고 물었고 교장은 ‘별 말씀 안 하셨지만 점심 약속을 취소하셨다’며 풀이 죽어서 대답했다. 교장의 눈자위가 붉어지는 것이 금방 울 것 같았다.

교장의 대답에 분기탱천한 생활지도부장이 다시 일어나 최근에 해이해진 학생들의 기강과 자유방임형 교육방식을 성토하고, 나이 많은 교사들이 생활지도부장의 격한 주장에 간간이 지원 사격을 하면서 수경의 퇴학은 점점 당연한 결정으로 굳어지고 있었다. 그때 수경의 퇴학 결정에 제동을 건 사람이 진학지도부장이었다. 생활지도부장에 못지않은 카리스마와 교장에 뒤지지 않는 처세술을 겸비한 그는 이사장에게도 큰 신임을 받고 있는 인물이었다.

“퇴학을 시키는 것은 그다지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습니다. 지금이 어떤  세상입니까? 버릇없는 애들이 영웅 되는 세상입니다. 예전에 미션스쿨에서 예배 안 하겠다고 고집하던 놈이 퇴학당했다가 어떻게 됐습니까? 소송 걸어서 이기고 유명해지지 않았습니까? 가뜩이나 우리 학교를 두고 밖에서 족벌경영이니 뭐니 떠드는데 괜히 학교 이미지만 나빠집니다.”
“아 그러면 진학지도부장은 지금 임수경이를 봐주잔 말입니까? 아니면 무슨 좋은 아이디어라도 있습니까?”

생활지도부장은 입을 비죽 내밀었다. 그는 회의 때마다 이사장과의 친분을 과시하고 잘난 척하는 진학지도부장이 싫었다. 진학지도부장은 차기 교감 자리를 놓고 그와 경쟁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있지요. 지난달에 국정원에서 온 협조공문 있지 않습니까? 지금은 ‘불온학생 신고기간’입니다. 임수경을 불온학생으로 신고하는 겁니다. 굳이 우리가 징계위원회를 열지 않아도 뒷일은 국정원에서 다 알아서 해줄 겁니다.”

교장은 ‘과연 진학지도부장이야’라며 대놓고 칭찬했고 속마음이야 어떻든 다른 교사들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진학지도부장의 제의를 정면으로 거부한 사람은 딱 한 사람 있었는데, 수경의 담임교사였다. 그는 자신의 반 학생을 사상범으로 무고하는 데 자신은 절대 동조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에 진학부장은 담임교사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 아이가 아침에 뭐라고 했습니까? 봉호여자중학교는 이사님과 이사님 가족들의 것이 아니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학생들에게 돌려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남의 사유재산을 내놓으라고 하는데, 이 게 불온사상이 아니고 뭡니까?”

교감이 ‘빨갱이들이나 할 소리’라고 맞장구를 쳤다.

봉호여중에 교사로 임용되기 위해서는 거액의 뒷돈을 건네야한다는 소문이 파다했지만, 봉호여중이 실력 없는 교사들을 무턱대고 뽑는 것은 아니었다. 재단 이사장은 입버릇처럼 ‘수재들이 우글거리는 경기도의 팔학군’을 만들고 싶어 했기 때문에, 최혜원 선생처럼 아무런 연고가 없는 교사라도 실력만 있으면 교장을 시켜 모셔오기도 하는 것이었다.  그녀가 봉호여중에 처음 왔을 때, 다른 교사들은 그녀의 유능함이 자신들의 무사안일과 무능함을 드러낼까봐 전전긍긍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동료들의 우려와는 달리 학생들의 성적관리에 열의를 보이지 않았고, ‘족집게 강의’ 따위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어느 날 갑자기 학생회 지도를 해보겠다고 나섰다. 교장은 썩 내키지 않았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녀는 삼년 내에 봉호여중의 영어성적을 수도권에서 이십 위 이내에 들게 하라는 지시를 받은 상태였다. 하지만 학생회 지도교사가 된 그녀는 몇 달이 지나자 자신의 임무를 완전히 망각한 것처럼 보였다.

수경은 책가방을 메고 등교하다가 양복을 입은 사내들과 맞닥뜨렸다.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지만 그녀는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을 재빨리 알아차리고 뒤로 내뺐다. 하지만 골목을 돌자마자 또 다른 사내들에게 몸을 부딪쳤고, 커다란 손바닥이 수경의 입을 막았다. 수경의 작고 여린 몸은 가뿐하게 들려져 회색빛 승합차에 태워졌다. 수경은 소리를 질러보기도 하고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했지만 검은 양복의 사내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승합차는 한 시간 가량을 달려서 서울 외곽에 있는 종합병원으로 이동했다. 철골주차장이 따로 있고 병동이 다섯 개나 있는 큰 병원이었다. 차는 병원 단지 안에 있는 국가정보원 부설 사상검진센터로 들어갔다. 사상검진센터는 십 층 건물의 다섯 개 층을 쓰고 있었다. 승합차에 같이 타고 온 덩치 큰 사내들이 말을 고분고분 들어야 집에 보내준다고 협박했기 때문에, 수경은 그들이 시키는 대로 속에 팬티 한 장만 입고 병원가운으로 갈아입었다. 탈의실에서 나오자 시커먼 사내들은 사라지고 하얀 가운을 입은 간호사들과 의사들만 보였다. 수경의 또래로 보이는 아이들이 가운을 입고 멍한 얼굴로 돌아다녔다. 수경은 간호사가 지시하는 대로 소파에 앉아서 문진표를 작성했는데, 수경이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질문들이 대부분이었다. 예를 들면, ‘8촌 이내 인척 가운데 노동조합이나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직계부모나 형제 중에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유죄선고를 받은 사람이 있습니까?’, ‘칼 마르크스, 노엄 촘스키, 김대중, 장하준, 홍세화, 진중권, 박노자의 책을 읽어본 적이 있습니까?’ 뭐 이런 식이었다.

수경이 가장 자신 있게 답한 질문은 마지막 주관식이었다.

당신(혹은 당신의 자녀)는 어떤 사람과 결혼했으면 좋겠습니까?(주관식)

뚱뚱하고 무뚝뚝한 간호사는 두꺼운 바늘을 수경의 가느다란 팔뚝에 꽂았다. 유리관을 끼워 넣자 피가 고이기 시작했다. 간호사는 의심스러운 눈길로 수경을 쳐다보았다.  

“피가 너무 빨갛다.”
“피가 빨간 거는 당연한 거 아닌가요?”
“지나치게 빨갛다는 거지. 소름끼칠 정도로.”

시력검사에서는 양쪽 눈 모두 이점 영에 가까운 정상시력이 나왔는데, 왼쪽 시력이 약간 더 높게 나왔다. 검사원은 고개를 살짝 흔들어 보였다.

“좌편향 시각을 가지고 있어.”

수경은 엠알아이 검사실에서 왼쪽 뇌가 살짝 더 큰 거 같다는 소리를 들었고, 골밀도 검사실에서는 어쩔 수 없는 골수분자라는 소리를 들었다.

수경의 어머니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허옇고 번질번질한 담당의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는 교육을 많이 받고 똑똑한 사람처럼 보였으나 그녀와 수경의 편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수경의 어머니는 이러한 검진센터에 와본 일이 처음이었고, 이러한 곳이 있다는 이야기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의사가 말하는 수경의 병명도 생전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선생님,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우리 수경이가 무슨 병에 걸렸다고요?”
“불온사상 빙의입니다. 속된 말로 빨갱이 귀신에 씌웠다고도 하고, 좌귀(左鬼)에 홀렸다고도 하지요. 환자가 불온한 서적을 읽었다거나, 불온한 학생과 교유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환자는 불온한 사상에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현대의학적인 관점에서 설명 드리면, 불온한 사상이 무의식중에 환자의 마음속으로 스며들었다고나 할까요.”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불온한 사상이란 게 도대체 뭐란 말인가요?”
“차마 입에 담기에 거북합니다만, 유물론, 사회주의, 마르크시즘, 레닌주의, 트로츠키주의, 공산주의, 주체사상 뭐 그런 이름들로 불리지요.”
“말도 안 돼요! 우리 수경이가 그런 걸 알 리가 없어요. 집에서 교과서만 보는 착실한 아이가 어떻게 나쁜 대학생들이 보는 책을 봤겠어요?”
“책을 봤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래서 빙의라고 하는 겁니다. 칼 구스타프 융에 따르면 옛사람들의 의식적 경험이 상징을 통해 집단 무의식으로 전승될 수 있습니다. 따님은 공산주의자들이 만들어놓은 상징을 통해 공산주의에 빙의된 겁니다.”
“아니에요! 우리 수경이가 그럴 리가 없어요! 선생님은 도대체 무슨 근거로 우리 수경이가 그런 병에 걸렸다고 하시는 거죠? 수경이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하셨나요?”

의사는 차트를 돌려서 수경의 어머니에게 보여주었다. 그는 매우 자신만만한 얼굴이었다.

“검진 결과 일단 생리학적으로는 정상인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습니다. 일부 의심스러운 항목이 없지 않지만 그 정도는 오차범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사료됩니다. 문진 결과도 대부분의 항목에서 중도우파나 중도실용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질문에 대한 주관식 답변이 문제였어요. 어떤 사람과 결혼하고 싶은가하는 질문에 따님이 뭐라고 썼는지 보세요.”

남을 배려할 줄 알고 생각이 바른 사람과 결혼하고 싶다.

수경의 어머니는 도대체 이 평범함 답변이 뭐가 문제냐고 항변했지만, 담당의사는 바로 이 답변 때문에 빙의 판정을 받은 거라고 말했다.

“여성의 경우, 연령이 삼십대를 넘어가면서 ‘성격이 좋은 남자’가 높은 비율을 차지하기는 하지만, 환자와 같은 십대의 나이에서는 ‘돈이 많고 잘 생긴 남자’가 모범답안입니다. 간혹 연예인의 이름을 적는 학생들도 있고, ‘의사’와 같은 특정 직업을 언급하는 경우도 있고, 모 재벌그룹의 후계자와 같은 비현실적인 답변을 적기도 하지요. 하지만 ‘가진 사람’보다 ‘바른 사람’을 좋게 본다는 것은 아무래도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여중생이라고 보기에는 어렵습니다. 오차범위를 넘어선다고나 할까요. 건강한 정신과 사상을 가진 사람은 ‘어떻게 하면 잘 먹고 잘 살 것인가’를 궁리하지, ‘바른 삶이란 어떤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배려’를 생각한다는 것은, 환자의 뇌 속에 침투한 불온사상이 이성을 마비시킨 결과로밖에 생각할 수 없습니다.”

수경의 어머니는 의사의 말이 엉터리 같고 무언가 크게 이상하고 우스꽝스러운 잡소리라고 생각했으나, 자신의 생각을 조리 있고 그럴듯하게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많이 배우지 못하고 말을 잘하지 못하는 것이 이때처럼 원통한 적이 없었다. 의사는 수경의 어머니가 적당한 어휘를 찾아 입을 우물거리는 동안 재빨리 처방전에 꼬부랑글씨를 휘갈겼다.

최혜원 선생이 학생회를 맡은 뒤로 회의가 점차 불건전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는 보고가 교장에게 접수되었고, 그녀는 결국 두 달 만에 보직을 박탈당했다. 하지만 이미 학생회 간부학생들은 문제의식으로 충만해있는 상태여서, 교내에 만연해 있는 불법찬조금을 어떻게 없앨 것인가, 급식 업체나 교복 업체 선정을 어떻게 투명하게 할 것인가, 학생회의 권한을 어떻게 확대할 것인가 따위를 놓고 고민하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최혜원 선생을 무고한 동료교사의 주장과 달리 최혜원 선생 자신은 한 번도 이러한 문제제기를 한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모든 것은 학생들이 스스로 깨우친 결과였다. 그들은 이미 어른들의 부조리를 자각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수경은 누운 채로 귀를 막았다. 정신병동에서 들려오는 기분 나쁜 소리들을 듣지 않기 위해서였다. 간호사가 들어와 수경의 손을 억지로 귀에서 떼어 냈다.

“약 먹어야지.”

수경의 손바닥으로 납작하고 하얀 알약 두 개가 떨어졌다. 수경은 간호사에게 등을 보이고 돌아앉았다. 약을 입에 넣고 물을 삼켰지만, 알약 두 개는 어금니와 볼 사이에 끼워져 있었다. 간호사는 약을 먹은 후에 입을 벌리게 했다.

“혀 들어.”

대부분의 간호사들은 혀 밑에 숨겨도 알지 못했지만, 이 나이든 간호사는 눈치가 매우 빨랐다. 언젠가 어금니와 볼 사이에 끼워진 약도 찾아낼지 모른다. 간호사가 사라지자 수경은 약을 뱉어 베개 밑에 숨겨 두었다. 약은 화장실에 갈 때 몰래 버려야 한다. 복도에서 기괴한 웃음소리가 스멀스멀 흘러들어왔다. 수경은 다시 귀를 막았다.

수경의 어머니는 거의 매주 병원을 찾아왔으나, 단 한 번도 면회를 허락받지 못했다. 불온사상은 접촉한 사람에게 옮겨갈 수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런 점에서, 불온사상은 역병과 같다고 의사는 말했다.

“수경이는 언제쯤 퇴원할 수 있을까요?”
“병세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나아진다고 해도 국정원의 허락이 없으면 밖으로 나갈 수 없어요. 환자는 지금 걸어 다니는 생화학 무기나 마찬가지입니다.”
“제 딸이 그렇게 위험한 존재라면 선생님이나 간호사들은 어떻게 같이 지내실 수 있는 건가요?”
“지난번에도 말씀드렸듯이, 이 병동에 있는 의료진들은 불온사상에 대해서 아주 강한 면역력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병원균에 대한 면역력이 아니라, 사상에 대한 면역력을 의미하는 겁니다.”
“그럼 수경이가 평생 이 감옥 같은 병동에 갇혀 지내야 하는 건가요?”
“안달복달하지 말고 느긋하게 기다려보세요. 약물치료를 중단하고 새로운 방법을 써볼까 생각중입니다.”
“멀쩡한 애한테 약을 먹이니 나아지겠어요? 우리 수경이한테 또 무슨 짓을 하시려는 거죠?”
“엑소시즘이죠. 빙의 증상에 대한 가장 오래된 치료방법입니다. 치료기전이 규명되지 않았을 뿐이지 효과는 확실히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종교적 의식을 통해서 따님의 몸속에 들어온 불온한 사상을 쫓아내는 겁니다.”
“이제 무당을 불러서 푸닥거리를 하신다구요? 제가 지금 병원에서 의사선생님하고 이야기하고 있는 게 맞나요?”
“무당이 아니라 목사님을 부를 겁니다. 이런 일은 성직자라고 아무나 할 수 없습니다. 특별한 지식과 경험이 있어야만 가능하죠. 제가 잘 아는 분이 계십니다.”

큰 키에 목회셔츠가 잘 어울리는 김형도 목사는 오른 손에 커다란 가방을 들고 있었다. 그는 수경을 보자 잠깐 미소를 지어보였다. 수경은 잠시 동안 자신이 정말 미쳐서 헛것이 보이는 줄 알았다.

“목사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
“네가 마귀에 들렸다고 해서 왔다. 사실 그 동안 네가 예배에 나오지 않아서 무척 걱정했단다.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난 이런 경우를 많이 보았다. 마귀는 강하고 교활하지만, 하나님의 권능에 비할 바는 아니다.”
“제가 마귀에 들렸다고요? 말도 안돼요. 지금도 하루에 세 번 이상 기도하는 걸요. 진짜 마귀에 들린 사람들은 여기 병원에 있는 사람들이에요.”
“마귀에 들린 사람은 절대로 자신이 마귀에 들렸다고 하지 않는다. 이사장 취임기념식장에서 학교운영권을 달라고 하는 아이는 마귀의 권세를 등에 업었기에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거다. 교회더러 복식부기를 하고 세금을 내라는 자들도 마귀에 들렸기에 감히 그런 신성모독을 하는 것이다. 지금 너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 소리는 마귀의 말이지 너의 영혼이 말하는 것이 아니다.”

김 목사는 가방을 병실 바닥에 내려놓고 성경책과 십자가를 꺼냈다. 수경은 그가 예배를 드리려는 줄 알았다. 성경책을 펼치고 목에 자줏빛 띠를 두르고 입으로는 속삭이듯 무언가를 암송했기 때문이다. 손에는 커다란 은빛 십자가를 들었다. 그가 십자가를 수경에게 흔들며 성경을 읽었다.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수경은 지금 김 목사가 하고 있는 의식이 매주 교회에서 하던 예배와 조금 다르다고 느꼈다. 성경을 읽어 내려가던 김 목사가 갑자기 육이오 호국영령과 건국시조 이승만에게 도와달라고 기도를 올렸고 북한 괴뢰도당의 영수 김정일과 그리스도의 적군 공산주의자들에게 저주를 퍼부었기 때문이다.

김 목사는 그 날 이후로 매일같이 찾아와서 불온사상을 수경의 몸에서 쫓아내는 의식을 계속했는데, 삼일 째 되는 날부터는 십자가를 흔들며 반공구호를 외치는 요란한 구마의식 대신에 손을 수경의 정수리에 얹고 기도문을 암송하거나 성경을 읽었다. 김 목사는 안수기도를 하면 머리와 가슴이 뜨거워 고통스러울 것이나, 이는 성령이 임하여 그러한 것이니 걱정할 것이 없으며, 수경의 몸속에 들어와 있는 붉은 마귀가 성령의 불길에 눌려 사탄에게 돌아갈 것이라 말하였다.

과연 김 목사가 안수기도를 시작한 지 열흘 째 되던 날에, 가슴이 아프고 얼굴에서 열이 화끈거려 눈을 떠보니 성령이 임한 것 같지는 않고 김 목사의 손이 수경의 환자복 사이로 들어와 가슴을 주무르고 있었다. 창피하고 당황스러워 수경이 몸을 빼자 김 목사는 성령이 온 몸 구석구석 임하여야 더러운 마귀의 때를 말끔히 뺄 수 있다며 다시 가슴을 만지려하였다. 수경은 다리를 오므렸다가 달려드는 목사의 가슴팍을 세차게 차냈다. 목사는 병실 바닥에 볼썽사납게 벌러덩 넘어졌다가 쌍시옷이 들어가는 욕설을 내뱉고 일어나 말했다.

“안수기도에도 여러 가지 버전이 있는 것이다. 네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구원의 기회를 얻었는데도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자하니 이제 나도 어쩔 수가 없구나. 지옥불에 떨어진다 하여도 후회하지 말거라.”

김 목사는 신경질이 나는 듯이 성경책을 아무렇게나 집어 들고 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다. 오랜 세월 동안 존경하고 믿었던 사람에게서 지옥불에 떨어지라는 저주를 받고 난 수경은 멍하고 세상이 뒤집힌 느낌이었다. 그동안 옳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옳지 않은 것 같고, 그동안 소중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소중하지 않은 것 같고, 그동안 굳게 믿었던 것들이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것 같았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더니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그녀는 억지로 울음을 삼키다가 결국 신음하듯 울었다.

그 날 피자집에서 열린 최 선생의 환송회에 참석한 아이들은 부회장인 수경을 포함해 고작 다섯 명에 불과했다. 다른 교사들이 그녀의 해직에 관하여 안 좋은 소리를 잔뜩 해놨기 때문에 교사들의 눈을 피해 몰래 마련한 환송회에 선뜻 참석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환송회에 나타난 최 선생은 그날따라 초췌해보였다. 눈은 약간 충혈 되었고 투명하기만 했던 피부는 칙칙해보였다. 집에서 뒹굴다 나온 것처럼 아무 옷이나 되는대로 걸치고 있었다. 총기가 넘치던 눈은 초점을 잃은 듯 멍했고 인사하는 아이들에게 희미한 미소만 지어보였다. 아이들이 피자를 고르는 동안 수경은 그녀와 대화를 나누었다. 처음엔 어색했지만 점차 말수가 많아지고 목소리가 높아졌으며 어느새 대화의 주제는 가장 깊숙한 곳까지 와 있었다.

“그만두면 뭘 하실 건가요?”

그녀는 피식 웃었다.

“글쎄, 시집이나 갈까.”

수경은 잠시 고민하다가 진짜 궁금한 것을 물었다.

“선생님에 대한 소문이 진짜인가요?”

그녀의 얼굴에서 잠시 고민하는 기색이 보였다.

“무슨 소문?”

수경은 생활지도부장이 최 선생에 대해 썼던 노골적인 어휘를 대신할 말을 찾고 있었다.

“그러니까......선생님이 예수님이 싫어하시는 왼쪽의 무리에 속하신다는 거요.”

최 선생은 수경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수경아, 너 교회 다닌다고 했지? 예수님이 지금 시대의 우리나라에 태어났다면 어떻게 되셨을까?”
“잘 모르겠어요. 적어도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지는 않았겠죠.”
“내 생각에는 잡혀가서 고문을 당하거나 감옥에 갔을 거 같아.”
“왜요?”
“예수님은 입 바른 소리를 잘하는 분이었으니까. 지금은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사람이 살기 힘든 시대야.”
“목사님 설교를 열심히 듣는 편인데 그런 소리는 처음 들어요.”
“네가 예수님에 대해 알고 있는 것들은 대부분 사실과 달라. 하지만 예수님은 자기의 생각을 거리낌 없이 말씀하셨던 분일거야. 그 때문에 힘 있는 자들에게 박해를 받으셨던 것이고.”
“선생님도 자신의 생각을 말했기 때문에 쫓겨나시는 건가요?”

최 선생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수경은 그 날 피자조각을 몇 개 삼키지 못했다. 아무리 콜라를 마셔도 자꾸 목이 메었던 것이다. 수경은 작별인사를 하고 돌아선 최 선생의 등에 대고 자신에게만 들리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저도 할 말은 하고 살겠어요.”

최 선생은 수경의 속삭임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뒤돌아서 환하게 웃어보였다.

- 끝 -
김몽
댓글 3
  • No Profile
    김명준 09.11.18 22:35 댓글 수정 삭제
    리얼리즘이라 볼 수도 있지만 과도한 흑백논리가 그리 깊은 사유를 거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무슨 분노에 사로잡혀 글을 쓰셨는지 몰라도 사람을 좌우 한가지 기준으로 나누기엔 너무나 많은 변수와 개성이 존재합니다. 또한 좌우성향을 분간하는 기준은 글의 내용처럼 '도덕'이 아닙니다. 이 글은 우파적인 사상을 가진 사람들은 상식과 도덕도 무시하는 괴물들이며 합심해서 구축해야 한다는, 단순하고 왜곡된 메시지를 전달하는 기능외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내용은 땅콩뿐인데 문장이라는 튀김옷은 두툼하군요. 인간사회가 글쓴이의 생각대로 단순해서 좋은사람 나쁜사람으로 확실히 구분된다면 저도 편하겠습니다.
  • No Profile
    김명준 09.11.18 22:42 댓글 수정 삭제
    아, 그리고 한가지 더.
    위 글에서 '좌'를 '우'로 바꾸고 읽어도 내용은 별 차이가 없더군요.
    어차피 프로파간다를 목적으로 쓴 글은 주어만 바꾸면 편이 바뀌니까요.
    요는 자기편이 정의라는 겁니다. 소설과 프로파간다를 혼동하지 말아주세요.
  • No Profile
    김몽 09.11.19 09:40 댓글 수정 삭제
    이글은 좌파를 옹호하는 프로파간다가 아니라 '양심적인 인간을 좌파로 몰아가는 사회'에 대한 풍자(Satire)소설입니다. 정치적 풍자가 금기시된 사회에 살고 있으면 이런 접근법이 불편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우파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획일화된 체제, 기독교에 대한 비난이 아니라 도그마에 대한 비판일 뿐입니다. 오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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