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가끔씩 들리는 멀리서 차가 지나가는 소리, 그리고 녀석의 떠들어 대는 소리만 빼면 호숫가는 고요했다. 그리고 그 거대한 침묵을 먹고 증식해 가듯 눈발은 점점 거세졌다.

"눈이다! 눈이야! 흰 눈 사이로~ 썰매를 타고~"

녀석이  고요한 대자연에 마구잡이로 집어넣는 저 잡음이 눈이라도 좀 멈춰주면 좋으련만. 하지만 녀석이 유행 지난 지 한참 된 크리스마스 캐롤을 메들리로 부르는 데도 백색의 입자는 더욱 시야를 메우기만 할 뿐이었다. 하늘은 관대하기도 하지. 이럴 때는 좀 매정해 져도 되는데.

바람에 실려 온 그 자그마한 차가움이 내 얼굴에 들러붙는 걸 느끼며 나는 호수를 바라보았다. 딱히 눈 오는 호수가 멋있다거나 낭만적이어서 바라보고 있는 건 아니다. 단지 고민하면서 딱히 시선을 둘 때가 없었을 뿐.

돌아갈까, 아니면 더 가볼까.

슬라이고에서부터 쉬지 않고 걸어온 것도 2시간이 넘었다. 호수를 계속 시야에 넣고 왔으니 엉뚱한 길로 들어선 것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슬라이고에서 6킬로미터 지점에서 본 표지판을 마지막으로 이니스프리의 호수 섬의 흔적은 더 이상 찾을 수 없었다. 게다가 그나마 있던 표지판에도 거리는 표시되어 있지 않았다. 거리 미상. 그게 의미하는 건 섬이 엄청 가깝거나 엄청 멀거나 둘 중 하나일 테지만, 지금껏 걸어도 어떤 표식이 나오지 않는 걸 보면 후자일 가능성이 짙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후회따윈 없다, 라고 말하기엔 양심이 찔린다.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는 표현이 좀 더 정확할려나.

"애초에 시 속에  나온 섬을 굳이 눈으로 보겠다고 직접 찾아온 것 자체가 바보 짓 아니니? 솔직히 말해. 너 그 시 외우지도 못하지? "

노래 부르기도 질렸는지 어느새 다가온 녀석의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렸다. 나는 어차피 녀석을 볼 수 없기에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대답했다.

"시끄러워."

녀석의 말이 옳다는 건 나도 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응, 나 바보 맞아.'라고 넘겨 버릴 만큼의 인재가 나는 되지 못한다. 녀석도 내가 저런 질 낮은 대답이나 할 수 밖에 없다는 걸 아는지 내가 싫어하는 웃음소리를 흘려대기 시작했다.

"끼히히히히! 시간이나 확인해 봐. 돌아갈 때 해가 져버리면 곤란하잖아?"

이것도 옳은 말이었기에 팔을 흔들어 소매에 파묻혀 있던 손목시계를 꺼냈다. 그래도 이른 아침에 나온 덕에 시침이 숫자10을 살짝 넘겼을 뿐이었다. 겨울이라 해가 빨리 지겠지만 완전히 지려면 적어도 5시는 되야 하니까 아직 여유는 있다.

하지만 시간만이 유일한 문제인 건 아니었다. 날씨가 좋다면야 산책 기분으로 얼마든지 걸을 수 있겠지만 이  눈, 빌어먹을 눈 때문에 간단한 만큼 확고하던 계획의 안정성이 통째로 붕괴되고 있는 것이었다. 눈이 낭만적일 수 있는 건 따뜻한 방이 한 시간 이내 거리에 있을 때 만이다. 그 외의 경우엔 성가심의 단계를 넘어 증오의 대상이 될 뿐.

이대로는 가서 이니스프리의 호수 섬을 직접 눈으로 본다 한들 날씨 때문에 제대로 즐길 수 없을 것이다. 차라리 포기하고 다른 곳을 둘러보는 것이 더 좋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조금씩 머리 속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돌아갈까, 아니면 더 가볼까.

어려운 문제다.

"에리카였나, 셀린이었나-그 애가 한 말을 기억하라고."

내 정면에 떠 있는지 녀석의 목소리가 앞에서 들렸다. 목소리는 들리는 데 텅 빈 공간이 보인다는 건 정말 익숙해지기 힘든 일이 라는 생각을 하며 나는 대답했다.

"그 둘한테서 기억에 남길만한 말을 들은 적은 없어."

"끼히히히히. 이름이야 내 알바는 아니지. 여하튼 걔 있잖아, 걔. 네가 그렇게 좋아하던."

그만. 제발 좀 그만. 부탁이니까, 그만 .

"좀 닥쳐줄래?"

"아직 걔 생각만 해도 가슴이 찌릿한가 보네? 정말 유네스코 지정 문화재 감이라니까. 끼히히히히!"

신경 거슬리는 웃음소리를 뒤에 남겨 두고 나는 도로를 향해 걸어 나갔다. 기왕 바보가 되어 버린 거, 몇시간 정도는 더 바보가 되어 보는 것도 그렇게 나쁜 선택은 아닌 것 같으니까.


눈이 내리기 때문인지 도로를 지나가는 차는 그 전보다 훨씬 뜸해졌다. 별로 신경을 안 써도 된다는 점은 분명 편해진 점이었지만, 이미 눈이 내린다는 전제조건이 깔려 있는 이상 편한 여행은 도버 해협 너머로 날라 가 버렸다.

눈앞을 어지럽게 날라 다니는 눈송이들을 보고 있자니 머리가 어지러웠다. 눈이 발밑에서 밟히는 소리가 발걸음의 리듬을 타고 천천히 몸을 잠식해 가는 가운데 누군가가 머리 속의 문을 살며시 열었다.


흔들거리는 분홍빛 우산, 사방에서 튀어 오르는 빗방울들, 그 속에서 그녀가 입을 열었다.


"꿈속으로 여행을 떠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기왕이면 밤에, 그리고 침대 위에서만 그래 줄래?"

녀석의 목소리에 나는 정신이 들었다. 도로가로 걸어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내 몸은 도로 정 중앙을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었다.  눈 오는 날이라 차가 없었기에 망정이지 바다 건너 다시 바다 건넌 아일랜드에서 녀석과 동급이 될 뻔한 상황이었다.

"젠장."

"끼히히히히, 그리고 한 마디 더 하자면 뒤에서 차가 오고 있어."

뒤를 돌아보자 복잡하게 꼬여있는 발자국의 나선이 나 있는 도로를 따라 빨강색 차 한대가 천천히 오고 있었다.  옆으로 살짝 비켜주자 차는 내 옆을 지나가나 싶었더니, 몇 미터 앞에 멈춰 섰다.

"태워 줄려나 보다. 운이 좋다, 야."

"밀어 달라고 멈춘 거 아냐?"

"어째 죽은 사람보다도 더 비관적이다, 너?"

"넌 이미 죽었기에 낙천적인 거야."    

실제로 이유야 어찌됐든 간에 나는 차를 향해 걸어갔다. 내려진 조수석의 유리창 너머로 운전석에 있는 사람이 보였는데, 눈이 오고 있어 전반적으로 어두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저거 위험하지 않나? 라는 의혹과는 별개로 그는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어디로 가는 길인가요?"

"에...이니스프리의 호수 섬에 가는 길인데요, 혹시 어디쯤에 있는지 아나요?"

"여기서 꽤나 오래 걸어가야 할 텐데요. 날씨도 이런데 태워 드릴게요."

옆에서 '내가 뭐랬어? 응? 내가 뭐랬어?'라고 말하는 녀석을 내버려두고 나는 잠시 생각해 보았다. 어쨌든 히치하이크가 매번 안전한 건 아니니까. 하지만 끝이 안 보이는 길, 휘 몰아 치는 눈보라, 영하로 추정되는 기온. 마다하기엔 따뜻한 차를 타고 가는 이니스프리의 호수 섬 투어는 너무 매력적이다.

"예, 고맙습니다."

-

카를 스마이티라는 이름을 가진 사내는 야간작업을 마치고 슬라이고에서 돌아오는 길이라고 했다.

"이니스프리의 호수 섬은 어디서 알게 됐나요? 영문학에서?"

"아뇨, 다른 과목에서였어요. 원문이 아니라 번역본으로 읽었거든요."

솔직히 말하자면 영어로 쓰여진 게 아니었다는 것만 기억할 뿐 언제, 어떤 과목에서 그 시를 배웠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국어 아니면 문학이었을 것 같은데.  

"저도 2년 전에 마지막으로 섬에 가봤기 때문에 정확한 길은 기억나지 않지만, 표지판만 따라 가다 보면 나올 겁니다. 그렇다고 걸어가기에 결코 쉬운 거리는 아닌데요. 표지판에 거리가 나와 있지 않아 사람들이 모르고 길을 나서지만, 아마 슬라이고에서 16 킬로미터 정도는 될 겁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인터넷 블로그에 이니스프리의 호수 섬에 대해 써놓은 사람들을 언젠가는 한 번 저주해 주겠다고 생각했다. 걸으면 금방 나오는 것처럼 사람을 현혹하다니.

"멀어봤자 10 킬로미터 안이라고 생각했는데, 계속 걸었다간 눈사람이 될 뻔 했네요."

"당근 코를 달고 말이죠. 그런데 정말 거기까지 걸어갔다 올 생각이었어요?"

"예, 뭐."

그 간단한 대답에서 내가 별 생각 없었다는 걸 깨달은 카를은 회전하는 손가락과 옆머리의 조합이라는 전통적인 방법으로 '당신 머리가 살짝 돈 거 아냐?'라는 제스처를 해 보았다. 부정할 수만은 없는 게 현실이었다.

"거기에 대해서는 나도 전적으로 동감이야. 네 녀석 뇌의 일부분은 봄 소풍을 나간 채 아직 돌아오지 않은 게 틀림없어."

그제서야 나는 한참 동안 잊어먹고 있던 녀석의 존재를 기억해 냈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 웬일로 내가 남과 대화하는 걸 방해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녀석이야 뭐라 하건 나는 허공에 대고 혼자 중얼거리는 꼴을 다른 사람에게 보일 수는 없었기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서 일까. 다른 한 사람은 대답해야 할 필요를 느꼈나 보다.

"친구 분은 유머 감각이 좋군요."

"그렇긴 한데, 저는 개인적으로 저런 유머를 싫어해서...?!"

뒤늦게 깨달은 내가 홱 소리가 날 정도로 급하게 고개를 돌려 카를을 보았지만, 그는 별 신경 쓰지 않은 채 운전을 계속 할 뿐이었다. 내가 뭐라고 말해야 할 지 몰라 입을 벙긋거리는 가운데 녀석이 '역시나.'라고 말하는 게 들렸다.

"일부러 조용히 하고 있었는데도 눈치 채고 있었네. 사람으로 보기에는 너무 민감한데? 끼히히히히!"

"무슨 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는 군요. 이래봬도 꽤 섬세한 성격이랍니다."

카를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존재를 알아채고 이야기를 나누는 게 별로 의식할 만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흐릿하게 보이는 앞의 표지판을 가리키며 불평했다.

"저거 봐요, 또 거리를 안 써놨죠? 저래서야 10킬로미터인지 100킬로미터인지 어떻게 알아요?"

"예...그것보다 당신 정말로..."

말을 잇지 못하는 나를 그가 흘끗 고개를 돌려 보았다. 선글라스에 가려 눈은 보이지 않았지만 나머지 얼굴만으로도 표정은 읽을 수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전 섬세한 성격이라서, 그렇게 파고들지 않아 줬으면 좋겠군요. 솔직히 제가 100년을 산 흡혈귀이든 1000년을 산 마법사이든 그게 지금 상관이 있나요?"

아니, 그렇게 말하면 좀 그렇잖아. 하지만 내가 들어온 사람이 아닌 존재들은 호의적인 존재라기 보단 호전적인 존재들이었기에 문제인 거다. 그런 내 걱정을 아는 지 역시 사람이 아닌 녀석이 쫑알대기 시작했다.

"너를 개구리로 만들어 놓고 여자랑 키스할 때까지 본모습으로 못 돌아올 저주를 걸 능력을 가진 존재가  눈 오는 날에 빌빌대는 차를 몰고 다니겠어? 말해놓고 보니 그 저주는 좀 위험한데. 절대 못 돌아오겠는걸."

"요즘 세상에 그런 저주는 정말 위험하죠. 협회 쪽의 친구는 세상이 각박해 짐에 따라서 저주 관련 규약도 점점 복잡해진다고 하더군요."

"협회 쪽에 연줄도 있어? 생각보다 거물이시네. 할 일 없이 이런 놈이랑 다니기도 지겨운데, 나 좀 거기 추천해 줄 수 있어?"

"저도 지금 거의 은신에 가까운 상태라서요. 아직까지도 저 같은 존재는 이 세상의 해충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많거든요."

점점 내가 감당할 수가 없는 쪽으로 얘기는 흘러가고 있었다. 제발 좀 현실적인 얘깃거리로 돌아와 줬으면 하는 생각에 나는 그래도 유럽 권에서는 남자들 사이에서 제법 통하는 주제인 축구 얘기를 꺼내기로 했다.

"카를, 축구 좋아해요?"

"어떤 축구요? 미식축구, 발로 하는 축구, 아니면 갈릭 축구?"

"에-발로 하는 쪽이요. 그런데 갈릭 축구는 뭔가요?"

"발뿐만이 아니라 손도 쓰는 축구인데...말로 설명하기엔 좀 힘들군요. 여하튼 개인적으로는 그 쪽을 제일 좋아하지만, 아일랜드 외의 사람들에겐 생소한 모양이군요."

엄청 생소하다. 솔직히 카를한테서 듣기 전까진 그런 게 있는지 꿈에도 생각 못했다. 나름 흥미가 동하긴 하지만 내가 모르는 것에 대해 말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나는 발로 하는 축구로 말을 이었다.

"저는 첼시를 응원하는데, 어느 팀을 응원하나요? 혹 아일랜드에 있는 팀이라든가."

"음...사실 그 쪽 축구에서 아일랜드 팀을 좋아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죠. 그래서 전 아스날을 응원한답니다."

"그럼 요새 기분 좋겠네요. 아스날이 계속 1위를 지키고 있잖아요."

"그렇기는 해도 다른 팀과 포인트 차가 많이 나는 건 아니라서요. 그래도 그만큼 매 경기를 흥미진진하게 볼 수 있는 점은 좋잖아요?"

"그거 꽤 괜찮은 사고방식인데요."

무난한 내용의 대화에 내가 안심을 할 무렵 녀석이 껴들었다.

"나는 셰필드 웬즈데이. 축구에 대해 관심 없는 네 녀석은 모르겠지만."

"미안하지만 그 정도는 안다고. 2부리그에 있는 팀 아냐? 예전에 축구공부 좀 할 때 봤어."

"그 애 때문에? 끼히히히히."

...아차, 싶었다. 그리고 그것과는 별개로 그녀의 얼굴이 다시 멋대로 머리 속에서 튀어나왔다. 특이하게도 축구를 좋아했던 그녀와 친해지기 위해 나는 특이하게도 축구를 안 좋아 했음에도 불구하고 축구를 공부해야 했었다. 내가 첼시를 응원하기 시작한 이유도 단지 그녀가 첼시를 좋아했기 때문이었고 말이다.

딸깍. 나는 머리를 잠갔다. 잊어버리기로 한 일이었다. 분명 그녀를 잊어버릴 수는 없다. 나는 정상적인 남자니까. 하지만 그녀에게 가졌던 감정은 잊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정확하게는, 잊을 수 있다고 믿고 싶다.

"아, 거의 다 온 것 같군요."

카를의 말에 주위를 둘러보자 차는 어느새 시골 마을로 들어서고 있었다. 곳곳에 집들이 널려 있었지만 불이 켜져 있는 곳은 없어 마을 전체가 텅 비어 있는 것 처럼 보였다. 잘팔리는 수기에나 나오는 인심 좋은 시골 사람들은 사라진 지 오래인 것처럼 보였다. 단지 관광시즌 한 철로 여행객들의 돈을 빨아 먹는 전형적인 돈 맛을 아는 관광지 시골의 냄새가 풍겨올 뿐이었다.

"마치 흡혈귀들의 마을 같죠? 피 대신 돈을 빨아먹는 게 다르지만요."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꺼낸 카를의 말에 흠칫 했다. 카를의 정체는 모르지만, 만약 그가 흡혈귀라면 꽤나 실례되는 짓을 한 셈이다. 하지만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과 동시에, 호기심 역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카를, 진짜 흡혈귀 마을에 가본 적 있나요?"

"가본 적은 있습니다. 오래 전 일이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는 기억할 수 있어요. 굳이 말하자면...사람의 마을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 말이 흡혈귀들이 사람 같은 존재라는 뜻인지, 혹은 사람들이 흡혈귀 같은 존재라는 뜻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녀석이라도 거기에 대해 뭐라 말을 해주길 바랬지만, 딴 생각을 하고 있는 지 아니면 거기에 대해 할 말이 없는 건지 그 자리엔 침묵만이 있을 뿐이었다.

눈에 파묻혀 간신히 본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주차장에 카를은 차를 세웠다. 엔진소리가 없어지자 와이퍼가 삐걱대는 소리가 갑자기 커진 것 같았다.

"다 온 것 같군요. 내려 볼래요?"

"예, 여기까지 왔는데, 직접 봐야죠."

차 밖으로 나오자 잊어버리고 있던 추위가 몸을 감싸 안았다. 나는 일단 안내판으로 다가갔지만 눈이 들러붙어 있어 아무 것도 읽을 수가 없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 쓸만한 물건을 찾자 동전 몇개가 손가락에 걸렸다. 그 중 하나를 꺼내 살짝 얼어붙은 눈을 긁어내자 가려져 있던 글자들이 하나씩 보이기 시작했다.

이니스프리의 호수 섬.

제대로 오긴 온 모양이었다. 하지만 시야가 안 좋아 조금 더 잘 보이는 자리를 찾던 나에게 저 아래쪽에 호수의 보트 선착장이 보였다. 그 곳으로 가면 조금 더 잘 보일 것 같아서 나는 미끄러져서 넘어지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내리막길을 걸어갔다. 과연 선착장에 서자 아까보다 시야가 트였다. 그리고,

섬이 보였다.
.
.
.

"어때? 너무 감격스러워서 아무 말도 못하겠니? 끼히히히히!"

어느새 다가온 녀석이 말을 걸었지만 나는 멍하니 있었다. 한 십여 초 쯤 지나고 나서야 나는 가까스로 말을 꺼낼 수 있었다.

"...그 소리 못 들었어?"

"소리? 무슨 소리?"

"내 환상이 깨지는 소리. 그것도 아주 산산 조각나는 소리."

딱히 그렇게 큰 기대를 하고 간 것도 아니었다. 그 동안 본 다른 유명한 곳들처럼 0.5초의 감동이라도 주면 감개무량했을 것이다. 하지만 마치 한강 둔치의 이름 모를 섬처럼 생긴 이니스프리의 호수 섬의 외관은 예이츠 양반의 시를 '오늘은 일어나서 동네 섬에 가서 놀았다. 오늘 일기 끝.'수준으로 떨어뜨리고 있었다.

"그렇게 멋지지만은 않죠?"

카를이 선착장으로 걸어오면서 말했다. 내가 뭐라고 말해야 할 지 몰라 하자 그는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웃었다.

"날씨 탓도 있을 거에요. 섬을 구경하기에 최고의 날씨라고는 할 수 없는 날이니까."

나는 다시 몸을 돌려 섬을 보았다. 어둠의 잉크를 탄듯한 색의 호수 위에 흐릿하게 떠 있는 섬. 그 모습이 머리 속에 뭔가를 떠오르게 했다.  아니, 기억나게 했다.

"아니요."

내 부정에 카를이 물음표를 머리 위에 달아 보인다. 나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왠지 하고 싶어져서 미소를 지은 채 말을 이었다.

"원래 이런 거에 불과한 거에요.  사실 그건 중요한 게 아니거든요. 다른 모든 것들이 그러하듯이."

어느 샌가 나는 눈이 아닌 비가 내리는 곳에 있었다. 호수 대신 가을의 황량한 왕립식물원의 모습이 펼쳐졌다. 그리고 내 옆에는 카를 대신 그녀가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아코였다.

-

툭.
툭, 툭.
툭, 툭, 툭.

할인매장에서 산 것이 분명한 분홍빛의 싸구려 우산에 빗방울이 튀기는 소리가 귀를 울렸다. 불안함을 가득 안고 있는 흐린 날씨에도 불구하고 식물원에 놀러왔던 사람들은 비를 피할 수 있는 곳을 찾아 뛰어 다녔다. 나는 옆에서 걷고 있는 아코를 보았지만 아코는 우산이 있으면 문제없지, 라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괜찮아도 나는 투덜거리고 싶었다.

초록을 바탕색으로 깐 화려한 꽃들의 색 잔치를 기대하고 왕립식물원에 왔지만 가을은 듣던 것만큼 로맨티스트가 아니었는지 심심함을 제외한 모든 것을 커튼 뒤로 숨겨버렸다. 거기다가 비라니. 회색의 하늘, 회색의 식물원. 이정도면 투덜거려도 괜찮은 조건이라고 생각했다.

"봄에 왔어야 했는데. 하다못해 맑은 날이기만 했어도 이것보단 좋았을 거고."

"결국은 네가 바보라는 거지. 인정해, 끼히히히히!"

나는 녀석의 목소리에 휘둘리지 않으려고 못들은 척 했다. 내가 아무 반응이 없자 심심한지 녀석은 작은 목소리로 투덜대기 시작했다. 나는 녀석의 투덜거림 속에서 아코의 말을 잡아내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그래? 하지만 난 이것도 나쁘진 않아."

아코는 평소처럼 별로 힘들이지 않는 목소리로 잔잔하게 말을 이었다.

"사람들은 다들 결과만을 봐. 기다리고 기다리던 어떤 것이 기대를 충족시키지 않으면 실망하고, 비난하기 마련이지. 하지만 어째서 사람들은 가슴 설레었던 그 과정을 잊어먹는 걸까?  분명 이건 데이트로는 실격이지. 우리가 더 가까워 질 일도 없을 테고."

사정없이 말해대는 그녀 때문에 마음에 흉터가 생긴 게 하루 이틀은 아니었지만, 이건 좀 확연히 아팠다. 그리고 녀석이 뒤에서 웃는 그 목소리까지 겹쳐지자 죽을 맛이라는 맛에 대해 깨달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코는 내가 어떤 마음인지 아는지 모르는 지 계속 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오늘을 기다리는 동안 설레인 그 시간들의 가치가 없어지는 건 아니잖아? 축구경기에서 사람들이 함성을 지르기 시작할 때는 공이 골에 들어갈 때가 아니라 그 전인, 공격수가 공을 몰고 갈 때인 것처럼. 나는 행복한 오늘을 기대했고, 그것만으로도 행복했어. 그걸로 충분해."

나도 아코처럼 말할 수 있을까. 지금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하지만 언젠가는 그 걸 이해하고, 하다못해 그녀와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되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넌 정말 재미있어."

"거짓말, 이상하다고 생각했지?"

"아니, 진심으로. 그래서 더욱 아쉽지만."

빗물이 고이기 시작한 돌길.
빗방울이 부딪히는 진동이 느껴지는 우산.
그리고 그 우산 밑에서 내 옆에 어깨를 댄 채 같이 걷고 있는 아코.

비록 회색이 가득한 기억이지만, 잊어버리기 싫었다.

그래, 잊어버리기 싫었다.

-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입김이 공중에 느릿하게 퍼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사방을 채우고 있는 눈송이와 더불어 그건 나름 봐줄 만한 광경이었다.

녀석의 웃음소리가 나를 끌어내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끼히히히히, 다시 돌아왔나 보네."      
          
갑자기 들린 녀석의 기분 나쁜 웃음소리는 지금 내가 있는 곳을 좀 더 확실하게 알게 해 줬다. 착잡하고도 뭔가 개운한 이상망측한 기분을 느끼며 나는 선착장을 걸어 나와 카를에게로 갔다.

"이제 돌아가죠."

"사진 같은 건 안 찍고요? 제가 찍어줄게요."

"그럼 나는 그 사진을 심령사진으로 만들어 줄께. 끼히히히히!"

녀석의 말은 싹 무시한 채 나는 섬을 다시 한 번 돌아보았다. 여전히 볼품없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설령 그 기다림의 끝에 있던 것이 이런 것이었다 하더라도.

괜찮았다.  

"아뇨, 이걸로 충분해요."

어쩌면 조금이나마, 나는 아코를 이해한 것 같았다.
해파리
댓글 3
  • No Profile
    배명훈 08.01.24 15:27 댓글 수정 삭제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네요. 앞에 것도.
    그런데 결론이 난 뒤에도 해결되지 않은 잔재가 좀 남았네요. 특히 등장인물들의 캐릭터에.
  • No Profile
    해파리 08.01.25 01:16 댓글 수정 삭제
    이야기를 만들어 본 게 거의 10년만이다 보니, 글을 쓰는 도중에 등장인물들을 통제하는게 불가능해져 버려서, 그만 가위질을 해버린 탓일 겁니다.
    (애초에 플롯 설정이 허접했다는 게 더 큰 이유 같지만서도, 자학개그는 취향이 아니라 그렇게 말하기는 싫군요.)
    아무튼, 재미읽게 읽은 이야기를 만든 사람이 써주는 비평은 웬지 기분이 좋군요.
  • No Profile
    배명훈 08.01.25 09:52 댓글 수정 삭제
    플롯은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다만, 플롯의 궤적은 캐릭터의 중력에 이끌려 가는 거잖아요. 질량이 꽤 큰 캐릭터들 사이를 지나왔는데 플롯 자체는 빈 공간을 지나온 궤적을 그리고 있달까. 뭐 그렇습니다.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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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 단편 나의 사랑스러웠던 인형 네므2 아진 2003.12.08 0
1906 단편 [뱀파이어] 카나리아1 김지원 2006.03.27 0
1905 단편 불면1 금원정 2013.07.15 0
1904 단편 옛 하늘4 amusa 2005.05.25 0
1903 단편 죽은 달의 여신4 안단테 2009.10.31 0
1902 단편 [외계인]이빨에 끼인 돌개바람(본문 삭제)5 Inkholic 2007.04.20 0
1901 단편 협회에서 온 남자4 마그마 2010.11.18 0
1900 단편 얼음마녀 이야기6 slowdin 2010.11.10 0
1899 단편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 2005.04.27 0
1898 단편 어린왕자와 여우 은비 2013.01.12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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