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기억

2013.03.15 10:0803.15

벽에는 압정으로 고정된 하트모양의 색종이가 가득했다. 새빨간 색종이로 접혀진 하트로 가득 찬 벽을 보노라면 어떤 미친 사람이 이걸 만들었을까보단, 이걸 만든 사람이 얼마나 슬펐을까가 먼저 떠올랐다. 개인적인 감정이입이겠지만 새빨간 색종이로 구석구석 꼼꼼히 접혀진 그 하트들은 하나하나가 보이지 않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듯 했다.

이 분이세요.”

벽에 신경이 팔려있는 동안, 나를 안내했던 젊은 여인은 한 커다란 침대에 누워있는 한 노인의 손을 잡고 있었다. 벽에 시선을 떼고 침대 옆으로 다가가자, 그 노인이 시야에 가득히 들어왔다. 군데군데 빠진 듬성한 머리에 이미 뿌리까지 회색으로 변한 머리카락, 세월이 무심히 남기고 간 주름이 보였다. 무겁게 감겨있는 눈은 다시 뜨는 것조차 힘들 것처럼 보였다.

교수님을 기다리시다가 잠 드셨어요. 깨워드릴까요?”

나는 안내인의 말에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저렇게 곤히 잠드신 분을 깨우는 것도 실례라고 느껴졌다. 다른 스케줄이야 급한 것이 아니니 미루면 그만이었다.

잠시 방 좀 둘러보겠습니다.

어차피 교수님을 부른 건 이 분이시니 부르실 적에 방 둘러보는 정도는 허락하신 것이겠죠. 편하게 보세요.”

들어올 때부터 시선이 간 노인의 침대 뒤쪽의 벽은 다시 봐도 장관이었다. 저렇게 많은 하트를 접은 것도 접은 것 이지만, 저 높은 곳까지 하트가 고정되어있는 것을 보면 어떻게 저기에까지 박아놓았을까 하는 신비감마저 들었다. 침대 옆 탁자에는 성경책과 전화기와 작은 전등 그리고 액자가 하나 놓여있었다. 액자 속의 사진은 노인이 중년이었을 적에 찍었던 것 같은데, 얼굴 곳곳에 주름이 생기기 시작한 노인의 모습과 그 옆으로 다정하게 붙어있는 한 중년 여인이 있었다.

사진 속에 이 여성분이 이 분의 아내 되시는 분이십니까?”

액자를 들어 안내해줬던 여자에게 보여주었다. 액자를 받아든 그녀는 사진을 한 번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 맞아요. 제가 이 분 댁으로 오기 전에 이미 돌아가신 터라 뵌 적은 없지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방은 빨간 하트로 거의 도배된 한 벽면을 제외하고는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다. 간병인이 정리해준다고 하더라도 이 정도로 정리정돈이 되어있다면 평소 본인의 성격의 영향이 컸을 터였다. 책장에는 종교관련 서적과 문학 서적이 종류대로 정리되어 있었고, 옆의 책상에는 연필꽂이 하나와 공책 하나가 덮여진 채 올려져있었다. 문 옆의 옷걸이에는 깨끗이 다려진 옷들이 걸려있었고, 모자는 중절모 하나만이 걸려있었다.

저기, 박사님. 일어나셨습니다.”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노인이 힘겹게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내가 침대로 다가가자 앉아있던 여인이 일어나며 앉으라고 권했다.

반갑습니다. 전화 주셨던 김 성철 교수입니다.”

직접 오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몸이 편치 않아서.”

노인은 편치 않은 몸으로 허리를 연신 굽히셨다. 나는 그에게 그러지 말라며 편하게 있으란 말부터 해야 했다.

일단 저를 찾으신 이유부터 다시 듣고 싶습니다. 되찾고 싶은 기억이라도 것이 무엇입니까?”

*

내 사무실로 전화를 건 것은 날 안내해준 젊은 여인이었다. 때마침 교수로 재직 중인 대학교도 방학기간이었고, 계절학기 강의는 거절해놓은 참이라 한가하던 때였다. 학기 중 한창 바쁠 때 나왔던 논문들 중에서 괜찮아 보이는 논문을 몇몇 뽑아 커피를 마시며 다시 읽어보려던 차에 전화기가 울렸다.

[김 성철 교수님 되시나요?]

젊은 여자의 목소리에 처음에는 내 강의를 듣던 학생인 줄 알았다. 학기 중이 아니면 학생에게 걸려오는 전화는 뜸 한터라 반가움이 앞섰다. 어떤 과목을 듣던 학생인지 물어보려던 차에 전화기 건너편의 여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는 최 한순 이라는 간병인이라고 합니다.]

순간 반가움이 사라지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수화기 건너편의 여자에게 전화를 건 용무를 물었다. 그러자 그 여자의 담담한 목사리가 수화기를 지나 내 귀속에 들어왔다.

[저는 한 철심이라는 분의 간병인으로 3년 째 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의 병세가 최근에 갑자기 안 좋아지시더니, 당신의 입으로 곧 갈 때가 올 것 같다며 가기 전에 꼭 해야 할 일이 있는데, 이젠 시간이 없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을 찾아보라고 하셨습니다.]

그게 무슨 일 이기래 저에게 전화를 건 것이죠? 전 심리학 교수입니다.”

[그게, 한 기억을 되찾아야 한다고 하셨어요.]

기억이라뇨?”

[꼭 다시 기억 해내야할 기억이라고만 하시면서, 다른 것은 기억이 안 난다고 하십니다. 무엇인지는 자신도 모르겠다는데, 꼭 기억해내야 하늘에 있는 부인을 편히 만날 것 같다고만 하세요.]

그걸 왜 제게?”

[제가 인터넷에서 찾아봤더니 최면 중에 기억을 되살리는 것이 있더군요. 그런데 최면술하시는 분을 어떻게 모셔 와야 할지 막막하기도 했고, 가끔 돌팔이도 있다고 해서 믿기가 힘들더라고요. 그래도 찾기는 해야 해서 찾아보는데 제가 일하는 이 집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고 가장 믿을 수 있는 권위자는 교수님이셨어요.]

꽤 예전에 한 방송사의 부탁으로 한 프로그램에서 최면술을 했던 적이 있었다. 그 이후로 최면술을 가르쳐달라느니, 최면술에 걸려보고 싶다느니 하는 전화가 쇄도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가라앉았었다. 그 때 이후로 아예 최면술에 대한 내 정보가 묻혔나 싶었는데, 이 여자는 용케 그걸 찾아낸 모양이었다.

최면술로 되살리는 기억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특히 오래된 기억일수록 그렇죠. 대부분 기억 속에 남은 사실에 근거하기는 하지만, 완전하지 않은 부분은 개인의 무의식에 의해 꾸며질 수도 있습니다.”

간혹 TV프로그램에선 최면술로 되찾는 기억이 정확한 것처럼 설명하거나 묘사하곤 했다. 하지만 최면술로 되살리는 기억은 절대 온전한 기억이 아니었다. 의식적으로 기억해내는 기억도 그 사람의 기대나, 상상력 속에서 바꿔지는 경우도 흔하게 일어난다. 무의식의 힘을 빌리는 최면술 같은 경우엔 그럴 위험이 더 높아지는 것이었다.

[괜찮아요. 이 분은 그저 그 때 기억을 다시 떠올리는 것이 중요한 거지, 그 때 기억을 온전하게 되찾는 것이 아니니까요. 이 분도 그걸 원하실 거예요. 이 분도 약간이라도 떠올릴 수만 있다면 어떤 것이든 괜찮다고 하셨고요.]

학기 중이었다면 거절했을 터였지만, 한가했고 또 그 기억이라는 것에 호기심이 가 주소를 물어보고 말았다.

*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기침 소리가 섞이긴 했지만, 노인은 차근차근 내가 이해할 수 있도록 말하고 있었다.

제가 제 부인이 죽었을 적에 기억을 잃어버렸습니다. 중요한 것이 있던 것 같은데 기억을 못 하겠어요. 병원에서는 심리적 원인에 의한 기억상실증이라고만 설명하고, 저에겐 아무것도 가르쳐 주질 않았습니다. 병원이 관련되어 있긴 한 것 같은데, 아무리 물어봐도 병원은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며, 문제가 없는데 무엇을 알려줘야 하는지 모르겠다고만 합니다. 그래서 제 아내와 저의 진료기록이라도 보여 달라고 해도 문제가 없는데 보여줘야 할 의무가 없다며 발뺌만 합니다.”

환자 본인의 기록인데도 보여주려 하지 않았다는 말인가요? 개인에 대한 기록인데 당연히 알려줘야 하는 것 아닙니까?”

나는 노인의 말에 당황했다. 아무리 병원의 진료기록이라고 해도 그렇지, 본인의 기록을 알려고 싶다는데 그것을 거절할 권리는 병원에게 있을 리가 없었다.

물론, 저도 그렇게 말해봤지요. 하지만 병원에서는 아무리 그래도 보여줄 수 없다며, 법적으로 대응하던가 하라고 발뺌만 할 뿐이었습니다. 늙은 나이에 지병도 있는데 제가 그렇게 험한 것을 견딜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가진 거라곤 이 낡은 집 한 채와 자식들이 주는 용돈 뿐 인 터라 포기하고 말았죠. 차라리 스스로의 힘으로 기억을 되찾는 것이 더 안전하고 더 빠를 거라고 느껴졌습니다. 병원에서도 그걸 다 알고 그러는 것 일 테죠.”

어이가 없었다. 병원에서 뭔가 일이 있었던 것이라면 병원은 그게 자신들에게 불이익이 될까봐 환자의 건강을 상대로 버티기에 들어간 것이었다.

자식들은요? 자기 어머니가 어떻게 눈을 감았는지조차 병원이 알려주지 않는데도 가만히 있습니까?”

자식들도 처음엔 길길이 날뛰더군요. 하지만 제 자식들도 월급 받고 사는지라, 법적인 문제는 힘들 겁니다. 돈도 돈이고 시간도 시간이니. 아무리 부모의 문제라도 제 자식들도 가정이 있는데 그 가정을 포기하라곤 저는 말 못 합니다. 포기한다고 나선다고 해도 저는 말려야하는 입장입니다.”

노인의 말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그래서 저 혼자서 떠올리려고 노력은 해봤지만, 도저히 떠오르질 않습니다. 저도 이제 곧 부인을 따라 갈 시간이 다가오는데, 마냥 저 혼자서만 노력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간병인에게 부탁하여 이렇게 교수님을 모셨습니다.”

그리 길게 말한 것도 아니건만 노인은 벌써 지쳐보였다. 간절해 보이는 노인의 눈은 내가 당장이라도 기억을 되살려주겠다고 말하기를 바라는 듯 했다. 병원에서 감추는 것이라면 보통 일은 아닐 것이었다. 내 예상이 옳다면 기억을 잘못 되살렸다간 노인의 마음에 더한 충격을 줄 뿐이었다. 이 노인의 건강상태를 고려하지 않고, 기억만을 되살린다면 그건 단순히 내 호기심을 위한 것일 터였다. 내 호기심만으로 이 노인을 생명의 위험에 내보낼 수는 없었다. 내 고민은 길어져가고, 노인의 입에서 간헐적으로 거칠게 나오는 기침소리만이 방 안을 울렸다.

부디 제 기억을 되살려주셨으면 합니다.”

노인이 먼저 침묵을 깨며 말했다. 그의 얼굴은 내 고민을 아시는 것인지, 모르시는 것인지 그저 자신의 기억만을 되찾고 싶다는 애절함만이 가득했다. 나는 노인의 얼굴을 계속 쳐다보지 못 하고 고개를 돌렸다. 나는 간병인을 방 밖으로 불러냈다.

지금 저 분의 건강상태를 보면 기억을 되살리는 것 자체가 큰 위험이 될 수 있습니다. 좀 더 저 분의 건강을 회복하신 후에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니, 꼭 그렇게 해야 합니다. 저는 환자에게 해가 될 행동은 할 순 없습니다.”

내 말에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몇 번인가 뭐라고 말하려는 듯 입을 열긴 했지만, 그녀의 입에선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제가 저 분께 직접 말씀드려볼게요.”

그녀가 그 사실을 몰랐을 리는 없었다. 내가 오기 전에 이미 노인에게 한 번 졌을 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생면부지인 내가 직접 말해서 노인을 이길 자신은 없었다. 노인과 3년간 함께 했으니 그녀가 더 진심으로 노인을 설득할 수 있으리라.

그녀는 한숨과 함께 노인의 방으로 들어갔다. 무슨 말을 하는지 들리지 않았다. 내 시선은 자연스레 거실로 향했다. 관리는 잘 된 것 같지만, 이 집도 세월의 흐름에서는 자유롭지는 못 했다. 군데군데 색 바랜 벽지가 삐져나와있었고, 고친 흔적도 여러 군데에서 보였다. 그래도 집의 위치는 좋아 햇빛은 잘 들어왔다. 벽에는 자식들 사진과 젊을 적 결혼사진, 그리고 어딘가 놀러가서 찍은 것 같은 부부사진도 있었다. 사진 속의 다정한 모습에 내심 부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한 쪽에는 커다란 거울이 세워져 있었다. 간병인이 매일 청소를 하는지 먼지 한 톨 묻어있지 않았다. 거울 안쪽으로는 얼굴 곳곳에 주름이 새겨져가는 깡마른 40대 남자가 서있었다.

들어오세요.”

어느새 밖으로 나왔는지 내 뒤에는 간병인이 서있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설득이 잘 된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따로 묻지 않고 그녀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는 노인이 여전히 침대에 몸을 일으켜 앉아있었다.

제 건강상태는 신경 쓰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 목숨은 제가 압니다.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내가 들어가자마자 노인은 말했다. 예상은 한 결과였지만 이렇게 맞닥트리니 한숨 밖에 나오지 않았다. 더 고민해봤자 다른 방법은 없다는 것은 확실했다. 내가 여기서 그냥 거부하고 나간다 치더라도, 노인은 간병인을 닦달해 다른 사람을 구할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차라리 내가 하고 싶었다. 최면술에 덜한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내가 한다 해서 더 안전한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돌팔이들에게 걸리는 것 보단 지금 내가 하는 게 더 좋을 것이었다. 게다가 노인의 상태를 보고나니 이렇게 아프면서 까지 되찾고 싶어 하는 기억이 무엇인지 궁금증은 더욱 강해졌다. 심리학자로서의 비윤리적인 호기심이라 해도 할 말은 없지만, 지금은 이 노인의 마음을 좀 더 지켜보는 것이 지금 내게 부여된 의무 같았다.

알겠습니다.”

이미 내가 이 집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부터 정해진 대답이었다. 내가 아무리 이 말의 책임을 피해보려 했지만, 또는 더 한다 해도 결국은 나는 이 말의 책임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었다.

기억을 되돌려드리겠습니다.”

내 말에 노인은 안심이 되었다는 것처럼 다시 침대에 몸을 뉘였다. 간병인에게 부탁하여 쓸 종이와 펜을 구했다.

천천히 눈을 감아주십시오.”

노인의 눈꺼풀이 천천히 감기었다. 노인의 청력을 감안하여 평소보다 크게 말했다. 자칫하면 최면상태(트랜스상태라고도 함:Trance)에 빠지는 것을 방해할 수도 있었지만, 노인의 기억을 되찾고자 하는 소망이 강해서인지 별 다른 반응 없이 노인은 최면상태에 빠져들었다.

당신은 계단의 중간에 서있습니다. 위로 올라가는 계단은 당신의 미래이며,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은 당신의 과거입니다. 보이시면 고개를 끄덕여주세요.”

노인의 감은 눈이 떨리기 시작했다. 곧 멈추더니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뒤로 도시고, 한 계단 한 계단 천천히 내려가세요. 그리고 아내분이랑 행복하던 시절이 보이시면 멈추시고 말씀해주세요.”

노인은 정신 속의 계단을 몇 계단이나 내려가는지 시간이 좀 흘러서야 입을 열었다.

, 보입니다.”

노인의 입가엔 미소가 맺혀있었다. 처음 보는 그의 행복한 모습에 좀 더 그 추억에 있도록 할까 하다가, 노인의 몸이 성치 않다는 것을 다시 떠올렸다.

지금 그 기분이 계속 유지됩니다. 슬플 때, 힘들 때면 이제 그 기억이 먼저 떠오르는 겁니다. , 지금 기분 좋으시죠?”

내가 생각해낼 수 있는 최소한의 방어선이었다. 이게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효과가 있기를 기도해야만 했다.

, 이제 좀 더 계단을 올라가 보겠습니다. 아내분이 돌아가신 원인의 시작부분으로 가보겠습니다. 도착하시면 말씀해주세요.”

.”

, 이제 앞에 문이 보이실 겁니다. 그 문에 들어가시면 이제 그 때 기억이 처음부터 쭉 보이실 겁니다. 그걸 보이시는 데로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

여느 때와 같은 일요일 아침이었다. 노인이 일어났을 때에는 그의 아내는 이미 일어나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내도 피곤할 터인데 아침은 그냥 어제 저녁 남은 걸로 먹어도 된다고 더 자라고 해도 그 말은 죽어도 듣지 않는 아내였다. 조금은 게으름을 피워도 될 나이인데 저렇게 성실한 것을 보면 노인은 자신이 문제가 있는 건가 싶어 좀 부끄럽기도 했다.

, 또 그리 일찍 일어났어. 더 자라니까.”

노인은 부엌 앞에서 괜히 한 소리 했다. 아내는 그럼 영감이 좀 빨리 일어나서 도와주면 될 것 아니냐며 오히려 투덜댔다. 아내의 말에 할 말이 없어진 노인은 자신보다 3살 밖에 안 어린 아내에게 내 나이 먹어보라며 자기도 못 일어나게 될 거라는 둥 연신 핑계를 대었다.

알았으니까, 아침부터 잡수셔. 영감 말대로라면 나도 영감 아침 챙겨 주는 거 얼마 남지 않은 거네. 나중에 그립다, 그립다 하지 말고 챙겨줄 때 잡숴둬.”

매일 아침의 일상과도 같은 대화였다. 언젠가부터 잘 잤냐는 말 대신에 이런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노인은 이런 대화도 정감 있게 들리는 것 같아 꽤 괜찮다고 여기고 있었다. 아침을 먹은 후에는 교회 나갈 준비를 했다. 아내는 젊었을 적부터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지라, 막 결혼했을 참엔 종교문제로 좀 다툼도 있었다. 그녀와 결혼하기 전까진 평생을 무교로 살아오던 노인으로선 어느 날 갑자기 다가온 종교에 거부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아내는 그런 노인을 천천히 달래며, 교회로 이끌었고 어느 덧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요일만 되면 부부가 같이 교회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평소에 검소하게 입는 것을 좋아하는 아내도 일요일만큼은 자신의 옷장에서 가장 좋은 옷을 꺼내 입곤 했다. 노인은 그런 아내를 보며 가끔 자기랑 놀러나갈 때도 그렇게 입어보라며 농담을 던지곤 했다.

평소엔 그렇게 서두름서, 교회 갈 때도 좀 서둘러봐.”

노인의 아내는 평소 어디 갈려고 치면 노인보다 늦게 준비했지만, 교회만큼은 노인보다 훨씬 빠르게 갈 준비를 끝내곤 했다. 노인은 그 모습에 교회가 저리도 좋을까 싶기만 했다.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젖은 머리를 말리지도 못 한 채 모자를 쓰고 현관으로 나셨다.

문 밖으로 흘러들어오는 햇빛에 눈이 부신지 그의 아내가 눈을 찌푸렸다. 노인은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아내의 머리에 씌웠다.

그러게, 모자를 쓰고 다니라니까. 기어코 말을 안 듣고 그려.”

영감도 눈부실 텐데 왜 또 괜히 벗어주고 그랴. 얼른 가져가요.”

그녀는 찌푸렸던 눈을 풀지도 않고 모자를 벗으려 했다. 노인은 그런 아내의 손을 꼭 잡으며 그냥 가자며 이끌었다.

매 일요일마다 같은 아침의 모습이었고, 노인도 오늘 또한 똑같이 흘러갈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교회를 가던 중 아내가 쓰러져버린 것이었다. 노인은 너무 놀라서 아무것도 못 하고 멍하니 보기만 하고 있었다. 그 길가를 걸어가던 한 청년이 그 광경을 보고 급히 119에 신고를 해, 그의 아내는 병원으로 옮겨질 수 있었다. 노인은 응급차 안에서 하염없이 쓰러진 아내의 손만을 쓰다듬고 있었다.

병원에 도착하자 아내는 응급실로 옮겨졌다. 노인은 응급실까지 따라 들어가려 했지만 간호사가 말려 따라 들어갈 수가 없었다. 응급실 밖에서 발만 동동 굴리며 기다리던 노인은 지나가는 의사나 간호사들이 보일 때마다 괜히 역정을 내거나, 똑같은 질문을 반복하기만 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간호사가 노인을 이끌고 한 진료실로 들어갔다. 그 안에는 의사가 차트를 보고 있었다.

, 모셔오셨나?”

간호사가 노인을 의사 앞에 앉히고 나서야 의사는 이제 봤다는 듯 말했다. 노인은 그런 의사의 모습에 불안이 앞서, 막상 물어볼 수 있는 상대가 앞에 있는데도 아무 질문도 못 하고 있었다. 의사는 그런 노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히 입을 열었다.

이 옥자 씨의 남편 분 되십니까?”

, 그렇습니다.” 노인은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의사는 그런 노인에게 미소를 보이며 안정 시켰다.

크게 걱정하실만한 문제는 아닙니다. 아내 분께서도 나이가 있으신지라, 초기에 빨리 병세가 나타난 것 같습니다. 생각보다 병세가 나쁘지 않아 간단한 수술로 나으실 수 있으실 겁니다.”

의사는 노인의 아내의 병이 혈관질환이라고만 했다. 심장 부근의 혈관이 막혀 혈액순환이 잘 되지 않아 실신한 것이라고 했다. 이 부분만 잘라내어 다시 연결하면 그리 큰 고생 없이 금방 나을 거라는 소리도 덧붙였다. 노인은 그 소리에 그저 의사에게 감사하다는 소리만 반복했다. 의사가 수술비도 말했지만, 그 정도야 문제도 아니었다. 젊을 적 모아두었던 돈이 충분히 남아있어서 수술비로 쓸 수 있었다. 아내가 나은 다음은 노인이 일을 하던지, 자식들에게 손을 벌리던지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을 것 이었다. 노인은 아내가 병실에서 잠들어 있는 것을 보고, 얼른 집에 가 돈을 챙겨왔다. 노인은 이 정도의 돈으로 아내가 나을 수 있다는 사실에 그저 감사하기만 했다. 노인은 아내가 깨어나 괜히 반대하기 전에 얼른 수술대금을 지불해버렸다. 아내가 일어나서 그 사실을 듣곤, 늙은 몸 치료하는데 무슨 돈이 그렇게 많이 들어가는지 모르겠다며 놀라긴 했지만, 노인은 아내가 낫기만 하면 어떤 금액이든 뭔 상관이냐며 빨리 낫기나 하라며 잔소리를 했다. 수술일이 잡히고 그 동안 노인은 아내가 먹고 싶은 게 없는지 아내에게 계속 물어보기도 하고, 혹은 혈관에 좋은 음식이라고 소문이 난 것이라면 다 사가지고 왔다. 그의 아내와 같은 병실을 쓰는 사람들은 그런 노인의 모습에 부부 금슬이 참 좋다며 부러워했다.

수술일이 다가왔다. 노인의 아내는 노인의 손을 잡고 놓을 줄을 몰랐다. 노인은 그런 아내의 모습에 한 숨 푹 자고 일어나면 이미 끝나있을 거라고 달랬다. 노인도 불안하긴 마찬가지였지만, 수술을 받는 당사자 앞에서 그 불안감을 나타낼 수는 없었다. 아내가 수술실에 들어가자 노인은 더 이상 불안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간호사들은 시간이 좀 걸릴 테니, 쉬시다 오라고 했지만 노인은 수술실 앞을 떠날 줄 몰랐다. 수술은 예정 시간이 지나도록 끝날 줄 몰랐다. 어느 순간부턴가 간호사들이 수술실을 계속 왔다갔다 거렸다. 그 부산한 모습에 노인의 불안감은 더욱 커져가기만 했다. 예정 시간을 한 시간을 더 넘기고서야 수술실에서 의사가 걸어 나왔다. 의사는 조용히 노인을 진료실로 데리고 갔다. 아내의 모습은 보고 가고 싶다며 버티는 노인을 진료실에서 꼭 드릴 말씀이 있다며 억지로 끌고 갔다.

수술을 실패했습니다.”

의사의 입 안에서 튀어나온 말은 노인에게 큰 충격으로 날라 왔다. 노인이 그저 입을 벌린 채 정면을 쳐다보는데 의사는 노인에게 한 사진을 보여주었다. 아내의 심장 부근에 빨간 자석으로 고정시키더니 그 옆 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혈관을 자르던 도중 제 부주의로 심장에 손상이 가버렸습니다. 어떻게든 이걸 다시 치료해 보려고 했지만, 출혈이 너무 심해 그만.”

노인에게는 의사의 말이 전혀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의사가 무슨 말을 하든, 죄송하다며 뭐라 말씀을 드려야할지 모르겠다는 말에도 반응 하나 보이질 않았다. 어느 순간 노인의 의식이 끊어져 있었다.

*

노인의 눈에선 하염없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몇 번이고 실신할 것처럼 이상한 소리를 내더니 끝끝내 견뎌내며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 뒤의 이야기는 안 봐도 뻔했다. 노인이 기억을 잃자, 병원에서는 오히려 좋은 기회다 싶어, 이 사건을 묻으려 했을 것이었다. 노인의 아내의 죽음은 그저 수술도중 노인의 아내가 견디지 못 해서 죽은 것이라고 꾸미고선 노인과 그의 자식들에게 둘러댄 것이었다.

옆쪽을 쳐다보니 간병인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다시 노인을 보려는데 문득 침대 뒤 쪽의 벽에 눈길이 갔다. 빨간 색종이로만 접혀진 하트에 가운데의 압정. 노인이 의식을 잃기 전에 봤던, 마지막 아내의 사진이 그의 무의식 속에 남아 계속 반복되었던 모양이었다.

, 미안하오. 내가 미안하오. 내가 너무 약해서 당신이 어떻게 갔는지 조차 잊어버렸어.”

노인은 무엇이 보이는지 눈을 감은 채 숨이 넘어갈 듯 헐떡거리며 연신 중얼거리고 있었다. 지금 노인의 눈앞에 먼저 가버린 아내가 보이는 것일까. 그는 연신 사과만 하고 있었다.

*

괜찮아. 하나님이 날 당신보다 일찍 부른 것뿐이야.”

노인은 갑자기 시야가 하얗게 변하며 자신의 앞에 나타난 아내의 모습에 그저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아내는 그런 노인의 손을 다잡고 그를 달랬다.

당신은 아직 더 살아있어야 해. 하나님께선 아직 당신은 부르지 않았어. 우리 어린 자식들 사는 것 좀 더 보다 와야지. 당신까지 갑자기 가면 우리 아이들 가슴에 대못 박는 거야. 하나님도 그걸 아셔서 우리를 한 번에 다 부르지 않으신 거야.”

노인은 아내의 말에 그저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신이 없는데 나만 여기에 남아있으면 뭐해. 같이 가야지.”

좀 더, 좀 더 우리 아이들 사는 것 보다 와. 그리고 나에게 알려줘. 내가 간 사이에 우리 자식들이 이만큼 더 자랐고, 우리 손자들이 얼마나 더 예쁘게 컸는지.”

노인의 아내의 표정이 너무 애절해보여서, 그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너무 슬퍼하지 마. 난 괜찮아.”

*

노인이 일어나서 해준 이야기는 놀라웠다. 최면상태에서 시술자의 통제에서 벗어나 다른 장면이 보였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다. 처음에 충격을 줄이기 위해 마련한 장치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게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애써 그 이유를 찾으려 애쓰고 싶진 않았다. 굳이 기적을 논리로 푼다는 것도 어리석은 일일 것이었다.

병원에는 따로 배상요구는 안할 겁니다. 그 의사 선생님도 나름 고생하고 있겠지요. 제 아내도 다 때가 돼서 간 거라고 하니. 아내는 제가 거기에 얽매여 사는 걸 원치 않겠죠. 산다는 것이 다 그런 게 아니겠어요. 말없이 왔다가, 말없이 가는. 저도 곧 그녀를 따라가겠지만, 그녀 말대로 지금은 좀 더 남은 시간을 소중히 여기고 자식 놈들이나 더 보다가 따라갈렵니다.”

이 말을 하는 노인의 표정은 오늘 하루 본 어느 표정보다 너무나도 후련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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