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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잿빛 우물

2013.01.12 08:11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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잿빛으로 가득 찬 하늘. 그 아래 자리 한 시계추가 바삐 고개를 저었다. 째깍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어 머릿속으로 울렸다.
시간이 없다, 시간이.
규칙에 따라 다급히 움직이는 그림자들이 무채색을 띠었다. 차갑게 얼어있는 세계가 마치 쳇바퀴인양 똑같은 방향으로 돌고 돌았다.
그 안에서 홀로 독특한 색채를 타고난 존재들은 결국 배타적인 시선 속에서 죽어가고, 남은 것은 그저 꼭두각시.
그 꼴이 너무도 우스웠다.
개성도, 특별함도 없이 사회가 정한 하늘에서 벗어나지 못 하는 이들이 모여, 늘 똑같은 짓만 반복하고 있지 않나. 물론 나 또한 그와 마찬가지지만.
이렇게 돌고 돌다, 결국 마모되어 쓸 수 없게 되면 폐기물처럼 버려지는 것일 게다. 그런데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막상 인정하자면 입맛이 썼다.

"대장암 말기입니다."

그 소리에 나도 모르게 '예?'라고 되물었다. 모터라도 켜놓은듯 윙윙 울려오는 고막이, 이야기를 듣고도 제대로 받아들이질 못했다. 창자도 찢어질듯 아픈데, 이젠 귀까지 고장난 걸까.
아니. 사실은 애초부터 이야기 자체를 듣기 싫었던 건지도 모른다.

"종양이 이미 퍼질데로 퍼졌습니다. 대장암 말기입니다."

덜컹, 하고 내려앉는 심장과 함께 빠른 속도로 식어가는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분명 암. 암이라 했다. 드라마에서 주인공들이나 흔히 걸려 눈물, 콧물을 짜내는 바로 그 병.
아니. 그것과는 조금 다르지.
드라마의 여주인공들이 밥먹듯이 걸리는 뇌종양, 위암이 아니라, 하필 대장암이니.
게다가 말기랬다.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라는 생각을 하기엔 이미 머릿속이 텅 비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내 나이 이제 겨우 스물일곱. 아직 결혼도, 제대로 된 연애도 못 해봤다. 둘이나 딸린 동생들을 뒷바라지 하느라 그 흔한 하이힐도 못 신어보고 여기까지 왔다. 그동안 무엇을 했는지 회상해보면 항상 일, 일, 일, 일, 일...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은 나태하게 굴어도 좋았을텐데. 아니, 한 달만 일찍 병원에 올 것을.
제 몸이 아픈 줄도 모르고 무식하게 일만 했다.

바보처럼,
돈만 부르짖었다.



#

의사에게 치료가 어떻고, 앞으로 남은 시간이 어떻고를 들었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만 '암'이라는 단어만 남아 뇌리를 어지럽혔다.
이제 어찌해야할까.
과거에 보았던 어느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사직서를 던지고 여행이나 다닐까. 아니면 울며불며 친가로 뛰어가 신세한탄이나 할까.
도무지 결정을 내릴 수가 없다.
그렇다고 같은 회사의 친구에게 하소연하자니, 그 계집애도 결혼 준비에 바쁘다는 사실이 떠올라 섣불리 연락할 수 없었다. 게다가 둘 있는 동생들은 본인의 일만으로도 벅찼다.
결국 남은 건 나뿐. 마모된 부품처럼 폐기되는 거다, 이렇게.
그걸 실감하는 순간, 가슴이 먹먹하게 젖어들었다. 코끝이 시큰거리며,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울음소리를 억누르려 입을 막고 입술을 악무는데, 그것이 오히려 더 서러웠다. 나는 어째서, 소리 내어 울지도 못하는 걸까.
가슴이 아프다. 불에 달군 돌덩이가 들어앉은마냥 뜨겁고 고통스럽다.
차라리 이대로 녹아버리면 좋으련만,
아직 살아 숨쉬고 있었다.



#

그 길로 집에 와 방구석에 틀어박혔다.  그리고는 몇 시간이고 눈물만 짜내며, 두 끼를 꼬박 굶었다. 그토록 울었건만, 멍청히 있다보면 또 그 소금물이 흘렀다.
퉁퉁 부어 쓰라린 살갗에 계속, 또 계속.
이제는 그것을 닦아내는 것도 무의미해져, 고개를 들었다. 창문의 촘촘한 방충망 사이로 어둑한 하늘이 보였다. 그것이 남빛인지 흑빛인지는 헷갈리지만, 달만은 뚜렷한 백색으로 떠올라 발길을 드리웠다.
물기 젖은 눈이 그 빛자락에도 아려왔다.
그동안 하늘을 올려다 본 적이 몇 번이었더라... 기억을 차근차근 되짚어보았지만 알 수가 없었다. 확실한 건, 굉장히 오래되었다는 것.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일까. 어차피 하늘은 늘상 똑같고, 나는 이제 사라져간다. 재활용도 못할 폐기물이 되어서.



#

시한부를 선고받았다 해서 늘 겪어오던 일상이 변하지는 않았다. 울다 지쳐 잠이 들고 깨어나니 출근할 시간이었고, 어느새 회사에 있었다. 눈이 퉁퉁 부은 상태라 주위 시선이 묘하긴 했지만, 그다지 신경쓰진 않았다.
어차피 고졸 학력의 여직원 하나가 나간다해도 회사는 끄덕없고, 난 지금 사직서를 내면 마땅히 할 일이 없었다. 병원에서 치료가 어쩌니 하는 이야기를 듣긴 했으나 그건 그저 희망고문. 별 의미도 없을 것이라 결론 내린지 오래였다.
게다가 죽음 자체도 별 감흥이 없었다. 어제 너무 울어버린 탓인지는 몰라도, 모든 것이 저만치 멀리 있는듯 불분명한 느낌이었다.
아니, 솔직히 살고싶은 마음은 있었다. 다만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일찌감치 포기할뿐.
그리고 점심시간. 창자가 찢어질듯 아픈 느낌에 식사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저 병원에서 처방받았던 진통제만 삼키고 앉아 사무실을 지켰다.

나의 세계, 나의 하늘은 어젯밤 창밖으로 보였던 그것이 아니었다. 바로 이곳. 잿빛 시멘트로 밖과 차단된, 인간들의 우물이었다.
내 끝은 아마도 이곳에서 맞게 되지 않을까.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넓은, 하지만 결국 똑같은 잿빛의 사회에서 의미없이 죽어갈 지도 모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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