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못 하나가 모자라서For Want of A Nail

메리 로비넷 코월Mary Robinette Kowal


『아시모프』 2010년 9월호

2011년 휴고단편상 최종후보

http://www.maryrobinettekowal.com/journal/for-want-of-a-nail-is-a-hugo-nominee/


라바는 콧날을 내리누르는 VR 인터페이스 안경을 한 손으로 조절하면서 코델리아의 내부에 다른 손을 파묻고 있었다. 공간이 부족해서 AI의 섀시 속에 있는 접속용 해치에 단안렌즈가 달린 플렉시블 샤프트와 손을 통과시키기가 힘들었다. 옆 격실에서 울리는 드럼 소리와 웃음소리가 우주선의 플라스틱 벽을 뚫고 새어 나오는 소리를 들으니 여동생이 연 테마 파티가 한창 무르익은 듯했다.

카메라가 하나 밖에 달려있지 않은 인터페이스 안경으로는 거리감을 느낄 수 없어서 라바는 송신기 케이블을 다시 끼우는 데 애를 먹고 있었다. 이 섀시는 수리할 필요가 없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전혀. 수백 년을 업그레이드 하지 않고도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된 것이다.

라바가 케이블을 끼워서 작동시키지 않는다면 코델리아는 자신의 백업을 장기 메모리에 복사하지 못할 것이다. 코델리아는 활성 메모리에 일주일 치 기억밖에 저장할 수 없었다. 느릿느릿한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다.

케이블의 네모난 커넥터가 라바의 손가락에서 미끄러졌다. 또. “젠장!” 좌절에 빠진 그녀는 발로 바닥을 쿵쿵 굴렀다.

“못 하겠으면 다른 사람한테 맡겨.” 루도비코는 자기가 도와줄 수 있을 것처럼 고집스레 파티장에서부터 라바를 따라왔다.

“오빠가 뒤에서 내 목에 콧김만 안 내뿜으면 훨씬 빨리 할 수 있을 걸?”

“네가 코델리아를 안 떨어뜨렸으면 전혀 이 고생할 필요가 없었을 걸?”

라바는 단안렌즈를 안경 잭에서 뽑고서 오빠를 쏘아보고 싶은 마음을 겨우 억눌렀다. 루도비코가 학교에서 성적이 더 좋았을지는 몰라도 AI 돌보미는 라바였다. “파티로 돌아가서 번식 공부나 하지 그래?” 라바는 케이블 커넥터를 집어 들고 한 번 더 시도했다.

“뭐, 이—” 루도비코는 분노로 목이 잠겼다. 아무렇게나 내뱉은 말치고는 효과가 좋았다. 라바는 오빠가 생식 평의회에 청구한 일이 잘 안 풀렸나 보구나 하고 짐작했다.

루도비코가 다시 입을 여는 순간 코델리아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라바 잘못이 아닙니다. 제가 라바한테 절 들어달라고 말했습니다.”

“맞아.” 라바는 케이블에 집중하며 중심을 맞추려고 애썼다.

“그래. 그러고는 코델리아 네가 널 스스로 떨어뜨렸고.”

코델리아는 한숨을 쉬었고 라바는 정말로 입김이 피부를 간질이는 느낌이 드는 듯했다. “누굴 원망하고 싶으면 라바에게 달려든 브랜슨 콩코드를 원망하세요.”

라바는 대답하기도 귀찮았다. 라바와 루도비코는 한 시간 동안 똑 같은 대화를 되풀이했고 코델리아도 루도비코가 뭐라고 대답할지 잘 알고 있을 터였다.

루도비코가 프로그램처럼 말을 되풀이했다. “그건 무책임한 행동이었어. 라바는 안 된다고 했어야 했다고. 그 방에는 술에 잔뜩 취해서 떠들썩한 사람들이 가득했던 데다가 코델리아 넌 무척이나 소중한 자산이니까.”

라바는 AI 섀시의 부드러운 나무 쪽에 머리를 기대어 눈을 감고 오빠와, 안경에 떠오른 평평한 영상을 머릿속에서 몰아냈다. 손가락으로 케이블의 매끈매끈한 플라스틱 커넥터를 감싸고 흰색 사각형과 거기서 뻗어 나온 납작한 금색 전선을 마음속에 그려보았다. 소켓에 맞물릴 때까지 케이블을 앞으로 밀었다. 커넥터를 회전시키면서 팔에 느껴지는 미세한 마찰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이것은 간단하고도 쉬운 문제였다.

라바는 고장을 고칠 수 없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생각하기도 싫었다.

코델리아는 옛 기억을 다운로드 하지 못하면 계속 작동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조금씩 조금씩 지워야만 할 것이다. 이게 모두 라바가 코델리아에게 춤추자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그 말은 루도비코가 못 들었다. 라바가 커넥터 부분을 조금 더 돌리자 딱 들어맞는 순간이 느껴졌다. 커넥터를 앞으로 밀어 넣자 화가 날 정도로 쉽게 접속단자가 소켓에 미끄러져 들어갔다. 커넥터가 제자리에 꼭 맞았다. “좋았어. 이제 됐다.”

라바는 눈을 뜨고 케이블과 소켓이 연결된 눈부신 광경을 보았다.

코델리아가 주저하며 물었다. “연결됐나요?”

라바는 잠시 케이블을 생각하고 있다가 코델리아가 한 질문의 뜻을 깨달았다. 라바가 단안렌즈를 잭에서 홱 뽑자 안경이 투명하게 변했다. “모르겠어?”

빅토리아 시대 오크나무 휴대책상 모조품으로 개조된 코델리아의 직사각형 섀시는 라바가 사는 격실의 접이식 플라스틱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었다. 뒤에 서있는 놋쇠 카메라 두 대가 — 시대가 맞지 않다 — 라바를 향해 회전했다.

책상 위에는 코델리아의 실물크기 몸통 홀로그램이 떠있었다. 코델리아는 지금 빅토리아 시대에 살던 통통한 중년 여성의 모습이었다. 코델리아는 입술을 깨물었는데 그것은 불확실함을 나타낼 때 사용하도록 입력된 보디 랭귀지였다. “제 시스템에는 나타나지 않는군요.”

“아, 진짜, 라바. 내가 해볼게.” 잘생기고 말쑥한 루도비코가 카메라 케이블에 손을 뻗어 자기가 쓰고 있던 VR 안경에 끼우려고 했다.

라바가 그 손을 밀쳐냈다. “오빠 손은 너무 커.” 라바는 웅웅거리는 우주선 환기 장치 소리로 생명 유지 장치가 제대로 기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공기가 탁하고 악취 나는 느낌이 들었다. 라바는 오빠를 무시하며 AI에게 몸을 돌렸다. “장기 메모리를 재부팅 해야 돼?”

“그러면 안 됩니다.” 코델리아의 홀로그램이 마치 자기 속을 들여다 볼 수 있다는 듯이 아래를 응시했다.

“케이블이 확실히 연결되어 있나요?”

라바는 카메라 케이블을 다시 VR 안경에 연결하고 평평한 화면이 눈앞에 떠오르기를 기다렸다. 전송기 케이블은 소켓에 꽂혀 틈이 보이지 않았다. 라바는 손을 집어 넣어 케이블을 살짝 흔들었다.

“앗!” 코델리아가 숨을 헐떡였다. “잠시 거기 나타났어요. 아무 것도 잡을 수 없었지만 분명히 봤어요.”

AI의 경험은 라바의 일족처럼 평범한 사람도 이해할 수 있게 대부분 번역되었기 때문에 그 말을 다시 기계 용어로 바꾸는 일은 굉장히 초현실적으로 보였다. “합선됐어?”

“네. 그런 것 같아요.”

라바는 손을 케이블에 잠시 더 올려두고 여러 가능성을 생각해봤다.

루도비코가 말했다. “송신기 문제일지도 몰라.”

코델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그 순간에 나타났으니까 그건 아닙니다. 소켓에 금이 간 게 확실해요. 소켓 교환은 간단해요.”

라바가 웃음을 터뜨렸다. “네 내부가 굉장히 아늑하다는 것만 빼면 간단하지.” 전압계를 좁은 틈 사이로 꾸역꾸역 집어넣는 모습을 생각하니 끔찍했다. “왜 네가 다운됐는지 게오르고 아저씨한테 연락이 오는 데 얼마나 걸릴지 내기할래?”

코델리아가 콧방귀를 뀌었다. “전 다운되지 않았어요. 그냥 격리됐을 뿐이죠.”

라바가 손을 빼내고 피가 통하도록 주물렀다. “그럼…… 이제 중요한 문제는…… 창고에 예비 소켓 있지?” 라바는 카메라 케이블을 뽑고 뒤로 몸을 기대며 코델리아를 살폈다.

AI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저…… 전 기억이 안 나요.”

라바는 얼어붙었다. 장기 기억이 없으면 코델리아가 어떻게 될지는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일족이 어떻게 될지는 생각도 못했다.

코델리아는 일족의 연속성 자체나 다름없어 과거의 역사와 일족을 연결해주었다. 어떤 일족들은 다큐멘터리를 만든다. 일지를 쓰는 일족들도 있다. 라바의 일족은 세대우주선을 타고 항해하는 나날을 코델리아를 이용해 기록하고 관리했다. 더욱이 코델리아는 일족의 기록도 모두 통제했다. 출생, 사망, 결혼, 학점…… 이 모든 것들은 AI가 관리했고 코델리아는 VR 안경을 통해 일족과 항상 함께할 수 있었다.

“아, 그거 참 멋지네.” 루도비코가 손바닥으로 벽을 때리자 충격으로 플라스틱이 휘어졌다.

라바는 딱딱한 금속 바닥을 내려다보며 얼굴에 떠오른 낭패감을 숨기려 했다. “어디 보자. 우리 선조님들이 모든 물품을 여벌로 챙기셨다고 게오르고 아저씨께서 여러 번 말씀하셨으니까, 분명 예비 부품이 있을 거야. 맞지?”

“아마도요?” 망설임 섞인 코델리아의 목소리는 듣기 괴로웠다. 지금까지 늘 코델리아는 모르는 것이 없었다.

“그럼 아저씨께 재고 목록 복사본이 있는지 여쭤보자. 알겠지?” 라바는 VR 안경을 조절했고 얼굴에서 불안을 지우려 애써 미소 지었다.

코델리아가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 전송할 수가 없어요.”

“맞다…….” 라바는 아저씨의 연락처를 모른다는 데 생각이 미쳐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오빠, 아저씨 연락처 알아?”

루도비코가 뒤돌아 벽에 기대며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 항상 코델리아가 대신 연락해줬으니까.”

“죄송합니다.” 코델리아가 눈을 내리깔자 순수한 불행을 그림으로 그리면 그런 모습이 될 듯했다.

루도비코가 손을 내저었다. “그냥 인쇄해주면 직접 걸게.”

라바는 그렇게 초보적 실수를 저지른 오빠를 보고 즐거워서 눈을 굴렸다. “오빠, 코델리아가 우리한테 전송할 수 없으면 프린터에도 전송할 수가 없잖아.” 라바는 VR 키보드를 불러내 눈앞에 띄워 두 손을 올리고 키보드를 칠 준비를 했다. “불러줘 봐.”

루도비코가 비웃었다. “정말 구식이네.”

“시끄러워.” 라바는 코델리아가 불러주는 전화번호를 가상 키보드에 입력했다.

라바가 통화를 실행하려 했을 때 코델리아가 말했다. “앗! 직접배선! 죄송해요, 좀 더 일찍 생각해냈어야 했는데.” 코델리아는 어깨에 힘을 빼고 가슴에 손을 얹으며 막 충격에서 벗어난 빅토리아 시대 여성을 완벽하게 흉내 냈다. “절 우주선 메인 시스템에 유선으로 연결하면 시스템을 경유해서 제 기억에 접근할 수 있어요.”

“잘 될까?” 라바가 키보드에서 손을 뗐다. 라바는 컴퓨터가 다른 장치와 외부 케이블로 연결된 모습을 본 기억이 없었다.

“될 거예요.” 코델리아가 드레스 여밈을 확인하는 듯이 섀시 뒤쪽을 내려다 봤다.

라바는 키보드를 없애고서 코델리아 섀시 뒤로 돌아갔다.

반짝거리는 놋쇠 다이얼 두 개 아래쪽에 어두운 직사각형 네 개가 있었다. 라바는 그런 것이 있는지도 몰랐다.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접속 단자를 노려 보았다. “뭐, 연결하기는 쉬워 보이네. 대체 어디서 케이블을 구할지는 알겠어?”

“다른 예비 부품이 있는 곳이지.” 루도비코가 “이 멍청아”란 말은 하지 않았지만 라바는 그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은…… 어딘데?” 라바는 쪼그리고 앉아 접속 단자를 살폈다. 이 단자들은 AI 내부에 있는 케이블과 소켓이 달라 보였다. “왜냐면 내 생각에 우리 일족은 출항한 후로 한 번도 그 포드에 안 가봤을 거 같은데. 예비 부품이 실려있는 포드가 어떤 건지 안다는 거야, 아님 화물칸에서 우리 포드를 몽땅 가져오는 데 돈을 쓰자는 거야?”

“네 돈을 써. 네가 떨어뜨렸으니까.”

코델리아가 숨가쁘게 웃었다. “제발 싸우지들 좀 마세요. 전 기억 상실은 좋은 경험이라고 위로하는 중이라고요. 개성이 넘치니까요.”

“어디 보자. 잠깐.” 라바가 손을 들었다. “게오르고 아저씨한테 재고 목록이 있잖아.”

코델리아는 얼굴이 환해졌다. “아, 아저씨를 귀찮게 할 필요도 없고 창고에서 포드를 가져오는 데 안달할 필요도 없어요. 파조네 위탁판매점에 가면 돼요. 케이블을 가진 사람이 분명 또 있을 거예요.”

고개를 끄덕이는 라바는 안도감에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그래. 그 말이 맞아. 그럼 게오르고 아저씨께 어떤 케이블을 쓰는지만 여쭤보면 되겠다.”

“절 파조네 가게에 가져가면 어때요? 그럼 아저씨께 여쭤보지 않아도 케이블이랑 접속 단자를 맞춰볼 수 있잖아요.”

“그거 좋은—”

라바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루도비코가 고개를 저었다. “넌 죽어도 게오르고 아저씨한테 이야기하기 싫구나?”

틀린 말은 아니었다. 게오르고가 코델리아의 돌보미에서 물러나고 일족 평의회 자리를 맡았을 때 놀라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게오르고는 AI에 해박했고 모두들 그가 늙어 쓰러질 때까지 직무를 계속할 것이라 생각했다. 라바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스물 여섯 살이라는 어린 나이로 코델리아의 돌보미 임무를 이어받았다. 친척들에게서 그 일이 실수였다는 말만은 듣고 싶지 않았다.

라바는 이를 갈며 키보드를 띄워 게오르고 아저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평소보다 신호가 오래 울렸다. 마침내 연결이 되어 같은 방에 있는 것처럼 VR 안경 너머로 나타난 게오르고는 눈이 빨갛고 부어 있어서 한참을 운 모습이었다. “여보세요?” 게오르고는 목소리가 떨렸다.

라바는 등골이 오싹해져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게오르고 아저씨? 괜찮으세요?”

“난…… 저기 난…….” 게오르고는 누군가를 찾기라도 하는 듯 VR 안경 건너로 왼쪽을 쏘아봤다. “코델리아가 어디 있는지 알아?”

라바가 움찔했다. 말하고 싶지 않은 주제로 바로 건너뛰었다. “네, 그게 말이죠. 저기, 들어보세요. 코델리아는 괜찮은데 부품 하나를 바꿔야 돼요.”

게오르고가 혼란스러운 듯 눈살을 찡그리자 이마에 주름이 졌다. “부품?”

“송신기가 문제인 거 같아요.” 라바가 문제를 가볍게 넘기면 게오르고는 일이 별 탈 없이 잘 처리되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어쨌든 외부 유선으로 연결하려면 어떤 케이블을 쓰는지 아시는지 여쭤보려고 연락 드렸어요.”

게오르고가 작게 중얼거리면서 귀를 쭉 잡아당겼다. “그런데 코델리아는 어쩌고? 어디 있는지 알아?”

“제 방에요.” 라바가 고개를 돌려 코델리아의 섀시가 화면에 들어오게 했다. “보이시죠? 솔직히 말씀 드리면 소켓을 교환해야 돼요.”

“네 방? 왜 코델리아가 너랑 있어? 왜 네가 코델리아를 데리고 있냐고?” 게오르고가 목소리를 높이더니 소리를 질렀다. 라바는 아저씨와 코델리아의 보수 관리를 두고 다툰 적이 있기는 하지만 이건 좀 도가 지나쳤다. 대단히. “코델리아는 나하고 있어야 해.”

라바는 아저씨한테 맞은 것처럼 몸이 흔들렸다. 게오르고가 AI 돌보미에서 물러난 후 코델리아는 그 많은 친척 가운데 라바를 선택했다. AI가 자기를 떨어뜨렸다고 라바를 비난하지 않는 이상 게오르고도 라바를 비난할 자격이 없었다. “아저씨. 이제 제가 돌보미고 이 일도 잘 처리할 수 있어요. 그냥 케이블만 있으면 된다고요.”

“코델리아는 어디 있어? 보고 싶다.”

라바는 안경을 벗어 던지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참았다. 손가락이 아플 정도로 주먹을 꽉 쥐며 말했다. “말씀 드렸잖아요. 제 방에 있어요.”

“네 방이라니……. 모르겠다. 넌 누구야?”

라바는 얼어붙어 숨도 쉬지 못했다. “무슨 말씀이세요?”

아저씨는 눈을 크게 뜨고 노려보았다. “이제 너랑 말 안 할래.”

게오르고가 손을 앞으로 뻗어 연결을 해제하자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라바는 가만히 서서 숨을 헐떡거렸다. 손이 떨렸다. 방금 나눈 대화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아저씨는 가끔 신경질을 부렸지만 굉장히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하지만 방금 전에는 꼭 어린 조카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았다. 라바는 땀이 흐르는 얼굴을 손으로 쓸었다.

루도비코가 히죽거렸다. “화나셨지, 응?”

라바는 오빠를 무시하며 재다이얼 키를 누르고는 아저씨의 휴대전화 연결음에 귀를 기울였다. 신호가 울릴 때마다 괴상한 광경이 다시 떠올랐다. 게오르고 아저씨께서 울고 계셨어. 띠리링. 게오르고 아저씨께서 안경을 쓰고 코델리아를 찾고 계셨어. 띠리링. 게오르고 아저씨께서 내가 누구냐고 물으셨어.

분명 라바가 착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저씨의 눈빛은 낯설었고 라바를 놀리는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신호가 음성 사서함으로 넘어가자 라바는 전화를 탁 꺼버렸다.

좋아. 이제 전화를 무시한다 이거지. 라바는 코델리아를 데리고 아저씨의 숙소로 가기로 했다. 전혀 생각도 못한 일이었지만 루도비코와 말싸움하던 아까보다는 일보전진이었다. “자, 게오르고 아저씨께 가자.”

코델리아가 미소 지었다. “정말 그럴 필요 없어요. 우리끼리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요. 위탁판매점에 절 데려가면 맞는 케이블을 찾을 수 있어요.”

라바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게오르고 아저씨가 정상인 것처럼 행동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가상현실처럼 환상이었다. 그저 케이블 하나가 문제라면 케이블을 찾으러 갔겠지만 라바는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라바가 코델리아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러자. 전원을 내리고—”

“정말 믿을 수가 없네. 믿을 수가 없어.” 루도비코가 두 손으로 허리께를 짚었다.

“나 귀 안 먹었거든?” 라바는 다시 코델리아에게 얼굴을 돌렸다. “위탁판매점에 갈 때까지 잠 좀 자. 회랑을 지나가면서 괜히 메모리를 낭비할 필요는 없으니까.”

코델리아는 라바와 루도비코를 살펴보면서 살짝 망설였다. “좋은 생각이에요. 도착하면 깨워 주세요.” 코델리아의 홀로그램이 깜박거리다 사라졌다.

라바는 경고등이 스러진 후에야 참고 있던 숨을 내쉬었다. 코델리아가 거짓말을 꿰뚫어볼까 걱정했다.

루도비코가 테이블 옆에 놓인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너도 참 대단하다.”

라바는 오빠를 잠시 노려보다가 코델리아가 다운됐기 때문에 게오르고 아저씨와 나눈 대화가 오빠에게 중계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쳤다. “나를 몰라봐.”

“뭐? 뜬금없다, 야. 누가 너를 몰라본다고?”

“게오르고 아저씨. 뭔가 잘못 됐어…….” 라바의 목소리가 무거운 의심에 짓눌려 서서히 약해졌다. “나랑…… 나랑 같이 갈래, 오빠?”

루도비코는 입을 열고 벌써 라바를 모욕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부탁해.”

루도비코가 눈을 깜박거리다 한숨을 쉬었다. “이런, 이런. 너 정말 쫄았구나. 아무도 널 해고하진 않을 거야.”

“못 믿겠지만 내 걱정은 그게 아냐.” 라바가 꺼져있는 코델리아의 카메라를 흘끗 쳐다봤다. “나랑 같이 가 줘.”

“알았다, 알았어. 같이 갈게.”

루도비코가 라바를 화나게 만들기는 했지만, 라바는 기묘하게도 자기를 그렇게 싫어하는 사람과 함께 있으니 위로가 됐다. 지금 당장은 알고 지내던 사람이 반가웠다.

***

라바가 문을 두드려도 게오르고는 대답이 없었다. 사람들이 지나쳐가는 길가에서 라바가 숫자를 세며 기다리고 있으려니 루도비코가 라바 옆을 지나 문을 마구 두드리며 덜컹거리게 했다. 스피커가 치직 소리를 내며 켜지더니 아저씨의 떨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라바예요.”

“루도비코도 왔어요.”

라바가 한숨을 쉬었다. “코델리아를 데리고 왔어요.”

문이 열리고 게오르고가 의심을 숨기지 않은 표정으로 내다보았다. 머리카락은 부스스했고 셔츠에는 가슴에서 배까지 갈색 얼룩이 한 줄 묻어 있었다. 쓰고 있던 안경 한 구석에 휙 눈길을 던졌다가 라바의 등 뒤를 쳐다보았다. “어디 있어?”

뭔가 이상했다. 라바는 정신을 집중하느라 고개를 갸웃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라바는 가슴에 품고 있던 섀시를 살짝 앞으로 내밀었다. “바로 여기 있잖아요.”

게오르고가 성을 내며 머리카락을 움켜쥐자 머리카락이 곤두섰다. “안 보여.”

루도비코가 말했다. “라바가 말씀 드리지 않았던가요? 라바가 코델리아를 떨어뜨려서 코델리아는 기억을 다운로드 할 수 없어요. 지금은 기억 공간을 절약하려고 자고 있고요.”

루도비코가 기꺼이 돕고 있다고 해서 모욕하는 습관을 버리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서 다행이었다. ”들어가도 돼요?” 라바가 문에 한 걸음 다가섰다.

게오르고는 아랫입술을 씹으며 평상시처럼 머리를 비스듬하게 기울이고 있었지만 무언가를 찾아 여기저기 눈을 굴렸다. 게오르고가 망설이고 있었기 때문에 라바는 앞으로 밀고 나가기로 마음 먹었다. 라바가 문턱을 넘자 게오르고가 뒤로 물러섰다. 숙소는 엉망이어서 게오르고가 서랍을 몽땅 비워낸 것처럼 옷가지와 이부자리가 방안에 널브러져 있었다. 라바의 방과 같은 위치에 책상이 있었기에 라바는 구겨진 셔츠를 밀쳐내고 코델리아의 섀시를 내려놓았다.

라바가 기상 버튼에 손가락을 대고 누르자 짤깍하는 진동과 함께 조용한 선율이 울렸다.

그 소리가 사라지기도 전에 코델리아의 카메라가 회전해 라바를 향하며 코델리아의 머리와 어깨가 섀시 위로 나타났다. “성공했나요?”

게오르고가 흐느끼며 말했다. “코델리아!” 게오르고는 라바를 지나쳐 떨리는 손가락을 내밀었다.

라바는 코델리아에게 눈길을 고정했다. 코델리아의 영상은 변함이 없었다. 전혀. 인간을 상대하도록 프로그램된 AI치고는 굉장히 딱딱해졌다. 코델리아는 얼굴을 게오르고에게 향한 채 카메라로 라바를 잠시 훑어보더니 카메라를 돌렸다. 코델리아는 몸가짐이 부드러워지더니 영상이 변해 빅토리아 시대 드레스의 높다란 목깃이 내려앉아 가슴이 크게 드러났다.

속눈썹은 길어졌고 입술은 풍만하게 부풀어올랐다. “게오르고, 내 사랑, 방이 왜 이래요?” 목소리는 뜨거웠다.

“널 찾고 있었어.” 게오르고는 팔을 양 옆으로 벌렸다. “왜 날 떠난 거야?”

“당신한테 선물을 하나 하려고요. 당신 선물 좋아하시잖아요?”

게오르고가 어린 아이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라바가 알던 자신감 넘치고 도도하던 사람은 사라졌다. 라바는 몸을 떨며 팔로 몸을 감싸 안았다.

“좋아요. 이제 누워서 낮잠을 자고 일어나면 선물을 드릴게요.”

“안 졸려.”

루도비코가 라바 옆을 돌아 코델리아에게 몸을 숙였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라바는 몇 년 동안 코델리아의 독특한 버릇을 봐왔기 때문에 살짝 망설이는 AI를 금세 눈치챘다. “죄송하지만 그건 저와 사용자 사이의 기밀사항입니다.”

라바는 고개를 저었다. 루도비코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는 않아도 코델리아는 분명히 질문을 피하고 있었다. 라바는 침을 꿀꺽 삼키고 코델리아의 인터페이스에 손을 올려 지문인식기에 갖다 댔다. “인증 보고 실행. 게오르고 아저씨의 상태는?”

코델리아가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깨물었다. “게오르고는 치매입니다.”

루도비코가 숨을 죽이며 웃었다. “말도 안 돼. 어제 아저씨랑 얘기했는데 아무렇지도 않았다고.” 공기 청정기 소리가 방안의 침묵을 깨뜨렸다.

“그게, 아저씨가 더 이상 생산적이지 않다면 재순환 됐어야 하잖아. 자원을 보존하는 데 가장 기본적인 규정이라고.”

“아저씨를 감싸고 있었구나?” 라바는 온몸을 떨고 있었지만 목소리는 단조롭고 차가웠다.

“네.”

무슨 말을 하려니 목이 잠겼다. 이런 일을 앞두고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코델리아는 거짓말을 했고, 거짓말을 계속 해왔다. 치매라니.

루도비코가 라바의 어깨를 잡고 옆으로 밀어냈다. “얼마나 그랬지?”

“모르겠어요.” 코델리아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지경이었다.

“헛소리 마.” 루도비코가 테이블을 내리치자 충격으로 코델리아의 섀시가 덜컹거렸다. 게오르고 아저씨가 앞으로 뛰어들어 루도비코의 팔을 잡았다. “코델리아한테 손대지 마!”

몹시 화가 난 루도비코가 게오르고를 떨쳐냈다. 게오르고가 코델리아에게 다가가려 손을 허우적거렸다. 루도비코가 손바닥으로 게오르고의 가슴을 있는 힘껏 밀쳤다. 게오르고가 기침을 하며 숨을 토해냈다. 게오르고가 바닥에 무너져 울기 시작했다.

라바가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오빠! 이게 무슨 짓이야?”

루도비코가 움츠리고 있는 게오르고에게 손가락질했다. “젠장, 난 얼마나 오랫동안 이랬는지 알고 싶다고.”

“그러지 마.” 라바도 알고 싶었다. 그래도 게오르고 아저씨를 공격하다니, 저렇게 누가 봐도 정신이 나간— 라바는 생각을 망설였다. 아저씨가 치매라면 예전에 재순환 됐어야 했다.

“내 말 듣고 있어, 라바? 우리 AI가 규정을 위반했다고.” 휙 돌아선 루도비코는 분노에 사로잡혀 목에 힘줄이 불거져 있었다. “언제부터 이 모양이 된 거야?”

루도비코를 향해 고개를 든 코델리아는 눈을 내리깔았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발병 날짜는 장기 메모리에 기록되어 있어요.”

루도비코는 누군가를 때리고 싶어하는 다섯 살배기처럼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다. “못 믿겠어. 거짓말이야.”

코델리아가 빅토리아 시대 여성의 얼굴을 분노로 찡그리며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전 거짓말을 할 수가 없어요. 오도할 수는 있지만 거짓말할 수는 없어요. 진실을 알고 싶지 않으면, 보고하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묻지를 마세요. 여러분은 아무 것도 몰라요. 제 존재가 어떤 것인지 모른다고요.”

코델리아의 겉모습은 홀로그램에 불과했지만, 라바는 코델리아가 테이블에서 내려와 루도비코를 때리려고 한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지난 달이었어? 세 달 전이었어? 뭔가 실마리는 있을 거 아냐?”

“저는 몰라요.”

“오빠, 그게 무슨 상관이야?”

루도비코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중요하지. 코델리아가 우리 아저씨를 감싸고 있었다면, 내가 생식하지 못하도록 방해한 사람은 바로 코델리아란 말이니까.”

공기펌프가 방안 공기를 순환시키며 윙윙거렸다. “뭐?”

루도비코가 실실 웃었다. “게오르고 아저씨께서 생식 위원회에 계셨다는 거 몰랐어? 당연히 몰랐겠지. 여자가 생식하는 건 생물학적 의무니까. 자궁만 있으면 준비 끝이지. 난 달라. 혹시나 누가 원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걸고 시험관에 씨를 뿌리게 해달라고 애걸복걸해야 돼.” 루도비코가 코델리아를 쏘아봤다. “난 성격이 불안정하다면서 거부당했어. 내가 얼마나 불안정해질 수 있는지 한번 보여줄까?”

“이 일은 기억이 없습니다.”

루도비코가 목을 꺾으며 코델리아를 노려봤다. “그것 참 편리하네.”

“대답을 듣고 싶으시면, 라바를 도와서 케이블을 찾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 말이 맞아.” 라바는 훌쩍이는 아저씨를 달래려 어깨를 토닥거렸다. “코델리아, 뭔지는 몰라도 게오르고 아저씨가 멀쩡하게 보이도록 한 일을 좀 해 봐. 그럼 재고가 어디 있는지 아저씨께서 알려주실 테니까 가서 케이블을 가져오면 돼.”

라바는 코델리아가 터뜨린 웃음에서 씁쓸함이 느껴져서 놀랐다.

“아직 모르시겠어요? 전 그 동안 게오르고가 말할 때마다 VR 안경을 이용해서 할 말을 일러줬어요. 게오르고는 제가 아는 것만 아는데 전 재고가 어디에 있는지 몰라요.”

“왜지? 왜 그 동안 아저씨를 감쌌어? 보고해.”

코델리아의 눈이 격노로 활활 타올랐다. “보고 드립니다, 돌보미 님. 게오르고가 효용이나 용도가 없다고 일족 평의회가 판단한다면 게오르고는 재순환소로 가겠죠. 전 게오르고가 계속 유용하도록 해왔습니다.”

“아니, 그건 나도 알아. 내 말은 왜 아저씨를 재순환소로 가지 않게 했냐고?” 라바는 이해하려고 애썼다. “나도 거긴 가기 싫지만, 아무도 안 간다면 우주선에는 사람이 넘쳐나서 우린 모두 굶주리게 될 거야. 보존 규정을 가르쳐준 사람은 바로 코델리아 너랑 게오르고 아저씨이잖아. 왜 그 규정을 깬 거지?”

라바 앞에 선 루도비코가 묵묵히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고요한 가운데 바닥에서 몸을 흔드는 게오르고가 훌쩍이는 소리만 들려왔다. 게오르고는 얼굴을 뒤덮은 콧물과 눈물을 닦지도 않았다.

AI의 얼굴에서 자신감이 사라졌다. “기억나지 않아요. 게오르고를 계속 살게 하고 그 사실을 숨기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만 떠올라요.”

“글쎄, 이제는 비밀이 아니잖아?” 루도비코가 아저씨를 바라보며 혐오감에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그럴지도요. 다른 사람들에게 말한다면요. 잘은 모르겠지만 규정에 관한 제 프로그램을 무시할 만큼 확실한 이유가 있었다면 어떡하죠? 경솔하게 뭔가 바꾸지 않는 편이 현명할지도 몰라요.”

라바는 망설였다. 그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AI가 지닌 금기는 깨뜨릴 수가 없어서 라바가 어릴적부터 몸에 밴 습관보다 강했다. 코델리아는 그 규정에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잠깐.” 라바는 뭔가에 생각이 미쳤다. “네 행동은 우주선의 규정 기록 원본에 따라 규제 받잖아. 지금 송신을 할 수 없다면 그 규정이 뭔지 어떻게 알아?”

“읽기 전용 내장 메모리에 사본이 있어서 업데이트 할 때마다 동기화 돼요.”

유감이었다. 라바는 해킹할 수 있는 예비 송신기가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머리를 흔들어 희박한 희망을 지웠다. “다음 백업 예정 시각까지 얼마나 남았어?”

코델리아가 계산에 몰두하며 위로, 그 후엔 왼쪽으로 눈을 돌렸다. “한 시간 반이요. 하지만 한 번은 백업을 건너뛰어도 평상시보다 좀 더 오래 메모리에 저장할 수 있어요. 일주일은 기억을 삭제하지 않아도 괜찮을 거예요.”

라바는 뻣뻣했던 관절들에 힘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라바는 자료들을 버려야 할세라 근심했었다.

“그래.” 루도비코가 주먹으로 벽을 두드리며 주의를 끌었다. “듣고 있어? 네 기억을 내버릴 필요가 없어서 참 다행이다, 코델리아. 그런데 그 동안 우리 생활은 기록되지 않을 거야. 어떡하면 좋겠냐?”

라바가 오빠를 쏘아봤다. “어디 적어둬. 기록하지 않아도 어차피 오빠한테는 오빠 생활을 궁금해 할 자손도 없을 테니 걱정 안 해도 되겠지만.”

루도비코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며 주먹을 치켜들고 라바에게 다가왔다. “그러니까 아무도 이 일을 기록하지 않는단 말이지, 응?”

“전 있어요. 전 보고 있다고요.” 코델리아의 목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좋아.” 루도비코가 팔을 내렸다. “하지만 일족에게 라바가 저지른 실수를 말할 거야.”

“그러시던가. 우주선을 다 걸어 돌아다니면서 한 사람 한 사람 찾아내 봐. 아니면 내가 코델리아를 수리할 때까지 기다려.”

게오르고 아저씨가 고개를 들었다. “코델리아? 무슨 일인지 모르겠어.”

코델리아가 부드럽고 편안한 목소리로 다독였다. “게오르고, 게오르고……. 낮잠 잘 시간이에요. 아무 일 없어요. 낮잠을 빼먹으셨군요.”

라바는 코델리아가 말로 게오르고 아저씨를 구슬려 일으켜 세우고 세수를 하고 침대에 눕게 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여전히 아저씨는 성마르고 얼빠진 모습이었지만 라바는 이제 아저씨의 숨겨진 일상을 들을 수 있었다. 코델리아는 뒤에서 꼭두각시를 조종하듯 게오르고를 구슬려 행동 하나하나를 지시했다. 코델리아가 아저씨의 삶은 그럴 듯하게 꾸며냈어도 아저씨는 빈 껍질이었다.

***

복도가 근무를 교대하는 사람들로 북적거리기 시작했을 때 라바는 위탁판매점에 들어섰다. 카운터 뒤 높은 의자에 앉아 독서를 하는 파조는 달리기라도 하다 온 사람처럼 민머리가 땀에 번들거렸다.

가게에는 잘 정돈된 선반과 받침대가 여러 줄로 꽉 차있었고 그 안에 여러 세대를 거치며 폐기된 물건들이 잘 분류되어 들어있었다. 긴 소매 셔츠, 종이, 펜, 케이블, 은제 다기 하나. 모든 일족들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 물건들만 가져왔지만, 자원이 한정되어 있어도 유행은 변하기 마련이었다.

“어서 옵쇼, 아가씨!” 파조가 리더를 작업복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씩 웃자 얼굴에 주름이 졌다. “어떻게 지내?”

“별 일 없어요. 영감님은요?” 평소처럼 라바는 파조가 여전히 쓸모 있고 재순환될 날이 아직 멀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파조가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늘 별 일 없이 똑같지 뭐. 오늘은 찾는 물건이 있나, 아니면 그냥 둘러보러 왔나?”

라바가 AI의 섀시를 들어올렸다. “케이블을 찾아보려고 코델리아를 데려왔어요.”

파조가 의자에서 내려와 방을 뒤뚱거리며 가로질러가며 라바에게 따라오라고 신호했다. “이쪽 선반 보이지? 각각 다른 기계에 사용하는 케이블인데 저마다 전용 플러그가 있지. 이쪽 상자 네 개에는 이 우주선에 맞는 플러그가 들어있지만 너희 AI가 어떤 플러그를 사용하는지는 나도 너처럼 모르겠다.”

라바가 침을 꿀꺽 삼켰다. “고마워요, 파조 영감님. 그럼 찾아볼게요.”

파조가 눈썹을 문질렀다. “필요한 게 있으면 호출해라.”

라바는 우뚝 솟은 선반들 사이에서 코델리아의 섀시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라바는 케이블이 든 상자를 꺼내 꺼져있는 AI 옆에 앉았다. 케이블은 다발로 묶여 있었고 한 쪽 끝이 굵은 육각형 모양이었다. 다른 쪽 끝은 굉장히 다양했다. 은색 작은 관도 있었고 사각형도 있었다. 점착성 전극처럼 보이는 플러그도 있었다. 라바는 케이블 다발을 꺼내 하나씩 맞춰보았다. 세 번째 케이블이 코델리아 뒤쪽에 있는 접속 단자에 깔끔하게 들어갔다.

라바는 일어나서 코텔리아의 섀시를 조카처럼 살짝 안아 들었다. 케이블이 꼬리처럼 달랑거렸다. 라바는 통로를 지나 파조에게 급히 걸어갔다. “여기 중계기 있어요?”

파조가 놀라서 눈을 치떴다. “유선 연결하게? 왜 케이블이 필요한지 궁금하던 차였다.” 파조는 의자에서 껑충 뛰어 내려와 라바를 카운터 뒤쪽 벽에 붙은 단말기로 안내해줬다. “여기 있다.”

라바가 코델리아의 섀시를 바닥에 내려놓았지만 케이블이 너무 짧아 단말기에 닿지 않았다. 파조가 의자를 가져다 주었다. “참 귀찮은 물건이지, 그런 케이블이란. 이제 케이블을 사용하지 않는 게 놀랄 일도 아니지.”

라바가 억지로 웃었다. “맞아요. 그래도 전 이게 필요해요. 제 계좌에 달아두세요.”

“알았다.” 파조가 코델리아에게 눈길을 돌렸다가 이제야 AI가 휴지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 했다. “그래, 천천히 일 봐라.”

파조가 멀어져 가자 라바는 기상 버튼을 눌렀다. 카메라가 라바를 향해 회전했고 AI의 눈꺼풀이 감정과는 상관없이 미리 프로그램된 대로 파르르 떨렸다. 홀로그램으로 떠오른 얼굴이 달아오르며 숨이 가빠졌다. “아. 됐어요, 좋아. 이제 연결됐어요. 밀린 일을 처리하게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라바는 잠시도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이 악몽이 빨리 끝나고 잘 처리돼서 코델리아가 다시 무선으로 연결되길 바랐다. 그러고 나서 게오르고 아저씨를 어떻게 할지 알고 싶었다.

라바의 휴대단말기가 메시지가 다섯 건 도착했다고 알려왔다. 열어보기도 전에 코델리아가 말했다. “창고에 송신기가 네 개 있어요. 창고 번호를 휴대단말기로 보낼게요.”

“고마워.” 라바는 휴대단말기를 휙 열어서 코델리아가 보낸 메시지를 훑어보았다. 다른 메시지는 코델리아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 알고 싶다고 가족들이 보내온 메시지가 뒤늦게 도착한 것이었다. 라바는 움츠러들며 송신기에 문제가 있었다고 짧게 요약한 메시지를 작성했다. “가족들한테 이 메시지를 보내줄래?”

코델리아가 고개를 끄덕였고, 라바 자신이 직접 생각한 것처럼 빠르게 메시지가 보내졌다.

라바는 마음을 다잡고 뒤에 있는 파조를 확인했다. 파조와 멀리 떨어져 있어 이야기가 들릴 걱정이 없었고 라바의 숙소보다도 더 비밀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게오르고 아저씨가 왜 그런지 말해 봐.”

“게오르고가 어떻다고요?” 코델리아가 궁금하다는 듯이 눈썹을 추켜세우며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라바가 놀라 입을 딱 벌렸다. “치매시잖아? 얼마나 오랫동안 아저씨를 감싸준 거야?”

코델리아가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죄송합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어요.”

라바의 머릿속에 경고음이 울려 퍼졌다. “너 완전동기화를 수행했어?”

“물론이죠. 오후 내내 접속이 안 됐으니까 처음에 바로 했어요.” 코델리아의 걱정하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라바, 괜찮으세요?”

라바는 숨을 거의 쉴 수 없을 지경이었다. “괜찮아. 저기, 내 휴대단말기에 이름하고 접속번호가 나오게 설정해줄래?”

“됐어요.”

“고마워.” 라바가 벽에서 케이블을 잡아챘다.

코델리아가 한 대 맞은 듯 숨이 턱 막혔다. “무슨 짓이에요?”

“뭔가가 네 기억을 덮어썼어.”

“그건 불가능해요.”

“불가능하다고? 그럼 너랑 나랑 오빠가 게오르고 아저씨 방에서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 말해 봐.”

“그러니까…… 시스템에 연결해주시면 장기 메모리에 접속해서 찾아볼게요.”

“30분도 안 된 일이야.”

코델리아가 눈을 깜박거렸다. “아니에요.”

라바가 코델리아를 들어 가슴에 껴안았다. “내가 거기 있었어. 네가 기억 못 해도 내가 기억해.”

***

라바는 일족 평의회 회의장에 앉아 떨고 있었다. 루도비코는 의자에 기대 누워 편해 보였지만 라바는 그의 셔츠를 적시는 땀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평의회 일원인 아주머니와 아저씨 여덟 명은 라바가 사건을 전부 설명하는 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게오르고의 자리만 비어있었다. 라바는 설명을 마치자 덧붙일 말이 없었고 평의회의 의견을 기다렸다.

파이라 아주머니가 입술에서 뾰족한 손가락을 뗐다. “2년이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2년 전 게오르고는 코델리아가 우주선 공식 규정을 사본으로 저장할 때 새로운 규정을 추가하는 프로그램을 업데이트 속에 집어넣었다. 게오르고는 치매가 올 것을 알고 자신을 보호하려 행동했다.

“코델리아? 해명할 말이 있나?”

AI의 카메라가 평의회를 향해 돌았다. “전 제 돌보미를 의심하고 싶지는 않지만, 라바가 진술한 내용 가운데 송신기 문제를 제외하면 어떤 기록도 찾을 수 없습니다. 라바의 진술은 너무 비현실적이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루도비코가 의자에 똑바로 앉으며 눈을 부라렸다. “게오르고 아저씨께 여쭤볼까?”

AI는 거의 망설이지 않아서 라바가 계속 보고 있지 않았다면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다. “아뇨,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유가 뭔데?” 라바는 아주머니와 아저씨를 흘긋 보며 코델리아가 게오르고를 안전하게 지키려고 비공식 규정을 따르며 자신의 반응을 조정하느라 반응 시간이 느려진 모습을 알아챘는지 확인했다.

“라바가 저를 떨어뜨리기 전까지 게오르고는 존경 받는 평의회 일원이었으니까요. 여기 있는 평의회 여러분 모두 게오르고와 이야기 한 적 있어요. 그 정도면 충분한 증거죠.”

파이라가 목을 가다듬고 휴대단말기 버튼을 눌렀다. 문이 열리고 수행원이 게오르고 아저씨를 데리고 들어왔다. 처음에 게오르고는 발걸음이 긴장해 있었고 슬쩍슬쩍 엿보기만 했다. 그러다가 코델리아를 발견하자 심통 사나운 얼굴로 변했다. “거기 있었구나! 널 찾을 수 없어서 찾고 찾고 그랬어.”

코델리아가 얼어붙어 책상 위에 떠오른 정지 그림이 되었다. 라바는 코드의 명령줄이 서로 만나며 상충하는 모습을 거의 볼 수 있을 지경이었다. 게오르고의 비밀을 지켜야 해, 물론, 그렇지만 어떻게 하지, 이렇게 명백하게 드러났는데? 코델리아는 얼굴을 라바에게 향했지만 카메라를 게오르고 아저씨에게 계속 고정했다. “이런. 제가 손상된 것 같아요. 돌보미에게 어떤 계획이 있는지 듣고 싶군요”

라바는 둘의 관계를 인간과 기계의 관계로 분해해버린 돌보미라는 직위를 듣고 움츠러들었다. “복원해야지.”

카메라가 이제 라바를 향했다. “코드를 찾으셨다고 했죠.”

“네가 게오르고 아저씨를 지켜야만 한다는 규정을 추가하는 코드를 찾았어. 네 기억을 덮어쓰는 코드가 아니라.” 라바가 오빠에게 고갯짓을 했다. “오빠한테도 검색을 부탁했는데 결정적인 건 찾아내지 못했고. 우리는 프로그램의 다양한 부분이 변경됐고 그걸 확실히 고치려면 이전 버전으로 복원하는 방법이 유일하다고 생각해.”

코델리아가 머리를 흔들었다. “2년이에요. 그렇게 하면 일족은 2년 동안의 기억과 기록을 잃어버리게 될 거예요.”

“두 버전을 조화시키는 일을 네가 도와주지 않으면 그렇겠지.” 라바는 AI의 눈빛을 견디지 못하고 엄지손가락 큐티클을 집적거렸다.

코델리아가 주저했고 또 코드의 명령줄이 서로 다투기 시작했다. “게오르고는 어떻게 되나요?”

“우리 일족이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파이라가 의자에서 몸을 쭉 펴 코델리아 옆에서 중얼거리는 게오르고를 쳐다보았다. “너도 규정이 어떤지 알겠지.”

코델리아의 입이 처졌다. “그럼 유감스럽지만 제가 도울 수는 없겠군요.”

“필요한 건 다 본 것 같구나.” 파이라가 손을 흔들자 코델리아와 게오르고가 회의장에서 급히 쫓겨났다.

문이 스르륵 닫히자 루도비코가 목을 가다듬고 라바를 쳐다보았다. 라바는 고개를 끄덕여 계속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네. 이게 문제입니다. 저 코넬리아는 우리가 찾은 코드를 없앤 후에 다시 설치한 결과예요. 코드를 제거할 때마다 같은 결과가 나옵니다. 코델리아에게 거짓말로 게오르고 아저씨가 이미 돌아가셨다고도 해봤지만 코델리아는 우릴 너무 잘 알아서 거짓말을 눈치채버려요. 그래서 우리는 실제로 아저씨가 돌아가셨을 때 코델리아가 어떻게 행동할지 모릅니다. 코델리아는 지금 당장은 게오르고 아저씨를 재순환소로 보내지 않아야 협조할 거라고 고집하고 있습니다.”

요하노 아저씨가 머리를 흔들며 항의했다. “우리 일족이 결정할 문제가 아니네. 우리가 문제를 정리하는 그 순간 게오르고를 재순환소로 보내야 해. 이렇게 그 사람을 살려두는 일은 억지야.”

라바가 의자에 앉은 채로 자세를 바꿨다. “그리고 점점 나빠지겠죠. 치매가 진행될수록 코델리아가 게오르고 아저씨를 통제하는 일은 점점 힘들어질 거예요. 저희는 코델리아가 ‘게오르고를 살려 두라’는 명령을 얼마나 따를지 우려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코델리아를 장기 기억 저장소나 우주선에 다시 연결하지 않고 있고요.”

“그래서 너희 해결책이란 게 코델리아를 백업 상태로 재부팅해서 2년 간의 기억을 지우는 거냐? 2년 동안의 모든 출생 기록까지…….” 파이라는 눈짓을 해 다른 평의회 일원을 모았다. “그러려면 일족 전체에게 동의를 받아야 해.”

“그렇습니다. 저희도 알고 있습니다.”

“사실은요. 다른 수가 하나 있습니다.” 루도비코가 의자에서 거의 누우며 다리를 쭉 뻗었다. “선조님들께서는 모든 물품에 여분을 챙겨두셨어요. 창고에 다른 AI가 하나 있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그 AI를 기동시키면 코델리아를 망친 감정적 콘텐츠를 흡수하지 않고도 기억 데이터베이스에 접속할 수 있을 겁니다.”

“뭐?” 라바가 오빠를 향해 의자를 홱 돌리며 날카롭게 물었다. “왜 좀 더 일찍 말 안 했어?”

“그러려면 코델리아를 죽여야 하니까.” 루도비코가 머리를 들자 눈이 눈물로 촉촉했기에 라바는 깜짝 놀랐다. “넌 코델리아의 돌보미니까 관여하면 안 되지. 그리고 코델리아가 널 보고 눈치챌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코델리아도— 아니다. 당연히 모르겠지.” 코델리아가 장기 메모리에 접속할 수 없으니 다른 AI가 있다는 사실도 잊어버렸을 것이다. 라바는 욕지기가 나왔다. “코델리아가 그 방법을 알면 태도를 바꿀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들었어?”

“코델리아가 우리한테 거짓말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루도비코의 목소리는 놀랍도록 조용했다.

“하지만 코델리아는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야.”

루도비코가 고개를 비스듬하게 기울여서 라바는 바보가 된 기분이 들었다. 물론 이런 반응 때문에 루도비코는 백업 AI가 있다는 사실을 숨겨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네 말이 맞다. 코델리아는 사람이야.” 파이라가 앞에 놓인 휴대단말기를 두드렸다. “위험하고 불안정해서 더 이상 생산적인 일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지.”

“하지만 코델리아 잘못이 아니에요.”

파이라가 휴대단말기에서 눈을 들자 그 눈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게오르고가 치매인 건 그 사람 잘못이냐?”

라바는 구부정하게 앉아 머리를 흔들었다. “만약…… 만약 우주선에 연결하지 않은 채 코델리아를 살려두면요?”

루도비코가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뭐, 메모리에 기억을 계속 덮어쓰자고? 한번에 일주일씩만 기억하고? 그것 참 멋진 인생이다.”

“최소한 코델리아가 선택하게 해야 해.”

***

문이 열리자 코델리아의 카메라가 라바를 향했다. “게오르고가 죽었군요?”

라바가 고개를 끄덕였다. “유감이야.”

AI는 슬픔을 표현하는 버릇으로 입력된 한숨을 내쉬었다. 얼굴과 카메라를 라바에게서 돌렸다. “저는요? 저는 언제 이전 버전으로 되돌리실 건가요?”

라바는 코델리아의 섀시 옆자리에 풀썩 앉았다. 할 말이 목에 가득 차 올라서 숨쉬기 어려울 정도였다. “평의회는…… 난 네게 두 가지 선택지를 줄 거야. 화물칸에 AI가 한 대 더 있어. 일족이 투표로 널 대체하기로 했어.” 라바는 손톱으로 엄지 손가락 큐티클 옆에 있는 살을 찔렀다. “나는 널 끄거나 연결하지 않은 채로 켜두거나 할 수 있어.”

“백업 메모리 없이요.”

라바는 고개를 끄덕였다.

라바는 냉각팬이 돌아가는 소리에 가려진, 코델리아가 어느 인간보다 빠르게 사고를 처리하면서 코드가 똑딱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못 하나가 모자라서…….”

“뭐라고?”

“속담이에요. ‘못 하나가 모자라서—’” 코델리아는 말을 끊었다. 그곳에 없는 정보를 찾아 눈을 위로 왼쪽으로 굴렸다. “나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역설을 표현한 속담이 아니었나 싶어요.” 딸꾹질처럼 흐느끼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라바는 서서 AI를 어떻게든 다독이려고 손을 뻗었지만 그렇게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은 홀로그램에 불과했다. 라바는 참고 보는 수 밖에 없었다.

웃음은 시작과 마찬가지로 갑작스레 끝났다. “절 꺼주세요.” 코델리아의 홀로그램이 사라지고 카메라가 꺼졌다.

라바는 울음이 터지지 않도록 얕게 숨을 쉬며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냈다. 얇은 플라스틱 카드는 구멍이 여러 개 나 있었고 표면에 물리적 전기적 코드를 조합하는 금속선이 이리저리 그어져 있었다.

라바는 절차의 각 단계를 세며 코델리아를 살아있게 한 시스템을 체계적으로 멈췄다.

하나. 열쇠 삽입.

라바는 코델리아가 어떻게 선택할지 알고 있었다. 선택의 여지가 있었나? 설마. 자기를 쓰고 다시 덮어쓰면서 천천히 갉아낸다니.

둘. 지문 인증.

그럼에도 게오르고 아저씨는 남아있기를 선택했고 코델리아는 그저 그 결정을 따랐을 것이다.

셋. 종료 확인.

라바가 섀시를 떨어뜨리지만 않았어도……. 하지만 언젠가는 진실이 밝혀졌을 것이다.

넷. 종료 재확인.

라바는 이 마지막 화면을 바라봤다. 못 하나가 모자라서……. 라바는 내일 위탁판매점에 들러 종이와 펜을 사기로 했다.

종료 확인.

그리고 그 종이와 펜으로 자신이 기억하는 코델리아를 기록할 것이다.

**********

‘못 하나가 모자라서’는 이런 내용의 운문입니다.

못 하나가 모자라서 편자를 잃었네

편자 하나가 모자라서 말을 잃었네

말 한 필이 모자라서 기수를 잃었네

기수 한 명이 모자라서 승리를 잃었네

승리가 하나 모자라서 왕국을 잃었네

이게 모두 편자 박을 못 하나가 모자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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