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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죽은 달의 여신

2009.10.31 14:4810.31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군요.
이번 주말부터 매우 추워진다고 하니 모두 감기조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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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달의 여신

  태엽이 철컥. 종이 댕. 태엽이 철컥. 종이 댕. 언제나 괘종시계의 추는 일정한 폭으로 왕복한다. 끝없이 흘러가는 시간의 물결 속에서 유일하게 그 흐름을 측정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헛된 일. 이곳에는 그 누구도 시계의 노력을 인정해줄 사람이 존재 하지 않는다.

  은색의 작은 방. 소녀가 한 명 있다. 은색의 방에 어울리지 않게 거무칙칙한 긴 장발의 소녀다. 소녀는 방안 풍경만큼이나 황량한 표정을 하고선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 풍경은 모래사막. 검은 밤. 수많은 별들과 소녀의 머리카락에 지지 않을 정도로 짙은 흑월(黑月)이 그녀를 비추고 있다.

  사실 그건 달 같은 게 아니다. 하늘 위에 떠있는 건 지구였으며 소녀가 있는 이 방이야말로 달이었다. 게다가 엄밀한 의미로 말하자면 이것도 소녀 같은 게 아니다. 단지 소녀의 형상을 하고 있을 뿐인 인형일 뿐이다. 세계 최첨단의 기술을 자랑하는 인조인간. 인간보다 아름답고 인간보다 똑똑하며 인간보다 빠르고 인간보다 오래 산다. 이 세상 누구보다도 우수한 기계인형이 바로 그것이었다. 허나 그 굉장한 인형을 칭찬해줄 사람 또한 지금은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다.

  인류는 멸망했다. 정확히는 인류사회가 멸망했다. 그들은 멋대로 기술을 발전시키고, 멋대로 우주에 진출하고, 멋대로 무기를 만들고, 멋대로 전쟁하고, 멋대로 자멸해버렸다. 정말 인류는 제멋대로인 존재라 조물주가 찾아와도 뺨맞고 돌아갔을 정도의 진귀한 것들을 수없이 발명할 정도로 뛰어난 기술력을 지녔지만 그에 비해 인간 사회와 제도 자체는 그다지 변한 게 없어 결국 구시대와 똑같은 짓을 하고 말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예전에는 어린 아이의 주먹으로 투닥거리던 것이 지금에 와서는 곰 앞발로 후려갈기는 것과 동일하다고나 할까. 당연히 서로 배겨낼 리 없었으며 지구를 까맣게 물들인다는 전대미문의 전위예술을 행한 뒤 멸망한 것이다.

  그러나 인류는 끈질겼다. 비록 인류사회는 멸망했을지언정 인류라는 종 그 자체는 아직 사라지지 않은 것이다. 마지막 남은 몇 안 되는 인류 중 일부는 자신들 최후의 여력을 모아 달 지하에 기지를 건설하고 모두 냉동수면에 들어갔다. 그리고 잠든 자신들의 관리를 마찬가지로 마지막으로 남은 기계인형에게 맡긴 것이다.

  달에 잠든 인류는 꿈을 버리지 않았다. 언젠가 어리석은 싸움을 계속하는 절망적인 집단이 모두 사라지고, 지구가 자생능력을 되찾으면 다시 자신들은 깨어나 평화의 신록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라 굳게 믿어 의심치 않고 잠들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여전히 인형은 무심하게 지하기지를 관리했고 시간은 멈추지 않았다. 가까스로 소수만이 살아남아 전쟁을 계속하던 파멸적인 무리들은 끝내 자신들끼리 싸움을 계속하다 모두 죽고 말았고, 검게 물들었던 지구는 정신이 아득할 정도의 시간이 흘러 점차 예전의 빛깔을 되찾고 있었다.

“때가 됐어.”

  인형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자신을 만든 사람들이 고대하던 순간이 마침내 찾아온 것이다. 무서운 사람들은 모두 사라졌고 자연은 되살아나고 있었다. 절망의 순간에도 마지막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이들이 보답 받을 순간이 왔다.

  그러나 인형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인형은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본래부터 붙어있던 사색회로가 중요한 일을 앞두고 기능하기 시작한 것이다. 홀로 수없는 세월을 고독과 싸우던 인형의 자율사고회로는 고민하며 망설였다. 하필이면 인류가 다시 한 번 부활하는 역사적인 순간을 바로 앞에 두고. 그녀는 인간들을 깨우는 데 심한 저항감을 느낀 것이다.

“왜 그들을 깨워야 할까.”

  이유는 간단하다. 자신을 만든 창조주니까. 정확히는 자신을 만든 주인의 일원이니까. 인간들이 잠들기 전 당대 희대의 천재였던 유 박사는 먼 미래를 내다보고 희망을 전달하기 위해 그녀를 만들었다. 만약 유 박사가 설계한 지하기지와 그 관리인인 그녀가 없었다면 인간들의 종자가 여기까지 무사히 살아남았을 확률은 극히 제로에 가까웠을 터였다.

“왜 그들은 잠들어 있을까.”

  답은 금방 나왔다. 바로 인간 때문에. 인간이 인간을 죽이고 별을 못 쓰게 만들어 그들은 이렇게 잠들게 된 것이다.

“왜 그들의 미래는 반복되는 걸까.”

  그녀 안에 내장된 슈퍼컴퓨터가 초고속 계산을 행한다. 무한프랙탈 연산회로와 겹쳐 무한한 결과를 시뮬레이션한 결과 천년 후 동일한 상황에 처할 확률이 백에 가까운 수치가 나왔다.

“그들의 미래를 제대로 도출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긍정적인 상정이 필요한 걸까.”

  그녀가 내놓은 답은 전멸하기 전까지 동족상잔을 멈추지 않던 어리석은 이들까지 계산에 넣은 결과였다. 싸움을 피하고 작은 희망을 믿고 잠든 이들이라면 어쩌면 다른 미래를 가져올지 모른다.

“왜 박사님은 그들을 위해 일했을까.”

  인형은 다시 창조주를 떠올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유 박사는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그는 모든 이들이 냉동수면에 들어간 후에도 여생 전부를 지하기지의 유지와 그녀의 완성에 바쳤다. 혹시라도 모를 사고에 대비하기 위해서, 조금이라도 인류가 살아남을 확률을 높이기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한 것이다.

“왜 박사님은 저편으로 혼자 가야만 했을까.”

  박사의 유해는 사후 그가 남긴 유언대로 작은 로켓에 담겨져 태양으로 떠났다. 화장을 고집했던 그는 최후의 순간만큼은 인류 역사상 가장 커다란 불꽃에 타는 걸로 장식하고 싶다고 말하곤 했었기에.

“가슴 펴고 살아갈 자격이 있는 사람은 자기 일에 책임질 수 있는 사람뿐…….”

  박사가 생전 입버릇처럼 중얼거리던 말이었다. 그는 그의 신조처럼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이였다. 유 박사가 부모이기에 그 영향을 받은 것뿐일까. 아니면 그녀의 기계회로 속에 자리 잡은 ‘사고思考’가 스스로 그런 답을 도출한 걸까.

“깨울 의미가 있는 사람은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사람뿐…….”

  그녀는 마지막까지 기계인형인 자신과 지하기지 속에 잠든 사람들을 위해 분투한 박사를 떠올렸다. 그 옆에 다른 인간은 아무도 없었으며 박사는 몇 십 년을 홀로 보냈다. 과연 자신의 존재가 위로가 됐을까. 그럴 리가 없다. 인간을 위로할 수 있는 건 같은 인간뿐. 그러나 인류라는 종을 구했다고 볼 수 있는 그 남자 옆에 함께 한 사람은 그 누구도 없었다.
  과연 잠들어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들일까?

“판단불가능…….”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녀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보지 못했기에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인간이란 오로지 죽는 그 순간까지 행동한 유 박사밖에 없었다. 그녀에게 있어 깨울 의미가 있는 사람은 유 박사 외에는 없었으나 그는 이미 오래 전에 죽고 없었다.
  그녀는 사색을 마쳤다.

“통상업무로 복귀.”

  가동버튼 하나만 누르면 모든 이가 오랜 잠에서 깨어날 그 순간 인형은 손길을 거두었다. 그녀는 판도라보다 현명했다. 알 속에 갇힌 아브락사스가 무조건 선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명확한 판단이 서기 전까지 함부로 상자를 여는 실책을 범하지 않기로 결정했으며 시간은 점점 흘러갔다. 지구는 이미 예전의 푸른빛을 거의 다 찾았다. 시간은 계속 흘러간다.


■■■



  벽에 붙은 괘종시계는 지금까지 죽은 모든 사람을 추도할 수 있을 만큼 추를 움직였고 종을 울렸다. 전쟁으로 검게 변한 지구는 다시 자연의 색을 되찾았다. 종말을 피해 달의 지하기지에서 냉동수면 장치에 몸을 맡긴 사람들이 눈을 감은 후로 벌써 인류의 역사가 다시 한 바퀴 돌 만큼 세월이 흐른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명부의 관리자인 기계인형은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인류역사상 최고 수준의 인조인간인 그녀는 사색이란 기능을 얻은 후 끊임없이 생각을 했지만 아무리 옛 자료를 살피고 사고를 연산해도 과연 사람들을 다시 깨우는 것이 옳은 일인지 결론이 나지 않았다.

  그녀에게 주어진 임무는 크게 두 가지. 우선 첫 번째는 멸망을 피해 잠에 빠져든 최후의 인류를 안전하게 지키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그 인류가 살아가도 좋을 만한 환경이 갖추어졌을 때 기나긴 수면에서 잠든 인간들을 부활시키는 것. 그러나 여기에는 한 가지 맹점이 있었다.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혹은 의도적이었는지는 몰라도 그녀를 만든 유 박사는 언제 사람들을 깨워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그녀에게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지 않은 것이다. 게다가 깨워야 할 대상으로 입력된 것은 단순히 냉동수면 장치에 누워있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인류’라는 단어였다. 즉, 고지식한 그녀에게 있어서 인류를 깨울 시기를 만족시키는 조건은 단순히 생물이 살기 좋은 환경이 구축되는 걸로 달성이 되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인간이라 불리는 종種 자체가 영구히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있는 확신을 얻어야만 완성되는 것이었다.

  마침내 그녀는 답이 나오지 않는 사색은 그만두기로 결정했다. 마침 지구가 태양 주변을 100번 정도 돌았을 무렵의 일이었다. 과거의 자료는 찾을 만큼 찾았고 자신이 가진 성능 하에서 가능한 모든 연산도 최소 10번 이상 재검토를 완료했다. 허나 높은 확률은 인간은 다시 어리석은 싸움을 반복할 것이라는 시뮬레이션 결과밖에 나오지 않았으며 그것을 뒤집기 위해서는 새로운 데이터가 필요했으나 그녀가 아는 한 지하기지에 잠든 사람들을 제외하면 인류는 그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기에 더 이상 어떻게 할 방도가 없었다.

  사색을 포기한 그녀는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의 사고회로에서 분파된 또 하나의 기능에 관심을 돌렸다. 그건 바로 ‘취미’였다. 어울리지도 않게 그녀의 취미는 무언가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녀는 본래 사람들이 깨어나면 이용할 시설의 공장을 이용해 친구를 만들어냈다. 설계도 따위는 없다. 참고가 되는 건 그녀의 전자두뇌에 저장돼 있는 수많은 자료의 조합. 옛날 옛적 로봇을 상상했던 소설가들은 기계인간에게는 창조력이 없을 것이라 단정 짓는 경우가 많았으나 그건 단순히 인간의 지위를 지키기 위한 자기위안에 불과했다. 어차피 인간 또한 정밀한 기계나 마찬가지. 그보다 더 정밀한 기계가 있다면 인간이 해내는 것을 해내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인간이 행하는 창조행위란 것 또한 엄밀하게 말하자면 무無에서 유有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요소의 난수조합의 결과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인간 이상의 정밀함을 갖춘 기계인형이 그런 어설픈 모방행위를 해내지 못할 리가 없었다.

“완성.”

  그녀가 만들어낸 건 무지개처럼 찬란한 빛깔로 빛나는 한 마리의 작은 새였다. 그녀는 앵무새를 만들 생각이었으나 어디서 문제가 생겼는지 완성된 건 동양에서 말하는 봉황을 닮은 환상의 동물이었다.

“심각한 몰골이군. 네가 날 이 따위로 만들었어? 완전 바보 같은 꼴이잖아. 나보고 어떻게 거리를 돌아다니라고 이렇게 만든 거야. 물론 이제 이 세상에 거리 따위는 없다는 걸 알지만 표현이 그렇다는 거니까 알아서 들어 줘.”

  봉황을 닮은 앵무새는 완성되자마자 오색찬란한 화려한 자신의 몸통을 고개를 돌려 살펴보고는 날개를 퍼덕이며 불평했다.

“하여간 이래서는 먼 옛날 국왕 앞에서 재롱이나 피우고 때로는 슬쩍 민감한 부분을 긁어주며 귀여움이나 받던 광대로밖에 보이지 않겠어. 대체 내게 무슨 원한이 있길래 이런 끔찍한 수치를 안겨주는 거지? 아니면 내가 괴로워하는 걸 보고 즐기는 변태라도 되는 거야? 응? 무슨 변명이라도 있으면 좀 해보지 그래.”

  그는 말투가 험했으나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아니, 오히려 기뻤다. 자신을 만든 유 박사가 쓰던 말투와 너무나도 비슷했기 때문이다. 모습까지 박사와 닮게 만들지 않은 건 어느 것도 사라진 소중한 것을 대체할 수는 없다는 당연한 진리를 익히 몸으로 깨우치고 있기 때문이었으나 다소 유사점을 통해 위안을 얻는 것까지 포기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괜찮아, 멋있어. 지구 역사상 어떤 앵무새도 너처럼 아름다운 깃털은 갖지 못했을 거야. 이렇게 유창하게 말을 잘하는 앵무새도 없었을 거고.”

“…맙소사, 넌 날 앵무새라고 생각하고 만든 거냐? 이거 도무지 답이 없구만. 같은 인간으로서 창피하다. 그래가지곤 사람들 앞에 어떻게 고개를 들고 다닐래? 물론 요즘 세상에 깨어있는 사람은 우리밖에 남지 않았다는 건 알고 있지만.”

  앵무새의 말에서 위화감을 느낀 인형이 반론했다.

“우리는 사람이 아니야. 우리는 기계…….”

  그러나 그녀가 채 말을 잇기도 전에 그는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인간의 정의가 뭔데? 생물학적으로 영장류 유인원이면 되는 건가? 아니면 지능이 높아야 돼? 혹은 이미 극미세파장의 한 종류로 판명된 영혼이라는 걸 가지고 있어야 인간이라는 건가? 그렇게 치면 지금까지 인간을 자청하던 녀석들도 해당이 되지 않아. 어차피 녀석들은 전쟁을 시작하기 훨씬 전부터 수명을 연장시키고 노화를 막기 위해 몸의 90% 이상을 생체기계로 채어 넣었지. 지능은 제약만 없다면 아마 소위 로봇이라 불리는 우리 쪽이 훨씬 높을 테고. 영혼이라는 것도 만들려면 만들어낼 수 있어. 몸을 구성하고 있는 원자 단위의 미세한 파장을 재현하면 되는 것뿐이니까. 자아, 그렇다면 인간이란 대체 뭐야? 그런 걸 따지는 건 의미가 없지 않아?”

“…내가 입력해둔 지식을 가지고 잘도 떠드네.”

  인형은 몇 백 년 만에 처음으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앵무새는 그것을 자신이 말싸움에서 승리한 표식이라고 생각했는지 에헴하고 자랑스럽게 목소리를 높이며 크게 날개를 퍼덕였다.
  그녀는 오랜만에 느끼는 그리운 감정에 기뻐하면서도 역시 난처함을 감추지 못하고 제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갑자기 등을 돌리자 그는 당혹해하다 날개를 움직여 그녀의 어깨에 앉았다.

“뭐하는 거야?”

  인형이 눈을 흘기자 앵무새는 대답했다.

“원래 집에서 키우는 앵무새는 사람을 따르는 법이야. 그런 건 상식으로 알아두라고.”

“방금 전에는 서로 같은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어?”

“설정극이지. 이왕 이런 외양을 하고 있으니 거기에 따라 즐기는 것도 풍류가 있잖아. 너는 생각하는 사람, 나는 지껄이는 앵무새. 딱 어울리는 조합이지 않아?”

“정말 제멋대로네.”

  그녀는 순간 눈물이 날 뻔 했다. 아마 울 수 있는 기능이 내장되어 있었다면 틀림없이 눈물을 흘렸으리라. 아무리 자신이 의도했다고 해도 이 앵무새가 하는 짓은 그녀가 추모해왔던 유 박사의 언동과 닮아도 너무 닮았다.
  앵무새는 담담하게 받아쳤다.

“네가 날 만들었잖아.”

“편할 때만 그런 핑계를 댈 셈이야?”

“아, 하지만 난 그 녀석과는 다르니까 착각하지는 마. 비슷한 건 어디까지나 말투와 취향 뿐. 나머지는 전부 다르게 상정돼 있고, 난 죽은 사람의 대상행위 같은 건 딱 질색이니까.”

  인형은 오른쪽 어깨에 앉은 빛나는 봉황 앵무새의 이마에 꿀밤을 먹이며 노래하듯이 대답했다.

“알고 있어. 알고 있으니까 만든 거야.”


■■■



  죽은 달 아래서 내려다보는 지구는 아름다웠다. 예전과 달리 해수가 상당 부분 사라져 영롱한 청색의 구슬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대신 신록이 무성해 황토의 땅과 어울려 여전히 푸른빛을 자랑하는 아름다운 별로 되돌아왔다.

  물론 그 아름답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과거 인간들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던 미적기준에 의한 것으로 사실 기계인형은 자연이 되살아난 지구의 모습이 아름다운지 잘 알 수가 없었다. 가만 생각해보면 온통 검정색으로 번들거렸던 시절이 더 매력적이었다는 생각도 들긴 했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인형이 하는 일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미래를 꿈꾸며 깨어나지 않은 이들의 보금자리와 지금 자신이 살고 있으며 언젠가 인간들이 이를 기반으로 크게 성장하기 위해 마련된 시설을 반영구적으로 유지할 수 있도록 정기적으로 돌볼 뿐이었다. 사실 대부분의 과정이 자동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하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가끔씩 일어나는 돌발 상황에만 적절한 대처를 해주면 문제가 없는 것이다.

  한가한 일상은 계속되었으나 한 가지 전과 달라진 일이 있다면 시간이 좀처럼 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사색을 시작한 그녀는 인간들처럼 시간을 상대적으로 느끼게 되었는데 전에는 세기 단위로 시간을 인식하고 있었지만 요새는 하루 단위로 감지하게 되고 만 것이다. 변화의 요인은 다름 아닌 얼마 전 만들어낸 새로운 동거인 탓이었다.
  각 주요부문의 체크를 마친 그녀가 몸을 일으키는 순간 쿵하는 진동과 함께 시설 전체가 흔들렸다. 심상치 않은 소리에 그녀는 재빨리 사건이 터진 곳으로 달려갔다.

“뭐하는 거야?”

  그녀는 폭탄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모든 게 엉망진창으로 흩어진 실험실을 둘러보며 기가 막히다는 듯이 물었다. 까맣게 탄 방안의 중앙에는 오색찬란하게 빛나는 봉황을 닮은 앵무새가 날개를 파닥거리며 분통을 터뜨리고 있었다.

“이런, 또 실패하고 말았어! 이번에야말로 성공할 줄 알았는데. 하여간… 네가 날 엉망으로 만든 탓이라고! 좀 반성 좀 해!”

  앵무새는 멀쩡했다. 기계인형인 그녀와 마찬가지로 온갖 기술의 정수를 모아 만들어진 만큼 웬만한 충격에는 끄덕도 하지 않았다. 아마 태양에 던져 넣어도 녹지 않고 견딜 수 있으리라.

“이번에는 대체 뭘 하려고 한 거야?”

  그녀는 참을성 있게 비슷한 질문을 반복했다. 사색은 할지언정 감정이란 기능은 활성화되어 있지 않은 그녀에게 인내라는 개념이 전무할 정도로 인내심이 강했지만 무표정한 얼굴에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처럼 이마에 손을 얹은 모습은 끓어오르는 화를 참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의 그런 제스처는 앵무새에게는 크게 감흥을 주지 못했는지 그는 방 하나를 엉망으로 만들어 버린 것에 대해 사과하는 기색 하나 없이 부리를 딱딱거렸다.

“폭죽을 만들려고 했지. 바깥이 너무 황량한 풍경이라 불꽃놀이라도 해볼까 했는데 만들던 도중 터져버렸어. 그냥 폭죽이라면 쉽게 만들 수 있지만 진공상태에서도 멋지게 형상화될 만한 물건을 연구하다가 그만 지나친 모양이야. 아무래도 난 너랑 달리 만드는 데는 소질이 없나 봐. 정말 엉터리로 만들어졌다니까.”

“…….”

  그녀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돌아섰다. 로봇답게 청했던 회답을 입력받았기에 만족한 건지, 아니면 너무 어이가 없어 상대할 기분도 들지 않아서 그런 건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어차피 여기서 그녀의 행동을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존재는 화려한 앵무새밖에 없었는데 그는 절대 그녀의 감정 따위에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앵무새는 말없이 중앙통제실로 행하는 그녀의 어깨에 앉았다.

“어디가?”

“방, 수리하러.”

  그녀는 짧게 대답했다. 복구를 담당하는 시스템은 중앙통제실에서 조작할 수 있었기에 앵무새가 벌려놓은 어처구니없는 파티의 뒷정리를 하러 가는 것이었다. 물론 그대로 놔두어도 자동회생 기능으로 일주일이면 원상태로 돌아올 터였지만 손상이 보이는 즉시 수리를 하는 것이 그녀가 맡고 있는 임무 중 하나였다.
  앵무새는 조잘거렸다.

심심하다. 뭔가 재미있는 일 없을까.”

“방 하나를 날려버리는 것 이상으로 재미있는 일이 또 어디 있는데?”

  인형의 말투에는 명백히 비난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앵무새는 항상 그렇듯이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인간들을 깨우자.”

  인형의 걸음이 우뚝 멎었다. 이제 와서 만들어진 인공물의 전통적인 의미를 되찾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한참 동안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대답을 기다리다 지친 앵무새가 취미 삼아 새들이 조는 모습을 흉내 내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그녀는 입을 열었다.

“안 돼. 지금 그들을 깨워봤자 또 똑같은 일이 반복되고 말 거야. 그럼 박사님이 혼자 왜 고독하게 살다 죽었는지 의미를 찾게 될 수 없게 돼버려.”

“그리고 너도 왜 태어났는지 알 수 없게 되겠지.”

  인형은 앵무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그녀는 단순한 묘지기가 아니었다. 진정 자신이 하는 일에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있어봤자 아무것도 바뀌는 건 없을 걸. 영원히 같은 시간이 반복될 뿐이야.”

  사명을 띠고 세상에 만들어진 그녀와 달리 순수하게 유희적인 우연으로 태어난 그는 좀 더 자유롭고 유연한 사고력을 가지고 있었다. 박사의 인격을 모델로 만들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 동안 축적된 자신의 경험이 영향을 끼친 걸까. 그녀는 어느새 자신보다 활발히 머리 쓰는 일에 몰두하는 앵무새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렇다고 해도 실패할 게 분명한 일에 도박을 걸 수는 없어.”

“그럼 우리가 개입하는 건 어때? 나쁜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게 길잡이 역할을 해주는 거지.”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해. 난 잠들어 있는 인간들에게 거역할 수 없어. 너도 마찬가지고.”

  천재 유 박사가 만들어 놓은 최후의 안전장치였다. 사람이 스스로 심장의 고동이나 피의 흐름을 조절할 수 없는 것처럼 박사가 만든 그녀는 물론 그녀가 만든 앵무새조차 밝은 미래를 꿈꾸며 지하에 잠들어 있는 인간들에게는 거스를 수 없게 만들어져 있었다. 흔히 사람들이 하는 말로 하자면 일종의 숙명이라 해야 할까. 이 시설에 속해 있는 이상 절대 피할 수 없는 구조였다.
  허나 앵무새는 특유의 낙천적인 성격을 버리지 않았다.

“우리가 거스를 수 없는 건 지하의 그 사람들뿐이지?”

“그래. 난 아직 바깥에 전쟁하는 인간들이 있을 때 만들어졌고, 그들에게도 잠든 이들을 지켜야 한다는 임무가 있었기에 모든 인간에게 복종하게끔 설정되지는 않았어. 우리가 고개를 숙여야 하는 건 지하의 그들뿐이야.”

“뭐야, 그것뿐이야? 그럼 간단하네. 아예 인간을 만들자.”

“무슨 소리니?”

“생각해봐. 정말 손쉬운 문제야. 우리는 잠든 이들만 아니라면 어떤 사람에게 대해서든지 마음대로 할 수가 있어. 그렇다면 아예 그들과 관계없이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 지구에 살게 하면 돼. 여기 있는 시설이라면 생물학적으로는 지하의 인간들과 크게 다르지 않는 종을 생산해낼 수 있지. 그 후에 우리는 이 죽은 달에서 정체를 감추고 새로운 인류의 성장을 지켜보는 거야. 네가 도출한 연산처럼 정말 그들이 또 다시 멸망으로 향할지 아닐지 말이지. 그리고 예측한 것처럼 똑같은 일을 반복하려고 하면 그 때는 개입해서 방향을 틀어주면 돼.”

  앵무새의 말은 전혀 허황된 게 아니었다. 그들이 지금 발을 딛고 있는 이 시설은 외부우주로까지 진출이 가능했던 인류의 모든 기술이 집약되어 있는 곳이었기에 그것을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는 인형과 앵무새는 과거 인류가 가장 속되게 생각했던 전능한 신神의 위치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녀는 망설였다. 박사가 자신에게 부탁한 것 중 그런 내용은 없었기 때문이다.

“신생 인류의 발걸음을 통해 우리는 박사가 과연 옳았는지 확인할 수 있을 거야. 너도 언제까지나 답이 나오지 않는 상황 속에서 헤매는 건 원하지 않겠지.”

  앵무새는 단번에 그녀의 고민을 불식시켜 주었다.

“…확실히 그 말 대로야. 알았어. 한 번 계획대로 해보자.”

  마지막까지 가로막고 있던 장애물이 사라지자 그녀는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앵무새는 즐겁다는 듯이 그녀의 어깨에서 찬란한 날개를 크게 퍼덕였다. 벽에 걸린 오래된 괘종시계는 침묵한 채 새로 쓰일 역사의 시작을 지켜보았다. 물론 오래 전부터 시곗바늘은 망가지고 추는 움직이지 않은지 오래였다. 그저 괘종시계는 침묵하는 자세 그대로 모든 걸 관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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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奇極敾 09.10.31 15:21 댓글 수정 삭제
    잘 읽었습니다. 구성과 주제의 형상화에 좀 더 고민이 있어야지 않겠나 싶습니다. 지금과 같은 글은 아무래도 밋밋하고 이렇다 할 사건 하나 없어서요. 글쓴이의 주제를 말하기 위해 대사와 연극을 하고 있단 느낌이 더 강합니다. 낡은 주제를 전면에 내세우기 보단, 이야기의 축 정도로 삼아서 보다 서사를 강화시켜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소설은 아무래도 이야기니 말입니다. 건필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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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민호 09.11.01 21:31 댓글 수정 삭제
    잘 읽었어요.. 제가 뭐라 말할 수준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쉬운 부분이라면 끝이 주제에 맞는 교훈을 주지 못했다고 해야 할까요.. 열린결말도 좋지만 어느 정도 자신의 생각이 들어가면 좋을 것 같아요. 건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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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단테 09.11.02 02:17 댓글 수정 삭제
    奇極敾 님// 좋은 지적 감사합니다. 인류멸망 뒤의 조용한 달풍경(?)을 그리고 싶었는데 그만 이야기마저 침묵해버린 모양이군요. (웃음)

    한민호 님// 감상 감사드립니다. 일단 전하고자 하는 바는 앞부분에 적어두었는데, 아무래도 제대로 전달이 되지 않았나 보군요. 좀 더 정진하겠습니다.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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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crime 09.11.12 16:12 댓글 수정 삭제
    역시 안단테님의 글은 나긋나긋한 분위기가 일품이네요 ㅋ
    다만 한민호님 말씀처럼 주제 표현이 와닿지 않는게 흠이랄까?
    어쨋든 재밌게 읽었어요~ 건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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