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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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떻게 처리해야 잘 처리했다고 소문이 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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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핸드폰이 울렸다.
이불 속에서 나온 제희의 손은 머리맡을 향해 기어 갔다.
두어번 헛손질을 해서야 핸드폰 소리가 들리는 방향이 머리 위가
아닌 것을 알게 된 제희는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이불을 젖히고
상반신을 크게 움직였다.
만화책 더미 위에 놓인 핸드폰을 겨우 집어들고 귓가에 갖다댄
제희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여보세요...
-...목소리 왜 그래?
-누구야...
-형님 목소리도 못 알아듣냐?
-동연이냐?
-지금이 몇시인데 쳐자고 계셔?
-몇신데?
-열두시 반.

제희는 옆으로 누운 자세 그대로 기지개를 켰다.

-아직 새벽이구만. 나는 특이체질
  이라서 두시까지는 자야 돼.
-됐고, 빨리 내 집으로 와라.
-평소 때는 간다고 해도 오지 말라
  더니 웬일로...으윽, 허리야.
-헉, 여자랑 있냐?
-...그 허리 말고.

제희는 짜증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옆구리 밑에 깔려 있던
만화책을 빼서 옆으로 집어던졌다.

-웬일이냐고 물었잖아.
-일단 와.
  와서 직접 봐.
-급한 척 오라가라하고 있어...
  언제 가면 돼?
-되도록 빨리 come.
-컴? 독일어로 해보시지?
-농담할 때 아냐.
  빨리 와라. 기다린다.
-알았...얼레...여보세요?
  ...이 자식 보게...

냉랭한 한 마디와 일방적으로 끊어진 동연의 전화에 당황한 표정
으로 혼잣말하던 제희는 인상을 구기면서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열두시 이십분이구만...

시계를 보며 퉁명스럽게 중얼거린 제희는 TV에 비춘 자신의 얼굴
을 멍하니 보며 입맛을 다셨다. 곧 눈썹을 구기며 턱을 한번
쓰다듬었다. 오늘은 면도를 해야 될 것 같다.. 생각하던 제희는
무릎을 세우고 천천히 일어 섰다.
문고리에 걸린 수건을 집어들면서 제희는 힘없이 혼잣말했다.

-라면 끓여 달래야지.

너무도 평화롭고 무심하게 하루가 시작되었다.

**

-뭐야, 이게.

제희는 한 마디 뱉고는 혀를 차더니 마땅히 이을 말이 생각나지
않는 듯 방 안을 다시 둘러보았다.
동연의 옥탑방은 오늘따라 그 동안 알고 있던 이미지와 상당히
달라 보였다. 하나뿐인 방의 천정에 크게 뚫려있는 구멍 너머로
보이는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나도 온지 얼마 안됐어.
  어제 덕용이랑 술 마시고, PC방에서
  밤새고, 해장술 한 잔하고 왔더니,
  이 꼬라지네.

동연의 부가 설명은 그렇게 도움되는 것 같지는 않다. 확실한 것
은 무너진 천정의 넓이와 집안 여기저기 흩어진 플레이트와 콘크
리트 조각, 화장실 문을 뚫고 박혀있는 철근과 알루미늄 캔처럼
찌그러진 냉장고 등으로 볼 때, 동연이 집에 있을 때 이런 사태가
벌어졌다면 지금쯤 요단강 너머 어딘가로 프리런닝 중일 것이라는
사실 밖에 없었다.
한동안 보고 있던 제희는 깔끔해진 턱을 잠깐 긁적이다가 말했다.

-그런데...난 왜 부른 건데?
-같이 좀 치우자고.
-치우긴 뭘 치워.
  집주인한테 말해.
-안돼.
-안돼? 어디 있는데? 연락처 없어?
-그게 아니고...
  나 방값 밀려서 일부러 피해다니는
  중이란 말야. 그런데 방이 이 모양
  된 것까지 알아봐라.
  당장 나가라고 할 걸.

동연의 말에 제희는 -이건 뭐 병신도 아닌 것을 목격했을 때
무의식적으로 나오게 마련인-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네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뭐 어때.
  이게 그냥 될 일이냐?
  어여 전화해.
-그래도..좀 치우고, 짐이라도
  챙겨서 바로 나갈 준비해놓고..
  핸드폰도 저기 있어.

안방을 가리키는 동연을 보다가 제희는 물었다.

-그러면 아까 나한테 전화 건 것은?
-덕용이 핸드폰.
-아, 맞어. 덕용이는 어디 가고
  자느라 시간없는 나를 부르는 건데?
-시간 남는 애가 너 밖에 없으니까.
  덕용이... 제수씨 또 짐싸서 친정
  갔다고 붙잡으러 간다대.
-아, 쓸 데 없이 결혼만 일찍
  해가지고..인생에 도움이 안돼.
  나 구두 신은 거 보이지?
  오늘 막노동 컨셉 아냐.
-그러지 말고 좀 같이 치워 줘라.
  다른 것 보다...

동연이 손가락을 떨면서 지붕 조각 위를 가리켰다. 제희가 지금
까지 의식적으로 외면하고 있던 것이다.

-저것 좀 어떻게 해야 할 것 같아.

방바닥 위에 넓직하게 추락해 있는 지붕 조각 위에 얹혀진
-아마도 이 사태의 원인으로 보이는- 기괴한 물체를, 기계처럼
뻣뻣하게 고개 돌려 억지로 응시한 제희는 한숨 쉬었다.

-난 저거 건드리는 건 반대일쎄.
-나...통장도 전부 장판 밑에 있어.
  저거 일단 치워야 돼.
-...구두 신고 왔다니까.
  그리고 저거 치우고 나면? 저 밑에
  깔린 지붕은 무슨 종잇장이냐?

낙심한 표정이 처연히 떠오르는 동연의 얼굴을 보며 괜히 미안한
기분이 든 제희는 다시 고개를 돌려서, 방금보다 자연스럽게 물체
를 보았다.

-...대체 저게 뭘까?

보다 보니 호기심이 증폭했는지 제희는 구두를 신은 채 성큼성큼
방에 들어섰다. 그리고는 무너진 지붕을 밟고 서서 그 물체를
내려보았다.
볼수록 괴상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2m 쯤 되어보이는- 5개의 금
으로 나누어져 굴곡을 이루는 회색 본체, 그 옆 양쪽에 뻗어나온
철사같은 간선들과 그것들을 연결해주는 연회색의 막, 본체 주위
에 어지럽게 늘어져 있는 가늘고 굵은 여러 줄들, 다섯 조각으로
갈라져 별 모양 또는 불가사리 모양을 이룬 상단부와 하단부,
특히 상단부의 벌어진 틈에서는 끈적한 녹색의 액체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방 안에 들어서지도 못하다가 제희를 보고 뒤따라 들어온 동연은
잠시 살펴보다가 말했다.

-산업용 통신 중계기 아냐?
  전에 알바 뛸 때 본 것 같은데...
  맞네. 저기 펼쳐진 건 안테나고
  저기 케이블들 잔뜩 늘어져 있고
  이쪽에 플러그 연결하고...
-중계기가 이렇게 꿈틀거리냐.
-가끔.
-가끔?

제희가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으며 되물을 때 그 괴상한 물체는
격심하게 요동치며 굴곡을 뒤틀어 반쯤 몸체를 일으켜 세웠다.
불가사리 모양의 윗부분이 놀란 표정의 두 사람을 향해 활짝
벌어졌다가 오무려지기를 반복했다.

-으악! 뭐야!

동연이 뒤로 물러서며 소리지르는 동시에 제희는 반사적으로
구둣발을 뻗어 괴물을 걷어찼다. 고1 때 봉화직염에 걸리지만
않았어도 지금 해외에서 뛰고 있을 것이라고 혼자만 생각하는
전前 천안중학교 축구부 주장의 프리킥에 걷어차인 물체는 잠시
멈칫했다가 진동하면서 세차게 울부짖었다.

"테켈리리!"

-이게 뭔 소리여?
-음향장치도 있나?

당황한 표정의 두 사람 앞에서 짧은 포효를 마친 물체는 앞으로
무너졌다. 쓰러졌다거나 넘어졌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지도 모른다.
물론 이것이 생물이라는 전제 하에서다.
잠시의 시간이 흐르고 정신을 수습한 제희와 동연은 쓰러졌다거나
넘어졌다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는 것에 의중을 실고 있었다.
회색 본체는 몸통으로, 가는 선과 비늘같은 막의 연결은 날개로,
늘어뜨린 여러 개의 줄들은 더듬이나 털이나 촉수로, 몸통 아래
불가사리 모양의 황록색 하단부는 다리로, 몸통 위 뭉툭한 구근
모양에 이어진, 녹색 액체를 쏟고 있는 회색 상단부는 대가리로
부르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데 두 사람은 무언의 합의를 보았다.

-아, 이거 성가시네.

다시 바닥에 누워 미묘하게 꿈틀거리고 있는 그 생물에게서 뒤로
물러나서 거리를 유지하며 제희는 말했다.

-하늘에서 떨어지려면 돈이나
  떨어지지 이딴 게 떨어지고...
-팔면 돈 될까?
-팔 데는 있고?
-왜..그 스컬리나 멀더 있는데
  같은 데다가 팔면 되지 않나?
-거긴 미국이잖아.
-한국도 이제 우주인 배출하는
  시대라는 데.
-잡소리 그만하고 현실로 돌아와.
-그래. 어서 치우기나 하자.
-싫다니까.
-너 어차피 구두에 잔뜩 묻었다.

동연의 말에 발을 내려본 제희는 구두에 묻은 녹색을 보고 표정을
일그렸다. 손가락을 살짝 갖다댄 제희는 늘어지는 점성을 보며
욕을 뱉었다.

-나 안해. 집에 가련다.
-일당 10만원 줄께.

뒤로 돌던 제희는 멈칫하더니 잠시 생각하는 표정이 되었다.
동연은 괴생물에게 고개 돌리고 가만히 고심하다가 중얼거렸다.

-옆으로 미루면...굴리거나...
-저 좁은 방에서 얼마나?
-그러면 밖으로 꺼내야...
-무슨 수로? 아까 발에 닿는 느낌
  보니 무게도 꽤 되겠던데.

계속되는 제희의 반박에 동연은 인상을 구기며 뒤로 물러섰다.
제희도 일단 치우는 방법에 대해 고민을 하면서 무심한 시선을
주위로 돌렸다.
정체모를 생물, 허한 하늘, 콘크리트 조각이 담궈진 싱크대,
무너진 간이옷장, 찌그러진 냉장고, 깨진 창문, 방 구석의 펜치.
...펜치?

-동연아, 전에 너네 집에 연장
  있었지?
-공사장에서 들고 온 거?
-어, 어디 뒀냐?
-못봤어? 문 밖에 세워뒀잖아.

제희는 머쓱한 표정으로 밖에 나갔다. 옥탑방을 중심으로 사방의
공터에 아무렇게나 흩어진 낡은 평상과 고장난 TV, 찢어진 샌드백
등을 둘러보던 시선은 벽면 바로 옆을 보고 멈추었다.
전에 인근 공사장에 -그들의 시각에서 볼 때- 버려져 있던 것을
팔겠다고 들고 왔지만, 당연하게도 팔 곳을 물색하지 못해서
몇 개월째 방치되어 있던 망치와 삽 등이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날빠진 톱과 녹슨 삽을 살펴보던 제희는 말했다.

-되겠다.
-뭐가?
-썰어서 조금씩 옮기면 되겠다고...

동연은 이마에 손을 짚고 말했다.

-저걸 썰어? 토막 낸다는 거야?
-뭐 어때. 팔 것도 아닌데.
-피라도 묻으면?
-뭐?
-피가 산성이면 어떻게 해?
-...현실로 돌아오라니까.

삽을 집어든 제희는 큰 걸음으로 괴생물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심호흡을 한 번하고는 삽을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10초 뒤, 자신을 흘겨보는 제희에게 동연은 웃으며 말했다.

-것봐. 너도 걱정되지?

제희는 이를 악물고 삽날을 세워서 괴생물의 몸통을 내려쳤다.

"테켈리리!"

괴생물의 몸이 크게 튀어올랐다. 삽에 찍힌 자리에서 뿜어져 나온
녹색 액체가 제희의 얼굴에 튀었다.
제희가 삽을 다시 잡아빼자 괴생물은 대가리를 돌려 제희의 얼굴
을 향해 녹색 액체를 뿜었다. 그것을 보며 동연은 유쾌하게 웃어
제꼈다. 그 웃음소리는 괴생물이 촉수와 날개막을 퍼덕일 때 동연
의 벌어진 입 속으로 액체가 들어 가서야 멈추었다.
얼굴을 뒤덮은 녹색 점액이 흘러내리는 동안에도 눈 한 번 깜빡
이지 않고 괴생물을 응시하던 제희는 눈썹에 힘 주며 고개를 끄덕
이더니 다시 삽을 세웠다.
불가사리 모양의 대가리는 정확히 찍히면서 바닥에 내리꽂혔다.
이제 여섯 개로 갈라진 대가리가 다시 한 번 꿈틀거리며 제희에게
향하려 할 때 삽날은 다시 찍어내렸다. 가느다란 촉수 몇 가닥이
제희의 바짓가랑이를 휘감고 오르기 시작했지만 그는 상관하지
않고 다시 삽을 휘둘렀다. 또 한번, 다시 한번...
대여섯 차례 내리쳤을 때에야 괴생물의 장엄한 진동은 멈추었다.
몇 갈래 더 갈라져서 너덜거리는 대가리를 힘없이 흔들던 괴생물
은 바닥에 다시 쓰러졌다. 그와 함께 제희의 다리를 감아오르던
촉수들 역시 발 아래로 떨어졌다.
대가리가 서서히 우그러지는 것을 보고서야 제희는 턱에 묻은
녹색 액체를 닦았다.
그때까지 입을 다문 채 구경하고 있던 동연이 침을 한 번 뱉고
숨을 내신 뒤 제희에게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삽질 기예가 예사롭지 않은데?
-말 안했냐? 나 부대 있을 때 돼지
  구제역 났었잖아. 그때 돼지 잡느라
  삽 좀 만졌다.
-오오...
  잠깐, 나도 그랬는데...
  너랑 나랑 옆 부대였잖아! 인간아.
-아...그랬나.

힘없이 말하고, 삽을 아래로 내리뜨린 제희는 왼손으로 허리춤을
짚고 서서 거만하게 괴생물을 내려보았다.

-톱 가져와.
-...정말 썰자고?
-아까 한 말 뭘로 들었냐.
  시작한 김에 끝내야지.
  빨리 가져와.

동연은 마지못한 표정으로 밖에 나갔다. 톱을 들고 돌아온 동연은
제희에게 내밀며 말했다.

-네가 썰어.
-..남한테 도움 안주는 것들이 꼭
  뭐 하나 해주면 더 해 달라고
  쑈하더라. 네가 해.

제희가 손을 앞으로 내밀어 괴생물을 가리키자 동연은 쓴 입맛을
한 번 다시며 힘겨운 한숨을 내쉬고는 앞으로 나섰다.
괴생물을 한 발로 밟고 선 동연은 굴곡 사이에 톱날을 갖다대고
슬슬 밀기 시작했다.

-밤새겄다. 힘줘서 썩썩 썰어.

제희의 재촉에 동연은 한번 흘겨보고는 더욱 힘을 주어 톱질했다.
괴생물의 살갗이 벌어지면서 녹색 액체가 유유히 흘러내렸다.
톱질하다보니 손에 익는지 약간 생동적으로 변한 동연의 눈빛을
보고 제희는 코웃음치더니 자신의 옷주머니를 뒤지며 담배를
찾았다.
다시 앞을 보았을 때, 괴생물과 동연이 사라져 있었다.

***

순간적으로 눈 앞에서 생긴 이변을 파악하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내민 채 멍하니 서 있던 제희는 급히 고개를 치켜들었다.
뚫려있는 하늘 위로 날개막을 펼친 괴생물과 그 몸통에 가까스로
매달린 동연이 보였다. 괴생물에게서 흘러내린 녹색 액체들은
천정 가에 맺혔다가 떨어져 내렸다. 공중에 떠 있는 괴생물의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제희는 황급히 오른발을 치웠다.
발등이 있던 자리에 박혀서 진동하는 톱날을 흘끗 본 제희는 다시
위를 올려보았다. 날개를 펼치고는 있지만 괴생물은 앞으로 나아
가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자신의 눈에 가깝게 가라앉고 있는 것
을 보며 제희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톱질한 틈새에 한 손을 끼워넣고 다른 한 손에 촉수를 움켜쥐어
겨우 매달려 있는 동연을 보던 제희는 말했다.

-뛰어 내려!
-누구를 죽이려고?
-이 정도 높이에선 안 죽어.
  지붕 쪽으로 뛰어내려.
-...씹할.

지붕과 발의 거리를 눈어림하고 있는 동연을 보며 제희는 삽을
팽개쳤다. 직접 매달려서 잡아당기기라도 할 심산이다.
동연이 뛰어내리려고 손에 힘을 빼는 순간, 괴생물은 앞으로
나아갔다. 그와 함께 동연도 끌려갔다.
뒤를 쫓아 문 밖으로 달려 나온 제희의 눈에 보인 것은 추락하여
계단 난간에 부딪힌 괴생물과 옆에 나동그라진 동연이었다.
제희는 황급히 다가가서 동연을 살펴보았다. 머리에서 피 흘리는
것을 보며 볼을 두드렸다.
의식을 완전히 잃은 것 같지는 않다. 팔을 받쳐서 부축해 일으
키며 제희는 고개를 돌려 괴생물 쪽을 보았다.
스테인레스로 만든 계단 난간은 아직 버둥거리고 있는 괴생물의
무게에 밀려 바깥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일단 동연을 옥탑방 벽면에 기대어 앉히고 다시 돌아 보는 제희의
눈에 지면을 향해 떨어지는 난간이 보였다. 아래에서 올라오는
여자의 비명소리와 이어지는 금속성 소음을 들으며 제희는 순간
눈을 감았다가 찌푸리며 떴다.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일어난 제희는 아직 계단에 누워 힘겹게
꿈틀거리며 날개를 펼치려는 괴생물을 응시하다가 연장이 놓인
곳에 가서 자루 긴 망치를 집어들었다.

-하여간 쉽고 깔끔하게 끝내려는
  일은 더 환장하게 꼬이지, 꼬여.
  다른 건 그렇다쳐도 사람이 자꾸
  다쳐서 안되겠다. 숨통이 얼마나
  질긴지 몰라도 어디 한 번 갈 때
  까지 가보자.

화난 듯 중얼거리며 괴생물에게 다가선 제희는 망치를 들어 크게
반원을 그리며 후려쳤다. 펼치려던 날개 중간 부분이 크게 패이며
부러진 우산처럼 구부러졌다. 대가리를 한 번 움즉거리는 괴생물
을 보고 제희가 재차 내려치려 할 때 다른 날개가 활짝 펼쳐지며
날카로운 날갯살을 제희의 얼굴 쪽으로 뻗었다.
제희가 뒤로 물러서며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고 망치 무게에 주춤
하는 사이 괴물은 몸을 옆으로 틀었다. 거대한 몸체는 유연하게
회전하며 계단을 굴러 내려갔다. 괴생물에게 부딪힌 계단 난간이
일제히 흔들거리며 기분 나쁜 소음을 냈다. 옥탑에서 4층으로
순식간에 내려가는 괴생물을 보고 있던 제희는 망치를 들고,
녹색 점액이 묻어서 미끄러워진 계단을 조심스러우면서 빠르게
내려갔다.
괴생물을 쫓는 눈동자에 핏발이 섰다. 호흡이 거칠어지는 것을
느끼며 제희는 망치를 더 꼭 쥐었다. 하지만,
3층에서 계단 옆 문이 갑자기 열렸다. 덕분에 어깨를 부딪히며
휘청했다.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옆으로 회전한 망치는 소음에
대한 호기심으로 문을 열던 3층 주부의 턱 앞에 멈추었다.

-죄송합니다.

제희는 건성으로 사과하며 신경질적으로 어깨를 틀어 문을 밀치고
계속 괴생물을 쫓아 갔다. 망치에 이어 녹색 액체를 뒤집어 쓴
얼굴까지 본 주부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속도가 붙어서 더욱 빠르게 굴러 내려가는 괴생물을 보며 제희는
이를 악물었다.
계단에서 내려가던 속도에 체중을 더해서 현관문을 뚫고 그대로
밖에 튕겨나간 괴생물을 보고 제희는 여덟 계단을 한번에 뛰어
내렸다. 한 바퀴 굴러서 일어났을 때 괴생물도 꾸물거리며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황록색 불가사리같은 하단부로 지탱하고 곧게 일어선 괴생물은
누워있을 때보다 훨씬 커 보였다. 잠시 멈칫하고 있던 제희는
망치를 고쳐 쥐며 다가섰다.
굴곡 많은 몸체를 곧게 펴고 촉수들과 날개까지 모두 펼치자
상당한 위용을 보이게 된 괴생물의 너덜거리는 대가리 사이에서
가느다란 섬모들이 길게 뻗어나왔다. 마치 꽃의 술처럼 생긴 섬모
들이 허공에 너울거리는 것을 보며 제희는 당황한 웃음을 흘렸다.

'우매한 종자여.'

갑자기 들려온 이질적인 목소리에 제희는 뒤를 돌아보았다.

'나를 어이하여 핍난하는 것인가.'

소리가 들려온 방향이 다른 곳이 아닌 자신의 머리 속이라는 것을
, 그 소리를 들리게 한 것이 앞에 서 있는 괴생물이라는 것을
납득하는 자신에게 놀라며 제희는 말없이 서 있었다.

'나는 넓은 고요의 바다를 건너온 자.
  빛도 어둠도 영겁 속의 찰나가 되는
  우주 저 너머에서 지구를 향해 온
  여행자.
  오랜 과거 이 곳에 생명을 전해 준
  위대한 동족들을 만나기 위해 온
  나의 존엄을 이토록 훼손하는 이유
  를 해명하라.'

-글쎄...그렇게 말하면...
  ...딱히 할 말은.

제희는 대답하지 못하고 고심하는 표정으로 가만히 있었다.

'나를 괴롭히는 이유가 무엇인가.
  우매한 종자여.'

-우매하다는 말뜻은 알고 쓰는 겨?

'너희의 하등한 언어 체계에 대해서
  는 이미 분석하였노라.'

그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하던 제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아, 이제 좀 알겄다.

제희의 손목에 힘이 들어갔다.

-내가 왜 이렇게 널 괴롭히고
  있는지 변명해줄께. 잘 들어봐.
  일단, 왜 거기에 네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추락하면 안되는
  자리였던 것이 제일 중요하고...
  처음 봤을 때 말야...
  너무...괴상하게 생겼어.
  뭐라고 하지...아, 혐오.
  혐오스럽게 생겼어. 당장 앞에
  안 보이게 치우고 싶을 정도로...
  게다가,

제희는 망치를 휘둘러 바닥을 지지한 괴생물의 하단부를 찍었다.
납짝하게 눌린 다리를 들고 휘청하는 몸체에 망치를 올려친 제희
는 말을 이었다.

-내 머리에 대고 말하는 게 마음에
  안든다. 말투도 거만해.

제희가 망치를 다시 휘두르려고 할 때 굵은 촉수 두개가 망치자루
를 휘감았다. 당황한 제희가 잡아당기려고 했지만 촉수의 악력이
만만치 않았다. 불현듯 이상한 느낌에 고개를 뒤로 뺀 제희에게
실처럼 가는 촉수들이 눈 앞을 교차해서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눈 앞으로 떨어지는 잘린 머리카락들을 보며 제희는 말했다.

-마냥 온순한 놈은 아니었네?

'나를 핍박한 대가를 치룰 기회를
  주겠다.
  너희 종족의 첫 해부 표본으로
  선택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라.'

제희는 이를 악물고 망치를 잡아당겼지만 굵은 촉수는 탄력이
허용하는 범위 이상으로 놓아주지 않았다. 가만히 서서 섬모를
너울거리던 괴생물이 표본화 작업을 시작한 것은 잠시 후 였다.
어느 새 숨이 거칠어지고 있는 것을 느끼며 자신을 향해 어지럽게
뻗어오는 가느다란 촉수들을 보고 있던 제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영광으로 생각해주마.

****

제희는 망치자루를 놓는 대신 앞으로 밀면서 달려들었다.
굵은 촉수의 탄력에 의해 괴생물 쪽으로 당겨지는 속도는 빨랐다.
체중까지 실어서 밀고 들어가며 제희는 눈을 감고 고개 돌렸다.
관자놀이를 가느다란 촉수가 스쳐지나갔다. 부드러우면서 선뜻한
느낌이었다. 바지와 상의를 향해 뻗어오는 촉수들이 날카롭게
섬유를 찢어댔다.
짧은 거리를 영겁처럼 느끼며 달려든 제희의, 망치 끝이 창처럼
몸통을 향해 꽂혔을 때 괴생물은 균형을 잃고 뒤로 밀려서 다시
넘어졌다. 몸통에 눌리며 반쯤 꺾인 날개는 뛰어오른 제희가
휘두른 망치에 찍혀서 으스러졌다.

-인간이라는 것은 말이다.

제희는 쉬지 않고 망치를 다시 휘둘렀다. 공중에서 큰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진 망치는 괴생물의 몸통에 그대로 패인 자국을 만들
었다.

-원래부터 편견이 더럽게 심해서...

대가리 속으로 들어가려던 얇은 섬모들은 제희 망치에 구근 모양
의 목이 납작해지면서 움직임을 멈추었다. 촉수가 휘저어 지고
있었지만 방금 전과는 달리 날카롭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다르게 생겼거나
  보기에 마음에 안들고 이상하거나
  무엇인가 자신보다 잘났거나 한
  것들은 동물이건 인간이건 일단
  싫어하고 괴롭혀.
  그런데 넌,
  인간하고 다르고 이상한데다가...
  하여튼 잘났잖아!

쉴 새없이 내리찍는 망치질에서 벗어나기 위해 앞으로 기어가면서
괴생물은 소리 질렀다.

"테켈리리!"

-테칼리인지 뭔지 간에...
  내가 할 말은 다 해줬으니 이제
  죽어, 좀, 표본 안 남길테니까
  죽어, 제발 죽어!

몇 차례나 그렇게 내리쳤는지 알 수 없다.
제희가 허리와 어깨 근육에 무리가 가는 것을 느끼면서도 거의
360도에 가까운 원을 그리며 휘두른 망치가 괴생물의 대가리를
납작하게 짓눌러놓을 때 제희의 팔을 타고 올라오는 어떤 느낌이
있었다. 죽음의 낫을 든 자가 즐기는 그 느낌... 굵은 촉수 하나
가 경련하면서 위로 뻗었다가 작은 반원을 그리며 떨어졌다.
제희는 무릎 꿇고 주저 앉았다. 얼굴에 흘러내리는 땀이 차갑다.
녹색 액체로 탈을 쓰다시피 한 얼굴을 하늘로 향했을 때에야
보슬비가 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형태를 알아볼 수 없게 망가진 괴생물의 옆에서 그렇게 한참을
앉아있던 제희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고개를 돌리자 저쪽 길가
에 떨어진 계단 난간과 그 옆에서 피흘리며 쓰러져 있는 여인이
보였다. 아직 아무도 못 본 모양이다. 아니면 보았는데 119 누를
시간에 폰캠에 담아 친구에게 전송하는 지도 모른다. 제희는
핸드폰을 꺼내들다가 이내 집어넣고 대신 담배를 찾아 물었다.
빗줄기가 가늘어서 담뱃불에 큰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 동연에게
가봐야겠지만 근육이 비명지르는 다리로 옥탑까지 올라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녹색으로 변한 구두 속의 발가락이 몹시 쓰라리다.
제희는 담배를 한 모금 빨고 하늘을 올려보며 연기를 내뿜었다.
비가 오늘따라 유난히 시원하다고 생각하며 하늘을 올려보던 제희
의 눈은 천천히 경악한 빛을 띄며 크게 떠졌다. 제희가 떨어뜨린
담배는 녹색 액체로 얼룩진 바닥에서 잠시 타들어가다가 이내
꺼졌다.

*****

-뭐야, 저게.

제희는 한 마디를 뱉고는 혀를 차더니 마땅히 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 듯 서 있었다.
하늘 위를 날아다니는, 불가사리 모양의 대가리와 굴곡 많은 몸체
를 가진 괴생물들은 점점 숫자가 늘어가고 있었다. 하늘 여기저기
에서 불꽃이 보인다. 날개를 펼치고 빠르게 대기에 진입한 자들은
그대로 구름 밑으로 하강하여 비를 맞으며 불붙은 표면을 식힌다.
그 뒤 인간이 기억하지 못하는 먼 과거에 그들의 동족이 그랬듯이
유유하게 공중을 부유하며 촉수를 펼쳐 지구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제희가 보고 있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었다. 일정한
대열을 이루기도 하고 자유 비행을 하기도 했다. 어느 새 하늘이
눈에 띄게 뒤덮혀 있었다. 그들 중 몇몇은 건물 위 첨탑이나
지붕에 내려 앉아서 대가리와 날개막을 위로 활짝 펼치고 얇은
섬모들을 뻗어 너울거리며 자신들 만의 언어를 주고 받았다.
그것들과 자신의 옆에 쓰러져 있는 사체를 번갈아 보던 제희는
한숨을 내쉬었다. 눈으로 봐도 발 앞에 있는 것과 하늘 위에 있는
것들은 똑같이 생겼다. 저것들이 지구에 온 목적이 무엇이건 간에
지금 망치와 사체와 그가 같이 있는 모습이 좋게 보이지 않을 것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분 나쁜 예감 속에서 제희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이걸, 어떻게 처리한다...







                                                                              <終>

                                                        ninelife1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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