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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그의 할로윈

2013.10.24 19:5210.24

  10 31. 온 도시가 축제로 들뜬 분위기였다. 아직은 어설픈 야외 전등과 손수 만든 호박 등불이 화려한 밤을 밝히고 있었다.아이들은 삼삼오오 쪼르륵 모여 이웃의 문을 두드리고 어른들은 아이들과 함께 어울리거나 기회를 노려 그들만의 파티를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모두에게 해당되는 사항만은 아니었다.

  벨리프 스미스.

  살짝 구겨진 회색빛 양복 바지에 전혀 어울리지 않은 곤색 자켓이 그가 앉아 있는 의자 뒤에 걸려 있는게 보였다. 그나마 제일 조용한 장소를 찾는다고 했지만, 그래도 지금 그가 있는 바(Bar) 역시 술 취한 사내들의 무용담으로 시끄러웠다. 그러나 그는 그나마 제일 나은 이 장소를 포기 할 수 없었다. 언제나처럼 사람들에게 방해 받지 않게 최대한 구석으로 자리를 옮기고, 잔뜩 충혈된 눈을 부릅뜨며 뚫어져라 무언가를 계속 써 내려가는 중이었다.

  그는 이 마을의 콩트 작가였다.

  언제나 자신에 대한 프라이드가 높았던 그가 마감 때만 다가오면 종종 볼 수 있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답지 않게 독신이라는 것을 보여주듯 하나도 정돈되지 않은 복장에 와인이라도 흘렸는지 크게 묻어있는 거뭇한 얼룩. 게다가 제대로 깎지 않은 덥수룩한 수염을 하고선 마감을 위한 밤을 불사르는 것이다.

왜 하필 이런 시끄러운 무대를 골라 사서 고생을 하냐고 물어보겠지만 그 역시 할말은 많았다. ‘절대 두드리지 마시오.’라는 문구를 보고도 어린아이들은 ‘trick or treat!’을 외치며 문을 두들기고 화단을 밀가루 더미로 망쳤으며 나올 때까지 음울한 노래를 불러댔다. 기껏 문을 열고 뭐라 한 마디를 할차면 그 말썽쟁이 놈들은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며 도망치기 일쑤. 결국 마지막으로 세 팀으로 나눈 고아원의 아이들 중 마지막 팀이 왔을 때 이미 그는 폭발할 지경이었다. 그 아이들은 화단 주변을 모두 흰 꽃으로 뒤덮고 있는 것이 아니던가!

  그렇기에 마감까지 얼마 남지 않은 원고를 들고 사정없이 떠돌았지만, - 이 나라에 이렇게 좀비와 유령이 많았던가. 이곳은 정녕 저주 받은 땅인가? 빌어먹을 아메리카!

  벨리프작가님 아니신가요?”

  불과 몇 분 전에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며 속으로 욕짓거리를 퍼붓는데, 때마침 어떤 여성이 자신을 불렀다. 평소라면 한껏 자신의 매력을 뽐냈겠지만 이번에 그는 그냥 묵묵히 못들은 척 무시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번에 새로운 작품을 쓰신다면서요? 귀신이야기로 덮혀버린 실제로 일어난 살인사건에 대해서요.”

  여자는 맞은편 의자를 끌어와 벨리프 앞에 앉았다. 그는 그녀에 대해 아주 약간, 마감에 내야 할 원고 한 장 정도만큼의 관심이 생겼다. 그 정도까지 알고 있다면 이 여자는 적어도 신문에 실린 내 기사들을 꼼꼼히 읽어주는 여자가 분명했다. 그런 레이디를 무시한다는 것은 프로로서의 자세가 아니었다.

  , 맞아요.”

  그는 이미 볼품 없는 셔츠의 앞 단추를 채우고 깃을 세웠다. 그리고 이곳에 도착하고 처음으로 원고에서 눈을 떼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다 준 여성을 바라보았다. 예상외로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고 있던 그녀는 동양인이었다. 쌍꺼풀 없이 길게 찢어진 눈, 칠흑 같이 새카만 머리에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어린 얼굴. 동양인을 접할 기회가 별로 없던 나에게 그녀는 신비롭게 다가왔다. 게다가 오늘 같은 날을 위해 일부러 색을 맞춘 것인지 상하의 온통 새카만 옷은 살짝 오싹하면서도 그 신비로움을 더 해주는 것 같았다

  이것이 그것에 관한 건가요?”

  그녀가 물으며 원고에 손을 뻗으려고 하자 벨리프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재산을 보호했다.

  , 죄송합니다. 아직 제출 전 초안이라서요.”

  괜찮아요. 후후훗.”

  여자는 그것에 대해 딱히 기분이 나빠하는 것 같지않았다.

  "사실 그 사건과 당신에게 관심이 있어요. 전 심령술사거든요."

  그녀의 입에서 그런 말이 떨어지자마자 벨리프는 크게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심령술사라고요? 그런건 다 사기꾼이라구요. 아니면 오늘을 위한 컨셉인가요?"

  벨리프의 빈정거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냥 웃기만 하고 있었다.

  "사건은 10 31일 할로윈 데이에 일어났죠. 성인 한 명과 고아원의 어린아이 한 명이 죽었어요. 그 모습이 하도 기이해서 사람들이 사람이 할 수 없다고 이야기했죠. 정말로 잭 오 랜턴이 살아나서 저질렀다라는 소문도 있었구요. 증거도 전혀 발견되지 않았고 말이죠. 하지만 당신은 그 증거를 '알아'냈죠. 그 사건에 범인을 찾아 낸다면 단서는 좁혀 갈 수 있었지만 그러지 못하는 이유가 있었어요."

  그는 깜짝 놀라 다시 자신의 원고를 보았다. 설마 저 여자가 몰래 읽기라도 한 걸까? 하지만 그럴리는 없었다. 이 원고는 그 어느 것보다 중요한 것이기에 철저하게 보호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사건이 경찰과 관련 있었기 때문이죠. 맞죠?"

  벨리프는 휘둥그래져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다행히도 주변사람들은 두 사람의 대화에 관심이 없어 보였다.

  ", 맙소사. 이봐요, 당신 진짜 어떻게 안거에요?"

  그는 다시 눈 앞에 있는 동양인 여자를 훑어보았다.

  "당신은 이곳에 살던 사람이 아니에요. 그럼 제가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어요. 그런데도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는 거죠? 저는 이 모든 것을 알아내는데 무려 일 년이나 걸렸다구요!"

  그것은 자신에 대한 한탄과 같은 절규였다.

  "말했잖아요. 심령술사라고."

  태연하게 말하는 그녀의 모습이 오히려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농담이라면 거기까지 해주세요. 진짜 무섭다구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주변 장식들이 눈에 띈다. 어두운 분위기, 아슬아슬하게 켜져 있는 등불, 온갖 괴물과 해골들로 꾸며진 주변 장식들이 그 두려움을 더해주고 있었다.

  "그런데 일 년 후 또 한 번의 사건이 일어나죠. 같은 사람에 의해서요."

  하지만 여자는 멈추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

  일 년 후라면 분명 오늘일 터였다. 이미 사건이 났다는 건가? 하지만 그렇다고 보기에 오늘의 할로윈은 평화로웠다. 아이들은 길거리를 마음껏 누비고 어른들 역시 축제에 빠져 지내고 있었다.

  "거짓말하지 말아요. 사건이 났으면 지금 분위기가 이럴 리가 없잖아요?"

  "아니요. 사건은 났어요. 그리고 그 희생자는 바로 당신이에요."

  "?!"

  , 맙소사. 하늘이시여. 주를 찾는 짧은 기도문과 함께 벨리프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저 여자는 분명 한패가 분명하다. 그래서 사건에 대해 저렇게 잘 알고 있고, 이 모든 것은 미끼에 불과한 것이라는 생각이 미치자 더 이상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그는 떨리는 손으로 목숨보다 소중한 원고를 들고선 자신의 자켓도 잊은 채 소리치며 뛰어나갔다.

  "이봐요! 살려주세요! 저 여자가 절 죽이려 해요!"

  경찰은 찾아갈 수 없었다. 일전에 이미 자신이 증명을 하려 찾아갔다 쫓겨난 경험들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때마다 듣던 소리는 인기 없는 콩트 작가가 관심을 끌기 위해 망상을 한다는 거였고, 그렇게 그대로 눈도장을 찍어버리며 아마 관련자의 귀에도 이 일이 들어갔을 것이었다. 그렇기에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이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미친놈이라고 손가락질 당해도 좋으니 제발 도와 달라는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길 바라는 외침뿐이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마치 이것 또한 할로윈 일부의 흔한 쑈처럼 보듯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벨리프는 계속해 뛰었다. 헛구역질이 날 정도로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멈춘다면 살해 당할 거다. 이것이 그의 머리 속에 가득한 생각이었다.

  집에 가까워 질수록 목소리는 점점 쉬어가는게 느껴졌다. 더 이상 주변에 자신을 도와줄 사람은 없었다.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아직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슬프게도 그 순간 그가 느낀 감정은 안심이 아닌 사람들에게 외면당한 고독이었다. 벨리프는 그런 미묘한 감정을 안고서 자신의 집으로 뛰어 들어가 모든 문을 잠갔다. 그리고 부산스럽게 눈을 돌리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것을 찾기 시작했다. 자신이 사용하던 낡은 책상, 낡은 침대가 먼지와 함께 좁은 방 안을 장식할 뿐, 적에게 대항할 무기라곤 먼지와 녹이 잔뜩 쓴 과도 뿐이었다.

  아니, 잠깐. 무언가 위화감이 느껴졌다. 그게 무엇인지 떠올리려 하기 전에 그는 자신의 손에서 바스락거리는 원고의 종이를 느꼈다비웃어도 좋았다. 단순한 풍자라고 여겨도 좋았다. 비록 어설픈 소설의 탈을 썼지만 진실이 담긴 이 원고는 반드시 지켜야 된다는 생각이 우선이었다. 그리고 자신만이 알고 있는 낡은 마룻바닥 밑이 생각해냈다. 그는 재빨리 어둠 속에 무릎을 꿇고 손으로 바닥을 훑기 시작했다. 제대로 관리 해주지 않아 거칠어진 나무 바닥 위에 손으로 쓸리는 먼지들을 지나 모서리 아귀가 살짝 어긋나 있는 판자 하나를 찾아냈다. 벨리프는 다급하게 그 판자를 들어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그 안에는 이미 또다른 원고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쾅쾅!

  "벨리프씨! 열어주세요!"

  동양인 여자는 그의 문을 두드리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영원히 안에서 나오지 않을 것 같은 그가 한층 더 창백해진 얼굴로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정말 나였군요."

  여자는 그 말이 의미 하는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자신이 꺼낸 말이니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녀는 그를 달래줄 무언가의 말을 찾는 듯 했지만 곧 진실을 말해주는 방법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요. 그날도 당신은 집에 있었어요. 미완성된 그 원고를 가지고 말이죠."

  “...맞아요."

  벨리프는 기억을 떠올렸다. 마지막날 이제 모든 걸 고발 할 원고의 작성만을 남겨둔 채 누군가가 자신의 집을 방문했었다.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얼마나 지난 거죠?"

  "그 사건으로부터 7년이 지났습니다. 당신이 죽고 나서야 그때 말했던 말이 받아 들여지기 시작했어요."

  그가 허탈함에 주저 앉았다그의 눈동자가 향한 곳에 있는 원고의 종이는 오랜 세월이 지난 것을 알려주듯 이미 노랗게 바래있었다.

  "끝까지 멍청한 짓을 했군요. 7년의 할로윈 동안 말입니다그래서, 당신만이 날 볼 수 있는 건가요?"

  그의 질문에 그녀가 끄덕였다.

  "사실 사건이 종결되고 당신의 친척들은 일단 집을 그냥 놔두기로 했죠. 폐가의 모습 때문인지 기일인 할로윈데이 마다 장난치며 노는 아이들도 있지만 당신을 기리는 마음에 국화를 놓고 가는 아이들도 있어요. 특히 죽은 아이의 출신인 고아원에선 매년 많은 아이들이 찾아오죠. 그런데 이상한 소문이 나기 시작한 거에요. 이곳에 유령이 산다고 말이죠."

  벨리프는 자신이 문을 열고 나올 때마다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는 아이들을 떠올렸다.

  "그랬군요. 진작에 알았다면 아예 화끈하게 할로윈을 즐겨 볼 수 있었을 텐데요. 이건 완전 저를 위한 날이잖아요. trick or treat은 날 위한 대사라구요."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 내어 웃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쓸쓸한 표정만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자신의 상태를 깨달아서인지 아니면 원고를 완성하지 못해서인지, 어떤 연유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 저기 아래에 있는 원고를 꺼내 주실래요? 지금 웃느라 기운이 빠지네요."

  그가 가리킨 곳엔 그가 당시 다급하게 숨겼던 원고가 잠들어 있었다. 그녀가 그의 부탁대로 가까이 살펴보니 그것은 급한 상황을 보여주듯 제대로 정리되어 있지 않은 원고가 구겨지고 들죽날죽하게 들어있었다. 이제 그녀는 원고를 꺼내 확인해 보기 시작했다한 장씩 훑어 넘겨보다가 초안에 불과한 원고 후반부터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채 비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미완성의 원고이지만 그의 이름으로 다시 세상밖에 드러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훑던 원고를 다시 정리했다.

  "수고하셨어요. 벨리프씨, 당신은 훌륭했습니다. 이것이 다시 밖으로 나온 이상 세상도 다시 한번 당신을 생각할 거예요."

  원고를 꺼내 들고 고개를 들었을 때 이미 그는 사라진 후였다. 당황한 여자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느 곳에도 그녀가 들고 있는 종이뭉치를 제외하곤 벨리프의 흔적은 이제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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