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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우주의 푸른 색

2012.03.12 03:1203.12

우주의 푸른 색


1.
그는 넓고 하얀 역사의 카페에 앉아 턱을 괴고 있었다. 아직 신선한 태양 빛의 하얀 색이었다. 그러므로 바닥이나 벽에 칠한 색깔이라기보다 공기의 색깔에 가까웠다.
역사는 2층이 베란다처럼 1층을 둘러싸고 있는 구조였다. 소여는 넓고 둥근 1층에 앉아 있었다. 건물의 앞쪽은 야외로 활짝 열려 빛이 들어오고 있었고, 넓은 역사에는 사람이 몇 명 없었다. 도시의 외곽에 있는. 공항 가는 길목에 있는 역이었다. 몇 달에 한 번씩 우주에서 비행기가 들어올 때를 제외하고는 늘 한산했다.
간헐적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아직 따뜻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추위와도 또 다른, 졸졸 흐르는 물 같은 바람이었다. 그런 물에 손을 담그고 있는 것 같은 날씨였다. 머리를 상쾌하게 하면서 피곤하게 만들었다. 그런 바람은 목도리와 겨울 옷의 잠들어 있던 묵은 먼지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소여는 목도리를 푸르지 않고 앉아 있었다.
그는 오랜만에 만나는, 우주 건너편에서 날아온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 아침 우주에서 도착하는 건 아니었다. 공항 가는 길에서 만나기로 한 것은 단순히 그의 숙소가 그 근처에 있기 때문이었으며 우연이었다. 친구는 사실 이 별에 도착한지는 벌써 두 달이며 그 동안 남쪽 계곡으로 여행도 다녀왔다고 했다. 친구는 이미 몇년 째 세계 여행 중이었다. 졸업 파티 때에도 졸업한 다음의 계획은 우주 여행이라고 했었다. 파티장 전체를 돌아다니며 그 자리에 있던 동기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고향 별에 찾아가게 되면 연락할 테니 꼭 만나자는 약속까지 받아내었었다. 그의 이야기는 항상 농담처럼 들리지만 대체로 진심이었다. 소여에게 있어 그는 마음을 알 수 없는, 그러나 처음부터 이상하게 친하게 되는 종류의 사람이었다.
학교에서 친구는 치와라는 애완 동물 같은 별명으로 불렸었다. 그의 본명은 무척 길고 설치음이 많은, 발음하기 힘든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친구의 고향은 극히 변방의 낯선, 대부분의 동기들은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별이었다. 그 별에는 도시가 없으며 옷도 아직 현대화되지 않았고, 우주선은 대략 십 년에 한 번씩 물물교환을 하고 갈 뿐이라고 했다. 그들은 사실 치와가 남자인지도 여자인지도 알지 못했다. 겉모습으로 분간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그가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장난으로 시작한 것 같았지만 어느 새인지 정말 알려주지 않기로 마음을 정한 것 같았다.
그들이 졸업할 무렵 본격화된 전쟁에도 치와의 우주 여행 계획은 변경되지 않았다. 마침 그들은 졸업과 동시에 평생 다시 만져보지 못할 만한 액수의 돈을 받게 되었기 때문에 계획은 오히려 더욱 실행하기 쉽게 된 셈이었다. 약속된 교육 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 데 대한 보상금이었다. 사실 전쟁은 그들이 입학했을 무렵부터 우주 한 구석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통신이 끊어진 별의 숫자가 유의미하게 많아지고 문제 해결의 실마리도 보이지 않자 학교를 지원하던 재벌들도 일단은 휴교하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을 내렸던 것이다.
그들이 다니던 것은 특별한 학교였기 때문이다. 행성 간 교류와 코스모폴리탄적 교육을 위해 우주적 재벌들이 공동으로 투자하여 설립한 곳이었다. 우주선이 이백 개가 넘는 별들을 오가고 있는 지금도 인간이 다른 별을 여행하는 일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첫째, 물건은 빛의 속도로 여행할 수 있었지만 인간은 빛의 속도로 여행하면 죽게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아주 가까운 행성이라고 해도 왕복하는 데만 삼사년이 들었다. 둘째는 빛의 속도가 아닌 여행이라도 서른 살이 넘으면 거의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원인은 알 수 없지만 뼈와 뇌에 무리가 간다고 했다. 그러므로 휴교라고 해도 지금 학교를 그만두는 사람들이 다시 학교로 돌아올 수 있는 종류의 휴교는 아니었다. 전쟁이 얼마나 계속될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지만 최소한 몇 년 안에 끝날 기미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학교가 다시 열릴 때쯤 그들은 이미 우주 여행을 할 수 없게 되어 있을 것이다.
학교는 우주선에 있었지만 지구에 거점을 두고 있었다. 우주선과 지구에서 삼 년간 기초 교육을 받고 남은 칠 년간은 여러 다른 별에서 유학하며 일도 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학비가 완전히 무료였는데도 입학 경쟁은 대부분의 별에서 거의 없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우주를 왕복하는 시간을 계산하면, 졸업하고 집에 돌아올 때는 빨라도 삼사십 년이 지나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치와처럼 먼 별에서 온 경우는 돌아가면 거의 이백 년이 흘러있을 거라고 했다.
마침내 휴교가 결정되었을 때 그들은 전부 고작 일 학년을 마친 참이었으므로 졸업은 예상보다 십 년이 앞당겨진 셈이었다. 하지만 치와 같은 경우에는 물론 큰 차이가 아니었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받은 돈으로 우주를 여행할 거라고 했다. 마지막 파티 날 소여는 열두 시쯤 일찍 방으로 돌아왔으므로 새벽에 또 무슨 헛된 말들이 오고 갔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는 다음 날 아침 일찍 비행기였다. 다음날 아침에는 당연히 아무도 깨어있지 않았으므로 그는 소리를 내지 않게 조심하며 복도를 지나 혼자 공항으로 갔다.

집에 돌아왔을 때는 운동회 같은 날씨였다. 부모님은 아직 살아 있었고 거의 변하지 않은 채였다. 그를 우주에 보내고 싶어했던 건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코스모폴리탄적 삶에 대한 꿈이 있었던 것 같다. 친척들의 충고도 잠재적인 비웃음도 소용이 없을 정도로 굳은 결심이었다. 우주선을 타러 가던 날 그는 공항에 배웅 나온 어머니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얼굴을 들여다보면 그 앞에 펼쳐져 있는 너무 긴 미래에 대해 생각하게 될 것 같았다. 수속을 마친 뒤 아무도 없는 대기실에서 거대한 하얀 벽을 올려다 보았을 때도 그는 콘크리트 알갱이가 견디지 못하고 분해되기 시작할 만큼 까마득한 미래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귀환은 거의 뉴스가 되지 않고 조용히 이루어졌다. 한때 별 전체를 열광하게 했던 우주는 마치 존재 자체가 잊혀진 것 같았다. 우주를 휩쓸고 있는 전쟁의 소식도 여기에서는 먼 외국 들판의 일기 예보 같았다. 집에 돌아왔을 때 시간은 이십 여 년이 지나 있었다. 친구들은 삼십 대 후반이 되어 있었고 부모님은 육십 대였다. 그는 일 년 반을 쉬고 특별 전형으로 대학에 입학했다. 보상금이 있었기 때문에 별 갈등 없이 집을 나와 자취할 수 있었다. 원래 많은 돈이었지만 고향 환율로 보상금은 정말로 큰 돈이었다. 이십 년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살아도 될 거라고 삼촌은 말했다.  
그는 대학 동기들보다 두 살이 어렸지만 또 스무 살이 많기도 했다. 그는 학교를 거의 나가지 않았다. 휴학도 세 번이나 했다. 시험 기간이나 삶의 계획에 묶이고 싶지 않다기보다 잘 묶일 수 없는 느낌이었다. 며칠 전은 조용한 공기 속 희망과 미래가 가득 떨리고 있는 중학교 때를 생각나게 하는 날씨였다. 그는 반쯤 열린 교실 창문 옆 자리에 앉아 있었다. 바람은 아주 먼 곳을 생각나게 했다. 하늘에는 달이 세 개 떠 있었다. 문학 시간에 배우는 것과 달리 바람은 사랑하는 여인의 소매에서 불어오는 것도 늙은 부모님 문 앞에서 불어오는 것도 아니고 훨씬 먼 곳에서 불어오는 것이 분명하다고 중학교 때도 생각했었다. 우주에 대해서도 지구나 역사에 대해서도 아무 것도 몰랐지만 말로 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아주 멀리 가게 될 거라고 믿었다. 지금도 그때처럼 물이 든 차가운 바람이 옷깃 사이로 스며 들어오고 목도리를 풀게 되는 계절이었다.
봄은 언제나 특별했다. 고향 별에서 겨울은 천 일을 계속 되었고 또 하루는 지구 시간으로 사십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돌아온 이래는 계속 겨울이었다. 그는 때때로 지구의 여름을 생각했다. 지구는 겨울에도 습기로 가득했고 근본적으로 따뜻했다. 이십 여 세기 전 환경 오염의 부작용이라고 했다. 그러나 고향 별의 겨울은 그 산성비보다 더 적대적이었다. 시차 적응이 잘 되지 않았던 처음에는 밤이 특히 길었다. 그럴 때면 같은 자리에 앉아 밤새 tv를 보고 있는 사오십 년 뒤의 미래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방은 하얀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온도가 내려가는 밤에는 커튼까지 다 닫아놓아야 했기 때문이다.
우주선에도 창문은 없었고 벽 너머는 검은 우주였으므로 논리적으로는 건조해야 했을 테지만 우주선에 있을 때는 언제나 물과 어둠 속에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었다. 매끈매끈한 벽은 그 너머 물이 있는 동굴이었던 것 같았다. 조명이 어둡고 소리가 울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처음 우주선을 디자인한 것은 지구 사람들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처음 어두운 지구에 도착했을 때 그는 그 먹먹한 날씨에 꿈이 이루어진 듯한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 지상을 운행하는 전차를 탄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고향 별에서 열차는 전부 지하철이었기 때문이다. 지구는 항상 어두운 신비한 구름이 드리워 있었고 지구 사람들은 피부도 어두운 색이었다. 지구의 수도는 우주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고도시였다. 열차를 타고 가면서 본 그 도시에는 낡은 지구식 건물들과 하늘을 향해 뻗은 완성되지 않은 폐허들이 있었다. 도시 전체에 어두운 물기가 이끼처럼 끼어 있었다.
수업에서는 우주의 역사에 대해 배웠다. 인류와 문명의 역사는 만 년이 넘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하지만 어떻게 최초에 지구를 벗어나 은하로 진출할 수 있었는지, 그리고 이렇게 많은 별들로 이주하게 되었는지는 까마득한 과거의 침묵에 잠겨 있었다. 그 이전의 역사는 물론이었다. 이 천 년전 지구의 어두운 높은 빌딩들의 사진을 볼 때면 그는 그 빽빽히 뚫린 구멍마다 사람들이 가득 차 있는 악몽 같은 모습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한동안 대이주 시대가 있었지만 지금은 추측할 수 없는 어떤 이유로 행성들 간의 교류가 끊겨 인류는 서로 다른 별들에 흩어져 고립되게 되었을 것이라 했다. 약 이 천 년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지구는 우주로 진출할 기술력과 힘을 재발견할 수 있었다. 옛 정착지들에 다시 찾아가게 되었을 때는 사람이 살았던 흔적만 있을 뿐 아무도 남아있지 않는 별도 있었고 우주의 존재나 고도의 기술을 아예 잊어버린 별도 있었다. 지금은 물기와 늪지에 잠긴 지구의 서반구에도 한때는 많은 도시와 지금은 잃어버린 수많은 언어들이 있었다고 했다.
그러므로 우주는 전염병 혹은 우주 폭풍 혹은 전쟁이 찾아올 때마다 몇 번이고 서로 연결되었다가 끊어지는 어둠의 시대의 반복인지도 모른다. 시대가 반복될 때마다 마치 처음 만나는 것처럼 서로를 재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때 우주의 반복되는 수축과 팽창에 대해 들었을 때 그는 미래를 알게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터널 모양 수족관 같은 모습의 이미 누구도 어떻게 할 수 없는 미래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당시 우주에서 만났던 사람들의 얼굴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마치 같이 계속 어둠이나 물 속에 있었던 것처럼 추상적인 윤곽으로 남아 있을 뿐 한 명 한 명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학교에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옆에 앉아있는 동기의 팔꿈치가 지나가는 행성의 빛처럼 멀리 있었던 것은 기억했다. 그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지만 좁혀지지 않더라도 기쁨이 있었다. 마치 집이 아닌 호텔에서 잘 때의 낯선 친구됨 같았다. 지구에 도착해서 처음 묵게 되었던 호텔에서의 기쁨을 기억한다.
호텔의 좋은 점은 맨발로 집에서와는 다른 야경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또 아무런 옷이나 입고 낯선 화려한 지역과 건물들을 돌아다닐 수 있다는 점이기도 하다. 그들이 지구에 도착한지 한 달도 안돼 휴교가 발표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다른 별이나 지구 보다 깊숙한 곳으로 숙소를 옮길 일이 없었다. 그 호텔은 그의 지구 경험의 거의 전부가 되었다. 그러나 그곳보다 좋은 장소는 없으리라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사실 아쉬움을 느끼지는 않았다. 그는 여행을 가면 호텔이나 공항에만 머물러 있으려고 하는 초심자처럼 그곳을 좋아했다. 마지막 저녁 파티에서 일어나 나왔을 때도 짐을 싸다 말고 혼자 방에서 그 조용함을 바라보고 있었다.
돌아온지 오 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우주와 우주선의 기억은 이미 전생처럼 희미했다. 한밤에 잠에서 깨어 하얀 조용한 벽들을 쳐다보게 되는 때 특히 그랬다. 다른 행성이란 전생과 비슷한지도 모른다. 옛날 학교의 친구들과는 거의 연락하지 않았다. 그 중 몇몇은 앞으로도 오륙 십 년이 지난 후에야 고향에 도착하게 되기 때문이기도 했다. 오륙 십 년이 지난 뒤 우주선에서 내리게 되는 사람들에게 있어 약 이십오 년 전의 졸업 파티와 그 미래 사이의 시간은 빈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 졸업 파티가 이십오 년 전에 일어났다고 말하는 것은 엄밀한 사실이 아니었고 우주의 시간을 계산하는 법은 사실 조금 더 복잡했지만 그걸 여기서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

2.
터미널은 햇빛이 조금씩 더 현실적이 되고 따가워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소여는 약간 더 그늘이 진 자리로 옮겨 앉았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났을 때 전화가 걸려왔다. 낯선 번호였다. 전화를 받으려던 소여는 어느새 손이 딱딱하게 차가워져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처음에 수화기에는 잠깐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다. 치와는 오늘은 아무래도 올 수 없게 되었다고 했다. 그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급하게 꼭 해야 할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전화는 눈 앞에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아주 특별한 장치이다. 친구의 목소리는 아주 깊은 푸른 곳에서 들려오는 것 같은 음질이 좋지 않은 소리였지만 그는 햇빛이 떨어지는 조용한 카페테라스를 보고 있었다. 머리 위에는 넓은 초록색 잎사귀의 나무도 있었다. 그는 무심코 그 잎사귀를 만지작거렸다.
전화를 끊은 뒤 소여는 그날은 집에 들어가지 않기로 한다. 저녁까지 이 근처에 있다가 중앙역으로 가는 것이 집에 들렀다 가는 것보다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치와가 그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전쟁에 대한 이야기였다. 점점 더 많은 별들이 화학 테러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전염 속도도 가속되고 있다고 했다. 전쟁은 사실 처음부터 화학 무기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특정 정부나 테러 단체가 범인이 아니라 단지 우주적 전염병일지 모른다는 설도 처음부터 있었다. 어떻든 당분간 우주가 원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것이 분명해진 이상 이제는 비밀리에 대피소를 건설하여 다시 우주로 돌아갈 수 있게 될 때까지 행성의 깊숙한 외딴 지역에서 잠들어 있기로 하는 프로젝트가 여러 별에서 추진되고 있다고 했다. 통신이 끊긴 별들 중에는 둘 다 잘 알고 있는 유명한 별들도 있었다. 소여는 같이 졸업했던 몇몇 친구들이 도착해서 빈 별을 발견하게 될 오륙 십 년 후의 장면을 생각했다. 광속에 수렴하는 속도로 움직이고 있을 때 우주선은 외부와 연락을 취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아직 열릴 때가 되지 않은 달걀처럼 자기 완결된 상태로 있었다.
치와는 대피소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오늘 저녁 몇 시 중앙역의 몇 번째 플랫폼에서 기차를 타면 되는지 알려 주었다. 대피소의 위치는 극비이지만 아침에는 도착하게 될 것이며 입소 일주일 후에는 전원 냉동 수면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소여가 거절할 가능성은 완전히 생각하지 않는 듯 말했다. 더 일찍 연락할 수 있으면 좋았을 테지만 어제 저녁에야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고 했다. 초대권은 전화를 끊은 잠시 후 문자 메시지로 도착했다.
소여는 해가 지는 시간까지 그 카페에 앉아 맞은편 좌판의 물건들이 밝은 빛으로 물들어가는 걸 보고 있었다. 오늘은 특별히 밝은 날이었다. 도중에 터미널을 돌아다니며 칫솔과 수건 등을 사기도 했다. 부모님과의 전화는 상당히 오래 걸렸다. 그러나 부모님과 친척들의 이야기로 들어가기 시작하면 이야기는 더 이상 그에 대한 것이 아니게 되어 버린다. 한편 자취 방에 마지막으로 들르고 싶지 않았던 건 침대와 가구들과 조용히 잠들어 있는 그 모습을 좋아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치와는 아마 오늘 저녁에 플랫폼에 나올 수 없을 것이므로 전화로 인사를 해야겠다고 했다. 그는 금방 다른 별로 나갈 생각이라고 했다. 그러나 어쩌면 유인 우주 여행은 이미 어렵게 되었는지도 몰랐다. 소여는 규제에 대한 뉴스를 본 기억이 있는 것 같았다. 한편 냉동 수면의 기간은 모든 변수를 고려하여 이백 년으로 설정되어 있다고 했다. 그쯤 되면 아무리 강력한 독소라고 해도 어느 정도는 정화되었을 시간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동안 아무런 테러도 전쟁도 일어나지 않고 그저 이백 년 동안 잠을 자고 일어나게 될 가능성도 있었다.

그날은 밝은 날이었지만 중앙역의 공기는 약간 어둑한 색이었다. 구도심의 아주 오래된 건물이었기 때문이다. 기차는 잠시 지상의 선로를 따라 달렸지만 머지 않아 지하로 들어가게 될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어느새 저녁으로 도시는 조금은 침수된 것 같은 호수 색이었다. 그는 짐을 올리는 도중 멈춰 서서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멀리 신도심이 별자리처럼 조금씩 빛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어느새 맥이 빨리 뛰기 시작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가 잠에서 깼을 때 기차는 밤보다 깊은 땅 밑의 어둠을 뚫고 가고 있었다. 차체에서는 낮은 기계음이 들려오고 있었다. 우주선에서는 언제나 그런 소리가 의식의 저변에 있었기 때문에 이상한 안정감이 있었던 것인지 모른다. 핸드폰을 열어보았지만 아무 것도 도착해있지 않았고 이미 통화권 밖이었다. 소여는 왜 옛날 친구들을 만나고 나면 반드시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고 생각하게 되는지 신비롭게 생각했다.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했거나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했다고 생각하게 된다.
치와는 그 동안 지구의 동쪽 해안 및 가까운 태양계의 몇몇 별들을 여행했다고 했다. 소여의 고향 별에는 아마 일부러 겨울이 끝나기 전에 도착했을 것이다. 별 남쪽의 사람이 살지 않는 지역은 여름에는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남쪽은 사면이 만년설의 푸른 산들에 둘러싸인 거대한 계곡이었다. 여름에는 빛이 너무 환해서 화상을 입게 되며 특히 눈이 멀게 된 경우도 있다고 했다. 치와는 지구에서 학교를 다닐 적부터 도시보다는 고대 문명의 유적지나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게 된 폐허를 좋아했으므로 남쪽 계곡에도 분명히 들르고 싶어했을 것이다. 치와는 그 별에 사는 사람들도 잘 가지 않는 지역에 늘 가 보고 싶어했다. 소여도 남쪽 계곡에는 가본 적이 없었다. 오지나 유적 관광은 한때는 크게 유행했다고 했지만 지금은 정말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치와는 이삼 백 년 전쯤의 베낭 여행자나 주말 여행객들이 다니던 코스를 전부 다시 찾아다녔다. 지구에는 특히 그런 것들이 많았다. 동쪽 해안에는 우주에서 가장 큰 관람차와 녹슨 유원지가 있었다. 주유소와 폐가들만 점점이 흩어져 있는 광야를 버스로 며칠 지나 비로소 도착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가 도착한 날 그 해안의 하늘도 지구에서는 늘 그렇듯 회색이었다.
그 바다 너머에는 오염이 너무 심해 몇 천년 째 아무도 들어가지 못한 대륙이 있다고 했다. 원자력과 또 말로 할 수 없는 많은 오래된 것들의 안개에 싸인 회색 대륙이었다. 그는 낡은 관광 안내서를 쥐고 한동안 그 빈 해안을 서성거렸다. 지구는 따뜻하고 습기찼지만 이제 도시나 온실에서 자라는 것들을 빼고는 식물이 자라지 않았다.
도시로 돌아와서 지구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율리를 만났다. 율리는 동기 중 하나 뿐인 지구 출신이었다. 새벽까지 같이 있던 졸업 파티 날 이후 처음 다시 만나는 것이었다. 그날 새벽이 왔을 때 그는 마루와 문 사이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방은 도심을 내려다보는 높은 곳이었고 창문도 아주 컸다. 지구에서 자꾸 밤을 새게 되었던 건 다음 날 아침도 또 흐리고 금방 다시 어두워질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광장 앞 카페에서 율리를 다시 만났을 때는 오후 한 시였지만 벌써 어두웠다. 지구는 오전에는 가끔 밝은 날이 있었지만 한 시에서 다섯 시 사이는 반드시 비가 내렸다. 낮이 오래 되어 지겨워지기 전에 서둘러 어둠으로 돌아가는 별이라고 율리는 얘기했었다.
치와는 이미 소여의 고향 별 대피소 초대권을 얻은 상태로 그 별로 출발하려는 참이었다. 초대권을 소여에게 양도하고 싶다는 생각을 어두운 그곳 카페에서 그는 처음으로 이야기했다. 율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역 근처에서 타로 카드 점을 봐주며 살고 있었다. 점성술이나 사주는 다른 행성들에 적용되지 않기 때문에 과학이 발전할수록 힘들지만 타로 점은 상관이 없기 때문에 제일 좋다고 했다. 그도 그 카페에서 점을 보고 대신 커피를 샀다.
지금 돌고 있는 이 병의 정체가 테러이든 전염병이든 지구는 다음 타겟이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별이었을 뿐 아니라 원래 문명화된 행성들 중 가장 평균 수명이 짧은 별이기도 했다. 습기를 따라 모든 곳에 스며들어와 있는 지난 몇 천 년간의 축적된 오염 때문이었다. 어떤 기술로도 결코 완전히 차단될 수 없고 어쩌면 태양이 적색거성이 될 때까지 영원히 계속될 오염이었다. 율리는 더 좋은 발전된 별들이 있는데도 이주하려고도 하지 않고 여기 계속 눌러사는 사람들을 원래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어릴 때는 꼭 나가서 살 생각이었고 그래서 우주선 학교에도 지원했지만 지금은 이대로 만족한다고 했다. 그녀는 대피소나 냉동 수면에도 관심이 없었다. 밖에는 건물이 무너지는 소리가 우르르쾅쾅 희미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지구는 재건축이 거의 항상 영원히 계속되고 있었다. 밤을 새워버렸던 졸업 파티 날에도 공사장 소리가 한 걸음씩 들리기 시작했으므로 아침이 온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지구는 또 항상 오래 묵은 비에 젖은 건물들로 가득 차 있기도 했으므로 재건축된 아파트들이 어디로 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치와는 나무로 된 카페의 벽에 등을 기댔다. 그는 지구의 나무와 기둥들의 냄새를 좋아했다. 사실 치와는 다른 어떤 별보다 비 내리는 어두운 고도 지구를 좋아했다. 재건축이 끊이지 않고 세포까지 속속들이 오염되어 있으며 화학 테러의 주범으로도 거론되고 있는, 수많은 악과 역사적 인물들과 건축 양식과 우주 그 자체를 탄생시킨 별이었다. 그는 지구 사람들의 스웨터와 플리츠 스커트와 단정한 머리카락도 좋아했다. 이제 바깥은 밤에 가까운 때의 비 내리는 어둠이었다. 지구의 어둠은 보통 비구름보다 훨씬 깊고 물과 같았다.
그들은 또 멸망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지금 우주를 위협하는 전염병은 머리카락이 빠지고 피부가 조금씩 타 들어가 죽게 되는 힘겨운 병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바퀴벌레 얘기를 했다. 바퀴벌레나 껍질이 딱딱한 동물들이 모기보다 항상 더 어렵게 죽는 것처럼 사람도 그럴 수 밖에 없게 된 것은 아닐까 한다고 했다. 그는 지금 이렇게 사람들이 다 죽고 공항과 연구소들이 비워지면 언제 다시 그 많은 사람들을 만들고 자전거와 증기 기관, 비행기와 우주선을 생산하여 덜컹거리며 우주로 돌아올 수 있게 될지 생각했다. 설령 대피소에 들어가 몇 백년을 살아남는다고 하더라도 어차피 다시 돌아올 수는 없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그에게 있어 우주는 어떤 추상적인 진공 상태가 아니라 우주 공항 특유의 분위기였고 공항마다 있는 패스트푸드 점과 체인 점들이었으며 지구산 우주선 복도의 독특한 푸른 색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어릴 때 우주선 학교에서 지낼 무렵의 그런 푸른 복도를 생각했다. 복도는 조용하고 아주 깨끗했으며 동굴처럼 소리가 확장되고 울리는 구조였다. 벽은 은색이었다. 우주였지만 문을 열고 나가면 정원에 조용히 비가 내리고 있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식사 시간이었던지 수업 중이었던지 다른 학생도 선생님들도 근처에 없었다. 그는 복도 한 켠에 앉아 통화권 밖인 핸드폰을 만지며 하릴 없이 있었다.
복도의 한쪽 끝은 평소 아무도 다니지 않는 구역으로 이어져 있었던 것 같다. 아마 기계실이었을 것이다. 그때 문득 어둠으로 소급해 들어가는 복도 저쪽을 보았을 때 아주 오래된 어둠을 마주 본 것 같은 느낌을 받았었다. 잘 다니지 않는 복도 저편의 그 어둠은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까마득한 옛날로 이어져 있는 것 같았다. 그런 무한한 시간 속에서 온 어떤 것이 그를 돌아본 것 같은, 복도 저편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그때 있던 것이 우주 공간을 유영하는 번쩍이는 우주선 속이 아니었더라면 분명 유령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타고 있던 우주선은 아직 아무도 여행한 적 없는 새 것이었으므로 유령이라고 해도 우주선 내부의 유령일 리는 없었다. 또 진공 속에는 유령이나 마음이나 영혼이 존재할 수 없을 거라고 그때까지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유령이나 심령 현상에 관심이 있었을 뿐 아니라 역사 책에서도 쓰여지지 않은, 쓰여질 수 없던 부분들에만 흥미를 느꼈다. 졸업 후 오지 여행을 할 때 그는 자주 역사 책들을 사 가져갔다. 모르는 건 모른다고 쓰여있는 교과서 같은 책들도 있었고 반은 상상이고 반은 거짓말인 재야 학자들의 책도 있었다. 그는 종종 우주의 푸른 신비에 대해 생각했다.
주변에 낮은 불도 없는, 시대를 짐작할 수 없는 적막과 어둠 속에서 자는 날이면 할머니 집의 꿈을 꾸었다. 할머니 집은 푸른 우주가 보이는 푸른 들판에 있었다. 하루에 한 번 벌판을 가로질러 가는 기차를 제외하면 우주에서 내려다 보았을 때 사람이 살고 있지 않다고 착각할 만한 지역이었다. 도시도 고층 빌딩들도 없었고 사람들은 몇십 집 단위로 여기저기 흩어져 살고 있었다. 친척들은 자주 할머니 집에 모였다. 우주로 떠나기 전 마지막 밤도 그는 할머니 집에서 보냈다.
지난 번 지구에 들렀을 때는 백여 년간 쌓인 편지를 한꺼번에 받아볼 수 있었다. 할머니와 부모님과 친구들이 죽기 전에 쓴 편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다시 고향 별에서 편지를 받아 볼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우주 여행을 할 수 없는 나이 또한 다가오고 있었다. 앞으로 대략 이삼 년 정도 남아 있었다.

한편 기차에서 소여는 우주와 옛 친구에 대해 생각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이상하게 피로하고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사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전염병은 이 별까지 미치지 않을지 모르고 그 자신은 단지 이백 년 후의 진보된 미래에 깨어나게 될지도 몰랐다.
치와는 옛날부터 이상하게 푸른 들판이나 풀의 냄새를 생각나게 했다. 아니면 들판과 닮은 바다의 냄새였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소여는 개인적으로는 그것을 어떤 특정한 원소의 냄새라기보다 미래의 냄새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유학을 떠나기 전날 어머니의 얼굴이나 하얀 벽에서 봤던 것과는 다른 미래였다.
그러므로 만약 전쟁이 이 중요할 것 없는 별까지 미쳐 다시 우주 여행을 떠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치와가 죽어가는 도시에 가만히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디를 여행하면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의 기나긴 시간을 기다리면 좋을지 소여는 생각했다. 이 별은 관광지라고는 남쪽 계곡 밖에 볼 것이 없는 작은 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쩌면 남쪽 계곡은 제대로 탐사되지 못한 것인지도 몰랐다. 그의 고향 별은 인간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끝이 없이 깊은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처음 인간이 남쪽 계곡을 탐사할 때 만년설이 덮인 산맥 사이를 뚫고 들어가니 깜짝 놀랄 만한 여름이었던 것처럼, 더 남쪽으로 계속 들어가다 보면 깊은 안개에 잠긴 또 다른 계곡 입구를 발견하게 될 것이며 모든 무너진 건물들과 실종된 사람들, 멸종된 동물들이 머물러 있는 계곡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다. 하늘에는 낯선 항성들과 모든 달들이 떠 있는 환상적인 불가능한 광경을 상상했다. 그곳은 우주가 파괴되는 동안 내내 관광하고 있을 만큼 영원한 여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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