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중년z

2011.05.16 13:2305.16

소들 밥을 챙기고 축사 수리를 하고나니 반나절이 지나갔다. 아침 햇살에 옥수수 밭의 초록빛이 쨍하다. 어젯밤 잠을 제대로 못 이룬 때문인지 어째 벌써 몸이 피곤하다. 해가 뜨자마자 어젯밤 축사에서 뛰쳐나간 소 한 마리를 찾아 나섰지만 어디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집으로 돌아와 급한 일부터 마치고 다시 놈을 찾으러 나갈 생각이었지만 영 기운이 나질 않았다. 찡그린 눈으로 눈부신 하늘을 올려보다 축사 지붕 그늘에 앉아 땀을 닦는다. 담배를 하나 꺼내 물며 오늘 오후 할 일을 생각해본다. 할 일은 많다. 이맘때쯤이면 뜬금없이 왔다 지나가는 폭우를 대비해서 집과 축사 지붕 수리도 해야 되고, 소들 점심 저녁도 줘야 되고, 브루노씨 댁에 들러 그 말썽 많은 트레일러도 고쳐줘야 된다. 틈이 난다면 멀리 떨어진 초원에 가서 일전에 설치해 두었던 함정들도 살펴봐야했다. 버르장머리 없는 들개들이 내 사냥감을 가로채기 전에 손을 써야 한다. 예전엔 그런 일이 없었는데, 벌써 이번 주에만 두 번이나 덫에 걸린 토끼와 사슴들이 습격을 당해 뼈만 남은 채 죽어있었던 것이다. 문득 생각이나 뒤 호주머니에 꼽혀있는 권총을 만지작거렸다. 단단한 손잡이가 믿음직스럽다. 손잡이에는 얇은 독수리 장식이 있는데 브루노씨가 작은 철 조각을 그라인더로 갈아내어 양각으로 만든 것이다. 그는 손재주 좋고 할 일 없는 늙은이로 그 선물을 핑계로 벌써 열두 번째 엉망진창인 트레일러의 수리를 부탁하고 있었다. 그 역시 10년 전 다니던 회사를 은퇴하고 시골에 정착한 사람인데, 인생에 진력이나 이곳에 정착한 나와 같은 처지의 귀한 친구이다.

그늘 바람에 땀이 어느 정도 식었는지 몸이 으스스했다. 아니 어쩐지 몸 상태가 좋지 않은 것 같다. 팔에 둘러맨 붕대에 피가 스며들고 있었다. 어젯밤 한바탕 소동이 일어나며 생긴 상처인데 괜히 신경이 쓰여서 몸살 난 것처럼 느껴지는지도 모른다. 30년을 병원 한번 가지 않고 회사에 다녔던 나다. 건강이라면 20대보다 낫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20대? 녀석들 대부분이 마리화나에 취해 사는 건 이미 이 나라에서 공공연한 사실 아닌가. 무능한 주제에 툭 하면 징징대며 세상에 원망이나 하고, 어른들 무시나 할 줄 알고 말이야, 아무튼 미래가 없어 이 나라는.

이 작은 마을에도 그런 녀석이 하나 있다. 인근 도시에서 초원을 가로질러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이 곳은 아이들 떠드는 소리 없이 나이든 늙은이들 기침 소리만 들리는 조용하고 작은 마을이다. 좀 나이가 찬 몇몇 녀석들은 취업이나 공부를 위해 도시에서 독립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중에 공부에는 취미....... 아니 그런 녀석은 억지로 공부를 시킬 필요가 없다. 공부 시켜서 잘되어봐야 어디 갱에서 대가리나 하겠지. 아무튼 하는 일 없이 마을 이곳  저곳을 쑤시며 빈둥거리는 그런 녀석이 있다. 힐튼씨 슬하에 있는 자식 놈인데, 오 불행한 힐튼씨, 녀석과의 첫 악연은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건이긴 하지만 잊을 수도 없는 일이다. 초원에 있을 내 사냥감들을 확인하러 갔을 때였다. 멀리 뒷발이 올무에 걸려 초조하게 바위 둘레를 서성이는 사슴을 발견하고 그리로 차를 모는 중이었다. 10M 쯤 남겨뒀을까 어디선가 울린 탕! 소리와 함께 사슴이 그대로 고꾸라지는 것이다. 위험하잖아! 나는 꽈앙 경적을 울리며 급하게 차를 세웠다. 주변을 살펴보니 저 멀리 수백 미터 떨어진 곳에 깡마른 젊은 놈이 라이플을 어깨에 걸친 채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총알은 정확히 사슴의 심장을 관통해있었다. 놈의 사격술은 감탄할 만 했지만 싸가지 또한 그러했다. 짐승같이 번득이는 녀석의 눈빛이 생생이 보이는 거리에서부터 나는 괜히 오금이 저렸지만 지지 않으려 일부러 험상궂은 얼굴을 지어보였다. 이어 권총을 빼어 보이며 ‘사람이 근처에 있는데 총을 쏘면 되니 애야’ 정도의 내용을 어른의 권위를 실은 갖은 욕설과 협박을 동원하여 전달했었다. 부끄럽게도 다음 순간의 기억은 나지 않는다. 한 밤중에 한기에 몸을 부르르 떨며 땅바닥에서 깨어나 머리에 피를 질질 흘리며 집으로 돌아간 나는 앞으로 녀석을 철저히 무시하기로 했었다.

당시 나는 녀석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 후에 부르노씨의 트레일러를 고치며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다 알게 된 바로는 이 마을 사람들 전부가 녀석의 만행에 기가 질려있는 상태였다. 게다가 항상 약에 잔뜩 취해 있어서 잘못 엮였다간 무슨 일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어찌하여 그런 놈을 그대로 놔두느냐 경찰에 신고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니냐 따져 물었지만 부르노씨는 마을이 시끄러워지는 건 싫다느니 애들 장난에 일일이 대응하는 것도 어른스러운 행동이 아니라느니 찻잔을 덜덜 떨며 변명을 했다. 나라고 별 수가 있겠는가. 아직 신분증도 없는, 무식해서 학생증도 없는 녀석에게 치욕적이긴 했지만 나도 그 이후로는 녀석이 갖고 싶은 것은 모른 척 내어주고 지나가는 길은 슬쩍 비켜주며 꼬리를 내려야했다. 그렇게 나는 지난 일년 동안 별다른 큰일 없이 이 척박한 동내에서 앞으로 살아갈 터전을 일굴 수가 있었다.

그렇게 그동안 나에게 아무 해코지도 않던 녀석이 지난 밤중에 별안간 나타난 것이다. 개자식! 진즉에 녀석의 명줄을 끊어 놓았어야 했다. 요거 한방이면 이마에 바람구멍을 만들어줄 수 있는데. 나는 권총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다 서부의 보안관처럼 착! 총을 꺼내 정면을 겨누었다. 총 끝이 많이 흔들렸다. 술과 담배를 줄여야겠군. 뜻밖의 현실적인 문제에 직면한 나는 한숨을 내쉬며 새삼스레 건강을 걱정했다.

이런 시골에 오게 된 것은 그래, 앞에서 말 했듯이 도시 생활에 진력이 났기 때문이다. 극작가였던 아내는 아이들 양육에 온 힘을 쏟는 지극히 가정적인 여자였다.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큰딸과 아들 녀석을 갖게 되었는데 그들은 행복한 가족이었다. 오직 나만 빼놓고. 아내는 나에게 늘 불만이 많았다. 자동차 샐러리맨이었던 나는 신입사원 때부터 가족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한대라도 더 팔아야 애들 분유 값을 댈 수 있지 않겠는가! 아내는 결혼 초기에는 나의 일을 이해하고 안쓰러워했지만 나이가 들수록 배가 처 불렀는지 ‘오늘도 늦냐? 네가 그럼 그렇지’가 되어갔다. 뭐 영업을 뛰다 보면 또 직장 생활을 하다 보면 그렇고 그런 업소에도 가끔 갈 수도 있는 거지. 그런 사실을 알고 난 후 아내는 날이 갈수록 나를 무시하고 경멸했다. 애들은 또 어떻고. 그러니까....... 내가 어렸을 때 키웠던 햄스터나 금붕어 같이 귀여웠던 아이들은 (비유에 어패가 있는 것 같아도 어쩔 수 없다. 그 이외에 내가 아는 동물들은 모두 사냥감이니까.) 나이가 들어찰수록 나에게 무관심해갔다. 나중에는 내가 밥은 먹고 다니는지 다가오는 크리스마스 때 선물을 줄지 안줄지도 관심이 없었다. 심지어 어차피 내가 줄 선물은 뻔하다며 그런 거 필요 없다는 이야기마저 들었던 것 같다. 녀석들이 결혼하여 따로 살림을 차린 뒤로는 나에게 개인적으로 전화 한 통화 걸려온 적이 없다. 그런 유령 같은 가족 구성원이었던 시간이 있었다. 결국 30년 근속 기념식장에서 내 돈으로 먹고 싸는 사람들 중 어느 누구도 발견하지 못했을 때 나는 막대한 위자료를 치루는 이혼을 결심한 후 속세와 이별을 했다. 나의 지난 세월에 대해서 브루노씨에게 처음 토로한 것은 내가 그의 트레일러를 세 번째 고치러 갔을 때였다. 내가 그 밖에 어떻게 살아야 좋았을지 그것은 지금도 알 수 없지만 그날 나는 브루노씨 집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팔의 상처가 나을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나는 집안으로 들어가 팔에 난 상처에 소독약을 잔뜩 처바른 후 붕대를 새로 감았다. 상처는 그리 깊지 않았지만 아물지 않아 피가 멈출 생각이 없었고 상처부위의 피부는 검게 변색되어 있었다. 아주 콱 그냥 그 쉐리를! 갑자기 속에서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가서 힐튼씨에게 따지든 아직 녀석이 살아있다면 뒷일이야 어찌되든 담판을 지어야할 것 같다. 그런 미치광이를 살려둘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니까 아까도 말하다 말았지만 지난밤 일이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8시쯤 되었을 때다. 나는 좋아하는 시트콤을 보며 키득거리면서 간단한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 때 축사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수풀이 부스럭거리는 소리도 나고 소들이 이리저리 움직이다 축사 벽에 몸을 부딪치는 소리도 났지만 남녀 주인공들의 출생의 비밀이 벗겨지는 순간이라 나는 쉽사리 자리를 뜰 수 없었다. 그러나 잠시 후, 한 녀석이 자지러지는 비명을 질렀을 때 나는 권총을 꺼내들고 밖으로 뛰어나갈 수밖에 없었다. 어두운 축사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축사 안에서는 여전히 소들이 지랄 발광 중 이었다. 들개들인가? 하지만 녀석들이 소를 습격한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도 못했다. 기껏해야 닭이나 훔치는 놈들이다. 나는 발소리를 죽이고 다가가 축사에 있는 불을 켰다. 그 때 보았던 광경은 아마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소 한 마리가 정신없이 벽에 몸을 부닥치며 녀석의 등에 올라탄 것을 때어내려 애쓰고 있었다. 녀석의 등 위에는, 맙소사. 이건 보지 않았다면 아무도 믿지 못한다. 바로 그 힐튼씨의 자제님이 내 소의 등에 올라타 목을 물어뜯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멍청한 녀석은 소가죽이 뭔지 알지 못하는 모양이다. 얼마나 세게 물어뜯고 있었는지 빠져버린 녀석의 이빨과 검붉은 피가 입에서 질질 흘러내리고 있을 정도였다. 대체 무슨 약을 하면 저렇게 되어버리는 거야. 저게 스테이크로 보이기라도 하는 거야? 놈은 혼신의 힘을 다해 매달려 목을 물어뜯고 있었지만 다행히 소의 상처는 대단치 않아 보였고 시간이 흐를수록 소가죽이 왜 소가죽인가를 증명하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지난 일년 동안 녀석을 피해 다니며 지냈지만 이렇게 녀석이 정면으로 부닥쳐올 줄은 생각도 못했기에 이놈과 싸워야하는지 아니면 계속 그래왔던 것처럼 녀석이 자기 구강을 자해하든 말든 원하는 것을 누리도록 내버려 둬야 하는지 고민해야 했다. 그래, 1년 전 자동차 새일즈의 전설이었던 나는 이런 말라깽이 촌뜩이 버러지에게 주눅 들지 않았던 남자였다. 잠시 30년 근속 축하 행사를 회상하던 나의 몸 어디선가 용기가 솟아올랐다. 어차피 난 더 이상 잃을 게 없는 남자다. 나는 뒷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내 녀석을 겨냥하고 소리를 꽥 질렀다.

“야이 버러지 같은 자식아! 당장 내려오지 못해!”

녀석은 나의 기백에 놀랐는지 식사를 중단하고 나를 쳐다보았다. 녀석의 눈은, 늘 그렇듯이 사람의 눈이 아니었다. 그 때, 목을 학대당하던 소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온 몸을 뒤흔들며 벽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 바람에 축사의 한쪽 벽이 부서져버렸고 소와 녀석은 함께 벽 밖으로 나뒹굴었다. 아유, 저걸 수리하려면 톱 좀 꽤 켜야겠구나. 나는 서둘러 축사 밖으로 뛰어나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크게 다친 곳이 없어 보이는 소가 녀석보다 먼저 벌떡 일어나 어둠 속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나는 이름을 불러 녀석을 멈추려 했지만 완전히 공포에 질린 놈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멀리 사라지고 있는 소를 발을 동동 구르며 쳐다보고 있는데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뭔가가 내 어깨를 덮치며 넘어트렸다.

우당탕 바닥에 구른 나는 지척에서 녀석의 거친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입가가 온통 피로 물든 녀석은 양 팔로 내 머리와 몸통을 못 움직이게 짓누르며 그 더러운 입을 내 왼팔에 갖다대고 있었다. 이 새끼가. 기다릴 것 없이 나는 녀석의 얼굴에 총구를 들이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쾅! 썩은 짐승의 냄새가 나는 녀석의 피가 내 몸 위로 쏟아졌다. 놈은 아직도 내 위에 올라탄 채 버둥거리고 있었지만 나 역시 총 소리가 머릿속을 사정없이 울리고 있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더 이상 고민할 게 뭐가 있겠는가. 나는 녀석을 향해 남은 총알을 다 쏟아 부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녀석은 처음 맞은 총알로 아래턱이 날아가 있었고 이어진 총격만큼이나 많은 구멍이 몸에 새겨져있었다. 하지만 놀라움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녀석이 걸레가 된 그 몸을 이끌고 어둠 속으로 손살같이 뛰어 달아나버린 것이다. 워낙 순간의 일이라, 또한 녀석이 그렇게 사라질 줄은 상상도 못했기에 나는 쫓아갈 생각도 하질 못했다. 놀라움과 두려움이 발목을 붙잡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어둠을 두리번거리던 나는 이내 가슴 속 깊은 곳으로부터 오랜 숙적을 패퇴시켰다는 자랑스러움이 물밀 듯이 밀려옴을 느꼈다. 나는 당당히 집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커튼을 치고 전등을 촛불로 바꾸고 총알을 채우고 샤워를 한 후 권총을 지척에 두고 부엌의 식탁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았다. 시트콤은 끝난 지 오래였고 한물간 블록버스터가 방영되고 있었다. 찻잔을 든 손에서 화약 냄새가 났다.



“이봐, 자네 소들 먹이는 제때 주는 건가?”

“당연하지. 내가 녀석들 다이어트라도 시키는 줄 아쇼?”

대체 이번엔 뭐가 망가진 건지 가늠할 수도 없는 골동품의 본넷 안을 뒤적거리고 있는데 브루노 씨가 시가 하나를 건네며 말을 걸어왔다. 이놈의 영감 심심하니까 일부러 망가뜨리는 건 아닌가 생각이 드는 것은 내 본성이 사악해서가 아니다. 말했듯이 브루노씨는 손재주가 뛰어난 노인이었고, 이 수 십년 된 트레일러에 한해서라면 그가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음은 자명했다. 다만 나 역시 낯선 시골 생활이 전적으로 유쾌하지만은 않았기에 나이차이는 좀 있지만 좋은 말동무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이곳에 오기 전엔 무슨 제약회사의 연구진에 있었다고 하는데, 바보도 아니고 그 좋은 직장을 박차고 이곳에 올 이유가 없지 않은가. 아마 약국 화장실청소 정도는 했겠지 싶다.

“밥도 제대로 먹는 소가 왜 가출을 하나?”

“어젯밤에 한 마리를 잃어버리긴 했지. 어디서 봤소?”

브루노씨는 쭈글쭈글한 손가락을 들어 먼 나무 아래를 가리켰다.

“저어기 큰 나무아래.”

나는 고개를 돌려 그가 가리키는 곳을 봤지만 거기엔 소 대신 영감의 하늘색 할리데이비슨 한대가 세워져있었다. 바이크가 소만큼 크긴 하다. 나는 심드렁한 얼굴로 손에 쥔 공구를 계속 놀렸다.

“없는데? 언제 봤는데 그러쇼?”

가만 보자, 브루노씨는 시계를 보며 뜸을 들였다. 그의 롤렉스 금장 시계는 그가 수십 년 전 결혼 예물로 받은 것인데 그가 틈만 나면 자랑하는 물건이었다. 특히 그는 대화 도중  한창동안 시계를 보는 습관이 있다. 하여간 특이한 인간이다.

“한 두어 시간 쯤 전인가. 저 나무 아래 토끼굴이 몇 개 있는데, 자네 소가 그 굴을 미친 소처럼 파헤치고 있더라고.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근처까지 가보고는 싶었는데, 그놈이 그 뿔로 들이받으면 어떡할 거야. 그래 멀리 숨어서 구경하고 있었는데 결국 토깽이 한 마리를 입에 물고 자리를 뜨더라고.”

“영감님 눈이 많이 나쁘시죠?”

“무슨 소리야 나 녹내장도 안 걸린 건강한 늙은이야.”

녹내장은 안 걸렸지만 치매가 걸린 모양이로군. 불쌍한 늙은이. 나는 외로움을 던다는 이유로 그와 친하게 지냈던 것이 후회됐다. 그의 증상이 심해진다면 이웃 주민들은 자연히 그의 간호를 나에게 맡길 것이고 내가 그를 무시하게 된다면 나는 졸지에 매정한 놈으로 낙인찍힐 게다. 결국 어디로 도망치든 운명은 시련을 주기 마련이다.

“소가 갑자기 육식이 당겼나.”

“시끄럽고, 이거 인젝션 펌프가 맛이 갔네. 여기 연결하는 부분 보이쇼?”

나는 영감에게 대충 문제점에 대해 설명해주면서 아까 받은 시가에 불을 붙였다. 기분 좋은 매캐함이다. 대체 이런 물건은 어디서 구하는 거지? 담배 맛이 너무 좋아 멍하니 연기를 내뿜고 있는데 영감이 빤히 나를 보고 있었다.

“뭘 보쇼?”

“그 팔에 상처 말이여. 어디서 다친 겐가?”

영감이 내 팔에 감겨있는 붕대를 가리키며 물었다. 소독도 하고 붕대고 갈았건만 피는 아직도 멈추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이제는 붕대 밖의 피부까지 검게 변색이 되어있어 이거 큰일 나는 건 아닌가, 이제 서야 덜컥 겁이 나는 것이었다.

“이....... 이거? 글쎄, 어디서 다쳤더라?”

난 뻐끔뻐끔 시가를 연달아 피우며 딴청을 피웠다. 내가 무슨 배짱으로 사실을 말하겠는가? 비록 놈이 미쳤고 세상에 둘도 없는 쓰레기이긴 했지만 나는 분명히 사람을 쏘았고 뒷골목 갱들처럼 ‘어젠 누굴 죽였네.’ ‘내일은 누굴 죽일 것이네.’ 떠들고 다니는 위인은 아니지 않는가. 하지만 브루노씨는 능글맞게 입 꼬리를 빙글거리며 나를 보고 웃고 있었다.

“어허, 이것 참 자네가 벌써 감염 될 줄이야.”

“뭔 소리야 영감, 감염이라니.”

“상처 보니까 살짝 물린 것 같네. 그 정도면 지금쯤 왠지 피곤하고 멍하니 공상에도 잠기고 그럴 거야. 그러다 시간이 좀 지나면 발열이 나면서 온 몸의 피부가 검게 변색이 되겠지. 그러다가 어느 순간 넌 다른 존재로 변할거야. 바이러스가 숙주를 죽이고 몸을 지배하는 거지. 죽은 몸은 다시 일어나서 살아있는 것들을 공격해 바이러스를 전염시키고, 동시에 그것들을 먹어서 에너지를 얻는다네. 좀비가 되는 거지.”

“이봐, 놀리지 마. 축사 고치다 살짝 긁힌 것뿐이라고! 내가 무슨 좀비가 된다는 거야?”

하지만 녀석이 소의 목을 물어뜯고 나를 덮쳤던 그 괴상한 행동은 영감이 설명한 감염자의 행동과 일치했다. 게다가 상처에 주변에 생기고 있는 피부 변색까지. 영감은 내 변명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모든 걸 알고 있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영감이 사람 좋게 봤는데, 자꾸 험한 소리하고 그러네. 아 뭐, 그렇다고 치고. 그럼 당신이 뭔데 그런 걸 다 아는 거야?”

“내가 만들었으니까 알지. 내가 전에 말했잖아 제약회사 다니다가 그만뒀다고. 그런데 사실 그거 내가 그만둔 게 아니고, 잘렸어. 정부에서 금지한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었는데 감사에 걸려서 내가 책임지고 내려 온 거여. 물론 연구 샘플은 몰래 여기로 가져와서 혼자 연구 중이었지.

지금 내가 이 늙은이에게 무슨 이야기를 듣고 있는 거야. 자꾸만 알 수 없는 소리들을 하네. 하지만 ‘뭔가 잘못 되었구나.’는 본능은 내 마음과는 상관없이 머릿속을 공황 상태로 만들고 있었다.

“이봐 브루노씨. 알았어, 좋아. 당신 말이 다 옳다 치자고. 그래, 당신 말대로라면 나에게 얼마나 시간이 남은 거야?”

“그걸 알면 어쩌려고. 이미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인데. 끽해봐야 열 시간 정도 남았을까? 오늘 자정이 넘기 전에는 좀비로 변하지 않을까 싶구먼.”

알면 어쩌려고? 나는 부아가 치밀어 트레일러 옆 작업 테이블에 있던 렌치를 들어 올렸다.

“이봐 영감. 나는 아직도 당신이 농담하는 걸로 들리거든? 그런데 자꾸 내가 죽는다느니 그런 싸가지 없는 소리 지껄이면 이걸로 확 대갈통을 부숴버리는 수가 있어! 알겠어!”

“그래, 자네가 지금 나를 죽인다면 그 바이러스를 억제할 수 있는 해독제도 얻을 수 없겠지. 내가 그 바이러스의 아버지라고해도 감염을 피할 수는 없으니 당연히 해독제부터 만들어 두었거든. 어때? 가지고 싶지?”

내가 좀비가 된다니. 이게 무슨 말이야, 왜 내가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 거냐고! 게다가 이놈은 또 무슨 미친놈이란 말인가. 마을에 미친놈이라고는 나이 어린 싸가지 하나 뿐인 줄 알았는데 여기 또 늙은 것이 있었다니. 게다가 그런 놈을 의지하고 지금까지 형님아우 해가며 살았다니. 자기 머리통보다 큰 렌치를 들고 위협하고 있는데도 이 늙은 정신병자는 빙글거리며 날 놀리고 있을 뿐이다. 이걸 어디 뼈라도 하나 부러뜨려야 정신을 차리려나?

“좋아, 좋아. 그 해독제가 있다면 나한테 줘. 지금 당장. 그럼 내가 목숨만은 살려줄게.”

나는 렌치를 바닥에 집어 던지고 한층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협상을 시도했다. 하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이 해독제가 아니고 진짜 바이러스라면? 내 상처는 그냥 찰과상일 뿐이라면? 아니, 아니, 나 이것 참 너무 심각해 졌었네. 이거 다 뻥이지? 그치? 여전히 의구심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목숨을 살려준다. 그것 참 고맙군. 그럼 저 차고 밖에서 달려오는 저 녀석부터 처리를 해보게.”

저 녀석? 그 순간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도 그게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마음속에 조금이나마 있었던 의심이 싹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지난 밤 느꼈던 바로 그 공포가 또 다시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온 몸의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었다. 나는 뒷주머니의 권총을 뽑아 뒤를 돌아보며 정면을 겨누었다. 아래턱이 날아가 검붉은 액체를 온 몸에 뒤집어쓰고 있는 좀비가 괴상한 소리를 지르며 온 힘을 다해 이쪽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총 끝이 많이 흔들렸다.



“죽여 버리겠어.”

덜컹거리는 영감의 고물 트럭을 운전하면서 나는 그 늙은이를 저주하고 있었다. 아니 내가 이 상황에 달리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멍청하게도 결혼이란 함정에 빠져 인생을 낭비하며 살았던 나는 남은 인생이라도 자유롭게 살고자 정착한 이 깡촌에서 조차 음모에 빠지고 만 것이다. 아니 차라리 결혼 생활이 그리웠다. 아내는 투덜거리긴 했지만 내 건강을 걱정해서 보험도 들어주었던 따뜻함이 있었고(생명보험이 좀 많긴 했지만 그래도 날 생각해준 건 아내뿐이었다.) 아이들은 나를 쌩까긴 했어도 아버지라고 불러 주긴 했지 않은가. 그런데 내가 그런 가정을 팽개치고 정신 나간 약장이 꼬마와 인류를 멸망시킬 바이러스를 개발하고 있던 영감이 있는 미친 동내에 살고 있었다니. 해 지는 노을을 바라보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애들이 아직 학교에 다닐 때, 저녁노을에 바깥 공기가 서늘해지는 이 시간이면 아내가 애들한테 팬케이크를 구워주곤 했었는데. 난 그 옆에서 한 조각씩 훔쳐 먹다가 ‘먹으려면 먹는다고 하지, 왜 안 먹는다고 하고 애들 걸 뺏어먹느냐.“며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들었었지. 문득 코에 스치는 흙먼지가 아내의 팬케이크 향기처럼 느껴져 나는 울컥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이혼서류에 싸인을 하던 아내의 뒷모습에서도 왠지 눈물을 봤던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끼이익. 트레일러가 비포장도로 위에서 미끄러지며 멈춰 섰다. 힐튼씨 집 앞이다. 몇 십 년은 지난 듯한 복층의 집으로 오랫동안 보수가 되지 않아 을씨년스러웠다. 힐튼씨와는 그다지 앙금이 있는 사이도 아니었지만 교류가 많았던 사이도 아니다. 처음 이곳에 정착했을 때 인사차 몇 차례 들렸던 적이 있었는데 부부 양쪽 다 조용하고 친절한 사람들이었다. 다만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도 짐승이 태어날 수 있다는 생물학적 발견을 뒤로 발길을 끊었을 뿐이다. 다시 이곳에 온 이유는 다름 아닌 브루노 영감의 명령 때문이었다. 무려 ‘명령’ 이다. 전설의 자동차 판매왕이자 30년 근속을 했던 나에게, 아직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니, 치욕적이지만 참아야했다. 욱신거리는 왼팔 피부의 검은 변색은 이제 팔 전체를 뒤덮고 있었고 머리도 점점 지끈거리는가 하면 온 몸에서 식은땀이 나며 오한이 느껴지고 목은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영감의 해독제를 받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나에게는 없었다. 나는 두 달 동안 한대도 판매하지 못한 신입사원의 심정으로 힐튼씨의 집 앞에 섰다. 뒷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내 총알을 확인하고 예비 탄창들의 위치도 다시금 확인하며 브루노 영감의 차고에서 머리에 총알이 박혀 움직이지 않는 좀비 앞에서 그가 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이 놈의 집에 찾아가 힐튼 부부를 감염시키게. 머리만 제외하고 아무 곳이나 쏴서 제압을 한 뒤에 이 약물을 주사해. 죽은 듯이 잠들었다가 적어도 삼십 분이면 좀비로 변할 거야. 좀비로 변하기 전에 여기 이 위치 추적기를 녀석들 몸에 설치해두고 차에 실어서 초원 북쪽 멀리 도시의 불빛이 보이는 곳에 버려두게. 추적기를 붙여두는 건 좀비들이 내가 원하는 데로 움직이는지 알기 위함이야. 자네 역할은 거기까지. 완수 한다면 해독제를 주도록 하지.]

[대체 왜 이런 바이러스를 만든 거야! 어휴 이걸 그냥. 다 늙은 주제에 그냥 빨리 뒤져버리기나 하지!]

[그래, 어차피 곧 되질 늙은이지. 다들 그러더군. 지금까지 해먹은 당신이 그만두라고....... 그리고 문득 생각했어. 죽기 전에 그 모든 사람들이 벌벌 떠는 모습을 보고 싶었어.]

이건 미친 짓이야. 과연 내가 이 두 사람을 쏠 수 있을까? 나 하나를 구하기 위해 필요한 대가가 죄 없는 이 부부의 목숨이라니. 게다가 브루노영감이 노리는 것은 이 마을 사람들의 감염을 시작으로 전 인류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어쩌다 그런 미치광이의 계획에 휘말렸단 말인가. 나는 도저히 떨어지지 않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조용히 걸어가 현관문 손잡이에 손을 짚었다. 저녁 준비를 하고 있는지 은은한 냄새가 문 밖으로 흘러나왔다. 배가 고팠다. 어서 모든 걸 끝내고 배불리 저녁을 먹고 푹신한 침대에 눕고 싶었다. 딸랑, 문을 열자 소리가 맑은 종이 조용히 울었다. 마침 접시를 옮기고 있던 힐튼 부인이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깜짝이야. 누구세요? 어머, 오랜만이네요?”

“아....... 안녕하십니까. 부인.”

괜히 부인보다도 깜짝 놀란 나는 재빨리 총을 뒤로 숨겼다. 도저히 그녀를 쏠 수가 없었다. 난 살인자가 아니라고.

“차가 오는 소리가 들려서 바깥 양반인줄 알았네요. 그렇게 서게시지 말고 안으로 들어오세요, 어서요.”

“예, 예.......”

나는 머뭇거리다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저녁을 차리던 거실로 나를 안내했다. 군침 도는 스파게티와 야채샐러드가 한가득 식탁 위에 차려져 있었다.

“바깥양반이 돌아올 시간이라 저녁을 차리고 있었어요. 우리 애도 들어오지 않을까 해서 넉넉히 준비했으니까 아직 식사하지 않으셨다면 함께 드시고 가세요.”

친절하게도 힐튼 부인은 의자 하나를 빼어 자리를 권하며 나를 위한 접시와 포크를 준비해 주었다. 나는 연신 고개를 숙여 고마움을 표시하며 자리에 앉았다.

“제가 너무 오랫동안 찾아뵙지 못한 것 같아서, 지나가는 길에 잠깐 들렸습니다.”

이건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평생이고 이 집에 올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냥 쏴버려? 마음속에 갈등이 일었지만 오랜만에 만났는데도 허물없이 저녁을 권하는 부인의 얼굴을 보며 나는 차마 총을 꺼내들 수가 없었다. 나는 살인자가 아니다.

“아니에요, 저희야말로 찾아뵀어야했죠. 여기 이 와인 좀 들어보세요. 작년에 수확한 좋은 포도로 담근 겁니다.”

부인은 와인 한잔을 채워 내게 권했다. 고요한 핏빛의 수상할 정도로 은은한 포도향의 와인이었다. 안 그래도 타들어가는 갈증을 느끼던 나는 부인으로부터 잔을 건네받자마자 잠시도 참지 못하고 단숨에 들이켰다.

“안색이 많이 안 좋으세요. 어디 아프신 것 같은데?”

“아뇨. 괜찮습니다. 그냥 조금 현기증이 나는 것 뿐 입니다. 그런데 힐튼씨는 어디 나가셨나요?”

“우리 아들놈이 집에 들어오지 않은지가 일주일이 넘어서요. 밖에서 무슨 짓을 하고 다녀도 이렇게 오랫동안 외박을 한 적은 없었는데. 아무래도 걱정이 되서 찾으러 나갔어요.”

“아, 아드님이요. 어디 나간다고 말은 안했나요?”

“했지요. 브루노씨 댁에 받을게 있다면서 아침 댓바람부터 나갔었는데. 무슨 큰일이 난건 아닌지 걱정이 되서 죽겠어요. 아참, 우리 아들놈 때문에 고생이 많으시죠. 아직 어려서 버릇이 없는 거니까 이해해주세요. 죄송합니다.”

“아뇨 별말씀을요....... 녀석이 일주일 동안이나, 우....... 우욱!”

별안간 눈앞이 캄캄해지며 엄청나게 어지럽다. 만취해서 롤러코스터에 탄 기분이 이럴까. 나는 식탁에 손을 집고 쓰러지지 않으려 애쓰다 결국 식탁 위로 뱃속에 있는 걸 다 토해내고 말았다. 가까스로 눈을 뜨자 힐튼 부인이 허공에 나이프를 들어 내리찍는 것이 보였다. 콱!

“아아아악!”

“우리 아들 어떻게 했어.”

내 오른 손등에 과도를 꽂은 그 여자는 무시무시한 얼굴로 돌변해있었다. 이런 빗치가!

“살려주려고 했는데 아주 가족들까지 미쳤구먼. 이런 쌍년을.”

나는 왼손으로 바지 뒤에 꼽아둔 권총을 꺼내려 했지만 갑작스레 나타난 누군가가 내 뒤에서 총을 빼앗았다.

“내 아들 어떻게 했냐고!”

“큭!”

부인은 쉰 소리를 지르며 식탁 위에 있던 와인 병을 들어 내 얼굴을 후려쳤다. 산산조각난 병이 내 볼을 할퀴어 왼쪽 뺨이 불이 난 듯 뜨거웠다. 그때 뒤에서 총을 빼앗았던 녀석이 휘청거리는 내 무릎을 발로 차 꿇어 앉혔다.

“이봐. 굳이 지금 당신을 죽일 생각은 없어. 당신이 브루노 영감이랑 친하다는 것은 알고 있으니까 더 험한 꼴 당하기 전에 불어. 아들놈이 무사하다면 좀 더 살게 해주지.”

탕! 고막이 나갈 듯 한 총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오른쪽 허벅지에 화끈함이 느껴졌다. 나는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숙여 총상을 확인했다. 총알이 깨끗하게 허벅지 바깥쪽을 관통해있었다. 그래도 아직 근육에 힘이 들어가는 걸 보니 어떻게든 걸을 수는 있을 것 같다. 뒤에 있던 놈은 바로 그 개망나니의 애비였다. 그저 자식을 잘못 둔 온순한 부부인 줄 알았던 두 사람의 정체는 바로 이러했다. 나는 괴로움과 두려움에 벌벌 떨며 질질 흐르는 눈물도 닦지 못한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총상보다도 괴로운 건 감염된 부위의 고통이었는데 팔에서 검게 변하던 피부는 이제 몸통으로 번지며 검게 썩어가고 있었다. 식은땀이 온 몸에 비처럼 쏟아졌다. 누가 약장이 어미 아니랄까봐 약탄 와인을 먹이고 타인에게 서슴없이 나이프를 휘두르는 여자가 앞에, 이런 여자를 아내로 두고 그런 놈을 아들로 둔 남자가 등 뒤에 총을 겨누고 있다. 어찌 할 도리가 없는 절망적인 상황. 하지만 이런 놈들에게 끝장나려고 그렇게 치열하게 살아 온 인생은 아니었다. 나는 가만 눈을 감았다. 투궁, 투궁, 쿵쾅거리는 심장소리가 귓가에 느껴졌다.

“이봐, 나도 피해자야. 시커멓게 변색된 내 왼팔 좀 보라고. 브루노 영감이 내 몸에 무엇인가 실험을 했어. 지금 당신들 아들도 위험하다고!”

“젠장 그 역겨운 팔 좀 치워! 그래, 그 음침한 영감이 그렇게 만들었단 말이지? 내 아들은 지금 무사한거야? 그리고 넌 여기 왜 온 거야?”

부인의 질문에 내가 잠시 대답을 머뭇거리자 그녀는 성난 요괴처럼 소리를 지르며 내 손에 꼽혀있던 나이프를 자신 쪽으로 당겨 뽑으며 재촉을 했다. 치명적으로 베인 손등에서 피가 쏟아지며 끊어지는 신경들이 비명도 지르지 못 할 정도의 고통을 마지막으로 전달했다. 투구궁, 투구궁, 투구궁. 미세하게, 집이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당신 아들은 살아있어! 나는 기절할 정도의 고통에 질끈 눈을 감으며 살아 있다는 말을 반복했다. 문득, 오래된 고객이었던 자동차 렌트 업체를 타사의 영업팀에 빼앗길 뻔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호랑이 굴에서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한국 속담도(맞나?) 있지 않은가. 결국 끝까지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자는 좋은 결과를 얻는다는 내용으로 많은 후배들 앞에서 당시의 경험을 이야기했던 강연장의 풍경도 새록새록 떠올랐다. 졸린 눈을 비벼가며 애써 초롱초롱한 눈빛을 나에게 보내주던 수많은 후배들. 강연이 끝나면 카메라 후레쉬와 함께 들이닥치던 몇몇 기자들. 어떤 상황이라도 극복해내곤 했던 당시의 나를 지금과 비교하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래 나는 이대로 쓰러지지 않는다.

“어이. 왜 웃어? 이게 정신을 놓으셨나.”

등 뒤에 있는 녀석이 총 끝으로 내 뒤통수를 툭툭 쳤다. 투구구궁, 투구구궁, 투구구궁. 나는, 나는 이 상황을 이겨낼 수 있다. 나는 조용히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았다. 시뻘건 동공을 빛내며 진물을 질질 흘리는 소 한 마리가 엄청난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달려오고 있었다. 콰과앙. 녀석은 그대로 창문으로 돌진하여 내 앞에 있던 불량 아줌마의 몸통을 뿔로 받아버렸다. 벽과 창문이 무너짐과 동시에 나는 재빨리 몸을 숙여 구석에 숨었다. 눈앞에 등장한 괴물에 기가 질린 힐튼은 오줌을 지리며 무차별로 총을 쏘아댔다. 힘차게 고개를 휘저어 뿔에 박힌 먹잇감을 방바닥으로 털어낸 좀비소는 그 위압감 그대로 뛰어올라 힐튼을 덮쳤다. 내가 뭐랬어, 난 살 수 있다고 했잖아. 뼈와 살과 피와 비명이 뒤엉키는 틈에 나는 잽싸게 정문으로 뛰어가 문을 열었다....... 이런, 망할!

문 앞엔 브루노 영감이 서있었다.

“너 완전히 일을 망쳐놓았군.”

“이봐요, 영감. 보시다시피 일을 망친 건 제가 아니라 당신이 만든 저 괴물이요.”

“멍청하게, 그걸 변명이라고 하는 건가?”

젠장. 나는 결재서류를 퇴짜 놓는 사장 앞에 선 기분으로 어쩔 줄 몰라 하며 브루노 영감 앞에 섰다. 놈은 이제 완전히 내 머리 위에 올라타 있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보다 어떻게든 그에게 해독약을 얻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년이 줬던 수상한 술이 감염을 촉진시키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바이러스가 온 몸에 퍼질 만큼 퍼져 몸속의 모든 장기가 문드러지는 괴로움 때문에 나는 제대로 허리도 펴지 못하고 겨우 서있을 정도였다.

“영감 해독제! 해독제 좀 주쇼. 이제 도저히 못 버틸 것 같아. 하라는 대로 하려고 노력 했다고. 저 괴물소를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해독제라....... 그래. 자네가 이렇게 일을 망칠 줄 알고 물론 준비했다네. 그 말은 곧, 자네가 이 일을 성공하든 그렇지 않았든 나는 자네를 배려하고 있었다는 말이네. 어찌 내가 자네를 이대로 버려두겠나. 안 그래도 자네가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을 때 복용할 수 있도록 자네 집에 이미 해독제를 준비해 두었지.

“지, 진짜야? 나 이 상태라면 얼마 가지 않아 죽어버릴 것 같아. 지금 숨쉬기도 너무 힘들다고. 영감 제발 나 좀 살려줘. 나 집에 다시 돌아가고 싶어.”

“허허 이 사람도. 자네가 그렇게 약한 모습을 보이니 내 마음이 다 아프지 않나. 어서 집에 돌아가. 문을 열면 바로 알 수 있을 거야. 거기 진짜 해독제가 있으니까.”

“지! 진짜지?”

“그럼. 기다리고 있으니 어서 가라고. 어서.”

영감은 내 어깨를 밀치며 트레일러로 떠밀었다. 그래 해독제가 여기 없단 말이지. 놈이 진심으로 말하는 건지 믿을 수는 없었지만 나에겐 선택권이 없었다. 이제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무너질 듯 한 걸음을 끈질기게 옮기며 나는 영감의 트레일러에 올라탔다. 시동을 걸기 전에 잠시, 브루노 영감을 돌아보았다. 영감은 한손에 권총을 쥐고 힐튼의 집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나는 굴러 떨어지듯 차에서 내려 추적추적 집으로 걸어갔다. 목 안의 갈증은 상상을 초월했고 온 몸이 무서울 정도로 고통스러워 신음소리를 잠시라도 참을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내 정신은 죽음과 삶 사이 아슬한 경계 상에 걸려있었다. 시야가 점점 붉게 변하고 있다. 이것도 좀비가 되는 증상의 일환인가? 붉게 변한 세상 속에 아늑한 내 집의 창문이 활짝 열려있는 게 보였다. 게다가 불까지 켜져 있다. 마당에는 낯익은 하지만 오랜만에 보는 웨건 한대가 세워져 있었다. 저것은, 내 아내의 차와 많이 비슷하다. 손자 손녀들인가?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도 들렸다. 문득 내 딸처럼 생긴 여자 한명이 열린 창문을 지나가는 것도 보았다. 다들, 와주었구나. 어디선가 그리운 냄새가 난다. 이것은 아내의 팬케이크 냄새인가? 아니다 그것보다 훨씬 맛있는 것이 집 안에 있었다. 그것이 무엇일까? 목은 고통스러웠고 시야는 점점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배가 고프다. 나는 집을 향해 온 힘을 다해 뛰었다. 마른 목에서 쉰 고성이 튀어나와 밤하늘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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