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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에게
오빠 나야. 오빠의 하나뿐인 동생이야. 잘 지냈어? 어디 다친 데는 없어?
(글씨가 흔들린다. 얇게 편 흰 가죽에 잉크를 새겼다. 깊다. 큰 힘을 주어 눌러 썼다. 하지만 흐리다. 먹이 충분치 않기 때문이다. 먹은 어디에서 났을까? 종이만큼은 아니더라도 먹과 펜을 구하기 힘들었을 텐데. 재상이 총동원령을 내린 뒤로 국내 사정이 많이 피폐해졌다 들었다. 이곳은 그닥 변한 것이 없는데, 빼앗긴 물건들은 대체 어디로 간 걸까.)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윙 브리든 성의 성주이시며 천 년을 내려오는 아르민 왕국의 국왕이신 위대한 샤를 아르민 폐하의 성전에 힘을 보태는 오빠가 자랑스러워.
(이 문장이 없는 편지는 검열에 걸려 불 태워진다. 혹, 누군가 이와 정반대되는 내용을 편지에 적어 보내면 받는 자와 보낸 자 모두 사형에 처해진다. 이따금 국내의 가난한 자들이 돈을 받고 죽음의 편지를 전장에 보내기도 한다. 가장 강직한 장군 몇몇이 그러한 편지를 받고 죽었다. 정직한 자들이 법을 만든 대재상=라브루이 2세에게 이러한 사실을 알리고 법을 폐지하기를 권고했으나 라브루이 2세는 거부했다. 아직, 덜 죽였기 때문이었다. 좀 더 많이 죽여야 권위가 살 것이었다.)
하지만, 조금 걱정되기도 해. 대지의 어머리=라할을 모르는, 더럽고 추잡한 야만인들의 소굴에 오빠가 가있다고 생각하니, 가슴 언저리가 선뜩선뜩하다고.
무녀님이 말씀하셨어. 기도문을 적은 종이나 천을 가까이 하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성스러운 보호를 받을 수 있다고. 오빠를 위해, 오늘 아침 무녀님이 들려준 기도문을 적을게. 이 편지가 오빠에게 두려움에 맞설 수 있는 성스러운 힘을 줄 수 있도록.

라할이 태어나기 전, 세상엔 두려움이 가득했다.
본래 세상은 끝없는 하늘 속에서 모든 것이 추락하기만 하는 곳이었는데,
그 시대의 인간들은 가늘고 길었으며
영원한 낙하에 숨을 못 쉬어 얼굴이 파랗게 질려있었다.
라할은 그들 왕조의 61925번째 여왕으로 세상에 태어났다.
라할은 황금의 검으로 제 오빠와 동생을 죽여 해와 달을 만들었고
9조 명의 백성을 죽여 땅을 만들었다.
그리고 가장 강한 자, 가장 아름다운 자, 가장 현명한 자
3천 명을 추려 지상에 금으로 된 성을 세우고 이름을 [삼]이라 하였다.

오빠, [삼]에 살았던 3천 명의 사람들은 라할 외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해. 그들은 강하고 아름답고 현명했으니까 지상에 그들을 당할 자가 없었기 때문이야. 우리 모두가 강하고 아름답고 현명해지려 노력하는 건 그 때의 기억이 남아있기 때문이라고 무녀님이 말씀하셨어. 대지의 어머니=라할에게 영광을. 이 편지가 오빠에게 강함과 아름다움과 현명함을 줄 수 있었으면 좋겠어.]

편지를 접어 주머니에 넣는다. 화롯불을 본다. 동생은 편지에 동생과 어머니가 어떻게 살고 있는 지에 대해 일언반구도 적지 않았다. 아버지는 반 년 전, 죽었다. 아버지의 부음을 전하는 편에 고향의 너와 어머니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하다는 전언을 실어 보냈다. 답으로 온 것이 이거다. 너는 종이를 구할 수 없어, 하얀 가죽에 글을 쓰고 먹을 아끼려, 글씨를 꾹꾹 새겨 보낼 만큼 살고 있다. 하지만 너는 투정부리지 않는다. 편지는 온통 나에 대한 걱정과 축복뿐이다. 조금은 투정을 부려도 좋았을 것이다.
「사랑한다.」
혼잣말한다. 부엌문이 열리고 헉이 들어온다. 헉은 조리장이다. 배가 불룩하고 턱 밑이 두툼하다. 식탐이 많아 맛을 본다는 핑계로 보통 병사 세 명은 먹일 만한 양의 음식들을 먹는다. 헉은 냄비뚜껑을 열어 펄펄 끓는 수프 냄새를 맡는다. 침 꼴깍 삼킨다. 당장이라도 냄비에 대가리를 박을 기세다. 내가 보고 있어 차마 그러지는 못한다. 부하 앞에서 위엄을 지켜야 한다는 건가. 꼴값이다. 헉은 나를 흘겨보더니 나를 밀치고 내가 보고 있는 화롯불 앞에 쭈그려 앉는다.
「요 놈을 뚫어져라 쳐다보던데. 뭐, 요 놈이랑 사귀기라도 하는 모양인가본데, 살살 쓰다듬어주지 그래? 거시기 처박으려면 먼저 애무를 해야 하잖아. 살살 달래야지.」
「죄송합니다.」
고개를 숙인다.
「죄송해? 어, 그래, 죄송해야지. 그렇고말고!」
헉은 누군가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을 좋아한다. 내 대가리가 수그려진 것을 보고 헤벌쭉 웃는 그는 꼭 돼지 같다. 헉이 내가 삶은 고기를 한 덩이 잘라 입에 넣는다. 우물우물 씹으며 몇 마디 보탠다.
「근데, 너 요리 실력이 괜찮다. 많이 늘었어. 아까 잘못한 건 용서하지.」
「감사합니다.」
「잠깐 나 좀 따라와. 명령이다.」
헉과 조리실을 나선다. 나무판에 진흙을 붙여 만든 긴 통로를 걷는다. 흙냄새가 향긋하다. 천장에서 내려온 실뿌리가 얼굴에 닿자 헉이 욕설을 퍼붓는다. 통로를 나서자 막사가 보인다. 이곳은 군영이다. 벌판 한복판에 목책을 두르고 안에 군사들이 잠을 잘 막사를 쳐놓았다. 군데군데 땅굴의 입구가 있는데, 병기고나 장군의 숙소 같은 중요시설의 입구다. 한 무리의 병사가 공터에 무릎 꿇고 있다. 병사들이 그들을 둘러싸고 선다. 호각소리가 울린다. 근처 땅굴에서 하얀 말을 탄, 보라색 망토를 두른 남자가 나온다. 샤를 아르민 대왕이다.

석 달 전, 샤를 아르민 대왕은 쿤 일족의 여족장=아타로부터 항복을 받아냈다. 쿤 일족은 까마득한 과거로부터 이 일대를 지배해온 일족으로 건국 이래로 아르민 왕국과 대립해왔다. 샤를은 쿤 일족의 수도 야로에 불을 지르고 일족 전부를 죽인 뒤 그 자리에 대지의 어머니=라할의 신전을 세울 것을 대재상=라브루이 2세에게 지시했다. 라브루이 2세가 신전을 세우는 동안 샤를은 말을 타고 다니며 학살을 피해 도망친 쿤 일족을 사냥했다.
일주일 전, 샤를은 신전 건축을 마친 라브루이 2세의 청원에 따라 본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지금, 헉이 대왕을 보고 힉, 소리를 내며 바닥에 엎드린다. 나도 서둘러 엎드린다. 샤를이 외친다.
「아직도 그 자를 죽이지 못했단 말이냐! 네 놈이 그러고도 근위 기사냐!」
「화, 황공하옵니다. 폐하. 적이 워낙 강대하여 저희들로써는 무리였습니다.」
「닥쳐라! 지금 그걸 말이라 하느냐! 적은 고작 한 명이란 말이다. 겨우 하나! 그 자 하나 죽이는 것이 그리 어렵단 말이냐.」
병사가 고개를 조아린다. 샤를이 으득으득 이를 간다. 푸른 옷을 입은 남자=대재상=라브루이 2세가 말한다.
「지휘관을 참하라. 병사 중 멀쩡한 자는 참하고 다친 자는 곤장 50대를 쳐서 10리 밖에 버려라. 버려진 자가 돌아오면 죄를 용서하고 원래의 지위를 돌려주어라. 대왕의 자애로움이다.」
병사가 읍하고 물러선다. 살을 찢는 소리, 뼈를 부수는 소리와 무른 살을 짓이기는 소리가 섞인다. 형장을 탈출한 몇몇 병사가 샤를을 향해 달려온다. 용서를 구한다. 근위기사가 철퇴를 휘둘러 그들의 입을 부순다. 라브루이 2세는 죄인들이 형장을 탈출하도록 둔, 병사들을 참하라 명한다. 불쾌한 얼굴로 형을 지켜보던 샤를이 땅굴 속으로 들어간다. 라브루이 2세가 뒤따른다.

그들이 사라졌지만 헉은 일어나지 못한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병사들이 노려본다. 고개를 들었다간 죽는다. 한참 뒤, 철과 철이 긁히는 소리가 들린다. 그제야 헉과 내가 일어난다. 이마에 맺힌 땀을 손바닥으로 훔치며 헉이 말한다.
「또 패하다니. 대체 어떻게 되먹은 녀석이야. 그 녀석.」
「빨리 죽여야 할 텐데요.」
「그래, 대왕은 녀석을 죽일 때까지 국내로 돌아가지 않을 테고, 국외에 있는 이상 언제라도 우린 죽을 수 있지. 지랄 같은 상황이야.」
퇫, 침을 뱉는다.
「더러운 야만인 놈들. 온 우주가 녀석들을 저주할 것이다!」
헉은 나를 데리고 어느 땅굴에 들어간다. 대장군과 왕이 적에게 빼앗은 전리품을 보관하는 창고다. 통로 여기저기 병사들이 서있다. 키가 크고 어깨가 넓은, 근육이 단단한 정예병이다. 흉흉하다. 헉은 병사들에게 허가증을 보이며 천천히 나아간다. 나는 헉에게 대체 무슨 일이냐, 묻는다. 헉이 답한다.
「귀한 음식 재료를 얻었어. 그것도 아주 많이. 왕조차 함부로 먹을 수 없을 만큼, 아주 귀한 열매인데 이 안에 몇 개 있다고 해. 재료를 발견한 장군이 여기에 처박아두곤 바로 전사했다는군. 운 좋게 얻은 보물을 남들에게 자랑도 못해보고 죽었다나봐. 오늘 아침, 대재상께서 창고의 보물 목록을 살피다가 열매의 존재를 알았어. 나를 불러 찾아보라 지시했지. 워낙 오래 전에 넣어둔 것이라 상할 수도 있고 상하지 않았다면 서둘러 조리해서 대왕께 올리라는 것이지.」
통로의 끝, 마지막 붉은 문 앞에 선다. 강철로 된 문을 두 명의 경비병이 지키고 서있다. 헉이 허가증을 보이자 경비병들이 문을 연다.
본다. 아름답다, 생각하기 전 압도된다. 초원을 떠도는 유목민족인 쿤 일족은 정으로 바위를 두드려 모양을 새기는 예술이 발달했다. 그들은 스스로의 예술에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거대한 탑과 그 곁에서 활을 들고 서있는 전사, 보닥불과 검무를 추는 무녀,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어미와 젖을 기다리는 또 다른 아기, 태양과 달, 별이 모인 하늘, 주먹 쥔 손에 쥐어진 둥근 것, 그 뒤에 이어진 뜻 모를 추상적인 문양. 쿤 일족은 절벽에 그림을 새겼고 아르민 왕조는 절벽을 부숴, 그림을 창고에 담았다. 가슴이 뜨끔하다. 눈가가 아프다. 끝이 둥근, 가늘고 긴 막대로 눈가를 누르는 듯하다. 시야가 흐려진다.
「씨발, 이게 뭐야. 이 기분 나쁜 조각은. 으, 기분 나뻐. 이런 걸 보물이라고 숨겨두다니. 귀족들 취향이란. 야, 너... 우냐?」
고개를 젓는다. 천천히, 말한다.
「주위가 좀 더 밝았으면 좋겠습니다. 너무 습하고 어둡습니다.」
「그래, 너 생각 잘했다. 입구 지키고 있는 녀석한테 횃불 좀 얻어와. 아, 씨발. 당장이라도 귀신 튀어나오게 생겼구만. 이런 데서 열매를 찾으라니. 나도 앞날이 참, 깜깜하다. 이거 어디 찾을 수나 있겠어.」
경비병에게서 횃불을 얻어 돌아온다. 역시, 압도적이다. 거대한 감정이 밀려와 현실감을 부순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두렵다. 간신히 발걸음을 옮긴다. 헉에게 횃불을 건네고 열매를 찾는다. 네발로 기어 다닌다. 손바닥으로 바닥을 훑는다. 종일 그런 짓을 한다.
창고를 나서자 경비병이 몸을 뒤진다. 아무 것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내보낸다. 헉이 보고서를 작성한다.
[가장 영광스러운 아르민 왕조의 72대 국왕, 샤를 아르민 폐하로부터 가장 현명한 자의 지위를 받은 자=대재상=라브루이 2세께 보고 올립니다.
금일, 정오부터 해가 나무의 세 번째 가지에 닿을 때까지 저, 조리장 헉은 취사병 조와 함께 제1보물창고를 뒤졌지만 열매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시간과 인원이 부족하여 창고 전체를 살피진 못했습니다. 전체의 약 3분의 1가량을 살폈습니다. 내일도 작업을 계속 하겠습니다.]

저녁 설거지, 다음 날의 아침 식사 준비가 끝난다. 취사병들이 비명 같은 하품을 뱉으며 주방을 나선다. 조리장 헉도 지친 얼굴로 주방을 나선다. 돌아본다. 헉이 말한다.
「야, 너. 안 나가고 뭐해?」
「왕명으로 요리를 하고 있습니다.」
헉이 측은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말한다.
「그래, 너도 수고가 많다.」
문 닫고 나간다. 나는 막 구운 빵을 그릇에 담는다. 향긋하다. 향이 사라지기 전에, 그녀에게 빵을 전해야 한다. 그릇에 뚜껑을 덮고 서둘러 주방을 나선다. 포로를 가둔 땅굴에 들어간다. 샤를 아르민 대왕은 항복한 쿤 일족을 모조리 죽였다. 포로는 한 명뿐이다. 쿤 일족의 마지막 추장=100명의 기사를 베어죽인 여자=아타가 나를 본다. 입을 연다.
「왔느냐.」
「예, 쿤 일족의 위대한 족장이시여. 식사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래, 매번 수고가 많다.」
창살 너머로 아타에게 빵을 건넨다. 밧줄로 손목이 묶인 아타가 빵을 떨어트리지 않으려 조심조심 손을 놀린다. 아타의 손은 상처투성이고 굳은살이 잔뜩 박혀있어 투박하다. 아타가 빵을 먹는다. 입을 열심히 놀린다. 나는 아타의 허리와 어깨와 팔을 본다. 허름한 옷 여기저기가 찢겨있어 속이 보인다. 자세히, 살펴본다. 당연하다. 아타는 내가 본 그 어떤 여자보다 아름답다. 아타를 사로잡은 날, 샤를 아르민 대왕이 외쳤다.
「이 순간, 아르민 왕국의 가장 아름다운 자가 바뀌었다! 바로 이 여자다!」
아타는 샤를의 말을 치욕스럽게 생각해서 번번이 목숨을 끊으려했다. 나는 샤를의 명을 받아 아타가 자살하지 못하도록 막는 병사였는데, 그녀가 내가 해주는 음식 외엔 먹지 않겠다, 해서 아타의 식사당번이 되었다. 나는 삶은 고깃덩이와 물을 아타에게 건넨다. 아타는 음식을 받아 열심히 먹는다. 손등으로 입을 훔치며 아타가 말한다.
「고맙다. 맛있었다. 갈수록 요리 솜씨가 좋아지는구나.」
「감사합니다.」
「아니다. 오히려 내가 그대에게 감사해야지. 그대의 왕=샤를 아르민에게도 언젠가 감사의 말을 전해주고 싶구나.」
샤를 아르민은 아타의 눈앞에 쿤 일족을 모아놓고 죽였다. 아타가 눈을 감을 수 없도록 병사를 시켜 아타의 눈을 뜨게 했다. 그 병사도 나다. 아타의 눈물은 뜨거웠다.
「그럼, 언제나처럼 바깥 이야기를 해봐라. 오늘은 어떤 일이 있었느냐.」
나는 병사들이 처형된 일과 헉을 쫓아 보물창고에 갔던 일을 떠올리고 천천히, 신중하게 단어를 고른다. 말한다. 아타는 내 말을 끊지 않는다. 오랫동안 혼자 떠들다보니 자연스레 숨이 가빠지고 문맥이 흐트러진다. 아타는 그런 말도 그냥, 듣는다. 간신히 이야기를 끝낸 내게 말한다.
「수고했다. 그래, 그 자가 이겼단 말이지.」
「그는 누구입니까?」
「모른다. 귀신의 일종이 아닐까, 한다. 우리 일족은 너희처럼 신을 믿지는 않지만 죽은 자의 영혼이 귀신이 되어 우리 곁에 남는다고 믿는다. 조상 중에는 죽은 넋과 친구처럼 지낸 분도 있다는 모양이다. 필시, 우리 일족에 연이 닿은 귀신 하나가 너희를 가로막는 것이겠지. 근거는 없지만, 나는 그렇다고 믿는다.」
「우리 군대가 귀신을 상대로 승리할 수 있을까요?」
「모르겠다. 그런데, 너 아무 열매를 찾아 보물창고에 갔다고 하지 않느냐?」
「네. 열매를 찾아 들어갔습니다. 열매 이름이 아무 입니까?」
고개를 끄덕인다. 여자가 말한다.
「그렇다.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열매다. 열매를 찾는 법을 알려주겠다.」
「열매를, 찾는 법이요?」
「그렇다. 늘 바깥 이야기를 들려준 상이다. 그대가 아니었으면 이곳 생활이 퍽 무료했겠지. 그에 대해서도 나는 그대에게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아타가 웃는다.
오, 신이시여, 당신이 주신 환상은 제겐 너무나 달콤합니다.

다음 날, 헉이 말한다.
「빌어먹을 아침부터, 잔뜩 죽으러 가는 구만. 기분도 더럽구만.」
공터에 군인들이 모여 있다. 갑옷에 가려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분명 겁에 질려있을 것이다. 푸른 망토를 두른, 라브루이 2세가 땅굴에서 나온다. 헉과 나는 서둘러 무릎을 꿇는다. 라브루이 2세가 말한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윙 브리든 성의 성주이시며 천 년을 내려오는 아르민 왕국의 국왕이신 위대한 샤를 아르민 폐하를 대신해서 나, 대재상 라브루이 2세가 그대들의 총대장을 부른다. 나오라!」
철퇴를 든 거한이 라브루이 2세 앞에 나와 무릎 꿇는다.
「위대하신 샤를 아르민 폐하로부터 가장 현명한 자의 좌를 받으신 대재상=라브루이 2세이시여. 저, 대장군=샤아 한, 왕명을 받들어 지금, 출격준비를 마쳤사옵니다.」
「적이 강하다. 적은 한 명인데 그에게 죽은 병사가 수백을 헤아린다. 그대는 적을 죽일 수 있겠는가?」
「문제없사옵니다!」
라브루이 2세는 손으로 얼굴을 매만진다. 눈이 축축하다. 샤아 한은 라브루이 2세의 아들이다. 라브루이 2세가 손을 젓는다. 주름이 깊다.
「가라.」
손을 내젓고 땅굴로 돌아간다. 라브루이 2세가 물러가자 샤아 한이 일어선다. 입을 꾹 다물고 아버지가 들어간 땅굴 입구를 바라본다. 돌아서고 소리친다.
「가자!」
철퇴를 높이 든다.
「가자! 가자! 가자!」
병사들이 환호한다. 샤아 한은 마른 눈으로 병사들을 바라본다. 천천히 말에 오른다. 무리가 진영을 나선다.
보물창고로 향한다. 팔을 걷어붙이며 헉이 말한다.
「좋아! 빌어먹을, 후딱후딱 끝내자고!」
돌무더기 속으로 들어간다. 헉이 사라지자 나는 호주머니에서 작은 병을 꺼낸다. 손끝에 침을 묻힌다.
바람은 없다. 괜찮겠지.
병뚜껑을 열어 안에 든 흰 가루를 손바닥에 조금 덜어낸다.
정말일까? 괜한 짓 하는 건 아니겠지?
소금을 뿌린다. 소금 떨어지는 모양을 본다. 휜다. 땅을 향해 바로 떨어지지 못하고  한 방향으로 휘어져 떨어진다. 여긴 지하고 바람이 없다. 소금이 가리킨 방향으로 간다. 이따금, 방향을 잃는다. 다시 소금을 뿌린다. 소금 양이 적음으로 방향을 놓치지 않으려 집중한다. 찾았다! 열매에 소금을 뿌리자 소금이 들러붙는다. 아무 열매가 틀림없다.

점심 식사를 가지고 포로수용소로 간다. 아타가 말한다.
「그래, 열매는 찾았느냐?」
「네. 아무 열매는 소금을 끌어들인다고 하셨죠.」
「그래. 이유는 모르겠지만. 우리 일족은 아무 열매를 그런 식으로 찾아냈다네. 그대 왕국에서 아무 열매는 왕조차 함부로 할 수 없을 만큼 귀한 재료일지 모르나. 우리 일족에겐 그 정도는 아니지. 아무 열매를 먹어본 적이 있네. 그것도 두 번씩이나.」
「맛있었습니까?」
「그야 당연하지. 태어나자 먹었을 때의 맛은 기억나지 않지만. (무척 아쉬운 일이네만.) 성인식 날 먹었던 아무 열매의 맛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네. 문자 그대로 영혼을 울리는 맛이었지. 이건 비유가 아니네. 정말, 영혼이 울었다네.」
표정이 밝다. 좋은 걸 보여주자.
「근데 이거 대체 어떻게 요리하는 겁니까? 껍질이 단단해서 뭔 짓을 해도 과육을 볼 수 없습니다.」
「아니, 너...」
아타가 창살로 다가온다. 얼굴을 창살에 바짝 붙이고 뚫어져라 아무 열매를 본다. 아무 열매는 잿빛이다. 우둘투둘하다. 겉보기엔 평범한 돌과 같다. 아타가 손을 뻗는다. 아타의 손에 아무 열매를 쥐어준다. 오랫동안 아무 열매를 만진 아타가 입을 연다.
「왜 이걸 가져온 것이냐.」
「드리고 싶었습니다.」
「위험했을 텐데.」
「괜찮습니다. 상관인 헉은 이것이 아무 열매라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보물창고 입구를 지키는 병사 또한 이것을 그냥 돌맹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건 명백한 도둑질이다. 샤를은 도둑질을 용서할 위인이 아닌 걸로 안다.」
「괜찮습니다.」
「죽을 것이다.」
「아니. 죽지 않습니다. 그러니 괜찮습니다.」
아타가 나에게 열매를 건넨다. 동작이 거칠다. 말한다.
「미쳤구나.」
잔뜩 골난 얼굴이다. 조금, 용기를 내보자.
「그러게 누가 족장님 더러 예쁘게 생기라 했습니까? 책임지십시오.」
아타의 얼굴을 바로 보지 못한다. 바닥을 보며 코를 긁는다. 낯이 간지럽다. 코끝이 화끈하다. 살짝 아타의 얼굴을 훔쳐본다. 바위 같다. 단단해졌다.
너무 심했나? 미친놈이라 생각하면 어쩌지? 무례하다며 내 목을 비틀지도 몰라.
후회가 밀려온다. 침묵이 흐른다. 아타가 말한다.
「아무 열매의 조리법. 가르쳐주겠다. 나도 얼핏 듣기만 한 거라 맞는 방법인지는 모른다. 한 번만 말할 테니 잘 들어라.」
「네!」
아타의 말을 귀담아 듣는다. 아타는 조리법 외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조리법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그 날 밤, 머리가 꿰뚫린 샤아 한의 시체와 스무 명의 패잔병이 돌아왔다. 샤아 한은 패했다. 샤를은 패잔병을 보러 땅굴에서 나오지 않았다. 푸른 망토를 걸친 라브루이 2세는 돌아온 스무 명을 모두 참하라 명했다.
「장작을 쌓아라. 내일까지 타도록 장작을 높이 쌓아라. 꼭대기에 내 아들, 샤아 한의 시체를 놓고 태워라. 비록 패배했지만 위대한 장군이었다.」
불이 오른다. 달이 하늘 꼭대기에 오른 한밤중, 샤를 아르민이 땅굴에서 나온다. 말을 타지 않고 땅에 발 딛은 그가 라브루이 2세 옆에 선다.
「아들이 죽어 슬픈가?」
「네. 그렇습니다.」
「네 아들을 사지로 내몬 건 나다.」
「하지만 그 것이 폐하에 대한 제 충성을 꺾지는 못할 것입니다.」
「나는 네 말이 거짓임을 안다. 하지만 용서한다.」
「황공하옵니다.」
샤를이 흙바닥에 주저앉는다. 양반다리를 한 샤를이 손바닥으로 땅을 치며 말한다.
「앉아라.」
라브루이 2세가 흙바닥에 주저앉는다. 아르민 왕조의 72대 국왕도, 가장 현명한 자라 불리는 대재상도 옷이 더러워지는 것을 신경 쓰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죽일 수 있겠는가.」
「많은 것을 소모했습니다. 그 자에게 죽은 병사가 벌써 3천에 이릅니다. 물량으로는 승부를 볼 수 없다는 건 충분히 증명된 듯합니다.」
「그래서 왕실의 정예 기사를 부대에 섞어 보냈고, 이번 전쟁에서 가장 용맹이 싸웠던 네 아들을 보냈다. 정예 기사도, 네 아들도 100년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전사였다.」
「아까운 인재를 잃었습니다.」
조용하다. 탁, 탁, 불똥이 튄다. 샤를이 주위에 엎드린 자들에게 엎드리지 말라 명한다. 유령처럼 움직이는 병사들 한가운데서 라브루이 2세는 늙어간다. 긴 세월, 적을 죽이는데 온힘을 다해온 남자는 부쩍 솟구친 눈물을 숨기려 안간힘을 쓴다. 샤를은 스승의 눈물을 모른 척한다. 작은 조각이 튀어 대재상의 손등을 지진다. 대재상이 입을 연다.
「지형이 단순하여 정면승부 외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상대보다 더 강한 힘을 갖고 맞부딪쳐야 합니다. 소랑 장군을 부를 때가 된 듯합니다.」
「그 자는 반역자다.」
「그 자가 정말로 반역하지 않았다는 건, 폐하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 자는 누구보다도 충직한 자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모르는 것이오나, 그는 결코 배반하지 않을 것입니다.」
「알았다. 불러라. 할 일이 많아 질 것이다. 빨리 자라. 기운이 딸리면 일을 못한다.」
라브루이 2세와 샤를이 땅굴로 들어간다.

다음 날, 헉이 말한다.
「너 어젯밤부터 대체 뭘 끓이는 거냐?」
「돌입니다. 돌 끓인 물을 마시면 몸에 좋다는 말을 들어서 실험해보는 겁니다.」
「됐고, 좌우간 따라와. 오늘도 창고 뒤져야지.」
따라간다. 몇 명, 병사들이 수군댄다. 헉이 말한다.
「소랑이 온다고? 갈 때까지 갔군. 반역자를 불러서 뭘 어쩌자는 거지? 왕실에 원한이 많을 텐데. 그 자가 여기 있는 전부를 죽여 없앤다고 하면 대응할 수 없잖아.」
「조리장님은 전쟁에서 패한 병사가 왜 돌아오는지 아십니까?」
「뭐? 그야... 글쎄? 돌아와 봐야 처형당할 텐데 왜 돌아오는 거지? 생각해본 적이 없네. 왠지 아냐?」
「출정하는 부대마다 감시병이 따라붙습니다. 그들이 탈영병을 체크합니다. 병사가 탈영하면 고국의 가족들을 모조리 죽입니다. 반역자라는 미명하에 말이죠.」
「아, 그게 그런 거였나. 맞아. 어느 날 아침, 우리 옆집 살던 녀석들이 모조리 잡혀가 목이 잘린 적이 있었어. 우린 그게 관리들한테 뇌물을 안 줘서 그런 줄 알았지. 관리들도 은근히 그런 소문을 부추겼고. 그런 사정이 있었구만. 빌어먹을 세상이라니.」
「빌어먹을 세상이 아닙니다. 빌어먹을 폐하입니다.」
헉이 당황한다.
「아니! 그런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냐. 이 자식아. 누가 듣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밤, 막사에 누워 천장을 본다.
빌어먹을 폐하...
말한다.
「왕을 죽이자.」
다섯 글자를 뱉자 오싹한 한기가 뱃속을 채운다. 이상하다. 막사엔 지금 나 혼자 뿐인데. 이렇게나 두려운 존재인가.
샤를 아르민 대왕은 아버지를 죽였다. 마르헨 협곡의 전투=쿤 일족의 족장, 아타가 왕국의 기사 100명을 베어죽인, 가장 처참했던 전투에서 아버지는 부상을 입고 돌아왔다. 샤를은 그 날 패배의 책임을 물어 지휘관과 멀쩡히 돌아온 자를 참하고 부상을 입은 자를 곤장 50대를 때려 황야로 내몰았다. 황야에 버려진 아버지는 사흘 밤낮을 기어서 부대로 돌아왔다.
「아버지, 왜 돌아오신 거예요? 여기까지 기어올 기운이 있었으면 그대로 도망가시지 그러셨어요. 감시병도 없었잖아요.」
「그런 소리를 해주는 너가 여기 있으니까. 돌아왔다.」
아버지는 의식을 잃었고 다음날 새벽, 죽었다.
아타는 이 이야기를 알고 있다. 샤를 아르민의 명으로 아타의 자살을 막던 때, 시도 때도 없는 그녀의 자살시도를 막느라 지친 내가 아타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평범한 넋두리였다. 아타가 말했다.
「만약, 그 날 전투에서 우리가 패배했다면 그 즉시 우리 일족은 멸망했을 것이다. 그 전투는 그런 싸움이었다. 나는 필사적이었고 그대의 아버지도 필사적이었겠지. 각자 자기가 바라는 것을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다. 내가 그대의 아버지보다 강했기 때문에 나는 민족의 멸망을 미룰 수 있었고 그대의 아버지는 죽었다.」
아타가 입을 다물었다. 생각에 빠졌다. 덧붙였다.
「아니다. 그건, 이런 말장난 따위로 단순화 할 수 없는 일이다. 단순화하기엔 너무 슬픈 이야기다. 이런 이야기는 결코 단순화해서는 안 된다.」
몽롱한 표정을 한 그녀가 말했다.
「거대한 무언가의 흐름 속에 떠밀린 아주 작은...」
마치, 귀신 들린 듯 했다. 아타는 그 날, 자살시도를 관뒀다. 그녀가 내게 말을 걸고 내가 그녀로부터 연정을 느끼게 된 건 그 때부터다.

[가장 영광스러운 아르민 왕조의 72대 국왕, 샤를 아르민 폐하로부터 가장 현명한 자의 지위를 받은 자=대재상=라브루이 2세께 보고 올립니다.
금일, 새벽부터 해가 나무의 두 번째 가지에 닿을 때까지, 정오부터 해가 나무의 세 번째 가지에 닿을 때까지 저, 조리장 헉은 취사병 조와 함께 제1보물창고를 뒤졌지만 열매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창고 전체를 살폈으나, 열매를 발견하진 못했습니다. 운송과정 중, 낙오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조사를 중단하려하니 허가해주십시오.]

아타가 말했다.
「그래서, 이제, 그 헛수고가 끝났구나. 축하한다.」
「아니요. 족장님. 아쉽습니다. 무척, 아름다웠는데 말이죠. 그 조각들을 다시 볼 수 없다니. 그, 느낌. 그, 보는 이를 압도하는 장엄함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림을 배워둘 걸 그랬습니다.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조각들을 베껴 그릴 것입니다. 긴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럴 가치가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아타가 웃는다. 손을 저으며 말한다.
「그건 그대가 진짜 작품을 보지 못해서 하는 소리다. 그들은 진짜 작품에는 손도 대지 못했다. 그건 어린 도공들이 연습 삼아 새긴 것에 지나지 않는다.」
「네? 그럼, 진짜는 얼마나 굉장한가요?」
「인간이 죽을 정도다. 너무나 압도적인 존재감이 영혼을 누른다. 영혼이 나약한 자는 보자마자 미쳐버린다. 당대의 가장 위대한 도공들만이 그런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다. 우리 일족은 대대로 그런 기술을 전수해왔지.」
「당신의 일족에 영광을.」
「그래, 고맙다.」

한 무리의 인간들이 군영에 도착한다. 소랑을 태운 마차가 선두에 있다. 라브루이 2세가 마차를 맞이한다. 마차에서 소랑이 내린다. 허름한 옷을 입은 그는 등 굽은 노인이다. 수갑 찬 양손을 힘없이 늘이고 라브루이 2세를 본다. 라브루이 2세가 말한다.
「위대하신 선왕 폐하로부터 가장 강한 자의 칭호를 받은 자=반역자 소랑. 무릎을 꿇으라.」
소랑이 무릎 꿇는다. 고개를 숙여 이마를 땅에 댄다. 병사들은 상상 속 소랑의 모습과 대비되는 불쌍한 모습을 보고 혀를 찬다. 하지만 라브루이 2세는 말한다.
「역시, 그대는 왕국 최강이다. 아직도 그대는 왕국에서 가장 강한 자다. 그대의 강함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빈말이 아니다. 라브루이 2세는 소랑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푸른 기운을 본다. 푸른 기운은 무한한 평화다. 가장 강한 자=소랑은 누구보다 강력한 감정의 힘을 가지고 있는 남자다. 감정의 기운을 조절하여 기적을 부르는 마법을 익혔다.
푸른 기운이 너무나 선명하다. 이 색을 붉은 색으로 바꿔 우릴 겨눈다면 여기 있는 모두가 죽을 것이다. 두려울 만큼 강력하다.
「위대한 아르민 왕조의 72대 왕, 샤를 아르민 폐하께서 그대를 여기 부른 것은 시킬 일이 있어서이다. 그대는 왕의 명령에 복종해야 할 것이다. 알겠느냐?」
「네.」
목소리가 거칠다. 라브루이 2세는 소랑에게 막사를 내주라 명한다. 출전은 내일이다.

수도로부터 편지 묶음이 도착했다. 헉이 말한다.
「여, 조. 편지 왔어. 고향집으로부터 온 편진데? 집이 부잔가봐?」
없는 살림에 또 편지라니. 불길하다. 헉이 건넨 편지를 펼친다. 대단히 짧은 편지다.
[오빠에게. 어머니가 위독합니다. 빨리 와주세요.]
칼로 가죽을 파, 재 섞인 나무진을 묻혀 써낸 편지다. 네가 이런 걸 보낼 정도면 얼마나 다급한 상황인지. 심장이 내려앉는다. 소인을 확인하니 보낸 날짜는 한 달 전이다. 어머니는 이미 죽었을 지도 모른다.

이틀 동안 끓인 아무 열매를 물에서 꺼낸다. 회색이었던 아무 열매는 이젠 완전한 검정색이다. 손톱을 세워 긁자 껍질이 벗겨진다. 두꺼운 껍질을 벗기자 노란 점액이 흘러나온다. 작은 그릇에 점액을 담아 아타를 찾아간다. 아타가 말한다.
「오늘, 이 땅에 소랑이 왔다. 맞느냐?」
「네. 맞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곳 포로수용소에서 아타가 외부 사정을 알 방법은 없다. 아타가 답한다.
「느껴진다. 영혼이 부서질 듯 아프다. 이렇게 강한 감정이 존재할 수 있다니. 정신을... 잃을 것 같아. 안 되는데. 부서지면 안 되는데.」
가슴에 손을 댄 아타의 이마에서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린다. 아타는 정말로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가지고 온 그릇을 창살 너머로 내민다.
「여기, 아무 열매를 가지고 왔습니다. 방금 조리를 끝냈습니다. 드세요.」
그릇을 받아든 아타가 말한다.
「그대, 나와 함께 이곳을 떠날 생각이 있는가? 소랑이 아직 이 땅의 형태를 파악하지 못한 지금이 기회다. 지금이 아니면 탈출할 방법이 없다.」
나를 본다. 아타의 말은 결코 농담이 아니다. 아타의 몸에서 풍기는 냄새는 분명 피냄새다. 아타는 오늘, 이곳을 탈출할 것이다. 내가 머뭇거리자 아타가 다가온다. 가슴에 손을 대더니 말한다.
「이 곳은 지옥이다. 그대도 지독하게 겪지 않았나. 그대의 왕은 폭군이다. 그를 따랐다간 언젠가 그대는 지독한 고통 속에서 죽게 될 것이다.」
하지만, 아타가 손을 댄 자리에는 동생의 편지가 있다. 나는 짧은 시간 동안 짙은 갈등을 겪고 결단을 내렸다.
「죄송합니다. 당신을 따를 수 없습니다. 고향에 가족이 있습니다. 그들을 위해 저는 여기에 남아야 합니다. 이곳이 비록 지옥 같을 지라도, 말입니다. 쿤 일족의 위대한 족장이시여. 감사합니다.」
절한다. 아타가 아무 열매의 즙을 마신다. 그리고, 수갑이 풀린다. 아타의 곁에 아타와 꼭 닮은 하얀 인형(人形)이 서있다. 하얀 검을 들고 아타를 호위한다. 아타가 말한다.
「샤를 아르민에게 살해당한 내 누이다. 아무 열매는 영혼을 부르는 힘을 강화시켜주지. 그동안 고마웠다. 이 은혜는 결코 잊지 않으마.」
아타의 누이가 검을 휘둘러 철창을 잘라낸다. 허리춤에서 검을 꺼내 아타에게 건넨다. 하얀 검을 든 아타가 포로수용소를 탈출한다. 많은 병사들이 죽는다. 아타는 잡히지 않고 무사히 군영을 나선다.

수많은 병사들이 처형당했던 공터에 무릎 꿇린다. 대재상=라브루이 2세가 말한다.
「네 놈이냐? 쿤 일족의 여족장=아타를 탈출시킨 병사가.」
「그렇습니다.」
「어째서 그런 짓을 했느냐.」
「그녀가 너무나 아름다웠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라브루이 2세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하고 혀를 찬다. 라브루이 2세가 말한다.
「죽여라.」
병사가 검을 든다. 나는 질끈 눈을 감고 온몸을 긴장시킨다. 두렵다. 도망치고 싶다. 하지만 온몸을 움직일 수 없다. 최대한 버둥거려본다. 소랑이 말한다.
「멈춰라.」
병사가 검을 떨어뜨린다. 딸그랑 소리 난다. 눈을 뜨고 소랑의 몸에서 뻗어 나온 녹색 기운이 병사의 팔을 휘감은 것을 본다. 소랑이 말한다.
「이 녀석은 제가 데려가겠습니다. 사지에 가는 것이니 그걸로 죄를 사해주시면 어떻겠습니까? 대재상 어른.」
라브루이 2세가 얼굴을 붉히며 뭐라 하려는데 샤를이 말한다.
「됐다. 하고 싶은 데로 하게 둬라. 그 자만 죽일 수 있다면, 쿤 족의 여족장 따위 아무 것도 아니다. 소랑, 그 자를 죽일 수 있겠느냐?」
소랑이 고개를 조아린다.
「네, 많은 병사도 필요 없이 이 자와 저, 둘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믿겠다. 가라.」
「왕명을 받들겠나이다.」

소랑과 내가 군영을 나선다. 왕이 준 갑옷을 마다하고 허름한 옷을 입은 소랑은 검 한 자루 쥐지 않은 허술한 모양으로 적이 있는 언덕을 향해 걸어간다. 걸음이 빨라 나는 거의 뛰다시피 한다. 소랑이 말한다.
「젊은 놈이 기운이 없다. 그래, 여족장이 그렇게 이쁘더냐?」
「네, 굉장히.」
소랑이 웃는다. 호탕하다. 가슴이 시원해지는 웃음이다. 소랑이 말한다.
「솔직해서 좋구나. 한 가지 묻겠다만, 너는 적이 누군지 아느냐?」
「하얀 남자가 아닙니까? 온 몸을 백색으로 칠한, 정체를 알 수 없는 궁수라고 들었습니다. 백 리 밖에서 하얀 화살을 쏘는데, 모든 갑옷을 통과하여 죽인다고 합니다.」
「그래. 그들은 그렇게만 알고 있지. 하지만 그게 잘못이야. 보이는 풍경, 뒤에 숨겨진 사정까지 꿰뚫고 있어야지. 그걸 볼 줄 알아야 하는데 저들은 그걸 몰라. 넌, 아타가 탈출하는 것을 보았다고 들었다. 아타는 어떻게 탈출했지? 혹, 유령을 부르지 않았더냐?」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내가 뱉을 한 마디가 아타를 죽일지도 모른다. 그럴 수는 없다. 소랑이 말한다.
「속 좁은 놈이군. 뭐, 좋아. 쿤 일족은 옛날부터 영혼에 집착했지. 그들은 신을 믿지 않는 대신, 옛 조상의 넋이 자신들을 지켜준다고 생각했어. 영혼과 소통하는 독자적인 방법들을 만들어냈지. 그들의 예술이 죄 그런 부류야. 그들의 예술은 정말로 영혼에 영향을 줘. 그게 좋은 영향인지 나쁜 영향인지는 모르지만 말야.」
소랑이 말을 쉰다. 곧, 말을 잇는다.
「그들은 전쟁에도 영혼을 이용하기 시작했지. 비록, 그 것을 다룰 줄 아는 자가 족장 일가로 한정되있기는 하나 그들은 옛 조상의 영혼을 불러 힘을 구할 줄 알았어. 들어본 적 있는지 모르지만, 족장 일가는 막 태어난 아기에게 아무 열매를 먹이고 성인식날 한 번 더 아무 열매를 먹이지. 아무 열매는 영적인 힘을 가진 열매야. 그걸 먹은 족장 일가의 일원은 유령을 다루는 특별한 재능을 가지게 돼.」
소랑이 이맛살을 찌푸린다.
「적은 유령이야. 그리고 지금 살아있는 족장의 피를 가진 자는 딱 한 명뿐이지.」
「아타...」
「유령을 다루는데 그닥 재능 있지는 않았던 모양이지? 그녀는 겨우 한 명의 유령 밖에 불러내지 못했어. 그걸 뜻밖의 장소에 세워둔 탓에 아주 강력한 한 명이 되었지만. 너가 그녀에게 아무 열매를 건넬 때까지 탈출에 활용할 다른 한 명을 불러내지 못했던 거야. 지금쯤이면 아무 열매의 힘이 떨어졌겠지. 아마 그녀가 불러낸 첫 유령이 서있는 그 곳에 있을 거야. 그녀에게 있어 그 곳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일 테니까.」
「그녀를 어쩔 생각입니까?」
「협상할 거야. 네 놈을 줄 테니 탑에서 나가달라고. 젠장. 네 놈이 족장을 풀어주지만 않았으면 족장 년을 그 자리에서 조져서 일을 끝낼 수 있었는데.」
「그녀는 쿤 일족의 족장입니다. 저 같은 일개 병사의 목숨 따위론 협상 따위 어림없습니다.」
「자신을 과소평가하지 마. 신의 눈으로 보았을 땐, 바닷가의 모래알보다 작은 존재일 너라는 인간은 누군가의 눈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한 명일 수도 있으니까.」

언덕을 오른다. 언덕은 하얀 색 소금으로 이뤄져있다. 나즈마한 언덕 위에 거대한 탑이 있다. 굳게 닫힌 정문 위, 테라스에 하얀 남자가 있다. 이쪽을 향해 활을 겨눈다.  모습이 선명하게 보일만큼 가까이 접근했음에도 하얀 남자는 활시위를 놓지 않는다. 소랑이 소리친다.
「협상하러 왔다. 난 대(大) 아르민 왕국의 기사=소랑이다. 쿤 일족의 족장=아타! 모습을 드러내라.」
잠시, 침묵이 이어지고 아타가 나타난다. 말한다.
「그대, 지난밤엔 영영 못 보는 줄 알았네만. 금방 또 보는군. 훼방꾼을 달고 오지 않았다면 퍽 반가웠을 테지만. 저건, 좀 너무하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다. 표정이 어둡다. 소랑이 껄껄 웃는다.
「배짱이 좋군. 감히 나를 무시하다니. 자신감이 지나친 거 아닌가.」
「여긴 먼 옛날, 하얀빛의 마녀가 저주를 내린 곳이다. 마녀의 말뚝을 중심으로 주위가 점점 소금밭이 되었지. 생명이 사는 땅이 줄어드는 것을 염려한 조상님이 봉인을 걸어 저주를 이곳에 묶어놓았다. 이곳은 소금의 기운이 가장 강한 곳이다. 소금은 유령을 강하게 하지. 소랑, 이곳에선 아무리 당신이라도 피해 없이 나와 내 아버지를 이길 순 없을 것이다. 적어도 팔 한 짝, 아니, 목숨을 내놓을 각오를 해야 할 거다.」
소랑이 말한다.
「착각하지 마. 지금 여기엔 죽고 싶은 이는 한 명도 없어. 나도 너도, 그리고 이 녀석도 모두 살아 돌아가길 원하고 있어. 다시 한 번 말하지. 나는 너와 싸우려고 온 게 아냐. 협상하러 온 거지.」
소랑이 아타를 본다. 늙은 이의 주름에 땀이 스민다. 아타가 말한다.
「원하는 게 뭐냐?」
「그 탑을 버리고 떠나. 샤를 아르민 대왕은 그 안에 가득한, 당신네 일족의 진정한 예술 작품들을 원하고 있어. 영혼을 울리는 작품들이 자국 문화 발전에 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하고 있지. 그는 무슨 수를 써서든 탑을 손에 넣을 생각이야. 당장의 피해는 클 테지만 탑이 주는 이득은 수천 년을 이어질 테니까.」
「탑을 버리면, 대가로 뭘 줄 테냐?」
「이 자를 주겠다.」
내 등을 툭 친다. 얼떨결에 떠밀려 두어 발자국 앞으로 간다. 고개를 들어 아타의 얼굴을 본다. 아타는 무척이나 당혹스러운 얼굴로 나와 소랑을 번갈아 본다.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거절하면 네가 보는 앞에서 이 자를 죽이겠다.」
소랑의 몸에서 뻗어 나온 붉은 기운이 나를 휘감는다. 순식간이다. 저항 할 수 없다.
「그만...」
아타가 말을 하다 삼킨다. 얼굴을 붉히며 소랑에게 비겁하다, 소리친다. 소랑이 웃는다.
「거 참, 쿤 족의 위대한 여족장께서 눈에 띠게 당황하는군. 오랜만의 재미난 구경이라 몸 둘 바를 모르겠네. 자, 아타, 이제 어쩔 텐가! 결정의 시간이네!」

==================================================================
커다란 바위 앞에서 아타가 말한다.
「그럼, 시작하지. 일족이 아닌 자의 영혼을 부르는 건 처음이라 조금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네. 참고 기다려주게나.」
아타가 자리에 앉는다. 두 손을 모으고 주문을 왼다. 아름답다. 뜻은 알 수 없으나 가슴에 와닿는 진심이 담겨있다. 주문이 끝나기를 기다린다.

그 날 언덕을 내려오며 내가 말했다.
「족장님, 죄송합니다. 정말 소중한 것이었을 텐데. 저 때문에...」
아타가 말했다.
「아닐세, 나야말로 미안하네. 자네는 이제, 이곳을 떠날 수 없게 되었네. 어디까지나 내 욕심 때문이네. 자네에게는 자네의 사정이 있다는 건 아네만, 역시나 난 자네를 보낼 수 없네. 일이 이렇게 되어버렸으니 말일세. 자네는 어디까지나 강제로 이런 상황에 빠져버린 게 아닌가. 반면에 나는 어디까지나 내 의지로 일을 벌였으니, 책임은 내 쪽이 크지.」

주문이 이어진다. 아타의 이마에서 굵은 땀이 흐른다. 땅에서 밝은 빛이 솟는다. 주문이 끝난다.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훔치며 아타가 말한다.
「이제 됐네. 곧, 나타날 걸세.」
밝은 빛이 모여 형상을 갖춘다. 조심스레 부른다.
「어머니.」
이쪽을 돌아본다. 아직, 완전히 형태가 잡힌 건 아니지만 저건 분명 어머니다. 가슴 속에 들어있는 무언가가 저 것을 어머니라 인식하고 있다. 어머니가 말한다.
「조? 우리 아들, 조?」
「네, 어머니. 조에요. 어머니 아들 조라고요.」
어머니의 유령이 나를 껴안는다. 따뜻하다. 어머니와 내가 눈물을 흘린다.
병에 걸린 어머니는 보름 전, 숨을 거뒀다. 여동생과 여동생의 애인이 어머니를 극진히 보살폈지만 소용없었다. 어머니는 여동생을 걱정했다.
「걔가 당차보여도 속은 여려. 나 죽고 나니까 얼마나 울어대던지. 정말, 하늘 아래 지 하나 밖에 안 남았다고 하는데...」
운다. 나는 어머니를 다시 한 번 끌어안으며 등을 토닥인다.
「괜찮아요. 괜찮을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한참 뒤, 울음을 그친 어머니가 아타를 본다. 말한다.
「근데, 너, 저 아가씬 누구냐? 니 객지에서 색시 하나 얻은 거냐? 아, 엄청나게 이쁘네. 너한텐 과분할 정도다. 이름이 뭐신가?」
「어머니, 색시라니... 그런...」
아타를 힐끔 댄다. 돌연, 아타가 고개를 숙인다. 말한다.
「아타라고 합니다. 모자란 몸이지만 잘 부탁드립니다.」
어머니가 웃는다.
「그래, 나도 잘 부탁한다. 난 조 에민데. 우리 조는 어쩌다 만났다냐?」
어머니와 아타가 대화를 나눈다. 즐거워 보인다. 어느새, 대화에서 소외된 나는 저 멀리 서있는 탑만 보고 앉았다.

어머니가 말한다.
「조야. 아타, 쟤, 참 좋은 색시다. 잘해주고. 아타도 우리 조, 모자란 놈이지만 잘 부탁해. 둘 다, 행복하게 잘 살어. 난 간다.」
어머니의 몸이 흐려지더니 자그마한 빛조각이 되어 땅 속에 스민다. 이제 새벽이다. 옥색으로 물드는 하늘을 보며 아타가 말한다.
「그대, 왜 북쪽을 보는가? 그대가 나와 가야 할 곳은 남쪽인데.」
「글쎄요, 자꾸 그쪽이 신경 쓰입니다. 결국 전 아버지의 원수를 갚지 못했습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네. 하지만 놓아야지.」
아타가 풀밭에 털썩 드러눕는다. 눈을 감고, 말한다.
「시원해서 기분이 좋군. 조금 쉬었다가 남쪽으로 가세. 생존자를 모아 쿤 일족을 재건해야지. 하지만 그 것도 조금 쉬고 개운해진 뒤의 일이네.」
「제가 따라가도 됩니까? 전, 쿤 족이 아닙니다. 반발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걱정 말게. 자네는 전리품이야. 저들도 우리 측의 예술작품들을 가져가지 않았나. 내주고 가져가고 이쪽이 살짝 손해를 봤네.」
「살짝 손해입니까.」
「그래, 살짝. 잊을 수 없는 살짝이네.」
「그렇군요.」
END.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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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우석 11.03.19 03:49 댓글 수정 삭제
    이런;; 같은 글을 문장에도 올렸는데. 문장에서 주간우수작으로 뽑혔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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