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비 오던 날 만난 이상한 그녀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친구 녀석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벌게진 얼굴에 풀린 눈이 위험해 보인다. 화장실 가서 배 안에 있는 것을 한 바탕 쏟기라도 할 것 같은 안색이다. 내가 말할 새도 없이 녀석은 그대로 소파를 뛰어 넘어 화장실로 향한다. 착지할 때 휘청한 것만 빼면 올림픽에서 높이뛰기로 최초로 3관왕을 차지한 레이 유리도 박수를 칠만한 솜씨다. 난 피식 웃는다.
단 둘이 남았다.
그녀는 무심히 포크로 튀김 하나를 찍어 올린다. 난 맥주잔을 들어 한 모금 넘긴다. 오늘 내 제일 친한 친구가 애인이라며 데려온 이 여자는 만난지 두 시간이 넘었는데도 도통 말이 없다. 그나마 그녀가 말을 하는 때는 내 친구가 그녀에 대한 농담을 하거나 그녀에게 말을 걸 때 뿐이다. 다른 시간에 그녀는 그저 웃고 맥주 대신에 안주를 종교 의식이라도 되는 것처럼 천천히 먹는 것이다.
물론 난 몇 번이나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이 친구 짠돌이죠?” “이 놈이 얼마나 여자가 많은지 아세요?” 따위의 말들로 말이다. 허나 그때마다 그녀는 그저 배시시 웃을 뿐 말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난 더 이상 그녀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고 오랜 만에 만난 친구만 있는 것처럼 행동하기로 했다.
그래서 친구가 떠나자 어색한 침묵이 시작된다. 주변에서는 게임을 하고 왁자지껄 떠드느라 정신이 없다. 세상은 그들을 위해 태어나고 이 시간은 순전히 그들을 위해 할애된 것 같다. 그만큼 그들은 즐거워 보인다. 그렇게 즐거워 보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금언 수행에 들어간 승려처럼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는 우리 둘을 생각하니 소외감이 느껴진다. 마치 후추 통 속에 실수로 들어간 소금 알갱이처럼 말이다.
사실 술을 먹으면서 반드시 시끄럽거나 소란을 피울 이유는 없다. 따라서 소외감을 느낄 필요도 없다. 하지만 필요해서 느끼면 감정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역시 어색한 건 어쩔 수 없다. 말을 걸어야겠다. 난 튀김을 베어 물며 다른 곳을 보고 있는 그녀에게 말한다.

“저기.......”

“네?”

그녀가 순간 눈을 크게 뜨며 나를 본다. 안 그래도 큰 눈이 더 커져버렸다. 이상하게 그녀의 그런 반응은 날 위축시킨다. 난 순간 내가 하려고 생각해뒀던 말을 잊어버린다.

“아....... 그게. 어디 사세요?”

간신히 내뱉은 질문이 사는 곳을 묻는 것이라니. 그녀도 조금 당황한 것 같다.

“아, 저기....... 불광동에 살아요.”

“아, 불광동.”

난 불광동을 머릿속으로 되새기며 그것에 관한 화제를 떠올리려 노력한다. 그러다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다.

“전에 신문에서 보니까 불광동에 무슨 연쇄 살인범이 있다면서요?”

내 말에 그녀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네? 전 처음 듣는데.......”

“아, 그러세요. 거 참 이상하다. 제 친구들은 거의 다 알던데....... 그....... 망치로 막 사람 머리 때리고 간다던데.”

난 망치질을 하는 몸짓까지 보이며 설명한다. 허나 그녀는 역시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그래요? 전 잘 모르겠네요.”

“아....... 뭐, 잡혀나 보네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우리는 다시 침묵한다. 난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하고 그녀는 야금야금 튀김을 먹기 시작한다.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뭐 상관없다. 잠시 후에 친구가 오면 난 반갑게 인사를 하고 변비 있냐며 놀려댈 것이다. 그럼 된다.
하지만 친구는 오지 않는다.
이 친구는 안에 있는 걸 확인한 다음에 큰일이라도 보는 모양이다. 하긴 지금 내가 긴장해 있어서 시간이 더디게 간다고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창 밖을 바라본다. 창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다. 난 나도 모르게 창을 연다. 빗소리와 함께 비가 들이치고 묘한 냄새가 난다. 오래된 먼지 위에 물이 떨어져서 퍼지는 냄새, 달군 돌 위에 물을 뿌렸을 때 나는 그 텁텁한 냄새. 도시에 비가 오면 항상 그런 냄새가 나기 마련이다. 거기다 비가 오고 있음에도 느껴지는 후끈한 열기가 그런 냄새들을 거품기라도 되는 것처럼 섞어버린다. 그녀의 톡 튀는 음성이 들린다.

“비 들이치는데요.”

“아, 죄송해요.”

난 황급히 창문을 닫는다. 그녀의 얼굴을 살피니 별 변화는 없다. 하지만 나와 그녀는 아무래도 한 걸음, 아니 한 열 걸음쯤은 더 멀어진 것 같다. 그녀는 아마 나와 헤어지고 나서 내 친구에게 나의 무례함을 얘기할 것이다. 여자에게 연쇄 살인범 이야기를 하고 장마라 비가 많이 내리는 데도 창문을 연 무례함 말이다.
생각해 보니 내가 왜 그런 얼빠진 소리를 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사는 곳을 물어본 다음에 하필이면 꺼낸 얘기가 연쇄 살인범 얘기라니 말이다. 아침마다 신문을 꼬박꼬박 보시는 아버지가 순간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 여자도 그렇다. 일부러 말을 걸면 적당히 대답을 해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아까 비 들이친다고 했을 때도 꼭 기분 나쁘게 그런 식으로 말을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난 생각하면 할수록 이 여자에게 기분이 나빠진다. 친구한테 헤어지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난 그녀 대신 창문은 열지 않고 창 밖을 쳐다본다. 차라리 네온사인 불빛이나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을 보는 게 더 좋을 것 같다.

“비 좋아하세요?”

갑작스런 그녀의 목소리에 난 움찔하며 그녀를 바라본다. 그녀가 커다란 눈을 뜬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아, 예. 뭐. 근데 그건 왜.......”

“그냥 아까부터 창밖을 계속 쳐다 보시 길래요.”

“좋아한다고 하면 좋아한다고 할 수도 있죠. 어쨌든 빗소리는 좋아하거든요.”

“빗소리요?”

“네.”

“그게 듣기 좋아요? 그냥 수천 개의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일 뿐이잖아요.”

뭐 이런 애가 다 있냐.

“뭐 그냥 취향 차이죠.”

난 억지로 웃는다. 나와 그녀 사이에 크레바스 하나가 놓이게 됐다. 내 친구를 그 위에 놓는다면 친구는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떨어질 것이다. 불쌍한 내 친구.

“비는 정말 싫어요.”

여자가 튀김을 다 먹었는지 포크를 내려놓고 탁자에 팔꿈치를 댄 채 말한다. 하지만 당신이 뭐라고 하든지 난 대꾸하지 않겠어.

“왜요?”

4년간의 솔로 생활이 날 배신했다. 여자는 한참 후에야 대답한다.

“제가 원래 심한 곱슬머리거든요. 그래서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머리가 엉망이 돼요. 파래 무침 좋아해요?”

“네?”

“파래 말이에요. 해초.”

난 가까스로 파래무침을 생각해 낸다. 덕분에 내 목소리는 심하게 억눌린다.

“아....... 네. 알아요. 뭐, 별로 좋아하는 편은 아니죠.”

“그럴 줄 알았어요. 내 머리가 꼭 그 파래무침처럼 되어 버려요. 더군다나 내가 만난 사람 중에 파래무침을 좋아한다는 사람은 한 명도 못 봤어요. 그러니 더 슬픈 거죠.”

난 도대체 뭐가 슬픈 건지 모르겠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곧게 펴진 생머리를 쳐다본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그녀의 생머리가 파래무침처럼 되는 상상을 해 버린다. 너무 웃기다. 난 그만 웃고 만다.

“뭐가 웃겨요?”

“아, 머리가 파래무침이 되는 상상을 해서요.”

“.......전 심각해요. 그래서 비를 싫어하는 거구요.”

그녀가 기분 나빠 보인다. 난 그녀를 위로해 줘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내가 그녀를 조금은 기분 나쁘게 한 것 같으니까.

“뭐, 파마머리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그....... 웨이브 진 머리 있잖아요.”

“그런 머리가 아니에요. 여하튼 직접 보면 그런 소리 못 할 거예요.”

난 입을 다문다. 파래무침 같은 머리를 가진다는 건 어찌됐든 꽤 기분 나쁜 일일 것이다. 나도 해산물 같은 머리를 가졌다면 슬펐겠지. 난 나도 모르게 유쾌한 기분이 든다. 그래서 반은 장난으로 웃으며 그녀에게 묻는다.

“그런데 제 친구 어디가 좋아서 사귀시는 거예요?”

“비 오는 날 우산을 씌워 줬어요.”

“네? 그래서 사귀게 됐다고요? 우산 씌워줘서?”

“네.”

난 잠시 말을 하지 못한다. 내가 말을 하지 않자 그녀가 말한다.

“다들 그래요. 우산을 씌워줘서 사귄다고 하면 모두 이상하게 쳐다봐요. 하지만.......”

그녀는 목이 마른지 맥주를 한 모금 마시더니 말을 잇는다.

“사귀는데 꼭 거창한 이유가 필요한 건 아니잖아요.”

“글쎄요. 그래도 좀 시시한 이유 같긴 하네요.”

난 그런 말을 하면서 웃다가 내가 내 뱉은 말에 깜짝 놀란다. 이렇게 생각 없이 말을 하다니. 조심스럽게 그녀의 눈치를 살핀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으로는 그녀가 내 말을 듣고 기분 나빴는지 괜찮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녀가 다시 맥주를 마신다. 그러다가 의자에 묶인 채 취조를 받는 사기꾼이 범죄사실을 부는 것처럼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을 한다.

“어렸을 때부터였어요. 비가 오는 날 싫어한 건. 엄마는 술집 마담이었는데 항상 반은 술에 절어서 관절 없는 고무 인형처럼 자고 있다가 저녁 때 쯤에서야 잠 깬 고양이처럼 느릿하게 돌아다니는 거예요. 아빠는 그런 엄마를 때리는 게 그리스도께서 자신에게 주신 사명쯤으로 아는 남자였으니까 어떻게 보면 천생연분이었죠. 그런 마당에 비 오는 날 딸내미 우산 씌워주러 오는 게 가당키나 하겠어요? 그래서 싫어했어요, 비 오는 날은.”

“........”

“하지만 그렇다고 비 오는 날 우산을 챙겨가지는 않았어요. 항상 비를 맞고 다녔어요. 그건 나 자신에게는 일종의 의식 같은 거였어요. 이 순간을, 이 시간을 절대 잊어버리지 않겠다는 의식. 어때요? 이제 이유가 됐나요?”

난 그녀의 이야기에 빠져 있다가 깜짝 놀라 대답한다.

“아, 네.”

“전 이런 이야기 하는 거 싫어해요. 구질구질 하거든요. 하지만 사람들은 항상 나에게 이유를 말하라고 해요. 왜 겨우 우산 씌워준 걸로 사귀었냐, 넌 왜 성격이 그 모양이냐 같은 거 말이죠. 내가 대답하지 않으면 그 사람들은 항상 자기들 멋대로 이유를 만들죠. 그 이유란 것들이 또 멋져요. ‘저 애는 겉멋에 들어서 그러는 거야.’ ‘이상한 책을 읽어서 저럴 거야.’ 그런 인간들은 모두 속이 텅 빈 채로 심장대신 짚으로 가득 차 있을 거예요.”

그녀는 말을 마치고 남아있던 맥주를 모두 마셔버린다. 난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아무 말도 못하고 그러 그녀를 쳐다볼 뿐이다.

“아, 시원하다.”

그녀는 기분 좋다는 듯이 웃으며 소파에 몸을 파묻는다. 그리고 그제야 난 내가 계속 맥주잔을 들고 있었음을, 옆자리 테이블의 손님들이 바뀌었음을, 창 밖의 비가 그쳐있음을 알았다. 기묘한 일이다. 그녀는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 와있다. 마치 나와 아무 대화도 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친구가 돌아온다. 아까보다는 상태가 훨씬 괜찮아 보인다. 다시 아까처럼 돌아온다. 친구와 내가 대화하고 그녀는 두 걸음 정도 물러서서 방청객처럼 우리의 얘기를 듣는다. 친구가 원하면 호응을 하거나 야유를 할 뿐이다.
오줌이 마렵다. 내가 화장실에 간다고 일어서니 친구가 뒤따라온다. 소변기에 나란히 선 채 일을 보는데 친구가 말을 건다.

“어떠냐? 예쁘지?”

“응, 예쁘긴 하다.”

친구가 일을 다보고 손을 씻으며 묻는다.

“예쁘긴 하다니 무슨 말이 그래.”

“그냥 좀 특이한 것 같아서. 말을 해 봤는데 좀 이상한 것 같아.”

“이 자식, 질투 나냐?”

“그런 거 아니야. 여하튼 이상해. 오래 만나지는 마라.”

“뭐가 이상하다는 건데.”

난 화장실 문으로 나가며 생각한다. 뭐가 이상한 건지. 하지만 떠오르는 말은 없다. 난 얼굴을 찡그리며 말한다.

“여하튼 이상해. 만나지 마라.”







김영욱
댓글 1
  • No Profile
    ^^ 06.02.04 23:22 댓글 수정 삭제
    그녀는 살인마일까요? 조금 더 섬뜩하고 무서웠으면 하는 바람이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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