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달걀

2005.12.17 21:0312.17


인정할 것은 인정하자. 분명히 간 밤에 나는 술을 많이 마셨어.


도대체가 좋게 변하는게 없구나.

창규의 절절한 호소에, 진혁이 소주를 들이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똑같아 똑같아. 2년 전 당해왔던 것과 2년 후 당하게 된 것들, 군이라는 이상한 집단에서의 이상한 짓거리들은 표면적으론 몰라도 그 안에서 하루 또 하루를 버텨야 되는 사람들에겐 변함이 없었다.

정말 그게 제일 싫었다.

창규도 제 잔에 가득 찬 소주를 내버리듯 한 입에 쏟아 붓고 나서는 한숨을 쉬었다. 잠시 침묵에 대신해 뱉어놓은 담배 연기가 주위를 자욱하게 채웠다. 유일한 미흡연자인 동호는 깨작깨작 젓가락으로 접시에 들러붙은 해물 찌꺼기를 주워먹고 있었다.
알코올과 니코틴에 절어 눈 앞에 보이는 광경이란 코 앞에 들이댄 점묘화처럼 껄끄러웠고 잔을 들어올리는 손은 의지보다는 그저 습관에 더 가까웠지만 뭔가 한 마디를 해야 한다고 의식의 끄트머리 같은 녀석이 내 머리를 걷어찼다.

그래도, 이제 끝났잖아 다들? 창규 너 어떻게 할 거야, 복학 할거냐?

후우- 대답 대신 창규가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소주를 마셨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대답 대신 다른 뭔가로 입을 먼저 채우고 한참 후에야 대답했다. 난 그 동안 이미 알고 있던 사정을 새삼 깨닫고야 자괴감에 미간을 푹푹 찡그렸고.

글쎄다, 병원비 때문에…동생 하나로도 넘치는데 뭐.

그렇지 돈, 돈이다. 창민이었나 창우였나, 어쨌든 비슷한 느낌의 돌림자를 쓰는 녀석의 동생이 약대였나 의대였나 뭐 그런 곳에 입학하게 되었다. 병으로 고생하시는 엄마를 위해서? 거기까진 모르겠지만, 우리는 녀석이 들어간 학교의 경쟁률에 놀라고 등록금에 또 놀랐다. 창규가 제대한 시간이 아주 나쁘게 절묘했다. 두 명의 대학생을 키우기는 힘든 처지였다.
모두 한숨 섞인 담배 연기를 뻑뻑 내뿜어대고 있을 때, 갑작스레 창규가 물었다.

지민이 너도 복학 안 했잖아? 언제 하려고?
어? 나?
그래, 너는 뭘 하는데?

내가 뭘 했더라? 얘들이랑 술을 마시고 있었지, 담배도 피우고 있었고. 물론 창규가 궁금했던 게 그런 것이 아니란 사실은 뻔히 알고 있었다. 도대체 무어로 하루의 백지를 채우고 있냐고. 딱히 답할 말이 궁했다.

지민이는 그림 그리잖아.

편드는 듯 동호의 한 마디. 무슨 그림? 푼돈벌이도 못되는 –좋게 말하면 경력쌓기- 선배네 회사 책의 손가락 두 마디만한 삽화? 아니면 우리 동네 공사장 컨테이너 박스에 그려진 크고 선명한 붉은 색 그래피티? JM이란 태깅은 자랑스럽게 도처에 널려 있긴 하지. 홍대 – 신촌 – 압구정 – 인사동 – 영등포, 서울을 주욱 건너서. 그래서?

나? 나는-

젠장. 나는 뭘 하고 있었지?

알 수 없지.


철 지난 유행어를 마지막으로, 기억이 끊겼다. 젠장 젠장. 다시 한 번 차근차근히 되짚어볼까? 그치만 그럴 때마다 망치가 왼쪽 관자놀이를 사정없이 때리는데. 땅 땅 두개골 보다는 뇌 자체가 흔들리는 것 같은 충격. 빌어먹을, 또 신호가 올라온다.  

우우욱…우아악…크우우…아아아악….
두 세 차례 위가 통째로 경련하며 근육을 마음껏 뒤틀고, 그 때마다 식도가 찢어지는 듯 하며 숨이 막혀온다. 눈앞은 누릿하게 떠 버리고, 입 안에서 느껴지는 시큼한 냄새가 역겨움을 더하며…우우욱…

정말 이제 더 이상 나올 수는 없다구. 흐아악 흐아악, 턱과 콧구멍으로 숨을 몰아쉬며 세면대 위의 거울을 보았다. 눈꺼풀에 달랑 매달린 눈물방울에 입가에는 미처 닦아내지 못한 토사물 잔해. 세면대 위에는 내가 토한 액체들이 조금 고여 있었다. 누르스름하고 푸르딩딩하며 끈적끈적한, 위액들과 그 가운데 있는 무언가.
수도꼭지를 활짝 열어 콸콸 물을 쏟아부어 세면대를 닦고 대충 얼굴을 씻었다. 거울을 한 번 더 보고 세면대를 한 번 더 보았다. 정신차려 이 녀석아, 한지민, 정신차려.

정신차리고,

정신 차리고 이게 뭘까 생각 좀 해봐.

고개를 숙여 다시 세면대를 바라 보았다. 물살에도 변함없이 덩그러니 놓여있는 이 물체.

한 줌에 쏙 들어올 정도의 부피에, 위 아래로 길쭉한 타원형 구체. 색깔은 연한 살구색. 차갑고 딱딱한 느낌의 껍질. 뻔 해, 생각해 볼 필요도 없어. 이건 100% 확실한 전 인류의 역사 깊은 완전식품, 어린 시절의 1급 반찬거리…맙소사. 그럴 리 없잖아?

이게 그게 맞다면, 왜 여기에 있는거지?

침착하자, 생각을 하자. 생각 생각 생각. 모래가 잔뜩 들어찬 듯 뻑뻑한 입안에 칫솔을 쑤셔 넣었다. 알싸한 치약이 혀를 자극하고, 따가운 솔이 밤 새 음식물을 게워낸 목구멍을 자극했다. 덕택에 머리가 좀 돌아가는 것 같았다.

하나 하나 술자리에서 먹었던 음식들을 되짚어 보았다. 콘 샐러드, 프라이드 치킨, 치즈 스틱, 파전, 부대찌개, 해물 떢볶이, 삼겹살? 삼겹살은 밥으로 먹었던가? 맞아 그랬다. 그런데 부대찌개에 달걀이 들어갔었나? 통째로? 껍질도? 아닌데?
이런 젠장 어느새 내가 입으로 낳은 ‘저 물체’가 ‘그것’이 맞다고 인정해 버리고 있잖아. 잠깐, ‘낳았다’고? 이건 인정한 정도가 아니구만.

차마 세면대 위에 놓인 그 물체를 바라보며 입을 헹굴 용기가 나지 않아 샤워기를 잡고 쪼그려 앉아 화장실 타일 바닥에 입가심을 했다. 침착하게 생각해 보려고 해도 자꾸만 저 물체를 인정하는 나와 부정하는 나로 나뉘고 만다. 더 혼란스러울 뿐이다.

초인종 소리가 두 번 울렸다. 입을 닦으며 반사적으로 현관문으로 걸어가다가 문득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았다. 알몸뚱이었다, 바닥에 나뒹굴던 티셔츠와 바지를 꿰어 입는 동안에도 벨 소리는 좀 더 조급한 기색으로 두어 번 더 띵동거렸다. 간신히 사람의 몰골을 하고 문을 열었다.

“누구-“


“한지민 너 뭐야 도대체!”

그녀께서 친히 방문하셨다. 길고 검은 머리칼에 노여움으로 얼굴을 찌푸렸으나 곱게 그린 눈썹과 커다란 눈동자가 역시 예쁘다, 솟아 오를 듯한 콧날 아래로 맞춤하게 갸름한 턱까지. H대 대학원 영어영문학과, 정이란양(26세) 혹은 나를 기르시는 목자님. 하하.

“누나-!”
“얘가 뭘 잘했다고 붙어, 너 어제 뭐했어?”

그녀는 달려드는 나를 매몰차게 뿌리쳤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끼며, 죄인은 만면에 미소 작전으로 화답했다.

“어제 창규 전역 때문에 술 좀 마셨죠, 많이는 아니고.”
“조금? 얘가 얘가, 근데 왜 전화도 안 받았어 너? 언제 들어왔는데? ”
“대충 새벽에 들어온 것 같은데, 전화는…배터리가 없었나봐요.”
“’대충’? ‘없었나봐요?”

손에 들고 온 비닐봉지를 싱크대 위에 내려놓던 누나는 머리칼을 휘날리며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한지민, 내가 간밤에 전화를 몇 번을 했는지 알아? 네가 한 일이라곤 동호 전화기로 새벽에 무슨 말인지도 못 알아먹을 문자 메시지 달랑 하나 보낸 것 밖에 없어.”

무리를 벗어난 양에겐 목자의 뿔피리, 그것도 듣지 않을 땐 굵은 지팡이. 그녀의 손에는 지팡이보다 더 선명하고 위엄있는, 봉지에서 튀어나온 대파가 손가락의 연장선으로 나를 찌르고 있었다. 이럴 때 양의 자기 방어 수단이란,

“으으, 미안해요 누나. 진짜로 잘못 했어요.”
“흥이다, 흥!”

나를 한참 노려보던 누나는 봉지 안의 물건들을 마저 풀어놓았다. 콩나물, 북어. 그런 것들, 투덜거리면서도 더 이상 별 내색 없이 찬장에서 냄비를 꺼내 씻는 그녀를 보며 한시름 놓았지만 곧 내 머리 속에 잊고 있던 한 가지가 다시 떠올랐다.

“맞다, 누나! 이거봐요!”
   “뭘?”

대파에 어슷썰기를 시작하려던 그녀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으며 대꾸했고 결국 누나의 손을 쥐고 화장실로 끌고 갈 수 밖에 없었다.

“한지민, 잘 들어. 나 아직 장난칠 기분 못돼. 행여나 허튼 짓-“
“이거, 이거!”

그녀의 말을 가로막으며 세면대 위에 덩그러니 놓인 ‘그 것’을 가리켰다.

“뭐니, 이게?”
“내가 10분쯤 전에 세면대에서 토했는데, 이게 그때 내 입에서-“
“지민이 너-“


“달걀을 이런데다가 두면 어떻게 해!”

  말릴 틈도 없이 ‘그 것’을 향해 누나는 손을 뻗었다. 결국 ‘그 것’의 껍질과 그녀의 손 끝이 맞닿는 순간, 하마터면 소리까지 지를 뻔 했다. 경악으로 휘둥그레 눈동자를 굴리며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는 내 앞에서 누나는 귀찮다는 듯 ‘그 것’을 쥐고 부엌으로 돌아갔다. 나는 빈 세면대 앞에서 멍하니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만 볼 뿐이었다.




술 마신 이튿날 아침, 우리 아가씨가 끓여준 북어국은 최고다. 뒤틀려있던 오장육부가 단번에 휘휘 콧노래를 부르며 제 있을 곳으로 기분 좋게 돌아가는 느낌. 특히나 이번에 끓여준 북어 국이 맛있었던 것은 내 입에서 나온 ‘그 것’, 아니 먹었으니 이젠 그냥 달걀이라 하자. 그 녀석을 넣었기 때문이리라. 먹으면서도 의심스레 관찰해보니 사실 그것은 풀어진 모양도, 맛도 그저 의심의 여지 없는 달걀, 그 뿐이었다.

빨리 가야 한다면서도 약까지 챙겨주신 목자님은 기어코 그냥은 못 가시고 북어국보다 삼백만 배 정도 맛있는 키스까지도 죄악에 물든 이놈에게 남기셨다. 최고다, 최고.

그래 뭐 이거면 되는 거지. 안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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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보는 이런 게시판에 글을 올린다는 것이 정말 오래간만입니다. 이 곳은 특히나 처음 이고요, 반갑습니다:)
http://soulskate.co.to 놀러 오세요.
댓글 2
  • No Profile
    배명훈 05.12.17 22:41 댓글 수정 삭제
    아, "그것"은 어떻게 된 영문일까요. SF가 아니니 굳이 발생 내막을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만, 판타지라면 이렇게 툭 던져진 훌륭한 소재를 더 신나게 활용하는 재미가 남아 있었을텐데요. 그 재미도 꽤 쏠쏠한데요. 소재를 들이밀어 놓는 능청이 재미있었는데요, 그걸로 더 큰 거짓말을 하는 재미도 참 놓치기 아까울 텐데...
  • No Profile
    soulskate 05.12.22 20:54 댓글 수정 삭제
    여백을 두고 싶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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