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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여름의 최후

2012.09.12 16:1809.12

매미들이 우렁차게 울어대는 어느 7월의 여름날, 녹음이 무성한 그 계절에 시약 연구를 하던 과학자 J는 더 이상 매미 울음소리를 버틸 수가 없었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그 소리는 초보 바이올린 연주자가 바이올린 현을 끊어놓는 소리만큼 귀를 찔러댔다. 그는 시약이 든 유리 비커를 막대로 젓던 것을 내려놓고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정말 지겨운 매미 소리야.”

J는 창문을 닫으려고 했지만 잠시 후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J의 연구실에는 낡은 고물 선풍기 한 대 밖에 없었고 창문을 닫으면 완전 찜통으로 변했다. 예전에 에어컨이 없던 것은 아니다, 겨울에 연구비가 모자라서 중고상에 팔았을 뿐이다. 순간 J는 아차 싶었다. 그건 뒷날을 생각하지 않고 벌인 경솔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너무 돈이 급했던 것이다.

J의 연구는 하나 같이 돈을 잡아먹는 일들이었다. 그가 만든 기기묘묘한 발명품들은 대부분 창고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효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J는 슈퍼컴퓨터도 만들었고 미사일도 만들었고 슈퍼카도 만들었다. 대부분의 발명품들은 특허를 내거나 정부로부터 공인을 받고 상용화 될 수도 있었다. J는 전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어쩌면 존재하지 않을) 만능 공학자였다.

구석에 쳐박혀있던 슈퍼컴퓨터가 J에게 조언했다.

“박사님, 매미 소리가 싫으시다면 매미를 박멸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인공지능이 탑재된 이 슈퍼컴퓨터도 J의 역작이었다. 다만 J는 슈퍼컴퓨터가 자신보다 수학 계산을 더 잘한다는 이유 때문에 시기했고, 대신 구석에다 가져다놓고 실험 조수로 사용했다.

J는 슈퍼컴퓨터가 자신보다 더 좋은 의견을 내놓았다는 사실에 실망했다.

“그럴 생각이야, 아니 그럴 생각이었어. 그러니 좀 조용히 해. 시끄러워서 집중이 안 되잖아.”

슈퍼컴퓨터는 입을 다물었다.

잠시 고민하던 J는 창고에서 물총을 꺼내왔다. 슈퍼컴퓨터의 음성 출력장치가 진동으로 달싹거렸다. J의 행동에 의문을 제기하고 싶었던 모양이지만, 슈퍼컴퓨터는 명령에 충실했다. J는 물총에 특수시약 B를 가득 채우더니 연구소 밖으로 나갔다. 슈퍼컴퓨터가 따라 나갔다.

특수시약 B는 J가 개발했던 해괴한 발명품 중에 하나였는데 무엇보다 강력한 독약이었다. 한 방울이라도 흘리면 묻은 자리가 녹아들어갈 정도였다.

J의 뒤에 바싹 따라붙으면서 결국 슈퍼컴퓨터가 물었다.

“박사님, 대체 그 물총은 뭐에 쓰시려구요? 물총 놀이를 하실 나이는 오래 전에 지나신 것 같은데요.”

“제발, 닥쳐. 이 고물아. 아무리 네가 나보다 수학을 잘한다고 해도 넌 그냥 내 조수일 뿐이야.”

슈퍼컴퓨터는 J의 말이 불만스러웠지만 그런다고 해서 ‘미치광이 박사의 조수‘라는 함수 관계가 변하는 것은 아니었다. 슈퍼컴퓨터는 지극히 논리적이었고 합리적인 선택을 할 줄 알았다. 그래서 다시 입을 다물었다.

첫 목표는 박사의 얇은 뉴런 신경을 희롱하던 매미였다. 그 매미는 연구실 앞의 고목에 달라붙어 밤낮으로 징징거렸다. 박사는 환청이 들릴 지경이었다.

J는 물총으로 매미를 겨냥하고 쏘았다. 물줄기는 매미를 향해 조금 날아가다가 물총의 몸체를 완전히 녹여버렸다. 몸체가 견뎌내지 못할 만큼 독성이 강했던 것이다. J는 녹아내리는 물총을 던져버리고 욕을 내뱉었다.

“이런 빌어먹을!”

게다가 목표물이었던 매미는 J를 비웃듯이 오줌을 갈기고 날아가 버렸다.

슈퍼컴퓨터가 유감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박사님, 제 생각을 말씀드려도 될까요?”

박사는 주의 깊은 사람이었다.

“경청하겠어.”

“그런 물총으로 매미를 어떻게 박멸하실 생각입니까? 제 계산으로는 그런 방법으로는 2천년하고도 30일이 더 걸립니다. 그건 박사님 혼자서 하실 수 없는 일이죠.”

“본론만 말해, 본론만.”

“문제의 근원을 없애자는 겁니다.”

“나무를 불태우자고?”

그런 짓을 저질렀다간 삼림청에서 분개할 테지만, J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태연히 그런 짓을 저지를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주변 여건만 된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슈퍼컴퓨터는 J에게 실망하지 않고 설명했다.

“매미는 여름에만 사는 동물입니다. 일주일만 살지요. 그럼 우리는 여름을 없애면 됩니다.”

“어떻게?”

“지구의 축을 바꾸면 되지요.”

J는 자신이 그 생각을 못했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그는 한참 머리를 쥐어뜯고 발광하고 난리를 피우다가 슈퍼컴퓨터에게 화를 냈다.

“너무 좋은 생각이야!”

J와 슈퍼컴퓨터는 동시에 투덜거리며 서로에게 불만을 쏟아냈다. 잠시 후에 J가 말했다.

“핵미사일이 어디 있지?”

슈퍼컴퓨터는 답을 내놓았다.

순식간에 J의 연구실 앞마당에 간이로켓 발사대가 설치되었다. J가 로켓을 가져와 발사대에 얹었다.

J의 이웃들 중에는 옆집에 미친 과학자가 살고 있다는 사실을 매우 불안하게 여기던 예민한 사람이 하나 있었다. 그 날도 이웃사람은 J의 연구실에서 들려오는 이상한 소리들을 듣고는, 약간의 신경과민 증상에 두통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J에게 항의하기 위해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었다가 J가 설치한 로켓을 보고 기겁했다. 이웃사람은 경찰에 J를 신고했다.

J는 지역 경찰서의 블랙리스트 1순위를 차지할 정도로 위험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정부에서도 요주의 인물로 감시하고 있는 대상이기도 했다. 신고는 지휘계통을 따라 재빨리 움직였고 마침내 J가 무슨 짓을 꾸미고 있다는 사실이 보고되었을 때, 대통령은 신음을 흘리며 경찰 특공대 출동을 지시했다. 옛날에 정부가 J에게 의뢰해서 만들었던 소형 핵미사일이 다시 나타났다는 것만으로도 골치가 아플 지경이었다. 분명히 J는 연구에 실패했다고 보고했었는데 말이다. 대통령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J는 연구비를 먹고 날랐었다 이 말인가.‘

뒤늦게 경찰 특공대가 J의 연구실을 급습했을 때, 이미 로켓은 분사구에서 불꽃을 뿜어내고 있었다. 경찰들은 아연실색해서 J와 함께 로켓이 날아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로켓은 성층권을 돌파한 뒤 음속의 속도로 날았다. J는 오후의 만찬을 즐기듯이 휘파람을 불었다.

경찰들은 아직 J가 무슨 짓을 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어쩌면 미국을 공격했거나, 일본을 공격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지금쯤 저 미사일은 베이징이나 평양을 향해 날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서울 군사기지의 대공 레이더가 미사일을 감지했다가 놓치자 전군에 비상 경계령이 떨어졌다. 항공기지에서 긴급히 전투기들이 날아올랐지만 아무도 서울을 공격하는 적군 항공기를 발견하지 못했다.

경찰들이 J에게 무슨 짓을 했냐고 물었다. J는 쾌활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이제 매미 소리는 듣지 않아도 돼.”

핵미사일은 남극으로 날아갔다. J와 슈퍼컴퓨터가 계산, 예측한 궤도를 따라 목표지점을 타격하기 위해서였다. 그곳에 여름이 있었다. 계산은 약간의 오차율 없이 정확했다. 핵미사일은 여름을 직격했다.

여름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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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0.01에 썼던 글입니다. 벌써 까마득하게 오래전 인것처럼 느껴지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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