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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넝마주이의 죽음

2012.06.06 06:4406.06

넝마주이의 죽음



시속 160km로 공을 던질 수 있는 투수는 야구선수들 가운데 비율상 드물다.
야구선수들 가운데에선 벤치에서 시간을 보내거나 평균 보다 덜한 연봉을 받는다거나 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야구선수의 꿈을 중도에 접는 사람들도 많다. 야구를 접는 사람들이라도 일반인 보다는 야구를 잘 할 것이고 노력했을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사람들 사이엔 노력으로 넘어설 수 없는 차이로 인한 수입 격차도 엄연히 존재하는 법이다. 난 노력이 많은 걸 해결해주는 것이라고 믿고 있고, 세상의 많은 것들이 긍정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모든 걸 뛰어넘는 진실은 난 돈을 못 번다는 사실이다. 내가 돈을 못 벌면 사람들은 노력이 부족하다 말할 것이다. 하지만 사회성과 인지능력이 일반인 보다 떨어지는 병이고, 심약한 사람이 잘 걸리는 병이며, 따라서 직업 선택에 어려움을 겪고 수입도 떨어지는 병이자, 발작할 때마다 뇌 손상이 오는 병인 조현증(정신분열증)과 조울증에 난 걸려 있었다. 정신건강의학과에 약을 타러 다녀야 하는 처지였다. 약을 먹고 있어야 난 제 정신이었다. 정신분열증은 심각한 정신병으로, 발병률은 인구 중 1.5% 비율로 발병하며, 보통 미쳤다고 할 때 지칭하는 바로 그 병이다.
내 가난은 노력의 문제가 아니었다. 어릴 적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자라난 사람은, 소심해지고, 작업 기억력이 떨어져서, 즉 어리버리해서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경쟁에서 밀려 직업에서 도태된다는 말을 조선일보에서 본 적이 있었다. 또한 난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 장애자였다. 내 가난은 말하자면 2012년 현재 사회적으로 인정받지는 못 하는 정신 장애의 문제였다. 정신만 제대로라면 신체장애를 갖고 있어도 정치인이나 기업가가 되어 자신의 권리를 마음껏 누릴 수 있다지만, 정신에 장애가 있는 나 같은 사람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좁은 쪽방에 덩그마니 놓여 온갖 역할을 수행하는 데스크톱 PC에 의존해서 얻은 정보였다. 태어날 때부터 부자라면 성공에 크게 유리한 법이고, 성격이 좋아야만 성공에 이를 수 있다. 사회적으로 인정받지는 못 하는 장애인이라고 난 나를 생각했다.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 하니 장애인 특례로 취업할 수 없고 사회적 기업에 들어갈 수도 없다.
노력은 인생에 있어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노력 없이 환경 탓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노력을 결정하는 자아는 유전과 환경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자아는 결코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자아는 태아 때부터 시작되는 자극의 산물이다. 신경이 끊겨 감각의 자극이 끊긴 갓난아기는 자아를 형성하지 못 한다는, 라캉 심리학의 연구 결과가 있다. 성격의 80%는 생후 11개월 안에 결정된다는 영국의 연구 결과도 있다. 연구 결과엔 과학의 권위가 있다. 갓난아기 때 만들어지는 자아이니 내게 책임이 있을 리 없건만, 그 대가는 내가 고스란히 짊어져야 했다. 자아를 이루는 성격은 결코 쉽게 바뀌지 않는다. 노력만을 강조하는 이들 대다수가 비합리의 총본산인 유신론자인 것은, 이들이 자아가 유물론적 결과물임을 인정치 못 하기 때문이다. 유물론이 과학에 따르면 진리다. 난 노력의 효율성이 극히 떨어지는 자아 위에 입각해서 모든 행위를 해야 하는 처지였다. 누구나가 그렇듯이 난 내 몸에 갇힌 수형자였고, 모든 것들이 그렇듯 난 인과의 집적일 뿐이었다.
사실 노력하면 누구나 다 된다는 발언은, 연봉으로 3조 6000억 원을 번다는 미국 7대 부자 조지 소로스나 해볼 법한 소리가 아닐까. 조지 소로스 보다 자신이 못 났다면 그런 소리는 꺼내지도 말아야 할 일이었다. 조지 소로스의 눈에는, 웬만한 부자의 처지는 그 자체로서 변명처럼 보일 터였다. 일을 못 하면 도태되는 법이다. 조지 소로스는 일을 매우 잘 해서, 가난한 헝가리 계 유태인 대학생에서 그 위치까지 올라갔다. 일반인 보다 훨씬 일을 더 잘 할 것이다. 난 일반인보다도 훨씬 일을 못 하기에 이 위치에 있었다. 난 일을 시작한 지 2시간 만에 일을 느리게 한다고 공장에서 퇴출당한 적도 있었다. 어떤 일을 하든 제대로 못 하고 덤벙대고 행동이 느린데다 체력마저 약해서 꾸중이나 듣다가 잘리기 일쑤였다. 사실 다들 제 나름의  수준 밖에 일을 못 하기 때문에 지금 같은 그런 상태로 사는 것이 아니겠는가. 다만 사회가 지탱을 해준다면 좀 더 잘 살 수 있을 따름인 것이다.
학원에 다니면서 기술을 배운 적도 있었지만 직업으로 써먹을 수 없었다. 난 일을 못 하니 공부를 해도 소용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일을 한 뒤 여가 시간에 공부를 해서 더 나은 직장으로의 이직을 꿈꾼다고 한다. 여가 시간에 공부를 해도 일을 못 하니 소용이 없었고, 일 자체를 못 하니 직장에서 버틸 수도 없었다.
내 집은 차상위계층으로는 되어 있었다. 내가 매일 같이 먹어야 하는 정신건강의학과 약만 나라에서 돈을 대주었다. 내가 근로 능력이 있다는 이유로 기초생활수급자로는 지정되지 않았다. 나라에선 기초생활수급자 선정이 나이와는 상관없다고 선전하지만, 공무원 선에서 걸러졌다. 기초생활수급자로 선정받기가 쉬운 일이라면, 노숙자들이 그렇게 많을 수가 없었다. 나라에서 주는 수입으로는 엄마 앞으로 나오는 10만원의 기초노령연금 뿐이었다.
올해로 75세가 된 엄마와 함께 폐휴지를 주우러 리어카를 끌고 길을 나섰다가 이제 막 집에 돌아왔다. 리어카는 둘 곳이 없어 고물상에 두고 오곤 했다. 올해로 46세인 나지만 일정한 직업 하나 가져 본 기억이 드물고 설령 했더라도 한 달을 못 채우기 일쑤였다. 자연스레 결혼은커녕 연애 한 번 못 해봤다. 좌절과 패배에 익숙해져 투지 없는 삶에 익숙해졌다.
어릴 적부터 길들여진 삶의 방식이었다. 지금 뿐 아니라 내 때에도 지금의 일진이나 왕따와 비슷한 무리는 있었다. 학창 시절엔 흔히 말하는 왕따였다. 왕따였던 사람은 그 피해로 인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트라우마)에 걸린다는데 그래도 세상은 무관심했다. 일진 출신 보다 왕따 출신은 온정의 대상에서마저 아래에 놓인다. 일진들에게 가는 도움의 손길들은 너무나 많은데 왕따들에겐 그렇지 못 하다. 일진들에게 더 많은 돈을 벌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른바 선생이라는 종자들도 일진들이 설령 범죄를 저지른다 할지라도 일진들에게 훨씬 우호적인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일진들은 최상급의 삶을 산다고 볼 수 있었다. 학창 시절부터 강간 폭력 등 인간 세계의 쾌락을 모두 즐길뿐더러, 어른이 되면 진취적인 삶을 살아가고, 노년이 되면 황혼을 즐기는 것이 일진들이었다. 난 날 괴롭혔던 무리들이 어떻게 사는지 모르지만 그렇게 추측하고 있었다. 반면 왕따 출신들 중에선 성공한 사람이 동서고금을 통틀어 아무도 없는 것만 보아도 그들이 얼마나 지원이 절실한지 알 수 있었다. 물론 세상은 언제나 지원이 가장 필요 없는 강력한 이들에게 훨씬 많은 지원이 가는 법이었다. 예컨대, 삼성그룹은 삼성자동차를 르노에 매각하는 과정에서 1조 4000억의 공적 자금을 받아 챙겼다.
일진들은 왕따를 생태계에서라면 어디든 벌어지는 현상이라고 자신들을 정당화한다. 다른 범죄들에선 대체로 피해자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데도, 왕따에겐 책임이 물어진다. 왕따는 신체 뿐 아니라 정신을 파괴하는 범죄인데도 그러했다. 하지만 인간은 그런 현상을 조율할 수 있고 왕따라도 사랑과 우정으로 보듬어줄 수 있는 존재라는 걸 난 학창 시절에 몇몇 친구들을 통해 안 바 있었다. 청소년이라고 일진들을 봐주는 사이에, 더 좋은 정신을 가지고 자라날 수 있는 사람들이 왕따로 몰리고 있었다. 갓난아기에 가까워질수록 인격 형성에 더 중요한데도 그러했다. 왕따 가해자들도 봐주자는 무리들이 있었다. 탈무드의 격언인 ‘잔인한 자를 동정하는 사람은, 동정 받아야 할 사람들에게 잔인하다’는 말처럼 그런 무리일수록 왕따들이 아무리 자살해도 상관하지 않는 법이었다.
좋았던 친구들이라도 그들과의 연락은 오래 전에 끊겼고, 내 평생에 난 내가 먼저 다가가서 사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방법을 몰랐다.
상자며 신문지며 빈 병 따위를 팔아 연명하는 생활이었다. 사람들의 쏟아지는 질시, 무관심, 폭력에의 위협 등이 두려워 한여름에도 모자를 쓰고 마스크를 두르고 나가곤 하는 날들이 이어져왔다. 지금은 겨울이라 더욱 서러웠다. 난 내가 창피했다. 나와 엄마 같은 넝마주이들은 많고 또 많았지만 그것은 내게 아무런 위안도 줄 수 없었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인터넷 상에 풀어 놓을 때면 사람들은 변명이라고 하면서 이해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게 있어 이런 말들은 솔직한 느낌 그대로였다. 놀라운 점은 자칭 진보라 하는 사람들도 나 같은 사람들에겐 비판의 날을 세우곤 한다는 사실이었다. 자신들을 부자들이 이해하지 못 한다고 한탄하는 사람들이 말이다. 그들은 삼성그룹 2대 회장 이건희는 개인의 노력이 아니라 재벌의 아들이기에 성공했다고 폄하하면서도, 나 같은 사람들은 자아 형성에 문제가 있어 실패했다고 생각하지 않고 노력을 탓했다.
능력이 일을 할 정도는 되는 사람들이나, 아직 사회를 제대로 겪지 못 한 이들은, 워크 넷 통계로 잡힌 구직 수가 100만 여 개가 넘는다면서 실업자들을 탓하곤 한다. 하지만 그 일자리들은 어디까지나 더 일을 확장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일을 굳이 늘리지 않는다면 없어도 되는 것들이다. 실업자에게도 유능, 무능은 있는 법이다. 젊고 빠릿빠릿한 이들이 넘쳐나는데 나 같이 무능한 사람이 어떻게 쉽게 일을 구하고, 비교 당해서 도태될 것이 훤히 보이는데, 가뜩이나 무능한데 어찌 버틸 수가 있겠는가 말이다.
특히 내가 정신병자라 밝히면 더한 편견들이 쏟아지곤 했었다. 한국에서 정신병자는 가장 심한 욕이다. 심약한 사람일수록 정신병자가 되기 쉬운 법인데 이를 가장 모욕하는 것은, 한국은 약자만 공격하는 나라라 그런 거라고 난 생각했다. 한국에서 정신병자를 가장 많이 경멸하는 것은, 노력하면 다 된다는 이데올로기에 반하여, 정신이 이상하면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없다는 진실을 보여주는 존재이기 때문일 거라고 난 나름 결론을 내린 바 있었다. 정신건강의학과의 통계에 따르면, 평생에 걸쳐, 한국 인구의 3분의 1은 정신 치료가 필요한 상태가 된다고 한다. 그런데도 정신 치료를 죽자고 안 받으니 OECD 자살률 1위 국가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이 좁은 쪽방엔 난방 기구라곤 전기장판뿐이었다. 온 몸이 아프다는 엄마를 눕히고 난 춥지 않다고 거짓말을 하고 하릴없이 앉아 어둑어둑한 방 안을 그저 응시했다. 엄마는 이도 다 빠졌는데 틀니 하나 없었다. 나도 이가 거의 없었다. 엄마는 죽은 듯이 잠이 들었다. 정말로 돌아가실까 걱정되었다. 엄마가 돌아가셔도 내겐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었다. 무력하게 난 고개를 숙여 숨을 잠깐 멈춰 엄마 코에서 나오는 힘겨운 숨소리를 들었다.
나지막하게 엄마라고 불러 본다. 못 난 남편, 못 난 자식을 만나 한 평생 고생만 하신 엄마였다. 일자리를 못 구하는 내가 너무나 죄송스러웠다. 엄마를 깨울까 두려워 소리를 조금도 높이지 못 했다.
엄마 핸드폰으로 동생이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난 핸드폰을 굳이 개통하지 않았다. 부부싸움이라도 했는지 하루 자고 가겠다고 했다.
남동생은 아내와 함께 월세 방에서 어렵게 사는 처지였다. 그 핑계로 경제적인 도움을 엄마에게 주지 않았다. 처자 건사하기도 힘들기야 하겠지만 엄마를 모시고 산다면 난 한 시름 덜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모든 책임을 벗고 노숙자 생활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청소도 하고 빨래도 하고 구직 활동도 시킨다는, 노숙자 쉼터 생활을 견딜 자신은 있었다. 물론 풍문에 따르면 노숙자 쉼터는 엄격한 기준에 맞춰 노숙자를 받는다고 했다. 노숙자라고 해서 전부 다 쉼터 생활도 못 버티거나 지루해하는 사람들뿐이겠는가. 겪어 보지 않았기에 자신하는 것일 뿐 나도 노숙자 쉼터에서 못 버틸 것도 같았다. 지금 내가 집을 나가버리면 실종으로 처리되어 부양 의무자가 생존하고 있는 것으로 처리되어 엄마는 국가로부터 아무 혜택도 못 받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국가는 남동생이 돈을 번다는 이유로 엄마에게 기초생활수급자 혜택을 주지 않았다.
남동생의 아내처럼, 요즘 여자들은 물려받을 유산이 없다면 부모를 안 모시고 사는 법이었다. 한국 국민이라면, 남의 목숨 보다는 나의 돈이 중요하다는 말에 공감할 것이다. 돈이 가족을 지켜주는 법이다. 요즘 결혼하는 남녀들은 부모 돈 타내서 집 장만하고 혼수를 장만한다고 했다. 부모의 노후를 책임질 것도 아니면서 말이다. 생떽쥐뻬리가 한 말인, “부모가 우리의 유년기를 아름답게 장식해 주었으니, 우리는 부모의 노후를 아름답게 꾸며 드려야 한다.”는 말을 난 실천하고 싶었지만 내게 그럴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이 같은 동생과의 관계에 관해 엄마에게 말씀드린 적이 있었다. 엄마는 동생은 처자식이 있어서 돈 쓸 일이 많은데 도와주지는 못 할망정 도움을 바라느냐고 역정을 내셨다. 때때로 역정을 내시는 엄마가 살짝 미워지곤 했던 순간들도 있었다. 하지만 동생 가정에 대한 엄마의 역정은 결코 무리가 아니었다. 만약 동생이 엄마와 내게 돈을 주었다면, 이혼 당했을 지도 모른다. 시어머니를 찾지도 않는 며느리가 제수였다.
인터넷을 신청하면 부수적으로 나오는 PC를 켰다. 어둠과 침묵을 찢으면서 작은 빛과 소음이 흘렀다. 낡아서 시끄러운 CPU 쿨러 소리에 엄마가 깨실 것이 두려워 얼른 다시 껐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내겐 CPU 쿨러 바꿀 돈도 없었다. 어둠 속에서 더듬더듬 난 지갑 안에 주민등록증을 챙겨 넣었다. 지갑은 바지 주머니에 질러 넣었다.
엄마가 깨시고 피곤하셨는지 그냥 누워 있었다. 난 PC에 저장해둔 내가 쓴 소설들을 대강 훑어보았다. 작은 상들을 탄 글들은 있었지만, 등단한 글은 없었고, 인기 끈 글도 없었다. 소설가엔 가정 가가 들어간다. 즉 소설로 한 가정을 벌어 먹일 능력이 있어야 소설가라 할 것이다. 물론 소설가의 어원은 제자백가 중의 하나이지만 이는 내가 나름 의미를 부여해 본 것이다. 즉 소설로 돈 벌긴 그른 인생이었다. 소설로 돈 벌기엔 시야와 경험은 협소했고 사회성은 없었으며 게을렀다.
시간은 못 견디게 지루했다.
난 시간은 어떻게 지내든 흘러가는 법이라는 걸 떠올렸다. 의식은 시간을 지루하게 여기도록 할 수는 있어도 멈출 수는 없는 법이었다. 난 한동안 그렇게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좁은 방구석에 웅크리고 누워 이불을 둘렀다. 슬슬 잠이 왔다.
한숨 자고 일어나니 엄마는 고물 TV를 보고 계셨다. TV만이 엄마의 지루한 일상에 유일한 낙이었다. 내가 깨어나자 엄마는 TV 소리를 높였다. 엄마는 웃는 걸 좋아했다.
“엄마, 컴퓨터 배울래요?”
“싫어. 복잡해.”
몇 번씩 해본 대화였다. 난 웃었다. 엄마가 치매에 걸리더라도 난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좁디좁은 방이었다. 내 등과 엄마 등이 맞닿을 듯 가까웠다. 부자들은 이런 가난뱅이들의 궁상맞은 현실을 삶의 조건상 공감하지 못 한다. 버클리 캘리포니아 대학의 연구에 따르면 부자들일수록 거짓말 잘 하고 남의 것 잘 가로채고 양보하지 않는다고 했다. 부자일수록 공감 능력이 떨어진다고도 했다. 그런 사악한 부자들이니 서슴지 않고 복지를 지탱하는 세금 증대를 반대하고 국가를 저버리기까지 하는 것일 것이다. 복지를 하면 나라 재정이 고갈 나고 부자들이 높은 세율을 피해 나라를 떠난다고 했다. 예로부터 부자들 가운데선 부를 피지배계층으로부터 강탈하기 쉽게 체계를 꾸미는 도둑들이 많았다. 애초에 부자들이 선량하다면, 세율을 높여도 탈세를 하지 않는다면, 복지가 실패할 일은 없다. 부자들의 사악함이 움직이지 않는 일반적인 행태인 이상 내가 인간답게 사는 것은 불가능했다.
“나야, 나야.”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동생이었다. 난 문을 열었다.
동생은 42세였다. 어리게만 보였던 동생이지만 어느새 얼굴에 세월이 내려 있었다. 뭐가 힘들었는지 새치가 보였다. 노래 가사처럼 태어날 때부터 우리 집은 가난했었고, 그나마 IMF 구제 금융 시대 때 아버지의 보증으로 인한 부도 수표로 직격탄을 맞았다. 동생도 어렵게 살고 있을 터였다. 아버지는 몇 년 전에 돌아가셨다.
“이거 먹어.”
동생이 피자를 내밀었다.
“뭘 이런 걸 다 사와. 시키면 되는데.”
“피자헛 꺼야.”
“잘 먹자.”
비싼 피자였다. 오랜만에 먹는다. 엄마, 나, 동생이 둘러 앉아 피자와 콜라를 먹었다. 달디 단 맛에 배도 불렀다. 난 기회를 엿보았다. 엄마는 부지런했다. 능력은 부족했지만 나와 동생 두 형제를 어려운 살림에도 키워냈다. 나라에서 약값을 도움 받는 것도 부끄럽다 하시면서 힘차게 리어카를 끌고 다니시곤 하면 난 그걸 낯부끄러워 하면서 쫓아다니곤 하는 일상이 요즘이었다. 물론 엄마도 그런 자신을 너무나 초라하다고 한탄하셨지만 나처럼 얼굴을 가리고 다니지는 않으셨다. 하루에 두 끼만 먹고 라면과 김치로 때우고 때때로 거르면서도 이렇게라도 사는 게 다행이라 하셨다.
내가 정신분열증에 걸렸을 때를 회상하실 때면 우시곤 하시는 엄마였다. 내가 조금만 아파도 그렇게 우시는 엄마였다. 만약 전생이 사실이라면, 엄마는 이전 생에서 뭔가 큰 죄를 지으셨기에 이런 삶에 떨어지셨을 터였다. 윤회가 있다면, 다음 생에서라도 엄마가 보상을 받으셨으면 했다. 하지만 과학에 따르면 영혼은 없었다.
우주는 가늠 없이 넓었고 별들은 지구의 모래알보다도 많았다. 아직 낮이라는 착시가 지구를 휘덮고 있었다. 낮이라는 빛은 단지 지구의 반쪽을 덮고 있을 뿐 언제나 우주는 한밤중이다. 창문도 없는 쪽방 천장에 흐릿하게 빛나는 형광등이 단지 방 안만을 살짝 비춰주는 것처럼. 마음은 그처럼 마음만으로 끝나는 것이었고, 진실은 비루하고 참담한 삶의 조건이었다. 진실은 그런 것이었다. 영혼이 있을 가능성은 우주에 보이지 않았다. 영혼이 있다면 그것을 있다고 주장하는 쪽에서 증명해야 한다. 영혼이 있고 그것도 특정 조건 아래 있을 가능성은 무한소에 수렴한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여호와도, 불교에서 말하는 지장보살도 그럴 터였다. 과학만이 진리에 이를 수 있는 길이었고, 그 길에서 난 혼자였다.
엄마가 암에 걸려 있다는 걸 난 알고 있었다. 엄마는 내가 모르고 있는 줄로 아셨지만 난 알고 있었다. 내겐 그 치료비를 댈 아무 수단이 없었다. 보험료를 낼 수도 없었다.
동생이 말했다.
“자고 갈래.”
엄마는 날 보고 말했다.
“파지 주우러 나가자.”
“저 피곤해요.”
“나쁜 놈. 동생 자는데 방해 말고.”
“네.”
엄마는 리어카를 가지러 고물상으로 떠났다. 나는 엄마의 족적을 가늠했다. 엄마는 익숙한 길을 더듬더듬 찾아갈 것이다. 겨울 햇볕이 내리쬐는, 듬성듬성 투명한 빙판이 있는 길을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내딛으며 천형과도 같은 육체를 끌고 갈 터였다.
난 누운 동생 옆에 웅크리고 앉아, 밥상 위에 놓인 PC를 켰다. 인터넷 기사들을 뒤적거렸고 댓글을 달기도 했다. 시간을 단순히 보내기 위한 행동이었다. 피자헛 사이트에 가서 확인해보니 동생이 들고 온 피자 가격은 3만원 정도였다. 내 입장에선 말도 안 되는 거금이었고, 동생 입장에서도 상당한 출혈이었을 것이다. 동생은 유전자로 이어진, 동생의 존재 보다 앞섰던 원초적인 가족이 그리웠던가 보다. 동생은 등을 돌리고 자고 있었다.
오랫동안 마음속으로 그려온 일이었다. 기회였다.
난 식칼을 찾아 꺼내 들었다. 영영 돌이킬 수 없다. 각오하고 있는가. 각오는 정작 때가 다가오면 조각조각 부서지고 마는 걸 난 수없이 겪어 왔다. 나의 마음이 특별히 나약한 것인지 인류의 특성인지 난 판단할 수 없었다. 틀림없이 후회할 일이었다. 심장이 거세게 고동쳤다.
난 온 힘을 다해 동생의 뒷목에 식칼을 질러 넣었다. 피가 솟구쳤다. 난 식칼을 뽑아 던지곤 방 밖으로 도망치듯 나왔다. 심장이 너무나 강하게 뛰고 있었다. 정신분열증 환자가 존속 살해를 저지를 확률이 높다 했다. 그 통계 속으로 난 스스로 들어갔다. 2평방미터도 안 되는 좁은 부엌에 덩그러니 솟아나온 수도꼭지에 손을 씻고 미리 놔둔 옷으로 갈아입었다. 흥분 상태였다. 이 상태에서 엄마를 본다면 또 다시 몹쓸 짓을 할 수도 있었다. 정신분열증 환자가 존속 살인할 경우 가족 중 엄마를 가장 많이 죽인다는데 그 통계로까지 나를 위치시키기는 싫었다. 그럴 수는 없었다.
난 한 번 크게 울부짖었다. 내가 선택해서 저지른 것이지만, 그런 선택으로 스스로를 몰아갔다는 것이 슬프고 안타까웠다.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차디찬 바람이 몰아쳤다. 이제 다음 계획을 실행할 때였다. 인간 사회에서 두 죄는 약함과 악함이다. 이제 난 두 가지 모두를 범했다. 악하면 부모를 모시지 않고, 약하면 부모를 모시지 못 한다. 난 이제 엄마와 같이 살 수 없다. 두 죄 중 더 큰 죄는 약함이다. 약함이라는 죄는 어떤 논리로도 변호할 수 없다. 내 삶이 지금껏 그러했듯이 말이다. 빠삐용에서 주인공의 죄가 인생을 낭비한 죄 즉 약함을 이어간 죄이듯이. 인간 사회는 경쟁사회이고, 인류는 생태계에 대해 약육강식하면서 살아 왔기에 본성상 약자는 침해하고 빼앗도록 되어 있고 약함을 죄악으로 인식하도록 프로그래밍 되어 있다. 만약에 계획이 잘 못 되어서 내가 교도소에 들어간다 해도, 노숙자 또는 지금의 삶 보다는 나은 규칙적이고 균형 잡힌 삶을 교도소 안에서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교도소에 들어가 있는 범죄자들은 좌우지간 가능성이 있는 존재로 대우된다. 요즘엔 군대보다도 교도소에서의 처우가 좋다고 했다. 그렇듯 약자들은 범죄자 보다 못 한 처우를 한국 사회에서 받는 법이었다. 이제 난 범죄를 저질렀으니 법체계의 상전이 된 것이다. 인권 팔이 들이 나의 인권을 약자들 보다 앞서 보장해 줄 것이라 생각하니 어딘지 개운한 생각마저 들었다. 인생 막장이 되면 한국인은 범죄를 저질러 국가 기관인 교도소의 보살핌을 받는 편이 수지가 맞는다.
착하기만 한 동생을 내가 죽였다. 물론 죽이지는 못 한 것일 수도 있었다. 최소한 살인미수인 중죄였다. 되돌아가서 확인 사살하려다 그만두었다. 어차피 그 정도 상처를 입었다면 병원비가 없어 치료를 받을 수 없을 터였다. 그러면 동생의 아내도 미련 없이 동생을 버릴 것이다. 엄마는 아마도 동생을 쉽게 저버리지 않으려 하시겠지만 별 도리가 없을 것이다.
나는 뛰듯이 언덕을 달려 내려갔다. 가끔 마주치는 사람들이 다들 날 노려보는 것만 같아 속이 탔다. 곧 지쳐 숨을 몰아쉬며 천천히 걷게 되었다. 익숙한 길들이었다. 엄마를 만날까 봐 두려웠다.
엄마와 비슷한 모습의 넝마주이를 본 것도 같았다. 난 재빨리 다른 길로 빠졌다. 들고 뛰던 모자를 깊이 눌러 쓰고 마스크를 고쳐 둘렀다.
도덕은 진화론적인 전제 조건 위에서 성찰할 수밖에 없다. 난 유교적 관습에 의한다면 지독한 불효를 저질렀고, 법적으로는 존속 살인범이 되었다. 진화는 인간의 양심을 적자생존 시켰고, 난 양심을 거슬렀다. 양심이란, 타인과 세상에 대한 애정과 의무감이라고 한 동물학자가 정의 내린 바 있었다. 죄수의 딜레마에 관한 대규모 실험에서, 가장 뛰어난 생존 전략은 처음엔 우호적으로 대하다가 상대가 나쁘게 대하면 똑 같이 나쁘게 대하고 상대가 다시 우호적이 되면 똑 같이 다시 우호적이 되는 것이라 했다. 난 우호적으로 다가온 동생을 죽였으니 이 보다 더 어리석은 전략도 또 없을 것이다. 생존을 담보로 하지 않을 때 전략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된다. 아니 그런 것을 전략이라 부를 수도 없을 것이다.
물론 과학에 따르면 인간의 몸의 모든 분자는 2년이면 완전히 교체된다. 따라서 예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른 사람이었다. 어디에도 자아의 연속성은 없었다. 결국 양심을 지킬 이유란 생존 본능뿐이었고 이는 제어할 수 있는 부분에 불과했다. 그래도 좌우지간 난 효도를 하고 싶었고 이미 이를 지킬 수 없는 바로 지금도 그랬다. 내겐 내 자아의 관성을 유지하고픈 본성이 있었다.
버스를 탔다.
허름한 옷차림의 171cm의 작은 체격을 가진 40대의 남자인 나는 내가 작아 보여 견디기가 힘들었다. 버스 안에 앉아 있는 젊고 예쁜 여자를 보자 내 성욕은 일어났지만 참았다. 남자는 누구나 자신의 성욕을 절제할 수 있다. 강간범의 경우 계획적으로 성폭행 욕망을 배치시켜 범행을 저지르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시간대가 시간대인지라 버스 안에 사람은 적었다. 왜 그런지 성욕이 일었다. 바지 지퍼를 풀고 자위를 하고 싶어졌지만 참았다. 2~30대엔 가끔 돈을 모아 1년에 한두 번 집창촌에 가서 성욕을 풀곤 했었다. 그러나 요즘엔, 부자 페미니스트들의 집창촌 부동산 재개발용 법안인 성매매 특별법 때문에 갈 수가 없었다. 곧 자리가 나서 앉았다. 차창 너머로도 젊은 여자들이 보였다.
전철역에 있는 정류장에 버스가 서자 난 바로 내렸다. 지하철 계단으로 내려갔다. 난 미리 점 찍어둔 역으로 가기 위해 전철을 탔다. 이 교통 카드도 이제 쓸 일이 없을 터였다.
오류동역에 도착했다. 벤치에 앉았다. 선로로 난 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직 낮이지만 곧 밤이 내릴 터였다. 밤이 되면 별이 보인다. 내가 어릴 적에 엄마는 밤하늘의 밝은 별을 보면서 이게 내 별이라고 말하곤 했었다. 허망한 발언이었다. 그 발언을 뒷받침한다고 볼 수 있는, 점성술에 따르면 그토록 밝은 별은 기운이 센 제왕의 운명을 상징할 뿐 그때의 나 같은 꼬마의 운명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었다. 천문학적으로 따지면 더욱 의미 없는 발언일 뿐이다. 행성이었는지 항성이었는지 알 수 없을 그 별은 인간에 비하면 터무니없는 규모를 가졌다. 먼지만도 못 한 지구 위에 사는 한 꼬마와 엮일 일이 없었다. 낮이라는 착시 너머엔 언제나 밤이 있듯이, 자아라는 착각 너머엔 언제나 차갑고 비정한 우주가 있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나는 없었고, 잠들 때엔 기억이 나지 않는 법이다. 죽음은 그저 물질로 돌아가는 일일 뿐이었다. 생물도 결국엔 물질로 이루어져 있었다. 나에게 생존 의지를 부여하는 자극은 감각의 소산이었고, 감각은 생존 의지 때문에 진화되어져 있었다. 내겐 생존 의지를 던져버릴, 내게 유일하게 주어진 힘이 있었다. 미약한 힘이었다. 내 외할머니를 죽인 것은, 속칭 아리랑치기라 불리는, 뒷덜미를 돌로 때리는 것이었다. 이왕 살인까지 저지른 것 아무 연약한 사람이나 붙들어서 전철 들어오는 길목에 밀어버리고도 싶었다. 그러나 그러면 계획에 방해가 될 수 있었다.
계획이라 봐야 별 것 없었다. 스크린 도어도 없는 오류동역에 전철이 미끄러져 들어오면 난 그 앞에 뛰어들 예정이었다. 벌써 몇 대의 전철이 지나갔다. 어째서 오류동역에 스크린 도어가 없는지 난 알 수 없었다. 주머니에 들어 있는 꾸깃꾸깃한 종이조각을 펴본다. 볼 품 없는 유언장이지만 내 사인도 있었다. 내가 남동생을 죽였고 이제 어머니는 홀로 되셨으니, 엄마를 기초생활수급자로 지정해달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명색이 서울인 오류동역에 스크린 도어 하나 설치 않는 공공기관이 과연 엄마를 기초생활수급자로 해줄지 난 알 수 없었다. 프랑스 대혁명 이래 국가는 부자의 국가일 뿐이었다. 가난뱅이를 위한 국가는 없었다.
버티고 싶었다.
미래학자의 과장된 전망일 수 있지만, 과학기술이 발전해서 앞으로 2~30년 안쪽이면 불로불사의 시대가 열릴 수 있다는 전망이 있었다. 그때까지 내가 삶을 꾸려갈 능력이 있었다면 엄마도 불로불사시킬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토록 발전된 과학기술은 인간과 기계를 융합시킬 터였다. 이미 뇌에 기계를 이용한 생각의 입출력이 가능했다. 부자일수록 인공지능과 로봇에 힘입어 더욱 성능 좋은 마음을 갖게 되고, 부자가 아닌 99% 이상의 인간을 해고한 뒤 필요 없다면서 학살할 미래가 다가 올 것만 같았다. 그때가 되면 부자라서 자신의 마음을 지속적으로 강화시킬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면 일을 할 수 조차 없을 만치 일들은 복잡해질 것이다. 어차피 사람들은 나 같은 사람들이 죽기를 바라고 있었다. 거지들은 죽여야 한다는 것이 요즘 청년들의 일반적인 생각이고, 낙오자와 부상자는 쏴 죽여야 한다는 것이 유명 지식인들을 비롯한 우파의 한 극단이다. 요즘 청년들 대다수는 사회적 약자라서, 인간을 목적으로 대우해야 한다는 칸트의 사상이 민주 공화정의 기본이 아니라면, 노예제의 부활을 부를 텐데도 그렇게 생각하고들 있었다. 그런 생각이 확장되고 미래의 기술과 영합하면 부자들은 인류를 멸망시킬 터였다. 그런 미래는 자유민주주의자는 물론이고, 절대빈곤 타파를 내세우는 신자유주의자조차 바라지는 않을 터였지만 주류 사상도 시대에 따라 변한다.
내겐 부자는커녕 평범하게 살기는커녕 일자리를 구할 능력도 없었다. 모든 것은 요원한 꿈이었다. 미래는 어차피 캄캄했다.
다시 전철이 승강장에 미끄러지듯 다가온다. 난 그걸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형사들로 보이는 사내들이 계단에서 올라오는 것이 보인다. 허름한 잠바를 입었고 덩치가 컸고 인상이 사나웠다. 좌우지간 내 눈엔 형사들처럼 보인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난 충동적으로 일들을 가끔 결정하곤 했었다. 그것도 이제 끝이다.
달려오는 전철 앞에 몸을 던졌다.


[Fin]

2012.06.06
댓글 1
  • No Profile
    418f 12.06.11 17:19 댓글 수정 삭제
    착한 마음 탓인지 조급함 탓인지 완전히 삭히지 않은 감정을 토해낸 탓인지 지나치게 노골적인 신맛만 나요. 좋은글 기대하고 있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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