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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루시의 이기적인 몸매

2009.07.08 17:4707.08

베르미 박사는 뛰어난 두뇌를 가지고 태어났으나, 청소년 시절에는 그다지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학교 성적은 중간 이하였고, 수학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과목에서 겨우 낙제점을 면하는 정도였다. 이탈리아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친척 형들과 어울려 나쁜 짓을 곧잘 했고, 때로는 무척 대담한 행동을 해서 주목을 받았다. 빵집주인이 한 눈 파는 사이에  커다란 호두 파이를 훔쳐 내온 일은 그를 유명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베르미를 이탈리아 불량 청소년들의 리더로 만들었다. 그래서 베르미의 사촌 형들은 그가 장차 아버지와 삼촌들이 해온 ‘패밀리 비즈니스’를 물려받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베르미가 우연하게 읽게 된 한 권의 책이 그를 마피아가 아닌 핵물리학자로 만들었다. 그 책은 동부의 무명 출판사가 파인만 박사의 베스트셀러를 흉내 내어 만든 현대물리학 입문서로, 표지에는 아인슈타인이 혓바닥을 길게 늘어뜨린 사진이 크게 박혀 있었다. 파인만 박사의 책을 흉내 냈지만 파인만 박사의 책처럼 유명해지지 못한 그 책은 공공도서관 서가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몇 년의 세월을 보낸 끝에 최초의 대출자인 베르미를 만났다.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의 무명 교수가 집필한 그 책은 편집이나 디자인 상태가 조잡했지만 내용은 매우 명쾌하고 재미가 있었다.

아버지가 빌린 ‘로마제국 쇠망사’를 반납하러 왔다가 우연히 물리학 책을 빌리게 된 베르미는 그날 밤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 이론에 푹 빠져버렸다. 갈릴레이나 뉴턴의 역학을 뒤엎어버린 혁명적 이론이라는 저자의 진부한 찬사와 관계없이, 베르미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마법 같은 이론에 사로잡혔다. 특히 에너지와 질량을 다음과 같이 간단한 방정식으로 나타낼 수 있다는 사실에 베르미는 전율했다.

     E=mc²

그 간단한 공식은 유대인 소년들과의 패싸움이나 사촌 형들의 마리화나보다 더 짜릿하고 흥미로웠다.

루시가 미국에 온 것은 한국 나이로 열다섯 살이 되던 해였다. 그녀의 한국 이름은 수영이었다. 수영은 한국에 있을 때에도 통통한 단계를 넘어서 비만에 가까운 상태였다. 돈 버느라 바빴던 그녀의 부모는 외동딸의 균형 잡힌 식단이나 적당한 운동에 대해서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내성적인 성격에 뚱뚱한 몸매는 자연스럽게 수영을 외톨이로 만들었고, 방과 후에 집에 홀로 남겨진 수영은 달착지근하고 칼로리가 높은 것들을 탐식하며 텔레비전을 끼고 살았다.

수영의 부모가 도미(渡美)를 결심하게 된 동기는 명확하지 않다. 수영의 아버지가 직장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고, 어머니는 시댁 식구들에게 진절머리를 내고 있었지만, 표면적인 이유는 수영의 교육이었다. 수영의 성적은 중상위권이었지만 명문대를 갈 정도는 아니었고, 수영의 부모는 ‘한국에서 시시한 대학을 나와서 고학력 실업자나 비정규직이 될 바에야 차라리 이민을 가는 게 낫다’고 수영에게 말했다. 밥숟가락으로 아이스크림을 퍼먹다 그 말을 들은 수영은 모욕감을 느껴 더욱 열심히 아이스크림을 퍼먹을 뿐 대꾸하지 않았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이륙해 한국 땅에서 점점 멀어지는 동안, 수영의 아버지는 지긋지긋한 술자리와 끔찍한 상사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어머니는 그 동안 시어머니와 시누이에게 당한 일들을 남편과 딸에게 하소연하며 로스앤젤레스에 가서는 한국 사람들과 아예 인연을 끊고 살겠다고 말했다. 수영은 말없이 창밖을 내다보며 승무원이 건네준 양념 땅콩을 씹었는데, 사실 그녀는 남모르게 설레는 감정을 숨기고 있었다.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는 막연한 희망이 생겨나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미국에서의 삶은 지금까지의 삶과는 다른 모습일지 모른다. 수영은 다이어트에 성공해 날씬한 몸으로 오렌지카운티를 거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번잡한 이민 수속이 끝나자, 수영의 아버지는 흑인들이 사는 타운에 가발가게를 열었다. 처음에는 꽤 장사가 잘 돼서, 수영의 어머니는 금방 백만장자가 되는 줄 알고 비버리힐즈의 부동산을 보러 다녔다. 하지만 돈 냄새를 맡은 한인들이 경쟁적으로 근처에 가발가게를 내는 바람에 매출이 사분의 일로 줄어들었고, 수영의 아버지는 결국 가게를 처분했다. 가발가게를 처분한 뒤에는 내외가 빌딩 잡역부로 일하면서 힘들게 살았는데, 자식교육만은 잘 시켜야겠다는 일념으로 수치심과 육신의 고통을 견뎌냈다.

하지만 루시로 이름을 바꾼 수영은 부모의 바람과는 달리 모든 일이 순조롭지 못했다. 엄청난 사이즈와 용량을 자랑하는 미국의 패스트푸드는 탐식증이 있는 동양계 소녀를 완전히 굴복시켰다. 날씬한 몸으로 변신하여 자신을 조롱하던 한국의 친구들에게 복수하겠다던 야심찬 계획은 산산조각 나고, 루시는 백육십오 센티미터의 키에 구십 킬로그램이 넘는 고도비만자가 되었다. 미국은 뚱보들이 넘쳐나는 나라였지만 뚱뚱한 사람들에게 별로 호의적이지 않은 것은 한국이나 매한가지였다. 그녀는 우울증에 빠져 전혀 학교생활에 적응할 수 없었다. 하지만 루시의 딱한 사정은 부모의 입장에서는 전혀 이해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아빠 엄마가 뼈 빠지게 일해서 번 돈으로 햄버거니 피자니 실컷 쳐 먹고 살만 뒤룩뒤룩 쪄서 공부도 안 하고 빈둥대기만 하니! 너 같은 것 잘되는 꼴 보자고 여기까지 와서 고생하는 우리 신세는 뭐니?“

루시는 자살을 생각했으나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그럭저럭 졸업을 하고, 명문대에 들어가지는 못했으나 집 근처에 있는 커뮤니티 칼리지에 들어가서 공부를 계속했다. 여전히 친구는 한 명도 사귀지 못했고 공부는 하는 둥 마는 둥 했으나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는 모친 때문에 어떻게든 무거운 몸을 움직여 학교와 집을 오가는 생활을 이어갔다.

우울한 나날을 보내던 루시에게 신의 계시와도 같은 채용공고가 나타난 것은 8월의 마지막 금요일이었다. 학교의 냉방장치가 고장이 나서 루시는 땀에 흥건히 젖은 채로 강의실을 나섰는데, 구직자들을 위한 게시판에 다음과 같은 공지가 붙어 있었다.

Job Opportunity

로스알라모스 국립연구소에서 함께 일할 여성을 구합니다.

자격요건 : 날씬해지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 분.

로스알라모스 국립연구소라는 화려한 명성에도 불구하고 이 채용공고에 혹한 학생들은 거의 없었는데, 업무내용에 대한 설명이 애매모호하고 스타팅 샐러리가 만 오천 달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UCLA나 UC버클리 같은 명문대가 즐비한 캘리포니아에서 굳이 커뮤니티 칼리지를 찾아왔다는 점이 더욱 수상했다.

“아마 하루 종일 시험관 세척을 하거나 문서를 복사하는 일일 거야.”
“비만치료제 임상실험 대상자를 찾는 게 아닐까? 인간 모르모트 말이야!”
“바보 같은 소리. 국립연구소에서 그런 실험을 할 리가 없잖아?”
“로스알라모스 국립연구소라는 건 거짓말일걸. 아마 연구소의 하청기업일거야.”

다른 학생들이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며 구직 게시판을 스쳐지나가는 동안 루시는 국립연구소의 채용공고문 앞에 말뚝처럼 서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자격요건에 고정되어 있었다.

날씬해지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 분.

베르미 박사는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캘리포니아에서 온 동양인 뚱보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눈을 맞추지 못하고 베르미 박사의 손톱이나 책상 위의 볼펜 따위를 힐끔힐끔 훔쳐보았다. 이 내성적인 소녀가 오십삼 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차세대 전략핵무기 프로젝트의 최종 지원자로 선발된 루시다. 베르미 박사가 캘리포니아 주에 채용공고를 낸 것은 뉴멕시코보다 뚱뚱한 여자가 더 많을 거라는 추측 때문이었다. 스타팅 샐러리를 겨우 만 오천 달러로 한 것은 고액 연봉에 이끌리는 지원자들을 배제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루시가 최종 지원자로 선발된 것은 가장 질 좋은 피하지방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고, 심리검사에서 만족할만한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루시는 ‘당신은 날씬해지기 위해서 사람을 죽일 수 있습니까?’ 라는 질문에 ‘매우 그렇다’를 골랐다.

“루시, 로스알라모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난 베르미 박사입니다. 앞으로 당신이 해야 할 모든 일을 알려줄 겁니다. 말하자면 당신의 직속 상사라고 할 수 있어요.”
“안녕하세요......전 그냥 무작정 왔어요. 뭘 하는지도 모르고 말이에요.”
“모르는 게 당연해요. 앞으로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일급 국가기밀이니까요. 한 가지 물어볼 게요. 뭘 하는지도 모르면서 왜 지원한 거죠?”

루시는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 그건........자격 요건 때문이에요. 날씬해지기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
“좋아요 루시! 그게 우리가 원하는 겁니다.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는 사람.”
“전 준비가 돼 있어요. 그런데,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으면, 날씬해질 수 있는 건가요?”
“물론입니다. 당신이 날씬해질 수 있다는 것은 아인슈타인이 이미 증명했습니다.”
“정말이요? 하지만 그 분은 저를 모르실텐데......”
“물론 아인슈타인은 당신을 몰랐을 겁니다. 당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셨으니까요.”
“저를 놀리시는군요.”

루시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보였다. 베르미 박사는 그녀가 지금까지 많은 상처를 받았다는 걸 알게 됐다.

“오오! 울지 말아요 루시. 절대로 당신을 놀리는 게 아니에요. 내 말은 아인슈타인이 모든 여자가 날씬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하나의 공식으로 증명했다는 거예요.”
“어떤 공식인데요?”

루시가 이슬처럼 맺힌 눈물을 훔치며 물었다. 베르미 박사는 하얀 가운의 포켓에서 볼펜을 꺼내어 종이 위에 천천히 적었다.

    E=mc²

“이 공식, 본 적이 있어요.”
“유명한 공식이죠. 이 공식이 말해주는 것은, 질량이 에너지로 바뀔 수 있다는 거죠.”
“그 게 저랑 무슨 상관인가요?”
“아, 다시 말할 게요. 루시의 몸무게가 에너지로 바뀔 수 있다고요.”
“저 놀리시는 거 맞죠?”

루시가 다시 울음을 터뜨리려 해서 베르미 박사는 진땀을 흘리며 그녀를 달래야 했다.

“질량이 에너지로 바뀌는 가장 대표적인 예는 핵폭탄이에요.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 알죠? 우라늄이나 플루토늄이 핵분열을 하게 되면 질량결손이 발생하거든요. 질량결손만큼 에너지가 발생해요.”
“전 핵폭탄이 아니에요.”
“지금은 아니죠. 하지만 곧 될 거에요. 루시는 사상 최초의 생체 핵폭탄이 되는 겁니다.”
“날 죽일 셈이에요?”
“오, 걱정 말아요. 엄청난 파괴에너지로부터 당신을 보호하는 기술을 이미 개발했으니까요.”
“박사님, 뭔지 모르지만 서둘러주세요. 전 하루라도 빨리 살을 빼야 된다고요.”

럼스펠 장군은 미 육군 내에서 대표적인 강경 보수파 인사로, 이라크 전쟁에 참전했으며 테러리스트를 응징하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라 굳게 믿고 있는 사나이다. 하얗게 센 머리와 억센 턱, 당당한 체구를 갖고 있는 장군은 ‘하얀 독수리’란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지금 몹시 화가 나 있었다.

“도대체 당신의 프로젝트는 언제 완성되는 거요? 우린 당장 차세대 전략 핵무기를 써야 한단 말이오!”

베르미 박사는 한숨을 쉬었다. 이 다혈질의 아일랜드인은 연구 활동도 군사 작전처럼 신속하게 해야 성공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박사는 장군이 자신의 책상에 발을 올리고 앉아서 시거를 피우는 것이 무척 못마땅했다.

“지원자를 찾았습니다. 동양계 여성인데 피하지방의 성분이 최적의 비율을 가지고 있어요. 다음 주에는 폭발 실험을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 우리 ‘신무기’의 이름은 뭐요?”
“루시 리.”
“중국인인가?”
“한국인입니다. 사회복지학 강의를 듣고 있지요.”
“복지학이라! 난 빨갱이들 학문은 딱 질색이오!”

베르미 박사는 장군의 무식함에 기가 질렸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걱정 마세요. 군인으로서 갖춰야 할 소양교육은 하고 있습니다.”
“군인이라니? 그 여자는 ‘무기’지 군인이 아니오!”
“지성과 자아가 있는 무기지요. 자신이 어떤 일을 위해 쓰이는지는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커뮤니티 칼리지에 다니는 동양계 뚱보 소녀가 뭘 알겠소? 지난번에 마시던 버번이나 한 잔 마십시다.”

탈의실 앞에 선 루시는 신축성 있는 소재의 옷을 받아들고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  

“이것만 입으라고요? 제 몸 위에?”

루시 같은 여자에게 이렇게 노골적으로 몸매가 드러나는 옷을 입히는 것은 잔인한 짓이었다. 베르미 박사는 그녀를 안심시킬 수 있는 표정은 무엇일까 궁리하고 있었다.

“루시, 겉보기에는 그냥 검은 나일론으로 만든 에어로빅 의상 같지만, 이 옷은 섬유 한 올 한 올이 미세한 나노로봇의 결합체에요. 각 로봇은 루시의 몸무게를 에너지로 변환하는 일을 하죠.”
“아직도 믿을 수 없어요.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 거죠?”
“지난번에도 이야기했죠? 핵폭탄이 바로 질량을 에너지로 바꾸는 거라고. 하지만 나는 기존의 핵폭탄과는 전혀 다른 방법을 찾아냈어요. 핵분열이나 핵융합을 하지 않고도 질량을 직접 에너지로 바꾸는 거예요. 루시가 들고 있는 그 옷이 바로 질량-에너지 변환기에요.”

탈의실에서 나온 루시의 모습을 본 베르미 박사의 조수들은 웃음을 참느라고 얼굴이 벌겋게 되었다. 입에 발린 칭찬을 준비해 두었던 베르미 박사는 막상 그녀의 모습을 보고 나자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루시는 몸에 착 달라붙는 질량-에너지 변환기만 입은 채 뜨거운 사막에 서 있었다. 맨발을 통해 땅의 열기가 전해졌다. 바위 사이로 작은 뱀 한 마리가 지나갔다. 새 한 마리가 높은 하늘에서 원을 그리고 있었다. 사방을 둘러봐도 바위와 약간의 관목뿐이었다. 그녀는 갑자기 무서워졌다. 귀에 꽂은 작은 리시버를 통해 베르미 박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시, 긴장하지 말아요. 우리가 멀리서 다 지켜보고 있으니까. 실험은 금방 끝날 겁니다. 아주 안전한 실험이니까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되요.”

루시는 자신을 안심시키려는 베르미 박사의 목소리에서 불안을 감지했다. 실험은 안전하지 않다. 루시는 그리 나쁘지 않은 최악의 사태를 각오했다. 그리 행복하지 않은 삶을 마감하는 것 말이다. 루시는 갑자기 무언가에 온 몸이 휩싸였는데, 푸르스름한 빛 같기도 하고 안개 같기도 하였지만 무엇인지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마치 눈을 감고 꿈을 꾸는 것 같았다. 베르미 박사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루시, 놀라지 말아요. 지금 플라즈마 배리어가 루시의 몸을 감싸고 있어요. 배리어가 폭발시의 충격으로부터 루시를 보호해줄 겁니다.”

베르미 박사는 루시가 있는 곳에서 팔십오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곳에서 컨트롤박스를 조작하고 있었다. 조수가 암호 키를 건네주었다. 암호를 입력하자 컨트롤박스의 안전장치가 해제됐다. 질량을 밀리그램 단위로 입력하자 변환되는 에너지가 줄(Joule)과 에르그(erg)단위로 계산되어 표시되었다. 루시의 몸무게를 1그램만 줄여도 90조 줄의 에너지를 얻을 수 있었다. 대형 모니터에 표시된 시간이 점점 줄어들더니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

사막 한 가운데 초신성이 폭발한 것처럼 밝은 빛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루시는 폭발 시의 충격에도 심각하게 다친 곳은 없었다. 플라즈마 배리어는 거의 완벽하게 루시의 몸을 보호했다. 루시가 기절한 것은 엄청난 에너지가 주변 사막을 파괴하는 것을 보고 심리적인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루시의 가까운 곳에 있는 바위와 관목들은 엄청난 열과 빛을 견디지 못하고 순식간에 증발해버렸다. 그리고 삼 킬로미터 반경 안에 있던 모든 물질이 타서 없어졌다. 십 킬로미터 밖에 있던 관측 장비들은 폭풍에 날아가 크게 부서지고 말았지만 다행히 관측 데이터는 손상되지 않았다. 폭발할 때 전자장 펄스가 생성되어 전자장비가 일부 고장 났지만 방사능은 나오지 않았다. 루시는 청정 핵무기였다.

실험은 대 성공이었다. 질량-에너지 변환 효율은 99.99%였다. 질량이 거의 완벽하게 에너지로 변환되는 것이다. 실험 성공의 주역은 단연 베르미 박사였다. 리만 기하학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변환 가속함수를 만들어낸 베르미 박사가 없었다면 질량-에너지 변환기는 만들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베르미 박사는 스웨덴 한림원에서 자신의 학문적 성과를 어떻게 평가할지 궁금해졌다.

“축하하오. 박사는 역시 천재요. 당신은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자로 기록될 거요.”

베르미 박사는 럼스펠 장군의 치사에 머쓱한 기분이 들었다. 연구의 진행속도에 불만을 가져 항상 연구팀을 힐난하던 장군이었다. 연구원들에게 ‘세금을 갉아먹고 사는 벌레들’이라는 모욕적인 발언도 서슴지 않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갑자기 자신을 영웅처럼 떠받들어주니 베르미 박사는 어리둥절한 기분이 들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제 시작일 뿐이죠. 나노로봇들이 여러 번의 변환과정을 견딜 수 있는 내구성이 있는지 검증되지 않았어요. 그리고 플라즈마의 양이 적당한지도 알아봐야 되고..........”
“그만! 실험은 이제 충분히 했소! 무기의 성능이 입증됐으니 이제 그 한국인을 작전에 투입해야겠소!”
“작전에 투입한다고요? 너무 이릅니다. 루시는 준비가 안 됐어요.”
“박사, 지난주에 관타나모 수용소에 갇혀 있는 알 카에다 조직원한테서 아주 중요한 정보를 얻었소.”

장군은 허리를 굽혀 박사의 귀에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베르미 박사의 눈이 커졌다.

폭발실험은 성공적이었지만 루시는 조금 울적한 상태였다. 알라모고르도(Alamogordo)의 인근 사막을 초토화시켰음에도 몸무게는 조금도 줄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의무실로 찾아온 베르미 박사를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박사는 간호사로부터 루시의 상태를 전해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 기분은 좀 어때요? 간호사 말이 루시의 건강상태가 아주 좋다는 군요.”
“별로요. 살이 하나도 안 빠졌어요.”
“안 빠진 게 아니라 체중이 아주 미세하게 줄어서 루시가 알아채지 못한 것뿐입니다. 우리 연구소에서 개발한 변환기는 효율이 좋아서 작은 질량에서 큰 에너지를 뽑아낼 수 있어요.”
“하지만 분명히 제가 날씬해질 수 있을 거라고 말씀하셨잖아요. 아인슈타인이 제가 날씬해질 수 있다는 걸 증명했다고 하셨잖아요!”

베르미 박사는 루시의 태도가 너무 공격적이어서 자기도 모르게 멈칫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물론 루시는 날씬해질 수 있어요. 이번에는 그냥 테스트를 해본 거지만, 실전에서는 확실하게 살이 빠질 겁니다. 그럼요, 루시는 차세대 전략 핵무기거든요. 실전에는 테스트보다 백배, 천배 되는 에너지를 쓰게 되요.”
“그게 언제인데요? 도대체 언제에요?”
“앞으로 삼일 후.”
“정말이에요”

루시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베르미 박사는 이 여자가 전쟁광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먼저 럼스펠 장군을 만나봐야 해요. 연구는 내 분야이지만, 전쟁은 럼스펠 장군의 몫이니까.”

아흐마르는 테러리스트들의 소굴이라는 럼스펠 장군의 이야기와는 달리 소박하고 조용한 도시였다. 노인들은 카페에 앉아 물 담배를 피우고 아이들은 길거리에서 축구공을 가지고 놀았다. 차도에는 차가 별로 없었고 건물은 모두 나지막한 단층건물이었다. 가끔 젊고 건장한 남자들이 눈에 뜨이기는 했지만 무기를 든 전사들은 아니었다. 여자들은 대부분 차도르를 뒤집어썼고 바쁘게 걸어 다녔다. 사막 한 가운데 자리 잡은 오아시스 도시답게 태양은 무척 뜨겁고 공기는 건조했다.

루시는 차도르 때문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녀의 몸을 가리고 있는 이 거추장스럽고 이상한 옷을 당장 벗어버리고 연구소로 돌아가 차가운 물로 샤워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럼스펠 장군은 다음 지시가 있을 때까지 카페에 가만히 앉아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참아야 했다. 날씬해지기 위해서는.

“장군님, 더워서 죽을 것 같아요. 이 차도르 좀 벗으면 안 될까요?”
“안 돼! 넌 외모가 그쪽 사람들하고 다르단 말이야. 내 부하들이 안전한 곳까지 대피할 때까지 기다려.”
“여기도 뚱뚱한 사람은 많은 걸요.”
“바보! 아흐마르는 외국인들이 별로 없는 도시란 말이야. 동양인 여자가 카페에 앉아 있으면 당연히 주목을 받게 돼.”

루시는 땀이 자꾸 흘러들어와 눈을 깜빡거렸다. 자신의 입에서 내뿜는 열기가 다시 얼굴로 돌아와 죽을 지경이었다. 피로와 더위로 의식이 점차 혼미해지고 있었다.

루시는 바다 한 가운데서 수영을 즐기고 있었다. 그녀는 군살 없는 팔을 앞으로 시원하게 내밀었다. 잘록한 허리는 유연하게 요동치며 물살을 가르고, 길고 멋진 다리가 물보라를 만들며 루시의 몸을 앞으로 전진시켰다. 루시는 자신의 아름다운 육체에 만족하며 누군가 자신의 몸을 봐주기를 기대했다. 그래, 아마 다들 보고 있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 날씬해졌다는 데 다들 놀라고 있겠지. 루시는 입안으로 들어온 바닷물에서 역한 비린내가 나서 토할 뻔 했다. 바닷물이 점차 붉은 빛을 띠고 있었다. 루시는 끈적끈적한 피바다 속에서 팔다리를 허우적거렸다. 노인과 아이들의 시체가 루시의 곁에서 둥둥 떠다녔다.

“루시!”

그녀는 리시버에서 들려오는 럼스펠 장군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장군님.”
“루시! 왜 응답하지 않았나! 상황을 보고하라!”
“아무 일 없어요. 잠깐 잠들었나 봐요.”
“대원들이 모두 안전지대로 빠져나갔다. 변환준비를 하라!”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루시가 특별히 할 일은 없다. 자리에서 일어나 팔 다리를 쭉 펼치고 있으면 된다. 차도르 속에서 플라즈마 불빛이 새어나오자 물 담배를 피던 노인들이 겁을 먹고 알라신께 기도를 올렸다. 베르미 박사가 럼스펠 장군에게 암호키를 건넸다. 장군은 시거를 문 채 스위치를 올렸다. 폭발 직전에 루시는 축구공을 차올리는 잘생긴 소년의 얼굴을 보았다.

아흐마르 시내 중심부에서 일어난 원인불명의 폭발은 시내 중심부에 있는 모든 인간과 건물을 흔적도 없이 증발시켜버렸다. 열과 폭풍은 아흐마르 시 전체를 휩쓸었고, 1만 명 이상이 숨지고 7만 명이 화상을 입었으며 폭발 시의 섬광을 본 9만 명이 장님이 됐다. 폭발한 지점과 아주 가까운 곳에서 동양인 여성 생존자가 발견됐으나 갑자기 나타난 적십자 헬기에 구조되었고, 이 헬기는 시 외곽에 있는 수많은 부상자들을 외면하고 곧바로 북쪽을 향해 사라졌다. 알-자지라 방송은 이스라엘군의 테러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했으나 증거가 없었다. 군사전문가들은 이번에 사용된 무기가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방식의 폭발물이라고 주장했고, 외계인 공격설, 알 카에다 내분설, 하나님의 이슬람교도 징벌설 등 다양한 음모론이 제기됐다. 미국 대통령은 아흐마르에서 일어난 불행한 사태에 애도를 표하고 적극적인 구호지원을 약속했다.

간호사는 베르미 박사에게 루시가 극도의 히스테리 증상을 보이고 있다고 보고했다. 거식과 폭식을 번갈아가면서 하고 간호사들에게 공격적인 태도를 보일 뿐 아니라 혼자 있을 때는 소리 내어 울거나 물건을 집어던지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베르미 박사는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아직 감수성이 예민한 나이였다. 그녀 때문에 무고한 생명이 무수히 희생되었으니 정신적 충격을 감당하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전쟁이란 강인한 남자들도 미치게 만드는 무서운 것이다. 베르미 박사는 간호사의 충고대로 저녁을 먹은 후에 그녀의 숙소를 찾아갔다. 루시는 눈동자가 빨갛게 충혈 되어 있었다.

“루시, 군사작전에는 항상 불가피한 희생이 따릅니다. 루시가 받은 마음의 상처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의 희생덕분에 더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했다고도 할 수 있어요. 죄책감을 떨쳐 내세요. 루시는 옳은 일을 한 겁니다.”

베르미 박사는 최대한 자상하고 친절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아버지의 듬직함과 어머니의 자상함이 담겨있는 목소리는 어떤 것일까를 생각하면서. 하지만 루시의 반응은 의외였다.

“살이 안 빠졌어요.”
“뭐라고?”
“살이 안 빠졌다고요! 단 1파운드도 안 빠졌단 말이에요! 실전에 투입되면 날씬해질 거라고 했잖아요!”

베르미 박사는 지금 그녀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 죄책감이 아니라 좌절과 분노라는 것을 깨달았다.

“살이 안 빠졌다는 건 정확한 표현이 아닙니다. 루시가 만족할 만큼 빠지지 않았다는 거지요.”
“또 그 소리에요? 도대체 언제까지 그런 거짓말을 하실 건가요?”
“루시, 난 거짓말을 한 적이 없어요. 아흐마르 도시를 날려버린 그 에너지는 루시의 몸무게에서 나온 겁니다.”
“어떻게 저를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 수가 있어요? 박사님은 실험에 참가하면 금방 날씬해질 것처럼 말씀하셨잖아요. 전 희망을 가졌단 말이에요. 전 박사님을 믿었단 말이에요. 박사님은 저를 속였어요! 당장 나가요!”

베르미 박사의 등 뒤로 방문이 쾅 하고 닫혔다. 그는 혼자서 조용히 중얼거렸다.

“난 루시를 속이지 않았어요. 단지 조금 과장했을 뿐인데.............”

럼스펠 장군은 담배 연기를 허공으로 뿜어 올렸다. 그의 주름진 얼굴이 냉소를 지어보였다.

“그래서? 그 한국인 뚱보가 불만을 품었단 말이지?”
“네. 사실 우리가 그녀를 선택한 것은 비만여성의 피하지방이 에너지원으로 쓰기에 가장 적합하기 때문입니다. 나노로봇이 질량-에너지변환을 하기에 가장 용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지요. 날씬해진다는 건 비만여성들을 유혹하기 위한 멘트였어요.”
“하지만 질량이 에너지로 변환되는 것은 사실이지 않소?”
“폭발을 하고 나면 살이 빠지는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너무나 미세한 변화이기 때문에 루시가 원하는 감량효과는 얻기 힘듭니다.”
“그렇게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는데 살이 안 빠졌단 말이오?”
“아인슈타인의 등가방정식(E=mc²)에 따르면 에너지는 광속의 제곱에 비례합니다. 따라서 질량이 조금만 증가해도 에너지는 질량의 90조배가 넘는 크기로 증가하게 되죠. 질량 5g 정도면 아흐마르 시를 파괴할 수 있는 겁니다.”
“흠, 만일 그 한국인 뚱보 소녀를 제시카 알바나 린제이 로한처럼 만들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거요?”
“인류 문명은 여기서 끝나는 겁니다.”

럼스펠 장군은 쿨럭쿨럭 기침을 하면서 웃었다.

“박사, 너무 걱정 마시오. 지원병을 모집하기 위해 미 육군이 얼마나 거짓말을 많이 하는지 박사는 상상도 못할 거요. 홍보란 원래 그런 거요. 신경 쓰지 마시오.”
“루시가 저를 사기죄로 고소할 지도 모릅니다.”
“난 법무관들을 많이 알고 지냈지. 덕분에 유능한 변호사들과도 줄이 닿는다오. 혹시 고소를 당하면 육군에서 소송비용을 대겠소.”
“아, 그렇게 해주신다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베르미 박사는 럼스펠 장군에게 품었던 반감이 급속하게 사그라지고 있었다. ‘알고 보니 의리도 있고 썩 괜찮은 남자’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다음날 베르미 박사는 두 가지의 끔찍한 보고를 한꺼번에 받았다. 간호사는 짜증이 나는 얼굴로 루시가 말도 없이 숙소에서 사라졌으며, 아무래도 연구소 밖으로 빠져나간 것 같다고 말했다. 베르미 박사의 수석 조수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는 암호 키 상자를 통째로 도둑맞았다고 보고했다. 베르미 박사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자신의 방에 있는 개인금고로 달려갔다. 그는 금고문이 열려 있으며, 그 안에 있어야 할 컨트롤 박스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았다.

연구원들과 군 관계자들이 대책회의에서 지적한 사고의 원인은 너무나도 안이한 보안시스템이었다. 럼스펠 장군은 베르미 박사의 연구가 국가안보상 무척 중요하고 위험한 것이었지만 군사스파이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민간연구로 위장하여 진행했으며, 특별한 보안을 요청하지도 않았다고 해명했다. 럼스펠 장군의 군내 정적들은 이때다 싶어 벌떼처럼 그를 공격했다. 무용한 책임 공방을 참다못해 베르미 박사는 이 번 사태의 심각성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루시가 가져간 암호 키 상자에는 컨트롤 박스의 안전장치를 해제할 수 있는 궁극의 암호가 들어 있습니다.”
“컨트롤 박스의 안전장치를 해제한다는 게 무얼 뜻하는 거요?”
“에너지로 변환시키는 질량의 한계를 없애버린다는 뜻이죠.”

럼스펠 박사가 시거를 질겅질겅 씹으며 덧붙였다.

“박사의 말은, 그 한국인 뚱보 년을 제시카 알바처럼 만들 수 있다는 말이오.”

그녀는 지금 자신이 다니던 중학교 운동장 한 복판에 서 있었다. 그녀가 사라지고 분명 연구소가 발칵 뒤집어졌을 텐데 이상하게도 그녀는 너무나 쉽게 이곳까지 왔다. 버스를 탈 때도, 공항에서 티켓을 발권할 때도, 한국에서 입국심사를 할 때도 아무도 그녀를 제지하지 않았다. 이렇게 엄청난 계획을 가슴 속에 품고 있는 데도 말이다.

저녁 아홉 시가 다 되어가지만 교실에서는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야간자율학습은 변함없이 계속되고 있었다. 컴컴한 운동장에는 인적이 없어 적막감이 감돌았다. 그녀는 비장한 얼굴로 옷을 벗고 있었다. 쌀자루 같은 셔츠와 헐렁한 바지를 운동장 흙바닥에 내려놓자 그녀의 비둔한 몸이 드러났다. 어둠 속에서 검은색 변환기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를 멀리서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가 이 학교를 폭심(爆心)으로 선택한 이유는 살아오면서 가장 강렬한 수치심을 느꼈던 장소이기 때문이었다. 신체검사를 할 때 체중계가 고장 나니 올라가지 말라고 면박을 주던 선생님과 배를 잡고 웃는 급우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뚱보라고 놀리고 괴롭혔던 남자애들과 창피하다고 그녀와 어울리지 않았던 또래 소녀들과 살 빼라고 밥을 많이 주지 않았던 영양사가 생각났다. 체육시간에 숨을 헐떡대면서 뒤로 쳐지는 자신을 윽박지르는 체육교사의 고함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 했다. 그녀는 한 손에 컨트롤 박스를 쥐고, 한 손에 암호 키를 쥐었다. 엄지로 여섯 자리 암호를 입력했다. 디스플레이 화면에 질량을 입력하라는 안내문이 떴다.

루시는 자신의 몸무게에서 린제이 로한의 몸무게를 뺀 숫자를 넣었다.

그녀에게 굴욕감을 안겨주었던 중학교는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는 것처럼 짧은 시간에 빛과 함께 사라졌다. 폭심을 중심으로 종로구 전체와 성북구, 동대문구, 서대문구, 중구, 용산구, 마포구, 성동구, 광진구, 여의도, 동작구, 강남구, 송파구가 모두 증발해버렸다. 과천의 서울랜드과 경마장은 뜨거운 열과 폭풍에 잿더미로 변했다. 곧 이어 부산시민이 남김없이 타죽었고, 바다는 부글부글 끓어 죽은 물고기들이 배를 뒤집었다. 일본 열도가 불길에 뒤덮였고 도쿄타워가 엿가락처럼 녹아내렸다. 전자장펄스(EMP)가 태평양을 건너 로스알라모스 연구소의 전자장비들을 모조리 고장 냈다. 베르미 박사는 때가 왔음을 깨닫고 가슴에 성호(聖號)를 그었다. 하늘은 한꺼번에 날아오른 새떼로 뒤덮여 어두웠다.

모든 생명체가 멸절해가는 동안 루시는 플라즈마 배리어 속에서 새롭게 태어나고 있었다. 풍선처럼 부었던 얼굴이 광대뼈와 턱 선을 찾아가고, 출렁거리는 엉덩이가 단단하게 능금처럼 여물었다. 그저 민둥산처럼 거대하기만 하던 가슴은 아름다운 곡선과 볼륨으로 수렴하고 통나무처럼 직선적이던 허리는 아마존 강처럼 굽이쳐 흘렀다. 코끼리 다리처럼 육중하던 다리는 골프채처럼 날렵하고 곧게 뻗었다.

그녀의 육신은 아름다웠다.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아름다움이었다.

이제 그녀의 매력적인 몸매를 보고 가슴이 설렐 남자들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예쁜 라인을 질투할 여성들은 모두 사라졌지만, 그녀에게 돈과 명예를 안겨줄 미디어와 대중문화는 없어졌지만, 그녀는 만족하고 있었다. 지금 그녀에게 가슴은 육아를 위한 도구가 아니요, 잘록한 허리와 엉덩이는 생식력의 표시가 아니었다. 인류문명이 모두 사라진 지금 그녀의 육체는 신의 속성인 미(美) 그 자체였다.

타자를 모두 죽이고 얻어 낸 이기적인 몸매. 그 것이 바로 이데아였다.
김몽
댓글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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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sri 09.07.08 21:55 댓글 수정 삭제
    재밌는 소설이네요^^ 배명훈님 색채가 물씬...
    이데아가 소설의 마침표를 찍으며 강하게 등장하는데,
    너무 직접적인 단어선택이 아닌가 라는 느낌이... 미스코리아 같은 몸매와 이데아가 동격이 아니라면, 주인공이 원하는 몸매가 이데아를 대표하는 상징이 되기 힘든 측면도 있을 겁니다. 미의 에 관한 것인지 이데아에 관한 것인지 좀 모호한 면이 있어요.
    하지만 소설의 전개가 아주 좋으네요. 잘 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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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dc 09.07.08 23:04 댓글 수정 삭제
    그러고보니 아이큐점프에 연재되던 다이어트 고고란 만화도 비슷한 발상의 격투만화였지요. 주인공 이름이 방만해였던가(...) 다 즐겁게 읽었습니다만 도입에서 베르미 박사를 내놓으신 것이 이후에 별 의미를 이끌어내지 못한 것 같아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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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hantahunter 09.07.09 01:40 댓글 수정 삭제
    와 아주 화끈한 소설이군요! 좋은데요. 다만 나스리님 말씀처럼 '이데아'라는 단어가 마지막에 나올 것이라면 주제에 대한 보다 깊은 생각과 '교묘한' 설정이 필요할 거라고 봅니다. 이데아라는 단어는 엄청난 무게감을 가지는 단어예요. 세상의 모든 단어들이 무게를 가질 수 있다면 한 10억 톤은 나갈 겁니다. 거의 블랙홀 수준이지요^^ 물론 맥락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긴 하겠지만, 이데아가 가진 일반적인 포스가 그렇다는 말이지요. 이데아에는 진,선,미의 측면이 있어요. 이에 관해 생각해 보셨는지... 그래서 저는 작품을 쓰기 전에 백 번, 천 번 생각하려고 노력합니다. 환상문학이 10대 뿐 아니라, 소위 순수문학을 하시는 분들이나 30대 후반의 지식인계층까지 그 매력을 발산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이런 작은 노력들이 필요할 겁니다. 그래야 장르/순수라는 슬픈 또 하나의 38선이 무너지겠죠. 제가 다른 분에게 사적으로 플라톤의 국가론만 가지고도 평생을 쓸만한 주제거리가 나온다고 했는데, 벌써 '이데아'에 관한 소설이 나왔어요^^ 좋은 작품 잘 봤어요!
    (아, 그리고 자신의 작품이 영어로 번역되어 다른 나라에서도 읽힐 수 있다는 생각으로 글을 쓰면 도움이 되는데, 그럴 경우 "동양계 뚱보 소녀가 뭘 알겠소?"같은 대사들은 사람에 따라 오해를 일으키거나 불쾌감을 줄 수 있다는 점 덧붙힘니다. 그 캐릭터를 진짜 악한 사람으로 그리는 역사 소설이 아닐 경우 더욱 그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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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ozzz 09.07.09 02:32 댓글 수정 삭제
    재밌게 잘봤습니다. ^^
    아쉬웠던 점은 루시가 어떻게 남을 죽이고서라도 살을 빼고자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을까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 느낌이었다는 점입니다. 맨끝에 갑자기 미 라든지 이데라라는 말이 너무 거대해서요.
    그냥 지나가는 독자로서의 감상이었습니다. 좋은글 앞으로도 많이 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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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몽 09.07.09 09:39 댓글 수정 삭제
    관심 감사합니다 ^^ 작품에 대한 해석은 개인에 따라 다를 수 있고, 달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박식하신 분들이 많아서 감히 마지막 문장의 이데아에 대한 해석은 내리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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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sri 09.07.09 09:54 댓글 수정 삭제
    뭐 별 연관 없는 얘기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해석과 느낌은 구분되야 한다는 말이 떠오르네요.
    해석은 그리 쉬운 작업도 행위도 아닌데 말입니다.
    보는 사람이 모두 해석을 할 수 있다면, 그것도 모두 다른 해석을 할 수 있다면
    데리다가 좋아할 만한 일이긴 하겠지만 가능한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작품이 품고 있고, 있어야 하는 최초의 해석은 작가의 의도에서 나오는게 아닐까요?
    해석이 보는 이의 단순한 '느낌'이 아니라면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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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짜오크 09.07.09 11:13 댓글 수정 삭제
    '거제도의 용 두 마리'에 판타헌터님이 남긴 댓글에 이런 말이 있네요

    "좋은 해석이란 것은 그 작품의 의미를 그 작품의 하부 구조와의 연관성 속에서 해명하는 그런 정합적인 의미체계에 불과한 것이니까요. 평론가들의 그런 노력을 통해 그 작품으로 들어 가는 적어도 하나의 '안전한 출구'를 얻는 것일 뿐이니까요."

    판타헌터님은 '불과한 것이니까요'란 표현을 쓰셨는데, 어쨋든 굉장히 핵심을 찌르는 말이라고 봅니다. 작품의 의미를 그 작품의 하부구조와의 연관성 속에서 입증하는 행위를 해석행위라고 판타헌터님은 보고 계시는 것 같네요.
    그렇다는 건 곧 작가가 그 의미를 담기 위해 그 만한 하부구조를 설정해야 한다는 걸 말하겠네요.
    판타헌터 님이 백 번, 천 번을 생각하라, 고 말한 이유도 여기 있듯 싶네요.
    이상 느낌과 해석의 구분에 대한 진짜오크님의 주절주절이었습니다.
    김몽님의 소설은 분명 재미있고 위트 있는 소설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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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뫼비우스 09.07.11 14:00 댓글 수정 삭제
    다 제쳐놓고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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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이 09.07.11 19:02 댓글 수정 삭제
    댓글이 많이 달렸길래 무슨 내용일까 궁금해서 읽어봤는데, 무척 재밌네요. 순식간에 다 읽어버렸어요. 음, 근데 저렇게 갑자기 살을 빼면 살가죽이 축 늘어지지 않을까요? 전에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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