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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이반 길버트의 심장

2006.11.09 03:4511.09

이반 길버트의 심장

못 생기고 볼품없고 불만만 가득한 아내. 말썽을 피우는 것도 모자라 남의 물건을 훔치거나  사고치는 일이 매일인 아들. 세 명의 가족이 겨우 잘 수 있는 작은 집. 얼마 되지 않는 재산. 세 가족 입에 겨우 풀칠할 만큼의 곡식이 나오는 작은 밭. 한 마리의 늙은 암소. 농부 이반 길버트는 집으로 돌아오면서 자기가 가진 것을 곰곰이 생각해보자, 한심한 자신의 모습에 화가 났다.

"내가 살아오면서 그 동안 모으고 얻은 것이 이런 것들뿐이란 말인가."

이반 길버트는 얼마 전에 영주의 성에서 쫓겨난 참이었다. 그는 영주에게 빌린 돈과 곡식을 갚지 못하게 되자 조금이라도 자비를 얻고자 영주의 성을 방문했으나, 이반 길버트에게 돌아온 것은 자비가 아니라 경비병들의 몽둥이와 영주의 폭언과 모욕이었다. 영주는 1주일의 기한을 더 줄 터이니, 그때에도 갚지 못하면 그의 암소든 집이든 얼마 되지 않는 세간 살림이든 돈이 되는 것은 무조건 가져가리라 말했다. 애초에 어디에서든 다른 곳에서 돈을 빌릴 수 있었다면 악마에게서라도 빌려서 영주에게 갚았을 이반 길버트였다. 하지만 이반 길버트에게는 한 푼의 돈도 없었고, 영주에게는 조금의 자비도 없었다. 고민을 수없이 했으나 뾰족한 수가 나올 리가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던 이반 길버트가 리츠강의 다리를 지날 무렵이었다. 어디에선가 노랫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리츠강에는 늙은 요정이 있다네.
요정은 무엇이든 말하는 것을 들어준다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심장이 필요하다네.
팔딱팔딱 살아 숨 쉬는 심장이 필요하다네.
하지만 누구도 심장을 주지는 않는다네."

이반 길버트가 노랫소리가 들려온 강 둔덕을 바라보자 새빨간 챙이 긴 모자를 쓰고 덧댄 소가죽 옷을 두르고 헤어진 녹색 헝겊 바지를 입고 나막신을 신은 늙은 난쟁이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늙은 요정은 이반 길버트를 향해 말했다.

"이봐! 고민 많은 친구! 무슨 고민이든지 말하면 내가 다 들어주지! 자네의 심장만 준다면 말이야!"

가난하지만 어리석지는 않았던 이반 길버트는 요정을 향해 물었다.

"심장을 주면 죽고 말텐데 그래서야 소원이고 뭐고 없지 않나? 너에게 내 심장을 줄 수는 없어."

요정은 이반 길버트를 어리석다는 듯이 바라본 후, 혀를 차며 말했다.

"쯧쯧, 난 요정이라구. 절대로 네가 죽지는 않아. 단지 심장만 주면 된다니까. 그럼 돈이든 명예든 네가 바라는 것 한 가지를 들어주지."

이반 길버트는 그만 여기서 늙은 요정의 말에 넘어가고 말았다. 이반 길버트는 어떻게 해서든 영주에게 돈과 곡식을 갚아야 했던 것이다.

"죽지는 않더라도 심장을 빼내다니! 그런 짓을 하다간 아파서 죽을 거야. 그렇지만 않다면 너에게 심장을 줄 수 있을 텐데."

"하나도 아프지 않아. 내가 주는 이 열매를 먹은 다음에 입만 크게 벌리고 있으면 된다구. 그럼 난 손을 네 입 속으로 넣어서 하나도 아프지 않게 심장을 꺼낼 수 있다구."

"하나도 아프지 않은 것이 맞겠지? 그리고 심장을 주면 소원을 들어주는 것도 맞겠지?"

요정에게서 확답을 얻은 이반 길버트는 심장을 주기로 했다. 이반 길버트는 요정에게서 받은 작은 녹색 열매를 삼킨 후 입을 크게 벌렸다. 그러자 난쟁이가 화를 냈다.

"이봐! 네가 그렇게 서 있으면 키 작은 내가 어떻게 심장을 꺼낼 수 있겠어! 내 키에 맞게 좀 앉으란 말이야!"

이반 길버트가 강 둔덕에 앉아 입을 벌리자 요정은 오른손을 이반 길버트의 입에 집어넣었다. 잠시 뒤 요정의 손에서 이반 길버트의 살아 움직이는 심장이 잡혀 나왔다. 요정의 말대로 조금의 아픔도 없었다. 그리고 이반 길버트가 죽지도 않았다. 이반 길버트에게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자 이반 길버트는 요정에게 말했다.

"이제 내 소원을 들어줄 차례야."

"알고 있다고. 친구. 너무 성급하게 굴지 말라구. 소원은 여기에 말하도록 해."

늙은 요정은 작고 둥근 빨간 열매 하나를 이반 길버트에게 주었다.

"그 열매를 손에 쥔 채로 소원 1가지를 생각해서 삼키라구. 그럼 바로 소원이 이루어질 테니까."

이반 길버트는 늙은 요정에게서 받은 열매를 주머니에 넣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반 길버트의 아내는 성에 갔던 일을 물었고, 사실을 말하자 아내는 화를 내며 정말 암소나 집이나 밭이 넘어가는 일이 생긴다면 자기는 멀리 도망칠 것이니 이반 길버트 혼자 알아서 하라고 했다. 그녀의 입에서는 계속해서 가난한 이반 길버트의 아내가 된 것을 후회하고 자책하며 불만을 토로하는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조금 뒤 이반 길버트의 아들은 오늘도 어디에선가 사고를 쳐서 물레방앗간의 작은 아들과 싸움을 벌여 코뼈가 부러져서 돌아왔다. 아들을 치료하는 아내를 뒤로 하고, 이반 길버트는 허름하고 작은 집을 나섰다. 잠시 들려서 본 마구간의 암소는 늙어 움직일 기운조차 없다는 듯이 누워 있었다. 걸음을 재촉해 도착한 밭에는 곡식들이 있었으나 그것들은 가족들이 먹기에도 빠듯한 양이었다.

이반 길버트는 이런 모든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소원을 빌기 위해 고민했다. 혹시 누군가가 소원을 이루어주는 열매를 훔쳐갈 수도 있으므로 다른 이와 상의하지 않고 혼자서 가장 훌륭한 소원을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게 하룻밤이 지났다.

다음 날이 되자 이반 길버트는 자신에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항상 짜증나고 힘들었던 모든 것들이 아무렇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아내의 잔소리도 아들의 사고도 가난한 자신도 모두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것은 심장과 함께 이반 길버트의 마음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하루하루가 힘든 이반 길버트였기에 아무렇지도 않은 것들이 오히려 고맙게 느껴졌다. 그렇지만 이반 길버트가 가진 것이 없다는 사실은 변함없었고 며칠 뒤면 영주가 이반 길버트의 모든 것을 가지러 올 것이라는 사실도 그대로였다. 결국 이반 길버트는 오랜 고민 끝에 소원을 결정했다. 이반 길버트는 요정에게서 받은 붉은 열매를 손에 쥔 채 고민 끝에 결정한 소원을 말했다.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가진 사람이 되면 좋겠어."

그리고 열매를 꿀꺽 삼켰다. 그러나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여전히 집은 허름했으며 작았다. 서랍이나 마구간 구석에 돈이나 황금이 생기지도 않았다. 그러나 달라진 것이 분명히 있었다.

이반 길버트에게 낡고 작은 집은 더 이상은 작은 집이 아니었다. 작은 집은 세 명의 가족이 살 수 있는 포근한 보금자리가 되었고, 아내는 항상 가족을 걱정해주는 애정 어린 여인이 되었고, 말썽꾸러기 아들은 어려운 집안 환경에도 건강하게 자라는 귀여운 아들로 여겨졌다. 이반 길버트에게 더 이상 불만과 걱정과 같은 감정을 사라지고 행복으로 충만한 마음이 깃들었다. 요정이 이반 길버트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생각으로 인한 분노와 화도 없었다. 그러나 이반 길버트가 가난하다는 사실은 변함없었으므로, 결국 이반 길버트는 얼마 뒤 영주에게 집과 밭을 빼앗기고 말았다. 이반 길버트는 슬퍼하는 가족들을 사랑으로 감싸 안았다. 이반 길버트는 널리 수소문한 끝에 어떤 농장에 일을 해주는 조건으로 농장 옆의 낡은 오두막집으로 옮길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농장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항상 행복한 마음을 가진 이반 길버트에게 신의 축복이 내려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오직 시간이 문제였다. 그는 부지런했고, 자비로웠으며 지혜로웠다. 세월이 지나자 그는 농장에서 조금씩 재산을 늘려갔고, 그것들을 주위의 어려운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에 감동받은 농장주인은 그의 농장 일부를 이반 길버트에게 나누어 주었고, 이반 길버트는 농장을 잘 가꾸어 이반 길버트의 농장의 나무와 열매는 어느 곳의 것보다도 풍성하고 탐스러웠다. 아내는 아름답고 자애로운 여인이 되었고, 아들은 남을 배려하며 건강한 몸을 가진 청년이 되었다. 이렇듯 행복한 이반 길버트였으나 가끔씩 고민에 빠지곤 했는데, 그것은 오랜 옛날의 난쟁이 요정이 왜 자신에게 거짓말을 했는가에 대한 궁금함 때문이었다.

어느 날, 이반 길버트는 농장의 과일들을 시장에 내다 팔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리츠강의 다리를 건너다가 언젠가 들은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

"리츠강에는 늙은 요정이 있다네.
요정은 무엇이든 말하는 것을 들어준다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심장이 필요하다네.
팔딱팔딱 살아 숨 쉬는 심장이 필요하다네.
하지만 누구도 심장을 주지는 않는다네."

이반 길버트는 늙은 난쟁이 요정을 알아보고 인사를 했다. 그러자 요정도 인사를 했다.

"예전에 나에게 심장을 준 그 가난한 농부 아닌가! 그래, 무슨 소원을 빌어서 어떻게 되었길래 그리 행복한 얼굴을 가지고 있나?"

이반 길버트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에 대해서는 자네에게 유감이네. 소원을 빌었지만 이루어지지 않았거든. 허나 그에 대해서 화내거나 하지는 않네. 나는 지금 충분히 행복하니까 말이야."

요정이 큰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럴 리가 있나! 그 열매는 무엇이든지 이루어주는 열매란 말이야! 절대로 그럴 리는 없어! 대체 무슨 소원을 빌었나?"

"단지 남보다 많이 가진 사람이 되기를 빌었다네. 하지만 어디에도 돈 자루나 곡식 포대가 생기진 않더군."

"그럴 리가 있나! 잠깐, 잠깐. 남보다 더 많이 가지기를 빌었다고? 잠깐 여기 와보게."

이반 길버트는 요정에게 다가가 몸을 숙였다. 그러자 요정이 이반 길버트의 가슴에 귀를 대었다.

"그랬군! 그랬던 것이군! 이보게, 자네 소원은 진작 이루어져 있지 않나!"

이반 길버트는 어리둥절하여 요정에게 물었다.

"내 소원이 언제 어떻게 이루어졌다는 것인가?"

요정이 웃으며 대답했다.

"껄껄, 자네 심장이 2개란 말일세! 심장이 2개! 그야말로 남보다 더 가진 사람이 되었지 뭔가! "

이반 길버트는 가슴에 손을 대었다. 그러자 큰 심장 고동 속에 부드럽고 따뜻하게 느껴지는 또 하나의 고동이 있었다.

"요정은 장난은 쳐도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네. 어쨌든 지금은 무척 행복한 듯 보이니, 어떤가? 자네 심장을 하나 더 나에게 주지 않겠나? 소원을 이루어주는 열매를 주겠네. 그럼 더 행복해지지 않겠나?"

이반 길버트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더 이상 바랄 게 없다네. 지금 이대로 나는 행복하다네. 오직 바라는 것은 이 행복이 계속되었으면 하는 것뿐이라네."

"그런가? 어쩔 수 없군. 그럼 잘 가시게나."

요정은 다시 노래를 부르며 리츠강의 둔덕 풀숲으로 사라졌다. 이반 길버트는 요정과 헤어진 후 석양을 앞에 두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재촉했다. 노래를 부르며 즐겁게 발을 떼며 집으로 향하는 이반 길버트는 세상 누구보다도 심장을 더 가진, 누구보다도 행복한 사람이었다. 이반 길버트의 소원은 오랜 옛날 이미 이루어져 있었던 것이다.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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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개 06.11.15 12:33 댓글 수정 삭제
    잘 읽었습니다. 세계 명작 동화? 우화? 신화?그런데에 있는 이야기처럼 사실감(?) 있게 몰입 되어서 읽은 것 같습니다. 마지막에 결정적 부분을 좀더 다르게 표현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요.(심장이 2개라는 표현에 축구 선수가 생각나고 그래서 말이죠. 좀더 있어 보이게 묘사하면 더 좋게 다가왔을 듯한 개인적인 생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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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쿠키 06.11.15 16:17 댓글 수정 삭제
    조언 감사합니다.날개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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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 전 굳이 좀더 있어보이게 묘사할 필요는 못 느끼고, 그냥 이렇게 소박하게 나가는 게 좋습니다만^^;;(독자의 의견도 다양한게죠).

    간만에 읽는 따뜻한 동화, 잘 읽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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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ustJun 06.11.27 07:47 댓글 수정 삭제
    동화 멋있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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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예 06.11.30 22:18 댓글 수정 삭제
    톨스토이식 동화를 읽는 기분이었습니다.^^ 재밌게 읽었는데요, 조금 햇갈렸던 부분이 있었습니다. 이반의 생활이 풍족해지는 과정이, 그의 내적인 변화 때문이 아니라, 부자가 되고 싶다는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읽혔어요. 아름다운 마음씨 때문에 영주가 영토를 나누어주고 모든 일이 술술 풀리는 과정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에 그런 것 같네요. 물질적 변화보단 주인공의 바뀐 시선에 좀 더 중심을 두어야 작품의 의미가 더 잘 전달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건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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