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지구가 진다.

2006.02.23 00:2802.23

- 사랑해.
나는 말했어.
(- 나도.)
너는 대답했어.
하지만 너라면, 그렇게 대답하지는 않았을 텐데.

 바깥은 무척 어두워. 초등학교 적 바라보았던 선생님의 등짝보다도 더 넓고, 중학교 적 바라보았던 교과서보다도 더 깊고, 고등학교 적 바라보았던 칠판보다도 더 짙어. 게다가, 이곳의 하늘은 아프리카의 정글에 숨어 금방이라도 튀어 나올 채비를 갖춘 사자와 치타들로 가득 차있어. 모두들 숨어서 그 번뜩이는 두 눈만 쏙 내놓고 있지. 오늘은 누구를 잡아먹을까? 오늘은 누가 잡아먹힐까? 깊은 어둠 속에서 오늘도 누군가가 죽어나가겠지. 그것이 산소통 가스 누출로 인한 질식사든지, 혹은 우주복에 난 작은 구멍으로 인한 압사라든지. 나머지들은, 그래 나머지들은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것을 감사히 여기며 살아가겠지. 그다지 새로운 일은 아니야.

 사실 나는 우주복에 작은 구멍이 나 죽은 사람을 본 적이 있어. 우주 공간에는 공기가 없어서 대기압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거든. 금방이라도 뻥, 징그러운 폭발음이 들려올 것만 같은 적막, 새카만 공간에 끔찍하게 흩뿌려지는 살점. 그래, 인터넷 강의를 본다는 느낌과 비슷할지도 몰라. 어쩌면 좋았을까? 그의 몸이 가마 안에 넣어진 빵 반죽처럼 부풀어 오르는 순간에도 나는 어쩌면 좋을까를 연발하고 있었어. 참, 바보 같은 일이지. 요즘은, 그 여자 덕분에 온 몸이 갈기갈기 찢겨져나가며 죽는 사람은 없어. 그렇다고 죽어가는 사람의 수가 줄어든 것은 아니지만.

 며칠 전부터 너의 단말기가 오작동하기 시작했어. 다행히 아직까지 내 이름은 제대로 발음하고 있지만, 가끔 멈추어버리는 얼굴 표정과 너와는 어울리지 않는 대답이 고장 났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어. 어째서 인류의 과학기술은 오류를 포함하고 있는 것일까? 액정 위에서 멀쩡하게 웃고 있다가 별안간 우는 표정으로 바뀌는 네 얼굴, 인류가 뭐야? 하고 해맑은 질문을 던지는 기계음 섞인 네 목소리. 오랜만에 하늘을 바라볼 용기가 생길 정도로 나는 당황했어. 여전히 검은 바탕에 수놓아진 맹수의 눈초리는 변함이 없겠지.

 나는 그들의 첫 고객이었어. TV며 라디오며 DMB며 요란하게 광고를 때릴 적에는 마치 인류가 만들어낸 모든 기업들 중에서 가장 인기를 끌고 있는 것처럼 굴더니. 속았다면 속은 것이겠지만 어쩔 수가 없었어. 당시 너를 반쯤 살릴 수 있는 기술(전문가들은 그렇게 부르더군.)을 가진 기업은 유일하게도 그들뿐이었으니까. 그들도 나를 반겼어. 물론 순수한 의도가 아니라 그 새로운 기술을 처음으로 시험해볼 수 있다는, 그리고 그것으로 돈을 벌 수 있다는 상업적인 기쁨이었지만. 물론 그들에게 나는 조금 부담스러운 고객이었겠지. 하지만 상관없었어. 살릴 수 있다면 좋고 안 되면 그뿐이었으니까. 억울했지만, 어쩔 수 없었어. 인류는 죽음으로 갈라지는 운명을 타고났으니까.

 그들은 너를 통해 문제점을 발견한 모양이야. 그렇지 않고서야, 상용화 이후 그렇게 많은 고객의 요청을 받고도 단 한 건의 소송에도 휘말려들지 않을 수는 없었을 테니까. 막대한 인기와 돈을 노리고 소송을 건 이들도 적지 않았지만, 그들은 모두 다 이겨냈어. 뒤로 얼마나 많은 돈이 오고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그들은 전 지구 고객 만족도 1위의 타이틀을 거머쥐고 놓치지 않는 데에 성공했어. 단 한건, 나를 만족시키지는 못했지만. 사실 그들에게 가는 동안 나는 네가 반쯤 살아날 확률을 계산해보았어. 반이 조금 안되더군. 창문 너머로 스며드는 매캐한 지구의 공기와 샴페인 마개를 틀어막은 듯 막히는 교통에 방해를 받아 계산이 흐트러졌는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결과는 그렇게 나왔어. 어떠한 결과가 나와도 좋아, 하고 나는 결심했어. 반의 반, 아니 그 반의 반 정도만 살아나더라도 네가 살아났다는 사실을 인정하겠다고.

 이 근처에서는 아직도 공사가 진행 중이야. 인류가 달에 발을 디딘 지는 얼마 되지 않았거든. 지구가 코앞에 보이는데도 여전히 이곳의 물 값과 산소 값은 내릴 생각을 안 해. 아마도 저쪽의 공사장은 물 공장을 만들기 위한 것이겠지. 인류의 과학기술은 급속도로 발전했지만 그만큼 많은 오류를 남겼어. 인류가 남긴 가장 강력한 오류 중의 하나인 네 단말기는 전원이 꺼진 채로 방구석 탁자 위에 엎어져있어. 전원을 켜면 너는 웃으며 인사하겠지. 정작 내가 기억하는 그 웃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나는 너를 반쯤 닮은 낯선 기계와 대화하겠지.

- 선생, 이것이 우리의 최선입니다. 죄송합니다.
 그들은 그렇게 말하면서 까만색의 작은 TV 리모콘처럼 생긴 기계를 내 손에 쥐여줬어. 이게 뭡니까, 하고 내가 채 입을 떼기도 전에 그들이 변명을 쏟아내기 시작했어. 기억 추출 중 발생한 오류로 네 기억의 일 퍼센트 가량이 삭제되었다고, 그렇지만 그 기억이 어느 정도 중요한 것인지를 몰라 일단은 나머지로 너를 프로그래밍 했다고, 액정 위의 애니메이션은 내가 보내준 수십 장의 사진을 합성해 웃는 표정, 우는 표정, 화난 표정, 그리고 몇 가지를 만들어냈다고, 얼마나 예전의 너와 같을지는 모르지만 만족하셨으면 좋겠다고. 얼마나 가슴이 아프시겠습니까, 따위의 예의 바른 인사를 건네면서 그들은 사라졌어. 그저 잠에 취해 대문을 열어 주었던 나는 우두커니 선 채로 남겨두고.

 인류는 외로워. 인류의 역사는 외로움의 역사야. 인류는 외로워서 벽화를 그리고, 노래를 불렀어. 인류는 외로워서 공룡을 발명해냈고, 외계인을 생각해냈어. 인류는 외로워서 신을 떠올렸고, 애완동물을 쓰다듬었어. 인류는 쉴 새 없이 외롭고 또 외로워. 그 어떤 발명과 발견으로도 인류는 외로움을 떨쳐내지 못했어. 무엇 때문일까? 그것을 알았더라면 인류는 더 이상 살아남아있을 필요가 없겠지. 모두들 외롭지 않게 해주는 그것을 향해 달려들 거야. 네가 죽은 후의 몇 년 동안 인류는 겨우 달에 발을 뻗쳤을 뿐이야, 암스트롱이 남겼다는 발자국은 흔적도 없었지만. 인류는 화성으로도 명왕성으로도, 나아가 전 은하로도 뻗어나갈 거야. 그곳에도 외계인이 없다면, 인류는 전우주적으로 외로워지겠지.

 소파에 앉아 단말기를 천천히, 그리고 자세히 살펴보았어. 겉은 검은 광택이 나는 플라스틱으로 되어있었고, 안에는 무엇이 들었는지 꽤나 묵직했어. 꼭 액정이 달린 TV 리모콘 같았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끔 툭 튀어나온 전원 버튼을 누르자 액정에 무엇인가가 그려지기 시작했어. 작은 점들이 튀어나오고 합쳐지는 그 순간, 내 심장은 얼마나 빠르게 뛰었던 것일까. 이윽고 네 얼굴이 완성되었어. 검고 둥글게 감싸 내려오다 짧게 끊긴 머리칼, 깊고 맑은 갈빛 눈망울. 나는 처음으로 좌절을 맛보았어. 치직 하고 미처 네 목소리가 튀어나오기도 전에 나는 전원을 끄고 소파 팔걸이에 단말기를 집어던지고서는 엎드려 울기 시작했어.
 단말기 속 네 입술은 여전히 시체처럼 창백한 보랏빛이었어.

 방금 전까지도 맑고 둥글게 떠 있었던 지구가 이제는 벌써 반쯤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어. 멀리서보면 지구도 한 마리 맹수의 눈알처럼 차갑고 날카롭게 빛나겠지. 어느 별에 사는지 모르는 외계인은 그 눈빛을 보고 두려움에 떨고 있을 거야, 저 별의 외계인은 얼마나 난폭할까 라고 자기네들끼리 속닥거리며. 맞아, 인류는 난폭해. 인류는 지구를 집어삼키고 다른 행성을 넘보고 있어. 우주와의 전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인류의 처절한 몸부림이 시작되었어. 이제 인류는 우주를 지배하거나, 멸망하겠지. 인류와 그 무엇의 대결은 언제나 승리 혹은 패배로 끝났으니까. 인류의 방법이 잘못된 것일까? 나는 모르겠어. 하지만 그 결투의 끝에서 매번 승자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지독한 외로움뿐이었다는 것은 잘 알아. 전 우주를 정복하게 된다면, 인류는 외롭지 않게 될 수 있을까?

 단말기 속 네 얼굴은 액정이 좁아서인지 어색하게 느껴졌어. 쇳소리가 섞인 목소리 또한 날카로운 파열음으로 귓바퀴를 울렸어. 그렇다고 그들의 작품이 완전한 실패작이었다는 이야기는 아니야. 그들은 네 얼굴을 합성해냈고 네 정신을 재조합해냈어. 인류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업적이자 신우주시대 기술 승리의 쾌거야. 너는 기본적인 네 신상정보를 줄줄이 꿰고 있었고(- 삼십사, 이십이, 삼십사. 어때?), 또한 몇 마디 불평 남기는 것을 잊지 않았으며(- 뭐야, 싱겁게.), 전원을 켜놓고 한참을 있으면 먼저 말도 꺼낼 줄도 알았어(- 자냐?). 하지만,
- 넌 직업이 뭐야?
(- 나? 글쎄, 학교 졸업하고는 작가도 해봤다가……. 요즘은 놀고 있어.)
 나는 네 사라진 일 퍼센트의 기억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어.

 지금 달은 무척 혼란스러워. 이주민들도 많고, 공사판도 한창이니까. 아직은 돔 내부에서만 살아가는 형태이지만 이제 저 물 공장이 완성되고 몇 년 후면 돔 뚜껑을 열고 바깥에서도 살 수 있다고 해. 달의 땅값은 이미 천정부지로 치솟아 올랐고, 며칠 전부터는 마약 중독자로 보이는 불량배들이 떨리는 손끝으로 저기다, 저기다 하는 모습도 보였어. 화물칸에 숨어서 이리로 왔겠지. 쉬운 일은 아니었을 거야. 이제 곧 월식이 일어나. 달은 지구의 그림자에 가려질 테고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곳은 무척 캄캄해지겠지. 우주 맹수의 대 침략이 시작되는 거야. 저항할 힘이 없는 달의 인류는 바닥에 엎드려 고개를 박은 채로 그 습격이 어서 지나가기만을, 최소한의 희생자를 남기기만을 빌겠지.

 너는 우주비행사였어. 단말기가 액정을 통해 내보내는 얼굴의 웃음보다 너는 천 배쯤 더 깊고 만 배쯤 더 맑게 웃으며 말했었어. 우주비행사가 되겠다고, 지구 바깥으로 가보고 싶다고. 다음 해 너는 국제우주항공국인가 하는 곳에 합격했다는 증서를 나에게 보여주었고 그 다음 해에는 네가 뉴스 리포터와 인터뷰한 모습이 전 세계로 중계되었어. 몇 달 후 너는 불꽃의 형태를 한 채 지구 바깥으로 나아갔고, 한 달 후 다시 한번 뉴스에 나왔어. ‘어처구니없는 사고’의 제목을 단 뉴스는 네 소식을 뭐랄까, 지나치게 자세히 전해주었어. 우주복에 구멍이 나 있었다고, 대기압이 없는 우주에서 너의 몸이 부풀어 올라 터져나갔다고. 후드득하고 지구로 쏟아지는 네 살점과 핏방울이 떠올랐어. 나는 숨을 깊이 들이켰어.

 그들은 일부러 그 기억을 지웠는지도 몰라. 인류에게는, 그리고 나에게는 잊고 싶은 상처이고 지우고 싶은 과거이니까. 실수로든 고의로든, 인류는 동료의 죽음과 그로 인해 나타난 외로움을 잊어내고 살아가는 데에 익숙해졌어. 인류의 그 방법이 옳은 것일까? 나는 동의할 수 없어. 너의 죽음은 몇몇 대형 우주복 회사의 부도와 우주복 안전성 테스트로 변형된 채 인류의 역사 속에 영원히 남겠지. 죽음은 그런 식으로 처리되어서는 안돼. 아직 닥쳐오지도 않은 죽음을 걱정하느라 살아있는 인류는 평생을 낭비하지. 죽음은 이미 죽은 인류를 위해 존재하는 거야. 죽음의 원인을 없앤다고 인류가 죽지 않는 것은 아니야.

 이제 막 월식이 시작되려 하고 있어. 보는 눈이 터져나가도록 밝고 환한 태양이 구석부터 조금씩 잡아먹혀가. 지구가 만들어낸 깊은 그림자가 태양의 빈자리를 메워나가지. 삽으로 조금씩 긁어내듯 태양이 점차로 사라져가고 있어. 이 순간만큼은 지구가 거대한 한 마리의 사자 같아. 태양계를 지배하는 정글의 왕. 하지만, 지구의 빛도 점점 스러져가고 있어. 구석에 자그마하게 굽은 칼날 마냥 빛나는 푸른 지구의 빛. 태양이 그 마지막 날카로운 빛마저 잡아먹히는 순간에는 지구도 그 빛을 잃겠지. 어쩌면 좋을까, 지구가 지고 있어.
 지구가 지고 있어.

외계인-
댓글 3
  • No Profile
    배명훈 06.02.25 09:56 댓글 수정 삭제
    분위기가 중심 이야기나 좋았는데요, 다만 이야기를 구성하는 방식을 바꾸면 더 극적으로 만들 여지가 있을 것 같아요. 재미있는 이야기이고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의 묘미도 있는 건 맞지만, 중심 스토리가 마치 배경 설명인 것처럼 담담하게 이야기되고 있어서 마지막 임팩트를 주는 사건이 생략됐다는 인상이거든요.
    그녀가 죽는 장면을 지구가 지는 것보다 더 생생하게 쓰는 건 어땠을까요? 평가가 아니고 물음입니다.
  • No Profile
    외계인- 06.03.14 23:11 댓글 수정 삭제
    그렇군요; 확실히 재미없어보이긴 했습니다만 뭐가 잘못된 것인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관련 없는 이야기겠지만, 마로하 재미있었어요!!
  • No Profile
    moodern 06.03.25 23:24 댓글 수정 삭제
    음..좋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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