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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잎글/ 순간

2005.07.08 03:1407.08

  두려울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녀는 마지막 남은 담배를 집어들었다.
  죽음이 다가오고 있었다.

*
  
  네슈카의 사막은 본래 평판이 좋은 관광명소였다. 백여 년 전까지는 그러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어째서인지 그 누구도 명확히 알 수 없었던, 그러나 확실히 위력적이었던-혹은 그럴 만한-요소에 의해 그 행성은 언제부터인지-역사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싸움터로 변했다. 건너편 jg-2352 시스템의 네라처럼 외계인의 권리와 자유를 위한 싸움터는 아니었다. (현지인도 아니고 동족도 아닌 외계인을 위한 싸움이라니 멍청하지 않은가고 대부분의 우주인들이 생각하는 바람에, 그 투쟁은 의외로 초라한 규모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오만 광년 너머의 사사 왕성에서 벌어지는 전쟁처럼 왕권 수복을 위한 싸움도 아니었다. 그저, 네슈카의 모든 담배 산업에서 쏟아져나오는 이득을 독점하고 싶어하는 대기업과 토종 소규모 농업자들간에서 벌어진 싸움이었다. 적어도 시작은 그러했다.
  그러했다고 배웠다, 단하시는. 그러나 그러했다고 배운 지식과 현 상황은 도무지 조금도 어울리지 않았다. 단순히 상권 다툼이었다면 사태가 이렇게 되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네슈카인들은 거의 멸종 상태였으며 싸움은 이미 전쟁이 되어 있었고 과거 꽤나 기세등등했던 [네슈카 소규모 농업종사자 조합]의 규모는 줄어들 대로 줄어들어 다만 한 사람의 회원만이 남았을 따름이었다. 나머지는 전부 암살당했거나 교살당했거나 사살당했거나 총살당했거나 운좋게도 복상사를 당했거나 실종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담배를 재배하는 사람은 오로지 단하시 뿐이었다.
  단하시는 자신이 직접 관리하고 키워내고 수확한 담뱃잎을 직접 손질하고 종이에 말아 피웠다. 입에는 담배, 한 손에는 적의 추적망을 교란시키는데 효과적인 g-095 건, 다른 손에는 네비게이터. 그것이 그녀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었다, 대기업에서 쏟아내는 공격에서 피하거나 대응하기에는.
  그녀의 약혼자는 대기업표 안드로이드에 의해 목이 졸려 죽었다. 이미 오래 전 일이다. 그녀의 하나뿐인 혈육이자 두 살 아래 남동생은 붙잡혀가 세뇌당해, 이미 충직한 대기업인이 된 지 오래였다. 네슈카에서 그녀는 홀로 살아남아 있었는데 그간 대기업들이 죽인 네슈카인들의 유령이 암묵적으로 도와주는 이유에서인지 아니면 단순히 운이 좋아서인지, 십여 년이 지나도록 끈질기게 살아있을 수 있었다. 무기와 식량은 싸움이 있었던 자리에 되돌아가면 주워담을 수 있었고 무엇보다 아직 그녀 소유의 담배밭은 건재했다. 우주 상법 5323058667조 57565453456875685686항에 의거, 아무리 대기업이라도 그녀 소유의 밭을 건드릴 수는 없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녀가 그들의 직원을 죽인 바 있으므로) 그녀를 찾아내어 쏴죽이는 일뿐이었다. 적어도 그녀는 그들 소유의 담배밭을 훼손한 적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부지를 다른 행성-노동력이 풍족하고 인건비는 적게 드는-으로 옮긴 지 오래였으므로. 우주 최고법원의 최고판사가 함무라비의 열혈 빠돌이이라는 사실은 단하시와 대기업 양쪽에게 있어서 좋은 일이기도 했고 나쁜 일이기도 했다. 사실 대기업 입장에 있어서 이제는 별 가치도 없는 단하시의 담배 거래 권리를 넘겨받는 일은 상당한 손해였지만-그동안 쏟아부은 모든 군수 비용만 해도!-그래도 도중에서 물러설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한 번 시작한 일은 반드시 마무리짓고 물러나는 똑부러지는” 기업 이미지는 그만큼 소중했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지금 그녀는 죽음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 무너져가는 과거의 공중 화장실 속에 앉아. 더는 도망갈 길도 시간도 없었다. 대기업이 출동시킨 전투기들이 미사일을 싣고 날아오고 있었다. 어쩌면 이미 발사했을지도 모른다.
별다를 것은 없었다. 죽음이 오나 안 오나 시간은 그저 흘렀다. 부서진 화장실 지붕 위로 보이는 하늘은 여전히 푸른빛이었다. 화장실 바닥을 메운 모래 역시 그녀가 주욱 보아온 다른 모래와 다를 것이 없었다. 단하시는 자신이 지금 왜 죽어야 하는지를 생각했다. 별다른 이유랄 것은 없었다. 운이 다했거나 네슈카의 유령들이 드디어 만사를 포기하고 승천했거나 대기업의 집념이 우주의 대의지를 감복시킨 것이거나. 어쨌든 아직 오지도 않은 죽음을 생각하며 굳이 두려워하거나 가슴 떨려할 이유가 그녀에게는 없었다. 그러기에는 너무 오래 이 사막 위에서, 버텨온 것이다. 싸우며 담배를 재배하며.
  가끔 별 괴상한 이름을 단 방송국 함대들이 찾아와 그녀를 인터뷰했다. 과거의 고상한 유물, 신문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신사모라고 했던가-도 온 적이 몇 번 있다. 불멸의 담배녀, 라든지 그녀는 왜 담배를 재배해야만 하는가, 같은 서적들도 출판된 바 있다. 맞은편 우주에서는 카슈네 행성에서 대기업과 시하단이라는 남자 사이에서 손바닥만한 대마밭을 놓고 치열하게 싸운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어쨌든 우주는 제멋대로 돌아갔다. 동쪽 술 회사와 서쪽 술 회사는-믿어지시는가, 저런 기막힌 것이 회사 이름이라는 사실이-유서깊은 적이었지만 양쪽 회장 딸끼리 사랑에 빠져 자살한 후 통합되었고, 회사 이름을 셰익드링크로 바꾸었다고도 했다.
  이러한 저러한 것들을 생각했다, 단하시는.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쓸모가 없었던 직감이 이제 말하고 있었다. 때가 다가오고 있다고. 두려울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녀는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그리고 깊이 빨았다.
  이런 순간은 뭐라고 불러야 하는 것일까. 단하시는 죽은 사람들의 얼굴을 기억하려 애썼다. 그다지 기억나는 것은 없었다. 죽음을 보았을 때마다 느꼈던-혹은 그랬다고 생각했던-감정을 기억하려 했다. 별다른 것이 떠오르지는 않았다. 그녀는 바람에 흔들거리는 오래된 공중화장실의 지붕을 올려다보며 느긋이, 벽에 등을 기댄 채 담배 연기를 뿜었다. 언제나처럼 주변을 메운 것은 오로지 바람 소리뿐이었다. 사막이 무심히 움직이고 있었다. 이 별을 온통 휘감은 채.
  그러하다. 이대로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다.
  단하시는 다시 담배를 빨았다. 그러고 나서 짧게 중얼거렸다. 행복하구나. 그녀는 진정으로 행복하다고 느꼈다. 별의 심장을 향해 꺼져들어가는 죽음의 무게를 느끼며, 우주가 뒤틀리는 것을 응시하며 그저 무미건조하게 기뻤다. 오직 그뿐이었다. 시간이 멈추어 서고 있다, 지금 이 순간. 모든 것이 정지하려 한다.

  행복하구나, 지금.

  그와 함께 순간은 끝을 맞이했다.














---------
~ㄴ~
) 오타 수정했스빈다prz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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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뇰 05.07.11 12:39 댓글 수정 삭제
    ...커흑. 담배인삼공사가 민영화되느냐 마느냐를 주의깊게 지켜보던 한 흡연자로서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ㅁ;(또 500원 올린다던데... OTL) 흡연자의 가슴을 절절히 후벼판다는 점에서 일단 박수.

    ....하지만 최고 판사가 함무라비의 열혈 빠돌이라던지, 술 회사의 딸끼리(!) 사랑에 빠졌다던지 하는 건 분위기를 깨는 개그 같습니다; 지나치게 심각한 분위기마다 한 번씩 개그를 던져 넣는 건 괜찮은 테크닉이지만 단편에서 쓰긴 무리가 많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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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로냥 05.07.12 01:08 댓글 수정 삭제
    마지막 한 문장을 위해서 온 순간이 끝을 맞는 느낌이에요. 좋은 글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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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musa 05.07.12 12:45 댓글 수정 삭제
    세뇰님/ 댓글 감사합니다. 그냥 저런 꿈을 꾸었었어요. 연인 죽고 동생한테 배신당하고 죽을 때만 기다리며 화장실에 숨어 담배를 피우는데 그게 얼마나 맛나던지요...prz
    미로냥님/ ;ㅁ; (부빗부빗) 아이고 부끄럽스빈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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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태공 05.07.12 22:34 댓글 수정 삭제
    저는 화루사로 아뮤사님을 처음 뵈어서 이런 분위기는 또 새롭네요. 시종일관 참 위트넘치고 가벼운 분위기인데 가볍지만은 않아서 묘한 느낌. 잘 읽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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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musa 05.07.14 02:56 댓글 수정 삭제
    강태공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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