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잎글/ 불꽃놀이

2005.06.03 13:1406.03






구십삼 세기 홍목의 해 적요의 달, 사라다의 대통령은 축제령을 선포했다. 반들거리는 만년필 끝으로 종이 끝을 콕콕 찍어대며 고민하다가 내린 결정이었다. 그는 나름대로 고심해서 내린 결정이었지만 그 결정을 내리는데 걸린 시간이 불과 삼 초밖에 되지 않았으므로, 장관들은 다들 경악한 얼굴로 반대를 외치고 나섰다.
"말도 안 됩니다!"
"축제령이라니요!"
"저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필시 우리를 저 어지러운 도시의 길거리로 끌고 내려가 단술을 먹이고 꿀과자를 먹이고 장화 대신 꽃신을 신기고 춤도리에 끼어넣어 두 번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고 싶지 않도록 만들어 버리고 말 겁니다!"
사라다의 대통령은 두 귀끝을 쫑긋 세운 채 장관들을 한 마리 한 마리씩, 눈으로 마주했다. 장관들은 귀를 내리고 입을 다물었다. 천구백이십삼 층 아래 길거리는 이미 축제 소식에 들떠 있었다.
사라다의 대통령은 근엄하게 말했다.
"이제 다들 꼬리 끝에 달아둔 넥타이와 귀에 꽂은 넥타이핀과 장화를 벗어 두고 거리로 내려가게. 당분간 통치는 휴업일세."
장관들은 서로 마주보며 중얼중얼거리다가 마지못해 넥타이와 넥타이핀과 장화를 벗고 줄지어 서서 출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한 줄로 걸어가는 일도 그만두게!"
한 줄로 걸어가는 일 이외의 걸어가는 일을 해본 적 없었던 장관들은 허둥대다가 그럭저럭 두셋씩 무리를 지어 걸어갔다. 사라다의 대통령은 우수에 어린 눈으로 자신보다 백삼십오 년씩은 어린 장관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본래 철과 콘크리트로 지어진 드높은 빌딩 속에서 자신들을 지배하던 자들은 인간이었다. 넥타이로 목을 조인 쪽도, 그 넥타이를 또한 핀으로 조른 쪽도, 인간이었다. 인간의 마지막 대통령이 고양이에게 통치권을 넘겨준 지도 어느덧 오백육십칠 년 하고도 백이십삼 일.
그때 덥석 서류를 넘겨받아서는 안 되었다. 사라다의 대통령은 혀를 두어 번 찼다. 인간의 대통령은 빨간 도장이 찍힌 서류를 자신에게 내어주며, 이렇게 말했다: "이제 너희들 마음대로 지구를 통치해 봐라." 그때는 그것이 자유를 보장하고 행복을 약속하는 말로만 들렸다. 그러나, 아니었다. 고양이들은 넥타이를 주워다 꼬리에 매달고 핀을 귀에 꽂고 장화를 신고서 꾸역꾸역 회색 빌딩으로 모여들어, 생존권이다 통치권이다 병권이다 법치다 민주주의다 사회주의다 신호등 불빛이 어쩌니 횡단보도가 어쩌니 말싸움을 벌이기 시작했고, 인간들은 옷을 죄다 집어던지고 자기들 멋대로 도시를 물들이기 시작했다. 고대의 고양이들이 날렵하게 뛰어오르고 건너뛰던 벽과 지붕 위로 사람들이 나돌아다녔고, 고대의 고양이들이 만나 주술을 배우던 바람의 영에게 손을 뻗고 풀잎 아래 누운 비밀스러운 정령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사라다의 대통령은 책상 위로 올라가 꼬리로 몸을 두르고 고심하기 시작했다. 세상에 빌딩과 공장과 사무실과 서류짝밖에 없다고 믿는 어린 고양이들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별빛에 담근 물과 꿀에 담근 과자와 달큼한 과일의 과육이라면 가능할까? 맨발바닥 아래 닿아와 간지럽히는 풀잎이라면, 털 사이로 스쳐 지나가는 미풍이라면?
그들은 그 모든 것을 잊었다. 온몸을 한껏 뻗어 달릴 때 근육과 뼈와 혈관이 즐겁게 소리지르는 그 느낌을 차가운 기계 바람 아래서 종이에 박힌 기호 하나하나에 신경질 내느라 잊었고, 목청을 높여 허공으로 하여금 물결치며 노래를 전달하고 울리게 하는 세상과의 이야기법을 기계음과 화면의 변화에 골몰하느라 잊었고, 숫자의 나열에는 밤을 새며 몰두해 수정하고 고치면서 별빛의 이름을 내팽개쳤다. 사라다의 대통령은 빌딩에 들어온 모든 고양이들이 내버리고 내던진 그 모든 것들이 하나씩 둘씩 빌딩 창밖으로 쓰레기처럼 추락하는 것을 보아왔다. 맨 처음으로 고양이의 발과 꼬리에 붙어 살던 바람이 떨어져 내렸고, 그 뒤로 사나운 즐거움과 카랑카랑한 노랫소리와 보석같은 시선과 꿈을 관통하는 정신이 차례대로 버림 받았다. 사라다의 대통령은 여전히 고심했다...문득 기억 한 조각이 그를 찾아왔다.
그 마지막 인간의 대통령은 모든 권력을 자신에게 넘겨주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가지 일을 했다. 인간들은 대통령을 말리려 애썼다. 우리는 형편없이 몰락하고 말 것이라고 외치며 필사적으로 발버둥쳤다. 피켓과 깃발과 포스터와 로비스트와 변호사와 법관과 온갖 산업을 주무르는 부유한 경영자들이 협박과 애원과 위협과 부탁을 했다. 그 인간의 대통령은 매력적인 미소를 띄고서 그들의 요구에 응한다고 말했다. 그때 그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면 그 인파 사이서 총 몇 자루가 입을 열고 총알을 뱉어냈을 것이다.
그날 밤 그는 자신을- 현 사라다의 대통령을 데리고 전쟁관의 통제실로 걸어 들어가, 모든 버튼 위의 뚜껑을 죄다 벗겨내고, 암호를 누른 뒤 열쇠를 돌리고 또 솟아오른 뚜껑을 열고 또 열쇠를 돌리고 또 암호를 누르고 지문을 찍고 각막 패턴을 보이고 음성 확인을 한 뒤, 궤도를 우주 어딘가로 정하고 인정사정없이 버튼을 눌렀다.
아직 어린 고양이였던 그- 현 사라다의 대통령은 갈빗대 어딘가에서 우주가 몸을 꿈찔거리며 간지러움에 몸을 흔드는 것을 느꼈다. 멀리서 별들이 빛을 깜빡이며 깔깔대고 웃었다. 은하수는 지구 주최 불꽃놀이를 구경하기 위해 평소보다 조금 느리게 흘렀다. 태양은 제자리에서 빙글 돌았고, 달은 재채기를 했다. 그날 밤, 새들은 날지 않고 앉은 채 우주를 구경했다.

멍하고 아연한 인간들은, 대통령이 통치권을 양도한다는 서류를 내밀고 그의 고양이가 그것을 입으로 받아무는 모습을 쳐다보고만 서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사라다의 대통령은 씨익 웃었다. 그는 만년필을 밀쳐 떨어뜨리고, 대신 발톱을 세워 잉크에 찍어 종이 위에 빠르게 휘갈겼다.

"불꽃, 놀이를, 선포한다!"














-----------
짤막한 그런. 엽편이라는 단어도 좋지만 잎글이라는 단어도 좋아합니다.
댓글 4
  • No Profile
    다담 05.06.06 10:17 댓글 수정 삭제
    재밌어요. 보는 것만으로도 입술 끝이 씨익하고 올라가요.^^
  • No Profile
    강태공 05.06.07 17:21 댓글 수정 삭제
    으아; 이거 좋잖아요;ㅂ;
    아뮤사님 이런 분위기의 글도 쓰시는군요-
  • No Profile
    amusa 05.06.08 05:09 댓글 수정 삭제
    다담님/ 감사합니다:-D
    강태공님/ 49주제놀이 하면서 의욕에 불타올라 썼었는데, 지금은 그냥 카테고리 만들어두고 놀고 있어요prz
  • No Profile
    녹용 05.09.22 12:47 댓글 수정 삭제
    두번봐도 재밌담./ㅅ/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1979 단편 혼자1 夢影 2005.07.31 0
1978 단편 붉은 낙타1 괴소년 2005.01.05 0
1977 단편 [뱀파이어] 언제나 함께이기를4 roland 2006.03.31 0
1976 단편 크리티 박사의 슈피겔 프로젝트 kristal 2009.05.25 0
1975 단편 독서시간3 異衆燐 2006.07.15 0
1974 단편 경국지색 - 달기2 니그라토 2015.06.27 0
1973 단편 [꽁트?] 육개산성과 전자레인지궁 김진영 2011.12.22 0
1972 단편 구렁이2 두꺼비 2006.01.10 0
1971 단편 육식주의2 불타는 검 2010.11.19 0
1970 단편 영원의 빛 (4) inkdrinker 2006.07.13 0
1969 단편 꽃의 집합4 amrita 2006.10.20 0
1968 단편 나는 자석의 기원을 이렇게 쓸 것이다 너구리맛우동 2014.02.19 0
1967 단편 이상향2 C.T 2005.11.26 0
1966 단편 외계인과 이계인이 만났을 때 루나 2003.10.13 0
1965 단편 [단편] 아기침대 unica 2004.04.28 0
1964 단편 여름 밤의 망상3 빡살 2003.09.01 0
1963 단편 [심사제외]우리는 그의 SF에 산다 니그라토 2013.11.15 0
1962 단편 여름의 최후 이상혁 2012.09.12 0
1961 단편 잎글/ 순간5 amusa 2005.07.08 0
1960 단편 부정적인 인식과 타파하는 방법 하나씨 2006.05.26 0
Prev 1 ... 7 8 9 10 11 12 13 14 15 16 ... 110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