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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SOS

2012.11.27 07:3811.27

문을 잠그고, 그나마 만만해보이는 서랍장을 끌어다놓는다. 문 가까이에 끌어붙이고 소리없는 한숨을 쉬는 내 눈 앞에 크게 펼쳐진 밤하늘이 보인다. 몇시였지? 가쁜 숨을 토한 나는 지쳐있었다. 맥이 풀렸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걷길 포기하고 두 팔로 몸을 끌어간다. 걸으면 1초나 걸림직한 걸이인가. 겨우 그 앞에 다다른 나는 움직이기 싫어 어기적어기적 걷는 사람보다 힘이 실리지 않은 내 움직임에 절망한다. 하지만 그 수렁에 빠질 틈같은 건 없어, 기운없는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더라도 유리창에 손자국을 남기며 짚고 올라간다. 더듬거리는 손 끝에 차가운 쇳덩어리가 잡혔다. 돌리며 이건 플라스틱이라도 아무 상관없었을 거야, 라는 헛소리를 내뱉는 목소리가 갈라졌다. 아, 목마르다.

방 반대편에는 여느 큰 평수 아파트의 안방 구조처럼 안방에 부속으로 딸린 화장실 문이 보인다.

왜 이렇게 된 걸까. 분명 움직일 힘은 없었을 텐데 나는 화장실의 문을 잠근 것같다. 머리 속에서 폭풍이 휘몰아친다. 그래, 문을 잠글 때는 소리없이 닫아야한다. 무의식 중에 오른손을 뻗어 살며시 문을 열고 잠금버튼 위에는 왼손 엄지를. 누를 때는 조심스럽게, 누구도 알 수 없게. 그러나 그는 나를 알고있다.

그리고 문이 잠긴 방은 이 곳 하나 뿐이겠지.

죽을까, 살까.

얼빠진 정신으로 숨을 내쉬니 시큼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다시 공포로 가득찬 어둠을 친구삼는 도중, 주머니 속의 핸드폰이 울린다.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감각이 허벅지 부근의 주머니로부터 나를 떨게한다. 멈추지 않는다.

그래, 지금은 2시다. 아마 그럴 것이다.

언제나 그래왔듯, 안부를 묻는 어머니의 전화이다.

평소 습관처럼 진동으로 설정해 놨다는 사실에 안일함을 느끼며 기계적으로 오른손 엄지를 왼쪽으로 드래그. 그 후엔 문자함이다. 암, 그렇고 말고. 평소엔 친구는 벌써 자는데 전화할 순 없잖냐며 무마하려 들 때 하는 행동이지만 의미가 다르다.

[살려줘]

이를 떨어가며 문자를 보낸다. 나도 모르는 새에 피부에 잡힌 물집이 야릇한 고통을 선사한다. 아파.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런지 나도 모른다. 전에 밀폐된 락스원액으로 청소를 했더니 피부가 벗겨졌다는 소리를 들은 적있다. 깜빡이는 눈꺼풀 위에 뜨뜻한 파도가 차오른다. 초등학교 시절엔 좋다고 윗옷은 짧은 팔을 고수했는데. 아, 따뜻한 집으로 가고싶다.

죽을까, 살까.

시큼한 냄새에 눈물이 난다.

멍하니 답장을 기다린다. 내가 살해될 시각을 예상해본다. 잘하면 그놈에겐 살해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 전에 락스에게 살해당할 게 자명한 사실이다. 사람 살 중에 제일 약한 부분은 눈이지 않을까. 예상대로라면 눈꺼풀 아래 각막부터 벗겨질 것이다. 그럼 아파서 비명을 지르고, 그 후엔 달려온 그놈때문에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게 되거나 고통에 몸부림치거나. 천천히 벗겨져서 고통을 참는다는 가정도 있을 지 모른다. 아플 거야, 분명 아플 거야.

답장이 오지 않아,

멍한 표정이 압권일 내 표정을 상상해보며 주머니 속을 뒤졌다. 잠금해제, 문자함. 기록을 열어볼 필요도 없다. 뭐야, 이상한 글자조합이다. 아무래도 한글로 쳐주긴 어렵다. 오타를 친 모양이다. 시간은 벌써 30분이 지났다. 지금 다시 보내면 받을까. 아냐, 받지 않을 거다. 죽을까, 살까.

이번엔 제대로 글자를 눌렀다. 시옷 아 리을, 살, 리을 여, 려, 지읒 우어, 줘. 나는 전송버튼을 눌렀다. 나도 제대로 하는 게 없다. 장문은 보내지 않기로 했다. 뇌리에 하드보일드 스릴러 영화를 몇십편 쯤 실은 내 판단은 보내면 안될 것같다고 말한다. 그렇게 말해봐야 영화지만.

이 시간에 경찰서에 연락하면 어떻게 될까. 장난전화 취급당하겠지. 그러니까 결코 전화해서 바보같은 소릴 늘어놓는 행동은 하지 않는다. 우리나라 경찰은 사건 하나쯤 터져주지 않으면 너무 무신경한 걸 불평하긴 미안하다. 좀 넉넉잡고 일하고 싶어도 사람들이 다들 너무 야박하지 않나. 그래도 무슨 성폭력 사건이다 뭐다 터졌을 땐 가출신고 하나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니. 그래, 그나마 감사한 거지.

스스로에게 신중하다는 평가를 내리고 싶어하는 자신에게 또 한번 실망하며 그 다음 해결책을 강구하도록 한다. 제대로 몸 건사한 채 나가는 건 포기했다. 그나마 어떻게 하면 9시 뉴스에서 5분 쯤이나마 조명받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뿐이다. 이런 식으로 죽는 사람이 많을런지는 모르지만 뉴스엔 지극히 자극적이고 정치적인 내용만이 편성되기 일쑤일 터이다.

그리고 그 중 하나 생각나는 게 있다면, SKY 졸업 후 대기업에 잘도 붙은 일반인이 부모를 죽여 존속살인으로 구속돼봐야 시기가 잘 맞물리지 않으면 그저 동네 소문거리로 전락하는 게 전부란 거다. 사실 시기만 잘 타면 연쇄살인을 저질러도 뉴스에 나오지 않는 건 아닐까 생각한 적도 있지만, 이건 구체적으로 아는 바가 없으니 더 생각말기로 했다.

일단 생존률을 높여야겠다. 현재시각은…… 새벽 3시 34분.

희생자는 정세리, 만 15세 여성. 일단 학생으로. 현 시각 약 3시 반, 식사 후 갑자기 돌변해 살해위협을 가하는 피고를 피해 집안에서 아무 방이나 골라잡아 들어갔다. 그 방은 일반적 34평 아파트 안방과 같이 화장실이 붙어있는 구조였으므로 피해자는 출입구를 봉쇄하고 그 안에 들어감. 내부에는 세탁 중이던 빨랫감이 락스원액에 절여져 있었으므로, 발견 당시 그 공기에 노출된 피해자의 몸은 울긋불긋한 수포가 피어나 있었다-참고로 표피가 다소 벗겨져 진피 부분이 노출돼있는데 이는 피해자가 고통을 참지 못하고 벗겨낸 것인지의 여부는 미지수-.

그 정도가 돼있지 않을까, 다른 건 더 생각하기도 싫다.

부르르르릉, 내가 생성해 뒀던 진동이 이번엔 화장실 타일 위에서 울고 있다. 액정 위로 [무슨 일이야] 라는 다섯글자가 떠내려간다. 아, 그렇지. 전에 친구 집에서 자다가 집에 가고 싶다는 둥, 귀신이 잡아먹는 악몽을 꿨다는 둥 지껄이며 주무시는 어머니 깨우는 건 지극히 일상다반사적 과정 중 하나였고, 지금도 어머니께는 이 일은 그저 평소 일상에 불과할 것이다. 그렇다. 내가 울고 있어도,

누군가 옆에 있지 않으면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누군가 슬픔에 떨고 있어도 그걸 모르는 이에겐 그 시간이 무엇과도 맞바꿀 수 없는 시간이 되기도 할 것이다. 지금 지구 저 반대편에는 아이들이 밥을 굶고 있겠지. 같은 동네친구 사이에서도 집 부채에 시달리는 아이와 밥 잘먹는 내가 있었지. 맞아, 그랬다. 어쩌면 지금 내가 이러고 있는 와중에 이 옆집이나 윗집 아이는 부모에게 얻어맞고 있을 지 그 누가 안단 말인가. 문 너머의 그놈이 내가 문자하는 걸 알건 말건 뭔 상관이란 말인가.

[곧 죽을 지도 몰라. 신고해줘.]

문 사이로 헐떡이는 숨소리가 새어들어온다. 그놈은 내 핸드폰 불빛이 샌다고 생각하겠지. 문득 중학교 때 배웠던 실탄사격이 간절해졌다.

문자를 전송하고, 이어 몇글자 더 덧붙인다.

[이 새끼가 날 안방 욕조 가득히 화장실 락스 부어둔 곳으로 유인했으니 라이터 지참했는지 안했는지 참고바람.]

아마 헛소리로 치부될 것이다. 난 언제까지 버틸 수 있는 걸까.

[참고로 놈이 얼마 전 장난감 비비탄 총을 구매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상대방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음.
충분히 위협적이라 경고함. 하지만 상대는 나를 칼로 난자하고 싶어하는 것같다.
문 앞에 서 있는 것같아서 잠입할 땐 여러 경로 이용할 것. 그러나 안방 유리창은 잠겼음. 현재 나는 아무 흉기도 가지고 있지 않아 나가지 못함.]

죽을 게 분명하지만 그래도 보내봐. 말 끝머리에 평소같은 말투로 덤덤히 덧붙이는 건 차마 할 수 없었다.

이런 행동에 과연 희망은 실려 있는 걸까. 떠오르는 노래를 옹알대본다.

夏が過ぎ風あざみ
여름이 지나 바람의 엉겅퀴

誰のあこがれにさまよう
누구를 동경해 방황하는지

靑空に殘された私の心は夏模樣
푸른 하늘에 남겨진 나의 마음은 여름의 모양

夢が覺め夜の中
꿈이 깨어 밤중에

長はが窓を閉じて
긴 겨울이 창을 닫고

呼びかけたままで
소리를 내어 부르는 채로

夢はつまり想い出のあとさき
꿈은 결국 추억의 처음과 끝

夏まつり宵かがり
여름축제 초저녁무렵

胸のたかなりにあわせて
가슴의 높이 뛰는 고동에 맞추어

八月は夢花火 私の心は夏模樣
팔월은 꿈불꽃놀이 나의 마음은 여름의 모양

目が覺めて夢のあと
눈이 떠져 꿈을 꾼 후에

長い影が夜にのびて
긴 그림자가 밤에 드리워져

星屑の空へ  
별들의 하늘로

夢はつまり想い出のあとさき
꿈은 결국 추억의 처음과 끝

夏が過ぎ風あざみ
여름이 지나 바람의 엉겅퀴

誰のあこがれにさまよう
누구를 동경해 방황하는지

八月は夢花火私の心は夏模樣
팔월은 꿈불꽃놀이 나의 마음은 여름의 모양

모든 게 끝나면,
그리고 모든 게 끝나면.
댓글 1
  • No Profile
    정세리 12.11.27 07:49 댓글 수정 삭제
    항상 쓰고싶어 했었던 내용이지만, 방금 전까지 꾸던 꿈이 너무 생생하여 과제도 처리할 겸 두서없이 써내려가고 말았습니다만 딱히 담긴 메세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 계획을 짜둔 것도 아니고, 그저 꿈 속에서 한 행동을 늘어논 거라 좋은 글만이 올라오는 거울 웹진에 올려도 괜찮은 지 모르겠습니다. 소리소문없이 잘려버리는 건 아닐까요. 여유가 생기는 대로 다시 써올리겠습니다.
    다른 글들의 절반 분량도 안될 이 짧은 글을 가사로만 때우며 정신없이 쓰는데 두시간씩이나 걸려서 쓰고 나니 제가 봐도 생경하게 읽히네요. 시간이 촉박해 흐지부지하게나마 끝내보려고 결말을 끼워맞춘 게 허술해서 죄송합니다. 제대로 끝을 냈다 말한 건 홀로 여러편 써봤으면서도 이번이 처음입니다. 밤이라서 그렇다고 생각해달라 말하기엔 한국은 아침이군요. 가사는 井上陽水(이노우에 요스이)의 少年時代입니다. 일본 것이라면 거부감 가지시는 분들도 많지만 한번도 들은 적도 없는데 가사가 묘하게 끌려서 집어넣고 말았습니다. 다시 찾으려 제목으로 검색했더니 아이유가 부른 게 있군요. 원곡과 그 버전 중 어느 쪽을 먼저 들어봐야 좋을지. 좋은 아침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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