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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냉장고 폐기법

2011.05.20 16:1005.20

냉장고 폐기법

# 1

째깍, 째깍, 째깍, 째애깍, 째애애깍, 째애애애애애깍.
더디게 흘러가는 초침 속에서 마침내 시간이 멈춰 버린 것 같다. 더 이상 그녀와 연락이 되지 않는다. 구원이라고 생각했던 마지막 한 줄기의 빛이 서서히 안녕히 고한다. 아니, 단번에 고한 이별이건만, 이제야 내가 서서히 받아들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 지금 거신 전화는 없는 번호이오니.....


# 2

냉장고 :
[명사] 식품 따위를 차게 하거나 부패를 막기 위하여 저온으로 저장하는 상자 모양의 장치.
- 한글과 컴퓨터 사전


# 3

어울리지 못하는 내가 싫었다. 끼어주지 않는 그들이 싫었다. 아니, 어울리려 하지 않는 내가 싫었다. 대인기피장애. 어느새 나는 그들에 의해 장애 판정을 받아 버린 지도 모른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인지도 모른 채 어느새 부턴가 무색무취의 존재로 대우받다가 그게 너무나도 자연스러워졌을 뿐이다.
혼란스럽기만 한 기억이지만, 적어도 그 혼란스러움 안에는 정확한 시작이 없었다는 것 정도는 확실하다. 말 그대로 나도 모르게, 어쩌면 그들은 알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중학교에 올라가면 달라질 거라는 기대는 입학식을 채 치루기도 전에 와장창 깨져버렸다, 그들에게 나란 존재는 역시 보여도 보이지 않는, 들려도 들리지 않는 그 무언가에 불과했으니까.
어줍지 않은 상황 탓, 단지 이 상황만 바뀐다면 달라질 수 있다는 헛된 기대는 정확히 두 배의 상처를 남기고 고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사라졌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현실을 부정하는 것보다는 받아들이는 게 쉬운 법. 쉽지 않더라도, 더 어려웠더라도 어쩔 수 없었을 거다. 나에게 주어진 선택지의 보기는 단 하나였으니까.
심각한 수준의 학교폭력들. 다수라는 이름의 재미를 위해 벌이는 악의 가득한 장난들. 누군가에게는 단지 철없는 시절의 추억 중 하나였겠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벌레가 되어 버린 것 같은 모멸감에 치를 떨었을 순간들. 어떨 때는 그런 것 마저 부러웠다. 최소한 저들은 피학자로서라도 존재할 수 있으니 말이다.
나는 언제나 홀로 존재할 뿐이었다. 한 쪽을 잃어버려 사물함 뒤쪽에 처박힌 삼선 슬리퍼 한 짝처럼, 지속적인 분필 투척에 4시 방향이 뿌옇게 흐려진 시계처럼 말이다. 그 누구와의 상호작용 없이 나는 그저 홀로 존재할 뿐이었다. 참을 수 없이 미웠다. 아주 가끔이지만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강력한 살의에 나조차도 놀랄 정도로 미웠다. 덕분에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다. 언젠가는 꼭 복수하고 싶었으니까.
다 그 덕분이었다. 지옥 같았던 고등학교 3년을 마치고, 아쉬움이라는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을 나누는 그들을 무덤덤한 눈빛으로 보았을 때도, 학문의 전당이자 또 다른 출발이라는 대학에 입학했을 때도 난 상처받지 않을 수 있었다. 이곳에는 나의 과거를 아는 누군가가 없을 것이다. 설령, 있다 해도 과거 그들의 숫자처럼 무시무시하지 않으니 어쩌면 조금은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냥 생각에 그쳤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 4

에스키모인들에게 어느새 냉장고는 필수적인 가전기기가 되었다. 그들에게 냉장고란 음식을 얼지 않도록 충분히 따뜻하게 보존할 수 있는 환상적인 제품이다.
그렇다. 냉장고란 차갑게 해주는 무언가가 아닌 보존하게 해주는 무언가다.
- 39세, 세일즈맨 강형구 씨


# 5

기억이 날락 말락. 그때 먹고 있던 삼각 김밥은 고추장불고기맛 이었을까, 아니면 참치마요네즈맛 이었을까. 대학에 들어와서도 달라진 것은 없다. 학교를 가고, 밥을 먹고, 학교에서 돌아오고, 분명 존재는 하고 있었다. 조교가 출석체크를 하는 동안 가볍게 손을 들어주며 내 존재를 증명하면 된다. 가끔씩 교수가 직접 학생들의 이름을 호명하며 출석 여부를 확인하는 때에는 내 존재가 아주 조금이나마 높아진 느낌마저 들었다.
그러니까 중요한건, 그때 들고 있던 게 정말 고추장불고기맛 이었던가? 학교식당에서 식권을 끊는 것보다 매점에서 말없이 물건을 내미는 게 편리하다고 생각하던 때였다. 분명히 둘 중 하나로 추정되는 삼각 김밥과 흰 우유, 딸기우유나 커피우유는 아니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마도 흰 우유였을 거다. 그나마 흰 우유가 저렴한 가격이었을 테니까.
인문학과 근처의 후미진 벤치. 매점에서 제법 떨어져 있는 이곳을 매번 찾게 되는 이유는 그냥사람이 없어서였다. 오후에 시작되는 교양을 들으려면 다시금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하지만 그냥 이 시간이라면 이곳이 좋았다. 아무도 없는 이곳에서는 누군가를 거치지 않고 그냥 나 그 자체로서 존재할 수 있었으니까.
“ 저기요, 혹시 시간 있으세요?”
“ .....!”
“ 아, 별건 아니고요. 아주 간단한 설문지 하나만 작성해 주시면 되거든요. 그러니까 히키코..... 아니,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 대한 아주 간단한 설문조사에요. 꼭 부탁드릴게요.”
그러.....니까 누군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기쁨? 당황? 불쾌함? 뭐라고 표현 못할 감정들이 순식간에 내 얼굴에서 맴돌면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놀란다.
“ 정말 죄송해요. 별다른 뜻은 없었고, 그냥 이곳에 자주 보이시 길래. 아니 너무 시간이 없었거든요. 큰소리는 치고 왔는데 여태 설문지 한 장도 나눠주지 못하고 이러다가는 진짜 저라도 아무거나 체크하고 몰래......어? 에구, 진작 그럴걸. 아무튼 감사합니다. 아까는 미안했어요.”
마지막에는 뭔가 중얼 거리던 그녀가 그렇게 사라졌다. 내 손에는 조금 전 건네받은 설문지 한 부만 남아 있을 뿐.

* 당신이 의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몇 명인가?
  1. 無    2. 1명   3. 2명 이상   4.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 당신은 왜 외로움을 느낀 기간은?
  1. 태어나서부터 줄곧   2. 최근 15년 이내   3. 최근 10년 이내   4. 최근 3년 이내

  ......................


피식, 엉터리 설문지다. 문항도 엉망이고 배열도 엉망이다. 한 가지 칭찬할 만한 사실은 설문 대상을 정확히 찾았다는 것, 씁쓸하지만 정말 귀신같이 찾았다.
벤치 옆에는 그녀가 놓고 간 것으로 추정되는 노트 한권이 떨어져 있었다. 심리학과 1학년 이유리. 그녀가 놓고 간 하얀 노트의 하단 부분에 새빨간 양념이 떨어졌다. 그래, 분명히 기억난다. 고추장 불고기 맛이 맞다.


# 6

- 냉장고에 코끼리를 집어넣는 방법

1. 냉장고 문을 연다.
2. 코끼리를 냉장고에 집어넣는다.
3. 냉장고 문을 닫는다.


# 7

심리학과 1학년 이유리. 그녀의 노트를 들고 이틀이나 고민한 끝에 돌려주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어쩌자고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모른다. 어쩌면 누군가를 통해 내 존재를 증명하고 싶다는 처음이자 마지막 발악이었는지도. 그녀의 노트를 들고 찾아간 사과대 건물, 심리학과는 사과대 건물 3층에 위치해 있다
그냥 과 사무실에 맡길 수도 있었으나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녀를 찾아 강의실을 헤매고 다닐 수도 없었기에 건물 앞 벤치에 앉아 하염없이 그녀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째깍. 째각. 얼마나 지났을까. 1시에 시작한 오후 수업이 벌써 끝났을 시간이건만 건물을 나오는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사실 오늘은 수업이 없는지도 모른다. 가뜩이나 교양수업의 비중이 높은 1학년인지라 아직 전공 수업을 들을 타이밍이 아닌지도 모른다. 그냥 돌아가야 하려나.
12시에 수업이 끝나고 매점에서 대충 점심을 때웠으니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을 거다. 그리고 지금 시간은 세시가 조금 넘어가고 있다. 고민은 제법 했지만 언제나 후회와 포기는 빠른 법. 과 사무실에 갈 필요도 없었다. 그냥 분실물 함 위에 얹어놓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던 찰나, 저 멀리서 그녀가 보인다. 눈이 마주쳤다. 자리에서 반사적으로 일어났지만 몸이 뻣뻣하게 굳어 움직여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녀가 나에게 다가온다.
“ 안녕하세요. 그때는 정말 죄송했어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나는 말없이 그녀에게 노트를 건넨다. 물론, 고추장 불고기의 양념은 깨끗하게 닦은 상태였다.
“어...이건? 에구, 그때 흘리고 갔었구나. 정말 고마워요. 안 그래도 한참 찾고 있었어요.
그런데, 혹시 식사하셨어요?”
“ 아... 아니요.”
“ 아, 잘됐다. 저도 수업이 어중간하게 끝나서 오늘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거든요. 저번에 신세진 일도 있고 오늘 고맙기도 하고 내가 밥 살게요. 사실 저, 그때 설문조사 끝나고 엄청 칭찬 받았거든요.”
분명, 나는 그날 설문지를 작성한 적이 없다. 이 여자, 정말로 모든 설문지를 자기가 작성했나 보다. 그녀는 내가 미처 어떤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내 소매를 붙잡고 나를 어디론가 끌고 간다.


# 8

- 냉장고에 그녀를 집어넣는 방법

1. 냉장고 문을 연다.
2. 냉장고 안의 코끼리를 빼고 그녀를 집어넣는다.
3. 냉장고 문을 닫는다.


# 9

“ 넌 왜 그렇게 자신감이 없어. 그러니까 친구도 없는 거라고.”
“ 아, 아니... 그러니까 응... 응 ”
“ 응은 또 뭐래. 남자가 왜 이렇게 박력이 없어. 자신감 좀 가지라고 ”

어느새 부터인가 나와 그녀는 친구란 것이 될 수 있었다. 같은 1학년이란 사실에 깜짝 놀란 그녀였지만, 아니 내 학생증을 보여주기 전까지는 믿지 않던 그녀였지만 말이다. 결국에는 주민등록증을 보여주고 나서야 비로소 그녀에게 같은 나이라는 사실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이상한 일이다. 분명 살아온 세월은 같건만 누구는 학생 누구는 아저씨로 보인다.
“ 그러니까 이건 말이야...”
“ 너 또 딴 생각 하고 있었지? 으이구 ”
“ 이게, 누나한테 까불고 있어. 진짜 혼난다!”

그녀는 쾌활하고 조금 자기주장이 강한 편이다. 생일이 나보다 3개월가량 빠르다는 이유로 어느 새부터 누나 행세를 하려는 그녀는 종종 고집이 센 만큼 나를 책임지려 했었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따사로움.
누군가의 비웃음이 들린다. 너는 이럴 자격이 없다. 이런 소소한 행복 역시 결코 너한테 허락된 것이 아니라고 말이다. 명백한 적의와 경멸이 실린 소리였다. 너에게는 어울리지 않아, 그러니까 포기해. 그리고 당장 네 자리로 돌아가. 머리가 어지럽다. 피곤한 눈을 하고 있는 내 머리를 그녀가 한차례 헝클어 틀이더니 저 멀리로 사라진다. 오늘 즐거웠다고. 그리고 한 번만 더 그런 멍청한 표정 짓고 있으면 이제 친구로 여기지 않을 거라고.
한 번도 허락된 적이 없던 지극히 소소한 행복을 느끼면서도 한 편으로는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정말 괜찮은 걸까. 혹시 누군가의 장난은 아닌 걸까. 그녀의 미소가 너무 해맑아서 차마 물어볼 수가 없었다. 만약 물어본다 치더라도 그녀는 따끔하게 팔뚝을 꼬집으며 말하겠지. 너 자신을 믿으라고.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은 남도 사랑할 수 없는 법이라고 말이다. 그러니까 너도 나처럼 예쁜 여자 만나려면 지금부터라도 너부터 사랑하라고.


# 10

오늘은 엄마가 젤리를 사줬다.
나는 기분이 좋아서 젤리를 냉장고에 넣어서 아껴 먹으려고 했다.
그런데 냉장고 안에서 초콜릿을 발견했다.
그래서 기분이 더 좋았다.
그것은 예전에 아빠가 사준 것이었다.
- 6세 샛별 유치원 사슴반, 김 나리 어린이


# 11

밀린 빨래를 하려고 청바지 주머니를 뒤지고 있는데 무언가가 손에 잡힌다. L열 14번. 그녀와 처음으로 함께 본, 그리고 내가 처음으로 가 본 영화관의 티켓이다. 어떤 외국인이 나온다. 또 다른 흑인이 나온다. 총을 쏘고 싸우고, 또 총을 쏘고 추격전을 벌이는 그런 내용이라고 한다. 물론, 네이버에서 찾아 본 것이다.
당시의 난 영화를 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옆자리에 앉아 있는 그녀와, 앞자리에서 손을 꼭 붙잡고 여느 커플들. 너무나 낯설어 당장이라도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처음 겪어보는 누군가와의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상. 불꽃을 처음 발견했던 먼 과거의 첫 인간의 심정이 이러했을까. 그건 신기함 이라기보다는 불안함, 두려움이기까지 했다.
너 따위가. 네 놈 주제에. 감히, 지금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지난날의 너를 생각해봐. 넌 이럴 수 없어. 이래서는 안 돼. 나는 너를 인정할 수 없어. 난 네가 싫어. 미워, 부끄러워 참을 수 없어. 당장이라도 자리에서 뛰쳐나가고 시었다. 시원한 물에 세수라도 하거나 엉엉 울어버리고 싶었지만 한참 영화에 집중 하고 있는 그녀 옆에서 도망갈 수가 없었다. 만약, 그녀가 당시의 내 심정을 알았더라면 바보 같은 생각 하지 말라고 위로해 주었을까.


# 12

- 냉장고에 기린을 집어넣는 방법

1. 냉장고 문을 연다.
2. 냉장고 안의 그녀를 빼고 기린을 집어넣는다.
2. 그녀가 빠지지 않는다.
4. 그녀가 꺼내지지 않는다.


# 13

언제부터였을까. 그녀와 연락이 뜸해지더니 한동안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이삼일에 한번은 연락을 주던 그녀였는데 보름이 넘었는데도 연락이 오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다급한 마음에 문자도 보내 보았지만 단 한 번도 답장이 오지 않았다. 걱정이 되어 몇  차례 전화도 해보았지만 그녀가 받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어떻게 된 것일까. 이제는 내가 싫증난 걸까. 아니면 이제야 나라는 존재를 알아버린 걸까. 아무런 연락도 없이 연락이 되지 않는 그녀. 미친 듯이 혼란스러웠지만 이상하게도 전혀 낯설지가 않았다.
사실, 전혀 이상할 바 없는 일 이자나. 단지 요 몇 달 동안의 네가 이상했을 뿐이라고. 정신 차려. 또 다른 내가 말한다. 너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 투성이였어. 다 잊어버리고 현실을 직시해. 넌 어제도 혼자였고, 지금도 혼자고, 앞으로도 혼자일 거야. 그녀의 전화는커녕 그 누구의 전화도 너에게 오지 않을 거란 말이야. 어떻게 아냐고? 난 너를 미워하니까. 그녀도 너를 미워하니까. 그리고 넌 너를 미워하니까.
숨이 턱 밑까지 차올랐다. 헉헉거리며 몸부림을 쳐 보았지만 누군가 내 목을 부여잡고 지그시 누르고 있는 것만 같다. 도와줘. 그 누구라도 좋으니 도와줘. 그녀 생각이 났다. 그녀가 미친 듯이 보고 싶었다. 그녀가 미친 듯이 보고 싶은 와중에도 그 누군가는 더 강력하게 내 목을 조이고 있었다.
누굴까. 언제나 그래왔지만 이 방 안에는 나 혼자 뿐이다. 언제나 그래왔지만 난 혼자였다. 그러니 그녀를 내쫓아. 당장 내 쫓아버려. 너만의 공간에서 지금 당장 그녀를 쫓아 버리라고. 나뿐인 공간에서 누군가가 발악하고 소리를 질러댔지만 난 차마 그녀를 쫓아 버릴 수 없었다.


# 14

아 놔ㅋㅋㅋㅋㅋㅋ
오랜만에 냉장고 정리하다가 못 볼 것 봤네여.
콩자반도 하얗고, 김치도 하얗고 곰팡이 작렬.
원하시는 리플 열 개 달리면 사진 올리겠지만...
대신 님들도 오늘 쫄쫄 굶은 채 아무것도 못 먹을 듯ㅋㅋㅋ
- 22세, 이름을 밝히지 않은 어느 자취생


# 15

그녀가 남기고 간 것들은 무척이나 잔인했다. 정작 그녀는 얼굴은커녕 목소리도 남기지 않았는데 그 사소한 하나하나의 남은 것들이 나를 괴롭혔다. 어색하게 찍혀 있는 그녀와의 사진. 그녀가 보냈었던 오래된 문자 메시지. 내 팔뚝을 꼬집던 그녀의 손가락 온기까지. 그 하나하나가 너무 생생하게 잔인해서 구역질이 났다. 주인 잃은 자취들은 나 혼자만의 기억만이 덧씌워져 곰팡내를 풀풀 풍기기 시작했다.
깊숙이 쌓아두었던 그것들을 꺼내려니 절로 비명이 난다. 더럽다기 보다는 무서웠다. 그 뚜껑을 열고 내용물을 깔끔히 비운다는 게 상상할 수 없이 무서웠다. 그리고 그 옆에서 나를 재촉하고 있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어떻게 표현할 수 없이 무서웠다.
너는 그 누구와도 어울릴 수 없어. 행복할 수 없어. 넌 영원히 나와 함께해야 해. 왜냐고?
난 너를 세상에서 제일 미워하니까. 이 형편없이 역겨운 놈아. 그러니 망설이지 말고 저 곰팡내 나는 쓰레기들을 치워버리라고. 그리고 복수하는 거야. 복수. 복수. 복수. 으하하하.


# 16


냉장고 청소하는 법
- 주방 세제를 듬뿍 묻힌 수세미로 내부를 깨끗이 닦아 줍니다. 그 후 식초 몇 방울을 떨어뜨린 스펀지로 그 위를 부드럽게 닦아 줍니다. 마지막으로 햇볕이 잘 드는 곳에서 바삭하게 말려주면 냉장고 청소 끝!!!
-믿거나 말거나 생활의 상식 17


# 17

정신없이 술을 마셨다. 학교에 나갈 생각도 하지 못하고 미친 듯이 술을 마셨다. 도수 높은 알콜이 내 몸을 깨끗이 정화시킬 수 있도록. 그녀와의 모든 기억도. 끊임없이 복수를 부르짖고 있는 저 소리도 깨끗이 사라질 수 있도록.
온 몸이 간지러워 참을 수 없었다. 당장이라도 그 무언가가 내 몸을 뚫고 뛰쳐나올 것만 같았다. 복수를, 복수를, 복수를. 아무리 깨끗하게 지우려 해도, 닦으려 해도 좀처럼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 알콜이 부족한지도 모른다. 왼쪽 발목 부분에 널브러져 있는 한 병, 의자 밑을 구르고 있는 한 병, 침대 밑에서 빼꼼이 주둥아리를 내밀고 있는 또 한 병. 조그마한 병뚜껑은 네 개가 보이는데, 그 커다란 병들은 아무리 찾아봐도 세 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어찌된 일일까.
째깍. 째깍. 째깍. 조금씩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고 있지만 어차피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는 세 개의 바늘이 안쓰럽다. 그래도 혼자가 아닌, 누군가와 함께이기에 덜 외로우려나. 아무렴 어때, 어쨌든 나는 전자시계보다는 저렇게 인간적인 시계가 좋다. 저 뾰족한 침 하나하나로 조그마한 찌꺼기도 남지 않도록 깨끗하게 긁어내고 싶다. 부드럽지 않아도 좋다. 조금 고통스럽더라도 깨끗하게 제거해 버리고 싶다. 오른손에 쥐고 있던 소주병을 들어 나발을 분다.
이래도 사라지지 않는다면 복수를 복수를 복수를. 나에게 허락되지 않은 무언가를 건네고 다시 사라져 버린 그녀에게 복수를,

어떻게 된 걸까. 지금 내가 무슨 짓을 해버린 걸까. 분명 그녀의 집을 찾아간 것 까지는 기억이 난다. 그런데 그녀는 왜 지금 이 방에 쓰러져 있는 것일까. 잠시 바람을 쐬러 현관 문을 열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그녀의 집을 향해 걸었단 말이지.
직접 찾아가 얼굴을 마주 볼 용기가 없었을 뿐이지, 그녀의 집 위치 정도는 진작 알고 있었다. 학교 주변에 늘어져 있는 하숙집이고 자취집이고의 위치는 거기서 거기니까 말이다. 그런데 마침 그녀를 본 것이다. 누군가와 팔짱을 끼고 걷고 있는 그녀를, 그리고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작별 인사를 하고 있는 그녀를.
그런데 왜 그녀가 지금 여기에 있냐는 말이다. 어깨가 얼얼한게 무거운 무언가를 옮기고 난 후인 것도 같고 단순히 술기운이 올라온 것도 같다. 그녀는 미동도 없이 침대에 쓰러져 있다. 그토록 보고 싶던 그녀가 내 앞에 있다. 나는 대체 무슨 짓을 해 버린 걸까. 그리고 무슨 짓을 하려고 했던 것일까. 두근두근.
복수를, 복수를, 복수의 시간이다.
그녀는 분명 아름답다. 감히 나에게 허락되지 않을 만큼 충분히 아름답다. 그래 감히 나에게 허락되지 않을 만큼.


# 18

인간은 누구나 자신만의 냉장고를 지니고 있다. 개개의 냉장고들은 용량과 디자인은 제각각이지만 그 안에서 각자의 내용물을 보존하며 오늘도 돌아가고 있다. 만약 당신이 그 내부를 틈틈이 정리 하지 않는 다면 온갖 내용물들은 이리 뒤섞이고 저리 뒤섞인 채 눌러 붙어 고약한 악취를 풍길지도 모른다.
그 안의 내용물들이 언제나, 항상 당신이 좋아하는 것들 만이라 착각하지 말라. 냉장고는 너무나 공평하다. 당신이 무척이나 좋아해 깊숙한 곳에 아껴두었던 것이나, 치가 떨리게 싫지만 어쩔 수 없이 잠시 보관 해 둔 것이나 그저 공평하게 보존할 뿐이다.
그래, 엄밀히 말한다면 불안정한 보존. 그러니 변질의 가능성을 항상 염두에 두어라. 한때, 달콤했던 딸기 케이크 속에서 구더기가 바글거려도 난 책임지지 못하니까.


# 19

사용하지 않는 가전제품의 플러그를 반드시 뽑아 주세요.
당신의 조그마한 에너지 절약 실천이 지구를 살립니다.
- 공익광고협회


# 20

째깍. 째깍, 째깍.
그래 이제야 기억이 난다. 지금은 복수를 할 시간이었던 것인가. 너무나 보고 싶던 사람이다. 그녀의 머릿결을 넘기고 하얀 피부를 바라본다. 하얀 피부에 묻어 나오는 불그스름한 피. 피? 나는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일까.
복수를, 복수를 복수를. 우워어어어어
무언가가 꿈틀댄다. 무언가가 아우성친다. 선택의 시간이다. 선택. 죽은 듯이 쓰러져 있는 그녀를 다시 한 번 쳐다본다. 그동안 정말 고마웠어요. 나에게 잠시라도 허락되지 않았던 그 무엇을 선물해 준 당신께 정말 고마워요. 하지만 나 복수를 하려해요. 복수를 해야 한단 말이다. 한 번도 나를 인정한 적 없는, 단 한 번도 나를 이해하려 해 본적도 없는 그것에게 복수를 해야 한다. 나를 그 무엇보다 미워하던 또 다른 나에게 복수라는 거창한 의식을 취하기 위해서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녀가 그랬었지. 왜 이리 자신이 없냐고. 나를 조금 더 사랑하라고.
미안해. 그 녀석은 나를 사랑할, 나를 받아드릴 생각이 조금도 없었나봐. 다시 그녀를 바라본다. 손가락 끝이 조금 움직이는 것 같기도 하다. 자신감 없이 그런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녀석은 더 이상 그녀의 친구도 될 수 없는 법이다. 조금 미안하지만 이런 식으로라도 그녀를 바라볼 수 있어 행복했다. 이젠 안녕. 작별의 시간이다. 안녕의 시간이다. 복수의 시간이다.
째깍. 째깍. 째깍.
11시 59분 59초. 이제야 확실히 알았다. 저 세 개의 침들이 외로워하지도 않고 같은 자리를 맴돌 수 있는 이유를. 저들은 아주 잠시나마 하나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 그랬던 거다. 피식. 창문을 연다. 그녀를 한 번 더 바라본다. 이제 정말 안녕.
녀석을 없애고 나를 없앤다. 안녕, 안녕. 그녀도 안녕, 시계도 안녕, 그리고 너도 안녕.


# 21

사용하지 않는 전기제품의 플러그를 뽑아주세요.
사용하지 않는 냉장고의 플러그를 뽑아주세요.
사용하지 않을 냉장고의 플러그를 뽑아주세요.
사용하기 싫은 냉장고의 플러그를 뽑아주세요.


# 22

“ 선배, 이 자식 이거 정말 미친놈 아닐까요? 2층 창문에서 뛰어 내린 흔적도 발견되었어요. 근데 이 자식은 기어코 다시 옥상까지 올라갔단 말이에요. 정말 뒈지려고 환장한 놈들 많지만 이거 좀 으스스한 대요. 어차피 뛰어내릴 거면 곱게 뛰어내리지. 뭣 하러 고작 2층에서 예행연습을 한 걸까요? 이거 단순한 자살 사건이 아닐 수도 있다는 감이 드는데, 어때요 한번 파 볼까요? 감이 팍팍 오는데 말이에요”
“ 어이~ 김형사, 쓸데없는 소리 말고 저리 꺼져 주세요. 아니, 아니 꺼지기 전에 그 여자 어떻게 된 거야? 그 왜 있자나. 집에 같이 들어갔다는 그 여자. 목격자가 봤다며. 그런데 어디로 사라졌냐고. 응? 응!!”
“ 아니, 그러니까 제 말은...”
“ 쓸데없는 소리 마. 약 성분 확인 했어? 최근 병원 기록, 약물 구입 예상 루트. 다 말이야. 주변 사람들 중심으로 하나하나 알아보란 말이야. 최근 이상 징후를 보인 적이 있는지, 신상을 비관한 일이 있었는지. 짬이 몇 갠데 자살 사건 처음 접해봐?”
“ 아니. 그니까 말이지요. 그 남자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 미치겠네 진짜. 뭐랄까, 사진을 보여주고 이러 이러한 사람이라고 알려주면 고개는 끄덕이는 것 같은데, 정작 그 사람을 안다는 사람이 하나도 없으니, 나 원 참. 이거 뭐 귀신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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