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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프로포즈 데이

2021.02.25 16:3602.25

그날은 어쩐지 기분이 좋은 날이었다. 알람이 또다시 울리기 전까지는.

때르르르릉 때르르르릉

핸드폰 화면 속에서 분홍색 자명종 알람시계가 요동을 쳤다. 8시였다. 일요일 아침치고는 일찍 일어나는 것이었지만 기분이 나쁘기는커녕 입가에 미소가 배시시 감돌았다.

오늘은 그를 만나는 날이다.

100일 전 그와 사귀기 시작한 후부터 거의 매일을 만났다. 하루하루가 질리지도 않고 그저 즐거웠다. 아직은 콩깍지가 벗겨지지 않을 때였다. 몇 번의 지루한 연애 경험 끝에 나는 설렘의 유통기한을 알아냈다. 이제 슬슬 콩깍지가 벗겨지기 시작하겠지. 나는 나를 잘 알았다.

부지런히 일어나 샤워를 하고 기초화장품을 겹겹이 바르며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음, 역시 어제 팩을 하고 잔 보람이 있어. 밉게 돋아났던 뾰루지도 언제 튀었나왔었냐는 듯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콧노래를 부르며 기초화장을 끝낸 뒤 머리를 말리고 옷을 골랐다.

“이게 낫나? 아님 이거?”

목부터 발끝까지 복숭아 향 바디로션을 발라 달콤한 향을 폴폴 풍기며 전신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자기 전에 골라놓았던 두 개의 원피스를 번갈아 대 보았다. 흰색 바탕에 분홍색 장미무늬 원피스와 초록색 바탕에 빨간 튤립무늬 원피스였다. 둘 다 하늘하늘한 시폰 소재 원피스라 디자인에 별 차이는 없었지만 어디 색이 같은가. 하늘아래 같은 색조는 없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한 10분을 넘게 그러고 있었을까. 결국은 장미무늬 원피스를 선택해 입고 다시 화장대 앞에 앉았다. 물에 적신 퍼프를 이용해 파운데이션을 바르고, 분홍색 블러셔를 칠하고 브라운 섀도우로 눈가에 음영을 준 뒤 마스카라를 덧발랐다. 푸시아핑크 색 립스틱까지 바르니 외출준비는 끝이었다.

어제 미리 골라놓은 핸드백에 소지품들을 챙겨 넣고 베이지색 하이힐을 챙겨 신고 밖으로 나갔다. 미리 불러둔 택시에 몸을 싣고 약속장소인 카페로 향했다.

날씨도 정말이지 완벽했다. 5월 초의 초여름이었다. 벚꽃 흩날릴 시기는 지났지만 붉은 장미가 곳곳에 피어날 때였다. 만발한 네온 빛의 철쭉들도 화단에서 만개해 올해도 어김없이 피었다고 소리들을 지르고 있었다.

“오래 기다렸어?”

택시에서 내려 카페 입구에 서서 기다리던 그에게 달려들었다. 나를 발견한 그가 웃었다. 검은 머리 검은 뿔테안경. 군데군데 살이 붙어 적당한 덩치의 곰 같은 인상. 길가면 10분에 한 번은 마주칠 것 같은 흔한 인상의 남자였다. 어쩌다 이 남자를 만나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지만 연예인 급이 아닌 이상 주변에서 잘생긴 남자를 만나기란 힘든 법이다.

예전엔 예쁜 여자들은 길에 널리고 널렸는데 왜 그만큼 잘생긴 남자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을까, 하는 생각에 우울해하기도 했지만 이미 포기한 지 오래였다. 조금 반반한 녀석들이 얼굴값을 하는 걸 보는 것보다 차라리 덜 생긴 남자를 만나 꼴값 못하게 하는 게 마음이 편하기도 했다.

얼굴 생김새는 이미 포기했으니 그렇다 치고 그는 마음이 잘 맞는 남자였다. 수더분했고 적당히 사람을 배려할 줄 알았다. 맞장구를 잘 쳤지만 영혼 없는 리액션을 보이는 남자도 아니었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렇기도 하겠지만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먼저 연락을 해오는 남자였다. 그만하면 만족했다.

블로그에서 미리 검색해 찾아둔 메뉴를 시키자 얼마 안 있어 소시지와 달걀프라이를 곁들인 팬케익과 샐러드가 나왔다. 하얗고 깔끔하게 꾸며진 카페 인테리어와 은은한 오렌지 빛 조명 아래서 음식이 더 맛있어 보였다. 달걀노른자가 깨져있었지만 그 나름대로 터진 노른자가 하트 모양으로 보여 오히려 자랑할 만 했다. #하트프라이.

가격에 비해 그리 퀄리티가 좋은 메뉴는 아니었지만 SNS에 올릴 거리가 필요하다는 걸 생각하면 그리 비싼 것도 아니었다. SNS에 올릴 사진을 찍는 내 버릇을 알고 있는 그가 잠시 기다려주고는 먹기 시작했다.

“어때. 맛있어?”

“응. 괜찮은데?”

그가 웃어보였다. 딱히 먹고 싶어하는 게 없는 남자라 그가 더욱 마음에 들었다. 메뉴를 내가 고를 수 있게 되었으니까. 나는 항상 남이 골라주는 걸 기다리기보다는 먼저 고르는 타입이었다.

“내 친구 정수가 말이야...”

그와 브런치를 나누어먹으며 그가 친구얘기를 꺼냈다. 그와의 대화에서 종종 등장하는 정수씨였다. 그의 초등학교 친구라는 정수씨가 웃긴 행동을 한 일화를 들려주어 그는 날 즐겁게 해주었다. 그의 얘길 들으며 나는 어김없이 폭소를 터뜨렸다.

식사를 끝마쳐 가는데 뒤에서 쟁반이 요란하게 나뒹구는 소리와 함께 퍽 소리와 함께 뭔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자라처럼 목을 움츠리고 뒤를 돌아보니 디저트로 시켰던 유리컵에 담긴 딸기스무디가 쏟아져 바닥에 처참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당황한 웨이터가 사과하며 다시 가져다드리겠다고 허둥지둥 주방으로 돌아갔다.

그것만 빼면 정말이지 좋은 날이었다. 날씨도 구름 한 점 없이 선선하고 따듯했다. 브런치를 먹고는 한낮의 공원에 나가 잔디밭에서 뛰노는 강아지와 아이들을 보며 웃었다.

“너는 나중에 아이 가질 거야?”

보물이라도 되는 듯 펭귄 캐릭터가 그려진 헬륨풍선을 손에 꼭 쥐고 걸어오는 아이를 바라보고 있는데 그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아이? 글쎄. 예전엔 별 생각 없었는데...잘 모르겠어. 요즘엔 애들이 귀여워 보이기는 하네.”

아이 쪽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아이스크림을 핥으며 대답했다. 그때 순간 머릿속으로 지난밤의 엄마에게서 걸려온 전화가 생각이 났다.

“얘, 넌 결혼 언제 할 거니?”

늘 하는 그 말이었다. 같이 싸우던 전선을 떠나 새로운 전장으로 뛰어든 것 같은 결혼식장의 친구들을 보며 전혀 부럽지 않다는 생각을 했지만 하나 둘 곁을 떠나기 시작하는 그들을 보면서 위기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결혼은 무슨...”

엄마에겐 아직 남자친구를 공개하지 않은 터라 대충 얼버무렸다.

“너 혹시 문제 있는 건 아니지?”

하지만 엄마는 오늘은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는 듯 나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문제는 무슨!”

결혼을 하지 않으면 하자 있는 것처럼 보는 어른들의 시선에는 신물이 났다. 왜 인간을 남녀 둘이 붙어있어야 온전한 하나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 건가. 촌스럽다.

“그럼 결혼을 왜 못해. 언제 할거냐구.”

이상한 도돌이표처럼 결국은 그 얘기로 돌아간다. 지겨웠다.

“네 언니는 시집가서 애 낳고 잘만 사는데.”

엄마 시대의 사람들에게 결혼은 상식이다. 결혼해서 애를 낳지 않은 사람은 아직 성인이 된 것이 아니다. 그러니 저렇게 나를 애 취급하는 것도 이해가 가기는 했다. 불쾌한 건 마찬가지였지만. 하지만 시대는 달라졌고 결혼은 더 이상 상식이 아니다.

“언니 애 낳을 때 난산이라서 엄청 아파했잖아. 엄마도 우리 낳을 때 힘들었다며. 나도 그러면 어떻게 해?”

나의 반격에 엄마가 잠시 말이 없었다. 이때다. 틈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언니 애 낳고 좀비처럼 살던데. 엄마한테도 자꾸 와서 애 봐 달라 한다고 귀찮다며. 나 애 낳으면 엄마가 키워줄 거야?”

“야, 요즘엔 의술도 발달하고 돈만 있으면 안 되는 게 없어. 그래서 너네 언니가 죽었냐? 넌 이제 돈도 잘 벌잖아.”

내가 번 돈을 다 애한테 쓰라는 거야? 하고 반박하려 했지만 엄마가 갑자기 머리가 아프다며 전화를 끊어버렸다. 겨우 엄마와의 전화를 끊고 잠시 우울해하다 잠들었던 게 어젯밤이었다.

남자친구와 결혼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분명하게 얘기해 본 것은 아니었지만 그도 나를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고 나도 그가 괜찮았다. 결혼을 하면 한 사람과 60년은 같이 살아야 된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소름이 돋는 것 같았지만 그 부분은 나중에 생각해볼 일이라며 애써 넘겼다.

사실 나이를 생각해보면 딱 결혼적령기였다. 문제없이 대학에 진학했고, 스트레이트로 졸업한 뒤 취직도 했으니 인생의 당연한 단계인 결혼이라는 관문도 넘으면 되는 것이다. 여자 나이는 크리스마스 케익이라는 말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코웃음 칠 정도는 되었지만 혼기를 놓치면 노산의 나이가 가까워진다는 것은 나를 불안하게 했다. 아이를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었지만 난자가, 내 신체의 일부분이 기능을 다하지 못한 채 늙어간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었다.

공원에서 일광욕을 하며 즐거운 한 때를 보내고 근처의 영화관으로 이동했다. 미리 예매해둔 슈퍼히어로 영화였다. 그가 좋아하는 시리즈였기에 내가 미리 예매해두었다. 센스 좋다고 말하는 그의 아첨인지 칭찬인지 모를 말이 듣기 싫지는 않았다.

전작을 보지 않았던 터라 시리즈의 내용을 모르니 긴 러닝타임이 지루하게 느껴졌다. 눈앞에서 빛이 펑펑 터지는 화려한 특수효과에 눈이 아프고 귀가 멍멍했지만 잘 참아냈다. 초능력자들을 모아놓은 영화였지만 잘 포장된 전쟁영화나 다름없다는 생각을 했다. 사람들의 전쟁욕구를 충족시키려면 이런 거라도 만들 수밖에 없나보다 하며 하품을 깨물었지만 옆자리에 앉은 그는 어린아이처럼 눈을 빛내며 화면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팝콘과 콜라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영화에 몰입을 못한 탓에 무서울 정도의 집중력을 발휘하는 그가 귀엽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다.

영화를 본 후 만족스러워하는 표정의 그와 레스토랑으로 이동했다. 레스토랑으로 가는 길 내내 그는 오늘 본 영화가 어떤 점에서 재미있었는지 잘도 조잘거렸다. 운전을 하는 동시에 빠르게 움직이는 그의 입이 신기해 보일 지경이었다.

“와, 여기 좋다.”

그의 안내에 따라 도착한 레스토랑은 교외의 분위기 있는 식당이었다. 고즈넉한 분위기에 세련된 인테리어가 돋보였다. 어느새 해가 진 바깥에는 가로등 불빛을 받으며 조용히 흘러가는 검은 강물이 눈에 들어왔다.

“응. 여기 예약손님밖에 안 받아서. 한 달 전부터 예약했어.”

그가 살짝 얼굴을 붉힌 채 아이같이 자랑스러워하는 얼굴을 내보였다. 잘했다며 그에게 웃어 보이고 와인 잔에 담긴 물을 마시며 바깥 풍경을 감상했다.

여러모로 만족스러운 저녁이었다. 레스토랑 내부에 조용히 흐르는 음악은 흥취를 돋웠고 미슐랭 스타를 받았다는 식당답게 음식은 맛이 있었고 정갈했다. 차례차례 나오는 코스 요리를 먹으며 나누는 대화는 즐거웠다. 그렇게 저녁이 마무리되는가 싶었는데 대미를 장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디저트로 나온 분홍색 알형 초콜릿이 흰 접시 위에 담겨 있었다. 작은 컵에 담긴 데워진 초콜릿을 부으면 된다는 안내를 남기고 웨이터가 떠났다. 마주 앉은 그가 먹어보라며 먼저 자기 몫의 뜨거운 초콜릿을 *모양으로 부었다. 이윽고 부드럽게 쪼개진 분홍색 초콜릿 아래 둥근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접시 위에 소담스럽게 담겨있는 것이 보였다.

그를 따라 내 몫의 초콜릿을 붓자 보름달처럼 동그란 아이스크림 위에 꽂힌 은색 반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에는 이물질인 줄 알고 어리둥절했다가 그게 반지임을 깨달은 순간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정수리 위로 번개가 내리꽂히는 기분이었다. 잠시 멍하니 녹아가는 아이스크림을 바라보았던 것 같다.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내게 그가 웃으며 말을 건넸다.

“나랑 결혼해줄래?”

그때까지도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던 내가 경련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왜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 아직도 아리송하기만 하다. 프로포즈 장면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수도 없이 봤고 그가 내게 프로포즈를 안 할 거라 생각했던 것도 아니면서. 오히려 내 프로포즈는 어떤 식일까 하고 평소에도 수없이 생각해왔던 것이 사실이었다. 왜 그 순간에 그렇게 멍청히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것인지. 아직도 나 자신이 이해되지 않았다. 왜 그렇게 놀랐던 걸까.

냅킨에 닦은 다이아몬드반지를 끼고 식당을 나와 호텔로 갔다. 얼떨떨한 기분으로 샤워를 하고 평소와 같은 섹스를 하고 잠이 들었다. 잠이 든 그를 등지고 달빛이 들어오는 창 쪽에 반지를 비춰보면서 이상하게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선택받았다, 인정을 받았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대체 무엇에 인정을 받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쓸모 있는 여자가 되었다는 생각이 환희로 가슴을 채웠다. 오늘은 하여간 좋은 날이었다. 인생에 몇 안 되는 완벽한 날. 이런 날들만 계속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정말 어느 노래가사처럼 시간을 멈추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며 잠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자기 전에 한 그 생각이 문제였는지 모른다.

오늘 같은 날만 계속되었으면 좋겠어.

결혼반지를 받고 행복해하던 내게 길 잃은 어떤 요정이 다가와 머릿속 생각을 훔쳐보고는 그래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산 사람 소원쯤 못 들어주겠냐 하고 요술지팡이를 흔든 것일까.

 

정말 그 날이 반복되었다.

 

핸드폰 알람소리와 함께 나는 내 방 침대에서 일어났다. 방은 어제 아침과 그대로였다. 옷장 문고리에 걸어놓은 원피스 두 개까지 완벽히.

처음에는 약간 얼떨떨했다. 핸드폰 시계를 보고 회사에 지각했다고 생각했다. 왜 평소와 다르게 늦게 시간이 맞춰져 있었던 것인지. 환한 창밖을 보면서 낭패감에 머리를 쥐어뜯고 튕기듯 침대 밖으로 나갔다. 얼굴에 찬물을 끼얹고 칫솔을 입에 물며 기본화장 하는데 시간이 얼마나 드는지 머릿속으로 계산해보는데 기분이 뭔가 이상했다. 책상 위에 둔 화장품 파우치를 뒤지는데 빈 왼손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늘 왼손은 비어있었는데.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뭔가 잃었다는 느낌이 사라지지 않았다.

반지가 없어졌다.

언제 잃어버린 거지? 어느새 회사에 지각했다는 생각은 뒷전이고 반지를 잃었다는 것에 더 당황했다. 입가로 치약거품이 질질 흐르는 것도 아랑곳없이 방바닥을 손으로 마구 훑었다. 그러고 보니 모든 게 이상했다. 분명 어제 호텔에서 잠들었던 것 같은데 왜 집에 와있지? 호텔에서 직장으로 바로 출근하자고 그와 얘기했던 것 같은데. 그가 데려다 놓은 것일까?

뭐가 뭔지 모를 혼란스러운 기분에 다시 핸드폰을 뒤집어 보았는데 오늘은 일요일이었다. 그럼 어제 겪었던 일들은 모두 꿈이었단 말인가? 하지만 그렇게 생생했는데? 이상한 기분에 빈손을 더듬었다.

토요일 저녁에 걸어놓은 원피스가 옷장 문고리에 그대로 걸려있었다. 장미무늬 원피스와 튤립무늬 원피스를 두고 한참을 노려보다가 장미무늬 원피스를 입었다. 그래. 꿈에도 나왔다면 이건 무슨 계시일거야. 여유 있게 옷을 갈아입고 나갈 준비를 했다. 택시 앱을 켜 택시를 불렀다. 어디선가 본 거 같은 하얀 택시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택시번호를 외우고 메모장에 써두었다. 6857. 택시기사 아저씨의 얼굴도 유심히 봤다. 특별할 것 없는 가는 눈에 부은 얼굴, 그리고 머리가 벗겨져 올이 듬성듬성한 머리였다.

“왔어?”

“응...”

목적지인 카페 앞에 내리고서도 나는 가자미눈을 뜬 채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왜, 무슨 일 있어?”

“아, 아냐. 아무것도.”

기시감이 느껴진다고. 데자뷰인거 같아. 말하고 싶었지만 그가 내 기분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어디선가 기시감을 지나치게 자주 느끼는 사람은 정신분열일 가능성이 높다는 기사를 언뜻 본 것 같아 가슴이 철렁했다.

내가 봐둔 카페의 유명한 메뉴를 시키고 곧 음식이 테이블로 날라져왔다. 짐작대로 계란 노른자는 터져있었다.

“왜, 맛이 없어?”

“아냐. 어때, 맛 괜찮아?”

그토록 고대해 온 SNS에서 유명한 카페였음에도 불구하고 사진도 찍지 않은 채 음식을 의심스럽다는 듯 쳐다보고 뒤적이는 날 보고 그가 물었다. 계속 그러면 그가 이상하게 볼 것 같아 억지웃음을 지으며 포크로 소시지를 하나 찍어 입가로 가져갔다.

이거 분명 짜다.

입에 채 넣기도 전에 뇌에서 미리 신호를 보내왔다. 역시 보통의 소시지 보다 훨씬 짰다. 어째서 처음 먹어보는 음식의 맛을 알고 있는 걸까.

그가 하는 친구의 얘기를 들어주다가 화장실에 가겠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친구 정수에 관한 일화도 어딘가 들어본 적이 있는 듯한 것이었다. 화장실에 가려는데 마침 웨이터가 은쟁반에 우리가 주문한 딸기스무디를 얹고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조심하세요!”

마침 자기 신발 끈에 발이 걸린 웨이터가 휘청하며 쟁반을 놓쳤다.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스무디컵을 쥐었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쟁반이 나뒹굴고 웨이터가 대자로 엎어졌다. 하지만 스무디는 내 손에 들려있었다. 웨이터까지는 내 팔이 닿을 수 있는 거리가 아니라 구해줄 수 없었지만 스무디는 기적처럼 내 손에 쥐어져 있었다.

“괜찮으세요?”

“네. 죄송합니다.”

“제가 잡았으니까 다시 안 가져다 주셔도 돼요.”

놀란 표정의 웨이터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무릎을 문지르며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스무디를 가져다 놓으려 내 자리로 돌아오니 남차친구가 입을 벌린 채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어보였다. 하지만 내 마음속 한구석은 어쩐지 끈적끈적한 스무디가 흘러내린 손가락처럼 찝찝함이 가시지 않았다.

이상한 일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공원에 가서 그와 나란히 벤치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도 그와의 대화에는 집중하지 않은 채 아이들과 강아지들이 걸어오는 길만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래서 정수가 글쎄...내 말 듣고 있어?”

소프트아이스크림을 무의식적으로 열심히 핥으면서 펭귄풍선을 든 아이 뒤에 따라오는 강아지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래, 비숑. 비숑 다음에는 뭐였더라? 눈을 질끈 감고 기억을 짜냈다.

“내 말 듣고 있냐니까.”

“푸들! 갈색 푸들!!!”

그가 내 어깨를 두드리는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길 건너 아이와 강아지들이 산책하는 길을 가리켰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손끝으로 가리킨 끝에 여자 하나와 갈색 푸들이 나란히 걸어오기 시작했다.

“예쓰!”

뭐가 그리 기분 좋은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정답을 맞혔다는 기분에 양 주먹을 쥐고 쾌재를 불렀다. 뒤통수가 당기는 기분에 옆을 돌아보니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 왜 그래...아침부터...”

“아, 미안, 미안.”

그제야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그에게 사과를 했다. 나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던 그가 영화시간 다 됐다며 자리를 옮기자고 했다.

분명 처음 와보는 영화관이었지만 익숙하게 표를 뽑고 광고가 시작된 상영관에 앉아있는데 영화 내용이 떠올랐다. 우연이겠지. 비숑 다음에 갈색 푸들이 나왔다 해도 요즘 제일 많이 키우는 개들 아니야? 그 정도야 맞을 수 있지. 영화 내용도 꿈에서 본 거니 실제랑은 다를 거야. 광고가 나오는 동안 심심해져 그에게 말을 걸었다.

“여기서 골드맨이 다른 히어로들 대신해서 죽는다?”

농담하듯 말을 걸자 그가 웃었다. 다행이었다. 아까 이상하게 군 것에 대한 보상이 될 수 있길 바랐다.

“너 이 시리즈 본 적 없잖아. 그리고 이거 오늘 개봉한 건데?”

“응. 근데 어디서 본 거 같아.”

나는 자신만만하게 킬킬댔고 곧 영화가 시작했다.

영화를 보는 동안 놀라 약간 굳어져 있던 그의 얼굴은 영화를 보고 나와서도 좀체 풀리지 않았다.

“어떻게 알았어?”

“어, 그게...”

뭐라고 해야 하지. 꿈에서 봤다고? 아니, 그보다 더 정확하게는 어제 겪었던 일인 것 같아서 라고 해야겠지. 부루퉁한 표정의 그를 어떻게 달래야 할지 난감했다.

“너...”

“응?”

“나한테 스포한 거지! 스포 보고 왔구나!”

그가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꿈에서 봤느니 어쩌느니 하는 미친 소리를 늘어놓는 것보다 차라리 그 편이 나은 것 같았다.

“응, 미안해...너무 좋아하길래 놀려주고 싶어서.”

뒤통수를 긁적이자 그가 심통 난 얼굴로 차를 향해 걸어갔다. 그를 뒤따라 차에 올라타자 어김없이 차는 기억 속의 그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여기 어때?”

“어? 어어... 되게 좋다. 전망도 좋고. 예약하기 힘들었겠네.”

“어떻게 알았어? 여기 예약이 한 달 전에만 겨우 된다고 해서 어렵게 예약한 거거든.”

스포일러에 대한 화는 풀린 것인지 그가 웃었다. 나도 모르게 ‘예약’이라는 단어는 왜 나오는 것일까.

“별로야?”

그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내 모습을 눈치 챈 듯 조용히 물어왔다. 열심히 좋아하는 티를 내려고 했지만 봤던 걸 또 보는 터라 감흥이 떨어지는 건 사실이었다. 모든 게 내 예상에서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돌아갔다.

식사는 두 번 먹어도 맛있었지만 핑크색 알 모양 초콜릿이 날라져 왔을 땐 나도 모르게 표정이 굳었다.

“먹어봐.”

그가 녹인 초콜릿을 부어 *모양으로 선을 그으며 말했다. 그의 말에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초콜릿을 부었다. 역시 알고 있는 그 디자인, 받은 순간 너무나 기뻤던 그 다이아몬드 반지가 아이스크림 위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고마워.”

떨리는 그의 목소리에 작고 웃어보이고는 반지를 받아들었다. 그의 생생한 반응도 모두 다 처음인데 어째서 나만 이렇게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시시한 기분이 드는 걸까? 마치 누군가에게 설레는 기분을 빼앗겨 버린 것 같았다.

호텔방에서의 섹스도 사실 정해진 패턴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라 지루했다. 어제는 오랜만이라 좋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았다. 나도 적극적인 타입은 아니었고 그도 그다지 열을 올리는 타입은 아니었으니. 잠자리가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대화가 통하니 그와는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

지친 그가 먼저 등 뒤에 곯아떨어지고 나는 핸드폰을 꺼내어 알람을 다시 확인했다. 알람은 평소대로 맞추어져 있었다. 12시가 넘어가는 걸 보고 싶었지만 이불 속에서 왼손 약지에 낀 반지를 만지작거리다 잠이 들었다.

 

때르르르릉 때르르르릉

이건 꿈이 아니다.

언제 잠이 들었는지 몰라 화들짝 일어나던 내 시야에 익숙한 내 방이 들어온 순간 직감했다. 그리고 이건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3번째 반복되는 하루에서부터는 당황하지 않고 조용히 일어나 침대 위에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옷장 문고리에는 역시 토요일에 골라놓았던 원피스들이 걸려있었다.

혹시 누가 날 곯리려고 몰래카메라 쇼를 하는 것일까? 그 생각이 들자 화닥닥 자리에서 일어나 카메라가 없는지 살폈다. 행거 사이를 뒤져보고 옷장, 화장실 문을 열어보았지만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었다. 연예인도 아닌 바에야 애초에 나한테 누군가 관심을 가질 리가 없다. 게다가 핸드폰 시계를 조정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힘이 빠져 화장대 앞 의자에 주저앉아 다시 머리를 쓸어 올리며 생각에 빠졌다. 그래. 애초에 그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니었어. ‘오늘 같은 날만 계속되었으면 좋겠다’니.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원이었던 거야. 누군가에게 소원을 빈 것도 아니었지만 뭔가 탓할 것이 필요했다. 어떻게든 원인을 알기 위한 발악이었다.

어쩌면 오늘이 제대로 마무리 되지 않아서 그런 것 아닐까? 내가 뭔가 빼먹은 게 있었던 거야. 다른 타임리프 영화들을 봐도 주인공이 못되게 군다거나 그래서 벌주듯이 하루가 반복되던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힘이 생겼다. 그래, 오늘 하루를 첫날이랑 똑같이 지내면서도 좀 더 긍정적으로 보내보는 거야. 첫날 입었던 원피스를 다시 꺼내 입고 공들여 화장을 하고 나갈 준비를 했다.

하지만 허사였다. 지나치게 친절한 내 태도에 어디 아프냐고 묻는 남자친구의 걱정스러운 질문만 얻었을 뿐이었다.

그 후로도 수많은 시도가 있었다. 한 번도 싸워본 적 없는 남자친구에게 일부러 시비를 걸어 싸워도 보았고(그가 재빨리 사과하는 바람에 싸움이 되지도 못했다) 혹시 결혼하자는 말이 문제인가 싶어 결혼하자는 말을 듣지 않게 레스토랑에 가기 전에 배가 아프다고 집에 먼저 가보기도 해보았으며, 결혼의 결 자도 나오지 않게 사전차단을 했다. 그러나 효과는 없었고 어딘가 침울한 그의 표정만 발견했을 뿐이었다. 섹스가 문젠가 해서 열정적으로 해보았지만 육체적인 즐거움만 얻었을 뿐 이 무인도에서는 빠져나갈 수 없었다.

결혼을 완성하지 못한 게 문젠가 해서 혼인신고를 해볼까 생각도 해봤지만 오늘은 관공서가 열지 않는 일요일이었다. 이 시간의 섬에서 빠져나가지 않는 이상 결혼할 수 있는 방도가 없었다.

어제는 처음으로 그와 싸웠다. 매일 반복되는 오늘을 과연 ‘어제’라고 표현해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렇게라도 붙잡을 것이 필요했다.

일은 영화관에서 터졌다. 브런치는 국밥집에서 해결했다. SNS게시물이 싹 지워져버리니까 SNS에도 흥미가 없어졌고, 그 카페에서 먹어볼 수 있는 건 다 먹어본 상태였다. 그리고 나는 돼지국밥을 좋아한다. 원피스도 옛날의 일, 매일을 같은 차림의 그를 보니 나도 꾸밀 의욕이 없어져 보라색 후드 티에 청바지를 입었다. 맨 얼굴을 내보여도 아무렇지 않았다. 그가 약간 놀라는 것 같았지만 겉으로 티를 내지는 않았다. 그가 매너 있게 모른 척 하는 것도 이젠 지겨웠다. 내가 못된 거라는 건 알지만 모두가 즐거운 놀이공원에서 혼자 같은 놀이기구를 백번쯤 타면 사람이 좀 이상해질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

공원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알아맞히는 것도 질렸고(비숑프리제 뒤에 나타난 푸들에게는 말티즈 여자친구가 있었다) 볼 수 있는 영화도 다 봤다. 보기로 했던 히어로 영화를 못 보게 되자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내가 보기 싫다고 하니 혼자라도 보러 갈 생각이었는지 나중에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왜 항상 밥 먹고 영화관이야? 짜증난다, 정말.”

노골적으로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니 그의 안경 속 눈이 커졌다.

“왜 그래? 오늘따라. 너 안 같아.”

그도 그럴 만 했다. 99일 동안 만나오던 나랑 100일째인 오늘의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니까. 나는 지나온 시간동안 원피스도 입지 않고 화장 개수도 줄이며 천천히 변해갔지만 그는 그걸 보지 못했다. 그를 좋아하지 않는 것도 아닌데 그렇다고 99일 동안 그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한 나도 본래의 나로 행동하는 100일 째의 나도 전혀 다른 사람도 아닌데.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답답함에 짜증이 치밀었다. 의도와 다르게 가시 돋친 말이 튀어나갔다.

“나 안 같으면? 헤어지던가.”

“...”

할 말을 찾지 못한 그가 작게 입을 벌렸다.

“....내가 뭘 잘못 했니, 너한테?”

그가 억울할 만도 하다. 하지만 울먹울먹하는 그의 얼굴을 보면서도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어차피 오빠는 나랑 못 헤어져.”

남자친구가 입을 떡 벌리고 어이없어하는 얼굴이 보였지만 아무렇지 않았다. 어차피 내일이면 그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 채로 상쾌하고 조금은 두근거리는 상태에서 하루를 시작할 거고 수많은 똑같은 날들을 보내며 상처받는 쪽은 언제나 나니까. 남자친구에게 모진 말을 해도 결국 나는 내 가슴을 후벼 파고 있는 거였다. 영화관을 나와 집으로 향하는 택시를 탔다. 그러고는 집으로 곧장 가서 많이 울었다. 그와 나의 시간에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 안에 있어도 같은 기억을 공유하지는 못했다. 그에게 나는 언제나 100일 째의 나지만 나는 그 위로 숫자라 자꾸만 쌓여가고 있었다. 마치 무인도에 갇힌 기분. 나만이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외로운 일이었다.

혹시 결혼하지 말라고 조상신이 도운 것일까. 다음날 또 반복된 일요일 아침에 그 생각이 들자 머릿속에 번개가 스쳐지나가는 것 같았다. 지금의 남자친구를 내게 소개시켜 주었던 내 친구 자인이. 그녀는 남자친구의 직장동료인 동시에 내 친구이기 때문에 그에 대해 가장 객관적으로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남자친구의 절친한 친구인 정수 씨의 여자친구이기도 했다.

그에게는 몸이 아파 약속에 못 나가가겠다고 하고 자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미 몇 번 해봤던 수작이라 말 꺼내는 게 어렵지도 않았다. 언제나 오늘이 처음인 그는 내 걱정을 열심히, 그리고 한결같이 해주었다. 어제 싸우고 나서 충격 받은 그의 얼굴이 떠올라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그런 그의 뒤에 무슨 비밀이 숨겨져 있을 지도 모른다.

“여보세요.”

일요일 오전이라 아직 잠이 묻어있는 목소리였다. 다급한 목소리로 그녀를 깨우고는 남자친구에 대해 물었다. 일요일 오전의 늦잠을 방해당한 직장인이라 언짢아진 목소리가 퉁퉁 부어 있었지만 오늘이 지나면 다시 잊어버리게 될 것이다. 자인은 일요일 오전의 늦잠을 언제까지나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갑자기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것도 아니고 왜 그래? 너 남친이랑 무슨 문제 있어?”

“아니, 그게 아니고... 좀 궁금해서. 너 혹시 뭐 들은 거 없어?”

“있긴 뭐가 있어. 있었으면 내가 너한테 소개시켜 줬겠냐. 너랑 나랑 몇 년 친구인데...”

수화기 너머로 퉁퉁 부은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다시 잠에 빠져드는 것인지 목소리가 작아졌다.

“야아, 자지 말고. 잘 생각해봐. 다음에 만날 때 너 가고 싶다고 했던 해산물 뷔페 데려가줄게.”

“뭐?”

하품을 뿜던 목소리가 커졌다. 정신이 번쩍 든 것이 수화기 너머로도 느껴졌다. 약속도 오늘 12시면 사라질 테니 공수표를 마음껏 날려도 걱정이 없었다. 장점이라면 장점이었다. 열심히 올린 SNS 게시물도, 친구한테 하는 부담스런 약속도 내일이 없으니 책임 질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근데 진짜 없어. 너 남친이 정수오빠 나한테 소개시켜 준 거잖아. 직장 여직원들 사이에서 평판도 좋고, 일도 잘해. 그렇다고 여자들이랑 친한 것도 아니고. 남자직원들이랑 그렇게 가깝게 지내지는 않는 것 같던데, 그게 감점 요소는 아냐. 너도 알잖아. 남자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남자는 좋은 남자 아닌 거. 마음 터놓고 지내는 친구라고는 초등학생 때부터 친해온 정수 오빠뿐이고. 정수 오빠도 답답할 정도로 착하다고 그러던데. 사생활도 깨끗한 거 같고. 성격도 무던하고. 집도 그만하면 여유 있고, 부모님도 해외로 자주 다니는 직업이라 자주 보지는 않는다던데. 왜? 너 남친이랑 결혼하려고 뒷조사 하는 거야?”

그녀가 핵심을 찔렀다. 잠시 얼어 어버버하니 수화기 너머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너 남친이 너랑 결혼하고 싶어 한다고 정수오빠가 얘기하긴 하던데. 너도 생각 있는 거야?”

“그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내가 이상한 병에 걸린 것 같다고, 아니 끝없이 시간이 반복되는 이상한 공간에 갇힌 것 같다고 그녀에게 얘기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아무도 이해 못할 것이고 어쩌면 날 정신병원에 입원시킬지도 모른다. 그래봐야 다음날 일어나면 내 방이겠지만.

자인과 통화를 끝낸 후 대자로 누운 채 다시 내 방 침대에서 눈을 뜬 채 어제와 같은 천정의 흰 벽지를 바라보았다. 내 인생도 저렇게 하얗게 지워져버린 것일까. 그나마 회사에 가야 하는 월요일이 아니라 일요일이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썰물처럼 밀려왔다가 빠져나갔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여행이나 가는 거야.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내일은 또 일요일일 텐데 뭐. 장거리비행은 비행기 안에서 하루가 끝날 게 뻔했기 때문에 가까운 곳으로 여행을 다니기 시작했다. 아침에 출발해 점심을 여행지에서 먹고 저녁에 호텔에서 잠들면 다시 내 방으로 돌아와 있었다. 아프다고 거짓말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나 양심에 찔렸지 계속 반복하니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는 항상 처음 듣는 소리였기에 나를 걱정해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여행이 지루해지면 집에서 뒹굴었다. 아무리 어지럽혀 놔도 다음날 아침이면 모든 게 원상태로 돌아와 있었다. 마치 돈 안 드는 가정부를 둔 느낌이었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SNS를 아무리 열심히 해도 다음날이면 사라지는 게 억울해서 일부러 어그로를 끌어본 적도 있다. 악플이 달리면 미친 듯이 댓글을 달고 고소하겠다고 협박도 해보고 별 짓을 다 했다. 악플이 실시간으로 달리는 건 무서운 일이었다. 그것을 발견한 남자친구가 저녁에 전화를 걸어온 일도 있었다. 하지만 괴롭고 나를 찌르는 것 같은 감각이 찾아올 때마다 살아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며칠이나 지났을까. 결국 몸에 손을 대고 말았다. 아마 SNS 사건부터 나는 망가져 가고 있었던 것 같다. 피라면 질색을 하고 고어영화 같은 것 죽어도 못 봐서 아무리 좋아하는 배우가 나오더라도 못 본 영화가 얼마나 많이 쌓여있던가. 그런 내가 칼로 내 팔을 찔렀다. 몸에는 무슨 흔적이 남을까 싶어서 시작한 일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문신을 했어도 됐을 일이지만 그 당시엔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아니, 하기 싫었다고 봐야겠지. 당장 살아있다는 감각을 느끼고 싶었으니까. 덜덜 떠는 손으로 내 팔을 찌를 때 두려움과 함께 이상한 희열이 나를 사로잡았다. 머리털이 곤두서는 감각이었다.

다음날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한 몸으로 다시 침대에서 일어났을 땐 울부짖으며 방을 때려 부쉈다. 옷장에 걸려있던 원피스를 찢고 화장대에 있던 화장품을 다 쓸어버리고 행거가 무너졌다. 깨진 향수병에서 냄새가 올라와 뒤섞여 머리를 아프게 했다. 방은 금세 핑크색 지옥이 되었다.

미친 듯 소리를 질렀지만 방음이 잘되는 건물 탓인지 항의하러 누군가 오는 기색은 없었다. 지친 채 방에 앉아 당장 이 짓을 그만 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건 희열이었지만 다신 보고 싶지 않은 무엇이 그 속에 있는 것 같았다.

남자친구에게 연락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티비를 켰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정상으로, 하루하루 빠짐없이 반복되어가고 있었지만 나의 의식만은 급격하게 노쇠해가고 있었다.

이제는 어느 채널에 무슨 프로그램이 방영하고 있는지 외울 수 있을 만큼 익숙해진 일요일의 TV였다. 멍한 정신으로 채널을 돌리는데 뇌과학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나왔다. 채널돌리기도 지쳐 리모컨을 내려놓고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디든 시선을 고정할 수 있는 곳이 있어 다행이었다.

사람의 인체 모형이 3D 영상으로 나오고 두뇌 부분이 클로즈업 되었다. 이어 머리가 희끗한 남자교수가 나와 기억상실에 관한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기억상실. 그래. 어쩌면 저게 답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 문득 정신이 들었다.

핸드폰을 켜 교수의 이름을 검색하니 어렵지 않게 그의 정보를 찾을 수 있었다. 다행히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그가 다니는 대학교 연구실이 있었고 그는 일요일 오후엔 늘 연구실에 있는다고 했다. 파자마 차림에 가디건만 걸쳐 입고 슬리퍼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마치 병원을 뛰쳐나온 환자 같은 차림에 사람들이 나를 힐끔거리는 기색이 느껴졌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일요일의 캠퍼스는 조용했다. 호수를 산책하는 사람들이 점점이 보이고 길가를 다니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미리 알아둔 그의 연구실로 직행했다. 혹시 오늘은 자리에 없거나 잠시 다른 데 갔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상관없었다. 내가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수 있을 때까지 난 여기서 몇날 며칠이고 기다릴 거니까. 내게 있는 거라곤 무한히 반복되는 시간밖에 없었다.

다행히 그는 연구실에 있었다. 문을 살짝 열어놓고 그는 자리에 앉아 책을 읽는 중이었다. 문을 똑똑 두드리자 책을 읽던 그가 고개를 들었다. 살짝 의아해하는 표정이 떠올랐지만 들어가도 되냐고 묻자 그는 순순히 나를 자리로 안내했다. 처음 보는 사람이 난데없이 들이닥쳤는데도 안으로 들이는 걸 보면 이런 상황이 익숙하거나 내 표정이 그만큼 절박하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어떻게 오셨죠?”

“전 환자가 아니에요.”

그가 익숙한 태도로 책상 옆의 의자로 나를 안내하자 딱 잘라 말했다. 마치 환자를 진료하려는 듯한 의사의 태도였기 때문이었다.

“그럼 왜 오신 거죠?”

“단기기억상실에 걸리고 싶어요. 수술해주세요.”

“그럼 환자가 되실 분이군요.”

그가 내 말에 잠시 멈칫하더니 웃었다. 그리고는 책상 앞의 소파로 안내했다. 그가 두 잔의 녹차를 내오고 내 앞에 잔을 놓았다. 흰 잔에 담긴 연한 녹색의 액체에서 김이 피어올랐다.

“기억상실을 고쳐달라고 오는 사람은 많지만 기억상실을 만들어달라는 사람은 본 적이 없는데요.”

“전 그래야 해요.”

“왜요?”

왜냐고 묻는 질문에 순간 숨이 막혔지만 대답을 해야 했다.

“다들 오늘만 반복되는 세계에 살고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하지만 전 오늘이 오늘이 아니란 걸 기억해요.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계속 오늘인 거죠. 하지만 사람들은 그걸 몰라요. 그럼 제가 맞춰야 하는 거 아니겠어요? 단기기억 상실에 걸리면 저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되는 거잖아요. 그럼 덜 괴로울 거 아니에요.”

“...왜 똑같아야 하는데요?”

내 말을 듣고 턱을 괸 채 생각을 하던 그가 물었다. 마치 유치원생 같은 순진한 표정이라 헛웃음이 나왔다. 뭐라 대답을 하려는데 그가 말을 덧붙였다.

“아무튼. 그건 어렵습니다. 해마 쪽을 건드리면 어떻게 될 지도 모르지만 아직 뇌과학에는 밝혀지지 않은 부분도 많고 너무 위험한 수술입니다. 하루 동안의 기억만 지워주는 그런 수술은 없어요. 그리고 남들이랑 똑같다고 덜 괴로운 것도 아닙니다. 가세요. 원하신다면 정신과를 연결시켜 드리죠.”

갑자기 단호한 태도로 돌변한 그가 빠르게 말을 쏟아내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순간 멍해져서 쫓겨나듯이 그의 연구실 문을 닫고 건물을 빠져나왔다.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마구 걷다가 호숫가의 벤치에 앉았다. 개와 산책하던 사람들이 파자마차림의 나를 보고 힐긋거렸다.

저 사람들처럼 되고 싶었다. 오늘이 빨리 가는 것을 아까워하면서 내일이 오는 게 싫다고 투정하는 사람들. 호수에서 유유히 헤엄치던 흰 오리들이 뭍으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내가 그동안 하지 않은 일이 무엇일까. 나는 뭘 잘못해서 이런 벌을 받는 걸까. 나 자신이 조각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더 이상 내가 하지 않은 일이 뭐가 있을까. 앞으로 뭘 더 해야 하는 걸까.

손에 쥔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그였다. 연락도 없이 약속장소에 나타나지 않았으니 화가 많이 났을 것이다. 망설이다 통화버튼을 눌러 전화를 받았다.

“너 괜찮아?”

나에게 화를 내는 대신 그는 의외로 침착한 목소리다. 무슨 말을 할까 하다가 한 번도 한 적 없는 말을 꺼냈다.

“오빠. 나 결혼 못해.”

“뭐라구?”

내가 생각해도 정말이지 뜬금없는 소리였다. 미쳤다고 생각할 것 같았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오늘 12시가 지나면 나는 깔끔하게 정리된 내 방에서 일어날 거고 이 남자는 그 전날 내가 무슨 소리를 했는지도 모른 채 나를 만나러 올 것이다. 이젠 진저리가 났다.

“난 결혼에 맞는 사람이 아닌 것 같아. 난 혼자 여행가는 것도 좋아하고...화도 엄청 잘 내. 나 사실 결혼하기 싫어. 일도 계속 하고 싶고 경력 단절되는 것도 무서워. 나 사실 집안일도 잘 못해. 요리도 관심 없고. 애 낳는 것도 아프고 무서워서 싫어. 지금 당장은 오빠를 만나면 좋지만 사고가 안 나면 적어도 60년은 더 살 텐데 그때까지 계속 좋아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남의 인생 책임지는 건 역시 난 안 되겠어. 나도 나를 잘 몰랐던 것 같아. 오빠는 좋은 사람이고 만나면 즐겁지만 오빠가 결혼이랑 애를 원한다면 난 못 만날 것 같아.”

내 속에 있는 줄도 몰랐던 말이 성대를 타고 마구 흘러나왔다. 수화기 너머로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는 다시 일어나서 걷기 시작했다. 오늘 하루만이라면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있다. 써도 써도 줄지 않는 오늘 하루를 낭비하면서.

그에게서 전화는 다시 걸려오지 않았다. 문자도 없었다.

어디로 걷는지도 모르고 한참을 쏘다니고 11시가 넘어서야 집에 다시 돌아왔다. 나간 그대로 집은 어지럽혀져 있었다. 평범한 사람이 봤다면 집에 도둑이 든 줄 알았을 그 광경을 보면서 어쩐지 마음이 편했다. 얼마 남지 않은 오늘 하루에서 내가 남긴 흔적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한 시간 안 되는 시간동안 나는 살아있는 사람이 될 수 있었다. 나만의 쓰레기 왕국을 만족스럽게 내려다보다가 옷더미가 쌓이고 부서진 섀도우가 묻은 침대 위에 엎어져 잠들었다.

다음날.

월요일 아침 나는 알람소리와 함께 폐허 속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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