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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지구를 먹어요!

2014.08.13 09:5908.13

지구를 먹어요!

여러분 안녕!

오늘은 먹는 법에 대해 알아보기로 해요.

음식을 먹다가 간혹, 주위에서 ‘먹는 법도 모른다’며 별 쓰잘데기 없는 훈계를 받곤 할 때엔 참 난감하기 짝이 없습니다. 아니 그냥 입 안에 쑤셔 넣고, 깨물고, 소화시키면 그만일 것을, 무슨 놈의 먹는 방법론까지 다 꿰뚫고 있어야 해? 여러분도 이런 고민은 한 번쯤 해보신 적이 있죠?

이제 그런 걱정은 붙들어 매세요!

오늘 저와 함께 먹는 법을 교정하고 나면, 주위에서의 훈계는커녕 ‘저 친구는 먹는 게 참 예술이야’, ‘차라리 내가 먹히고 싶을 정도라니까’ 등의 칭찬 세례로 수저 한 술 뜨는 것조차 부담스러울 겁니다. 이제 당신은 모든 형태의 먹을 것들, 그러니까 삼각형부터 원통형까지, 다리가 달린 것부터 달리지 않은 것까지 모두 먹어치울 수 있게 될 겁니다!

벌써부터 군침이 줄줄 흐르는군요. 슬슬 시작해 볼까요?


<지구를 먹어요!>

지구를 먹어본 경험이 거의 전무한 사람들이 흔하게 저지르는 실수 중 하나가 바로 지구 주위에서 돌고 있는 달을 무신경하게 떼어내는 행위라고 합니다. 통계에 의하면 거의 대부분의 초심자가 행하는 실수라고 하니, 알만 하죠? 달을 떼어내는 순간 지구가 머금고 있는 맛있는 육즙이 순식간에 접시 위로 곤두박질친다는 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상식이지만, 아무래도 초심자에게는 지구 주위를 뱅뱅 돌고 있는 달이 여간 성가신 게 아닌가봅니다.

달의 성가심을 감내하는 것 또한 지구 먹기의 즐거운 과정 중 하나예요.

몇 번을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구가 이토록 맛있을 수 있는 이유는, 교묘하게 달의 공전 궤도를 피해가며 육즙을 쭉쭉 빨아대는 행위에서 온다고 마니아들은 증언합니다. 달이 성가시면 성가실수록 감칠맛이 돈다네요.

─이렇게 먹어요!

더울 때는 달과 지구를 한꺼번에 급속 냉각 시킨 후에 빙과류처럼 표면을 천천히 핥아가며 즐기는 방법이나, 기계를 이용해 육즙을 남김없이 쭉 짜내 컵에 담아 마시는 방법도 방법이지만, 역시 지구 본연의 맛을 즐기기 위해선 수확 직후의 지구를 달의 간섭이 없는 지역을 두 손으로 고정시킨 채 달의 궤도를 따라 입으로 후루루루룩 빨아먹는 고전적인 방법이 뭐니 뭐니 해도 최곱니다. 입술을 직접 바다 표면에 대고 소리내어 빨아먹을 경우 상대방에게 좋지 않은 인상을 심어줄 수 있으므로, 성층권과 즈음에 서로 부딪치지 않도록 동그랗게 오므린 입술을 위치시켜 일거에 후룩! 빠는 것이 매너에 맞습니다.

다만 입술을 지구에 지나치게 쑤셔 넣거나, 있는 힘껏 빨아들일 경우 지구 내부의 뜨거운 용암까지 덩달아 빠져나올 우려가 있으니 조심해야겠죠?

─이렇게 골라요!

흔히 표면의 색이 새파란 것이 맛도 좋을 거라 생각하곤 하는데, 이는 잘못된 상식입니다. 물론 마냥 새파란 것이 더 많은 수분을 함유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적당하게 새파랗고 푸른 것과 비교해보면 입 안에서 씹히는 식감이 그야말로 천지차이입니다. 지구는 효소의 활동이 가장 활발한 시기인 50억년에서 70억년 사이의 것을 최고로 칩니다. 이것보다 너무 빨라도, 또 늦어도 안 됩니다. 너무 빠르게 수확한 경우 맛이 밍밍하여 금방 버리게 되는 데 반해, 너무 오래된 경우는 효소의 활동이 지나치게 왕성해져 부위별로 맛이 균등하지 못하거든요. 한 쪽 부위는 너무 썩은 맛이 나는데, 또 다른 한 쪽은 기가 막히게 맛이 좋아져요.

50억년에서 70억년 사이의 적당히 푸르딩딩한 놈으로 고르면 대개 맞습니다.

─뒤처리는 이렇게 해요!

다 먹고 뼈만 남은 지구는 찌개나 탕의 밑국물을 내는 용도로 끓여주면 맛이 기가 막히지만, 지나치게 오래 끓일 경우 안에서 용암이 터져 나와 국물을 전부 못 쓰게 되는 경우가 있으므로 숙련자가 아닌 이상 과감하게 버리는 게 이롭습니다. 참고로, 뼈만 남은 지구를 이용해 용암의 융용 상태를 조절하여 수상한 ‘장난감’ 만드는 방법이 마니아들 사이에 횡행하고 있는 걸로 아는데, 절대 따라하셔서는 안 됩니다. 그... 뭐랄까...... 하여간, 안 됩니다.

달은 그라인더로 갈아서 파스타나 찌개에 살짝만 뿌려도 향이 좋아지고, 수육을 끓일 때 고기와 함께 통째로 같이 넣어주면 고기가 연해지고 잡냄새를 잡는 데도 좋습니다. 하지만 달을 갓 수확한 경우, 그러니까 고작 고기 잡냄새나 없애는 데 쓰기 너무 아까울 정도로 선연한 회검색을 띠고 있는 싱싱한 달이 수중에 있는 경우, 차라리 과감하게 생으로 씹어 먹는 건 어떨까요. 먼저 달을 입 안에 넣고, 천천히 혓바닥으로 굴려가며 크레이터의 독특한 질감을 음미합니다. 어쩌다 크레이터와 입천장의 갈라진 곳이 정확하게 들어맞는 지점이 있으면 괜히 기분이 좋아지죠. 이제 표면이 어느 정도 동그랗게 다듬어졌다는 생각이 들면, 어금니로 힘차게 씹는 거예요. 달의 매캐한 풍미가 입 안 전체에 퍼지도록 반대편 어금니로도 옮겨 덩달아 씹어줍시다. 알싸한 향이 목 끝까지 내려와 이제 음식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면, 여기서 천해명(天海冥)볶음덮밥을 먹는 겁니다. 천해명 특유의 지저분한 냄새가 중화되어 자잘하게 씹히는 식감에 보다 집중할 수 있게 됩니다. 이처럼 달은 성가시다고 확 떼어서 휙 버리기엔, 여러 모로 아까운 부분이 많죠.


<‘아... 그때 내가 조금만 더 잘해줬더라면...’을 먹어요!>

─이럴 때 먹어요!

양치를 마치고, 그대로 자리에 앉아 샤워기로 머리를 적신다. 오른손으로 머리칼을 헤집으며 구석구석 물줄기를 통과시킨다. 귓바퀴 뒤로 흐르는 물기를 이용해 얼굴도 적당히 비빈다. 뭉쳐서 젖은 머리가 앞으로 축 늘어지면, 타일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비누를 짜서 양손으로 거품을 낸 뒤 얼굴 구석구석에 치댄다. 볼때기, 이마, 코 주변, 턱 끝까지 빠지는 데 없이 반시계방향으로 둥글게. 허우적거리며 샴푸에 손을 뻗는데, 이상하게 잘 안 집힌다. 손끝에 무슨 감촉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한데 비눗기에 튕겨나가더니 도미노 쓰러지듯 철푸덕 소리가 연쇄적으로 일어난다. 방향감이 순간 일렁인다. 샤워기 헤드도 어디로 갔는지 이제 손에 뭐 하나 집히는 게 없다. 따가운 비눗기에 바보처럼 훌쩍이며, 끝없이 확장되는 어둠을 헤맨다. 그녀는 이런 내 모습을 마주할 때면 “그러게 한 번에 하나씩만 하지, 미련하게”라며 쫑알거리곤 했다.

자, 바로 여기서 ‘아... 그때 내가 조금만 더 잘해줬더라면...’ 하고 곱씹는 겁니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러게 한 번에 하나씩만 하지, 바보같이’와 ‘라며 쫑알거리곤 했다’ 사이에서 포지션을 잡아야 가장 맛이 좋습니다. 더 늦어도, 일러도 안 됩니다. 여기에 고개를 숙인 채 목이 메어 숨도 제대로 못 쉬겠다는 제스처를 한번 곁들여 보세요. 이런 별 것 아닌 테크닉으로 ‘아... 그때...’ 상급자의 기분을 충분히 만끽할 수 있을 겁니다.

참고로 마니아들은 초반부의 ‘양치를 마치고, 그대로 자리에 앉아 샤워기로’에서만 자그마치 7-8회는 곱씹는다고 합니다. 정말 대단하죠?

─같이 먹어요!

‘아... 그때...’와 같은 회한의 감정은 단품보다는 다양한 감정과 함께 복합적으로 즐기는 편이 더 좋습니다. 가령 ‘나 혼자만의 잘못은 아니었어’, ‘이렇게 힘들 거면, 차라리 관계를 지속하는 게 더 나았을지도 몰라’, ‘아냐, 이렇게 나약해지면 안 돼.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고, 이번 기회를 통해 더 강해져야 해’, ‘그러고 보니, 그녀도 나와 같은 샴푸를 사용하곤 했지’, ‘이따위 머리카락 다 뜯어버려야...’, ‘그녀도 지금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까?’ 등을 차례로 곱씹으면 좋습니다. 취향에 따라 더 추가할 수도 있어요. 가령 요새 금연이 한창인 분은 ‘말... 보루...’ 따위를 추가한다면 아주 기가 막힐 겁니다.

─이렇게 보관해요!

‘아... 그때...’는 평범한 일상 안에서 문득 그녀의 빈자리를 느끼게 될 때마다 수시로 되새김질하기 용이하도록, 세월의 풍파 속에 느리게 퇴적시켜 보관하면 됩니다. ─같이 먹어요! 에서 언급했던 감정들과 함께 묶어 보관하면 공간의 낭비가 없어 효율적입니다. 모두 온전하게 보관된다면 좋겠지만, 일부는 풍파에 깎여 나가기도 해요. 파편만 남아 너덜거리는 감정은 새로운 오해를 낳게 되니 조심하세요. 오해는 여러 모로 칼로리가 높거든요.

보관에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나요?

특히 유쾌하지 못한 독백이 무의식중에 입 밖으로 툴툴 새나오는 경우, 이는 십중팔구 보관상의 문젭니다. 이렇게 되면 미관상 보기에 좋지 않아요. 조심. 또 조심.


<베이징 덕을 먹어요!>

그냥 씹어 먹으세요.


<끝내요!>

이제 마칠 시간입니다.

고르는 법부터 보관법까지, 그냥 먹는다고 다가 아니죠?

이렇게 힘들답니다.

다 기억 했나요?

아직 더 배우고 싶다고요?

아니에요.

여기서 더 배울 필요도, 덜 배울 필요도 없어요.

여러분은요.

그냥 딱 그 정도가 좋아요.

정말이지


군침이 줄줄 흐른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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