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역(逆)

2013.09.21 00:3909.21

역(逆)

 

1.

‘이카로스의 비극’을 아십니까?

미궁 속에 갇히게 된 다이달로스와 이카로스 부자의 이야기를 하려합니다. 크레타의 왕비 파시파에는 포세이돈이 보낸 황소와 간음하여 황소 머리에 사람의 몸을 가진 미노타우로스를 낳게 됩니다. 미노스는 다이달로스가 괴물 미노타우로스의 탄생에 일조한 것을 알고 그를 미궁에 가두게 되지요.

그들이 갇힌 미궁은 한번 갇히면 절대 빠져나올 수 없는 라비린토스라는 감옥이었습니다. 부자는 감옥에서 탈출하기 위해 새의 깃털과 밀랍으로 날개를 만들었죠. 이카로스 부자는 날개를 어깻죽지에 붙인 뒤 창 밖으로 뛰어내렸습니다. 부자는 인공날개를 만들어 하늘을 날았죠. 이카로스는 그 순간 더 높이 날아보고 싶다는 욕망과 호기심이 생깁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말을 거부한 채 태양이 닿을 정도로 높이 날다가 결국 태양열에 밀랍이 녹아 에게 해에 떨어져 죽게 됩니다.


2.

인간은 본디 날고자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었다. 비행기의 발명이 단적인 예이다. 허나 사람들은 차를 타고 갈 수 없을 정도로 먼 곳으로 가기 위해 비싼 돈을 지불하고 공항까지 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차를 비행할 수 있도록 개조하였다. 사람들의 발전된 기술력으로 자동차가 날아다니게 되는 데까지는 불과 10년도 체 걸리지 않았다. 곧 공항은 폐쇄되어 그 자리에 아파트 단지가 늘어섰고, 비행기는 고철덩어리가 되어 비행 차나 군수품의 재료로 쓰였다.

도로법이 바뀌었다. 비행 차를 위한 도로법이 개정되었다. 그러나 그 법은 오로지 비행 차를 위한 도로법이었다. 다시 말해,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들에 대한 보호는 간과한 법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되자 그때까지만 해도 직립보행을 하던 사람들이 횡단보도를 걷다가 아무렇게나 날아오는 차에 치여 비명횡사하는 일이 즐비하게 되었다. 걷다가 날아오는 차에 머리가 날아가 죽는 것을 막기 위해 사람들은 저마다 비행 차를 끌고 다니려 하였다. 도로는 매사에 차들로 꽉 차게 되었다.

도로는 점점 엉망이 되어가고 있었다. 신호등은 그저 가로등에 지나지 않았다. 빨간불에도 차는 움직였고, 시간이 가면 갈수록 빨간불과 초록불의 경계는 사라져갔다. 교통사고 사망률의 급증은 필연적이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생명공학에 거액을 투자했다. 그리고 세계 최초로 유전자변형으로 인해 날개달린 사람이 태어났다.

그것이 지금으로부터 200년 전의 일이다.

 

3.

새벽부터 바깥에 눈이 오고 있었다. 아침에 집을 나설 때는 진눈깨비였지만 지금은 눈발이 굵어져서 쌓이고 있었다.

창밖을 멍하니 쳐다보는 모습이 내 눈에 들어온다. 그의 등 뒤로 훤히 불이 켜진 사무실과 오늘 하루의 빛을 모조리 삼켜버린 암청색 하늘이 디졸브(Dissolve)되어 보인다. 자동차와 사람들이 사방으로 뒤엉켜 무겁게 날아다니는 시내의 풍경이 눈에 띈다. 느릿느릿한 게 보이지 않는 무거운 짐을 짊어진 것만 같다.

손목시계는 5시를 가리키고 있다. 퇴근할 시간. 나는 불을 끄고 자리를 나선다.

 

주차장에 차를 주차해 뒀지만 오늘만큼은 왠지 걷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차를 타고 가면 30분 남짓 걸릴 거리니 굉장히 먼 거리이긴 하다.

날개를 넓게 펼친 뒤 여러 번 펄떡펄떡 휘저었다. 날개에 닿는 눈송이들이 시리다. 눈이 녹아 깃털을 적신다. 날개가 젖어 날갯짓이 무거워진다. 찬바람이 부니 날개가 더욱 시려온다.

거리로 나선다. 저마다 뒤엉키지 않으려고 위아래로까지 길을 만들어 날아간다. 차도 인간도. 차와 인간이 닮아 보인다고 느끼기는 처음이다.

나는 사람들의 표정을 훑어보며 날아간다. 위아래 옆으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지나간다. 너무 빨리 지나가는 탓에 나는 단 한 번도 사람들의 표정을 읽지 못한다.

횡단보도 앞에 선다. 나는 멈춰있는 사람들의 표정을 세세히 관찰한다. 그러나 나는 사람들의 얼굴을 훑어보면서 문득 오싹함이 느껴진다.

사람들의 표정이 다 비슷하다. 아니, 똑같다고 해도 맞는 말일 테다. 가면을 쓴 것일까. 아니면, 그래, 사람과 차가 닮아서 그런 것일까? 표정이 변하지 않는 차처럼, 사람도 고철덩어리로 이루어진 걸까?

마치 무서운 인형극을 보는 듯하다. 나는 내 얼굴에까지 무표정이 전염된 게 아닌가 생각하며 몸서리를 친다. 이곳을 당장 빠져나가고 싶어진다. 다급하게 멈춰있는 택시로 몸을 옮긴다. 택시는 신호를 무시하고 다른 차들보다 더 위로 떠올랐다. 엑셀을 밟는 순간, 건너려던 사람과 부딪칠 뻔하자 택시기사가 욕을 퍼붓는다. 택시는 다시 고속비행을 할 준비를 한다. 방이 2동이요. 택시는 방향을 오른쪽으로 돌렸다.

 

3시 반. 길이 막혔는지 택시가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 택시기사가 말한다. 길이 막힌 모양이구만. 곳곳에서 크럭션 소리가 터져 나온다. 톱소리가 나는 걸 보니 시체나무 처리를 하려는 거구만. 위아래 옆으로 꽉꽉 막힌 택시. 아저씨. 그냥 여기서 내릴게요. 나는 뭐에 쫓기듯 지갑에서 돈을 꺼내 택시기사의 손에 쥐어준다. 서둘러 밖으로 빠져나와 사방에서 멈춰있는 차들의 틈 사이로 빠져나온다.

톱이 무언가를 갈라내는 날카로운 소리와, 막힌 차들의 원성어린 크럭션 소리가 공기보다도 더 많이 하늘을 가득 메우는 듯하다. 마치 불협화음 협주곡 같다. 횡단보도를 건너 톱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향한다. 그곳엔 사람들이 모여 있다.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까지 하여 이곳은 아비규환이다. 사람이 죽은 곳을 둘러싸고 차주인 들과 유가족, 그리고 공사인부들이 싸움을 벌인다. 차주인 들은 차가 지나가지 못하니 어서 시체나무를 베어버리라고 하는 반면, 유가족들은 조금만 더 기다리면 새 생명이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고, 나무를 베지 말라고 고래고래 악을 지른다. 울다가 실신해버린 유가족도 눈에 띈다. 공사인부들은 여차 없이 나무를 베어버린다. 유가족들의 울음소리가 커져간다.

아스팔트가 베어진 나무기둥을 뒤덮어버린다. 울고 불며 오열하다가 희망이 사라져버린 유가족들은 어느새 어디론가 사라진다. 공사인부들도 모두 물러나고, 다시 도로는 원활히 흘러간다. 나는 건너편 횡단보도에서 아스팔트로 메워진 나무기둥을 멀뚱히 쳐다보았다.

내 눈 앞에 기억 저 편에 묻힌 줄 알았던 어떤 영상의 필름이 돌아가고 있다.

이 횡단보도를 노파와 어린 아이가 건너고 있다. 때 묻지 않은 맑은 눈을 가진 어린 아이와, 쇠약해보이지만 미소를 띠고 있는 노파의 모습. 신호가 초록불로 바뀌고, 날갯짓이 시작된다.

할머니, 어서 건너와.

아이가 저만치 앞서서 손짓한다. 할머니는 느릿느릿 날며 손을 휘젓는다. 먼저 가고 있어라.

아이는 다시 더 멀리 날아간 뒤 뒤돌아본다.

할머니, 빨리빨리.

오냐, 간다.

빨리 빨리 좀 와.

아이는 이번에는 뒤를 돌아다보지 않고 다 건넌 뒤, 다시 뒤돌아본다.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든다.

빨리 빨리.

오냐, 가고 있다.

빨리빨리빨리

빨리빨리빨리빨리

빨리빨리빨리빨리빨리

빨리빨리빨리빨리빨리빨리

빨리…빨리…빠…빠…빨리…

오냐, 가고 있……

 

그때, 속도가 붙은 채로 질주하던 비행 차 한 대가 노파를 덮친다.

아이가 비명을 지름과 동시에

노파는 사방으로 피를 뿌리며 쓰러진다. 팔다리 목이 흉측하게 꺾인 채 피를 쏟아낸다. 찌그러진 채 버려진 깡통처럼. 흥건하게 아스팔트를 적시는 피 위로 깃털이 내려앉는다.

할머니, 빨리빨리……

오냐, 가고 있…다.

갑자기 탁, 필름이 끊겼다. 나는 그 다음이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노파의 시신도 그 자리에 깊숙이 새로운 생명을 부활하게 될 나무의 뿌리를 내렸을 것이다. 그리고 무럭무럭 자라 기둥을 세웠을 것이다. 차가 날아다니는 높이까지 나무가 자라나면, 사람들이 운전할 때 거치적거리니 베어버리라고 경찰에 신고를 했을 것이다. 톱을 든 사람들이 나무를 가차 없이 베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엔 두껍게 아스팔트가 깔렸을 것이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던 것일까. 나는 그 소년이 비명을 질렀던 자리에 있다. 지금 그 소년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어느새 암청색 하늘은 네온사인과 자동차 헤드라이트만이 반짝이는 암흑으로 바뀌었다. 2시 43분. 그제야 온 몸이 추위로 얼어가고 있음을 느낀다.

 

4.

22시 경. 방 안에 스탠드 불빛 하나만 켜져 있다. 아직 잠들지 못한 한 사람이 있다. 오늘 따라 왜 이리 잠이 안 올까. 그는 천장에 붙었다 책상 앞에 앉았다를 반복한다. 모두가 잠들어있을 시각인데도 홀로 깨어 잡히지 않는 생각들을 좇고 있다. 잘게 부서진 채로 흩어진 생각의 조각들. 나는 그 조각들을 여기저기서 줍고 있다.

편린들은, 날카롭다. 유리조각처럼. 나는 그것들을 줍다가 손가락을 벤다. 통각이 손을 타고 뇌로 전해진다. 고통이 느껴진다.

그래……

나는 화장실로 부리나케 날아 들어간다. 화장실에는 거울이 있다. 그 속에 나를 닮은 ‘그’가 모습을 드러낸다. 나는 ‘그’의 모습이 역겹게 느껴진다. 저게 사람의 모습인가. 팔꿈치며 주먹이며 할 거 없이 거울을 깨부수려 든다. 나를 따라 ‘그’도 거울을 부수려 든다. ‘그’도 나를 부술 마음이 있는 듯하다. 나는 ‘그’가 나를 부수게끔 하기 위해 ‘그’를 부수려 하고 있다. 나는 ‘그’를, ‘그’는 나를…

요란한 소리가 바닥에 쏟아지며 거울이 산산조각 난다. 조각이 바닥에 흩어진다.

거울 속에 ‘그’가 부서졌다. ‘그’의 거울 속에도 내가 부서졌다.

나는 아까 생각했던 것처럼 유리조각을 손에 쥔다. 손에 피가 나도록, 꽉 쥔다. 날카로운 유리 모서리가 손가락 살을 파고 들어간다. 피가 팔을 타고 흘러내려 바닥으로 한 방울 씩 떨어진다. 고통이 느껴지면 느껴질수록 나는 유리조각을 더 세게 쥐고 있다.

입에서 신음소리가 들린다. 내 손이 조각을 놓친다. 바닥에 흩어진 조각들. 부서진 ‘그’의 모습이 마치 피카소의 작품처럼 그려져 있다. 그 위에 한 방울 씩 떨어지는 내 피는 빨간색 물감.

날개의 힘을 뺀다. 나는 문득 저 날카롭게 펼쳐진 피카소의 그림 위에 ‘발’이라고 불리는 퇴화된 사람의 신체부위를 놓이고 싶어진다. 날개의 힘을 쭉 빼 밑으로 몸을 내린다. 그리고 굽혀진 ‘다리’를 바닥과 수직이 되게끔 편다. 날개에 힘을 줬는지 다시 공중으로 붕 뜨기를 반복하지만, 다시 천천히 온 몸의 힘을 뺀다. 천천히, ‘발’이 바닥에 닿게 한다.

‘발’이 바닥에 닿은 채 견디어보기를 계속 반복한다. 바닥 위에 중심을 잡으며 수직으로 서 있다가 날갯짓을 한번 했더니 뒤로 고꾸라지고 만다. 양 손과 엉덩이가 유리 조각에 긁힌다.

온 몸에 상처가 난 채 나는 다시 방으로 들어간다. 스탠드 하나 달랑 켜진 캄캄한 방. 오른 쪽으로 6°씩 움직이는 초침, 어느새 20시 30분이 조금 지났다.

창문을 열어본다. 집 앞에 눈이 쌓여 있다. 세워진 자동차며, 집 지붕이며, 모두 두껍게 눈이 쌓여있다. 손을 뻗어본다. 눈송이들이 팔위에 살포시 내려앉았다가 녹아 없어진다.

창틀에 일렬로 쌓인 눈을 검지로 치워본다. 이 작은 차가움. 청량감이 나를 기분 좋게 만든다.

밖으로 나가고 싶어진다. 나는 당장 옷을 갖춰 입고 나갈 채비를 하였다. 스탠드는 켜두고.

 

일부러 얇게 입고 나왔지만 춥지 않았다. 아까 그 혼잡했던 거리에서는 왜 이리 추위가 살 떨리게 했던 걸까. 지금은 오히려 시원하다.

화장실에서 했던 것처럼, 땅에 ‘발’을 디뎌보기로 한다. 이 차가움, 이 청량감을 ‘발’은 느낄 수 있을까. 몸에 힘을 빼고, ‘발’이 바닥에 닿게 한다. 날개를 가볍게 펄럭이며 앞으로 조금씩 나간다. 쌓인 눈이 ‘발가락’ 사이사이에 낀다. 그러나 차가움을 느끼지는 못한다.

나는 계속해서 눈 쌓인 골목에 자국을 만들어가며 날아가고 있다. 어린 아이가 장난을 치는 것 같이 즐겁다.

사거리로 나선다. 아직 잠들지 않는 24시간 편의점. 밝은 불빛을 향해 날아간다. 눈 쌓인 바닥에는 생소한 자국이 길게 늘어졌다. 난생 처음 보는 듯하다.

나는 신기하기도 하고 즐겁고 기쁘기도 해서 이제는 자국 만들기를 즐기고 있다. 그러다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 편의점 근처에까지 와있었다. 그런데 그만, ‘발’이 울퉁불퉁 튀어나온 돌부리에 걸려 눈 위로 엎어지고 만다. 무엇일까. 몸을 일으켜 세워 돌아보니, 그곳엔 작은 시체나무 밑기둥이 쌓인 눈 사이로 불거져 나와 있었다. 아스팔트를 씌워버린 시체나무 밑기둥. 내가 어렸을 적 일이다. 오토바이가 고양이를 뺑소니 치고 마치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그냥 갔었다. 날아오른 고양이의 몸이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나는 편의점 앞에서 터져서 흘러나오던 고양이의 왼쪽 눈이 떠올랐다.

손을 뻗어 눈 쌓인 고양이의 시체나무를 만져본다. 덮어버린 눈을 걷어치운다. 홀로 떨어진 작은 화산섬 같았다.

몸을 일으켜 세운다. 그때, 땅에서 희미한 빛이 반짝거린다. 편의점 안을 들여다본다. 그저 불만 휑하니 켜져 있을 뿐이다. 잘못 본걸까. 손을 짚고 다시 몸을 일으키려는데, 빛이 또다시 반짝거린다. 나는 빛이 반짝거리는 곳에 얼굴을 맞대었다. 다시, 이번에는 아까보다는 더 선명한 빛이 반짝거린다. 나는 손으로 빛이 반짝거리는 곳에 쌓인 눈을 파헤친다. 빛은 주기적으로 반짝거림을 반복했다. 유리조각에 찔려 다친 손이 차가움에 닿자 더욱 쓰렸지만, 눈을 더 깊게 계속 팠다. 바닥이 보일 때까지.

눈을 파헤칠수록 빛의 색깔이 더욱 뚜렷해진다. 밝은 노란색을 띄던 빛은 바닥에서는 야광 색으로 변하였다. 검은 아스팔트도 뚫고 비추는 이 찬란한 빛! 이 빛이 무언가 소리를 내고 있었다. 작아서 잘 들리지 않는 소리에 나는 귀를 갖다 대었다. 빛이 반짝이면서 눈이 부시게 만들었다.

나는 한참동안이나 빛이 내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그것은 말이나 그런 소리가 아니라, 그저 빛이 낼 때마다 쨍- 쨍- 하는 듯한 소리가 들렸을 뿐이었다. 나는 한동안 멍해져 있다가 문득 ‘발’이 차가워 옴을 느꼈다. 밑을 내려다보니 발이 눈 속에 깊숙이 파묻혀 있었다. 점점 발이 차가워짐과 동시에 나는 약간의 놀라움을 느꼈다. 나는 땅 위에 수직으로 곧게 서있었다. 수없이 많은 죽음들이 부활의 빛을 보지 못하고 파묻힌 이 땅 위에, 나는 수직으로 서있었다. 빛이 내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 소리는 왠지 내게 ‘발’을 디뎌보라는 말처럼 들려왔다. 그 옛날, 직립보행을 하던 인간처럼, ‘걸음’을 해보자는 말이 들려오는 듯 했다. 인간이 날개를 달고 하반신이 퇴화하기 전처럼.

발의 감각이 점점 살아나고 있었다. 눈이 쌓여 깊숙이 파묻힌 발을 무릎높이까지 들었다. 중심을 잡기가 힘들어 또다시 엉덩방아를 찧었다. 다시 천천히 땅을 딛고 일어섰다. 왼쪽 발을 조금 들어서 앞으로 옮겼다. 그러다가도 중심을 잘 잡지 못해 나동그라지기를 수차례 반복했다. 생각만큼 걸음이 잘 되지는 않았다.

어느새 온 세상을 뒤덮을 것 같던 눈은 그치고, 하늘은 주홍색 노을이 지고 있었다. 19시가 넘었을 것이다. 차가운 눈 위에 널브러진 나는 몸이 더웠다. 입김을 불었다. 하얀 입김. 아래를 들여다보니 눈 위에 뻘건 피가 묻어 있었다. 그제야 손의 쓰라림이 느껴졌다. 또한 발바닥이 아파왔다. 화장실에서 발에 유리조각 파편이 박힌 채로 나온 것이다. 손으로 파편을 떼어내자 살점이 뜯겨져 나갔다. 아픔이 느껴졌다. 나는 발의 쓰라림을 더 느끼고 싶어졌다.

다시 바닥을 짚고 일어섰다. 왼발을 오른발보다 앞으로 옮기고 다시 오른발을 왼발보다 앞으로 옮기고 이러면서 한 보 한 보 앞으로 나가고 있었다.

한 걸음씩 한 걸음씩, 두텁게 쌓인 눈길에 발모양 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한 걸음 두 걸음, 내 입은 걸음을 세고 있었다.

한 걸음에

거꾸로 돌아가는 것만 같은 세상을 생각했다.

두 걸음에

무법천지로 공중을 떠다니는 고철덩어리들과

세 걸음에

이 거리에서 죽어나간 약한 넋들

네 걸음에

고철덩어리들을 위해 영원히 파묻혀버린 생명의 씨앗들

다섯 걸음에

나의 어릴 적, 피 흘리며 쓰러진 할미와 기억이 지워진 소년이 떠올랐다.

여섯 걸음에

시간이 거꾸로 되돌아가는 듯 했고

일곱 걸음에

날개를 가지기 전 인간의 모습이 그리워졌다.

여덟 걸음에

나의 세상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는 듯 했다.

날이 개고 있다. 이 평화로움…… 계속해서 걸음을 옮겨갔다. 이게 진정 사람의 모습이 아닌가 싶었다. 이카로스를 닮은 사람들의 모습. 그러나 추락해버린- 사람들은 고철덩어리로 진화한 것이다. 허나 나는 헛된 욕망에 더럽혀져 파국에 치닫는 이카로스가 되고 싶지 않다.

나는 날갯짓을 포기하고 싶다.

오직 ‘걸음’만이

거꾸로만 가고 있는 이 세상을 다시 되돌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듯하다.

 

댓글 2
  • No Profile
    글쓴이 송형준 13.09.21 00:41 댓글

    웹진에 가입한 이후로 한번 정도는 제가 쓴 창작물을 올려볼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피일차일 미루게 됐네요. 다듬을까 하다가 결국 한 자도 안 다듬고 그냥 올려봅니다. 꽤 오래 전에 썼던 거라 지금 다시 읽으면 맘에 안드는 표현이나 설정들이 너무 많은데... 그런 부분들이 있다면 읽어주시는 분들이 평가해주실 거라 생각합니다. 추석 연휴 잘 보내세요~

  • No Profile
    플루터비 13.11.04 18:14 댓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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