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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맑고 흐림을 논하다

2013.05.10 19:4205.10

  어느 날 벗이 말하였다.

이보게, 자네는 한유()라는 고기를 들어보았나? 한유는 환유라고도 하고 환이어, 한유어라고도 하고, 지경(知經)에도 나왔고 공종선생의 좌림어보에도 나왔다네. 길이는 손바닥만 하고 두께는 한 촌 쯤 되는데 온 몸이 투명해서 한 편에서 들여다보면 반대편이 비쳐 보이지. 그래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얼핏 보면 있는지 없는지 분간이 안 갈 지경이라네. 일찍이 호진이 읊기를 얼음인 듯 유리인 듯, 사람 속도 그와 같았으면이라고 했으니 어떤 생김인지 알만 하겠지.

한유는 알지 못해도 저 넓고도 누런 대황강(大黃江)을 모른다고 하지는 않을 걸세. 흔히들 대황강은 넓고 혼탁한 세상에 비하곤 하는데, 저 위세 높은 맹안국 홍제도 대황강에 호화로운 용선을 띄우고 그 물을 거울처럼 맑게 해서 용선이 비치는 광경을 보고 즐기기 위해 온 땅의 기예와 술법들, 이름난 공장들과 뛰어난 박사들을 모아들였지만 결국 맑게 하지는 못했다는 고사가 있네.

  그런데 이런 대황강도 백여 년에 한 번씩 거짓말처럼 맑아지는 일이 있다네. 대황강 상류의 옥천 지방은 좋은 옥이 많이 나는 것으로 유명한데 이따금 사람의 손을 피해 귀중한 조각이 진흙투성이 물로 굴러 떨어진다네. 그러면 옥은 흐름을 따라 흘러 내려와서 깊은 강바닥에 묻혀서 백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혼탁한 기운이 스며든다네. 이러면 옥의 본성인 정한 기운이 문득 발하여 생기가 태어나고, 한 조각 옥이 한 마리 고기로 변해서 꼬리로 흔들며 큰물로 헤엄쳐 들어가는 것이지. 그런데 이 작은 고기는 제 본성을 잊지 못하고 그 큰 흙탕물을 온통 헤집어, 마침내 티끌을 가라앉히고 맑은 흐름을 일으켜 온 대황강을 제 몸처럼 맑게 만든다네. 근방에 사는 노인들은 강이 유독 탁해질 때면 한유가 강을 뒤집고 있다(有飜江)’고 말하고, 이윽고 온 강이 맑아지고 나면 모두가 몸을 정히 씻고 하백과 싸워 이긴 한유에게 좋은 옥 한 조각, 맑은 물 한 사발, 진흙 한 덩이를 올려 제를 지낸다고 하더군.“

  나는 웃으며 말하였다.

그것 참 기이한 이야기일세. 언제나 자네의 견식이 넓음에 놀라면서도 한 번 더 놀라게 되는군.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사경(四經) 가운데 인, , 예경은 통독했으나 지경은 워낙 양이 많다보니 게으른 성정 탓에 제대로 읽은 일이 없어서 어디쯤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지도 모르겠네. 허나 참으로 믿기는 어려운 이야기로군.”

벗이 다시 말하였다.

그렇다면 이런 이야기는 어떤가? 추어(秋魚), 취라고도 하는 미꾸라지라는 고기는 길이가 손바닥 만 하고 두께는 한 촌 쯤 되는 것이 진흙 속에 묻혀 사는 것을 즐긴다네. 겉은 미끈미끈하여 맨 손으로 쥐기 힘들고 짤막한 수염으로 흙탕 속을 더듬으며 살다가, 어부에게 쫓기기라도 할 량이면 구불텅거리며 몸부림쳐 온 물을 흐리게 만든다네.”

그건 좀 더 흔히 듣는 이야기인데. ‘고기 한 마리가 온 물을 흐린다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자네는 어째서 작은 것이 큰 흐린 것을 맑게 한다는 것은 믿기 힘들다고 하면서 작은 것이 크고 맑은 것을 흐린다는 것은 흔한 이야기라고 하는가?”

  나는 곰곰이 생각했지만 딱히 그 까닭을 알 수 없어서 말했다.

글쎄, 자네 말을 듣고 보니 그것도 이상한 일일세. 허나 그 이치를 상세히 따져보지 않더라도 세상 일이 돌아가는 것을 보면 대개 그렇지 않은가? 선왕께서 엄준한 위세를 드높이시고 구관을 혁파하여 청렴한 학사들로 자리를 채우신 일은 사직을 통틀어 드문 일이었는데, 지금은 어느새 조정에 다시 썩은 벼슬아치들만 드글대고 조금이라도 깨끗한 자는 찾아볼 수도 없네. 저 강직한 이우가 자네를 비롯한 청림원 학사들을 대신하여 팔뚝을 걷어 부치고 나섰다가 지금 그 뼈는 어디에 흩어져 있는지도 알 수 없고, 자네는 이 좁고 비새는 움막에 처량히 앉아 가을 귀뚜라미 우는 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지 않나. 이런 일들만 보아도 대체로 맑은 것은 적고 흐린 것은 많은 법이라네.”

 그러자 벗이 낯빛을 고치고 바짝 다가앉으며 말하였다.

맑다거나 흐리다는 것은 사람의 분별심이 이름 붙인 것에 지나지 않으니 짧은 것과 긴 것, 작은 것과 큰 것 따위를 구분하는 것과 같다네. 그런데 어째서 흐린 것은 많고 맑은 것은 적다고들 하는가? 여기에 흙탕물이 한 웅덩이 있다고 하세. 맑은 물을 한 바가지 쏟아 붓는 정도로 맑아졌다고 하지는 않겠지. 반대로 저 밖에 온 마을이 같이 쓰는 우물이 있는데, 거기에 흙탕물을 한 바가지 쏟아 부으면 틀림없이 탁해지니 다시 가라앉기 전까지는 사람이 마실 수 없게 되네.

  이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맑고 흐린 것이 짧고 긴 것이나 작고 큰 것의 구분과 다른 것은 맑은 것은 한가지고 그렇지 않은 것은 모조리 통틀어 흐리다고 하는 것이네. 전혀 흐리지 않은 것만 맑다고 부르고, 조금 흐리든 심하게 흐리든 나머지는 모조리 탁하다고 하지. 그렇다면 거꾸로 조금 흐린 것은 상당히 맑은 것이고 심하게 흐린 것은 조금 맑은 것이 아닐까?”

자네 말도 일리가 있군. 그러나 성인께서 맑은 덕을 사모하시고 흐린 것을 경계한 까닭은 맑은 것이 그만큼 귀하기 때문이네. 조금 흐린 것을 상당히 맑은 것이고 심하게 흐린 것을 조금 맑은 것이라고 부르기 시작하면 결국에는 맑아지기 위해 스스로를 갈고 닦기보다는 이만큼이라도 깨끗하니 다행이지 뭐야, 그래도 저 치보다는 내가 나은 게 아닌가하면서 수양을 소홀히 하게 되지 않겠는가?”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네. 그런데 맑은 것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그를 닮고자 노력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경지에 이르지 못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하니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네. 세상 사람들은 마치 제가 천정수(天頂水)가 아니면 살지 못하는 하늘 물고기라도 되는 양 이렇게들 말하고들 하지, ‘자 보라, 세상에는 이처럼 맑은 것은 적고 흐린 것은 많으니 세상의 이치가 이와 같거늘 미약한 사람의 손으로 어찌 하리요?’ 그러고는 맑은 덕은 다시 돌아보지도 않고 만수산 드렁칡 얽히듯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리 어화둥둥 한 가지로 어우러지니, 온통 어지러이 뒤엉킨 것을 참빗으로 빗듯 가지런히 하는 것은 요원한 일일세.

  한 점이라도 흐리면 맑은 것이 아니게 되니, 이른바 오십 보를 달아나든 백 보를 달아나든 겁쟁이라는 격으로 맑아지려 애쓰는 일을 소용없다고 비웃는다네. 그 그물코가 어찌나 촘촘한지 저 강직한 송골매 재상 정도나 되어야 겨우 마지못해 그래, 그 영감은 그나마 청렴한 편이지, 그러나 꼬장꼬장해서 귀감으로 삼을 위인은 아니야라고 할 뿐이니 도대체 탁하지 않은 것이 없게 되네. 심하게 흐린 것 가운데 조금 맑은 것 역시 인의지심이 싹트는 시작임을 알지 못하고 지금 당장 인의의 큰 나무가 서지 못한 것만을 탓하니 대체 어느 틈에 싹이 자라 큰 나무가 되겠는가? 사람들이 그를 생각지 않고 강바닥을 뒤엎는 것은 인력이 닿는 일이 아니라고만 하니 이야말로 세상이 넓고도 혼탁한 이유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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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에서 썼던 글인데 예전 노트들을 정리하다가 발견해서 옮겨봅니다. 상-병장 회의에서 좀 더 일을 공평하게 나눠야 한다고 주장했을 때 다른 병장이 아주 일이병하고 서로 존대말도 쓰지 그러냐, 어차피 완전히 평등하지도 않은데 평등 따지는 게 무슨 소용이 있냐고 반박한 데서 착안해서 썼던 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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