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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불을 껐다 켰을 때

2012.11.15 21:1111.15


1.

눈을 떴을 때, 내 옆에 누워있던 남자는 더 이상 내가 사랑하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질적인 감정이었다.

인생의 대부분을 알고 지내왔고 지난 몇년간 맨살을 부비대며 사랑해온 사람이 하루 아침에 이방인으로 보이는, 그것은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이질적인 감정이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비몽사몽간에 본 그의 얼굴이었지만 방금 나를 스치고 지나갔던 그 감정은, 어쩌면 무의식 중이라서 더 확실했다. 보통의 아침이었고 그는 여느 때와 같은 모습으로 내 곁에 잠들어 있었지만 나는 그에게서 사랑을 느낄 수 없었다. 보고 있으면 언제나 행복하던 그의 곱슬한 앞머리, 아침의 빛을 받아 부드럽게 빛나는 어깨선도 지금은 마치 뿌연 유리창 너머로 들여다보듯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사랑의 빈 자리를 대신하여, 혼란과 경계의 감정이 올라왔다. 그와 몸을 맞대고 싶지 않았고, 나는 침대 밖으로 나가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조금 남아있던 아침잠은 이미 쓰나미가 밀려오기 직전의 해변처럼 급격히, 그러나 부정적인 잔해를 남기고 먼바다로 쓸려나가고 말았다.

"어, 으음, 깼어?"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내가 깬 것을 알아차린 그는 여느 아침처럼 날 안아주려 했다. 나는 품으로 들어오는 그의 팔을 막았다. 아니, 안지마.

"으응...? 왜 그래?"
새로운 장난인줄 알았을게 뻔한 그는 억센 어깨로 날 안고 모닝 키스 자세를 취했고, 나는 빽 소리를 지르며 그의 얼굴을 걷어냈다.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위협을 당하는 느낌. 무언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느낀 그가 벌떡 일어났다. 혼란스러운 두 눈동자가 날 바라보았다. 방금 지른 비명에 대해 뭐라고 설명을 해야 했지만 차마 널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나조차도 받아들일 수 없으니까.
어제부터 아팠던 머리가 계속 아파서 그랬다고, 감기일지도 모르겠다고 서투른 변명을 해버리고 말았다. 속아넘어 가준건지 내 말을 납득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 침대에서 일어나 아침을 준비했다. 곧 차이니즈 에그와 합성 베이컨의 향긋한 냄새가 집안 구석구석에 퍼졌지만 나는 아침을 먹지 않고 등교하기로 마음먹었다. 아침을 준비하던 그는 몸이 아프면 재택 수업을 받으라고 얘기 했지만 나는 도망치듯 방을 빠져나왔다. 실은 그와 같은 공간에 있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끊임없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학교로 걸어갔다. 그저께부터 머리가 아픈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보다는 오늘 아침에 일어난 사건이 나를 더 괴롭혔다. 왜 갑자기 오늘 아침에 이런 일이 터진걸까?
평소 사이가 나빴다거나 최근에 다툼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우리는 긴 시간을 사귀면서도 한번도 싸우지 않았다는 이유로 친구들 사이에서 약간의 명성을 얻은 편이었다. 워낙 어렸을 때부터 같이 살아오기도 했거니와, 우리는 닮은 점이 많아서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기 쉬웠다. 물론 중간중간 다른 사람을 만난 적은 있었다. 두 명의 여자와 한 명의 다른 남자와 사귀어 봤지만, 그들과의 짧은 사랑이 끝나면 결국은 나는 그에게 돌아오곤 했다. 그의 든든한 품 안에서 나는 급하게 직조되어 성긴 감정을 한 올씩 풀어내릴 수 있었다. 모두들 말하는 것처럼, 나도 오랫동안 함께 해 온 사람의 품이 가장 포근했다.
잰걸음으로 학교를 걸어가면서(나는 마음이 혼란스러울 때는 학교까지 걸어가고는 했다) 와이드웹을 검색했다. 하룻밤에 사랑하던 사람을 싫어할 수 있나요? 검색이 시작되면서 톡쏘는 오존의 냄새가 느껴졌다. 신경회로와 뉴런들, 시냅스가 재배열될때 으레 느끼는 냄새였다. 그와 동시에 와이드웹의 검색결과 리스트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연애 상담 위키에서 나온 쓸모없는 고민이거나 가십에 불과했다. 하긴, 더미만 가득찬 와이드웹에서 제대로 된 내용을 바로 찾기는 힘들 테였다. 와이드웹을 끄고, 다시 보행자의 세계로 돌아왔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싶었지만, 수백가지의 다양한 생각들이 의문문의 형태로 머릿속에서 피어올랐다. 오늘 아침 느꼈던 그 감정은 무엇일까? 더이상 그와 함께 할 수 없는걸까? 헤어지자고 말해야 하는 건가? 머리를 굴려 내가 좋아하는 그의 사진을 꺼내보았지만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는 것은 여전했다.
나는 그와의 오래된 사랑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공포스러웠다. 그를 잃을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한 적이 없었기에 이런 공포는 처음이었다. 코가 막히고 눈물이 번졌다. 화장이 번질지도 모르는데.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 가운데 오늘 아침 확실한 사실은 하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오늘 아침에 사랑을 잃어버렸다. 그것도 평생을 함께 해 온 사랑을, 마치 주머니에 들어있던 지갑을 잃어버리듯이.

몸은 학교에서도 나아지지 않았다. 두통은 심해졌고, 나는 친구들의 인사도 무시하고 계속 로비의 빈 백에 쓰러져 있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종류의 두통이었다. 아파서인지 지나가는 사람들, 친구들의 모습에 까닭없는 짜증이 났다. 세상은 왠지 모르게 달라 보였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좀 더 날 것이고 좀 더 역겨워보이는.
어쩌면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을 때 나는 바로 진찰을 받아야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부분이 그렇듯이, 나는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고 있었다. 어느 순간 감정을 컨트롤하는 것이 힘겨워졌고, 가끔씩 지나가는 사람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점심 시간이 다 되어 학생들이 쏟아져 나오자 일순간 복도는 소란스러워졌고, 나는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학교에서 단짝(에 주책)으로 소문난 두 여자애가 내 앞에서 딥 키스를 하며 지나갈 때 나는 뭐하는 짓거리야 미친년들아! 하고 냅다 소리를 질러버렸고, 순간 시끌벅적하던 로비는 쥐죽은듯 조용해졌다.
아니,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거지? 나를 바라보는 모두의 시선이 느껴졌고, 순간 멍하게 아프던 뒷머리가 콕콕 찌르듯 다시 아프기 시작했다. 온 몸이 화끈거리는 느낌과 함께 무릎 뒤의 힘이 풀리면서 나는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요 며칠 간 들여다 보지 않았던 잿빛 하늘이 보였고, 그것이 내 기억의 마지막이었다.


2.
침대에서 정신을 차렸다. 두통은 가라앉아 있었다. 초점이 맞지 않는 흰 천장이 눈에 들어왔고, 뒷통수로 푹신한 베개가 느껴졌다. 작게 신음 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렸다. 방의 반을 차지하는 대인용 캡슐과 구형 캐비닛 사이로 나를 내려다 보는 은 선생님의 얼굴이 보였다. 가끔 생물학과 보건 수업을 가르치기 위해 학교에 오기 때문에 기억에 남아 있었다. 아마도 나는 학교에서 5분 거리의 클리닉에 실려온 모양이었다.

"깼어? 수경이랑 수영이가 데리고 왔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내가 한바탕 욕을 퍼부은 애들이 날 데리고 왔구나.
"쓰러졌대서 처음엔 꽤나 놀랐는데, 체크해보니 심각한 응급상황은 아니라 곧 캡슐에서 꺼내왔다. 응급상황이였다면 바로 치료했을 테지만 너한테 설명하고 동의를 얻을 부분이 있어서."
심각한 상태였다면 당연히 보호자가 필요했겠지. 지금 한창 일을 하고 있을 내 연인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한편으로 다행스러웠고, 다시 눈물이 나려고 했다. 안도감, 편안함, 부끄러움, 이 모든 감정들은 전에 없이 너무나 강렬하게 다가왔고, 나는 한동안 천장을 바라보며 마음을 진정시켜야 했다. 심장이 터질듯이 뛰었다. 은 선생은 내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저...는, 오늘 어떻게 된건가요?"
"안심해. 드물긴 하지만 그렇게 심각한 사건은 아니야. 얼마 전에 칩 업데이트를 받았지?"
"예. 이틀 전에 펌웨어 업데이트를 받았어요."
"그 이후로 이상이 있지는 않았나?"
"그랬어요. 처음에는 감긴줄 알았는데 그 뒤로 두통이 심해졌어요. 아침에 학교 갈 때 까지만 해도 와이드웹 서핑은 됐는데.."
"역시. 자네 바이오 기록에서 칩 업데이트를 받은 사항을 확인하고 우선 뇌 스캔을 해봤지. 이번 펌웨어 업데이트가 대뇌쪽 뉴로트랜스미터 조절 관련이었는데 그게 자네 몸에서 적합성 에러를 일으켰더라구."
"보통 바이오칩 펌웨어는 개개인에 맞게 재설정 된다고 하지 않았나요?"
수업시간에 딴짓을 하진 않았나 보군. 덧붙이더니 은 선생은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렇지. 보통은 펌웨어가 체내 로그를 읽어서 개개인에 맞는 뉴로트랜스미터의 양을 조절하니까. 그런데 펌웨어를 검사해보니 뉴로트랜스미터 수치가 잘못 적용된 부위가 몇군데 있었어. 가끔 몸 상태가 나쁠 때 업데이트를 하면 이런 결과가 나오기도 하지."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업데이트된 펌웨어가 개개인에 맞춰 재설정 될때는 이제까지의 로그와 함께 펌웨어 업데이트 시의 몸 상태를 함께 읽어들이기 때문이다. 칩 업데이트 하던 날에도 감기였는지, 몸 상태가 별로였는데, 경고를 무시하고 업데이트를 강행했더니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이다.
"머리 아프고 열이 난 이유는 아마 면역 담당 부위의 피드백이 깨져서가 아닐까 싶은데, 그부분은 워낙 중요한 곳이라 알아서 피드백이 작동해서 심각한 사태가 발생하진 않았다. 그 부분 말고 다른 이상은 없었어? 갑자기 나타난 이상한 일들?"

나는 곧장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자고 일어나니 사랑을 잃어버렸던 경험, 친구들에게 이유없이 화를 낸 기억들. 난 더듬더듬 오늘 아침 있었던 일을 이야기 했다. 15년도 넘게 살아온 연인에게서 갑자기 혐오에 가까운 감정을 느꼈다고. 가급적이면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않으려 했던 속마음이라 설명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의 얼굴은 붉게 달아오르고 말았다.
"음,"
이야기를 들은 은 선생님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마치 수업을 시작할 때의 버릇처럼 운을 뗐다.

"몇가지 에러 중에 자네 선조체-전두엽 커뮤니케이션을 담당하는 부분의 뉴로트랜스미터 조절이 다 꺼져있었어. 이게 무슨 뜻인지 알겠나?"
"전두엽은 감정을 관장하는 부분 아닌가요?"
"그렇지. 하지만 도덕도 담당한단다. 선조체(striatum)는 다양한 조절작용에 관여하지만 특히나 사랑을 일으키는 부위로 알려져 있지. 즉 오늘 아침에 자네의 성적 도덕 관념을 조절하던 부분이 꺼져버린거지."
"그런데 그것과 오늘 아침에 일어났던 일과는 무슨 관계가 있는 거죠?"
"음, 관계가 있지. 보통 바이오칩은 뇌의 특정 부위를 자극해서 학습이나 운동 등 여러 가지를 도와주잖아? 다른 부분과 달리 바이오칩은 불필요한 선조체-전두엽 커뮤니케이션을 억제시킨단다. 자연 상태에서 동성 간의 사랑이나 근친 관계는 혐오의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지."

마지막 문장을 듣고 나는 잠시간 어안이 벙벙했다
"잠시만요. 우리의 본능이 어떻다고요?"
"우리는 본능적으로 동성간의 사랑이나 근친과의 사랑을 터부시하도록 프로그램 되어 있다는 말이다."


3.
나는 대인치료용 캡슐에 누워 머리를 고정시켰다. 유동하는 젤타입의 시트가 몸을 감쌌다. 부드럽게 웅웅거리는 기계의 소음이 사방에서 들려왔고, 삐빗하는 작은 경고음와 오존의 냄새를 느낀 후 곧 목 뒤의 칩은 무선으로 제어 컴퓨터와 연결되었다. 캡슐 밖에서 은 선생님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뇌내칩과 나노공학이 발달하기 전인 21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인공적 감정조절은 불가능했다. 사람들은 본능적 감정을 그대로 가지고 살아갔지. 이런 세상이 어땠을지 상상이 가니?

응, 응. 맞아. 상상도 못할 야만적인 시절. 그때는 스포츠 경기에서, 술집에서, 침대에서 사람들이 감정에 휘말려 서로를 죽이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나고는 했지. 정치와 정책 결정, 전쟁 등 굵직한 일들도 개인의 감정으로 처리되고는 했단다. 감정과 이성이 적절한 조화를 이룰때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는건데, 당시에는 사람들이 극한의 감정으로 서로에게 못할 짓을 하곤 했던거지.
뿐만 아니라 감정적 본능에서 오는 불합리한 차별도 많았어. 사람들은 다른 피부색이나 같은 성별과의 관계에서 혐오감을 느끼도록 진화되었기 때문이지. 사실 처음으로 감정조절이 도입된 부분도 이쪽 부분이었어. 초기 뇌 개척자들은 다른의 감정을 억제하는 것 보다는 동성애에 대한 거부감을 억제하는 쪽이 덜 위험하고 더 윤리적이라고 생각한 거야.

그렇지. 호모포비아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곳이 선조체-전두엽 커뮤니케이션이었고, 여기를 조절함으로써 뇌 개척자들은 호모포비아를 없애는데 성공했지. 개정된 윤리법안과 맞물려 뇌내칩을 장착한 사람들은 제일 먼저 호모포비아 감정을 조절하기 시작했단다. 당시엔 이게 지켜야 할 예의범절 중 하나로 받아들여지기도 했고.
우리가 나중에서야 알게 된 다른 사실은, 선조체-전두엽 커뮤니케이션이 단지 호모포비아만 관련되어 있는 부분이 아니였다는 거다. 뇌의 이 부위는 모든 성적 터부와 관련되어 있고, 근친관계와 SM을 비롯해 모든 종류의 성적 터부가 한 순간에 사라졌지. 그에 따라 성관계의 종류는 전에 비해 이를데 없이 복잡하고 다양해지게 되었고, 사람들은 다양한 젠더를 넓은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거란다. 이게  너도 배웠을 '제 2의 성혁명'이란다. 피임약 이후로 세상을 가장 크게 바꿨지.

"그러니까, 은선생님의 말씀은 지금 제가 제 남자친구를 역겹...게 느끼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뜻인건가요?"
"그렇지. 치료를 위해 네 칩을 잠시 꺼뒀으니, 지금 너는 옛날 사람들이 느끼는 대로 세상을 느끼는 거야. 이런 경우를 의학계에서는 불이 꺼진 상태(Turn off)라고 부르는데, 지금처럼 온전히 의식을 가진 상태에서 칩을 껐을 때 이런 상태가 나타나고는 한다. 칩의 조절이 없는 세상을 살아본 경험은 어떻니? 곧 고쳐줄테니 걱정말고 누워 있거라."
불이 꺼진 세상은 어땠냐고? 은 선생은 내가 대답할 기회를 주지도 않고 캡슐을 닫아 버렸다. 대답을 바라고 한 질문은 아닌 모양이었다. 어두컴컴해진 캡슐에서 수면 유도 선율이 흘러나왔고, 나는 몽롱한 소리를 들으며 잠에 빠져 들었다.


4.
시술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남자친구가 등장하는 강렬한 원색의 꿈을 꾸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노봇 시술은 끝나 있었다. 무리한 몸을 달래줄 몇가지의 약을 받고 간단한 심리 테스트를 거친 후에 나는 정상으로 돌아왔다는 판정을 받았다. 은 선생은 다운그레이드를 시켜놓았으니 오류가 해결되기 전까지는 구버전의 펌웨어를 쓰라며 이례적으로 문 앞까지 나를 배웅해 주었다. 남자친구를 만나려면 눈화장을 고쳐야 하지 않겠냐는 말과 함께. 클리닉 문 앞의 전신거울을 보니 피곤한 눈망울을 가진 내가, 엉망으로 번진 눈화장과 함께 서 있었다. 사천년의 인류 역사를 하루에 경험하고 돌아온 것만 같은 지친 표정. 화장은 고치고 돌아가는게 예쁠 것 같았다.

집으로 돌아가면서 은선생님의 말을 복기했다. 예전에는 '가계도'라는 것이 있었다고 했다. 그때는 보통 한 명의 남자가 한 명의 여자와 오래도록 성적 관계를 가지며 아이를 낳았고 다른 시설의 도움 없이 직접 키워냈기 때문에, 그렇게 자란 아이들의 아이들을 추적하여 가계도라는 다이어그램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때의 가계도가 단순한 모빌 모양이였다면 지금의 가계도는 여기저기 엉키고 꼬인 실타래 모양이 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 뿐만이 아니다. 가족간의 관계가 중요했기 때문에 서로를 부르는 호칭도 엄청나게 다양했다고 한다. 나와 내 연인의 관계도 지금은 사어가 된 <삼촌>과 <조카>라는 호칭으로 설명할 수 있는데, 우리의 사랑은 21세기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을 관계였을 것이다.

이 모든 변화가 뇌내칩이 도입되고 50년만에 생긴 일이라고 했다. 그들의 엄격하기 이를 데 없는, 새디스틱하기까지 보이는 성윤리를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오직 한명하고만 섹스를 해야 한다니. 그 윤리 아래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사는 건물에서 누가 섹스를 제일 잘하는 지도 몰랐을 것이고, 누구의 가슴이 제일 몰캉한지, 누구의 정액이 제일 달콤한 지를 알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총천연색의 화면을 끄고 흑백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기분이 아니었을까. 21세기 사람들의 삶은 지루해서 견딜 수 없었을 것이고, 아마도 그래서 그 때 사람들은 자살을 많이 한 게 아닐까.

다시 연결된 와이드웹으로 찾아보니, 이번 펌웨어 업그레이드에서 나와 비슷한 사례가 전국에서 열 네 건 보고되었다는 뉴스가 나와 있었다. 그들도 다 나와 같은 일을 겪었을까. 반세기 동안 잠들어 있던 야생적 본능과 함께, 불이 꺼진 상태에서 영문도 모른채 살아하는 이들을 혐오하게 되는 그런 아침을 맞았으려나. 그 이질적인 감정이야말로 나의 원초적인 본능이라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내 사랑은 과연 어디쯤 위치해 있는걸까.

집에 돌아오니 그가 와 있었다.

식탁 뒤로 맛있는 저녁을 차려놓고 날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내가 오랫동안 사랑해왔고 오늘 아침 잠시 잃어버렸던 그 남자였다. 그에게 달려가서 안겼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절망만 있었던 아침이 떠올라 평소보다 오래 안고 있었다. 다시 눈물이 나오려 했지만 참았다. 괜한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고, 오늘 있었던 일을 언급하기 싫었다. 내 본능을 들킨다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부끄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단순히 머리가 아파서 클리닉에 다녀왔다고 말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나를 안아주었다.

저녁을 먹고 우리는 침대에 누웠다. 나는 그의 품으로 파고 들었다. 이틀 정도 내버려 둔 까끌한 수염, 따뜻한 옆구리,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나 때문에 오늘 깜짝 놀랐지, 미안해, 하고 나는 그의 왼뺨에 키스했다. 둥글게 말은 입술로 그의 이틀짜리 수염이 느껴졌다. 입술에 닿은 수염의 개수를 셀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한 감촉. 우리는 잠시동안 말없이 서로를 안은 채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전처럼
하지만 다시, 그를 사랑할 수 있을까?
그날 아침에 느꼈던 생경한 감정이 떠올랐고 나는 잠시 몸을 떨었다. 우린 서로 사랑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금지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지도 모르는거야. 본능이라는.
춥니, 하고 그가 말하였고 왼팔로 팔베개를 해주며 나를 감싸 안았다. 든든한, 매일밤 나를 편안하게 해주던 이두박근이 머리 뒤로 느껴졌다. 내용물을 싸고 있는 질긴 갈색의 피부 뒤로 그리운 근육의 감촉이 느껴졌다. 그가, 나의 그가 돌아왔다. 머리를 돌리고 한동안 나를 바라보던 그와 눈을 맞추었다.

혹시나 그를 바라보던 내 눈동자가 흔들렸을까?
다시 예전처럼 그를 사랑할 수 있을까?
확신할 수 없었다.

댓글 2
  • No Profile
    엄길윤 12.11.16 02:49 댓글 수정 삭제
    오오 좋은 글이 많이 올라오는군요! 재밌게 잘 봤습니다! 미래에 충분히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 No Profile
    니그라토 12.11.16 02:53 댓글 수정 삭제
    분명 사이버네틱스와 인간의 결합은 인간성의 침해라는 대가를 불러오게 되겠지만, 결국 그런 시대가 오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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