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탓티황옥씨 사건에서 영감을 받아 기사를 읽은지 세 달정도 지나서 완성시킨 단편소설입니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단체는 실제와 관련이 없다는 점 유의해 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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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1월 13일 강원지방경찰청 강력계 소속 형사인 김영호는 동료 형사 몇 명과 함께 속초경찰서에서 본청으로 넘어오는 사건을 인계받기 위해 주차장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잠시 후 주차장 안으로 승합차 두 대와 승용차 한 대가 요란스럽게 사이렌을 울리며 들어왔다.
두 번째로 들어온 승합차의 옆문이 열리고 수갑으로 두 손이 묶인 채 양 팔을 경관들에게 포박당한 사십대 후반의 남자가 차에서 내렸다. 그에게선 살인자의 몸에서 느껴지는 광기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김 형사는 동료들과 함께 계단을 내려가 용의자의 신변을 인수했다. 언론에 J씨라고 알려진 그 남자는 47세의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남성으로써, 자기 아내를 6일 동안 3회에 걸쳐서 폭행하고 다툼 끝에 흉기로 찔러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었다.
남자는 곧 유치장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김 형사는 속초지서에서 사건을 맡아 보던 박 형사를 만났다. 며칠 동안의 심문 때문인지 그도 용의자만큼이나 초췌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김씨는 박 형사로부터 지금까지의 사건조사 내용과 수사기록, 신상정보 등을 건네받았다. 기록에 의하면 그가 종전에 알고 있었던 사실과는 달리 J씨는 정신착란에 의한 살해를 저질렀으며 만약 그가 정신착란 증세를 보인다는 것이 입증된다면 아마 그는 감형을 받을 수 있을 것이었다.
“김씨가 수고가 많아. 근데 쪼끔 문제가 생긴 것 같아. 우리 서에서 심문한 내용을 가지고 회의를 할 때 신문사 수습기자 녀석이 사건을 물은 모양이야. 오늘 아침 조간신문에 기사가 떴더라고.”
“아, 예…….”
최근 일어났던 여타의 가정불화로 인한 살인사건과 다를 바 없는 이 살인사건이 언론의 구미를 당기게 한 것은 아마 정신착란 증세에 의한 살인이기 때문일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한참 서류철을 넘기던 김 형사는 어느 한 부분에 주목했다.
“피해자가 우리나라 사람이 아닙니까?”
박 형사는 자신의 입에 손가락을 가져다대며 언성을 낮추었다.
“그래, 결혼한 지 일주일도 채 안된 베트남 새댁이지. 나도 처음엔 좀 많이 놀랐어.”
만약 이 일이 기자들에게 알려진다면 그 여파는 엄청날 것이다. 한국과 베트남간의 외교 문제로 번질 가능성도 다분했고 피의자의 베트남 행을 알선한 여행사 사장도 책임공방을 면치 못할 것이었다.
“참 큰일이야. 이 사실을 기자들이 무는 날에는……. 에휴, 상상하기도 싫다.”  
박 형사는 한숨을 내뱉었다.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이러는지 막막하기만 하네요. 여행사에선 정신에 이상이 있는지 없는지 사전에 확인도 안 해 보고 보냈대요?”  
“그 자식들은 그냥 돈만 벌면 장땡이야. 애초에 그런 건 관심도 없지. 뒷돈에 눈이 멀어 서류 검사도 안 했더란다.”
“신부만 불쌍하게 됐네요. 한국 들어온 지 일 주일도 안됐는데.”
김 형사는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지구대에서 쓴 조서가 영 엉망이기에 윗선에서 뭐라고 하면 우리 팀장님 나만 갈구려 들테니까 먼저 좀 손보려고 간단하게 몇 가지만 물어봤더니 울면서 필요없는 얘기까지 막 말하더라. 지구대에서 쓴 조서가 엉망이었던 이유가 다 있더라고.”
김 형사는 수사 기록을 덮었다.
“뭐라고 말하던가요? 피의자가.”
“그러니까 말이야…….”
그는 이어지는 박 형사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2006년 12월 29일 초저녁 베트남 하노이 노이바이 국제공항에서 한 무리의 한국인 남성들이 가이드들의 안내를 받으며 홀을 빠져나왔다. 장 기환도 그 일행들 중 한 명이었다.  
공항에서 나온 그들은 미리 준비되어있던 버스에 올라 호텔로 향했다. 그 버스 측면에는 '베트남 하노이 국제결혼 여행'이라고 한국어로 대문짝만하게 써 놓은 현수막이 붙어있었다.   6시 30분경 호텔 앞에 버스가 멈추어 섰다. 책임자가 예약 확인을 하기 위하여 먼저 내렸고 여성 안내원이 각각 배정된 방의 호수를 불러주었다. 그의 이름이 가장 먼저 호명되었는데 배정된 방은 1201호실로 12층의 첫 번째 방이었다.
장 기환은 캐리어 손잡이를 길게 빼어들고 끌면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방에 도착해 전망을 한 번 둘러본 뒤 짐을 풀고 곧바로 식당 홀로 내려간 그는 미리 예약하여 자기 이름이 붙어있는 좌석에 앉았다.
잠시 후 사람들이 모이자 만찬이 시작되었다. 분위기는 차차 무르익어 다들 술잔을 기울이며 웃고 떠들었다. 그도 처음엔 그런 지나치게 활기찬 기운이 어색한 듯 느껴졌으나 이내 곧 익숙해져 마주 앉은 남성과 술잔을 주고받았다. 그는 여행사에서 베트남 국제결혼을 맡고 있는 이번 여행의 총 책임자라고 했다.
그렇게 다들 웃고 떠들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조명이 전부 꺼졌다가 단상 위를 향해 빛을 내뿜었다. 그와 마주보고 있던 책임자는 어느 새 단상 옆에 마련된 조그만 연단에 서서 마이크를 잡고 있었다.
책임자가 박수를 치자 단상 뒤의 문이 열리며 짙은 황색 피부를 가진 서른 명 남짓의 베트남 여인들이 나란히 걸어 들어왔다.
"자, 앞으로 여러분의 배우자가 될 지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모두들 기대되시죠? 일단 첫 번째 여자 분의 이름은……."  
그런 식으로 그 여자들의 옷에 붙은 번호표 순서대로 여자의 이름과 나이, 성격과 같은 간단한 소개가 이어졌다.
그는 소개가 이어지는 내내 싸구려 보드카 몇 잔을 기울이며 곁눈질로만 그 여자들을 쳐다보다가 어느 순간 술잔을 내려놓았다. 책임자의 소개가 이어졌다.
"열두 번째, 이름은 황 주이 란입니다. 우리 나이로 26살이죠. 과묵하고 도도하다고나 할까, 어쨌거나 그런 성격입니다."
그 여자는 황갈색의 피부색을 가진 다른 주위 여성들에 비해 유난히도 백색에 가까운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오뚝한 코에서는 중세 초상화에서나 느낄 수 있는 귀족 여인의 기품이 묻어나오는 듯하였고, 금발과 갈색이 적절히 섞인 머리카락에서는 동양인에게선 느낄 수 없는 이국적인 향기가 났다.
그는 한 눈에 그 여자를 점찍었다. 그러고 나니 처음에도 그랬듯 다른 여자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순서 추첨은 방 호수 순으로 진행하겠습니다. 일 번 기환 씨부터 차례로 나와 주세요."
장 기환은 의기양양하게 가장 먼저 앞으로 나갔다. 그는 서류 검사의 통과와 지금 이 순간선택의 우선권을 갖기 위해 여행사에 미리 뒷돈을 지불했었다. 시골 빈농에 불과한 그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몹시 큰돈이었지만 그는 기꺼이 그 금액을 받아들였다.  
안내원이 내민 검은 비닐봉지에 손을 집어넣은 그는 무언가 봉투의 가장 아래쪽에서 솟구쳐 올라오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러다 그의 손에 공 하나를 쥐어주었고 그는 그 공을 들어올렸다. 공에는 유성 매직으로 1이라는 숫자가 씌어져 있었다.
곧 모든 사람이 번호를 골랐다. 주최자는 장 기환을 다시 호명했다.
"첫 번째로 뽑으셔서 1등을 뽑으신 기환 씨, 몇 번 여성분을 반려자로 삼으시겠습니까?"  
그는 망설임 없이 12번이라고 대답했다. 장 기환이 12번을 고른 것이 확실시되자 주위에 있던 다른 남자들은 탄식을 내뱉었다.
"네, 12번 황 주이 란 양 맞으시죠? 새로운 출발 축하드리겠습니다."
통역 담당이 란에게 귓속말을 해 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단상 아래로 내려와 비어있던 그의 옆자리로 와서 앉았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살짝 미소를 머금었다가 다시 거두어들였다. 사실 그녀를 비롯해 오늘 단상에 올라선 여자들은 모두 건방져 보일 수도 있다는 이유로 되도록 웃는 표정을 유지하라는 주문을 받았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 세상에 하나 남은 혈육인 동생의 학비를 위해 한국행을 결심한 것이므로 그 말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없었다. 누가 그녀의 표정을 자세히 보았다면 비장함이 느껴진다고 할 정도로 그 얼굴엔 긴장감이 서려있었다.
"자, 그럼 저녁식사가 계속 되겠습니다. 추후 일정은 잠시 후 말씀드리겠습니다."
담당자가 진행을 마치고 맞은 편 자리에 와서 앉았다.
"상대분이 무척이나 마음에 드시는 모양입니다."
그는 호탕하게 웃으며 장 기환에게 손을 내밀었다.
"도와주신 덕분입니다."
그렇게 서로 술 몇 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시시콜콜한 잡담을 나누었다. 란은 의자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
"이 일 하면 벌이는 좋으십니까?"
"으음, 이번에 한국에 가면 바로 사표를 낼 작정입니다."
책임자는 담배연기를 깊이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기환은 술잔을 내려놓고 이어지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물론 벌이가 섭섭한 건 절대 아닙니다. 전 이 바닥에서만 10년을 먹고 살았으니까요. 젊었을 때부터 입사선배님들 따라 안 가본 나라가 없을 정도였죠. 최근에는 동남아시아 쪽을 다니면서 우리 남자들하고 이쪽 여자들하고 짝을 맺어 주는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거 아세요? 여기에 자원한 여자들은 다 빈민층 출신이에요. 돈도 힘도 권력도 없는 여자들이 뭘 믿고 이런 일에 자원을 할까요? 코리안 드림일까요?? 아니면 행복한 결혼 생활? 절대 아닙니다. 그 아이들이 바라는 건 단지 세 끼 굶지 않고 사는 겁니다. 그 사람들은 자기들이 거의 팔려가는 처지라는 거 절대 모르고 있어요. 그냥 기대에 젖어 망상만 하죠. 그리고 맹신해요. 텔레비전 뉴스에 나온 서울 도심의 모습이 한국 전체의 모습일 거라고요."
그는 담배를 비벼 끄며 말을 이었다.
"최근엔 인권단체도 거들더군요. 인신매매를 합법적으로 일삼는 소말리아 해적 같은 녀석들이다! 돈 받고 동남아 여자 한국에 팔아준다! 솔직히 저도 학생 때 윤리를 배운 사람으로서 항상 마음이 안 좋았어요. 그놈들 말대로 정말 불쌍한 여기 여자들 우리나라에 가정부로 팔아먹는 것 같았다 이 말입니다."
장 기환은 무거운 마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전엔 회사로 전화가 걸려왔었습니다. 자기가 고른 여자가 이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글쎄 환불을 해달라고 하지 뭡니까? 베트남으로 돌려보내래요. 전 단숨에 그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담판을 지었어요. 베트남 여자는 물건이 아니라 한 인격체인데 존중해주고 아껴주어도 모자란데 한 사람의 인격을 무시하고 자기 나라로 돌려보내라고 하는 건 도덕적이지 못한 행위라고 말이에요. 그랬더니 멱살을 잡으시더군요. 네놈이 나 외국 여자하고 결혼해서 사는데 이혼하고 싶다면 이혼 서류에 도장 찍어 주도록 도와주는 거지 무슨 상관이냐고 말이에요. 결국 끝까지 고집 부리시더니 지난주에 이혼 도장을 찍으셨더라고요. 너무 마음이 아파서 그 분께 결혼 비자 대신에 장기 체류 할 수 있는 비자도 드리고 방도 하나 얻어드렸어요. 어찌나 고마워하시던지……."
그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았다.
"이제 고향 내려가서 편히 농사나 지으며 살려고요. 뭐 몸은 조금 더 힘들겠지만 적어도 두 발 쭉 펴고 잘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말을 마치고 입술을 굳게 닫은 그의 얼굴에선 씁쓸함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기분 좋으신 날에 이런 말을 해서요. 좋은 여행 되세요."
그는 다시 연단에 올라서 마이크를 잡았다.
"지금부터 취침시간까지는 자유시간입니다. 다만 호텔 밖으로 나가거나 지나치게 과음하는 행위는 삼가 주세요. 내일 아침에는 10시까지 호텔 로비에서 배우자분과 함께 모여주시면 되겠습니다."
그는 란과 함께 식당 홀에 남아 보드카 몇 잔을 더 기울였다. 두 시간쯤 후에 그들만 따로 방으로 올라갔다. 란은 술에 취해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 하는 그를 부축하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방 앞에 다다랐을 때 그는 술에 취해 카드키를 제대로 긁지 못했다. 결국 란이 카드키를 받아들어 문을 열었다. 그들은 불 꺼진 방 안으로 들어갔고 잠시 후 동그랗게 불이 켜졌다.
날이 밝자마자 장 기환은 구토를 하기 시작했다. 그도 처음엔 어제 마신 보드카 때문이겠거니 하고 대수롭잖게 넘어가려 했지만 점점 머리가 찌르듯이 아파왔다.
어느 새 그녀가 구토 소리를 듣고 욕실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를 애타게 부르는, 어눌한 듯 들리지만 또렷하게 맴도는 바로 그 소리가 그의 고막을 계속해서 때렸다. 하지만 그 때마다 정신은 계속해서 몽롱해져만 갔다. 결국 욕실 문을 열고 나오던 그는 그만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뜻밖에 벌어진 상황에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전화기를 떨어뜨렸다. 무언가 조취를 취해야 했지만 자신 몸무게보다 두 배 이상 나가는 남자를 연약한 여자 혼자 들어 옮기는 것은 무리였다. 그녀는 이불을 그가 쓰러진 곳으로 가져와 그의 몸 위에 넓게 펴 주고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물티슈로 그의 입가에 묻어 흐르던 토사물을 닦아 주었다.
세 시간 후, 오전 9시가 조금 못 되었을 때 그는 깨어났다. 눈을 뜨자마자 지금이 몇 시냐고 물었다. 당연이 그녀는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욕실 문 옆 탁자에 놓여있던 시계를 발견하고 나서야 그는 안심했다.
일정표에 의하면 오전 열 시부터 시작되는 오늘 일정은 체크아웃을 마친 후 10시 30분까지 버스에 탑승해서 신부의 집으로 가는 것이었다. 신부의 집에선 베트남 식으로 결혼식을 올려야 했다. 오늘 그 집에서 밤을 보내고 내일 아침 일찍부터 한국인 남성들을 위한 관광 일정에 참여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들은 서둘러 씻은 후에 옷을 갖추어 입었다. 호텔 로비로 내려가 체크아웃을 하고 45인승짜리 버스에 올랐다. 그는 오늘 아침 있었던 일 때문에 그녀가 자신의 병을 눈치 챘을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다만 어제의 과음 때문에 빚어진 일이라고 생각하기를 진심으로 바랄 뿐이었다.
그런 생각들을 하는 사이 버스는 시골길을 달리면서 띄엄띄엄 있는 마을마다 한 쌍, 혹은 두 쌍의 부부를 내려놓았다. 그렇게 버스가 다섯 번째 멈춰 섰을 때 그들은 통역을 도와줄 가이드 한 명과 함께 버스에서 내렸다.
그녀가 사는 마을까지는 포장된 길이 없으므로 그들은 걸어서 산 하나를 넘어야만 했다. 란은 장 기환의 캐리어까지 끌며 앞서 걸었다. 이미 그의 목덜미는 땀에 흥건하게 젖어있었다. 산길을 돌고 또 돌아 3km 남짓 걸었을 때 그들 앞에 작은 언덕 하나가 나타났다. 란은 신이 나서 가장 먼저 그 언덕 위로 올라갔다. 뒤쳐져있던 그들이 그 언덕을 다 올랐을 때 그녀가 어느 한 지점을 가리켰다. 그 손가락 끝이 향하는 곳에는 조그만 오두막 한 채가 있었다.
얇고 긴 나뭇가지를 엮어 만든 문을 열고 마당에 들어선 장 기환은 흐르는 땀을 닦고 생수로 목을 축였다. 나무로 네 기둥을 세우고 판자로 벽을 막은 다음 지붕에 지푸라기를 얹은 전형적인 베트남 재래식 가옥이었다.
란이 가족들을 부르러 집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40대 정도로 보이는 부부가 문을 열고 나왔다. 장 기환은 평소에 보던 대로 절을 올렸다. 자기보다 연배가 더 낮은 사람들에게 절을 하려니 기분이 묘했다. 그 사람들 또한 그의 그 행동에 몹시 어색해했다. 통역 가이드는 그들에게 그것이 한국식 인사라고 설명해 주었다.
집 안으로 들어서자 벽 양쪽에 마주 보도록 걸어 둔 가족사진이 보였다. 소파는 없고 대신 구석에 천으로 안에 솜을 누빈 방석 몇 개가 쌓여 있었으며 병충해로 인해 벽 여러 곳에 구멍이 뚫려 밖이 훤히 내다보였다.
란은 그와 가이드에게 방석을 하나씩 주고 나서 그 옆에 다리를 모으고 다소곳이 앉았다.
“저 분들이 부모님이신가보군.”
“아뇨, 저 분은 우리나라 식으로 하면 고모시고 저분은 고모부세요.”
“그럼 부모님은 어디에 계신거지?”
“양친 모두 돌아가셨대요. 두 분 다 돌림병으로요.”
그렇게 잠시 동안 가이드를 사이에 두고 대화가 오갔다. 동생은 공부 때문에 도시에 나가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에 대한 경제적인 부담은 끊임없이 그녈 괴롭혀왔을 것이고 그 짐은 고스란히 시골 빈농들에게 가중되었다. 그는 어째서 그녀가 한국행을 결심했는지 그제야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대화가 거의 끝나갈 무렵 그는 안주머니에서 흰 봉투를 꺼냈다.
그 집에서 마련해 준 점심을 먹은 다음 가이드의 지도에 따라 베트남 식으로 먼저 결혼식을 올렸다. 란은 마을 공용으로 마련된 전통 혼례 의상을 입었고 장 기환은 마을에서 가지고 있던 남성 혼례복이 따로 없었기 때문에 귀국했을 때 입으려고 미리 가져온 양복에 넥타이를 맸다.
그의 장인, 장모가 된 사람들은 결혼식이 끝나고 차려 놓았던 음식을 풀어 마을 사람들과 함께 잔치를 즐겼다. 그들은 밤이 늦도록 모닥불을 밝히고 축하의 노래를 부르며 하나 둘씩 취해갔다. 오늘 아침 일이 생각났기 때문에 그는 술을 마시지는 않았지만 친절하고 다정한 그 밤의 분위기에 점점 취해갔고 어느 순간 잠이 들어버렸다.
다음 날 아침 동이 틀 무렵 그들은 어제 타고 왔던 버스에 다시 올랐다. 그 날은 한국으로 귀국하는 날이었다.
아침부터 한국인 남성들을 위한 관광이 기획되어 있었는데 그 일정들은 몹시 단조로웠다. 하노이의 유적지에 들렸고 여러 관광 명소를 다녔으며 하노이 시내에서 인지도가 무척 높다는 한인 식당을 찾아가 점심 식사를 했다.
일행 중 대부분이 식사 직후 식당 근처에 있는 작은 암자까지 걸어갔는데 그 암자에는 신혼부부들의 백년해로를 빌어 준다고 해서 유명해진 불상이 있었다. 란은 비록 순수 본인 의지에 의한 한국행을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한국에서의 생활이 진심으로 행복하길 바라며 기도를 했다. 그녀가 세 번째 절을 했을 때 갑자기 돌멩이가 멀리서 날아와 도금된 불상의 머리에 박혔다. 버스에 앉아 란은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불길한 느낌이 그녀를 엄습해왔다. 그는 가만히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모든 일정이 끝나고 밤 열 시경 비행기는 이륙했다. 그를 비롯한 한국 남성들은 하루 종일 진행된 관광 일정에 지쳐 금방 잠이 들었다. 하지만 베트남 신부들은 그렇지 못했다. 그녀들은 빌고 또 빌었다. 가난을 대물림 하지 않게 해 달라고, 세 끼만은 굶지 않게 해 달라고.
다음 날 새벽 3시 10분경 인천국제공항 정문에서 국제결혼 여행은 해산했다. 장 기환과  란은 공항 주차장에 주차되어있던 그의 승용차를 타고 여관으로 가 그날 정오까지 잠을 청했다. 그리고 예약한대로 서울의 한 한식당 연회장으로 향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상경했던 친구들은 기쁜 마음으로 그의 결혼 소식을 축하해 주었다. 하지만 그들의 아내는 신부의 국적을 가지고 이래저래 수군거리기 바빴다. 그 중 가장 큰 소리로 떠들던 한 여자가 남편한테 눈짓으로 주의를 받았지만 그녀들의 뒷담화는 멈추지 않았다.
"기분 상하게 해서 미안하네. 참, 우리나라는 언제야 다른 나라 사람들을 선입견 없이 바라볼 수 있을 런지."  
"괜찮아, 란도 못 알아들은 눈치고 뭐 저 사람도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을 테니까. 우리나라가 이런 나라라는 거. 솔직히 나도 아직은 좀 어색해."
한식당에 있는 내내 란은 그의 어깨 옆에 붙어서 한시도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장 기환은 그녀를 팔꿈치로 툭툭 쳐내기까지 하였지만 그럴 때마다 오히려 더 가까이 달라붙으려 하였다. 그녀에게 있어서 한국 땅은 앞으로 살아가야 할 땅이라거나 남편이 사는 나라라기보다는 아직 멀고 낮선 타국이었다. 그러한 땅에서 란이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라곤 그가 유일했다.
몇 시간 후에 그들은 다시 차에 올라 강원도 속초시에 있는 그의 집으로 향했다. 토요일 저녁이었기 때문에 영동고속도로는 극심한 정체상태였다. 결국 그들이 속초에 도착하는데 까지는 3시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다.
시내 분식집에 들러 간단한 요깃거리를 구입한 후 장 기환의 집에 도착했을 때의 시각은 6시 20분이었다.
란은 자동차가 멈추어 서자 자신의 짐을 내리고 집 문을 향해 뛰어갔다. 그녀 앞에 펼쳐진 풍경은 예상을 한참이나 빗나간 수준이었다. 높다란 고층빌딩 대신 태백산맥이 주위를 병풍처럼 두르고 있었고 그녀가 살아가야 할 집은 아담한 전원주택이 아니라 낡고 초라한 콘크리트 건축물이었다.        
그가 앞장서서 집 안으로 들어갔다. 란은 잠시 마당에서 머뭇거리다 베트남에서 신고 온 낡은 구두를 가지런히 모아 현관 한 쪽에 모셔두었다.
김밥으로 간단히 끼니를 때우고 그 동안의 긴 여행에 지친 몸을 풀었다. 그는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쓰시던 배게를 그녀가 누울 자리에 놓아주었다. 둘은 나란히 잠이 들었다.
란이 잠에서 깬 것은 새벽녘이 어슴푸레하게 밝아오던 때였다. 그녀는 눈을 뜨자마자 익숙한 소리를 들었다. 화장실 쪽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침대 밑으로 발을 딛었을 때 무언가에 미끄러지는 느낌이 났다. 더듬거리며 불을 켜자 바닥에는 역한 냄새가 나는 액체가 사방에 널려있었다. 화장실로 가서 문손잡이를 돌리자 바닥에 엎드린 채로 좌변기에 토사물을 쏟아내고 있는 그가 보였다.
그녀는 욕실에서 고무대야를 꺼내 거실에 놓고 물을 받아 침대 커버와 이불을 그 안에 넣었다. 이불을 맨발로 밟으면서 곰곰이 되짚어보았다. 그가 술을 마시거나 지나친 피로가 뒤따르는 일을 했었는가. 그는 한식당에서 식사에 반주를 곁들여 마셨고 3시간동안 정체되는 고속도로 위에서 운전을 했다. 아니면 베트남에서 마신 물 때문이었을 수도 있었다. 그녀 친구들의 말에 의하면 한국인 관광객들은 베트남 물을 마시거나 심지어 한국 정수기로 거른 물을 마셔도 구토를 하고 심하면 설사까지 한다고 했다.
화장실에서 들리던 몸이 거꾸로 치솟는 소리가 멈추더니 갑자기 무언가 박살나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덜거덕거리는 화장실 문고리를 조심스레 열었다.
장 기환은 눈이 풀린 채 욕조에 반쯤 몸을 걸치고 의식을 잃어버렸다. 그의 손에선 꽤 많은 양의 피가 흐르고 있었는데 그것은 세면대 위로 쏟아진 거울조각 때문인 것 같았다.
그녀는 그를 질질 끌면서 간신히 방으로 데려와 베트남에서처럼 몸 위에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리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손수건으로 상처를 묶어 지혈시켰다. 대충 응급처치가 끝나자 란은 다시 잠을 청하려 하였지만 멈추지 않고 들려오는 그의 짧고 낮은 신음소리에 결국 뜬 눈으로 해를 맞아야 했다.
7시쯤이 되어서야 그녀는 잠이 들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잠에서 깨어난 것은 늦은 아침이었는데 그는 아직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 신음 소리만 내뱉고 있었다. 그녀는 일어나자마자 물에 잠기게 담가놓은 이불을 마당에 널고 손에 묶어주었던 손수건을 풀었다. 딱지와 함께 손수건을 뜯어 낸 자리에 고모가 챙겨 준 하얀 연고를 발랐다.
부엌의 식기건조대에는 아직 완전히 씻기지 않은 그릇들이 쌓여있었다. 그 그릇들의 음식 찌꺼기가 물에 불도록 해 두고 설거지를 했다. 그리고 걸레에 물을 묻혀 바닥을 닦았다. 바닥에 두껍게 쌓인 먼지가 오랫동안 청소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해주었다.
점심을 그녀 혼자 먹어야 했으므로 냉장고를 열었지만 식욕이 생기지 않았다. 오히려 냉장고가 지저분하다는 생각이 들어 냉장고 정리를 했을 뿐이었다.
오후 4시가 되자 장 기환은 눈을 떴다. 처음에 그가 의식을 찾았을 때 방 안이 어둡고 공기가 차가워서 시계를 보고도 아직 새벽인줄로 착각하였다. 커튼을 열어젖히자 유난히도 짧은 겨울 해는 어둠이 붉은 빛을 머금도록 했다.
베트남에서는 과음이었기 때문에 그가 착각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이번엔 경우가 좀 달랐다. 확실한 그 느낌이었다. 격렬한 구토 후에 환청을 듣고 정신을 잃었다. 이번엔 의식이 돌아오니 손이 찢어져 있었다.
그녀는 그 모든 광경을 적나라하게 보았을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그가 병을 숨기기 위해서 지금껏 해온 일이 모두 소용없게 되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막상 그렇게 생각하니 그는 허무함과 분노마저 느끼기 시작했다.
방문을 열고 나와 거실 문을 열었다. 란은 가죽 소파에 누워 잠을 청하는 중이었다. 문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벌떡 일어났다.
“저 여자 때문에 모든 게, 네 노력이 물거품이 되었어. 기분 나쁘지 않아? 당장 죗값을 치르게 해야 해.”
또다시 그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욕구가 역기능을 하며 목소리를 내는 것이었다. 소리가 들릴 때마다 항상 그의 이성은 통제력을 잃었고 무력해져갔으며 의식을 상실했다. 욕구는 항상 파괴나 폭행 따위를 주문했고 이번에도 예외 없이 그러했다.
그는 큰 소리로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란은 갑작스런 큰 소리에 놀라 그 상태로 얼어붙었다. 물론 그녀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지만 그의 얼굴 표정과 억양을 통해 화를 내고 있다는 것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란은 억울한 느낌이 들어서 참을 수 없었다. 자신은 쓰러진 당신을 위해 끼니마저 건너가며 집안일을 거들었는데 막상 그에게 이런 대우를 받게 되니 황당했다. 계속되는 그의 욕설에 참다못한 란은 결국 응어리를 터뜨렸다. 낮고 공격적인 음성이 들린 직후엔 높고 날카로운 음성이 연이어 전해졌다.
그는 그녀가 갑자기 언성을 높이자 당황하였다. 그리고 과거에 자신의 아버지가 누리던 폭력적인 가장의 상흔이 다시 되살아났다.
“그 여자를 때려. 너희 아버지도 너의 어머니께 그리고 너에게 그렇게 했잖아.”
결국 그는 손바닥을 폈다. 심장이 멎는 듯한 소리와 함께 란은 바닥으로 나가 떨어졌다. 그녀는 아릿한 고통과 함께 쇠 냄새가 나는 것을 느꼈다. 이윽고 얼굴에는 두 줄기 붉은 빛 액체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는 피를 보더니 완전히 이성을 상실하여 눈의 초점이 흐리게 변해갔다.
여러 물건들이 날아다니기 시작했고 란은 온 몸으로 그 물건들을 모두 받아내어야만 했다. 몸 곳곳에 상처가 나고 멍이 들었다. 그는 더욱 씩씩거리며 언성을 높였다. 그녀가 한 맺힌 울부짖음을 토해 낼 때마다 그의 손은 가녀린 몸 여기저기를 강타했다.   그는 문을 거세게 닫고는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거실에는 훌쩍이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겨울의 칼바람은 그녀 몸 곳곳에 난 상처를 베고 가르며 고통이 배가 되도록 했다. 머나먼 타국 땅에서 의지할 곳을 잃어버린 그녀의 등은 한 없이 쓸쓸했다. 결국 장 기환의 체온대신 담요 한 장에 의지하며 밤을 보내야만 했다.
그는 경미한 두통과 함께 아침을 맞이했다. 그가 이상하게 여긴 것은 어제 거실로 들어선 이후의 기억이 전혀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거실에는 잡가구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형광등이 산산이 부서져 그가 건드리자 파편이 쏟아졌고 양친이 돌아가시기 전에 찍었던 가족사진도 유리가 깨져 흉물스럽게 찢어져 있었다. 이건 분명히 정신을 잃은 직후의 일이 틀림없었다. 광기에 사로잡혔던 자신은 둔기를 휘두르며 손에 잡히는 물건마다 전부 집어던졌을 것이었다. 생각이 그곳에까지 이르자 그는 손을 떨기 시작했다.
“란?”
목소리를 낮추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우두커니 불을 밝히고 있던 텔레비전에서는 음산한 느낌의 화면조정음만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그 때였다. 스르륵, 하고 뒤척이는 소리가 났다. 그는 숨을 죽이고 소파 쪽으로 다가갔다. 천천히 담요를 걷어 올리자 익숙한 얼굴과 그 안의 상처가 보였다. 한 겨울에 솜이불도 아닌 담요를 머리끝까지 덮고 있던 사람은 다름 아닌 란이었다. 얼굴 여기저기는 긁힌 상처가 나 있었다.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에 눈이 부셨는지 그녀는 몸을 뒤척이다 잠에서 깼다. 곧 마주하는 그의 얼굴을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라 벽에 붙었다. 그리고 바로 무릎을 꿇었다. 겁에 질린 눈동자는 어제 있었던 일을 생생히 보여주는 것 같았다. 란은 ‘오빠’를 연발하며 손을 싹싹 빌었다.
장 기환은 그녀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워주었다. 그러자 란도 자신을 때리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흔들리는 눈빛을 거두었다. 그는 그녀에게 따라오라고 손짓하고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 겨울옷이 없었고 그의 코트를 빌려 입을 수밖에 없었다.
아직 이른 시간이었기 때문에 거리에는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먼저 면사무소에 가서 혼인신고를 했다. 신고에 필요한 서류는 여행사에서 미리 마련해 주었었고 절차도 간단했다. 평소에 그는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평범한 농촌 남성이었기 때문에 그에게 의심의 눈빛을 던지는 사람조차도 없었다.
혼인신고를 마치고 사무소 2층에 있는 문화센터에서 한국어 교실에 등록했다. 다른 수강생들도 거의 그녀 또래의 동남아인들이었다. 그리고 시내로 가서 약을 지었다. 약사는 그가 오랫동안 보이지 않아 무슨 일이 생긴 건지 걱정했다며 공연히 너스레를 떨었다.
“어머, 이게 누구야?”
그녀는 고개를 푹 숙였다.
“결혼하셨나보네요. 그런데 괜찮으시겠어요?”
“신경 끄고 약이나 빨리 주쇼.”
그녀는 란의 얼굴에 난 상처를 발견하고 어젯밤 있었던 일을 예감했다.
“상처 난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잘 드는 연고도 같이 드릴까?”
“됐고, 약이나 빨리 달라고!”
그는 자꾸만 참견하는 약사가 귀찮았다. 하지만 그녀에게 있어서 그것은 최소한의 도덕적 양심의 표현이었다. 장 기환은 동네 약국에 소화제를 사러 가는 것조차 꺼렸기 때문에 그가 지난 한 달여 동안 약 구경을 했을 리가 만무했다. 그렇다면 그는 지금껏 수차례 환청을 들었을 것이고 그 후의 일은 저 상처가 말해주고 있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란이 걱정되었다. 하지만 그의 건방진 태도에 안타까운 눈으로 그녀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근처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한 후 집으로 돌아와 거실을 치웠다. 깨진 형광등도 새 것으로 갈았고 유리조각도 한 곳에 모아 신문지로 싸서 버렸다.
저녁노을이 지고 깜깜한 어둠이 찾아오자 그들은 미련 없이 한 침대 위에서 잠이 들었다. 하지만 첫째 날 보다 그녀는 그의 몸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다음 날 오후 장 기환은 친구와 약속이 있어 집을 나섰고 란이 혼자 남아 걸레질을 하고 있었다. 방바닥을 닦던 중 침대 밑을 닦기 위해 이불을 걷어 올리자 침대 밑에 있던 하얀 물체들이 드러났다.
고국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약병이었다. 하지만 한 두 개가 아닌 수십 개의 약통이 그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것들을 꺼내보자 대부분이 머리 모양이 그려진 약통이었고 나머지는 한국어로 상표만 써져 있어 그녀가 읽을 수 없었다.
갑자기 나타난 약통들에 그녀는 이상한 마음이 움트기 시작했다. 이것들과 지금껏 그녀가 수차례 보아온 그의 이상 행동들 사이에 뭔가 관련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여행사 직원들이 여행 신청 서류 중에는 건강 검진 결과나 정신과 전문의 소견서가 필요하여 신랑들의 건강엔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장담했기 때문에 이내 의심을 거두었다. 약통들을 한 쪽 구석에 밀어놓고 청소를 계속했다.      
저녁때가 되자 장 기환은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술잔을 주고받다가 별 것도 아닌 일로 시비가 붙어 실랑이까지 벌였기 때문에 지금 그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밑창이 거의 다 떨어진 신발을 집어 던지고 방으로 들어갔다. 과음을 하지 않은 이상 술을 마시고 잠이 들기 위해선 수면제가 필요했기 때문에 그것을 찾았다. 하지만 침대 밑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탁자 위에도, 서랍장 안에도 수면제는 없었다. 옷장 문을 여는데 무언가가 그의 발에 채였다. 발밑을 보니 약통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 약통을 꺼내놓은 기억은 일절 없었다.
당장에 거실로 달려간 그는 란을 흔들어 깨웠다. 그녀가 깨어나지 않자 손을 잡고 억지로 방까지 끌고 갔다. 문턱에 부딪혀 그녀는 잠결에서 확실히 벗어났다. 장 기환은 검버섯이 돋기 시작한 손으로 약통들을 가리켰다.
그녀는 침대 밑을 청소하다가 방해가 되어 치워두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베트남어를 알아들을 수 없었고 오히려 쏘는 것처럼 들리는 그녀의 억양이 화를 내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들었다. 바로 어제 내보이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한 화가 결국엔 술에 떠밀려 다시 뿜어져 나왔다. 그의 손짓, 발짓에 그녀의 상처에선 다시 한 번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란은 그에게 반항할 수 없었다. 다신 그제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욕설을 하며 소리를 질렀고 그녀는 울면서 날아오는 손찌검에 속수무책으로 얻어맞았다. 그 때였다. 누군가가 초인종을 눌렀다.
"경찰입니다. 잠시 문 좀 열어 주세요!"
하지만 이미 이성을 상실한 장 기환은 그 소리를 전혀 듣지 못했다. 이번엔 그 옆에 있던 전화가 울렸다. 하지만 전화기도 곧 박살이 나 버렸다. 고통의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고 있는 그녀를 버려둔 채 그는 외투와 지갑을 챙겨서 다시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현관문을 열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경찰관 두 명에게 곧바로 붙잡히고 말았다. 그들은 장 기환을 지구대까지 연행해갔다. 그는 부부싸움 중 일어난 소음이라고 적당히 둘러댔다. 단순한 소음죄로 벌금과 함께 몇 시간을 유치장에 구류되었을 뿐이었다.
일단 어느 정도 정신이 돌아온 그는 동네 슈퍼로 가서 소주 세 병과 담배 한 갑을 샀다. 한 병은 오는 길에 병째로 비워버렸다. 그 여자 때문에 생전 처음 유치장까지 들어갔다 왔다고 생각하니 다시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가 집에 다시 돌아온 새벽 2시에도 그녀는 아직 그 자세 그대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술병이 든 비닐봉지가 그녀의 머리 위를 지나 바닥으로 떨어졌다. 술병이 깨지고 담뱃값이 알코올에 젖어갔다.
"저 여자 좀 봐. 그거 몇 대 맞았다고 울고 있잖아. 넌 저 여자 때문에 유치장까지 갔다 왔는데 말이야. 정말 어이없어."
그는 자신의 욕구에 동조했다.
"그만 좀 해!"
그녀가 억, 하며 옆구리를 얼싸안고 바닥에 굴렀다.    
텔레비전이 내동댕이쳐지며 파편이 날았다. 그녀는 소리를 지르며 부엌으로 달아나 문을 잠갔다. 그러자 그는 문을 발로 차기 시작했다.
"문 열어!"
창고에서 망치를 꺼내와 문을 내려치자 쇠와 플라스틱으로 꽤나 견고하게 만들어진 문손잡이는 그대로 박살났다. 그 조각 중 일부가 그의 얼굴로 튀면서 안면 여기저기가 찢어져 피가 흘렀다.
부엌문을 넘어뜨렸다. 문에 등을 대고 발악하던 그녀는 문이 넘어져버리자 싱크대로 달려가 오른손으로 날이 뭉툭한 과도를 뽑아들었다. 그는 천천히 간격을 좁혀갔고 그녀도 그 때마다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얼마 못 가 벽과 마주하고 말았다. 오른손이 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일 미터가 채 남지 않았을 때부터 이성은 욕구에게 지배당한 채 빈 껍데기뿐인 그의 몸뚱이가 둔기를 휘둘렀다. 그녀는 남은 힘을 전부 짜내 그의 복부로 달려들었다. 하지만 첫 번째이자 마지막이었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팔목이 그만 그에게 붙잡혀버린 것이었다. 마침내 그는 칼을 빼앗았고 그의 손이 하늘로 치솟았다. 싸늘한 쇠의 느낌이 그녀의 뼈 깊숙한 곳까지 스며들었다. 그걸로 끝이었다. 그녀는 아랫배에서 피를 쏟으며 차가운 냉돌 위로 쓰러졌다. 그리고 숨이 끊어지기 직전에 그녀의 눈물 한 방울이 볼을 타고 흘렀다. 곧 그 눈물도 바닥에 뿌려져 그녀와 함께 식어갔다. 잠시 후 창문이 깨지며 경찰이 들이닥쳤지만 이미 숨이 끊어진 후였다. 그녀가 한국에 온 지 갓 6일이 된 때였다.
"그렇게 잡힌 건가요?"
"그렇지. 참 안타깝지 않아? 인간의 욕심과 사회의 허술함이 한 순수한 여자를 죽음으로 몰아간 거야. 그 얘기를 듣고 있자니 섬뜩하고 슬프더라."
박 형사는 한숨을 내뱉었다. 수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고 현장검증을 가진 몇 달 후 사건 관련자들에게 구형이 내려졌다.
장 기환은 초심에서 징역 20년을 선고받았으나 재심에서 음주 후에 범행을 저지른 점이 참작되어 18년으로 형량이 줄어들었다. 하지만 살인 후 가끔씩 보이던 정신 분열 증세가 계속 심각해져 최근 정신병원으로 이감되어 형기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에게 돈을 받았던 여행사 사장은 뇌물공여죄가 성립되어 징역 3년이 선고되었다. 그는 입소하면서 만약 모범수로 조기에 나가게 된다면 여행사를 접은 돈으로 여생을 베트남에서 온 여성들의 인권개선을 위해 살기로 마음먹었다.
정신과 병원의 의사는 그의 결혼 사실도 몰랐고 소견서 또한 작성해 준 사실이 없음이 입증되었다. 따라서 무죄를 선고받았으나 장 기환이 자주 다니던 약국의 약사는 결혼 사실을 알고도 아무런 조취를 취하지 않은 점이 사건을 조장했다는 이유로 사회봉사 70시간을 선고받았다.
란의 시신은 한국에서 장례가 치러진 후 화장되어 고국 땅으로 보내졌다. 그리고 그녀가 흘린 눈물은 하늘로 떠올라 그녀의 영혼을 천국이 있는 곳까지 인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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